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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오랜 방랑 생활 끝에 황제로 등극 몽골은 거란과 함께 동호계(東胡系)로 분류되어 중원의 한족과 반도의 사대주의자에게는 상종치 못할 오랑캐 나라였다. 그러나 원의 지배를 받는 동안 한족들은 민족차별에 불만을 느끼고 지하에서 골수중화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성리학을 완성시키는 한편, 정사 〈삼국지〉를 변조하여 유비의 촉한을 정통중화로 조작하는 공정을 진행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통치가 느슨해지자 각지에서 들고일어났고 당시 중국 남방지역에서 백련교(白蓮敎)의 홍건군이 발흥하여 반원항쟁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당시 원나라는 몽골황실의 권력다툼이 치열하였다. 몽골제국의 제4대 황제인 몽케칸의 아우 쿠빌라이가 1279년 원나라를 건국하였으나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 막내 동생인 아리쿠부카와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즈가 반란을 일으켰다. 쿠빌라이의 '유목과 농경의 조화를 통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 정면 도전한 것인데, 결국 이러한 싸움은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어 제국의 단명을 재촉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찍부터 제위 세습제가 정착된 한족과는 달리, 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제위를 꿈꾸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을 푸대접한 것은 원나라의 최대 실수였다. 또한 경제정책 실패는 철저한 푸대접을 받는 한족들로 하여금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만들어 후한의 혼란기에 황건의 난이 일어났던 것처럼 백련교라는 불교계통의 비밀결사 단체가 '홍건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홍건군에는 주원장이라는 빈농 걸인 출신의 무장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로 잔뼈가 굵었다. 당시 중국 전역을 휩쓴 무서운 역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중국 전역을 방랑하면서 걸인생활을 하였으나 이러한 생활이 나중에 주원장을 황제로 만들어준 원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방랑생활 그 자체가 그의 훌륭한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련교가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사회변혁을 위한 물리적 힘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여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강남 동부일대를 장악하고 1368년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북경)를 함락시켜 몽골인을 몽골초원으로 쫓아버렸다. 결국 주원장은 제위에 올라 명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로 시작되는 한족의 마지막 통일왕조를 이루어내었는데 명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역대 왕조와는 다른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왕조 초기 황제권 강화로 기초 다져 명나라는 강남에서 발흥하여 중국을 통일한 유일무이의 국가였다. 역대 중국의 통일왕조는 중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오다가 강남을 흡수시켜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였으나, 홍무제는 강남에서 시작해서 중원을 정복했다는 점에서 정반대였다. 또한 홍무제는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어찌 씨가 따로 있나'는 말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던 인물이었다. 시황제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왕, 한 고조(高祖)는 변방 하급 관리 출신, 수나라의 양견과 당나라의 이연, 송나라의 조광윤(절도사 출신)은 모두 중원 북방의 무장 출신이었으나 홍무제는 걸인 출신이었다. 요나라 → 금나라 → 원나라로 이어지는 오랜 이민족의 통치에서 벗어난 중국은 대명(大明)이라는 국호 하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홍무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독재체제 구축이 과제라 생각하였다. 우선 승상제를 폐지하여 6부가 자신의 통제 하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한편, 배타적 중화민족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내건 조선 길들이기에 착수하였다. 또한 국가제도의 고비용 저효율을 과감하게 수술하여 모든 것을 황제권 강화로 귀결시켰는데, 군사기관인 추밀원을 5군 도독부, 감찰기관인 어사대를 도찰원으로 고쳐서 모두 황제 직속기관으로 만들어 행정·사법·군사를 장악하였다. 군사면으로는 처음부터 과감하게 순수 징병제를 포기하고 징병제와 모병제를 절충시킨 병역제도를 채택하였고, 이를 '위소제도(衛所制度)'라 한다. 이 제도는 병농일치의 의무병제의 장점과 전투력 위주의 직업군인 장점을 수용한 것이다. 아무튼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는 걸인 출신 무장답지 않게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통치력과 행정능력을 보여 주었다. 더욱이 역대 왕조의 전통을 모방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모든 제도를 정착시킨 덕분에 이후 명나라가 무능한 황제들과 환관들의 전횡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로 버텨낼 수 있었으며 조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후계자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려 26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멀리 내쫓아 변방을 지키는 번왕으로 봉하였다. 태조 홍무제가 죽고 손자인 건문제(建文帝)가 1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에 변방을 지키면서 야망을 키워온 그의 삼촌인 연왕이 군대를 몰아 수도인 난징으로 쳐들어왔다. 물론 명나라의 안위와 황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결국 조카인 건문제는 도망가고 삼촌인 연왕이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이다. 영락제는 즉위하자마자 수도를 연경으로 천도하는 일에 착수하여 1420년 자금성이 완공되자 이름도 베이징[北京]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의리의 화신 관우를 관제(關帝)로 신격화하여 한족지상주의를 주변국에 강요하였다. 또한 그는 1410년부터 1415년에 걸쳐서 직접 대군을 이끌고 다섯 차례의 출정으로 북방을 평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방 원정에도 주력하여 베트남을 복속시키고 이슬람교도인 환관 정화(鄭和)로 하여금 남해를 원정케 했다. 정화의 원정함대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멀리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진출하였는데, 이유는 당시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원정의 결과로 남방의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국제관계의 다변화가 이루어졌고, 동남아시아에 관한 정보가 강남 지방의 중국인에게 전해져 화교(華僑)의 기원이 되었다. 환관 중용 이후 쇠퇴의 길로 들어서 환관은 역대 군주들의 경계 대상이 되어 왔다. 환관이라는 존재는 최고 권력자의 최측근으로서 직접 황제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권력을 향한 행보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이러한 그들의 속성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일찍이 홍무제는 환관의 정치참여를 엄금하였지만, 영락제는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던 까닭으로 환관을 우대하고 신뢰했던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남해 원정군의 총수로 환관인 정화를 임명한 것도 환관에 대한 영락제의 신뢰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며 정보정치를 강화하여 '동창(東廠)'이라는 특수 정보경찰기관을 만들어 총수에 환관을 임명하였다. 환관들은 신체적 콤플렉스를 물욕과 명예욕(권력욕)으로 보완하려는 심리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황제의 총애를 빙자하여 고관대작들을 얼마든지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 밖에 나는 사람은 얼마든지 황제에게 참소(讒訴)하여 죽이거나 귀양을 보낼 수 있었다. 제6대 정통제(正統帝) 영종이 아홉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장 문제가 터져 나왔다. 제5대 선덕제(宣德帝) 시절부터 태자의 시중을 들고 있었던 환관 왕진(王振)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사를 농락하여 국가 지배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북방에서 몽골계 오이라트 부족장 에센이 1449년 '토목(土木)의 난'을 일으키자, 왕진은 황제가 직접 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무모한 정벌을 감행케 함으로써 결국 자신은 전사하고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1450년 포로로 잡힌 황제가 풀려나 돌아와 보니 이미 동생이 제위에 올라 있었다. 그가 바로 경태제(景泰帝)다. 영종은 동생이 쿠데타로 자신을 몰아내고 제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유폐된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1457년 석형(石亨) 등에 의해서 복위되어 제8대 천순제(天順帝)가 되었지만 이미 실추된 황제의 권위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아무튼 명나라는 역대 어느 왕조보다 환관이 날뛰던 시대였다. 태조 홍무제가 그토록 환관을 경계하여 각종 조치를 취해 놓았지만 그의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유훈을 무시하고 그들을 중용함으로써 일찍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시대를 다룬 중국영화를 보면 악명 높은 실권자는 거의 모두가 환관들이다. 실패한 경제 제도로 약해지는 국력 산업이 발전하면 자연적으로 상업이 발달되고 따라서 화폐의 유통이 증가되기 마련이다. 당시 유통되고 있었던 화폐로는 '대명통보'라는 동전과 '대명보초'라는 지폐였다. 그런데 민간에서 비공식적으로 사용하던 은(銀)의 유통을 법으로 막아버리고 지폐만 찍어댔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화폐 사용량이 증가하자 더욱 지폐 발행량은 늘어났다. 그러나 지폐가 화폐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유통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이에 조정은 별 수 없이 은의 유통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러한 통화정책의 실패는 경제전반에 나쁜 영향을 가져다주어 조세정책의 실패로 이어지게 되었다. 은의 사용량이 급증하자 너도 나도 은을 요구하게 되었고 관리들조차 녹봉을 곡식이 아니라 은으로 줄 것을 요구하였다. 국가에서는 공무원들의 녹봉을 은으로 주기 위해서 많은 양의 은이 필요하게 되었고 세금을 은으로 낼 것을 명하였는데, 이것이 악명 높은 은납제(銀納制)였다(단, 토지세는 현물로 받았음). 도시에서는 그래도 은이 많이 유통되기 때문에 은을 구하기 쉽지만, 농민들은 은을 구하기 위한 이중고를 겪어야만 했다. 종전에는 곡식만 바치면 되었으나, 이제는 곡식을 은으로 바꾸어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세금이 더 무거워진 결과를 낳았다(나중에 밀무역으로 멕시코의 은이 유입되어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심각한 후유증을 남김). 한족 왕조 명나라는 개국 초부터 중화적 세계관을 주변국에게 강요하였고 정화의 남해 원정도 일종의 무력시위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활발한 대외무역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당시 한반도와 중국 해상에는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그 왜구들의 성격이 참 애매모호했다. 해안에 도착해서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그냥 무역을 하고, 상대방이 허술하거나 먹을 것이 많다고 생각되면 칼을 들고 일어나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명 태조 홍무제는 해안 주민들에게 일체의 사무역(私貿易)과 해외출항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다(1437년). 중화사상에 사로잡힌 명나라와 교역을 하려면 국가 간의 공식무역, 즉 조공무역 밖에 없었다. 조공무역이란 천자의 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천자는 그냥 받기만 하면 천자의 위엄에 누가 되니까 신하에게 인심이나 쓰듯 하사품을 보내는 식이었다(당시 조선은 '말로 주고 되로 받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국력이 강할 때에는 그나마 조공무역이 유지되었으나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중기 이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따라서 조공무역이 유명무실해지자 밀무역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으며 이러한 밀무역은 명나라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얼마 전 한 지인의 홈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말하고 싶을 때는 메신저 목록에 있는 안 친한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다. 정말 말하고 싶다.”라고 말이죠. MSN. 그러니까 다들 ‘엠에센’이라고 부르는 걸 제대로 하기 시작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메일보다 실시간으로 용건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더 편하고 빠른 걸 찾는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 MSN 사용을 최대한 미루어 온 이유에는 녀석에 대한 초창기의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그인을 하는 순간, “뭐야, 지금 출근한 거야?”(취재를 다녀오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찔리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라는 메시지를 읽어야 했고, 점심시간인 12시가 넘어도 로그인이 되어있으면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는 모양이지?”라는 친구의 재미없는 농담도 날라 오기 일쑤였으니까요. 나름 소심한 제가 녀석을 컴퓨터에서 파내 버린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메신저와는 담을 높게 쌓고 지냈다고 해야 할까요. 요즘엔 웹 카메라를 달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친구도 있지만 거기까진 아직, 좀 더 참아보려고 한답니다. 어찌어찌 이제 제 메신저 대화상대 목록에 10여 명이 들어차 있습니다. 심심할 때 이 녀석, 꽤 좋은 동무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나 불러내 “뭐하니?”하고 말을 꺼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심심할 때 상대방도 똑같이 심심하지는 않다는 것, 이것입니다. 컴퓨터를 켜놓았다는 것이 대화에 응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은 아닌데, 이쪽에서 볼 때는 그가 로그인을 했는지 아닌지만 관심이 있을 뿐이니까요. 물론 이쪽에서 말을 걸었을 때 저쪽이 바쁘다면(혹은 말하기 싫다면) “지금 좀 바빠서”라든가 하는 말로 점잖게 대화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 메신저가 이제 생활이 되다 보니 그렇게 꼼꼼하게 대응이 잘 안 되는 것, 그것이 문제인 거죠. 언제부터인가 내 ‘대화상대’ 중에는 온라인에 들어오는 즉시 ‘자리 비움’이나 ‘다른 용무 중’을 선택하는 이가 늘고 있더라는 겁니다. 인터넷에 얽혀있으나 그렇지 않은 척함으로써 불필요한 대화나 접촉을 줄이려는, 소극적 무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려면 차라리 로그인을 하지 말든지, 자동 로그인 설정을 바꾸던지, 뭐 그러면 더 좋을 텐데 말입니다. 가끔 ‘온라인’으로 분류돼 있는 친구에게 “바쁘니?”하고 말을 건넸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30초쯤 기다리다, 답이 없으면 창을 닫고 대화를 포기하게 되지요. 그럴 때 무척 쓸쓸합니다. 제가 던진 말 한마디는 초고속 인터넷 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북미대륙 뉴욕에까지 도달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을 때. 그때 말입니다. 제 지인처럼 아무나 붙잡고 말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어도, 말을 걸기가 두려워지는 건 아마도 이 쓸쓸함 때문이 아닐까요. 테크놀로지가 좋아진 만큼, 쓸쓸함도 비례해 무거워진 모양입니다. | 한국교육신문 기자
박준용 | 한양대 강사, 영화평론가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은 강원도 탄광촌의 도계중학교에 임시 음악교사로 부임하게 된 한 트럼펫 연주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배우 최민식이 연기하는 주인공 현우는 교향악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류에서 밀려난 트럼펫 연주자. 재능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어 자괴감에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처지도 못되면서 음악 학원에서 용돈이나 벌라는 친구의 말에는 자존심 상해한다. 돈을 위해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믿는 그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밤무대에 서는 일만은 끝내 피하려고 한다. 그런 주인공 현우에게 겨울은 길기만 했다. 교향악단 연주자를 꿈꾸었던 미래는 암담할 뿐, 현실의 벽에 부딪쳐 보내야만 했던 연인은 주위를 맴돌며 맘을 아프게 하고 나이든 홀어머니에게 효도도 못하고 걱정만 끼쳐드리는 형편이다. 그에게 인생은 늘 그렇게 캄캄한 겨울일 것만 같았다. 탄광촌에서 만난 순수한 열정 하지만 꽁꽁 언 땅 밑에서도 자연은 새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듯이 겨울은 고요히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떠나보낸 옛 연인 연희(김호정)가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던 날, 현우는 강원도 탄광촌에 있는 중학교 관악부 교사 자리에 지원한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부임한 첫 날. 낡은 악기, 너덜너덜한 악보, 까까머리에 얼굴은 새까만 아이들이 모여 있는 초라한 관악부를 보는 순간 한숨만 나올 뿐이다. 게다가 올해 전국경연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강제 해산해야만 하고, 현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망 없는 레이스에 돌입해야 한다. 우승은 턱도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담겨 있는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그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렸기에 아이들의 음악에 대한 사랑까지 포기하게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선생님이 굳은 신념과 이상을 품고 교직을 시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요즘 세상에는 현우처럼 어쩔 수 없는 생활의 한 방편이나 일종의 안정된 직업으로 교직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교사가 일상적인 직업들과 달리 사람, 곧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변화무쌍한 존재인 아이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특수한 성격의 일이라는 데 있다. 이런 까닭에 교육이란 언제나 학생은 물론 교사 본인도 이런 살아있는 만남을 통해 보다 나은 모습으로 변화하고 성숙되어 갈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교직이란 어떻게 시작하느냐 못지않게, 영화 속 현우의 변화처럼 그 열린 가능성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느냐에 그 궁극적인 성패의 여부가 달려있다. 비현실적 공간에서 현실 깨달아 아이들과 대회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그래도 여전히 옛 사랑의 그림자에 가슴이 저리는 현우. 그런 현우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맑은 심성을 가진 마을약사 수연(장신영)의 배려로 현우는 언 땅을 녹이는 따뜻한 봄기운을 느낀다. 현우를 이해하고 바라봐 주는 순박한 사람들도 그의 곁을 지켜 준다. 잘하든 못하든 좋아하는 거 계속 하자는 친구의 술주정, 기나긴 겨울을 보내야만 봄이 오는 거라는 수연의 넋두리,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자신의 울부짖음에 "넌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무뚝뚝하게 내뱉는 엄마의 한 마디를 가슴깊이 되새기며 말이다. 현우는 그제야 알게 된다.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얼어붙었던 마음에 사랑의 싹이 움트고 있음을. 희망은 아직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겨울을 보낸 현우에게 어느덧 꽃피는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화 속의 도계는 탄광촌이면서도 잿빛 가루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마을이다. 자잘한 상처들로 가슴 속 깊이 할퀸 현우는 도계에 오자마자 "잘 데는 있으세요?"라고 묻는 속 깊고 착한 아이를 만난다. 동네 사람들도 대부분 착하고 순박한 심성을 갖고 있다. 마치 현우를 위해 준비된 듯한 이 공간은 도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시골 이미지로 채색된 듯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곳의 실제 일상일 것 같은 탄광촌의 고단한 인생이나 예민한 사춘기 아이들의 고민은 살짝 스치고만 지나간다. 하지만 감독이 현우의 구부정한 뒷모습에 카메라를 집중하며 쌓아 올려가는 일상의 모습들은 잔잔하고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한계를 통해 희망과 가능성 찾아 드라마틱한 삶과는 거리가 먼 남자 현우. 그가 서울대를 졸업했다고 믿으면서 열심히 연습하는 아이들에게 밝은 미래를 주지도 못하고, 하다못해 단 한 번의 우승마저도 주지 못한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에게 "내가 너희한테 우승할 수 있다고 하면 그건 사기치는 거야"라고 말하며 김을 빼 버리는 현우는 어찌 보면 자격미달의 교사다. 하지만 아이들의 현실적 한계와 이후 발전 가능한 꿈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주는 선생의 길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꿈이 지나치면 곧 직면하게 될 차가운 현실에서의 고통이 만만치 않을 것이고, 반대로 현실의 한계만을 강조한다면 아이들의 가능성을 그 싹부터 밟아버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꿈을 품으려는 아이들에게 현우는 먼저 지극히 당연한 '현실'을 말한다. 그런데 실은 그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인 것이다. 삶의 사소한 장애물들에 무수히 발이 걸려 넘어지고 눈물은 가슴 속으로 뚝뚝 떨어지는 그런 현실 말이다. 엄청나게 화려하고 잘난 삶을 꿈꾼 것도 아닌데 인생은 그렇게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주저앉아 있으라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현우는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의 기대를 품게 하지 않으면서 바로 그 지점, 그 현실로부터 시작한다. 희망과 가능성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늘의 수고에 의해 내일의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배감을 녹이는 인내와 용기 제대로 소리도 나지 않는 악기를 들고도 최선을 다해 연습에 열중하는 관악부 아이들. 어머니가 집을 나가서 할머니와 살고 있는 재일은 할머니에게 트럼펫을 들려주겠다며 어려운 곡을 연습하고, 용석이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쳐도 '케니 G'처럼 유명해지고 싶다며 의지를 다진다. 이렇게 가난한 형편에도 꿈을 품고 사는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들이 이윽고 현우의 마음속으로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광부인 용석의 아버지는 용석이 그토록 되고 싶어 하는 연주가의 꿈이 그들의 형편에선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것을 알기에 용석의 손에서 트럼펫을 뺏는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현우는 관악부 학생들을 데리고 탄광촌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 아버지들 앞에서 엘가의 'Pomp And Circumstances(위풍당당 행진곡)'을 연주한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너무도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연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들은 시커먼 탄가루가 묻은 손으로 연신 눈물을 훔친다. 용석의 아버지가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이 장면은 두고두고 가슴을 찡하게 한다. 영화 은 제목 그대로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정직한 영화이다. 아무리 겨울이 매서울지라도 결국 그것이 지나가면 봄이 온다는, 이를 악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지 않아도 그저 잠잠히 기다릴 수 있는 인내와 용기만 있다면 봄은 오고 꽃이 피어난다는 자연의 순리를 영화는 담담하게 말해준다. 또한 이 영화는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못했던 한 어른이 자신을 믿고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기존의 교육현장을 다룬 영화들이 주로 열정을 가진 교사에 의해 학생들이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준데 비해 이 영화는 순수한 학생들의 열정이 패배감에 젖어 있던 한 선생을 변화시킨다는 설정으로 신선한 자극과 감동을 준다. 실제로 이 영화는 퇴직 후 폐광촌으로 내려가 도계중학교 관악부를 지도한 어느 교사가 아이들과 지낸 1년을 기록한 TV 다큐멘터리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제작되었다는 전언이다.
*1화*
신태식 | 본사 교육전문직 특강 교수 문제 ① 교사가 학생을 망친다는 말이 있다. 개성이 강하고 다양한 사고를 지닌 요즘 학생들은 교사의 지시나 학교교칙에 대해 대체로 순응적이지 않다. 이에 학생들과 교사 간에는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교사들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과 같이 체벌을 통해 학생을 지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로 인해 교사와 학생 간에는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학생은 학교와 교사가 싫어서 등교를 거부하거나 탈선을 하게 된다. 얼마 전 D지역에서 지각한 학생에 대해 200대의 체벌을 행함으로써 매스컴에 보도된 사건 등이 이 같은 사례에 해당된다. 학생지도와 관련하여 교사의 체벌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논하고, 교사의 지시에 반항적인 학생들에 대한 효과적인 지도방안을 논술하시오. Ⅰ. 序論 우리 속담에 '귀여운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라는 말이 있다. 영국의 속담에도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자녀를 올바르게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채찍을 가해야 한다는 자녀교육관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체벌과 관련하여 최근에는 체벌 당한 학생의 학부모들이 체벌한 교사를 고소하는가 하면 폭행까지 하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 주고 있다. 이에 교육적 견지에서 체벌은 바람직하지 않은 만큼 사랑으로 학생을 지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Ⅱ. 本論 (1) 체벌 찬성론 비판 교육에 있어 체벌은 행동수정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체벌을 긍정하는 견해는 분명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행동수정의 효과는 지속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며 오히려 악영향만을 초래할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또한 현실적인 입장에서 살펴봤을 때 다인수 학급이라는 우리의 교육현실에서 학생들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체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다수 아동에 대한 교사의 지도능력에 관한 문제로 결국 지도교사의 전문성과 자질에 직결된다. 교사가 교수·학습 및 지도 방법에 있어 탁월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면 체벌이 아닌 다른 인간적이며 교육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체벌 반대론 옹호 교육이란 전인적 인간의 육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체벌을 사용하는 교육은 학생들의 정신적·정서적인 영역에 깊은 상처를 주게 되어 결국 인격의 성숙을 가져올 수 없게 하는 큰 결함과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쿠닌과 겜프도 벌을 많이 사용하는 학급에서는 벌이 오히려 비행을 증가시키며 문제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또한 체벌은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인 교육에서 학생들을 수단시 할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으로 한 학생을 본보기로 체벌하거나 수업 진행의 편리함을 위해서 체벌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결국 한 인격을 수단시하는 것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형성이라는 교육적 의의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체벌을 받고 자란 학생들은 부정적인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어 사물의 부정적인 면만을 바라보게 되며 주체성과 창의성, 적극성 등을 잃게 되어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자랄 수 없게 된다. (3) 체벌 대체 방안 그러므로 교육의 목적이 인간행동의 바람직한 변화에 있다면 그 방법은 가장 교육적인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사는 우선, 학생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바탕으로 단계적으로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 교사는 학생과의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행동변화를 위해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학부모와의 상담이나 전임교사나 친구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반항적 행동을 보인 학생의 원인을 분석하여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끝으로 학생의 장점을 찾아 지속적으로 칭찬해 줌으로써 자아 정체성 확립과 자신감을 갖도록 격려해야 한다. Ⅲ. 結論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 말과 같이 학생에 대한 교사의 사랑과 기대는 학생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체벌을 통해 학생을 변화시키려는 교사도 있지만, 체벌은 정서적·정신적으로 성숙된 인격형성에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주게 되고 나아가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자랄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생에 대한 믿음과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체벌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학생의 인격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교육적 목적으로 행해지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 위 문제의 논술유형은 옹호논박형과 대안제시형이 결합된 형태로서, 논점을 제시하면 체벌반대에 대한 나름대로의 논리를 옹호논박형 형식(상대방의 견해, 주장과 비판, 나의 주장과 논거제시)에 따라 서술한 후 효과적인 지도방안을 제시한다면 설득력 있는 답안이 될 것이다. 문제 ② 교사평가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Ⅰ. 序論 학생은 교사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교육부는 교사의 전문성 신장을 위해 2005년 5월부터 교원평가제를 시험적으로 운용하고, 이르면 2007년부터 전면적으로 시행한다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전교조 등 교직단체는 평가기준의 객관성 부족 등을 이유로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교사들이 합의가 없는 교원평가제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Ⅱ. 本論 교사평가제를 찬성하는 입장은 우선, 교사들 간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전문성을 향상시키고 교육의 질 향상으로 공교육의 신뢰회복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평가기준이 명확하지 못할 때는 측정이 가능한 영역인 실적에 맞춰짐으로써 평가의 목적이 변질될 수 있고, 교사 간 과열 경쟁으로 상호불신을 유발할 수도 있다. 또 우수교사에 대한 사기부여를 통해 교육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는 교사들의 사기저하는 물론 무력감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교사평가 결과의 악용으로 교사의 불안과 학교의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다. 교원평가의 목적이 교사의 전문성 신장에 있다면 다수 교사가 희망하는 수석교사제 도입이나 획기적인 보상체제를 도입하여 현장의 교사의 사기를 높여주어야 한다. 또 법정 교원 확보를 비롯한 교육여건 개선과 교내 자율장학 활성화를 통해 교사들이 학생지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윈윈전략 차원에서 수석교사제와 교사평가제의 동시 도입 등도 고려해 볼 만 한다. Ⅲ. 結論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권위를 부여받는 유교적 윤리는 새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가치관이다. 하지만 교사들이 합의가 전제된 평가기준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교사평가제를 도입하는 것은 학교현장의 불만과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는 만큼 합의된 평가기준 마련과 수석교사제 도입 등 획기적인 대안 마련을 위해 협력해야 할 것이다. 교사들 또한 권위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제자들과 학부모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위 문제의 논술유형은 옹호논박형인데, 논점에 따라 제시하면 옹호논박형 형식에 따라 서술하면 될 것이다. 주의할 점은 논술자가 반대 입장을 취할 때는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건전한 대안이 없는 반대는 찬성자를 설득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 ③ 과외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학교에서의 과외해소 방안에 대해 논술하시오. Ⅰ. 序論 과외는 학생들의 특기나 적성 계발은 물론 교과의 보충·심화학습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획일화된 공교육을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과외교습 금지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과외가 전면적으로 허용되고, 학벌주의에 편승한 학부모들의 교육열로 과외는 교육 불평등은 물론 양극화 심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입시제도의 변화에 따라 교육병리현상의 주범으로 자리 잡은 과외문제가 다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Ⅱ. 本論 1) 문제점 과외 문제는 우선, 실질적인 교육기회의 균등한 보장이 어렵다는 점이다. 농·산·어촌과 대도시, 계층 간 과외 접근의 격차로 인해 학생 간의 서열화를 심화시킨다. 또 시험위주의 전달식 교육으로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과 자율적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가로막음은 물론 지식기반사회에 필요로 하는 창의력이나 자기 주도적 학습력 신장이 어렵다.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어렵게 하고, 가정에는 과외비 부담을 가중시키며, 사회적으로는 계층 간의 위화감 조성이나 소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2) 과외의 발생원인 과외가 과열되는 원인은 지필시험 위주의 평가 및 대학선발제도, 경쟁력이 약한 학교수업의 질, 열악한 교육여건, 다양한 교육수요에 대한 학교의 대응력 부족 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대학을 졸업해야만 인간대접을 받을 수 있고 출세할 수 있다는 학벌사회의 만연에 있다. 3) 해결방안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해 학교에서는 첫째, 학교교육의 내실화화가 필요하다. 학교는 학생의 전인적 발달 위해 N세대에 맞는 즐겁고 재미있는 수업,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이나 특별활동 등을 활성화하여 학생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는 건전한 학교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둘째, 학생들의 요구를 반영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방과 후 학교의 활성화를 통해 교과의 보충·심화는 물론 특기·적성 계발 프로그램의 지속적 운영으로 과외 수요를 학교가 수용해서 경쟁력 있고 신뢰 받는 학교로 거듭나야 한다. 셋째, 전문성 신장을 위한 교사의 노력이 필요하다. 세미나나 교과연구회 활동, 전문서적 탐독, 대학원 진학 등을 통해 교사의 자질함양을 위해 노력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사랑과 열정으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 끝으로 e-learning의 교육적 활용이 필요하다. 유비쿼터스 시대를 맞아 EBS 강의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교육 콘텐츠(서울 : 꿀맛닷컴)를 활용하여 교육격차를 해소해 나가야 한다. 그밖에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와 지원(mentor)제도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 Ⅲ. 結論 과외는 학교 이외의 사회구조에서 발생한 구조적인 문제이긴 하나 학교와 교사의 노력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 과외는 학생은 물론 가정, 학교, 사회에 많은 문제를 유발하는 만큼 누구에게나 균등한 교육기회 제공을 위해서라도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 학교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교사는 전문가로서 사명감과 열정으로 학생을 지도하며, EBS 등 인터넷 등을 최대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과외의 역기능을 해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위 문제는 대안을 제시할 때 일반적인 대책이 아닌 학교에서의 대책이란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인 대책은 원인분석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시각에서 대책을 제시해야 하겠지만, 본 문제의 경우 학교에서의 대책이므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에 한정해서 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