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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914m의 시루봉은 백두대간의 희양산과 이만봉 사이에서 북쪽으로 조금 물러나 앉아있지만 정상에서의 조망이 좋은 산이다. 시루봉의 등반 시작 지점은 주진리 진촌마을과 은티마을이다. 시루봉을 등반하려면 우선 연풍까지 와야 한다. 소재지에서 초등학교를 지나 계속 직진하면 진촌마을과 은티마을의 갈림길인 삼거리를 만난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진촌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은티마을이다. 시루봉은 길 찾기가 힘들어 몇 년 전만해도 정상을 찾는 등산객이 별로 없었다. 지금도 길 찾기가 쉬운 진촌마을에서 등반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을유래비, 장승, 괴산군 보호수인 멋진 노송, 키가 큰 전나무가 마을 입구에서 맞이해 반갑고 희양산, 구왕봉, 마분봉의 산행기점인 은티마을에서 시루봉을 오르기로 했다. 올봄 마을 주변의 매실나무들이 활짝 꽃을 피웠을 때 이곳에서 마분봉과 악휘봉을 등반했었다. 은티마을은 외부 차량의 출입을 금한다. 대신 입구에 승용차 50여대를 주차시킬 수 있는 유료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량들을 보면 산에 오르기 위해 은티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안다. 마을 초입의 냇가 옆에 작은 주막집이 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막걸리 한잔에 피로를 푸는 쉼터이다. 주막집 안팎에 백두대간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남기고간 리본과 낙서들이 가득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민박도 할 수 있는 이 주막의 안주인이자 내 고향 후배인 이종숙(011-490-5708)이 마을을 찾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시골인심을 느끼게 한다. 주막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갈림길을 만나는데 왼쪽은 시루봉·희양산·구왕봉, 오른쪽은 마분봉·악휘봉 등반길과 이어진다. 왼쪽 길로 접어들면 바로 시루봉, 희양산, 구왕봉이 그려져 있는 안내판을 만난다. 안내판 앞으로 세 봉우리가 한눈에 보인다. 안내판에서 보이는 은티산장 담장을 끼고 왼쪽으로 가면 전원주택이 몇 채 숨어있는 계곡이다. 산으로 시루봉 가는 길이 이어지고 산길에 있는 작은 밭들이 산촌임을 알게 한다. 산으로 들어서면 등반로인 골짜기를 따라 물이 맑은 계곡이 이어진다. 가을철은 떨어진 낙엽들이 길을 감춘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산길은 들어서지 않는 게 좋다. 계곡 입구에서 등산로를 조금 벗어났더니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다. 고생한 덕분에 전망대를 제외하면 조망이 좋지 않은 시루봉을 등반하며 단풍으로 물든 시루봉 중턱과 은티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구왕봉, 희양산, 마분봉 방향의 멋진 가을 풍경을 구경했다. 멋진 소나무가 있는 전망대바위와 개구리, 두꺼비, 강아지, 뱀 등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이름 모를 바위도 발견했다. 희양산과 시루봉 갈림길을 알리는 안내판에서 10여분 오르면 물이 고인 습지대 옆에 억새밭이 있는 헬기장이 있다. 헬기장에서 10여분이면 시루봉 정상에 도착하는데 조망이 좋은 전망대는 이곳에서 50여m 거리에 있다. 그리 넓지 않은 전망대에는 삼각점과 전망대를 알리는 예쁜 표석이 있다. 툭 삐져나온 봉우리인 전망대에 서면 동, 북, 서방향이 훤히 보인다. 단풍이 물든 가을 산만큼이나 산 아래로 펼쳐진 풍경들도 아름답다. 시루봉 등반로인 계곡을 따라 하산을 했다. 비교적 평탄한 산길 옆으로 계곡이 이어지는데 정상 부근에도 물길이 있다. 계곡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갈증도 달랬다. 마을이 가까워오면 냇가 옆 산비탈에 드문드문 벌통이 보이는데 토종 벌꿀을 뜨는 한봉이다. 붉은 사과들이 탐스럽게 열려있는 사과밭도 여러 곳이다. 이곳의 사과는 인체에 해롭지 않은 농약을 사용해 껍질 채 먹어도 된다. 주막에서 만난 이 마을 사람은 불신이 습관화 된 외지 사람들은 사과를 깎느라 고생을 한다며 껄껄 웃는다. [교통안내] 1. 중부고속도로-증평IC-괴산-연풍-주진리 은티마을 2. 중부내륙고속도로-연풍IC-주진리 은티마을
“한국의 영어교육은 입시와 취업 등 각종 시험 대비에 치중하는 경향이 많다고 봅니다. 읽기와 듣기 등 주어진 정보를 받아들이는 능력에 집중돼 있는 것이지요.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말하기, 쓰기와 같은 능동적인 형태로 전환돼야 한다고 봅니다.” 이안 심(Ian Simm) 주한 영국문화원장은 30일 영국문화원과 케임브리지대가 주관하는 영어평가시험 IELTS(International English Language Testing System) 설명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영국문화원은 이날 설명회를 기점으로 IELTS를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최근 토플접수 대란으로 인해 2009학년부터 토플 점수가 외고 입시전형에서 제외되고, 교육부도 국가 차원의 영어능력인증시험을 개발하기로 한 바 있어 영국문화원의 이같은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국문화원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각국의 IELTS 응시자는 70만여명으로 토플(75만여명)과 비슷한 수준이이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 심 원장은 “시험관과 일대일로 얼굴을 맞대고 실시하는 스피킹 시험은 IELTS의 최대 강점”이라며 “최소 3년 이상 영어교육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시험관 자격을 준다는 것도 특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정부의 영어인증시험 개발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서 “단시간에 국제인증을 받기는 어려운 만큼 영국문화원이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교총은 5일부터 17일까지 2주 동안 ‘학생건강증진 계기수업’을 실시한다. 이번 계기수업은 교총과 보건교사회가 공동으로 펼치고 있는 교육공동체 건강캠페인의 일환으로 양 단체는 올해를 ‘학생건강 지키기의 해’로 정한 바 있다. 학교별 상황에 따라 기간 내 언제든지 실시할 수 있으며 교총과 보건교사회가 제작한 계기수업 교안을 다운받아 재량활동 시간이나 교과 시간에 활용하면 된다. 수업자료는 교총 홈페이지(www.kfta.or.kr)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교총 교권국은 “수업안은 참고로 제시된 안이므로 실제 수업이나 교육활동은 선생님들이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진행하면 된다”면서 “이번 계기수업을 통해 학교 현장에서 건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공개수업은 6일 경기도 오산 대원초에서 오후 1시부터 40분간 실시된다.
충남지역 영양교사들이 수학능력시험 업무수당 지급에 차별을 받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수능시험 당일 수험생과 시험운영 교직원들의 점심 제공을 위해 일하지만 정작 수당은 못 받는 것. 1일 충남학교영양교사회에 따르면 올해 충남지역에 수능고사장이 설치되는 공립고 36개교 중 천안쌍용고를 제외한 35개 교에 급식실이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당일 해당학교 영양교사들이 근무를 해야 하지만 정작 수당을 받을 수 있는 교사들은 4명밖에 안 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이 수당을 받기 위해서는 학교관리요원 선정에 들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 영양교사의 우선순위가 밀리고 있다는 것. 학교관리요원은 수능주관기관인 교육과정평가원에서 학교 현장에 맞는 인력 운용을 위해 학교장에게 위임한 것으로 최대 6명까지 지정할 수 있다. 주로 행정실 직원 위주로 기능직, 교사들이 선정되고 있지만 영양교사는 제외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수험장 운영 고교 교장은 “당일 고생하시는 선생님들이 너무 많아 영양교사까지 챙기기에는 사실 어려움이 있다”며 “수당을 받지 못하는 선생님들은 전국적으로 관심이 모아진 큰 일에 봉사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양교사들은 “학교관리요원에서 영양교사가 주로 제외되는 것은 영양교사의 업무를 ‘주방 일’정도로 너무 쉽게 여기기 때문”이라며 섭섭함을 토로하고 있다. 고영종 충남학교영양사회장은 “수당을 받고, 못 받고 하는 것은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업무에 대한 자존심 문제”라며 “일선학교에서 영영교사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이번 일을 통해 만들어달라”고 주장했다 현재 충남학교영양사회는 영영교사업무에 대한 관심제고와 함께 평가원에는 학교관리요원 증원을, 교육청에는 학교장 학교운영요원 선정 시 영양교사 우선순위 지정 권고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평가원 측은 “충남의 문제 때문에 전국적으로 관리요원을 늘리는 것은 어려우며 관리요원을 증원할 경우 수험생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충남도교육청은 “영영교사 처우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고 적절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 마련에 노력 하겠다”고 밝혔다.
-간월분교생들의 서울 견학기- 부석초등학교간월도분교장(학교장 채규웅)학생 12명은 10월31(수) 자매결연을 맺은 국무총리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초청으로 연구회와 국회를 견학하고 문화체험행사로 뮤지컬 ‘점프’를 관람하는 서울 나들이 행사를 가졌다고 밝혔다. 사회봉사활동을 통한 지속적인 사회적 나눔의 문화를 실천해온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지난 6월 1일 간월분교와 결연을 맺은 후 교수․학습 용품 지원 등 지속적인 관계를 가져오고 있었는데 교류활동 촉진화를 위해 이번 분교생들의 서울초청행사를 계획 실행하게 된 것이다. 아침 9시 정각에 연구회 측에서 마련해준 버스를 이용 학생 12명과 지도교사(분교장 김장청) 3명 등 15명은 학교를 출발 11시에 연구회에 도착하여 연구회에 대한 안내와 연구원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으며 오찬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이횐식연구회 사무처장은 학교를 소중해 생각하고 발전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 순서로 국회를 방문 본회의장 등을 견학하고 문화체험행사로서 러닝타임 80분짜리 뮤지컬 ‘점프’를 관람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분교생들이 관람한 뮤지컬 ‘점프’는 한국작품으로는 난타에 이어 2번째로 브로드웨이에서 올 10월 전용관을 마련하여 장기공연에 들어간 작품이어서 문화체험의 기회가 적은 분교생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학생들을 인솔 서울나들이에 나선 김장청분교장은 “지역의 특성상 문화체험의 기회가 적은 분교생들에게 연구회측의 배려로 다양한 문화체험 및 국회와 국책연구기관을 견학하는 뜻 깊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라고 말하면서 연구회 측에 고마움을 표하였다.
지난달 29일 교육부는 내년 6월까지 고교교육 혁신 종합대책을 수립하고 수준별 수업을 최소 2과목 3~4단계로 강화하겠다는 요지의 ‘수월성 제고 방안’을 내놨다. 교육부가 서울 경기 등 시․도 교육청의 외국어고 확대 요구를 거부하고 거꾸로 특목고 폐지를 운운 했던 터여서 이 날 발표장은 긴장감이 돌았으나 교육부가 외국어고 존폐 문제를 차기정부로 넘겨 일단 한 숨 돌린 형국이 됐다. 그러나 딱히 새로운 내용도 없이 지난 수 십 년 동안 지지부진한 수준별 수업을 한층 강화하겠다는 방안을 왜 갑자기 발표했는지 의아스럽다. 아무튼 외국어고의 운명은 차기정부의 성격에 따라 요동치게 됐다. 이미 대선 후보들은 고교평준화 유지론 과 보완론으로 각을 세워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국가 백년대계인 교육 정책이 정치논리에 휘둘리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육부는 이참에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교총이 제안하고 대선 후보들이 지지하는 초정권적 국가교육위원회의 설립을 숙고하기 바란다. 차기 정부는 이 위원회에서 고교평준화 제도를 유지할 것인지 보완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논의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일반계 고교의 수월성 교육 대책은 수준별 수업을 확대하라는 식의 당위론적 목표제시형 방안이 아니라 실효성 있는 실천 방안이 제시돼야 한다. 학교 시설여건 미비, 수준별 반 편성에 따른 우열반 논란 등의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강사료 지원을 확대하고 교수․학습 자료를 지원한다는 선언만으로 수준별 수업이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는 탁상행정의 전형이다. 대입시에서 내신 비중이 확대되는 추세에서 수준별 반 편성과 그에 따른 학생평가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현실적 대안도 없이 각 과목별로 3~4단계나 수준별 학급을 편성․운영한다는 방침은 일부 희망하는 학교에 권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국의 모든 학교에 권장하는 것인지 부터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정란 교사의 자료는 유아가 흥미를 가질만한 다양한 조형놀이에 창안한 아이디어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이 교사의 작품이 유아의 근육발달이나 표현력을 기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처음 자료를 만들게 된 계기는. “조형활동은 유치원 교육활동 대부분과 연계돼 있다. 실제로도 많은 시간이 조형활동으로 이뤄지고 있고 유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장에는 적당한 작업대가 없고, 있다 하더라도 색종이 정도의 수납이 가능할 뿐이다. 결국 교사들이 자료실을 여러 번 오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놀이대를 만들면 교사들이 늘 손쉽게 유아들과 조형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출발하게 됐다.” -자료의 가장 큰 장점을 꼽는다면. “점토놀이, 그리기·찍기, 물감놀이, 짜기, 점토놀이, 염색, 바느질, 실 꼬기·땋기 등 총 8가지 영역의 조형활동이 한 자리에서 가능하다. 특히 염색영역은 천이 염료를 머금은 스펀지 위를 지나가도록 설계해 조작이 무척 간단하다. 그동안은 실제 염색을 해보려면 멀리 현장체험을 떠나야 했는데 번거롭기도 하고 일회성에 그치는 문제도 있었다. 조형놀이대에서는 염료만 넣어주면 바로 염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교사들의 부담을 크게 덜 수 있다. 뚜껑을 닫으면 일반 책상이 되는 점, 필요한 도구를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 점, 바퀴가 있어서 이동이 용이한 점도 편리한 부분이다.” -자료 제작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작년 10월 아이디어를 구상한 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하나하나 만들다보니 자꾸 욕심이 생겨서 새로운 것들을 추가하기도 했다. 유아용 교육자료이다 보니 안전성을 많이 고려해야 했다. 혼자 힘으로 자료를 제작하기에는 벅차 업체를 찾아다니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업체를 결정한 뒤에도 원하는 대로 작품이 나오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큰 상을 받고 보니 그렇게 동분서주했던 것도 이런 기쁨을 주려고 그랬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 수업시 아이들의 반응은. “놀이대를 만들어 교실에 들여 놓았을 때 유아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어요, 찰흙 많이 사주세요’하며 즐겁게 참여하는 모습들을 봤을 때 그 순간만으로도 정말 행복했다. 동료 교사들도 구입할 수 있다면 정말 들여놓고 싶은 자료라며 탐을 낸다. 유치원 교사라면 누구든지 별다른 설명 없이,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장 활용도가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영광의 대통령상을 차지한 변광태 교사는 “교실수업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교사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변 교사의 학습자료는 멀티미디어 자료에 국한되기 쉬운 생물 및 지구과학 분야를 학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자료제작에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3년 전부터 ‘해안에 대해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면 좋겠다’ 마음먹고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가 태안 바닷가 근처다 보니 해안 탐구활동을 종종 나가곤 한다. 우리나라에는 총 130여개의 해안사구가 있는데 그 중 30여개가 태안군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은 해안사구에 대한 이해도 낮고 거기에 살고 있는 동·식물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해안사구는 폭풍과 해일로부터 해안을 보호하고 지하수를 보호하는 역할도 하는데 최근에는 개발로 인해 많이 훼손되고 있다. 아이들에게 탐구능력은 물론 자연보호 의식도 길러주기 위해 자료를 제작하게 됐다.” -준비과정에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 “동물들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것이 특히 힘들었다. 원래 사진과 영상 제작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번 자료를 만들면서 사진을 수천장 넘게 찍었다. 평상시에는 수업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집중적으로 찍어야 했다. 특히 밤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고 날씨 때문에 촬영에 지장을 받은 적도 많았다.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된 표범장지뱀, 금개구리, 개미귀신 등 다양한 동물을 비롯해 갯방풍, 갯메꽃과 같은 식물도 자료에 담았다. 찍어온 사진으로 수업동영상도 만들고 해설이 필요한 부분에는 직접 더빙도 했다.” -수업에 적용했을 때 학습효과는. “해안사구에 대해서는 기존 자료가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텍스트자료 몇 개가 전부다. 실물을 보여주면서 수업하다보니 아이들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직접 바닷가에 나가서 해안에 서식하는 식물들을 직접 캐보기도 했는데 해안 생태에 대한 이해가 훨씬 빨랐다. 인근 태안해안국립공원에 있는 자연해설사들이 ‘어떻게 너희처럼 어린 학생들이 우리보다 해안사구에 대해 더 잘 아느냐’며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갔더니 아이들이 해변을 걸으며 수업시간 때 봤던 식물들을 찾아내고 이름을 맞추기도 했다. 호기심을 갖고 탐구력을 넓혀가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느꼈다.” -앞으로 더 연구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해안 사구에 서식하는 식물들을 심도 있게 연구해보고 싶다. 희귀한 생물이라고 알려지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아다녀 오히려 멸종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했다.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환경의 식물들을 관찰하고 이것을 어떻게 보호하고 보존할 것인지도 살펴볼 생각이다. 교사들의 연구는 연구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학생들과 수업하는 방법을 찾을 때, 아이들에게 올바른 자연관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교총(회장 이원희)과 교육부(교육부총리 김신일)는 31일 교원지위향상을위한특별법에 따라 교육부 대회의실에서 2007년도 제1차 정기 본교섭.협의를 가졌다. 이날 교총은 '수석교사제 연내 시범적용 및 법제화', '현장교육지원센터 설립 지원' 등 27개 조항의 주요 사항을 교섭 했다.
일본은「여유 교육」에 의한 학력 저하를 반성하여 초,중학교에서는 주요 교과의 수업 시간을 1할 이상 늘리는 한편, 현행의 지도 요령으로부터 도입된 종합 학습의 시간을 삭감한다. 또한,국제화에 대응하기 위해 초등학교 5년부터「외국어(영어) 활동」의 시간을 설정한다. 「도덕」을 교과로 격상하는 것은 미루었다. 이에따라 초,중학교의 수업 시간이 증가하는 것은 30년만으로, 「여유있는 교육」으로부터의 방침 전환이 명확하게 되었다. 중앙 교육 심의회는 내년 1월에 답신을 정리해 문부 과학성이 금년도 내에 학습 지도 요령을 개정한다. 신학습지도 요령은 빠르면 2011년도부터 실시된다. 현행의 지도 요령은 학습 내용의 3할 감축이나 수업 시간의 단축 등에 의한「여유 교육」을 내걸어 초중학교에서는 2002년도, 고등학교는 03년도부터 실시되었다. 그러나, 학력 저하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기 때문에, 이번 중간 보고「심의 정리」에서는 「수업 시간을 너무 줄였다 」는 점등을 반성하면서,〈1〉전 교과를 통한 언어력 육성〈2〉수학, 과학 교육 중시〈3〉전통 문화에 관한 교육의 충실〈4〉도덕 교육의 충실〈5〉초등학교의 영어 활동 등을 새로운 목표로 내걸고 있다. 초등학교의 수업 시간은, 각 학년 모두 주 1, 2 시간(1시간당 45분 ) 늘려, 6년간으로는 현재보다 278시간이 많은 합계 5645 시간이 된다. 특별히 증가한 것은 국어, 산수, 과학, 사회의 주요 4 교과와 체육이며, 이 가운데서도 산수와 이과는 함께 16%증가 된다. 또, 5 학년에서는 주 1 시간의 영어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학교에서는 각 학년 모두 주 1시간(1 시간당 50분 )으로, 3년간으로는 현재보다 105 시간 많은 합계 3045 시간이 된다. 특히 과학과 외국어(영어)가 증가해 3년간의 수업 시간은 모두 현재보다 33%증가한다. 영어는 국어, 수학 등을 포함해 교과 중에서 가장 수업 시간이 많아진다. 현재의 지도 요령으로 큰폭으로 삭감된 학습 내용도 연달아 부활해, 초등학교 산수에서는「사다리꼴의 면적」, 중학교 과학에서는「이온」이 더해진다. 한편, 여유 교육의 상징인「종합 학습의 시간」은 초,중학교 모두 삭감되어 중학교의「선택 교과」도 사실상 폐지된다. 「도덕」에 대해서는 「계속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여 교과목으로 하는 것을 보류했다.
익살스러운 호박의 모습이 떠오르는 10월의 마지막 날은 '할로윈데이'. 해마다 10월 31일 밤에 축제를 여는 연례행사로 서양의 어린이들이 갖가지 상징물과 가면 그리고 옷 등으로 변신해 집집마다 다니는 축제로 유명하다. === 서양의 할로윈데이 ===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 이용의 잊혀진 계절 === 10월 31일하면 생각나는 것 청소년 :『서양의 할로윈데이』... 기쁨, 현실, 즐거움, 축제 중장년 :『이용의 잊혀진 계절』... 슬픔, 추억, 외로움, 낭만 똑같은 날인데도 세대에 따라 떠올려지는 이미지는 이렇게 다르다. 어쩜 이렇게 달라도 한참 다른지... 10월의 마지막날이라는 주인공을 한가운데에 두고 서로 반대편에 서서 한쪽은 울고 한쪽은 웃고 하는 그런 상황이다. 나이가 들면 서러움이 많아진다고 하더니 그래서 할로윈데이가 아닌 잊혀진 계절부터 먼저 떠오르는 것인가? 10월 31일을 맞는 아침, 매달 맞이하는 마지막날이건만 무덤덤한 다른 달과는 달리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저절로 떠올랐다. 옷깃을 파고드는 쌀쌀맞은 추위도, 바람에 하염없이 떨어져 뒹구는 낙엽에도 괜시리 의미가 부여해졌다. 간만에 느껴보는 낭만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기분도 모르고 만나자마자 할로윈타령을 해대었다. “선생님, 오늘이 할로윈데이인데 우린 축제 안해요?” “뭔데이?” “할로윈데이요?” “그딴걸 왜해?” 그렇게 무심코 내뱉고 보니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기쁨에 들떠 선생님이 맞장구쳐주길 바라고 묻는 말인데 단절음의 노우였으니 말이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더 이상 내 말을 번복했다가는 아이들이 할로윈이니 뭐니 해가면서 하루종일 난리칠 것이 뻔해서 그냥 모르는척 넘어갔다. 더군다나 오늘은 정숙 또 정숙해야할 장학지도날이 아닌가? 준비하느라 마음도 급했지만 아이들을 들뜨게 만드는 것이 안좋겠다는 생각에 무시를 해버렸다. 오늘이 할로윈데이라는 징조는 며칠 전부터 있었다. 개구쟁이 몇 놈이 얼굴과 손목에 온통 핏빛 물감을 바르고 내 앞에서 얼쩡거렸다. “선생님, 형아들에게 얻어터졌어요. 엉엉엉.” “으으윽, 손목이 아파 죽을 것 같아요.” 확연하게 가짜인 것이 표가 나는 어설픈 분장이었다. “야야야, 물감인거 다 표난다. 할래면 제대로 해야지. 글구 너희들이 몇 살인데 아직도 얼굴에 물감을 묻히는 놀이를 하냐?” “어, 형들은 진짜 속았는데. 운동장에 엎어져 있으니까 정말 죽은줄 알더라고요. 울엄마도 진짜 속고 병원에 데려갈려고 했는데...” 그러면서 아이들은 이 반 저 반 휩쓸고 다니며 무슨 큰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듯 희희낙락했다. 그때만 해도 그 행위가 할로윈데이의 전초전임을 꿈에도 몰랐다. 요즘에 유행한다는 시체놀이려니 했다. 진즉 알았으면 유치하더라도 좀 멋지게 속아줄껄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말이다. 10월 31일은 할로윈데이, 분명이 서양에서 들어온 축제이지만 이렇게 열광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즐길만한 마땅한 축제가 없어서이다. 이제 우리도 가면을 쓰고 한바탕 멋지게 놀아보는 축제일이 하루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늘 학교와 학원으로 뺑뺑이를 도는 아이들에겐 일탈의 시간이 없다. 기껏해봐야 사이버공간에서 핸드폰, 게임기, 컴퓨터와 씨름하며 기계에다 스트레스를 푸는 일 뿐이다. 가상의 공간에다 화풀이를 하는 그런 서글픈 현세태보다는 직접 몸으로 가슴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청소년만의 건전한 축제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남의 나라 축제에 웬 열광이냐고 비판만 하지 말고 우리도 우리나라만의 특성을 살린 가면축제일을 만들었으면 한다. 오랫동안 전통문화로 내려오는 지방의 고유축제를 그냥 지방의 행사로만 묵히지 말고 그 탈들을 모두 모아 가면축제로 승화시키는 그런 10월 31일면 좋겠다는 말이다. 북청사자탈, 안동하회탈, 고성오광대탈, 강릉관노탈이 모두 한 곳에 모여 한바탕 놀음을 벌이는 그런 대규모 축제가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꼬마귀신으로 분장한 개구쟁이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트릭 오어 트릿 Trick or Treat(과자를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칠 테야!)”하고 외치면서 자루를 내밀면, 그 자루에다 한줌의 과자, 사과, 오렌지 혹은 사탕 등을 넣어준다고 할로윈데이! 도깨비분장을 한 개구쟁이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떡 하나 주면 안잡아먹지”하고 외치면서 돌아다니면 재미있을 것 같다. 아이들이 심청전, 놀부전, 별주부전, 콩쥐팥쥐전, 장화홍련전, 춘향전 등등 전래동화나 민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신바람날 것인가? 외국의 축제처럼 무섭고 으스스한 엽기적인 가면이 아닌 해학적이고 친근한 우리 고유의 탈을 쓰고 하하호호 웃는 그런 10월의 마지막 가면축제일이 되었으면 한다.
엊그제 한국교육신문과 e-리포터 글을 보다가 학급당 학생 수에 대한 국감 자료 논박 기사를 보고 느낀 점 몇 가지가 있어 말하고자 한다. 그 기사는, '과밀학급 1위 충북' …엉터리 국감통계, 경기 45명, 충남 43명 등 반해 ‘순진한’ 충북만 37명 기준 (2007.10.29. 한국교육신문 기사 참조), 과밀학급 기준도 없는 통계 무슨 의미가 있나?(2007.10.31. 이찬재 e-리포터 글 참조)였다. 우선 위 두 기사를 간략히 추려보면 국감자료로 제출한 과밀학급 통계자료가 교육부의 분명한 기준이 없어서 각 시도교육청마다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제출한 결과 실제보다 충북의 부풀려진 자료로 말미암아 오명을 뒤집어 쓴 것에 대해 기준 제시를 제대로 못한 교육부에 질타를 한 모양이다. 어느 정도 이유 있는 항변이라고 본다. 리포터는 새삼 경기도가 학급당 학생 수가 높고 어느 시도가 낮다는 것을 비교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택지개발과 인구유입이 활발한 경기도가 단연 학급당 학생 수가 높은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학급당 학생 수가 과연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측정이 있었냐는 것이다. 결론은 학급당 학생 수와 학업성취도 측정에 대한 연구는 매년 있어왔으나 지금까지도 명확한 기준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시적 수준에서의 교육목적과 방향, 교육제도, 교육정책 및 전략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교육개발원 소속의 한 연구원이 “적정 학급규모에 대한 연구가 주기적으로 이뤄졌지만 어느 기점이 학습효과가 떨어지고, 생활지도 효과가 떨어지는 과밀 개념인지 실증적 연구가 제대로 이뤄진 바 없다”고 한 것으로 그 고갱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말을 확인하는 교육부 연구 자료로 2002년과 2003년 대도시, 중소도시, 읍면 지역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한 학급당 학생 수별 학업성취도 측정결과표를 보면 더욱더 분명해 진다(위 측정 결과표 참조). 더욱이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조사한 학급당 학생 수 감소를 경험한 학생들이 교사의 개인적 관심과 지도, 수업분위기 향상, 교우관계 등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조사한 결과도 그렇다. 즉, 급당 인원이 낮다고 해서 반드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높고, 인격형성과 교우관계가 좋아진다는 상관관계는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들면 교사 입장에서 보면 학생의 교육, 인격지도, 학급 운영, 업무 경감 등에 있어서 순기능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동안 교육부는 학급당 학생 수 감축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라며 학교신설사업의 목표로 당연시하여 왔지만, 위와 같은 그에 상반되는 학업성취도 평가결과나 각종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 그에 비례하여 교육업무 및 교육 외 업무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은 각종 보고체계라든가 인력보조 등 제반 여건을 바꿔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여지도 분명히 있다. 따라서 학급당 학생 수가 학생의 학업성취도나 교육관계(인성형성)에 미치는 영향, 교원의 학습지도나 생활지도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연구가 면밀히 선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학급당 학생 수에 대한 과학적이고 교육적인 학생 수 목표치를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의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이러한 기준을 제시토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더불어 교총을 비롯한 교원단체에서도 교원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학급당 학생 수를 줄여달라고 막연히 주장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수반되는 교육적 효과와 인성교육에 바람직한 영향을 끼치는 과학적인 기준을 정하는 연구 검토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
컴퓨터를 켜면 하루에도 수많은 스팸메일이나 지인들로부터 편지가 도착해 있다. 그리고 중요한 업무나 전달사항도 전자메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정성들여 쓰던 카드도 이젠 전자메일 편지지를 이용해 내용에 알맞은 갖가지 예쁜 도안들로 채워진다. 옛날처럼 기다림도 설렘도 줄어든 전자메일은 글의 내용 외에는 어느 한 곳이라도 상대방의 향기를 맡기 힘들다. 그것은 아마도 직접 쓴 글씨를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글씨는 사람마다의 개성이나 마음씨를 알 수 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삐뚤삐뚤하지만 그 아이의 마음이나 태도를 읽을 수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글씨만 봐도 그 사람의 품성과 인격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주인의 인간성과 교양 반영해 서양화가 유입되기 전 먹이 주재료였던 우리 선조들은 글씨 혹은 그림 속에 자신의 감정과 능력을 담아냈으며, 그림과 글씨를 나타낼 때는 완벽하게 재료를 준비하고 표현을 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흔히 문방사우라 일컫는 벼루, 먹, 종이, 붓 외에도 글과 그림의 재료로 종이를 누르는 서진과 종이 아래 놓는 깔개가 있고, 먹을 갈 때 사용할 물 담는 연적 등이 있다. 그 중 연적은 글씨와 그림으로 완성된 작품을 보기 전에도 그 주인의 마음씨를 잘 알게 해 준다. 물체는 자그마해도 큰 모습을 지닌다든가 형체로는 안 보여도 지조와 도량 있는 마음씨가 숨어 있다든가 하는 잠재적인 아름다움은 문방 용품들이 지닌 미덕이리라. 특히 벼루나 연적처럼 항상 주인의 좌우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또 손수 길들이는 알뜰한 물건일 때는 주인의 인간성과 교양이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서울 성북동 옛집에는 박물관과 달리 진열장이 아닌 문갑 위에 놓인 아름답고 귀한 연적을 쉽게 볼 수 있어 좋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유난히 잘 읽는 감식안을 가진 혜곡 최순우 선생은 특히 두꺼비연적을 좋아하여 항상 그의 문갑 위에는 두꺼비연적을 올려놓기도 했다. 연적을 만든 도공의 마음과 그것을 알아챈 주인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을 사용하여 표현되는 글과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감동을 일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기 마련이다. 대개 연적 하나라도 안목이 세련된 문인이나 묵객 스스로 손수 선택하는 경우가 보통이므로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도 쓰는 이들의 높은 안목에 이끌려 호흡을 맞추어가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또 손 안에서 체온을 느끼도록 자그마하게 만들어졌지만 적당하게 물을 쏟아내는 기술은 매우 과학적인 지혜가 들어 있다. 지금은 연적까지 제대로 갖추어 쓰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과학적 실용미와 기운 생동하는 문기(文氣)를 간직한 연적을 살펴서 참다운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기로 한다. 숭고한 선비정신 그대로 나타내 연적(硯滴)은 벼루에 붓기 위한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수적(水滴) 또는 수주(水注)라고도 한다. 적절한 양의 물을 담아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문자를 쓰거나 물감을 풀어 그림을 그릴 때 벼루에 적당한 양의 물을 떨어뜨려주어야 하는데 그 목적을 위하여 고안된 그릇이다. 두 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물을 담고 따르기에 용이하게 만든 것으로 은, 동, 유기(鍮器), 자기(磁器), 대나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형태는 매우 다양하며 공기구멍과 물을 주입시키는 구멍으로 나뉘어 있고, 수구(水口)쪽으로 기울여 공기를 조절하면서 적당량의 물을 따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즉, 구멍을 둘로 내어 공기를 조절함으로써 연적 안에 물을 넣고 또 원하는 만큼의 물이 나오도록 조절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 무렵부터 청동제의 연적이 나왔으며, 도자기제는 송나라 이후에 많이 만들었다.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걸쳐 번창했던 강소성의 의흥요(宜興窯)에서는 붉은 색, 검정색, 갈색 등의 차주전자형 연적이 활발하게 제조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벼루를 써왔으므로 벼루에 물을 주기 위한 연적도 함께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것으로 희귀한 고구려의 도제 거북연적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지식인 사이에 문방 취미가 보급되면서 아름다운 청자연적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거북형이나 오리형 등의 청자연적을 많이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백자로 된 것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연적 역시 그 형태에 있어 다양해졌다. 전기에는 분청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지금 전하는 대부분의 연적은 백자연적이다. 조선시대 순백의 연적은 유교를 숭상하던 선비정신을 그대로 잘 나타내주며, 또 산수화가 그려진 연적은 후기에 한강변의 분원에서 구워낸 것으로 작은 연적에 산수를 그려 넣어 호연한 세계를 보려한 조선선비들의 아취(雅趣)와 문기를 엿보게 한다. 청자나 백자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놋쇠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자기로 만든 것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대나무, 은, 동, 주석으로 만든 것도 있다. 표면엔 각종 무늬를 넣어 완상(玩賞)하게 하였다. 그 형태는 거북이, 원숭이, 오리, 산의 모형, 복숭아, 동자상(童子像), 사각, 부채, 육각, 보주, 두꺼비, 해태, 물고기, 화형(花形). 무릎형, 고리형 등에 산수나 꽃, 동물, 곤충을 그려 넣기도 하여 운치를 더했다. 무늬와 그림이 없는 순수 백자도 있으나 청화백자 또는 청화에 동화를 곁들여 아름답게 장식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연적은 문방에서 실용으로 쓰이면서 완상품의 구실도 했다. 18세기 들어서면서 조선백자의 기형과 문양이 더욱 다양해져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의 관요 시대부터는 괄목할 만하게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1752년에 관요가 남종면 분원리로 옮겨진 이후에는 문방구의 종류와 의장이 매우 자유분방하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특히 ‘집 모양 연적(백자청화가형연적(白磁靑畵家形硯滴))’은 여러 형태의 집 모양 연적 중에서도 제대로 격식을 갖춘 뛰어난 예이다. 우진각 지붕에 난간이 있고 공예적으로 변형되긴 했지만 누대(樓臺) 위에 앉혀진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다. 기둥과 문살, 기와 등에 청화를 칠해 장식하였는데 청화의 색깔이 고우며 또 농담을 적절히 구사하여 백자의 고운 피부와 매우 잘 어울리고 있다. 대범한 듯 하면서도 음각과 양각을 잘 조화시켰으며 안정감이 있는 연적이다. 특히 18세기 이후는 청화백자의 유약 발색이 이전보다 짙어지고 도자기의 기형과 문양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면서 연적도 많이 제작되었다. 청화로만 장식된 것도 있지만, 청화에 동화를 곁들여 아름답게 장식한 것도 많다. 이와 같이 도자기로 제작된 연적은 문방에서 실용적으로 쓰이면서도 여러 가지 모양과 형태로 제작되어 장식품의 구실도 했다. 조용한 빛깔의 아취, 청자연적 명상적인 조용한 빛깔과 은은하고도 지체 있는 청자연적은 고려시대 상형청자의 아름다움에 고요와 신비의 생명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대개 공예조각이란 예술의 경지에 미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나친 잔재주와 아첨이 깃들어 속물스럽게 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청자연적이나 문진과 같은 작은 문방구들은 조형이 자칫 복잡해질 듯 하면서도 도리어 간명하고 물체가 지닌 습성과 아름다움을 잘 살렸다. 지금 전하고 있는 청자연적의 예로는 동자 모양, 도석인물, 원숭이, 원숭이 모자형, 오리모양 연적 등이 남아 있다. 그 중 청자오리연적은 이러한 장점을 가장 잘 살린 12세기 전반기 무렵의 작품이다. 청자거북형연적은 고려시대 비석의 귀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머리가 달린 거북을 형상한 연적이다. 이미 삼국시대 신라 토기 주자 가운데 이러한 양식의 유형적인 선례가 있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 이런 모습으로 세련 발전한 것으로 짐작된다. 거북의 등에 뚫린 물구멍은 둘레가 꽃잎 모양으로 싸여 있고 등 전체에 육각형 귀갑문이 음각되었으며 귀갑문 안에는 왕(王)자 모양의 무늬가 하나씩 있다. 귀갑 가장자리에는 주름 무늬를 띄엄띄엄 반양각했고, 용두의 눈에 철사(鐵砂)를 찍어 눈동자를 표현하였다. 용이나 거북, 물고기 등의 동물과 참외나 죽순 등의 식물, 인물의 모습을 본뜬 상형 청자는 청자 전성기인 12세기 전반에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국보 제74호로 지정된 오리모양 연적은 그 제작수법이 섬세하고 뛰어나서 윤기 나는 색 등은 나무랄 데 없는 걸작품이다. 한 마리의 물오리가 연못에 떠서 연꽃 고갱이를 입에 문 한가로운 모습을 형상한 것으로 등 위에는 연꽃잎을 오그려 붙인 공기구멍이 있고, 물은 오리의 입부리에 물린 연꽃 봉오리로 따르도록 된 기막힌 표현이다. 이 작은 물체가 실물처럼 느긋하게 보이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맛을 느끼게 하지만 잔재주가 아닌 탁 트인 심미안을 표현한 진실성을 느낄 수 있다. 출토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 일본에 살던 존카스비라는 영국인 수집가가 모은 한 무리의 고려청자 속에 들어 있던 것으로 그가 은퇴하고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한국의 청년 수장가 고(故) 전형필 씨가 도쿄의 유력한 수장가들과 맞서서 이 수집품을 서울로 되사들여 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화재를 높은 학식과 안목으로 수집했던 고(故) 전형필 씨는 수집의 목적도 목적이려니와 애국적인 열의가 더 대단하여 일본인들도 이에 감명을 받아 이해를 초월하여 이양해 준 것이다. 어질고 신선한 멋, 백자연적 우리나라 재래 문방 용품 중에서 조선시대 연적처럼 특색 있는 것은 없다.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의 품격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품격 정도와 생활정서를 잘 엿보게 해 주어 누구나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조선백자 중 백자연적처럼 순정적인 표현을 보인 예는 드물다. 청개구리, 두꺼비, 소, 잉어, 자라, 토끼, 동자에 이르기까지 익살스럽고도 순직한 모습 속에 도공들의 순정을 읽을 수 있다. 그 중 잉어연적은 늠름한 자태를 표현한 것으로 남성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조형의 일종으로 공예 의장에 많이 다루어져 왔던 것이다. 한국 연적은 중국이나 일본 연적들처럼 잔재주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수수한 모습으로 너그럽고 조촐한 선비들의 기개를 드러낸 것이 많다. 백자연적이 조선시대에 다양하고 흔하였지만 많은 명품들이 일본으로 수없이 건너갔다. 사람들이 흔히 무릎연적이라고 부르는 둥근 원형모양의 백자연적은 마치 젊은 여인의 무릎마루처럼 부드럽고 희고 잘 생겼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다만 둥그런 몸체와 흰 빛깔만으로 이루어진 청백색으로 어질고 신선하여 무릎연적만이 지닌 독특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때로는 청백색 유약만으로 티 없는 멋을 느끼게 해 주지만, 때로는 파초 한 그루를 은은하게 음각해 넣거나, 파초 앞에 앉은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를 쪽빛 청화로 칠해서 흰 백자 바탕이 시원한 맛을 줄 때도 있고 때로는 태극무늬나 매화나무 한 그루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백자무릎연적의 흰 맛과 둥근 맛, 쪽빛과 백색의 환상적인 조화는 한국인의 미의식과 어우러져 친근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다소곳이 한 옆에 앉아 오므린 입으로 물을 따르도록 만든 청개구리의 주둥이는 겉치레가 아니라 연적의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다. 백자연적 중에는 복숭아모양의 연적이 많다. 이것은 문방 용품으로서 실용적인 역할과 방치레의 장식품의 역할도 지니고 있다. 연적은 방주인의 취향이나 교양에 따라서 자기가 선택해서 쓸모와 놓일 자리를 잡는다. 그 중 ‘복숭아모양 연적(선도형연적(仙桃形硯滴))’도 그러한 공간구성에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아름다움은 도공의 예술인 동시에 자기생활 공간에 멋지게 정착시킨 방주인의 안목이기도 하다. 조선 전기의 복숭아 연적은 복숭아 형태를 단순화하면서 봉오리 끝이 봉긋한 것이 특징이다. 물론 봉오리가 좀 더 뾰족하게 솟아나 경쾌한 맛을 주는 것도 있지만, 이 연적은 전체가 풍만하고 편안한 선을 지니면서 봉오리는 의젓한 양감을 지녔다. ‘청화백자진사천도형연적(靑華白磁辰砂天桃形硯滴)’은 탐스럽게 영근 복숭아 모양을 한 연적이다. 줄기와 잎사귀까지 장식하여 마치 나무에 매달린 듯 자연스럽게 꾸몄다. 복숭아의 꼭대기에는 선명한 붉은 자줏빛 동화안료를 채색하여 풋풋한 생명감을 부여하고 줄기에는 갈색의 철화안료, 잎사귀에는 청화안료를 옅게 칠하여 사실감을 높였다. 이 외의 백자연적이나 청화백자연적들도 각기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멋과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 형상만으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은 물론 고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연적은 하나하나가 갖는 아름다움이 모두 이유가 있다. 대체로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기형에서 한국적인 특유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민족의 명산 지리산 높이 1915m의 지리산은 3개도(道) 5개군(郡)에 걸쳐 있는데, 경상남도의 산청군·하동군·함양군, 전라남도의 구례군, 전라북도의 남원시에 몸을 펼치고 있다. 남도의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동쪽 날개는 중봉, 하봉, 두류봉, 쑥밭재, 왕등재, 웅석봉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 날개는 제석봉, 삼신봉, 촛대봉, 칠선봉, 반야봉, 노고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산은 두류산 또는 방장산으로도 불리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류산은 멀리 백두대간의 머리가 흘려왔다는 의미이고, 방장산은 신선이 사는 삼신산에서 유래되었다. 웅장한 산세와 넉넉한 자연의 품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지리산 산행의 백미는 주능선 산행이다. 능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펼쳐진 산하를 보면서 25.5㎞의 주능선을 걷노라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몰아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주능선에는 1500m 이상의 봉우리만도 16개나 있어 더욱 운치를 더한다. 어느 코스에서 접근하더라도 주능선은 짧지만 실제 산행거리는 등정과 하산까지 합쳐 50㎞ 정도 된다. 백두대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남원시 덕두산에서 산청군 웅석봉까지의 산행을 고집한다. 전체 산행거리는 80.9㎞이고, 산행의 코스가 북에서 출발하여 남으로 왔다가 동으로 가는 모양이라 태극형 종주코스라 부른다. 지리산은 몸통의 곳곳에서 많은 물줄기를 뿜어내어 계곡마다 헤아릴 수 없는 맑고 검푸른 소와 폭포를 만들어 비경을 더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을 지리산 12동천이라 하는데, 청학동, 화개동, 덕산동, 악양동, 마천동, 백무동, 칠선동, 밤밭골, 피아골, 연곡골, 들돋골, 뱀사골 등이다. 골짜기에서 모여든 물들은 지리산 몸통을 각각 남북으로 감싸는 큰 강을 이룬다. 그 중 하나는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이다. 남강은 함양과 산청을 적시고 내린 경호강과 천왕샘에서 출발한 덕천강이 진주 근방에서 만나 이루어진다. 섬진강은 마이산과 봉황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의 서쪽을 감싸고 흐려다가 연곡천, 화개천을 만나 몸통을 불린다. 또 지리산에는 유서 깊은 사찰이 많이 남아 있어 다양한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가 즐비하다. 대표적인 사찰에는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법계사, 대원사, 내원사, 실상사, 벽송사, 영원사 등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지리산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식물 800종류, 동물 400종류 이상이 있다고 한다. 천혜의 자연과 이곳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울려진 이곳은 문화와 자연경관의 보고이기에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왕이 오른 고개에 자리 잡은 산지늪 지리산 12동천 중 하나인 덕산동은 천왕샘에서 출발한 물이 흐르는 중산리계곡과 대원사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학자 남명 조식 선생은 양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는 덕산동 초입에 정자를 만들고 많은 후학들을 기르면서 이곳의 경치를 다음의 시조로 표현하였다. 지리산 양단수를 옛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도원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양단수의 하나인 대원사계곡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쓴 유홍준은 발을 담구고 여가를 즐기는 남한 제일의 탁족장소로 소개하고 있다. ‘너럭바위에 앉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먼 하늘을 쳐다보며 인생의 긴 여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보다 더한 행복이 있으랴’라고 하였다. 이곳은 계곡이 깊고 계곡 옆에 많은 나무들이 자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가을에는 알록달록한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다. 계곡의 절경마다 붙여진 이름은 선녀탕, 세신대, 세심대, 옥녀탕 등으로 세속에 찌든 몸과 마음을 비우는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 계곡을 따라가면 대원사와 (구)가랑잎초등학교가 나타난다. 이 길을 계속 올라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조개골계곡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유평계곡이 나온다. 유평계곡은 길이가 짧고 규모가 작으나 2개의 산지늪을 품었으니 왕등재늪과 외고개늪이다. 고개를 이르는 말에는 재, 치, 령, 현 등이 있는데, 왕등재와 외고개는 삼장면 유평리에서 금서면 오봉리로 넘어가는 고개길이다. 외곡마을 끝자락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30분가량 오르면 왕등재늪이 나타난다. ‘왕이 오른 고개’라는 의미를 지닌 왕등재에 올라서면 산청과 함양 및 경호강의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이곳에는 가락국 제10대 왕인 구형왕(기록에는 나라를 넘겨준 의미로 양왕)의 슬픈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신라군에 쫓긴 구형왕은 지리산의 언저리인 왕산에 들어와 왕궁을 만들고, 천혜의 요새인 왕등재에 토성을 쌓고 항전하다 끝내 왕산 아래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로 왕산에는 가락국의 별궁인 태왕궁(또는 수정궁)이 있어 왕족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532년 구형왕은 신라에 대항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아픔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밀양의 이궁대에서 신라의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이곳의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하다 5년 후 세상을 떠난 것으로 가락국 200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왕등재늪 주변에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토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되어 있고, 성을 따라 성문이 적당한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성문이 있던 곳에는 석축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왕등재 남쪽에는 깃대를 걸었다는 깃대봉,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이 있다. 왕등재늪은 길이 200m, 폭 80m 정도로 사철 물이 있어 습지에 들어서면 발목까지 물이 차오른다. 등산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고, 늪 옆으로 목도를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대암산 용늪 다음으로 발견된 왕등재늪은 다양한 생물들을 품고 있어 보존의 값어치가 높은 곳이다. 왕등재늪에서 동쪽으로 가면 삼장면과 산청읍을 연결하는 밤머리재를 만날 수 있고, 서쪽으로 가면 외고개와 새재 및 쑥밭재를 지나 천왕봉으로 갈 수 있다. 외고개에서는 왕등재, 금서면 오봉리, 새재, 유평의 외목마을 등으로 갈 수 있다. 유평의 외목마을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 산비탈을 내려가면 잣나무 식재림을 만나게 된다. 가을에 이곳을 오게 되면 갑자기 은빛의 물결이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이곳이 외고개늪이다. 등산로가 늪의 중간을 가로질러 있어 은빛의 물결 속을 걸어가는 기분은 가보지 않은 사람을 알지 못하리라. 외고개늪은 해발 약 800m의 계곡 사면에 형성되어 있는데, 주변 능선의 경사면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모이면서 넓게 만들어졌고 대부분이 갈대 군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습지의 대부분은 갈대군락으로 되어 있어 저층습원으로 보이나 지형이나 지하수위로 볼 때는 중층습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계절별로 다양한 들풀 자생해 산이 높으면 구름이 쉬고 가는 날이 많은 법이다. 산할아버지가 구름 모자를 쓰듯이 많은 날들이 구름과 안개로 뒤덮인 왕등재와 외고개늪! 왕등재늪은 봄이면 안개 속에 동의나물, 참꽃마리, 산비늘사초, 자란초 등을 싹 틔우고, 여름이면 감자개발나물, 범꼬리, 세모부추, 방울새란, 닭의난초, 잠자리난초, 창포가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온갖 식물들이 알록달록한 단풍옷을 입는 가을이면 숫잔대가 보라색 꽃을 나홀로 자랑한다. 왕등재늪 주변은 신갈나무 군락으로 덮여 있고, 산림과 늪 주변에는 고사리를 비롯한 산나물도 많이 자라고 있다. 특히 늪 주변에는 1m 정도 자라는 꿩고비가 무리지어 있는데, 안개 속에서 만나는 꿩고비 군락은 이곳이 열대우림의 한 부분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꿩고비의 포자엽은 영양엽보다 작고 2회 깃꼴로 갈라지며 붉은빛이 도는 갈색의 포자낭이 입체적으로 달린다. 어린 싹을 나물로 먹고, 한방에서는 뿌리줄기를 약재로 사용한다. 그 외에도 주변 산림에는 고추나무, 노각나무, 단풍나무, 때죽나무, 병꽃나무, 층꽃나무, 큰꽃으아리, 족두리풀, 쥐오줌풀, 활량나물, 톱풀, 층층잔대 등이 자라고 있다. 다양한 식물이 어우러져 자라는 이곳에는 여러 곤충들과 동물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살아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꼬마잠자리와 도롱뇽이 있다. 외고개늪의 습지에는 갈대군락이 넓게 분포하고, 작은 개울이 거미줄처럼 펴져 있어 물이 많은 곳이다. 물길이 흐르는 곳에는 진퍼리새, 삿갓사초, 골풀이 작은 군락을 이루고, 사이사이에 큰방울새란, 닭의난초, 흰제비란, 꽃창포, 노루오줌, 하늘나리, 동의나물, 곰취, 도깨비사초, 왕비늘사초, 솜방망이가 자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외고개늪 주변에는 뻐국나리, 엉겅퀴, 억새, 털중나리, 꿀풀, 흰꿀풀, 조팝나무가 자라고 있다. 동물로는 꼬마잠자리를 비롯한 여러 곤충들과 척추동물인 무당개구리, 아무르산개구리, 살모사, 까치살모사가 발견되었고, 노루와 멧돼지도 살고 있다. 가락국의 슬픈 역사 간직한 계곡 왕등재와 외고개늪이 위치한 대원사계곡은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으로 원래의 이름은 유평계곡이다. 아직도 이 지역의 사람들은 “덕산 유독골”이라 부른다. 유독골 하면 아주 깊고 험한 골짜기를 의미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지역 노인들은 “유독골로 보낸다”는 말을 자주 쓴다. 유독골은 민족동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빨치산이든 이들을 토벌한 군인이든 살아 나오기 힘든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가장 무서운 말이 ‘덕산 유독골로 보낸다’였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져 지금도 사람들은 ‘골로 갔다, 골로 보낸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죽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대원사골은 골이 깊어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 삶의 피난처이자 안식처였다. 1862년 이곳의 인근인 단성면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이 동학혁명으로 이어질 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면서 모여든 곳도 지리산이요, 한국동란에서 사상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품어준 곳도 지리산이기에 이곳은 갈등과 융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소이다. 이루지 못한 꿈을 역사에서 찾고, 그 의미를 부여한 왕등재늪이 대원사골에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대원사골은 도피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땅인 것이다. 왕등재늪과 관련이 높은 구형왕릉은 늪의 북쪽 사면인 금서면의 왕산 근처에 있다. 역사적으로 밝혀지지 못하여 전구형왕릉으로 지칭되는 왕릉은 국가지정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잡석으로 방형의 단을 만들었는데, 피라밋 모양으로 모두 7단으로 이루어진 돌무덤으로 특이하게 4단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왕산 주변의 가락국의 유적에는 구형왕릉 외에 덕양전과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유허비, 수정궁, 왕대,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할아버지인 구형왕의 무덤을 지키면서 무술을 연마한 곳 등이 있다. 대원사골이란 이름이 있게 한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한 곳으로 1955년 법일 스님에 의해 비구니선원으로 중창되었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참선도량이면서 보물 제1112호인 대원사 다층석탑을 가지고 있다. 며느리밥풀꽃이나 동자꽃은 원망과 슬픔을 품고 있기에 꽃 색깔이 대체로 붉다. 그처럼 대원사골에 진하게 맺힌 아픔들은 가을이면 붉은 단풍으로 태어난다. 그것에 더하여 유평계곡에는 맛있는 사과로 알려진 유평사과가 가을이면 붉은색으로 익어간다. 억만 겁의 세월 속에서도 지리산은 영원한 우리의 영산이다. 넓고 높아서 영산이 아니라 사람과 여러 생물들에게 큰 도움을 주기에 영산인 것이다. 오늘도 왕등재와 외고개늪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수는 계곡과 하천을 적시며 생물들에게 생명수를 주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행복을 주고 있다.
“이슬람제국의 아랍인들, ‘0’의 사용은커녕 그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의 문명수준은 매우 낮을 것이다.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을 넘어 화성에 탐사선을 착륙시키는가 하면 동영상 이동전화기를 비롯한 최첨단의 이기를 사용하는 등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일 혹은 모레엔 또 어떤 신기한 기계가 발명되어 우리를 놀라게 할까? 생활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다못해 인간성의 상실을 염려하게 하는 과학기술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수준 높은 과학기술의 토대 이끈 ‘0’ 인류가 발견·발명한 각종의 원리나 기호들 중에서 인류로 하여금 한계를 알 수 없는 과학과 기술에 도전할 수 있게 한 것 중의 하나는 숫자 ‘0’일 것이다. 매우 단순하게 접근해도 0의 개념이 없으면 ‘-’, 즉 음수(陰數)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미분이나 적분 같은 고등수학은 생각할 수 없다. 인공위성, 컴퓨터, 휴대전화기, 나노 등은 모두 고등수학의 소산물이다. 화약, 나침반, 종이가 동양에서 발명되었지만 고등수학을 가능하게 한 0 또한 동양인의 고안물이었다. 사실 누가 최초로 0을 고안해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사가들은 견해일치에 이르지 못했다. 1 ~ 9까지의 숫자는 아랍인들이 인도로부터 배워 사용한 것으로 이야기되지만 0의 경우 사가들은 아랍인들이 인도가 아닌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안해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중국문화권인 인도차이나의 7세기경 문헌들에 0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미루어 볼 때 인도나 아랍이 아닌 중국이 0의 발명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가들은 ‘없음’을 의미하는 아랍어 ‘sifr’와 ‘0(cipher)’을 관련지어 위의 관점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이처럼 0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은 혹 중국인일지 모르나 그것을 실제로 사용한 사람은 아랍인들이었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대체로 8세기부터 11세기의 아랍세계는, 언뜻 석유·종교분쟁·이슬람원리주의·자살폭탄테러·지하드 등을 떠올리게 하는 금일과는 달리, 높은 수준의 문화를 자랑했다. 새교육 9월호에서 약술했지만 무함마드의 이슬람교는 동으로는 인도의 인더스강에 이르고 서로는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퍼져갔다. 이슬람교를 모체로 삼은 이슬람제국 또한 메카,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등을 중심으로 중동지역과 지중해세계를 장악했다. 서양에 앞선 높은 수준의 문명 이뤄 이슬람세계의 종교·군사적 성공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탁월한 문명이다. 당시의 아랍인들은 수학과 과학은 물론 다방면에서 경이로운 창조력을 발휘하여 인류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들의 왕성한 문화 창조력은 봉건적 서유럽의 그것을 압도했다. 대체로 15, 16세기 이후 세계문화를 주도해 온(물론 정신문화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서구도 중세에는 비잔틴제국이나 이슬람제국보다 문화적으로 훨씬 후진적이었다. 서구 중심적 사관에서 사유하는 사가들도 그 시기에는 서양이 문화적으로도 이슬람세계에 현저히 뒤졌다는 점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아랍인들로 하여금 9, 10세기 전후에 그처럼 탁월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 한 것은 주로 이슬람교였다. 이슬람교는 아랍인들의 예술·문학·과학적 성취를 자극하고 촉진했다. 아랍인들에 있어서 삶 그 자체였던 이슬람교는 그들의 문화 창조력과 지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더욱이 이슬람교는 성지순례를 요구함으로써 사상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다. 거기다 꾸란은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읽기 위해서 아랍인들은 아라비아어를 익혀야 했다. 아라비아어는 융통성이 비교적 큰데다 꾸란의 언어였으므로 쉽게 이슬람세계의 표준어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아라비아어는 이슬람교와 함께 이슬람세계의 통합과 문화 창조를 촉진하고 자극했던 것이다. 이슬람제국은 또한 학문을 후원하고 장려했는데 아바스조의 7대 칼리파 알 마문이 가장 좋은 사례이다. 철학·수학·천문학·의학 등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바그다드에 도서관이 딸린 학문의 집 ‘바야트-알-히크마’를 세워 그리스 고전들을 번역하게 했다. 천문대가 있어 천문학자들은 경도와 위도를 측정했는데 금일의 기준으로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지구표면적을 계산했다. 당시에도 꾸란의 해석과 관련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가 하면 꾸란을 인간인 무함마드의 창조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은 알 마문 또한 그런 경향에 동조했다. 그리하여 그는 827년에 칙령으로 꾸란의 창조설을 확인했고 833년에는 창조설에 반대하는 자들을 추방하고 탄압했다. 탁월한 흡수력으로 업적 이룬 아랍 거기다 아랍인들은 주변의 문화적 유산을 잘 흡수하여 소화시켰다. 이슬람제국에 정복당한 지역들은 훌륭한 문화를 자랑하던 페르시아나 비잔틴제국의 일부였다. 아랍인들은 페르시아로부터 정치, 그리스로부터 철학, 페르시아와 그리스로부터 문학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들은 페르시아·그리스·로마·비잔틴 등의 우수한 문화를 효과적으로 흡수했다. 이슬람제국과 비잔틴제국은 줄곧 대립했지만 간혹 평화롭게 지낼 동안 아랍인들은 비잔틴문화를 존중하고 배웠다. 아랍인들은 비잔틴제국의 그리스인들을 자기들 외의 유일한 문화민족으로 대우하고 외교적으로도 배려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두 문화가 활발히 교류되고 아랍인들이 그리스문화에 자주 접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인들도 아랍인들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도 아랍인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인정했으며, 외교상의 관례였지만 칼리프의 사신들에게만은 칼리프가(家)의 부녀자들의 안부를 묻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슬람제국의 문화는 특히 과학부문에서 높은 성취를 자랑했다. 아랍인들은 그리스는 물론 주변세계의 과학적 열매를 흡수하여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다(역시 문물을 교류할 때의 그리스인들과 아랍인들은 서로 상대의 과학상의 성취를 인정하고 예찬했다). 아랍인들은 그리스와 인도의 위대한 과학·철학적 저작들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하였다. 그들은 또한 전술했듯이 중국과 인도로부터 정교한 수학적 기법을 배우고 특히 인도로부터는 1에서 9까지의 문자사용을 배웠다. 과학 분야에서도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수학·화학·의학이었다. ‘아라비아숫자’가 말해 주지만 아랍인들의 수학 상 업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전 인류가 사용하는 아라비아숫자를 이용하여 일상적 계산을 쉽고 편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고등수학의 길을 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라비아숫자에는 로마인이 알지 못했던 0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0’개념을 모르면 음수개념은 존재할 수 없고, 음수를 알지 못했을 경우 오늘날 수학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아랍인들은 유클리드기하학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해석기하학에 도전했다. 그들은 평면 및 구면 삼각법을 창시했으며 3차 방정식 등 대수학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0을 최초로 책에 기록한 사람으로 알려진 9세기의 알-카와리즈미는 그리스와 힌두적 요소를 결합하여 대수학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대수학을 의미하는 영어 ‘알제브라(algebra)’는 그의 아랍어책 알-제브라(al-Gebra)에서 유래했다. 11세기경에 톨레도 등 스페인의 아랍계 도시들을 통해 아랍의 수학, 철학, 의학 등이 유럽에 유입되었다. 아라비아숫자는 처음 대학들에서 사용되고 이어 상인사회에 수용되었다. 동지중해 지역과 활발히 교류하던 이탈리아 상인들이 13세기부터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점차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연금술 통해 화학·의학 발전에 기여 다음은 아랍의 화학과 의학에 관한 이야기다. 9, 10세기경의 아랍에서는 연금술이 유행했고, 그것은 화학에서도 놀라운 업적을 남기게 했다. 중국의 경우 연금술은 주로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발전했고, 그리하여 중국적 신비주의와 결합했다. 반면 아랍에서는 비(卑)금속으로 귀금속(철학자의 돌)을 합성해내는 연금술, 즉 마술과 과학이 결합한 연금술로 발전했다. 아연이나 알루미늄 같은 비금속으로 금과 같은 귀금속을 만들어낸다면 얼마나 신날까? 연금술사들은 각종 비금속에 이런저런 화학약품을 넣고 열을 가하거나 감하는 시행착오적 실험을 되풀이했고, 그런 실험과정을 통해 증류·여과·승화 등 과학적 방법을 개발하거나 발전시켰다. 또한 탄산소다·알룸(명반)·붕산·질산·유황산·질산은·초산·알코올 등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었다. 화학실험과 화학원소의 발견은 당연히 의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아랍인들은 그들 스스로 의학을 연구하고 치료술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등 그리스 의학지식을 활발하게 수용했다. 그처럼 아랍인들은 그리스인들로부터 의학을 배웠으되 그들을 능가했다. 중세 전성기와 중세 말부터 근대 초까지 유럽 대학에서의 의학교육은 주로 아랍 의학자들(알 라지·이븐알아바스·이븐시나(아비세나)·아불카심 등)의 의서(醫書)들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에 의존했다. 특히 안질·천연두·홍역 등의 치료에 관한 아랍 의서들은 18세기까지도 그 분야의 권위서로 통했다. 아마도 아랍의 가장 유명한 의학자는 알라지와 이븐시나일 것이다. 알라지는 10세기에 모든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20권의 개론서 의학대전을 남겼다. 이븐 시나는 기왕의 의학을 체계화하여 중세의 가장 뛰어난 의학서로 평가받은 의학규범을 썼으며 회복의 서도 남겼다. 특히 의학대전은 그리스와 아랍의 의학은 물론 페르시아와 인도의 의학까지 종합한 의서였고,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된 이래 17세기까지 서구 대학들의 의학교재로 사용되었다. 그밖에 이슬람세계의 중요한 도시들에는 대소 병원과 의학도서관들이 있었다. 그들은 약전(藥典)도 처음으로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이곳저곳의 효험 있는 다수의 식물이나 약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한 것에서 비롯했다. 이슬람제국의 아랍인들이 인도와 중국의 도움을 받아 0을 포함한 아라비아숫자를 고안해 내거나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특히 0을 고안해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위에서 지적했지만 현재의 첨단과학은 불가능하거나 그 수준이 훨씬 낮을 것이다. 로마의 숫자 I(1), V(5), X(10), L(50), C(100)를 염두에 둘 경우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IV(4) IX(9) LV(55), CL(150) 등으로 미·적분은커녕 제곱, 세제곱을 수행할 수 있을까? 로마숫자로 수행되는 수학을 바탕으로 인공위성이나 컴퓨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한국 교육 발전과 함께 해온 60년 올해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가 출범한 지 6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1947년 11월 23일 회원 상호 간의 강력한 단결을 통해 교원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교직의 전문성을 확립함으로써 교육의 진흥과 문화의 창달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출범한 지 어언 60년의 성상(星霜)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교총은 조선교육연합회(1947~1948), 대한교육연합회(1948~1989),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1989~현재)로 발전하면서 큰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현재 회원만 해도 약 20만 명에 이르며, 지역조직으로 190개의 시·군·구교원총연합회와 1만 1000여 개의 학교 분회를 거느린 16개 시·도교원단체총연합회가 있고, 직능조직으로 초등교사회, 중등교사회, 초등교장(감)회, 중등교장(감)회, 대학교수회 그리고 산하단체로 학교급별·직위별·설립별·성별·전공별 단체 25개 등을 둔 방대한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방대한 조직과 회원을 가진 교총은 한 일간지의 국내 파워조직 영향력 조사에서 청와대,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을 능가하는 13위, 국가기관 및 대기업을 제외한 시민사회단체 중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파워와 영향력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성장은 교총이 우리나라의 유일한 교원전문직단체로서 각급 학교의 교사로부터 대학의 교수에 이르기까지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교원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 그들만의 이익이 아닌 우리나라의 교육 발전이라는 대의를 추구해 온 데 힘입은 것이다. 지금 교총은 우리나라 교육정책의 수립과 추진, 학교교육의 발전과 내실화 그리고 사회문화 발전과 풍토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내적으로는 교원의 전문성 신장을 위한 각종 연수와 교권 옹호 활동 그리고 학교공동체 신뢰 회복과 교육 복지 향상을 위한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교원들의 권익과 복지 향상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다각도로 전개하고 있다. 60년의 회고와 반성 지금까지 한국교총이 우리나라 교육 발전과 교원들의 권익 보호에 기여해 온 점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교총의 전신인 대한교련은 해방 이후 혼돈의 시대에 유일한 합법적 교원단체로서 국민교육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교육공무원법 제정을 실현하여 교원의 신분과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교총은 1991년에 교원 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실현하여 교원 지위 향상을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1992년 이후에는 교육부와의 단체교섭을 통해 교원의 지위와 복리를 증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고, 다양한 정책 협의를 통해 우리나라 교육을 발전시키고 내실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교총은 양적 성장과 함께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다. 대한교련 시절 우리나라 교육의 발전과 교원의 복리보다는 일신의 영예와 안위만을 생각하는 인물이 회장으로 임명되어 정치권력과 유착된 일탈 행태를 보임으로써 회원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고, 정권의 홍위병처럼 활동하여 어용단체라는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하는 등 많은 내홍과 외환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에서 사회적 변화와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하고 독재정권에 유착된 행태를 보임으로써 많은 회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결과적으로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태동시키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행착오는 한국교총으로의 새로운 태동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원죄의 그늘이 교총의 과거와 현재를 옥죄고 있는 부분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과거에 거의 자동적으로 학교장이 맡아오던 분회장을 평교사가 맡을 수 있도록 분회장 직선제를 도입하고, 교총 회장 선출도 회원 모두가 참여하는 직선제로 전환하여 회원들의 참여에 기반한 민주적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고 모든 교원들의 뜻과 전문적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전문직 공동체로서 역할을 다함으로써 서서히 그 위상을 올바르게 정립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총의 지난 60년은 새로운 거듭남을 위한 진통과 도약을 위한 몸부림의 과정이었고 앞으로의 창대한 발전을 위한 기반 다지기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직 단체로 교육발전 앞장서야 전통적으로 60년은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의 조합에 의한 60갑자(甲子)의 1주기를 의미하며, 60세는 장수(長壽)의 삶과 새로운 삶의 시작을 나타내는 환력(還曆)을 의미한다. 그래서 60주년은 한 주기가 완성되고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는 매우 의미 있는 해이며, 개인의 삶으로 말하면 오랜 삶을 완성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뜻 깊은 감흥의 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총이 지금 60주년을 맞이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 있는 해를 맞이했음을 의미한다. 즉, 태동과 성장의 60년이라는 한 시대를 완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의미 있는 출발선상에 서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총의 회원으로서 출발선에 서 있는 한국교육의 대표 주자(走者)를 보는 설레는 마음으로 60주년을 맞이한 교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대와 바람을 주문해 본다. 첫째, 우리 시대와 사회를 이끄는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논어(論語)에서는 60년의 삶을 이순(耳順)이라고 하여 단지 듣기만 해도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는 지극히 높은 삶의 경지를 표현한다. 이제 교총도 60년의 발전 역사를 가진 만큼 이순(耳順)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을 포용하고 아우르는 지극히 높은 경륜과 활동의 경지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둘째, 전문직 교원단체로서 교총이 교육과 국가 발전을 선도하는 큰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총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직 단체이다. 전문직은 한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직종으로 고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봉사와 헌신으로 핵심적인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최고의 직업이다. 따라서 교총은 회원들의 전문성을 극대화하고 그를 바탕으로 다양하고 질 높은 교육을 추구하여 교육과 국가 발전을 선도하는 견인차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셋째, 교총이 자신의 이익에 앞서 학생과 학부모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품격 높은 전문직 공동체주의를 실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육은 자아를 실현하고 창조적 능력을 계발하는 행복한 삶의 과정이다. 따라서 교원들은 청출어람의 자세로 자신보다는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학생과 학부모의 복지와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관점을 견지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바로 전문직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교총이 추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입장일 것이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은 교원들의 권익과 복리 향상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총이 노조처럼 자신들의 권익만을 위해 투쟁하는 모습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교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의한 처우를 받았을 때 침묵하는 것 또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60년을 유지해온 전문직 단체로서의 명예에 걸맞지 않은 이익집단으로 보일 정도로 과해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교육의 발전과 학생의 성장에 이바지하는 올바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총은 국민과 회원들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우리 교육의 발전과 동행하는 또 다른 발전의 역사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60주년이 되는 날,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멋진 교총의 새로운 거듭남을 기대해 본다.
인간의 영원한 원초적 욕망, 변신 사람들은 누구나 변신을 꿈꾼다. 인류가 화장을 하고 가면을 쓰는 것은 현실의 자신에서 벗어나려는 가장 손쉬운 시도다. 여기에 경제적 차원이 개입되면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의도했던 화장은 변장으로 이어져 마침내 성형 수술에 이른다. 이러한 인류의 열망은 문명사의 거대한 새 물결과 맞닿아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인터넷 세상에서 누리꾼들이 별칭을 구사하고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아바타(Avatar)를 치장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도 한 예다. 아이디를 여러 개 사용하여 남녀노소를 두루 연기하는 다중 자아(Multiple-Ego)들도 결국은 변신을 꿈꾸는 또 다른 모습들이다. 변신을 젖혀놓고 인간이란 존재를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을 이해하는 원형인 신화에서도 변신은 제일의 중심 테마다. 신화의 영웅들은 자유롭게 변신을 거듭하는 존재들이다. 온갖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제우스의 능력은 모든 신들을 압도하는 권위를 지니고 그의 번개는 모든 존재를 완전한 무로 변신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다. 전 세계 모든 신화는 변신의 능력이 신성과 연관됨을 보여준다. 우리 의식의 뿌리를 이루는 단군 신화에서도 변신은 가장 핵심에 놓여 있다. 한마디로 우리의 조상 단군은 웅녀와 환웅이 각각 변신하여 결합한 성과다. 곰이 인간으로 변신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하여 성공하고, 다시 이를 가상하게 여긴 신이 인간으로 기꺼이 변신하여 이루어진 결과가 바로 단군이다. 인간 존재는 동물과 인간이 각각 자신의 존재를 벗어나고자 노력하여 이루어진 화신(化身)과 현신(現身), 곧 변신의 결과다. 동물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인간이 되고, 거기에 감동한 신이 화답하면서 태어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단군 신화는 성(聖)과 속(俗)이라는 인간 존재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는 신화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행위도 결국 변신을 꿈꾸는 가장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 아닐까.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주인공으로 변신하고, 다시 저자로 변신하고 독자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그때마다 나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면서 또 다른 세상을 꿈꾸고 만든다. 내 안의 곰이 오랜 고통 속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고 다시 신과 접하여 내일을 위한 꿈을 꾸며 현실에 뿌리를 내린다.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책을 읽은 후의 ‘나’는 변신의 전과 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체적 진실 그 자체다. 그렇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형성되는 존재다. ‘변신’하기에 존재하고, 존재하기에 ‘변신’하는 존재가 바로 ‘나’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현대인의 변신이 어떻게 비극적으로 그려지는지 보여준다. 벌레가 되어 깨어난 외로운 현대인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7쪽)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벌레가 되어 깨어난다. 그는 출장 영업사원으로서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다섯 시에 기차를 타러 가야 하는 고달픈 신세의 가장이다. 천식을 앓는 어머니,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17살도 안 된 여동생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 온 성실한 남자다. 일곱 시 십오 분도 안 되어 회사 지배인은 직접 찾아와 그레고르 잠자가 왜 출근을 하지 않았냐며 수금한 돈을 빼돌리지 않을까 의심한다. 하지만 벌레로 변한 주인공 잠자는 그야말로 속수무책,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그의 말은 인간이 아닌 벌레의 언어로 바뀌었기에 예전과 같은 의사소통은 전혀 불가능해진 것이다. 마침내 그가 흉측한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배인과 집안 식구들은 모두 경악한다. 지배인은 도망가고 하녀는 자신을 해고해달라며 그만 둔다. 어머니와 아버지, 여동생은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그레고르 잠자를 돌봐주기 시작하지만 생계유지에 필요한 수단을 마련하자 곧 귀찮아한다. 특히 훌륭한 연주자가 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해 도우려던 여동생은 노골적으로 오빠인 잠자를 매몰차게 대한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요. 두 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깨달았어요. 저는 저런 괴물 앞에서 오빠의 이름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오직 한 가지, 우리가 저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 동안 저것을 돌보고 참아내기 위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어요. 우리를 조금이라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111쪽) 그레고르 잠자는 마침내 죽어간다. 슬프고 허망한 현대인의 변신을 암시한다. 그는 가족들에 대해 감동과 사랑의 마음으로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그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아마 여동생 보다 그 자신이 더욱 단호할 것이다. 탑시계가 새벽 세 시를 칠 때까지 그는 이렇게 공허하고도 평화로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창밖의 세상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까지는 아직 알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푹 떨어졌고,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흘러나왔다.(117쪽) 다양한 의미로 해석 가능한 변신 카프카의 변신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다. 여기서 ‘벌레가 된’이란 표현을 정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벌레가 되려고 ‘변신한 것인지’ 어쩔 수 없이 벌레로 ‘변신된 것인지’에 따라 작품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비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폭압적 현실 자체 가 곧 변신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반대로 그러한 비인간적 현실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강렬한 (무의식적) 소망이 변신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그레고르를 벌레로 변신시킨 것은 현실 자체인가 아니면 현실로부터의 탈출 충동인가? (중략) 이와 같이 변신의 원인을 외적 요인(=현실자체)에 의한 것으로 볼 것인가, 내적 요인(=현실로부터의 탈출 충동)에 의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변신의 의미는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이해된다.(132~133쪽, 옮긴이 해설) 실제로 작품을 읽다보면 벌레가 되는 ‘변신’이 과연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구속인가, 아니면 주인공이 스스로의 삶의 상황을 명료하게 파악하는 순간에 다가온 제한적인 해방인가 쉽사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일단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흉측한 갑충’으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는 첫 대목에서부터 자신의 존재를 명료하게 직시한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 모양으로 흰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져내릴 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버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7쪽) 이러한 치밀한 관찰은 곧 명료한 자기 인식을 뜻하며, 곧바로 지금까지의 자기 삶에 대한 예리한 반성과 성찰로 이어진다. 읽어보면 지금도 공감이 될 만한 진술들로 압도해 오는 대목이다. 더구나 창졸지간에 벌레로 변한 사람의 생각이라 보기 힘들게 긴 분량이다. 아아, 세상에! 나는 어쩌다 이런 고달픈 직업을 택했단 말인가. 허구한 날 여행만 다녀야 하다니. 회사에앉아 실제의 업무를 보는 일보다 스트레스가 훨씬더 심하다. 게다가 여행할 때의 이런저런 피곤한 일들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기차를 제대로 갈아타기 위해 늘 신경을 써야 하는 일, 불규칙하고 형편없는식사, 상대가 늘 바뀌어 결코 오래 갈 수 없는 만남과결코 진실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적 교류 등등.악마여, 제발 좀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다오.(8~9쪽) 마지막 구절인 “악마여, 제발 좀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다오”는 벌레로 변신한 상태를 서술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 삶을 돌이켜 보는 고통 어린 시도다. 이는 변신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변신’의 원인과 의미를 곱씹게 해주는 대목이다. 벌레로 변한 잠자의 의식과 행동은 가장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벌레, 다시 말해 몸은 벌레이나 영혼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로서 그레고르 잠자는 변신 이전의 부정하고 싶은 상태에서 벗어나 오히려 생각하는 동물로서 인간 존재의 모습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벌레가 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고 할까. 판에 박힌 생활을 하면서 벌레 같은 삶을 살던 과거와 벌레이면서 새로운 삶,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상태의 인간다운 삶을 살던 현재가 교묘하게 병치된다. 무엇이 벌레이고 무엇이 인간인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생각하는 벌레로 변신했다는 사실은 시종 일관 작품 속에 명료하게 강조된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그는 생각했다. 꿈은 아니었다.(7쪽)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아, 세상에! 나는 어쩌다 이런 고달픈 직업을 택했단 말인가.(8쪽) 그는 다시 미끄러져 이전 자세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9쪽) 아무 쪽이나 펼쳐보아도 카프카의 벌레, 잠자의 변신인 갑충은 생각하는 존재요, 기존의 구속에서 벗어난 불안한 인간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인간의 존재에 깃든 삶의 한계를 벌레로 변신한, 또는 변신된 순간부터 명백하고 심도 있게 깨닫는다. 변신은 결국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간 존재가 벌레와 같이 불행하게 전락하는 모습, 그리고 스스로를 벌레라고 깨달은 순간부터 행복하게 자신의 마지막 본질을 지킬 수 있는 풍경. 이 두 가지 의미를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코드로 읽을 수 있는 현대의 고전이 바로 소설 변신이다. 슬프고 허망한 현대인의 비극은 누가 읽느냐에 따라, 어떻게 읽느냐, 왜 읽느냐에 따라 실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변신하는 것이다. ‘변신’의 의미 따져보는 변신 읽기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변신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카프카 생전에 간행된 소수의 작품 중의 하나이며, 변형기담(變形奇譚)에 특유한 유머와 이상한 사건을 예사로운 일처럼 묘사하는 작자의 냉정하고 사실적인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실존(實存)의 차원과 부조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박력을 지니고 있으며, 현대인이 언제 어느 상황에서 처하게 될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세계 속에 유폐된 소시민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카프카 문학 중에서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이런 식의 해설을 읽고 문학 작품에 대해 무엇인가를 느끼고 깨달을 수 있을까. 메뉴판에 있는 음식 사진들을 보면서 배부른 표정으로 만족스러워하는 경우나 마찬가지일 듯싶다. 그러니 이런 해설을 조사해 오라는 과제는 이제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문학 작품을 멀리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짜깁기하는 악습까지 물들게 할 수 있다. 필자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유명한 아무개 시인의 제1시집, 제2시집, 제3시집…. 열심히 조사했지만 실제로 시집들을 제대로 읽은 것은 대학에 진학한 뒤였다. 그때까지 필자는 시가 그렇게 훌륭한 언어 예술이라는 사실을 결코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동일한 해설 자료를 베껴야 하는 대상인 줄만 알았다.아, 그나마 이 정도는 나은지도 모르겠다.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자습서식 해설이 여전하니까! 요점 정리 작자 : 카프카(Kafka : 1883∼1924) 갈래 : 중편 소설, 실존주의 소설 성격 : 객관적, 사실적 제재 : 벌레로 변한 인간, 변신 주제 : 소외된 인간의 고독, 인간 실존의 허무 의의 : 현대 문명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의를 잃고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주의적 소설이며, 실존의 문제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실존주의 소설로 간주되기도 한다. 섬뜩하기까지 한 해설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감동을 어쩌지 못하며, 읽다가 말고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는 행위다. 가슴과 머리가 꿈틀거리지 않는다면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할 까닭은 없다. 카프카의 변신은 현대인의 소외, 가족 공동체의 해체, 비현실적이고 우화적인 이야기, 임금 노동자의 안전, 소통 불가의 세계 등 여러 가지 논제들이 늘 관련되는 현대판 고전이다. 그만큼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1915년 체코 프라하에서 탄생한 이후 지금까지 다양하고 심오하게 해석되어 오고 있다. 카프카를 직접 읽기가 조금 어렵다면 ‘변신’의 의미를 다양하게 따져보면서 차츰차츰 접근하게 유도하는 것도 좋겠다. *작가, 그리고 함께 읽으면 좋은 작품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1883년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태계 독일 소설가로서 1924년에 사망하였다. 체코와 유태계, 독일인 등의 출생 배경은 카프카의 작품 세계를 논의할 때 십중팔구 언급된다. 실제로 프라하만 해도 독일의 신비주의와 슬라브적 경건성, 유대교의 비교 사상이 융합되어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유태계라는 특성 때문에 고독감을 키워주었을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여기에 선천적으로 허약하여 훗날 사망 원인이 되는 폐병에 건강 악화로 인한 언어 장애 등 평생 따라다닌 질병은 그의 작품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도 아주 심했는데 변신에서도 잠자의 아버지 모습을 묘사하는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카프카는 극도의 열등감에 시달렸는데 자신이 죽으면 자기 작품 모두를 태워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했을 정도였다.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 가운데 심판과 성(城,) 실종자, 시골의사, 단식 광대 등의 작품이 인상 깊었다. 카프카에 관한 자료나 그의 어록 등을 묶어서 낸 책들도 적지 않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으로 위대한 꿈의 기록(이윤택 옮김, 북인)이 있다. 이 글에서 인용 출처로 활용한 책은 변신(이재황 옮김, 문학동네, 2005)이다. 아르헨티나의 세계적인 화가인 루이스 사카파티(Luis Scafati)의 영감 가득한 삽화가 돋보이는 책으로 변신만 담겨 있다. *생각해 볼만한 문제들 1. 변신, 욕망과 연관된 작품과 현상을 주위에서 찾아보자. 얼마 전에 개봉한 트랜스포머(transformer) 같은 영화도 좋은 사례. (참고 : 다음은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타난 ‘변신’의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고, 오늘날 이와 유사한 상황으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지 구체적 경우를 들어 설명하시오.(1998년 한양대 기출문제)) 2. 변신을 그레고르 잠자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읽어 볼 것. 아버지의 말과 행동의 변화는 어떻게 전개되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3. 그레고르 잠자의 시체를 치운 다음에 가족들은 교외로 전차를 타고 나간다. 따스한 햇살을 쬐면서 그들은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장래에 대한 설계를 하느라 바쁘다. 변신의 이러한 마지막 대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과 함께 읽어 보자. 4. 아서 밀러가 쓴 현대의 비극 세일즈 맨의 죽음(The Death of Salesman)(1949)을 읽으며 카프카의 변신과 비교해 볼 것. 세일즈맨인 아버지 윌리 로먼이 자살하는 현대의 미국 가족 이야기는 ‘변신’ 모티프 없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살펴보자. 나아가 변신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도 비교 분석해 보면 ‘딱!’이다. 5. 카프카라면 무조건 읽는 광팬들이 예상보다 많다. 카프카는 시대를 앞서 태어난 천재 문학가다. 카프카의 전 작품에 도전해 보자.
1980년 광주의 봄을 시작으로 80년대를 관통했던 암울한 시대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삶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황석영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오래된 정원은 이러한 질문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영화이다.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 등을 통해 시대와 사회의 부조리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을 형상화하는 데 장기를 보여준 임상수 감독은 시대의 그늘과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원작의 구성을 바탕으로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그 시절 청춘들의 슬픈 자화상에 연민의 시선을 던진다. 우리가 망각해버린 ‘오래된 정원’ 영화는 오랜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현재의 오현우(지진희)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반대하다가 젊음을 온통 감옥에서 보낸 현우. 17년이 지난 눈 내리는 어느 겨울, 교도소를 나선다. 변해 버린 가족과 서울풍경,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단 한 사람, 감옥에 있던 17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지갑 속 사진의 얼굴만이 익숙하게 다가온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바로 한윤희(염정아)다. 며칠 후, 현우의 어머니는 그에게 한윤희의 편지를 건넨다. “소식 들었니? 한 선생, 죽었어.” 이제 카메라는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검거를 피해 숨어든 운동권 대학생 현우를 ‘갈뫼’라는 한적한 마을에 숨겨준 윤희와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피생활을 하던 현우를 숨겨줄 사람으로 소개받은 윤희는 첫눈에 봐도 당차고 씩씩하다.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라고 미리 선언하면서, 사회주의자라는 현우의 말에 “아… 그러세요? 어서 씻기나 하세요, 사회주의자 아저씨!” 라며 환하게 웃는다. 현우는 그런 윤희와 지내면서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평화로움을 느낀다. 두 사람만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은신처인 갈뫼와 최루탄이 난무하는 살벌한 거리를 오가는 카메라는 험난한 시절을 통과해온 이들의 아픔과 시대상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인물들과 일정부분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감독의 연출에 의해 주인공들의 가슴 아픈 사연은 신파적인 눈물을 덜어내고 담담하게 진행된다. 갈뫼에서의 천국 같은 6개월이 지난 후, 동료들이 모두 붙잡혔다는 소식에 갈등하던 현우는 갈뫼를 떠날 결심을 한다. 윤희는 그를 잡고 싶지만 차마 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현우를 떠나보낸 후, 윤희는 수감 중인 현우의 얼굴도 한 번 못보고 홀로 그의 아이를 키우면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감독은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 꿋꿋하게 현재에 충실하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채워나간 윤희의 시선으로 당시의 운동권과 시대를 바라본다. 혼자만 행복한 게 미안했던 시절 영화는 80년 광주에 대해, 한 운동권의 삶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재현하면서 그 시절의 불행한 청춘들을 위로하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섣불리 결론내리지 않는다. ‘사랑도 사치이고 혼자서만 행복하면 왠지 죄책감이 들던’ 시대에 현우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 개인적인 삶과 청춘을 저당 잡혔다. 이에 반해 윤희는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 우리 좀 더 겸손하자… 상황은 달라지기 마련이고 그때 그때 할 일이 또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 힘든 세월을 버텨낸다. 현우의 후배인 ‘영작’은 투쟁의 전면에 나서라는 운동권 조직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택한다(이 캐릭터는 후에 정치가의 길을 걸어갈 것임을 암시해 씁쓸함을 남긴다). 감독은 이들 등장인물들에게 때론 연민을 보여주고, 때론 냉소를 보내면서 삶보다 이념이 지배하던 시대의 흉물스러움을 잘 보여 준다. 영화 오래된 정원은 또한 현재의 우리는 80년대의 그 암울한 시절보다 얼마나 더 나은 시대를 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현우의 수감 기간 동안 부동산 졸부로 변모한 현우 어머니(윤여정)의 모습을 보며 부동산이 서민들을 웃기고 울리는 한국 사회를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짓게 된다. 섬뜩하리만치 리얼하게 묘사된 80년대 당시 한 여공의 분신 모습은 현재의 생계형 시위를 연상시키며 마음을 무겁게 한다. 청년 ‘사회주의자’ 현우가 흰머리가 듬성한 중년이 되어 갈뫼를 찾아와 윤희가 남긴 기록과 기억을 더듬어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의 쓸쓸함과 회한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윤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그곳에서 현우는 윤희가 남긴 일기와 그림을 통해 17년 전의 과거와 윤희의 삶 속으로 빠져든다. 이제 한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그때 그 시절과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리고 반추하면서 그리고 윤희가 자신에게 남기고 간 선물을 통해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갈 힘을 얻는다.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윤희가 남기고 간 이 마지막 편지를 통해 그 사랑의 깊이를 헤아리면서 현우는 비로소 자신의 청춘과 사랑을 저당 잡히게 했던 그 시절과 그 자신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심 되살려 영화 오래된 정원은 잘 알려져 있듯이 소설가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자신이 80년 5월 광주를 직접 경험했고 방북 등의 대외 활동으로 인해 수감 생활을 해야 했던 저자의 생생한 체험과 진지한 사색에 의해 탄생된 역작이다. 그래서 소설 오래된 정원은 시대와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 고통스런 시절을 겪어 내면서 가슴 속에 사연과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묵직하게 담겨 있다. 거기다 저자 특유의 힘 있고 유려한 문체와 유기적이고 서사적인 구성이 더해져서 이야기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이에 비해 영화 오래된 정원은 두 주연 배우의 성숙한 연기에 의해 캐릭터는 생생하게 빛을 발하지만, 원작소설이 주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깊은 울림과 이해는 다소 부족하다. 이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소설을 2시간 내외의 영화로 만들 때 핵심적인 플롯 중심으로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각색을 거치면서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전작들에서 보여준 감독의 예리한 풍자와 연출력이 뭉툭해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픈 역사라는 무거운 소재를 들고 대중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고민을 해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주인공들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의 선택이 보다 적절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금의 젊은 세대들, 특히 과거의 역사를 잘 모르는 십대들에게는 이런 영화를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또한 특정한 시대와 사회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늘 사건보다는 그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보여주었던 감독의 관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더불어 사람들이 망각해버린 것들에 대해 자꾸만 환기시키려는 감독의 노력과 진심도 살아 있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임상수 감독은 그간의 냉소적인 관찰자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따뜻한 온기를 뿜어낸다. 살아 있노라면 언젠가는 영화 종반부에 중년의 아버지 현우와 윤희의 당당함을 쏙 빼닮은 딸이 눈 내리는 거리에서 조우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17년 동안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살았던 딸 은결(이은성)은 원망이나 눈물이 아닌 신세대다운 쿨한 태도로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우리 자주 만나죠, … 아버지.” 은결의 이 한마디에 현우는 그간의 모진 세월이 할퀴고 간 가슴의 상처들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윤희가 험한 시절을 살아 내면서 현우의 외로운 인생에 남겨 준 귀한 선물 ‘은결’. 감옥에서의 세월을 버티며 힘겹게 살아남은 현우에게 이 감격적인 순간과 은결의 존재는 남은 인생을 살아갈 이유가 될 것이다. 젊은 현우와 윤희의 아버지, 삭발한 윤희 그리고 딸이 나란히 등장하는 윤희의 그림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살며시 손을 잡는 마지막 장면은 가슴 뭉클함을 자아낸다. “인생은 길다”는 윤희의 말처럼 살아 있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는 따스한 위로를 넌지시 건네고 있는 것이다. *영화정보 제 목 : 오래된 정원 감 독 : 임상수 출 연 : 지진희, 염정아 관람등급 : 12세 관람가 제작연도 : 2007년
Q1. 휴가 관련 규정 개정으로 유산 또는 사산한 경우 유산·사산휴가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합니다. A1 교원휴가업무처리요령(교원정책과-1181, 2007. 3. 8)에 따르면 임신 16주 이후 유산 또는 사산한 경우로서 교원이 신청하는 때에는 다음 기준에 따라 유산·사산휴가를 주어야 합니다. 다만, 인공임신중절수술(「모건보자법」제14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한 경우는 제외)에 의한 유산의 경우는 휴가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임신기간에 따른 휴가기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유산 또는 사산한 교원의 임신기간(이하 “임신기간”이라 한다)이 16주 이상 21주 이내인 경우 : 유산 또는 사산한 날부터 30일까지 (2) 임신기간이 22주 이상 27주 이내인 경우 : 유산 또는 사산한 날부터 60일까지 (3) 임신기간이 28주 이상인 경우 : 유산 또는 사산한 날부터 90일까지 ※ 참고로 1주는 7일이므로 임신 106일부터 147일까지 30일, 임신 148일부터 189일까지는 60일, 임신 190일 이후는 90일이 됩니다. ※ 휴가기간은 유산·사산한 날부터 기산하므로 유산·사산한 날 이후 일정기간이 지나서 청구하면 그 기간만큼 휴가기간이 단축됩니다. ※ 임신 16주 미만(105일까지) 기간 중에 발생한 유산의 경우는 일반병가를 허가받을 수 있습니다. Q2. 정년퇴직 예정인 교원입니다. 일반공무원은 퇴직 전 휴가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교원의 경우도 휴가가 없어진 것인지 궁금합니다. A2 퇴직준비휴가의 경우 일반공무원은 2006. 1. 1부터 폐지되었으나, 교원의 경우 그대로 적용됩니다. 즉, 「교육공무원법」제47조에 의한 정년퇴직과 「교육공무원법」제36조에 의한 명예퇴직을 할 교원은 퇴직예정일 전 3월이 되는 날부터 퇴직예정일 전일까지 퇴직준비휴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명예퇴직 시 퇴직준비휴가는 「국가공무원명예퇴직수당지급규정」또는 「교육공무원명예퇴직수당지급에관한특례규정」에 의하여 명예퇴직수당 지급대상자로 결정되어 그 통보를 받은 날의 다음 날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