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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수업은 준비가 반… 예비 토론문부터 자료수집 카드, 토론 계획표 등 작성해야 토론자는 전 과정 논술문 작성, 과제로 제출 나머지 학생은 토론 과정 메모해 점수 부여 영국 의회의 특징을 반영해 찬성과 반대 측을 호명하며 중간에 확인 질문을 던질 수 있어 역동적 구성이 가능한 의회식 토론은 찬반이 격해질 수 있어 시간 관리가 중요하다. ■ 토론 수업의 계기 1. 떠드는 아이들 때문에 수업을 못하겠어요=교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아이들이 내 수업을 듣지 않고 떠든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수업 계획을 멋지게 하고 들어가 뭔가 하려하면 아이들은 언제나 떠든다. 아이들이 떠들면 집중할 수가 없고 떠드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다 보면 어느 부분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조차 까먹을 때가 있다. 심지어 떠드는 아이들이 미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에 서 보면 건강한 아이들은 떠들게 마련이다. 생각이 있는 아이들은 떠든다. 그것은 새가 노래하듯이 시냇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정적이 흐르는 교실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 떠드는 아이들 때문에 수업이 되요=토론은 아이들을 마음껏 떠들게 하기에 좋은 활동이다. 물론 토론의 규칙과 절차에 따라 떠들어야 하지만 수업시간 50분 내내 침묵하거나 간단한 단답형의 질문을 하던 아이들의 가려운 입이 해방되는 시간이다. 토론활동을 하면서 평소에 소극적이고 얌전한 줄 알았던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 또한 큰 수확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하고 싶은 말이 많고 수능의 선택지 안의 적절한 반응으로 수렴될 수 없는 훨씬 다채롭고 풍성한 생각을 하고 있다. 2. 수준 차가 나는 아이들 때문에 수업을 못하겠어요=대부분의 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수준별 수업은 그 실제적인 효과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와 성찰 없이 확대 시행되고 있다. 수준별 수업은 비슷한 성적의 아이들이 모여 있을수록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기에 편리하게 구조화된 면이 있다. 좀 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수준에 따라 정해진 진도를 나가는 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수준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아이들끼리 모여 있으면 수업분위기는 어떠할까? 교사의 헌신과 애정으로 모자라는 그 부분이 채워지리라는 기대는 너무 낙관적이다. -> 수준 차가 나는 아이들 때문에 수업이 살아납니다=토론의 모둠을 구성할 때 교사가 가장 배려해야 하는 부분은 다양한 아이들이 고루 섞이게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성적뿐만 아니라 교우관계, 성격, 발표력, 책임감 등을 1학기 때 두루 살펴 두었다가 아이들과 함께 토론 모둠을 구성한다. 6명 혹은 4명이 한 모둠이 되어 토론활동을 준비할 때 아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파악해 책임감 있게 순서를 나누어 맡는다. 자료조사를 잘 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상대방의 논리의 흐름을 꿰뚫고 반박을 잘 구성하는 아이, 큰 소리로 발표를 잘하는 아이, 수줍어 하지만 모둠 내의 분위기를 띄워주는 아이 등이 서로 어울려 토론을 준비한다. 아이들의 활동 후기를 보면 일과 중에 토론 준비를 하기가 어려워 한 아이의 집에 모여 1박을 하며 열심히 준비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약간의 유흥활동을 하며 친목을 다지기도 했겠지만 아이들이 서로 모여 밤늦게 까지 토론연습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순간이다. ■ 토론의 속성: 경쟁과 협력 1. 은근히 경쟁을 즐기는 아이들=토론은 전형적인 경쟁적 말하기의 유형이다.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서로 자기주장의 옳음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대방 주장의 논리적 오류나 허점을 지적하고 자신의 주장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치열한 갈등 상황은 오히려 문제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하게 함으로써 정확하고 비판적인 현실인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이와 같은 경쟁적 상황을 싫어할까? 아니다. 토론의 일종의 지적인 게임으로 청중이 된 아이들은 날카롭고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 아이들에게 “와”하며 반응을 보이고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 안타까워한다. 또한 토론에 참여한 아이들도 쟁점이 극명하게 대립되는 경우일수록 더욱 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가 할 말을 메모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2. 우리는 공동 운명체 맞죠?=토론은 승패가 있는 게임이다. 찬성 측과 반대 측은 각각 협력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최대한의 객관적이고 신뢰성 있는 정보를 모아야 한다. 토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으며 토론을 하는 과정 중에도 잠시 갖는 작전시간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점검하고 상대측 주장의 논점에 반박을 구성하면서 협력하게 된다. 또한 상대측의 질문을 받고 대답을 못해 당황하는 아이가 있을 경우 같은 팀의 학생들은 메모를 전달해 그 아이의 발언을 도와주고 응원해 준다. ■ 토론 수업 준비하기 토론 수업은 준비가 반 이상이다. 논제와 토론 모둠이 구성되면 아이들은 본격적인 토론준비에 들어간다. 교사는 최소한 1주 이상의 시간을 주어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배려하며 중간 중간에 점검을 해서 학생들의 필요에 반응해야 한다. 학생들의 준비절차는 다음과 같다. ① 찬성 3명, 반대 3명이 모여 예비 토론문(자료조사 없이 자유토론하며 쟁점 찾기)을 작성한다. ② 개인당 자료수집카드를 2개 이상 만든다. ③찬성, 반대가 각각 모여 토론계획표(본 토론에 대비해 전략회의)를 작성한다. ■ 토론 진행하기 토론의 형식과 절차가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에 대한 교사의 설명 이후에 학생들은 토론의 형식을 선택해 토론을 진행한다. 하나의 형식으로 진행할 수도 있으나 6명씩 모둠을 구성하게 되면 한 반에 6모둠 정도가 나오기 때문에 다양한 형식을 이용해 토론을 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① 의회식 토론 : 영국 의회의 특징을 반영해 수상과 각료, 야당 당수와 의원으로 찬성과 반대 측을 호명하며 중간에 확인 질문을 던질 수 있어 역동적인 토론구성이 가능하다. ② 교차질문식 토론 : 미국 전국 토론대회 방식으로, 토론자들 간의 교차질문을 가미하여 토론자들의 직접적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③ 칼 포퍼식 토론 : 비판적 사고, 자기표현,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의 자세를 길러주기 위해 만들어진 방식으로 쟁점별로 찬성과 반대의 질의가 오고 갈 수 있다. 토론 진행을 도와줄 도우미 학생을 한 명 선정하거나 교사가 간단한 진행을 맡아 원활한 흐름을 돕는다. ■ 토론 평가하기 토론자들이 토론을 하는 동안 나머지 학생들은 판정관이 되어 토론 과정을 메모하고 토론자에 대한 점수를 부여한다. 토론이 끝나면 판정단의 점수를 걷어 승패를 발표하고 교사가 토론의 전반에 대한 평가를 한다. 청중이 된 아이들도 판정관 이름 옆에 자신의 사인을 하게 되면 책임감을 느껴 신중하게 점수를 매기려고 노력한다. 또한 우수토론자를 추천할 수 있도록 하면 비록 토론에서 지더라도 개인별로 노력한 성과를 얻을 수 있어 위로가 된다. 토론자들은 토론 이후에 토론과정을 반영한 논술문을 써서 최종 과제로 제출하게 된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게 되는데 이 과정은 종합적 사고를 길러줄 뿐 아니라 학생의 태도교육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 다음 회는 서울 양강중 김선일 선생님의 체육 수업입니다.
교육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교육과정이 바뀌었어도 국어 교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교사는 교과서를 읽어나가며 내용을 설명하고, 학생들은 이를 받아 적는다. 학생 중심의 수업 방법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지속되기 어렵다. 학생들은 학교 공부가 실생활과 떨어져 있어 재미가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학습 참여가 낮다. 안팎의 환경이 학생 중심의 학습을 막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되고 있는 이 선생님의 토론 수업은 의미가 크다. 이 선생님은 국어 교사로서 학생 중심의 교실 학습 방법을 탐구하고 실천하는 연구가이자 실천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토론 수업의 이론을 탐색할 뿐만 아니라 이를 교실에 적용하여 새로운 토론 수업 모형을 개발하고 있다. 국어 교실의 토론 수업이 학생들에게 ‘토론을 가르치는 토론 수업’이 될 뿐만 아니라 ‘토론을 활용하는 토론 수업’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 선생님의 토론 수업에서는 일단 학생들이 말문을 연다. 학생들의 학습 참여도가 높다. 이것은 토론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이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다. 학생들은 토론을 위하여 여러 시간을 준비한다. 토론 주제가 결정되면 자료 수집 카드를 활용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예비 토론문, 토론 계획표 등을 작성하여 토론에 임한다. 토론을 마친 다음에는 토론 평가표, 토론 소감문 등을 통하여 전 과정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사실 토론 수업은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쉬운 과정이 아니다. 토론 수업의 준비와 실행이 힘들지만, 교사와 학생들은 토론 과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 현실에서 토론 수업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더라도 하나의 대안이 되는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과서 해설식 국어 수업을 넘어서려면, 지속할 수 있는 새로운 수업 방법에 대한 교사의 연구와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토론 수업에서 대안을 찾고 있는 이 선생님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그 결과가 우리 국어 교실에서 의미 있게 지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경북 문경에 중등 교육 과정의 영어대안학교가 설립된다. 1일 문경시에 따르면 충북 음성에서 영어특성화 대안학교인 글로벌 비전 크리스천 스쿨(Global Vision Christian School.GVCS)을 운영하고 있는 글로벌교육선교회는 문경시 영순면 3만6천㎡ 부지에 GVCS 문경캠퍼스를 설립키로 했다. 글로벌교육선교회는 해외 조기 유학에 따른 경제적 문제나 가족 해체 문제를 줄이고,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영어특성화 대안학교를 설립키로 했다고 밝혔다. 선교회측은 내년 3월께 GVCS 문경캠퍼스를 착공해 2010년 2월까지 완공한 뒤 학생을 모집해 3월부터 학교를 운영할 방침이다. 선교회측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이 있는 음성 본교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문경캠퍼스를 설립키로 했으며, 문경캠퍼스가 완공되면 본교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 중 한 개의 과정을 분리해 문경에서 운영키로 했다. 이와 관련해 선교회 관계자는 "음성과 문경 어느 곳에 중학교나 고등학교 과정을 둘 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분리한다는 것은 결정이 됐다"고 설명했다. GVCS 문경캠퍼스는 450명 가량의 학생과 교직원 70명으로 구성되고, 국사 등 일부 과목을 제외한 대부분 수업이 영어로 진행된다. 글로벌교육선교회는 오는 5일 문경시와 이 같은 내용의 양해각서에 서명할 예정이다. 문경시 관계자는 "음성에 있는 학교 졸업생들이 미국 대학에 입학하는 등 성공적인 교육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며 문경캠퍼스도 이에 준해 운영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주몽의 후예 실크로드 여행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비행기를 타고 100일 동안의 여행을 위해 푸른 지붕의 모스크가 가득한 타슈켄트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만난 일본 배낭족을 통해 저렴한 홈스테이에 짐을 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거리는 온통 티코, 마티즈를 비롯해 대우자동차의 물결이었다. 현지에서는 ‘우즈베키스탄 대우’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데, 다른 나라에 비해 우즈베키스탄에 수입 차가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자국 차 보호를 위해 수입 차에 엄청난 세금을 물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타슈켄트에서 출발해 사마르칸트에서는 레기스탄 광장, 하하라에서는 미나렛 탑, 히바에서는 노을에 물드는 올드 타운을 보며 감동을 받았지만 역시 여행의 묘미는 현지 사람들을 만나는 데 있다. 우즈베키스탄 전역에 한국 드라마 ‘주몽’이 방영 중이라 제키 찬보다도 주몽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주몽 그림이 들어간 장난감과 옷이 드라마의 후광을 업고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인사가 “주몽!”이다. 경찰을 만나도 드라마 얘기에 신분증 검사는 뒷전이었다. 어떤 현지인들은 드라마를 통해서 일본의 만행을 보고 일본을 싫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보고 즐긴 것으로 끝났을 텐데 여행을 통해서 문화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이번 우즈베키스탄 여행이 블루모스크의 유혹에서 시작됐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랄 해(Aral Sea)를 보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서쪽까지 가야 하는 인내가 필요했다. 생태 파괴로 말라가는 아랄 해의 비극 짐 반, 사람 반으로 가득 찬 미니버스는 한 시간 반을 달려 허름한 ‘모이나크’ 마을 입간판을 지나 멈췄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랄 해를 보는구나!’ 하는 감탄도 잠시, 미니버스 기사는 간판도 없는 초라한 2층짜리 건물 앞에 내려주었다. 그곳에 들어서니 할머니 한 분이 오느라 고생했다며 차를 내오셨다. 호텔 앞의 을씨년스러운 건물들과 털털거리며 지나가는 차, 모든 것들이 지금 내가 여행을 하고 있는 건지 착각하게 만들었다. 모이나크까지 오느라 너무 고생을 해서 낮잠부터 자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곳이 좋은 건, 여느 여행지 같지 않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정말 순수한 사람들이 여행객을 순수하게 대했다. 모이나크까지 오는 데 자기네들은 짐하고 뒤엉켜 앉아 왔지만, 손님이라고 운전사 옆 로열석까지 내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녘에 바닷가(현재는 사막으로 변해 있다)로 향했다. 사진에서 보았던 녹슨 배와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모이나크는 1970년대까지 섬이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작 정부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물이 필요했고, 아랄 해로 들어오는 두 강(우즈베키스탄-아무다리야 강, 카작-수르다리야 강)을 막았다. 강물은 아랄 해로 흐르지 못하고 밀밭과 목화밭, 각종 공장에 쓰이고 있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던 아랄 해의 물이 감소하면서 인근 최대의 항구도시였던 모이나크는 해안선으로부터 150㎞나 밀려난 폐허의 도시가 됐다. 이곳에는 황폐한 흙과 눈처럼 내려앉은 하얀 소금기, 거친 풀만 남아 있었다. ‘배들의 묘지’라고 부를 만큼 여기저기에 녹슨 배들이 방치돼 있기도 했다. 아랄 해가 주는 것으로 먹고살았던 사람들의 삶 역시 달라졌다. 대부분이 어부였던 모이나크 주민들은 한순간에 일터를 잃었고 식량이 없어 하루하루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저수지 물을 떠서 소독도 하지 않은 채 마시는가 하면 물이 마르면서 생긴 소금바람으로 인해 관절 사이에 소금이 껴 노인은 물론 20~30대 젊은이들도 류머티즘을 앓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환경파괴였다. 실제로 그곳에 있을 때 상당히 건조했고 그로 인해 기관지가 아파 왔었다. 최대의 항구도시에서 물조차 귀해진 모이나크 예전에는 물속에 잠겨 있었을 작은 언덕에 올라서 아랄 해의 석양을 감상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는 투숙객이 아무도 없었다. 2층 복도가 너무 무서워서 화장실(공동화장실)은 내일 낮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삐걱거리는, 어쩌면 20여 전에 년 어느 선원이 하루 일을 마치고 잠을 잤을 그 침대에 오늘은 내가 외로운 여행객이 되어 모이나크에서의 첫 밤을 보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삐거덕거리는 침대 덕에 잠을 설쳤더니 아침부터 온몸이 쑤셨다. 여느 도시에서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동네를 둘러보았다. 흙집이 즐비한 주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학교 주위를 뛰고 있는 초등학생들, 하릴없이 집 앞에 나와 있는 사람들, 연신 ‘Hello’를 외치는 코흘리개 아이들이 보였다. ‘문화의 집’안에 자리한 ‘모이나크’ 박물관을 찾아가는 길. 길가 건물에 그려진 고기와 갈매기 그림들을 보고 이곳이 한때 어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열심히 우물물을 긷던 소녀가 렌즈에 들어왔다. 힘겹게 물을 퍼올렸지만 물은 가녀린 소녀의 손목만도 못하게 졸졸 나왔다. 이 우물물을 주변 수십 명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가뭄이 얼마나 심했으면 우물물조차 말라갈까. 박물관(입장료는 기부금, 사진 : 1000숨) 문은 잠겨 있었는데 관리자가 와서 열어 주면서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벽면 가득한 풍경화들과 어느 소련 사진가가 1970년대 찍어 둔 사진으로 아랄 해의 번성했던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수십 개의 통조림 공장과 수많은 어부들이 이곳에 살았지만, 지금은 한 개의 공장도 남아 있지 않고 인구도 그 당시에 비해 5분의 1로 줄었다. 최근에는 아랄 해 서쪽에 유전이 개발된다고 해서 외지인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좀 멀어서 지나가는 차를 잡았는데, 운전사의 말이 며칠 전 한국에서 온 기자 세 명을 아랄 해 바닷가까지 태워다 주고 300달러를 받았는데, 왕복 약 8시간 걸리고 거리는 편도 약 180㎞라고 했다. 정말 말라도 얼마나 말랐기에 20여 년 전 바닷가가 그리 멀어진 건지…. 사진기를 들고 마른 아랄 해로 갔다. 1인 시위라도 하듯 물고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낚싯대를 드리우는 사진을 찍었다. 내일 아침이면 이곳을 떠난다. 그렇게 와 보고 싶었던 아랄 해. 바닥에 오랫동안 앉아서 아랄 해를 바라보았다. 너무 건조한 탓인지 목이 칼칼하고 피부도 푸석푸석해졌다. 그래도 아랄 해를 2박 3일 동안 보고 가는 것은 기쁨이었다. 미래에는 물 때문에 전쟁도 할 거라는데, 아랄 해가 그 전초전을 보여주는 게 아닐는지 벌써부터 지구촌에 사는 사람으로서 걱정이 앞섰다. 저녁엔 이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 아주머니를 만나려고 했으나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못 만났다. 이렇게 쓸쓸한 곳에서 아주머니는 뭘 하시는 걸까. 이번 여행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여러 도시에서 한국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한국인에게 큰 정을 느꼈다고 했다. 뉴스에서는 악덕업자들의 횡포로 가슴에 큰 멍을 안고 돌아간 외국인 노동자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의외였다. 행여나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만났으면 손가락질을 받았을 텐데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준 한국의 마음씨 좋은 사장님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낯선 외국에서의 오랜 배낭여행을 하면서 항상 중요시하는 게 있다면 나 자신이 민간 외교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들 느끼는 것이지만 나 하나로 내 조국 한국이 칭찬받고, 또 폄하된다는 것을 다른 여행자들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아직은 한국이 세계인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느꼈고 또 한 번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그동안 부족한 여행기를 읽어 주신 새교육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남은 한 해 잘 마무리하시고 못다 한 여러 곳의 여행기를 함께하실 분은 네이버 블로그(blog.naver.com/russiana)로 놀러 오세요.끝 ---------------------------------------------------------------------------------------- Tip 1. 매년 한 달 동안 무슬림 나라에서 라마단이 시작되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낮에 문을 연 식당 찾기가 힘들다. 중앙아시아 무슬림 나라에서는 라마단 규율을 잘 지키지 않지만 중동 지역에서는 잘 지키고 있다. 이 기간에는 결혼도 안 한다. 왜냐하면 낮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우즈베키스탄은 교통편과 도로 사정이 비교적 좋은 편인데 서쪽으로 갈수록 상황이 안 좋다. 중고 버스보단 좀 느리지만 기차를 권한다. 혹시 아랄 해를 볼 생각이 있다면 우즈베키스탄 쪽보다는 카자흐스탄 쪽 아랄 해가 더 멋있다.
교권은 학생의 인권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한다. 특히,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유네스코의 ‘교원의 지위에 관한 권고’ 68조에서도 ‘교원은 전문직상의 책임 문제에 대해 불공정한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며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결정권을 인정하고 있다. 옛선현들은 ‘스승은 은인 중의 은인’이라며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 번째는 스승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강조하는 의미로서 ‘그림자조차 밟지 말아야 한다’이고 두 번째는 ‘그림자’를 스승의 올바르지 못한 허상(虛像)으로 여겨 스승의 나쁜 점을 배우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스승이 나쁜 그림자를 드러내게 되면 제자는 그것을 밟으며 따라가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도(師道)로서 사람이 사람을 참되게 가르친다는 것은 그 어느 일보다도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8년 오늘의 한국 사회는 스승에 대해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보호받아야 할 교권(敎權)이 침해되면서 ‘스승의 그림자’가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몇 년 전 충북의 모 초등학교에서 학부모들이 학교에 몰려가 집단으로 항의하는 과정에서 여교사가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필자 역시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교사가 학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최근 이처럼 전국적으로 학생과 학부모에 의한 부당한 교권 침해 행위가 급증하고 있다. 교권 침해 사건이란 학생, 학부모, 동료 교원, 교육행정기관이 학교 교육활동과 관련하여 교원(敎員)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교육할 권리와 사회·윤리적인 권위 또는 교원의 전문적 권위를 침해, 무시하는 행위로 인해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특히 학생과 학부모에 의한 교사의 교육권 침해와 관련한 사건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면서 현장 교원의 사기가 갈수록 저하되고 있어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매우 시급한 실정이다. 교사에게 폭언하고 대드는 학생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할까? 학생과 학부모는 이런 교사의 심정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교사 입장에서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폭행이나 모욕을 당했을 때의 영향은 일반적인 하극상(下剋上)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사제(師弟) 관계라는 특성상 제자가 갑자기 폭언과 폭행을 가했을 때, 교사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교권이 침해당하게 되면, 교사는 학생들을 지도해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치명타여서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에 취약해질 수 있다. 실제 2008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년 교직생활의 만족도는 떨어지고 있으며,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교사들이 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교육전문가들은 교사의 교권 추락이 교사의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수업의 위축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권 침해 사건을 예방하려면 무엇보다 각 교육주체들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학생, 학부모, 교사의 권리가 상호 간에 균형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각 교육주체들이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권리(교권), 학생의 권리(학생 인권), 학부모의 권리(교육 참여권)를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는데, 현재는 각자 일방적 주장만 있을 뿐, 사실상 대화와 협의가 전무한 실정이다. 따라서 각 교육주체의 권리와 의무를 구체적으로 알리고, 사회적 대협약을 이루어 내야 한다. 부모의 학교교육 참여가 활발한 교육선진국에서는 ‘부모의 권리장전’이 만들어져 부모의 권리를 정확하게 규정해서 홍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학부모회, 학교운영위원회 등을 통해 학부모의 권리가 학교교육과 교육행정에서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교육의식의 대전환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 교권은 학생의 인권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한다. 특히,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유네스코의 ‘교원의 지위에 관한 권고’ 68조에서도 ‘교원은 전문직상의 책임 문제에 대해 불공정한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며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결정권을 인정하고 있다. ‘권리 위에 잠자고 있는 자의 권리는 보호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교권 역시 교사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 수업능력, 학생지도능력, 연구성과 향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교권침해행위는 그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교사의 인권뿐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권도 침해하기 때문이다. 교권은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와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진정한 교권으로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교원단체, 교육부와 시·도교육청, 학부모단체 등 각 교육주체들이 이제는 열린 마음으로 민주적 대화와 토론을 통해 교육공동체 복원을 위해 다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교과부, 국사편찬위 ‘서술방향’ 바탕으로 수정 추진 ----------------------------------------------------------------------------------------- ◇ 서술방향 요지 - 대한민국은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밝힌다 - 북한정권의 성립과 변화과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 6·25전쟁이 북의 남침으로 시작됐음을 명확히 한다 - 현 정부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다 ----------------------------------------------------------------------------------------- 좌편향 논란에 선 검정교과서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한국근현대사’ 과목이 탄생하고, 2003학년도부터는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가 발행되어 고등학교 2·3학년이 이를 선택 과목으로 배우고 있다. 정부의 ‘한국근현대사 교육 강화’ 취지와 맞물려 간행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종전 국정 ‘국사’ 교과서보다 내용 요소가 풍부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쟁점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은 2004년 10월 4일 국회의 교육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권철현 전 의원이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검정교과서를 좌파적 편향성이 심각하다고 주장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2005년 1월 정치학자, 경제학자, 원로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교과서포럼’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이 교과서의 내용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내용의 오류와 관점의 편향 등 여러 문제를 제기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교과서포럼뿐 아니라 여의도연구소, 상공회의소 및 정부 부처에서 ‘한국근현대사’를 검토하고, 그 의견을 교과부에 제출했다. 정권 교체가 이뤄진 후 교과서의 좌편향 논란은 더욱 커졌다. 지난 10월 6일 교육과학기술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여당 의원들은 좌편향 부분의 즉각 수정을 요구했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나라다. 좌파 세력들에 의해 이뤄진 교과서 편향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폐해와 해악은 나라의 존망까지 위협할 정도이기 때문에 연내에 개정 절차를 거쳐 당장 내년부터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병만 교과부장관은 답변을 통해 “교과서 일부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해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며 “잘못된 부분은 수정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안 장관은 또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의 올바른 역사관을 가르치도록 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있다”며 “정사(正史)가 근현대사로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교과부는 이미 7월 24일 국사편찬위원회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6종에 대한 분석을 의뢰해 놓고 있었다. 10월 15일 마침내 국사편찬위의 보고서가 교과부에 도착했다. 국사편찬위의 분석 대상 교과서는 금성출판사(김한종 외 5인), 대한교과서(한철호 외 5인), 두산(김광남 외 4인), 법문사(김종수 외 3인), 중앙교육진흥연구소(주진오 외 4인), 천재교육(김흥수 외 5인) 등에서 펴낸 것으로 2008년 발행된 것을 기준으로 했다. 국사편찬위는 교과서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바람직한 교과서 서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중도적 성향’을 가진 학계 중진 10명으로 ‘한국사교과서심의협의회’를 8월 1일자로 발족시켰다. 10명의 면면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을 비롯해 전공별로 한국사 통사 1명, 한국전근대사 1명, 한국근대사 1명, 한국현대사 1명, 동양사 1명, 서양사 1명, 역사교육 1명, 경제사 1명 등이다. 이들은 산하에 교과서 분석 실무를 담당하는 ‘교과서심의소위원회’를 운영했다. 소위원회 위원은 편사기획실장과 근현대사 전공 연구자 6명, 업무담당자 1명으로 꾸려졌다. 국사편찬위는 교과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역사교과서의 서술 방향을 제언한 이유로 “국가 수준에서 학습 평가가 시행되는 교육현실을 고려할 때 교과서별로 교육내용과 수준에 커다란 편차가 나타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역사 해석의 편향성을 피하고 교과서 내용의 타당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일정한 범위에서 서술 방향 제시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가이드라인 국사편찬위는 구체적인 교과서 서술 방향으로 ‘개관 12개항’, ‘단원별 서술 방향 37개항’ 등 모두 49개항을 제시했다. 서술 방향, 즉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의 ‘가이드라인’인 셈이다. 교과부는 “이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교과서 수정·보완을 추진하겠다”고 화답했다. 10월 말 교과서 발행사에게 수정권고(안)을 제시하고, 11월 말까지 수정·보완을 마무리한다는 일정도 밝혔다. 국사편찬위는 ‘개관’에서 교육과정 및 교육과정이 제시한 정신을 충분히 반영하여 서술하고, 학문적 접근과 아울러 교육적 관점도 고려할 것을 요구했다. 연구자들 간에 서로 해석을 달리하는 내용일 경우는 학계에서 널리 인정하는 이른바 정통적인 학설을 수록토록 했다. 또 특정 이념이나 역사관에 편향되지 않고 우리 역사를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게 서술하도록 주문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경우에는 각각의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를 균형 있게 제시하고, 우리 역사의 주체적인 발전과정을 중시하며 민족사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을 갖도록 한다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국사편찬위는 특히 역사적 사실의 표현이나 용어 등은 ‘교육과정’과 ‘교과서 편수자료’를 따르고, 교과서에 인용된 그림·도표·과제·토론자료는 최근 데이터를 사용하며 최대한 객관성과 균형성을 유지하도록 당부했다. ‘단원별 서술 방향’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제시를 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발전’ 단원 서술 시에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정부를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설명한다”고 명시했다. 우리 현대사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서술한 문제의 교과서를 바로잡자는 취지가 들어 있는 대목이다. “이승만 또는 이승만 정부의 역할 서술 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한 긍정적인 면과 독재화와 관련한 비판적인 점을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때의 독재정치와 민주화 운동을 서술하면서 그 배경에 대하여 함께 설명한다. 북한 정권의 성립과 변화 과정을 사실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북한 사회의 비판적인 면도 함께 서술한다. 북한 자료를 인용할 때는 체제 선전용 자료에 유의하여 신중을 기한다” 등 남북문제 서술의 균형을 중시했다. 이 밖에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을 통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발전해 나간 점, 대한민국이 성취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점도 서술토록 했다. 6·25전쟁과 관련해서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UN군 참전과 중국군의 개입 등 국제적인 전쟁으로 확산되면서 3년 동안 이어져 심각한 인적·물적 피해가 있었음을 설명하라고 했다. 단원별 서술 방향 가운데 ‘근대사회의 전개’와 ‘민족 독립운동의 전개’에 대한 부분은 앞 페이지에 제시한 바와 같다. ‘편향성’ 없는 교과서 나와야 위의 서술 방향에서 볼 수 있듯이 국사편찬위는 보수단체 등에서 문제를 삼았던 교과서 속 표현들에 대한 세세한 코멘트는 제시하지 않고 원론적 수준에서 언급했다. 이는 교과서 문제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차가 매우 큰 사안인 데다가 이미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내용에 대해 국가기관이 나서 조목조목 수정 요구를 하는 것은 검인정 체제를 흔드는 것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아직까지 각 교과서의 최종 수정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교과부의 수정요구에 대해 집필자의 반발도 컸을 것이다. 국사편찬위의 서술 방향 제시와 관련해 심은석 교과부 학교정책국장은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에 ‘장관은 내용 수정이 필요할 경우 저작자에게 수정을 명할 수 있게 돼 있다’고 돼 있다. 대한민국 정통성, 바른 역사관을 정립하자는 취지이므로 집필진도 동의해 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리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달부터 인쇄에 들어가 내년 3월부터 우리 고교생이 사용할 교과서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또한 산고(産苦) 끝에 나오는 이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과연 편향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 ■ 근대사회의 전개 *흥선 대원군이 추진한 내정 개혁의 내용과 목적을 설명하고, 세계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대외 정책의 한계도 함께 서술한다. *개항 이후 국가가 추진한 ‘위로부터의 근대화 정책’과 국민이 추진한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운동’을 균형 있게 서술한다. *갑신정변의 성격에 대해서는 ‘정변’부터 ‘부르주아 혁명’까지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나 학설적 규정보다는 주도 세력이 지향한 사회의 성격과 실패한 이유, 이후 전개되는 국제적 대립의 격화를 통해 공과에 대한 평가를 균형 있게 서술한다. *갑오·을미개혁에 대하여 시기별로 추진 주체, 성격, 내용, 지향점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서술한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민란’, ‘전쟁’, ‘혁명’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함에 유의하며, 당시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농민이 추구한 사회 모습을 사료, 사진, 지도를 통하여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탐구할 수 있도록 서술한다. *대한제국은 각 나라의 주권을 인정하는 ‘만국공법’에 기초하여 건국되었기 때문에 국제법으로 인정된 자주독립국가임을 강조한다. 아울러 광무개혁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 근대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서술한다. *아관파천 이후 독립 협회의 성립 배경과 활동 내용을 국내외 정세와 연관하여 설명한다. 또한 독립 협회와 대한제국은 국내외 주요 쟁점에 대해 상호 대립·협조하는 양면성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일제의 침략에 맞선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를 의병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이라는 두 흐름으로 정리하되, 두 계통 운동이 서로 대립하는 등 차이점도 있음을 서술한다. *개항 이후 외국 상인의 상권 침투에 밀려 몰락하는 조선 상인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경쟁을 통해 성장해 간 경우도 있었다는 긍정적인 면도 함께 서술한다. *1890년대 후반 이후 열강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여 전개된 경제적 구국운동을 강조하여 서술한다. *간도 귀속 문제와 간도 협약의 내용을 설명하고, 간도 협약은 일본이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사용하여 체결하였음을 서술한다. *대한제국이 관보를 통하여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한 사실, 독도 영유권을 부정했던 일본이 러·일 전쟁 때 독도를 불법적으로 편입한 사실 등 독도의 역사 및 독도영유권 문제에 대하여 최근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기술한다. ■ 민족 독립운동의 전개 *일제 강점기 동안 ‘근대화’나 ‘자본주의화’가 일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왜곡된 식민지 공업화로 나타나 오히려 광복 이후 한국사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하여 서술한다.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조선총독부의 토지 수탈도 이루어졌지만, 동양척식 주식회사나 일본 민간 자본의 토지 매입과 고리대를 구실로 한 기만적인 토지 약탈도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서술한다. 일본인 농장에서 조선 농민들은 불안정한 소작권과 과도한 소작료 등으로 생활이 크게 위협받았음에 유의한다. *3·1 운동의 배경을 민족자결주의 등 외인을 강조하는 경향과 민족의 주체 역량 등 내인을 강조하는 경향을 모두 고려하여 서술한다. *3·1 운동의 연장선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과 역사적 의의를 서술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결성하고, 중국 관내 민족 운동 세력을 통합하였음을 유의하여 서술한다.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을 서술함에 있어, 자의적으로 특정 계열을 정통 노선으로 설정하고 다른 노선은 민족 운동 범주에서 제외하거나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켜 서술하는 태도는 지양하고 균형 있게 서술한다. *3.1 운동 이후 국외 각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 운동은 당시 국제 정세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세계사의 조류 속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서술한다. *1920~1930년대 전개된 다양한 무장 독립 투쟁의 전개 양상을 특정 이념에 편향되지 않게 공평하게 서술한다.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합작하여 신간회를 결성하고, 비타협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서술한다. *1905년 이후 일제의 탄압과 경제 수탈이 심해짐에 따라 국외로 이주한 동포들이 독립 운동에 참여한 사실과 이들이 겪은 수난을 함께 서술한다.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 민족 자본의 형성, 전근대적인 사회 관습의 타파, 근대적인 문화의 본격 수용 등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되, 한계성도 아울러 지적하여 서술한다. *문인과 예술가 중에는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민족문화 전통의 계승과 발전에 노력한 인물도 있었으나, 일제 말기에 친일에 앞장섰던 사람들도 있었음을 지적하여 서술한다.
과거 우리나라에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국가를 지탱하는 힘은 바로 건강한 국민들에게서 나온다는 말이다. 때문에 당시에는 학교체육이 강조되었고, 심지어는 대학 입시에서까지 ‘체력장’이라는 체력검정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체력관리는 학교가 아닌 개인이 하는 시대가 되었고, 가끔씩 신문기사를 통해 접할 수 있듯이 5~6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체력검사에서 오래달리기를 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빈번해 이제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오래달리기조차 함부로 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중국 정부는 학생들이 입시에만 매달리게 되면서 체력이 떨어지고, 정서적으로도 황폐해져 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한다는 인식 아래 2007년부터 각급 학교에서 체육교육 및 예술교육을 강화하도록 했다. 학교 체육교육의 강화는 2007년 중국 정부가 발표한 ‘청소년 체육 증가를 통한 청소년 체질 증강에 관한 의견’을 통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 의견에 따라 중국 정부는 청소년들의 체력 강화를 위해 전국적으로 ‘국가학생체질건강표준’을 제정하고 ‘전국의 억만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활기찬 체육활동’을 확대 실시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매일 1시간씩의 체력 단련시간을 확보하는 동시에 다양한 학생 체육 활동 모임을 개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학생들의 체력 증진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학교 체육활동 강화는 지난해 가을, 베이징 올림픽을 맞이하는 장거리 달리기 행사로 확대되었고, 올해도 동계 장거리 달리기 대회를 전국에서 실시하기로 했다. 2008년 9월 22일 교육부, 국가체육총국, 공청단(共靑團)이 공동으로 발표한 ‘제2회 전국 억만 학생 활기찬 체육 동계 장거리 달리기 활동 방안에 따르면 장거리 달리기 활동은 강인하고 건강한 신체를 위한 행동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이해 동계 장거리 달리기 활동으로 청소년들의 의지를 다지고, 양호한 신체단련 습관을 배양해 학생들의 체력, 특히 인내력을 높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동계 장거리 달리기 활동의 슬로건은 지난해의‘활기찬 체육활동으로 올림픽과 함께 하자’에서 ‘활기찬 체육활동으로 조국과 함께 하자!’로 바뀌었다. 참가 대상은 전국의 초·중·고 및 대학생들로 초등학교는 5·6학년 학생이다. 활동시간은 2008년 10월 26일부터 2009년 4월 30일까지 약 6개월간으로, 이를 위해 지난 10월 26일 베이징에서는 장거리 달리기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 전국적으로 같은 날 동시에 이 활동이 시작됐다. 장거리 달리기 활동은 학교 교육활동 계획에 포함되어 각 학교의 정규 체육교과, 아침체조 활동, 과외 체육활동 시간을 적절히 활용해 운영하게 된다. 학생들이 매일 달리는 거리는 초등학교 1000m, 중학생 1500m, 고등학생 및 대학생 2000m이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정규 수업이 있는 날에 매일 정해진 거리를 달려야 하고, 학교가 쉬는 날에는 학생들 스스로 집에서 훈련을 하도록 학교에서 과제로 부과한다. 학교에서는 학급별로 매일 학생들의 장거리 달리기와 관련한 내용을 기록하고 동계 장거리 달리기 활동이 끝나는 시점에 학생들이 각기 달린 총 거리를 통계 낼 예정이다. 학생들이 달려야 하는 총 거리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60의 배수로 결정되었는데 초등학생은 120㎞, 중학생은 180㎞,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240㎞의 거리를 이 기간 내에 달려야 한다. 중국 정부는 앞으로 장거리 달리기 활동의 결과에 따라 각급 학교 및 정부 단위별로 우수 표창을 실시할 예정인데, 표창은 우수 기관, 우수 반, 우수 학생, 우수 교사 등으로 나누어 실시되며, 우수 학생으로 표창을 받은 경우 학생생활기록부에 이 사실이 기재되어 대학 진학에 참고가 되도록 했다. 이번 동계 장거리 달리기 활동은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것으로 이번 활동을 위해 소후사이트(sunnysports.sohu.com)에 이와 관련한 전용 공간까지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지난해부터 예술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예술교육의 강화는 2007년 교육부가 발표한 ‘중·소학 예술교육활동 강화와 개진에 관한 의견’을 통해 전국에 하달되었는데, 초·중·고 예술교육활동은 학생들의 인지와 심리 발달을 목적으로 추진되며 이 활동은 학교의 학급이 중심이 되어 교과 및 방과 후 활동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특히 학교에서는 예술교육활동을 학교 교육과정 계획에 포함시켜 매주 일정한 시간에 예술교육활동을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예술교육활동의 강화와 관련한 이번 조치와 더불어 정부에서는 그동안 기승을 부렸던 사교육에서의 예술교육 및 이를 통해 획득한 예술 기능 인증서가 학교에서 수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상급학교 진학 시 참고자료로 활용되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그동안 예술교육에서의 사교육이 지나치게 과열됐던 현상에 대한 정부의 조치인 동시에 그동안 사교육시장에서 유행했던 예술 등급 시험 응시 열풍을 잠재우기 위한 정부의 의지 표현이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사설기관에서 주관하는 각종 예술 수준 등급 시험이 유행했고, 여기에서 획득한 성적 및 등급은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는데, 이번 조치로 이러한 일은 불가능하게 됐다. 이러한 학교 예술교육활동의 확대·강화를 위해 중국 정부는 최근 전국의 초·중·고에서는 예술교육과정 평가계획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학생들의 예술 능력을 학생기록부에 기입하며, 학생들의 발전 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중요 내용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상급 학교에 올라가는데 있어서의 참고 자료가 되도록 했다. 중국 교육부가 2008년 9월 25일 발표한 ‘초·중·고 예술교육을 강화하는 것에 대한 의견’에 따르면 모든 초·중·고에서는 ‘의무교육과정’에 명시된 예술교육 시간을 반드시 준수하도록 했다. 현행 중국의 의무교육과정에는 총 교육과정의 9~11%(857~1047시간)를 예술교육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번 교육부의 지시로 조건이 비교적 괜찮은 학교에서는 의무교육과정에서 총 수업시수의 11%에 달하는 시간을 예술교육을 위해 사용하고, 형편이 어려운 학교에서도 최저 9%에 미달하지 않도록 했다. 이 같은 학교에서의 예술교육 강화를 위해 조건이 비교적 잘 갖추어진 지역의 학교에서는 전문적인 예술 관련 교사를 배치해 수업을 진행하고, 그렇지 못한 지역에서는 겸직 교사나 순회 교사를 통해 예술 수업을 담당시키도록 해 예술 담당교사의 부족을 해결하기로 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 정부는 향후 예술교과 담당 겸직 예술 교사 양성과정의 개설을 통해 예술교사를 양성하는 동시에 순회교육, 이동수업, 거점연계 등의 방식을 통해 예술교육을 강화할 예정이다. 이처럼 최근 중국에서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몰입해 체력이 저하되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되고 있는 청소년들을 위해 건전한 신체와 정신을 길러 주는 학교 예체능교육을 활성화하는 데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낙선해 뉴딜정책을 펼 수 없었다.” 아니다. 당선된 루스벨트는 후보 때 구상한 뉴딜(New Deal)을 중심으로 대공황 타개에 전력을 쏟았고, 결국 공항을 극복하고 미국은 다시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가 낙선했거나 법원의 위헌결정 등 이런저런 이유로 뉴딜정책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면 미국은 언제 공황에서 벗어났을까? 과연 미국과 세계가 공황을 극복할 수나 있었을까? W. G. 하딩의 급서로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을 이끈 C. 쿨리지 대통령은 이른바 ‘쿨리지의 번영’을 자랑했다. 쿨리지 시대의 전설적 번영은 주식시장 성장을 살펴보는 것으로 족하다. 주가는 천정부지로 올랐고 증권거래소에 드나들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쿨리지는 “미국이 해야 할 일은 경제 활동뿐이다”라고 자랑했다. 미국은 본격적 대량생산 - 대량소비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급성장한 자동차 산업은 도로망의 건설을 촉진했고 철강·유리·고무 공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당연하지만 국제교역에서의 미국의 지위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어떤 나라도 미국의 경쟁국이 될 수 없었다. 고작 7개월 뒤면 닥쳐 올 대공황을 상상도 못한 H. 후버는 대통령 취임연설(1929)에서 “우리의 국토는 자원이 풍부합니다. 풍광이 아름답습니다. 거기에 수백만의 행복한 가정이 있습니다. 안락과 기회로 충만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그러나 갑자기 내습한 ‘대공황’으로 남북전쟁 이후 최대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29년 10월 21일에 이어 24일(검은 목요일)에 주식가격이 폭락하고 뒤이어 월가(街) 전체를 강타해 29일(공포의 화요일)에는 50여 개 주요 주식가격이 평균 40% 급락했다. 투자자들과 그들에게 돈을 빌려 준 채권자들은 물론 은행도 견디지 못해 파산하기 시작했다. 미국발 공황으로 많은 나라가 곤경에 처했지만, 패전의 잿더미에서 허우적거리던 독일을 제외하고는 미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1929~1932년 사이에 미국의 산업생산은 47%나 감소했다. 전체 노동인구의 1/3에 달하는 16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1929년에 1000억 달러가 넘던 국민총생산이 1933년에는 550억 달러밖에 안 될 정도로 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많이 늘어난 미국의 산업생산은 전후에 오히려 더 증가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 전쟁 채무국의 구매력은 크게 감소했다. 거기에다 공산품의 수출이 감소된 채무국이 금(金)으로 전채(戰債)를 지불하면서 금값이 폭락했고, 결국 ‘과잉생산 - 조업 단축 - 실업 - 저생산 - 물자 부족’의 악순환의 경제공황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소련의 저가 공산품도 공황을 확대시켰다. 수많은 실직 노동자와 파산한 농민이 불을 끄고 일당을 벌기 위해 워싱턴 주의 아름다운 산야에 고의로 불을 지르기도 했다. 후버가 자랑한 행복한 수백만 가정의 잠자리는 공원의 벤치로 바뀌었다. 최악의 해인 1932년 여름에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 2만 5000명이 걷거나 지나가는 차에 편승해 무작정 워싱턴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자리를 찾기는커녕 잠자리조차 얻을 수 없었다. 무일푼의 떠돌이 무리가 도시와 농촌의 거리를 메웠다. 가장은 가족과 함께 펜실베이니아 길가의 빈집을 찾거나 강변에 판잣집을 지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유랑할 수 있는 서부 전체의 땅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을 찾아서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국도는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도로변의 도랑 둑에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뒤에도 이동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1939)의 한 구절이다. 경이로운 경제성장, 안락과 무한한 기회로 충만했던 미국은 갑자기 6000명의 숙련공을 모집하는 러시아의 한 구인광고에 10만 명이 넘는 취업희망자가 몰려드는 나라로 전락해 버렸다. 미국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감마저 잃게 되었다. 영국은 거국연립내각을 수립하고 영국연방 제국과의 특혜관세협정과 무역협정(오타와협정, 1932)을 중심으로 하는 블록(Bloc)경제로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려 했다. 프랑스 역시 사회당 중심의 인민전선내각이 혼신의 노력으로 공항을 극복해 나갔다. 반면 파시즘 체제인 데다 국내시장이 좁고 식민지가 없던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은 이웃 나라들을 식민지로 희생시켜 대공황에서 탈출하려 했다. 대통령에 취임하던 1933년 3월 4일에도 은행의 파산을 목격해야 했던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며 불퇴전의 용기와 결의를 과시했다. 39세에 앓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가 마비된 신체적 악조건에도 3선 대통령이 되고(1940),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당선돼 미국 역사상 유일의 4선 대통령으로 기록되어 있는 루스벨트. 확고한 신념과 단호한 태도로 경제적 회복은 물론 국민의 자신감과 희망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한 그의 모든 정책의 밑바탕은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뉴딜’은 루스벨트가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연방 정부의 활동 영역을 확대해 단행한 경제적 구조 및 산업·농업·재정·수력·노동·주택의 개혁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뉴딜정책은 구제(Relief)와 부흥(Recovery)은 물론 개혁(Reform)을 포함했기 때문에 흔히 3R 정책이라고 부른다. 루스벨트는 그처럼 구호·복구·개혁의 목표 아래 일련의 입법 및 행정 조처를 통해 공황에 대처했는데 정책 추진에 필요한 법률은 대통령 취임 100일 안에 거의 다 제정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취임 다음 날 금(金) 거래를 중지시킨 후 ‘은행의 휴일’을 선언했다. 그리고 3월 9일에 정부가 지불능력이 있는 은행을 지원하고 재조직해 영업을 재개할 수 있게 하는 ‘비상금융법’을 의회에 제출했고, 상·하원은 그 법안을 통과시켰다. 뉴딜정책의 최우선 과제 중의 하나는 거대한 실업인구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었다. 정부가 단기원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임시 일자리를 마련하고 건설 사업을 일으켰으며 젊은이가 국립 산림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공사업국(WPA)과 민간식림치수대(CCC)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기업과 농촌을 부흥시키기 위해 국가부흥국(NRA)에 기업 활동·임금·노동시간·어린이 노동·집단계약 등을 통제해 산업규약을 만드는 권리를 부여했다. 농업과 농민을 지원하기 위해 1933년에 농업조정법(AAA)을 제정했다. 곧 연방 정부가 개입해 농업생산량을 조절하고 과잉생산물을 정부가 매입하되 농민으로 하여금 계획 생산하게 해 공급과 수요를 조절하려 했다. 이어 전국산업부흥법(NIRA)을 마련해 산업부문 전반의 생산조절과 최저가격을 정하게 했다. 물론 거기에는 고임금과 실업자 구제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뉴딜정책은 또한 1929년의 그것과 같은 주식시장의 붕괴 및 그에 따른 은행파산을 막기 위해 재정 체계를 통제했다. 즉, 연방예금보험조합(FDIC)은 연방 준비제 회원 은행들의 예금 지급을 정부가 보증할 수 있게 했고 주식시장의 부정거래로부터 공적 자금을 지키기 위해 증권거래위원회(SEC)를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연방 정부는 테네시강계곡개발계획(TVA)을 통해 전력 부문에도 개입했는데, 그 계획은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자를 구제하는 것 외에 7개 주에 걸쳐 값싼 전기를 공급하고 홍수를 막았으며 관개(灌漑)를 개선하고 질산칼륨비료를 생산할 수 있게 했다. 테네시 강의 여러 지류에도 댐을 건설하는가 하면 약 8000㎞의 송전망을 가설해 인근 지역에 값싼 전기를 보급했다. 그것은 지역 개발의 필요성 및 가능성과 함께 공공사업의 타당성을 입증한 것이었다. 관개와 홍수 조절 등 치수, 전력 개발, 관광자원 개발, 일자리 창출 등 다목적 TVA는 주지하듯이 후일 개발도상국 국토 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1935년에 이르러 뉴딜정책의 중심은 노동자를 비롯한 도시민을 지원하기 위한 조처들로 옮겨갔다. 1935년의 ‘와거너법’(WA)은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한 위에 산업 부문에서의 연방 정부의 권능을 크게 증대시켰으며 노동쟁의조정국(NLRB)을 세워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향상시켰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정노동기준법을 제정해 일부 산업에서 최대 근로시간과 최소 임금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기존의 직능별 노동조합인 미국노동자총동맹과 별도로 산업별 노동자회의를 새로 조직해 노동자에 대한 지원과 노동자의 복지 향상을 기했다. 뉴딜정책 중 가장 넓은 범위에 걸친 것은 1935년과 1939년에 제정된 사회보장법(SSA)인데, 그것은 연방 정부가 65세 이상의 노인에게 적절한 금액의 은퇴 수당을 지급하고 실업자 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비롯해 빈곤자·불구자·무능력자·과부 등을 구제할 수 있게 했다. 1935년 이후 제정된 법률 중에는 연방 준비제도 강화를 위한 은행법, 일자리를 창출해 고용을 확대시키기 위한 긴급구제금법 등도 있다. 또한 그동안 지원에서 소외된 주택소유자를 지원하기 위한 법률이 만들어져 저당설정을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주택개량이나 저당금을 위한 은행융자를 보장했다. 즉, 도시민이 저당 5년 후 다시 저당할 수 있는 기금 마련을 위해 만든 주택소유자대부법을 제정하고 중산층의 주택 개선을 지원하기 위한 연방주택관리국을 설립했던 것이다(1934). 하지만 뉴딜정책은위헌 시비에 시달렸다. 특히 ‘산업부흥법’은 대법원의 위헌 결정으로 적잖게 위축되었다. 헌법상 산업을 통제하고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할 권리가 연방 정부에게 없다는 것이 위헌 판결의 근거였다. 뉴딜정책의 모든 조처들의 합법성을 믿은 루스벨트는 1937년 초에 법원의 재조직을 제의했지만 격심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법률들을 제정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세력 등의 저항에도 뉴딜정책은 공항을 점차 극복해 갔고, 따라서 국민적 지지를 얻어 갔다. 뉴딜정책은 결국 미국으로 하여금 공황을 극복하게 했고 루스벨트는 1936년 선거에서 압승했다. 그것은 자유경쟁 및 개인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미국적 이념에서 벗어나는 통제 정책이었고 국가가 재화의 분배에 관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맹목적 자유경쟁을 지양했을 뿐이지 완전한 국가 통제 체제는 아니었고 따라서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규정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그것은 재화의 합리적 분배를 통해 피라미드형 부자 - 빈자 구성 형태를 다이아몬드형의 그것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뉴딜정책은 위헌 시비에 이어 실패한 정책으로 보는 평가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곧 경기를 침체시켜 공황을 장기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빈부차를 격화시켰고 TVA도 예산만 낭비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공황을 이긴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뉴딜정책이 공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에 탄력을 부여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위법성 시비에 말려 비틀거렸거나 그것의 여러 조처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미흡했을 경우 미국과 세계는 대공황의 고통을 더 오래 겪어야 했을 것이다. 작금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짓누르기에 새삼스레 뉴딜정책을 되짚어 보았다.
가슴과 머리에서 손으로 당연한 이야기에 대해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하나는 무 반응이요, 다른 하나는 놀라움이다. 반응이 없는 사람은 그저 지나가고 놀라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는다. ‘글은 손으로 쓴다’는 말도 그렇게 엇갈리는 반응을 가져오리라. 자율신경계의 활동은 대개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심장의 박동, 폐의 호흡, 장기들의 연동운동, 눈 깜박임 등은 그 운동을 의식한다는 것이 오히려 몸에 이상이 있다는 증좌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일 또한 그러하다. 손으로 펜을 잡고 글을 쓰면서, 혹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손의 동작이나 움직임을 일일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인다. 그런 움직임이 반복되고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글을 쓴 종이를 들고 읽고 검토하고 교정을 한다. 한데 정작 그러한 일을 손으로 한다는 생각은 깊이 하지 않는 편이다. 손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글의 소재는 가슴으로 온다. 가슴으로 온다는 말은 감동으로, 충격으로 온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아침에 문득 보니 단풍이 깨어질 듯한 빛깔로 물들었다. 드디어 가을인 것이다. 공연히, 나도 모르게 ‘아!’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면 그게 감동이고 충격이다. 결혼 날짜를 잡아 놓은 소방관이 진화 작업 중에 목숨을 잃었다. 젊디젊은 얼굴을 검은 리본으로 두른 채 사람들의 절을 받는다. 결혼을 앞두고 남편감을 잃은 여성의 들먹이는 등 뒤로 삶의 슬픈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가슴에 짠한 소금물 같은 느낌이 차오른다. 이렇게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창작의 소재가 된다. 가슴으로 온 소재는 손으로 정리된다. 가슴을 치밀어 오르는 소재라도 그것을 손으로 정리해야 글이 된다. 얼개를 짜든지, 개요를 작성하든지, 아니면 그런 사전 절차가 귀찮아 일단 원고지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손으로 글을 써 가는 중에 틀이 잡히고 생각이 정리된다. 한 번 생각한 것을 고치고 다듬을 수 있다는 데에 글쓰기의 매력이 있다. 시간의 수레바퀴에 매어 돌아가는 인생은 지나가면 되돌릴 수가 없다. 그런데 글은 써 가는 중에 얼마든지 되돌리고 다른 플롯을 짤 수 있다. 치달리는 생각을 곱씹어 되돌려 놓고 이야기 가닥을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은 손으로 작업하는 중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이 잘 안 풀리는 경우 우리는 방 안을 바장이며 배회를 하기도 하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면서 공상에 잠기기도 한다. 습관에 따라서는 ‘붓방아를 찧고’ 앉아 있기도 한다. 연필이나 펜대의 뒤끝으로 책상을 툭툭 치면서 생각을 거듭하는 경우, 그런 표현을 쓴다. 그런데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다른 생각이 떠올라 앞의 생각을 지우면서 얼크러진다. 결국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의 실타래에 내가 얽히고 만다.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이 가뭇없이 지워지고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 놓는 것인데!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은 것을 뉘우치게 된다. 그런데 심장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다른 머리로 흘러가면서 넘치고 너울지던 생각은 손으로 정착되지 않는 한 그저 안개처럼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감동이니 충격이니 놀라움이니 하는 것들은 물론이고,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각을 손으로 적어 놓아라. 글은 손으로 쓰기 때문이다. ‘고기를 잡았으면 그물은 잊어버려라’ 하는 말이 있다. 한자로 득어망전(得魚忘筌)이라고 한다. 꼭 그럴까? 고기를 잡은 경험을 지혜로 살리자면 그물을 잊을 게 아니라 다시 살펴야 한다. 내 손으로 글을 쓴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음미하는 가운데 글은 손으로 쓴다는 말의 진의를 깨닫게 된다. 글을 쓴 다음에는 손을 정갈하게 씻고 다시 시작할 일이다. 손을 주제로 한 바리아시옹 글을 쓰는 당신의 손은 창조의 손이다. 글을 쓰든, 다른 일을 하든 우리는 손의 존재를 잊고 지낸다. 일단 안심이다. 손을 늘 의식해야 한다면 손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내 존재의 근원을 늘 의식해야 한다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존재 근거가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 불안과 회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의 존재를 잊고 지낸다. 창조의 손을 잊고 지내더라도 이따금은 그 존재를 의식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들어 보라. 손등에는 핏줄이 퍼렇게 살아 지나간다. 어렸을 때는 보송보송한 피부 밑에 보일 듯 말 듯한 핏줄이 서늘한 그림자처럼 지나갔는데, 어느새 핏줄이 굵어지고 일을 하면서 불끈거려 그런지 핏줄이 불거져 있다. 거기다가 나이를 좀 더 먹으면 피부는 번질번질하게 되고 핏줄이 고목나무 뿌리처럼 손등을 질러 지나간다. 그야말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손가락 마디에는 언제 생긴 것인지 주름이 제법 굵게 앉았다. 손가락을 구부리고 펴는 데는 뼈의 움직임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손마디에 주름이 생기는 것은 의당 그래야 한다. 그런데 그 주름이 너무 굵어 손 전체를 볼품없게 만든다. 손등이 그런데 손가락 마디가 홀로 깨끗하란 법이 있던가. 안타까운 일이다. 손가락 끝에 손톱이 연분홍으로 장식되어 있다. 손톱은 장식이 아니라 사실은 무기이고 유용성이 높은 도구이다. 손톱 없는 손가락을 생각해 보라. 쓸모를 떠나서 얼마나 밋밋하고 단조로울 것이며 무감각해 보이겠는가. 대개는 손가락에 손톱이 이어져 자라는 데에 뽀얀 초생달 무늬가 잡힌다. 이 무늬를 어른들은 ‘쌀알’이라고 했다. 손톱 밑에 쌀알이 크게 들면 식근(食根)을 한다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먹고사는 데 걱정을 안 해도 되는 복을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손톱이 건강의 표징이니 먹을 것 걱정 않는 근본은 되는 셈이다. 손을 젖혀 손바닥을 들여다보라. 손이 접히면서 자국이 생기고 그 자국이 손금이 되었다. 관상가들은 손금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이야기한다. 목숨을 좌우한다는 생명선, 지혜의 크고 작음을 가리킨다는 두뇌선, 그리고 감정선, 성공선, 운명선 등 복잡한 선들이 크고 작은 길처럼 손바닥에 흩어져 있다. 손금은 변한다고 한다. 관상가들이 말하는 운명은 결정적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가는 대강(大綱)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어떻게 운영하는가, 어떤 경험을 축적해 왔는가 하는 데 따라 손금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손바닥 밑에는 푸르스름한 실핏줄이 지나간다. 거기 내 유년의 맑은 강물이 아직도 그윽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손가락 안쪽 끝에는 손가락마다 지문이 새겨져 있다. 태극무늬 비슷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작은 실뿌리가 얽힌 것 같은 것도 있다. 동심원의 물무늬가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놈은 소용돌이가 되어 휘돌다가 한쪽으로 매끄럽게 빠지기도 한다. 주민등록을 만들기 위해 동사무소에 갔는데 일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지문이 닳아 버려 ‘지문 없는 사람’이 되어 돌아온 그는 강소주를 마시며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한 열흘 쉬고 오라”는 동사무소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내 팔자가 그렇게 한가하지를 못하다며 쓴 침을 삼키고 돌아섰다고 한다. 창조의 손은 그 모양부터가 녹록지 않다. 손 이야기를 하자고 해도 하루는 족히 할 수 있으리라. 당신의 손은 창조의 원천이며 창작의 원동력이다. 손, 하는 일이 많아 고생이라 어떤 일을 두고 애썼다는 이야기를 할 때 “수고했다”고 한다. 한자어 ‘수고(手苦)’를 떠올리기 쉬운데, 순 우리말이다. 아무튼 수고란 말을 들을 때 손의 고달픔을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듯하다. 손은 내 삶의 역사를 담고 있다. 내 삶의 고비에서 이루어졌던 각종의 기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손에 남은 상처는 지난날의 어떤 일을 떠올리게 한다. 내 엄지손가락 안쪽 아래편에는 까만 흑연(黑鉛) 자국이 남아 있다. 고등학교 때 교복 호주머니에 연필을 거꾸로 꽂은 것을 잊고 어깨에 묻은 먼지를 떨다가 찔린 상처다. 왼손에는 여기저기 칼로 베고, 낫날이 지나간 자국이 남아 있다. 행동이 부잡스러운 데 원인이 있기도 하고 어른들 일하는 것을 보고는 덤벼들어 호기를 부리다가 생긴 상처들이다. 여러분 손의 작은 상처들,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 손가락에 낀 반지 그런 추억이 구석구석 서려 있다. 오늘날까지 해 온 일들이 오늘 내 손 모양을 만들었다. 글을 쓰는 것은 내 삶의 역사를 쓰는 일이다. 지금 글을 쓴다면 그것은 내 미래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 역사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 일을 손으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손은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사물이 소통하는 감각기관이다. 세상에는 만져 보아서 아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여름 시냇물에 손을 담갔을 때, 매끄럽게 흘러가는 그 감촉은 피부에 스며 핏줄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가을 물은 싸늘한 감각으로 손을 에며 스며들어 정신을 쇄락(灑落)하게 한다. 봄에 얼음이 풀린 밭에 나가 흙을 파고 씨앗을 뿌릴 때 그 흙의 부드러운 감촉은 농부의 생의 감각과 연결된다. 손끝을 가시에 찔렸을 때의 그 아찔한 통증은 가시라는 것의 보편 상징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가시밭길, 형극(荊棘)의 길을 이해하는 보편 감각은 그렇게 형성된다. 냇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손에 잡힌 미꾸라지나 뱀장어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찌릿함과 느끼함은 생명에 대한 양가적인 감각으로 연결된다. 송창식의 노래 ‘한 번쯤’에 나오는 “말 한 번 붙여 봤으면, 손 한 번 잡아 봤으면” 하는 구절에 이르면 손은 사랑의 소통을 매개하는 통로가 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는 경우는 자신과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계기이다. 기도의 몸짓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아마 손을 모으는 게 아닌가 싶다. 상대방의 안녕과 무사를 기원하는 인사 또한 손을 모으는 방법이 활용된다. 손은 성스러움을 지향하는 기도의 수단이다.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는 곧 글을 쓰는 자세이다. 모든 글쓰기를, 창작을 기도하는 자세로 해내기는 대단히 어렵다. 너무 부담을 주게 된다. 그러나 기본적인 자세는 그러해야 한다. 불가에서는 합장(合掌)으로 인사를 한다. 손을 모으면 두 손 사이에 성스러운 공간이 형성된다. 단학(丹學)이나 기공(氣攻)을 수행하는 이들이 손을 모아 단전 아래 편안하게 놓고 숨을 고르면 그 손안에 기가 가득 고인다는 이야기를 한다. 글 쓰는 자세는 기도를 하는 자세, 기 수련을 하는 자세, 공손한 인사를 올리는 그런 자세이다. 꼭 그래야 한다는 식의 억압적 강제를 하고 싶지는 않다. 몰두해서 글을 쓰는 시간, 나는 글쓰기 이외의 아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법열(法悅)의 시간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현실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문득 깨닫게 된다. 그러할 때 잠시 손을 모으고 쓴 글에 대해 감사의 묵상을 해 보라.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거기 글을 쓴 기쁨이 가득 고이는 실감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손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손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첫째는 손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많은 글감을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다음으로는 글은 손으로, 온몸으로 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글을 쓰기 위한 창작의 재료는 우리들 오관을 통해 몸으로 들어가 모이고 안에서 성숙되어 손으로 흘러나와 글이 된다. 흔히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사고하고, 몸으로 행동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행동은 근육운동적(Motor-sensorial) 표현을 연상하기 쉽다. 그런데 정서의 변화, 사상의 전환, 신념의 개조 등은 행동인가 아닌가. 글쓰기에서 논의되는 행동에는 심리-정신 영역의 모든 변화를 포함한다. 정신노동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육체의 노동 가운데는 정서노동, 지성노동 등이 모두 포함된다. 창작은 그런 의미의 노동에 해당한다. 그러한 노동의 환유적 표현이 글은 손으로 쓴다는 것이다.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신체 감각이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실현된다는 뜻이다. 달리 생각하면 감각과 사고와 논리가 손끝을 타고 나와 종이 위에 일정한 형태의 글로 구체화된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메모지에 옮기는 것부터가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다.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은 장기기억으로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손을 통해 글로 기록을 해야 내용이 오래 보존된다. 글은 논리적 관계로 구성된다. 시도, 소설도, 수필도 한 편의 글마다 논리적 구성을 갖추기 마련이다. 논리적 구성, 즉 글의 얼개를 짜기 위해서는 적어 놓고, 단락의 위치를 바꾸고, 그렇게 바꾼 위치가 적절하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록된 자료를 다시 보아야 한다. 그저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구조를 매만지고 그 매만진 것을 재배열하는 중에 논리적 구조는 완결성을 갖추게 된다. 창작의 과정은 사고를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가을볕이 좋아 들로 나갔다. 벼가 누렇게 익은 볏논에 메뚜기들이 후두둑튀어 날아올라 달아난다. 이러한 메뚜기를 묘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메뚜기의 모양새, 날아갈 때 날개의 빛깔, 날아가는 모습 등을 묘사하는 낱말을 찾고 선택하는 일이 우선 과제가 된다. 문장을 완성한 후에는 그 문장을 다시 손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문장과 어울리는 문단인지를 판단해야 하고, 예를 든 것이라든지 메뚜기와 연관된 기억을 떠올린 것이 글 전체와 적절히 어울리는지 등의 판단을 해야 한다. 이때 손으로 써 놓은 문장들이 검토의 대상이 된다. 요컨대 가을 들판의 메뚜기는 글을 쓰는 그대의 손에 모이고 날아가고, 되돌아오기를 거듭한다. 글은 그렇게 손을 통해 구체화된다.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은 짙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영국군이 점령한 프랑스의 ‘칼레 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나선 시민들 여섯 사람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 것이다. 침중한 고뇌와, 들끓어 오르는 애국심으로 호소하는 무언의 항변, 나라의 운명에 대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현기증, 모든 체념 끝에 도달하는 평온함으로 시의 열쇠를 들고 있는 인물의 엄숙한 표정 등 어느 하나지나치는 인물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가운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속으로 오열하는 인물은 손에 가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손이 다른 인물의 얼굴 그 이상의 표현 효과를 가져온 것을 보고는 로댕의 천재성에 놀랐다. 손으로 인물의 개성이 드러나는 조각을 위해 수많은 손을 예비적으로 조각한 사실 그 성실성에 다시금 놀랐다. 로댕의 손이 만든 손들, 거기 엉겨 붙은 함성이며, 그 손으로 전해져 오는 떨림, 몸부림 등은 실로 놀라운 예술적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조작가의 손이 창조의 손이듯이 작가의 손 또한 창조의 손이다. 조각이나 글쓰기나 창조는 형상화이다. 형상화는 구체화의 예술적 방법이다. 손으로 쓰고, 다듬고, 버리고, 되불러오고 하는 과정은 전신적(全身的) 감각의 예술 활동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부지런한 손에서 나온다. 상상력마저도 손이 부지런한 사람의 정신에서 피어난다.
1 한국 논쟁사(論爭史)에 두고두고 뒷이야기를 남긴 것 중에 1963년도의 ‘사형제도 찬반’에 관한 논쟁이 있다. 당시 유력한 저널이었던 동아춘추(東亞春秋)를 통해서 찬성 반대 주장이 몇 번씩 오가면서, 지식인은 물론이고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논쟁이었다. 5·16 군사혁명 직후 상당히 경직된 분위기에 대한 지성계의 암묵적 반발 정서가 일조를 한 탓일까. 논쟁은 상당한 활기를 띠었다. 이 논쟁 주제는 이후 논술시험의 과제로도 더러 출제되어 오늘의 우리에게는 상당히 진부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논쟁 주제 자체가 상당히 진보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사형제도 찬성 주장을 편 사람이 천주교의 사제인 윤형중(尹亨重) 신부이고, 반대 주장을 편 사람이 현직 법관인 권순영(權純永) 판사였다는 점이다. 사회 일반의 통념으로 보면, 종교인인 신부는 사형제도의 존속을 반대할 것 같고, 법을 집행하는 법관은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할 것 같은데, 이 논쟁에서는 우리들의 통념에 반하여 논쟁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두 분 논쟁 당사자들은 소신과 철학이 투철했다는 것을 엿보게도 한다. 논쟁은 윤 신부가 ‘처형대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흉악범에 대한 사형의 당위성을 동아춘추 1962년 12월호에 기고한 것에 대해서 권순영 판사가 반박의 글을 동아춘추 1963년 1월호에 게재하면서 시작됐다. 이것을 다시 윤 신부가 반박하고, 그것을 다시 권 판사가 대응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두 사람 모두 당시 한국 최고의 엘리트 지성을 표상하는 존재였으므로 이 논쟁이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만만치 않았다. 이미 대한민국이 주시하는 논쟁이 되고 말았으므로 당사자들도 상대에게 밀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입가경의 경지가 펼쳐졌다. 반박을 당한 윤 신부가 권 판사를 재반박한다. 그는 매우 실감 나는 리얼리티를 살려서 그럴 법한 상황을 상정한다. 이래도 권 판사는 사형 제도를 반대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을 던지는 셈이다. 그런데 그 상황 예시가 예사롭지 않다. 윤 신부가 쓴 글의 그 대목을 줄여서 인용해 본다. 권 판사의 활동으로 우리나라의 사형이 전폐되었다고 가정하자. 권 판사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문제의 본모습이 더 잘 드러나고 더 실감 나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건을 상상해 본다. 권 판사의 아버지는 정의파에 속하는 양심적 인물이다. P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자는 불량한 인물이다. P는 남의 큰 재산을 가로채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권 판사 아버지의 협력이 필요하다. 여러 번 청해서 회유를 해 보지만 권 판사의 아버지는 끄떡도 않는다. P는 자기의 뜻을 이루려면 권 판사 아버지의 협력이 있든지, 아니면 권 판사 아버지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P는 권 판사 아버지를 죽여 버릴 결심을 하고 기회를 노린다. 독살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납치를 계획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P는 여러 차례 자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어느 무더운 여름 밤 일본도를 들고 담을 넘어 권 판사 아버지의 방에 들어섰다. 인기척에 놀라 깨어난 권 판사 아버지를 난자(亂刺)하여 죽여 버렸다. P는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아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무슨 고역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방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P는 돈을 많이 예치하여 놓고 날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청하여 먹는다. 그렇게 소일한다. P는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지도 않는다. 도리어 가끔 소리를 높여 말한다. “내게 협력해 주지 않은 그놈(권 판사 아버지)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린 것은 통쾌한 일이었다. 하하하, 나는 내 명대로 살 것이니 이것은 참 통쾌한 일이다. 나라에 경사라도 생기면 감형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출옥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말이 권 판사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다. 교도소 옆을 지날 때 권 판사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 동아춘추 1963년 2월호 - 윤 신부의 상황 설정이 참으로 묘해서 권 판사의 반론 글이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권 판사가 동아춘추 편집장에게 보낸 글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참으로 심중했다. 권 판사가 보낸 글을 그대로 소개해 본다. 편집장에게 나는 윤 신부의 사형에 관한 글에 대하여 논평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의 의견대립으로서의 논쟁이 본론(초점)을 떠나 인신공격으로 빠지는 예를 보아왔기 때문에 나와 윤 신부와의 논쟁도 또 그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하고 적이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불행하게도 적중되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은 공개토론 할 기회가 적었던 우리 민족의 비극입니다. 나는 윤 신부가 나의 소론(所論)을 반박한 글에 대해서 다시 논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윤 신부의 저주를 받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을 자식으로서 다행하게 생각합니다. - 1963년 2월 27일 권순영 - 2 위의 논쟁에서 누가 이긴 것으로 보아야 할까. 사람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름대로 승자를 판단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칼로 자르듯 ‘누구의 승리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누가 이겼다고 보아야 할까? 상대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케 했으므로 윤 신부가 이긴 것으로 보아야 할까. 논쟁의 올바른 차원을 깨우치려 한 권 판사에게 승점을 더 주어야 할까? 그런데 이런 식의 질문이야말로 의미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어 표현식으로 하면 그야말로 난센스(nonsense)의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은 명확하다. 하나는, 논쟁의 판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사형제도 찬반에 대한 합리적 주장을 펼치고 경청할 판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씨름 경기에서 씨름판이 깨어졌는데 승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두 번째 사실, 즉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기지 못했을뿐더러 두 사람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권 판사의 불편함은 쉽게 이해가 간다. 자신의 인격과 몸(인신)이 공격을 당했으니까. 그것도 육친의 아버지가 참혹하게 당하는 장면으로 끌려갔으니까. 윤 신부인들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권 판사가 저렇게 속이 상했는데 희희낙락하는 마음이 될 수 없다. 당연히 불편하고 힘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이 논쟁에서는 이긴 사람이 없다. 논쟁을 지켜본 사람들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굳이 승자를 가리려고 한다. 아니 자신의 관점에 부합하는 사람을 승자로 만들려고 한다. 요즘 같으면 윤 신부의 글에나 권 판사의 글에 악성 댓글이 미친 듯이 달려 나갈 것이다. 논쟁이 게임의 논리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곳에 저급한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린다. 그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인격이 바로 소영웅주의라 할 것이다. 포퓰리즘의 음습한 온상이 바로 우리들 안의 악마적 공격성에서 만들어진다. 포퓰리즘에 휩쓸리기 쉬움을 경계하는 지혜는 일찍부터 있어 왔다. 대중은 어리석다는 말도 있었다. 대중이 어리석다는 말을 압도하는 말로 일찍이 민심이 천심이라는 지혜로운 명제가 있음도 잘 알고 있지만, 그 민심이 악플을 통해야만 제대로 드러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3 부메랑(boomerang)이란 것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사냥이나 전쟁을 할 때 쓰는 굽은 막대 모양의 무기를 일컫는 말이다. 부메랑을 던져서 짐승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나무에 쳐 놓은 그물에 새 떼를 몰아넣기 위해 매 대신 부메랑을 이용하기도 한다. 전쟁에서는 살상용 무기로 쓰이기도 하였다. 부메랑은 차차 발전하여 던진 사람에게로 돌아오는 부메랑이 생겨났다.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부메랑은 가벼우면서 얇고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길이는 30~75㎝, 무게는 약 340g이다. 그래서 부메랑은 던진 사람에게로 되돌아오는 무기이다. 말의 백태(百態)를 알면 사람의 백태를 아는 것이다. 인신공격은 말의 백태(百態) 중에 가장 질이 낮은 말이다. 인신공격을 하는 동안에는 가장 치열하게 말을 하고 가장 잘 공격한 것 같지만 그 피해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모든 인신공격이 예외 없이 그러하다. 그것을 깨닫는 데도 세 부류의 심급이 있다. 첫째 부류는 그래도 교양과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한 못된 말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자기혐오에 휩싸인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하는 마음에 괴로워한다.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상처받는 것이다. 그다음 부류로는 인신공격으로 인해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고 좋은 평판을 상실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자신의 인격에 실망하기보다는 주변의 인기를 잃었다는 데에 실망을 하는 부류들이라고나 할까. 마지막 부류는 인신공격 자체를 특기쯤으로 자랑스럽게 펼치고 다니다가 자기가 공격을 가한 상대로부터 열 배, 백 배의 통렬한 복수를 당하고 난 다음에 인신공격의 폐해를 아주 늦게야 깨닫는 사람이다. 물론 이렇게 평생을 살면서도 인신공격의 악마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자기가 던진 부메랑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가 쏜 독한 말의 부메랑이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어리석기는 원주민들이 아니라, 문명시대 약삭빠른 말의 재주꾼들이다. 국정감사 장면에서도 인신공격의 말이 난무한다. 민망하기 그지없는 장면들이 속출한다. 저렇게 상처들을 양산해야만 국정이 감사되는가. 무릇 모든 상처들은 원혼처럼 떠다닌다. 그래서 부메랑이 되어 원래의 발신자에게로 돌아간다. 주술처럼 들리는가. 사실 주술의 본질이란 것이 자연의 섭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말의 부메랑이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치명적이다.
바보란 밥만 축내면서 제 구실 못하는 사람 요즘 필자의 눈길을 끈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한 장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우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두루미(이지아 분)와 천재 트럼펫 주자 강건우(장근석 분) 커플, 가을 밤 정취에 취해 키스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입술과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애견 (베)토벤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괴짜 지휘자 강건우(동명이인, 김명민 분)에게 딱 걸리고 만다. “흥, 귀머거리에 백치라, 바보 커플이네. 계속해 봐….” 지휘자 강건우가 청신경 종양 때문에 청각을 잃게 될 두루미를 귀머거리로, 스스로 엄청난 음악적 천재임을 모른 채 좌충우돌하는 순수한 청년 강건우를 백치라고 비아냥거리는 대목이다. 이 대사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귀머거리+백치=바보’가 된다. 바보의 뜻을 찾아보면, 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또는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바보를 규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 볼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여하튼 통상적인 기준에 비추어 바보가 틀림없을 때 바보라는 호칭을 쓴다. 또 하나는 실제로 바보는 아닌데 비난, 조롱, 동정 같은 목적을 위해 단지 비유적으로 바보라고 부른다. 바보는 어원적으로 ‘밥’에 ‘보’가 붙은 형태라고 한다. 이때 ‘보’는 울보, 겁보, 느림보와 같이 낱말 끝에 붙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마디로 바보란 밥만 축내면서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원래의 뜻에서 어리석거나 멍청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변한 말이다. 제 구실을 못한다는 넓고 추상적인 의미가 지능이 모자란 사람이라는 뜻으로 좁혀지고 구체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자란 사람을 가리키는 말 바보의 뜻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모자람’이다. 됨됨이가 변변하지 못하고 덜된 사람을 얼간이라고 하는데, 얼간은 소금에 살짝 절이는 것을 가리킨다. 즉, 얼간이란 간이 덜 되어 맛이 엉성한 상태의 사람을 빗댄 말이다. 본래는 제대로 간을 맞추어 맛깔스럽게 절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대충 간을 맞춘 것처럼 어설프고 모자란 듯하다는 뜻인 셈이다. 얼간이는 얼간, 얼간망둥이라고도 한다. 모자람의 뜻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말로 ‘반편이’를 들 수 있는데, 지능이 보통 사람보다 모자란 사람을 가리킨다. 반편, 반병신과 바꾸어 쓸 수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반(半)’ 자체가 모자람, 온전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반편이는 열 달을 온전하게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여덟달반’이라고도 한다. 한편 말이나 하는 짓이 다부지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머저리라고 한다. 머저리와 비슷한 말로 어리보기가 있지만, 이보다 멍청이라는 말이 더욱 일상적으로 자주 쓰인다. 멍청이는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속된 느낌을 더하여 멍텅구리라고도 한다. 한 번에 낱말을 하나씩 동원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지만, 분하거나 속이 터질 때는 ‘바보 머저리 멍텅구리…’처럼 몇 개를 동시에 나열하면 감정 표현의 효과가 더욱 커진다. 육체적 결함과 정신적 결함 바보의 뜻이 정신적인 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유념하며 다시 ‘귀머거리+백치 =바보’라는 도식으로 돌아가자. 귀머거리는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는 사람을, 백치는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고 정신이 박약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백치는 바보가 틀림없겠으나 귀머거리를 과연 바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바보는 지능과 관련해서 이른바 정상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뿐,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신체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은 ‘병신’이라고 한다. 따라서 엄격히 말해 병신은 정신적인 결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자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병신이라 칭한다. 원래의 뜻에서 보자면, 여기서 ‘모자라는 행동’이란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능력을 고려한 지적일 따름이지 정신적인 측면에는 하등 해당하는 바가 없다. 육체적인 기능에 아무런 결함이 없는데도 굳이 병신이라는 욕을 한다면, 육체에 한정되는 뜻의 범위를 정신까지 확장하여 비유적으로 끌어다 쓰는 경우일 것이다. 본래 병신이란 말이 육체에 속하는 낱말이라는 증거는 이 말이 물건에 쓰일 때 확연하게 드러난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문이나 한 짝이 없어진 양말, 꼭지가 떨어져 나간 뚜껑 등 어느 부분을 갖추지 못하여 쓸모없어진 물건을 가리켜 흔히 “그건 병신이 되어 버려 이젠 못 써”라고 말한다. 물건에는 지능 같은 정신적 능력이 없기에 병신은 될지언정 죽었다 깨어나도 바보는 되려야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다 앞에서 바보의 쓰임새를 실제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 두 가지로 제시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연 일상생활에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의미로 바보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 뇌의 장애 때문에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사람을 바보라고 공개적으로 일컫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병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권이나 차별 같은 개념이 없던 옛날이라면 몰라도, 바보나 병신이란 말을 원래의 뜻으로 입에 담는 일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비유적인 의미라면 상황이 사뭇 다르다. “널 믿었던 내가 바보였어”, “이 바보야, 정신 차려”에서처럼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책망하는 진지한 쓰임새도 있는 한편, “울긴 왜 우니? 바보같이…”, “난 너 같은 바보가 좋아”에서처럼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 유쾌하고 귀여운 쓰임새도 친근하다. 나아가 ‘바보들의 행진’, ‘바보 선언’, ‘병신과 머저리’ 등 예술작품의 제목으로 쓰일 때는 사회적 환경이나 시대의 흐름에 닳거나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순박함, 혹은 상처나 아픔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기도 한다. 밥이라는 뿌리에서 가지를 친 낱말 가운데 밥만 축내는 한심한 족속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밥통’이나 ‘밥벌레’를 들 수 있다. 밥통이나 밥벌레도 바보와 뜻은 별다르지 않지만, ‘통’이나 ‘벌레’에 비하면 사람을 가리키는 ‘보’의 존재는 하늘과 땅만큼 차원이 다르다. 아마도 바보에서 인간미가 흠뻑 느껴지는 까닭은 ‘보’의 위력에 있지 않은가 한다. 바보와 영웅은 종이 한 장 차이 한반도에서 배출한 바보 가운데 가장 전형적이고 고전적이며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역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전하는 온달이 아닐까 한다. 온달은 신분이 낮고 얼굴이 못생겼으며 눈먼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는 가난한 청년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의 평가 기준은 똑같은 모양인지 별 볼일 없는 사내라는 이유로 고구려 사람들은 온달을 바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남들은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평강공주는 온달이 착하고 성실하며 힘과 지략을 갖춘 남자라고 평가했다. 곁에서 아버지 평원왕이 갖은 말로 뜯어말리는데도 온달의 잠재 능력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고 기어이 온달에게 제 발로 시집을 갔다. 온달이 왜 하필이면 남들이 바보라고 부르는 내게 시집을 오려고 하느냐고 묻자 평강공주는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서방님이 왜 바보입니까? 바보라고 부르는 사람이 바보이지요. 늙으신 어머님 봉양 잘하고, 맡은 일 열심히 하고, 남 해롭게 하지 않는 착한 분이 왜 바보입니까?” 남들의 시선을 한칼에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평강공주의 심지가 굳었기에 온달은 바보에서 영웅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온달과 평강공주 부부의 꿋꿋한 모습에서 지능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바보의 이미지를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들 부부는 바보야말로 영웅의 또 다른 모습임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바보라고 놀려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남이야 뭐라 하든 말든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해 내는 온달과 평강공주야말로 바보와 영웅은 실로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약에, 이런 바보들만 산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