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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한상철 | 대구한의대 청소년교육상담학과 교수 학생만 있고 청소년은 없는 사회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단지 한 세대 이전의 청소년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 많은 모험과 위기 그리고 요구 및 기대에 직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아동기에서 성인기로 이동하는 경로를 성공적으로 통과하고 있다. 몇 가지 준거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10년이나 20년 전의 청소년들보다 더 훌륭한 것 같다. 청소년의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있으며, 심지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에 걸쳐 청소년 문제와 살인사건은 약물남용이나 청소년 비행 그리고 청소년 임신과 함께 다소 줄어들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긍정적인 자아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우리 사회의 많은 성인들과 대중매체가 묘사하는 것보다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 청소년들은 그들이 유능한 성인이 되는데 필요한 적절한 기회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10년 또는 20년 전의 청소년들보다 덜 안정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높은 이혼율, 청소년층의 높은 임신율, 그리고 가족의 잦은 이사는 청소년들의 삶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여자 청소년 가운데 20% 이상이 출산을 하고 있고, 약물남용이 청소년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으며, AIDS의 유령이 청소년의 육체적, 정신적 황폐화를 가속화시켜 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지원 대책을 마련 중이다. 특히 M. Wright Edelman은 다음 세대인 어린이와 청소년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말하고, 과거 어떤 시대보다 더 중요한 정책적 이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 청소년 문제행동이 적다고 안심하고 있을 단계가 아니다. 오히려 실종된 듯한 청소년문화에 대해 염려하고 대책을 수립해야 할 때이다. 문제행동이 소수 청소년들에게 존재하는 일탈적 행위가 아니라 비교적 건강하다고 하는 다수의 청소년들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 잠재적 비행의 배경에는 학생만 있고 청소년은 존재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특이한 문화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 사회변화에 따른 청소년의 지위변화 한국의 ‘청소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대학생 운동일 것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반독재 정치 운동의 선봉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운동은 사춘기적 방황과 갈등,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과 실험정신, 대안 문화 등과 같은 청소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서구의 청소년들이 근대화 이후 부모나 기성세대로부터 독립하고, 구별화됨으로써 그들 나름의 확고한 사회적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서구의 경우 1970년대 히피운동이나 반 문화운동을 통하여 평등과 자유라는 근대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청소년들의 움직임이 그들의 주류 문화를 형성하였고, 21세기 사회에서 그들은 대량실업과 세기말적 혼란 속에서 사회의 불안 세력이자 가능성의 세대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국의 청소년은 1980년대 대학생 운동의 절정기를 맞으면서, 조직력과 이데올로기가 극도로 강조되는 분위기에서 청소년의 실험성과 자유로움은 상실되어 버렸던 것이다. 청소년에 의한 문화 변혁적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대 ‘신여성’과 ‘모던 보이’들이 불러 일으켰던 신문화 조류나 1960년대 말부터 일었던 ‘청년문화운동’이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통기타와 히피풍조 패션으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운동은 서구 풍조의 모방이자 퇴폐풍조로 간주되어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정책에 의해 억제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주도했던 그 시대의 청년들은 군대를 갔다 오면서 곧바로 기성세대 체제에 편입되어 버렸던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반독재 투쟁은 어느 정도의 결실을 이루게 되지만, 청소년들의 행보는 곧바로 소비에만 열중하는 ‘신세대’로 규정됨으로써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형성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혜정 교수의 글에 따르면, 근대 한국사에서 청소년의 위상은 크게 세 단계를 통해 발전하였다. 여기서는 조혜정 교수의 단계구분에 근거하여 필자 나름의 견해를 덧붙여 설명하고자 한다. ‘학생’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근로 청소년 첫 번째 단계는 대가족의 ‘소인’일 뿐이었던 청소년들이 가족을 빠져나와 ‘학생’이라는 독자적인 위상을 갖게 되는 단계이다. 근대 국가기구는 모든 아이들을 ‘근대적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학교를 지었고,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가정에서 벗어나 개인의 공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학생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획득했고, 이 시대에는 청소년 자신들이 이 지위를 선호했다. 그러나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이들은 주변적 범주로 인식되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소외 계층’, ‘학교 공부보다 생계유지가 더 시급한 사람’이라는 식의 범주화가 근대 전반부에 청소년들의 삶을 지배했던 것이다. 이 시대에 행운아는 자기를 상급 학교에 보내 줄 경제력을 가진 아버지나 잡다한 집안일을 시키지 않고 숙제를 하도록 배려하는 어머니를 가진 아이였다. 소수의 선택된 아이만이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시대에 ‘학생’이 되는 것은 축복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 시대에 ‘학생’에 속하지 않는 청소년은 주변적인 범주인 ‘근로 청소년’에 속한다. 교복을 입은 같은 또래의 학생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계층인 이들을 위해 1970년대 국가는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근로 청소년회관을 지어서 검정고시 반을 운영하거나 취미교실을 운영하여 이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화장법을 가르쳐서 이들을 숙녀로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 더 이상 학생과 근로 청소년의 이분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고등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은 ‘좋은 청소년’, 비학생은 ‘불량 청소년’ 두 번째 단계는 다수의 청소년들이 학생인 시점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이 더 이상 불우한 청소년이 아니라 부적응자이거나 일탈자로 범주화되는 단계이다. 이 시점에서 10대는 ‘학생’과 ‘비학생’으로 이분화되었으며, 학생은 ‘좋은 청소년’인 반면 비학생은 ‘불량 청소년’으로 취급되었다. 1980년대까지 지속된 대량생산 체제에서 학교는 그 체제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기능을 수행했으며, 기성 사회는 그 체제에서 이탈하는 청소년을 ‘불량 청소년’으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의 청소년은 대학생과 중·고등학생으로 구분되고, 청소년이란 용어는 중·고등학생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대학생들이 고등학생들을 의식화시킬 것을 두려워해서 선배들이 모교에 와서 동아리 활동을 하던 것이 금지되었고, 그래서 많은 선후배가 함께 하는 청소년 동아리의 맥이 끊겼다. 따라서 1980년대를 통해 중·고등학교는 가장 폐쇄적인 공간이 되었으며, 중등학교 학생들은 ‘학생’ 이외의 정체성을 버려야 했다. 강압적이고 통제 일변도의 학교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이런 특수한 역사적 시점을 거치면서이다. 이 시대의 학생은 더 이상 특권 계층이 아니었으며 단지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 모범생 등으로 인식되었을 뿐, 공부하는 곳에서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공부를 포기한 사람들은 열등생, 부적응자, 비행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만이 인정받았으며, 그들의 사소한 허물이나 실수는 묻힐 수 있을망정 공부 못하는 사람의 허물은 인생의 실패나 부도덕으로 낙인 되었던 것이다. 대량 생산시대에 필요한 인력은 뛰어난 엘리트가 아니라 대중화되고 평준화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지만, 학교교육은 점차 평준화를 지향함으로써 모든 학생들을 백화점의 상품과 같이 개성 없는 생산품 또는 진열품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소비 주체로서의 청소년 세 번째 단계는 1990년대 전후 본격적인 소비 자본주의 체제가 진행되면서 ‘학생’의 위상이 ‘청소년’이란 위상으로 또는 ‘소비자’란 이름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단계이다. 이제 학교라는 울타리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적극적으로 이탈하는 아이들이 생겨났으며, 이에 따라 정부에서도 학교의 규범에 얽매인 학생들을 보다 자유로운 인격체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구체적인 예로써, 1987년 당시 체육부는 ‘청소년육성법’을 제정하였고, 1988년에 체육부 내에 ‘체육청소년국’이 설치되었으며, 1990년에는 청소년헌장이 선포되고 ‘체육부’가 ‘체육청소년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당시 정부 차원의 청소년 정책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의 신분을 ‘청소년’이라는 신분으로 이미지 변신을 도모한 것은 성공적으로 평가되지만, 학교 내 각종 규제에 얽매여 있는 10대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크게 바꾸어 놓지는 못하였다. 1991년 청소년기본법이 제정되면서 학생들은 잠시 학교를 떠나 자연 속에서 수련활동을 할 수 있도록 되었다. 청소년의 범위를 9세부터로 정한 것도 학생들의 수련원 활동을 권장하기 위한 차원에서이다. 1997년 이래로 다시 청소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청소년헌장을 개정하는 등 ‘학생’이 아닌 ‘전인적 청소년’을 강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국가발전을 위해 청소년을 육성하겠다’는 식의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이 잔존해 있는 한, 그리고 교육부와 교육청의 학생 지배에 대한 욕심이 계속되는 한 청소년 활동의 활성화는 사실상 쉽지 않은 형편이다. 그러나 국가적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시장의 급격한 변동에 의해 청소년의 세계가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다. 자본은 청소년을 위한 길거리 농구장을 마련하였고, 유명 상표를 부착한 신발과 의류를 팔았으며, 10대를 위한 각종 잡지와 패션 책을 통해 10대들만의 무수한 이야기를 제공하였다. 청소년들은 정부에서 벌인 행사에서와는 달리 시장의 자본이 만든 공간에는 자발적으로 찾아다녔으며, 노래방, 피시방, 오락실, 호프집, 콜라텍을 선택하였다. 1980년대 이후 자본에 의해 청소년들의 학교 밖 놀이공간들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졌으며, 청소년들은 그 공간에서 자기들만의 개별공간을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하면, 10대들은 한편으로 자본이 만든 새롭고 광활한 소비 공간의 유혹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낙후된 학교가 밀쳐내는 힘의 작용에 의해 독자적인 생활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된 아이들에게 학교는 더 이상 재미없는 공간에 불과하며, 오래 머물다가는 낙후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어줄 뿐이다. 실제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의 수는 적지만, 다수의 아이들이 몸만 학교에 있는 식의 태업에 들어갔고, 상당수는 학교생활을 삶의 일부로만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가끔 우리는 한국의 청소년이 서양의 청소년들보다 학교에 더 잘 다니지만, 또한 더 폭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학교에 대한 문제제기를 학교 망신시키는 행동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고답적인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학교 운영책임자도 있다. 청소년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고 해결책이 없으니까 그냥 덮어두자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청소년들의 행동에 포함되어 있는 권리와 자유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들의 반항적인 행동만을 문제 삼는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청소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 내 청소년문화의 형태 교육이란 본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작용이며, 개인의 전인적 성장을 조력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교는 교육의 일차적인 장(場)으로서의 기능을 포기하고, 입시경쟁으로 학생들을 구속하는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교 내 청소년들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사이버공간이나 B-boy 댄스 활동, 밴드 활동 등에 몰두하면서 학교 밖의 공간을 확보해 놓은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활동공간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 대해 큰 기대도 불만도 없는 편이며, 학교에서는 그들 나름의 시간 때우기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듯하다. 학교에서 무턱대고 잠자기, 그들만의 정보교류, 쉼터, 그리고 부모님께 최소한의 효도를 제공하기 위한 곳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두 번째 부류는 아예 학교를 떠난 아이들이다. 이들은 학교 밖에서 학원에도 다니고 여러 종류의 비공식적 모임에 참여하거나 독학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계획해 나간다. 문화센터를 통해 영화 만드는 것을 배운다거나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사회경험을 하는 등 새로운 학습의 공간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라는 폐쇄된 공간에 더 머물다가는 변화되는 역동적인 사회 환경에서 도태되고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으로 인해 스스로 학교를 탈퇴하고 자기만의 공간 및 생활터전을 창조해 나가는 적극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부류는 딱히 자기만의 창조적 공간을 마련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열심히 노는 아이들이다. 인기 대중가수의 열성적인 팬 클럽회원이기도 하고, 때로는 나이트나 콜라텍 등에 가서 열심히 춤도 추고, 노래방에 가서도 적극적으로 노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발랄하고 당돌한 신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이들에게 어른들의 걱정스러운 간섭은 잔소리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당돌하리만큼 정열적이고 반항적이지만, 노는 데 빠져있을 뿐 비행이나 일탈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네 번째 부류는 아마 현재 대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되는 수동적인 청소년들이다.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으니까 학교에 가라면 가고, 텔레비전도 조금 보고, 친구를 따라 콜라텍에도 가끔 가고 노래방에도 간다. 이들은 대체로 “별 생각 없이 살아요”, “사는 게 재미없어요”라고 반응한다. 일 중독증에 걸려 놀 줄 모르는 부모세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놀고,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이다. 아마 이들 중 다수는 10년 후에도 이런 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앞의 세 부류는 오늘날 그 숫자가 점차 증가되고 있지만, 아직도 소수일 뿐 지배적인 청소년 세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90% 이상의 청소년은 네 번째 부류에 속할 것이다. 어른들은 앞의 세 부류에 대해 염려하고 심지어 문제청소년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의 경우 나름대로 문화공간을 가지고 있거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고 그리고 열심히 놀고 있을 뿐, 비행이나 문제행동에 개입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들이 새롭고 역동적인 청소년문화를 창조하는 주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 부류의 청소년들은 따분하고 재미없는 삶을 엮어가고 있으며, 잠재적 비행요인을 어느 누구보다 많이 내포하고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스트레스와 욕구불만 등으로 신체적·정신적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변화에 따라 청소년들의 의식과 가치관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현대 사회의 청소년들은 성인 사회의 문화를 단순하게 수용하고 흡수하는 스폰지 세대가 아니라 그들 나름의 독창적인 문화를 생성하는 문화 주체적 세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다수가 아닌 소수에 의해 생성되고 확산되는 청소년문화이기에 하위문화 또는 대항문화라는 좋지 못한 평판을 듣고 있는 듯하다.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의 당당한 동반자로서 가치를 높여나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와 가정의 울타리에만 안주하지 말고 사회의 더 큰 터전으로 뛰쳐나와서 자신의 역량과 잠재력을 시험하고 개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혜영 | 한국청소년개발원 부연구위원 학생만 있고 청소년은 없는 사회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단지 한 세대 이전의 청소년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 많은 모험과 위기 그리고 요구 및 기대에 직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아동기에서 성인기로 이동하는 경로를 성공적으로 통과하고 있다. 몇 가지 준거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10년이나 20년 전의 청소년들보다 더 훌륭한 것 같다. 청소년의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있으며, 심지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에 걸쳐 청소년 문제와 살인사건은 약물남용이나 청소년 비행 그리고 청소년 임신과 함께 다소 줄어들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긍정적인 자아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우리 사회의 많은 성인들과 대중매체가 묘사하는 것보다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 청소년들은 그들이 유능한 성인이 되는데 필요한 적절한 기회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10년 또는 20년 전의 청소년들보다 덜 안정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높은 이혼율, 청소년층의 높은 임신율, 그리고 가족의 잦은 이사는 청소년들의 삶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여자 청소년 가운데 20% 이상이 출산을 하고 있고, 약물남용이 청소년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으며, AIDS의 유령이 청소년의 육체적, 정신적 황폐화를 가속화시켜 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지원 대책을 마련 중이다. 특히 M. Wright Edelman은 다음 세대인 어린이와 청소년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말하고, 과거 어떤 시대보다 더 중요한 정책적 이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 청소년 문제행동이 적다고 안심하고 있을 단계가 아니다. 오히려 실종된 듯한 청소년문화에 대해 염려하고 대책을 수립해야 할 때이다. 문제행동이 소수 청소년들에게 존재하는 일탈적 행위가 아니라 비교적 건강하다고 하는 다수의 청소년들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 잠재적 비행의 배경에는 학생만 있고 청소년은 존재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특이한 문화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 사회변화에 따른 청소년의 지위변화 한국의 ‘청소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대학생 운동일 것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반독재 정치 운동의 선봉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운동은 사춘기적 방황과 갈등,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과 실험정신, 대안 문화 등과 같은 청소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서구의 청소년들이 근대화 이후 부모나 기성세대로부터 독립하고, 구별화됨으로써 그들 나름의 확고한 사회적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서구의 경우 1970년대 히피운동이나 반 문화운동을 통하여 평등과 자유라는 근대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청소년들의 움직임이 그들의 주류 문화를 형성하였고, 21세기 사회에서 그들은 대량실업과 세기말적 혼란 속에서 사회의 불안 세력이자 가능성의 세대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국의 청소년은 1980년대 대학생 운동의 절정기를 맞으면서, 조직력과 이데올로기가 극도로 강조되는 분위기에서 청소년의 실험성과 자유로움은 상실되어 버렸던 것이다. 청소년에 의한 문화 변혁적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대 ‘신여성’과 ‘모던 보이’들이 불러 일으켰던 신문화 조류나 1960년대 말부터 일었던 ‘청년문화운동’이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통기타와 히피풍조 패션으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운동은 서구 풍조의 모방이자 퇴폐풍조로 간주되어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정책에 의해 억제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주도했던 그 시대의 청년들은 군대를 갔다 오면서 곧바로 기성세대 체제에 편입되어 버렸던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반독재 투쟁은 어느 정도의 결실을 이루게 되지만, 청소년들의 행보는 곧바로 소비에만 열중하는 ‘신세대’로 규정됨으로써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형성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혜정 교수의 글에 따르면, 근대 한국사에서 청소년의 위상은 크게 세 단계를 통해 발전하였다. 여기서는 조혜정 교수의 단계구분에 근거하여 필자 나름의 견해를 덧붙여 설명하고자 한다. ‘학생’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근로 청소년 첫 번째 단계는 대가족의 ‘소인’일 뿐이었던 청소년들이 가족을 빠져나와 ‘학생’이라는 독자적인 위상을 갖게 되는 단계이다. 근대 국가기구는 모든 아이들을 ‘근대적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학교를 지었고,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가정에서 벗어나 개인의 공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학생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획득했고, 이 시대에는 청소년 자신들이 이 지위를 선호했다. 그러나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이들은 주변적 범주로 인식되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소외 계층’, ‘학교 공부보다 생계유지가 더 시급한 사람’이라는 식의 범주화가 근대 전반부에 청소년들의 삶을 지배했던 것이다. 이 시대에 행운아는 자기를 상급 학교에 보내 줄 경제력을 가진 아버지나 잡다한 집안일을 시키지 않고 숙제를 하도록 배려하는 어머니를 가진 아이였다. 소수의 선택된 아이만이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시대에 ‘학생’이 되는 것은 축복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 시대에 ‘학생’에 속하지 않는 청소년은 주변적인 범주인 ‘근로 청소년’에 속한다. 교복을 입은 같은 또래의 학생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계층인 이들을 위해 1970년대 국가는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근로 청소년회관을 지어서 검정고시 반을 운영하거나 취미교실을 운영하여 이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화장법을 가르쳐서 이들을 숙녀로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 더 이상 학생과 근로 청소년의 이분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고등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은 ‘좋은 청소년’, 비학생은 ‘불량 청소년’ 두 번째 단계는 다수의 청소년들이 학생인 시점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이 더 이상 불우한 청소년이 아니라 부적응자이거나 일탈자로 범주화되는 단계이다. 이 시점에서 10대는 ‘학생’과 ‘비학생’으로 이분화되었으며, 학생은 ‘좋은 청소년’인 반면 비학생은 ‘불량 청소년’으로 취급되었다. 1980년대까지 지속된 대량생산 체제에서 학교는 그 체제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기능을 수행했으며, 기성 사회는 그 체제에서 이탈하는 청소년을 ‘불량 청소년’으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의 청소년은 대학생과 중·고등학생으로 구분되고, 청소년이란 용어는 중·고등학생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대학생들이 고등학생들을 의식화시킬 것을 두려워해서 선배들이 모교에 와서 동아리 활동을 하던 것이 금지되었고, 그래서 많은 선후배가 함께 하는 청소년 동아리의 맥이 끊겼다. 따라서 1980년대를 통해 중·고등학교는 가장 폐쇄적인 공간이 되었으며, 중등학교 학생들은 ‘학생’ 이외의 정체성을 버려야 했다. 강압적이고 통제 일변도의 학교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이런 특수한 역사적 시점을 거치면서이다. 이 시대의 학생은 더 이상 특권 계층이 아니었으며 단지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 모범생 등으로 인식되었을 뿐, 공부하는 곳에서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공부를 포기한 사람들은 열등생, 부적응자, 비행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만이 인정받았으며, 그들의 사소한 허물이나 실수는 묻힐 수 있을망정 공부 못하는 사람의 허물은 인생의 실패나 부도덕으로 낙인 되었던 것이다. 대량 생산시대에 필요한 인력은 뛰어난 엘리트가 아니라 대중화되고 평준화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지만, 학교교육은 점차 평준화를 지향함으로써 모든 학생들을 백화점의 상품과 같이 개성 없는 생산품 또는 진열품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소비 주체로서의 청소년 세 번째 단계는 1990년대 전후 본격적인 소비 자본주의 체제가 진행되면서 ‘학생’의 위상이 ‘청소년’이란 위상으로 또는 ‘소비자’란 이름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단계이다. 이제 학교라는 울타리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적극적으로 이탈하는 아이들이 생겨났으며, 이에 따라 정부에서도 학교의 규범에 얽매인 학생들을 보다 자유로운 인격체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구체적인 예로써, 1987년 당시 체육부는 ‘청소년육성법’을 제정하였고, 1988년에 체육부 내에 ‘체육청소년국’이 설치되었으며, 1990년에는 청소년헌장이 선포되고 ‘체육부’가 ‘체육청소년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당시 정부 차원의 청소년 정책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의 신분을 ‘청소년’이라는 신분으로 이미지 변신을 도모한 것은 성공적으로 평가되지만, 학교 내 각종 규제에 얽매여 있는 10대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크게 바꾸어 놓지는 못하였다. 1991년 청소년기본법이 제정되면서 학생들은 잠시 학교를 떠나 자연 속에서 수련활동을 할 수 있도록 되었다. 청소년의 범위를 9세부터로 정한 것도 학생들의 수련원 활동을 권장하기 위한 차원에서이다. 1997년 이래로 다시 청소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청소년헌장을 개정하는 등 ‘학생’이 아닌 ‘전인적 청소년’을 강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국가발전을 위해 청소년을 육성하겠다’는 식의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이 잔존해 있는 한, 그리고 교육부와 교육청의 학생 지배에 대한 욕심이 계속되는 한 청소년 활동의 활성화는 사실상 쉽지 않은 형편이다. 그러나 국가적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시장의 급격한 변동에 의해 청소년의 세계가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다. 자본은 청소년을 위한 길거리 농구장을 마련하였고, 유명 상표를 부착한 신발과 의류를 팔았으며, 10대를 위한 각종 잡지와 패션 책을 통해 10대들만의 무수한 이야기를 제공하였다. 청소년들은 정부에서 벌인 행사에서와는 달리 시장의 자본이 만든 공간에는 자발적으로 찾아다녔으며, 노래방, 피시방, 오락실, 호프집, 콜라텍을 선택하였다. 1980년대 이후 자본에 의해 청소년들의 학교 밖 놀이공간들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졌으며, 청소년들은 그 공간에서 자기들만의 개별공간을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하면, 10대들은 한편으로 자본이 만든 새롭고 광활한 소비 공간의 유혹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낙후된 학교가 밀쳐내는 힘의 작용에 의해 독자적인 생활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된 아이들에게 학교는 더 이상 재미없는 공간에 불과하며, 오래 머물다가는 낙후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어줄 뿐이다. 실제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의 수는 적지만, 다수의 아이들이 몸만 학교에 있는 식의 태업에 들어갔고, 상당수는 학교생활을 삶의 일부로만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가끔 우리는 한국의 청소년이 서양의 청소년들보다 학교에 더 잘 다니지만, 또한 더 폭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학교에 대한 문제제기를 학교 망신시키는 행동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고답적인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학교 운영책임자도 있다. 청소년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고 해결책이 없으니까 그냥 덮어두자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청소년들의 행동에 포함되어 있는 권리와 자유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들의 반항적인 행동만을 문제 삼는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청소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 내 청소년문화의 형태 교육이란 본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작용이며, 개인의 전인적 성장을 조력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교는 교육의 일차적인 장(場)으로서의 기능을 포기하고, 입시경쟁으로 학생들을 구속하는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교 내 청소년들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사이버공간이나 B-boy 댄스 활동, 밴드 활동 등에 몰두하면서 학교 밖의 공간을 확보해 놓은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활동공간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 대해 큰 기대도 불만도 없는 편이며, 학교에서는 그들 나름의 시간 때우기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듯하다. 학교에서 무턱대고 잠자기, 그들만의 정보교류, 쉼터, 그리고 부모님께 최소한의 효도를 제공하기 위한 곳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두 번째 부류는 아예 학교를 떠난 아이들이다. 이들은 학교 밖에서 학원에도 다니고 여러 종류의 비공식적 모임에 참여하거나 독학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계획해 나간다. 문화센터를 통해 영화 만드는 것을 배운다거나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사회경험을 하는 등 새로운 학습의 공간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라는 폐쇄된 공간에 더 머물다가는 변화되는 역동적인 사회 환경에서 도태되고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으로 인해 스스로 학교를 탈퇴하고 자기만의 공간 및 생활터전을 창조해 나가는 적극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부류는 딱히 자기만의 창조적 공간을 마련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열심히 노는 아이들이다. 인기 대중가수의 열성적인 팬 클럽회원이기도 하고, 때로는 나이트나 콜라텍 등에 가서 열심히 춤도 추고, 노래방에 가서도 적극적으로 노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발랄하고 당돌한 신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이들에게 어른들의 걱정스러운 간섭은 잔소리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당돌하리만큼 정열적이고 반항적이지만, 노는 데 빠져있을 뿐 비행이나 일탈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네 번째 부류는 아마 현재 대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되는 수동적인 청소년들이다.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으니까 학교에 가라면 가고, 텔레비전도 조금 보고, 친구를 따라 콜라텍에도 가끔 가고 노래방에도 간다. 이들은 대체로 “별 생각 없이 살아요”, “사는 게 재미없어요”라고 반응한다. 일 중독증에 걸려 놀 줄 모르는 부모세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놀고,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이다. 아마 이들 중 다수는 10년 후에도 이런 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앞의 세 부류는 오늘날 그 숫자가 점차 증가되고 있지만, 아직도 소수일 뿐 지배적인 청소년 세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90% 이상의 청소년은 네 번째 부류에 속할 것이다. 어른들은 앞의 세 부류에 대해 염려하고 심지어 문제청소년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의 경우 나름대로 문화공간을 가지고 있거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고 그리고 열심히 놀고 있을 뿐, 비행이나 문제행동에 개입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들이 새롭고 역동적인 청소년문화를 창조하는 주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 부류의 청소년들은 따분하고 재미없는 삶을 엮어가고 있으며, 잠재적 비행요인을 어느 누구보다 많이 내포하고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스트레스와 욕구불만 등으로 신체적·정신적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변화에 따라 청소년들의 의식과 가치관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현대 사회의 청소년들은 성인 사회의 문화를 단순하게 수용하고 흡수하는 스폰지 세대가 아니라 그들 나름의 독창적인 문화를 생성하는 문화 주체적 세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다수가 아닌 소수에 의해 생성되고 확산되는 청소년문화이기에 하위문화 또는 대항문화라는 좋지 못한 평판을 듣고 있는 듯하다.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의 당당한 동반자로서 가치를 높여나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와 가정의 울타리에만 안주하지 말고 사회의 더 큰 터전으로 뛰쳐나와서 자신의 역량과 잠재력을 시험하고 개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심영옥 | 경희대 겸임교수·미술사 기교 없는 무작위의 질서 창출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돌이나 흙으로 소박하고 질박한 담장을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주었다. 담장을 쌓는 사람은 돌 크기나 흙 양을 미리 계산하지 않고,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쌓는 동안 질서를 찾아가며 담장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 무작위의 질서를 창출하는 지혜와 멋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담장은 한국인의 정서와 잘 어울려 소박하면서도 분방한 듯한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쌓은 돌 사이사이에는 사람들의 추억도 묻어주면서 욕심 없이 쌓은 돌들은 은근한 멋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하는 문양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꽃담이다. 대체로 담장치레만 보더라도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흙담은 흙담대로 돌담은 돌담대로 꽃담은 꽃담대로 궁궐과 민가의 얼굴 역할을 했다. 옛 궁궐의 꽃담은 화려한 것 같지만 야하지 않아 선비 같은 은근한 멋을 풍긴다. 이에 반해 일반가옥의 꽃담은 질박하면서도 분방한 멋을 느끼게 해 준다. 깨진 기왓장을 이용하여 투박한 솜씨로 토담에 꾹꾹 박아 놓은 기와담장이나 흙담장, 돌담장은 모두 구수한 한국인의 심성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이와 같이 뽐내지 않고 순수한 한국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우리의 담장은 사계절 마다 그 변화와 잘 어울려 한국의 정취를 물씬 풍겨주는 역할을 똑똑히 한다. 시대 상황 반영하는 조화로움 꽃담은 집의 벽이나 담에 여러 가지 무늬를 놓아 장식한 벽면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꽃담의 치장은 돌로 벽면을 쌓거나, 흙담에 기왓장으로 무늬를 만들어 넣거나, 흙을 구워 전돌을 만들어 꾸몄다. 꽃담은 넓은 의미로는 벽체와 담장을 말하나 주로 담장을 지칭한다. 그림과 무늬로 모양을 냈다고 해서 그림담 또는 무늬담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꽃담은 담장을 치레한 것을 말하므로 굳이 꽃담과 담장의 의미를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꽃담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시작됐다고 본다. 〈삼국사기〉권33, 옥사(屋舍)에 보면, '진골 계급 주택의 담장은 석회를 발라 꾸미지 못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해 왕족인 성골은 석회를 발라 집을 치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이 발전하여 고려시대에는 민가의 꽃담이 궁궐의 꽃담보다 오히려 화려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검소한 것을 숭상하는 풍조가 생기면서 수수하고 은은한 꽃담이 많아졌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는 경제 사정이 매우 나빠져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소박한 재료만으로 꽃담을 꾸미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하찮은 재료로 담을 쌓더라도 자신들만의 미의식을 발휘하여 그냥 쌓지 않고 주어진 재료로 가능한 예쁜 무늬를 놓으려고 했다. 시골 집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이나 돌, 기와나 그 파편들로 무늬를 만들어 그것을 보며 즐길 줄 아는 높은 미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꽃담에는 그 지역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어 돌이 많은 제주도에는 돌담이 많고, 돌을 구하기 힘든 곳에서는 토담이나 토석담, 그리고 중부지방에는 토석과 전돌로 담을 쌓았다. 흙이 많은 지역에서는 흙담을 쌓되 흙이 주저앉지 않도록 중간 중간에 돌을 박거나 때로는 깨진 기와도 섞어 무늬를 넣어 담을 만들었다. 거기에다 길상적인 의미를 지닌 글자나 꽃, 동물 등의 무늬를 넣어 주변의 건축이나 자연과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토담은 토담대로, 돌각담은 돌각담대로 표정이 있는데 이는 그 집 주인의 마음과 개성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꽃담들도 옛 주인의 멋을 잘 읽을 수 있다. 한옥의 담장은 쌓을 당시 그 집안의 사정도 알 수 있다. 자식이 부족한 집에는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포도 무늬를 넣기도 하였고, 즐거움을 바라는 집에는 '희(囍)'자를 넣어 축복의 마음을 담았다. 친숙하고 정감어린 자연의 일부 꽃담은 울타리를 치는 것에서 비롯되어 발전하였다. 원래 울타리의 '울'은 우주를 의미하며 '한울'하면 '큰 울', 즉 끝없는 무한대의 우주를 가리켰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울타리는 하늘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며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그 역할이 바뀌게 되고, 대신 그 담에 우주를 상징하는 해와 달과 별을 무늬 놓아 꾸미기도 했다. 담장의 기능은 공간을 나누거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사나운 짐승을 막기 위해서나, 계급사회에서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차츰 울타리는 집을 보호하는 구실을 주로 하였다. 보호를 위해서 담장은 더욱 강하면서 튼튼하게 변하였다. 이런 담이 생기면서 점점 복잡하고 많은 사연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 사연의 내용을 무늬로 표현하거나 다른 의미의 무늬로 부드럽고 아름답게 꾸미려는 노력도 함께 하였다. 한국의 담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이나 가족을 보호하는 목적도 있었으나 선천적인 미의식의 발로로 조형적인 목적이 더 컸기 때문에 위협적으로 높게 쌓기보다는 대개 아담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우리나라 꽃담은 경계나 단절이 아니라 자연 재료를 이용하여 친숙하고 정감어린 자연의 일부와 같이 만들었다. 이를테면 인간세계와 자연을 담으로 단절시키지 않고 담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교감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질서를 찾으려는 의도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의미는 서민들의 담장치레에서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흙으로 쌓아올린 담장에 깨진 사기그릇 파편과 조각난 기왓장을 꾹꾹 눌러 박은 소탈한 치장은 자유로운 추상미까지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화려한 듯하면서 튀지 않고 수수하면서도 정교하여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는 궁궐의 꽃담도 현란하지 않게 주변 경관과 어울리도록 은은한 멋을 풍기게 하였다. 돌이든 흙이든 전돌이든 또 다른 어떤 재료든 간에 자유로운 마음으로 장식한 무늬들에 의미를 담고, 담장의 모양에도 의미를 담아 질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우아하고 단아한 궁궐의 꽃담 우리나라 궁궐의 꽃담은 그 건축의 모양새와 멋들어지게 어울려 인공과 자연을 적절히 구분하여 아늑함을 더해주고 인공미를 살려준다.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궁궐의 꽃담은 직선과 곡선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질서 있게 무늬를 배열하여 미감을 높이는가 하면 왕실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으로 위엄을 갖추기도 했다. 임금의 무병장수를 비는 만수무강(萬壽無彊), 수복강녕(壽福康寧) 등의 문자를 직접 나타내어 단순한 장식이나 미적 표현보다 그 뜻에 더 의미를 두기도 했다. 우리나라 꽃담의 진미라 불리는 경복궁의 자경전 서쪽 꽃담을 보면 윗부분은 기와로 마무리하고 담장에는 만(萬),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의미를 가진 길상문자와 함께 귀신을 쫓는다는 의미로 가운데 액자 그림처럼 틀어박힌 꽃무늬를 담아냈다. 그 외벽에는 사군자, 모란, 연꽃, 태극무늬, 석쇠(귀갑)무늬, 문자무늬 등 각종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잘 알려진 한국미 발견자 혜곡 최순우는 경복궁의 담장을 보고, "동산이 담을 넘어와 후원이 되고 후원이 담을 넘어 번져 나가면 산이 되고 만다. 담장은 자연 생긴 대로 쉬엄쉬엄 언덕을 넘어가고 담장 안의 나무들은 담 너머로 먼 산을 바라본다.(중략) 담장은 자연과 후원을 천연스럽게 경계 짓는 것이며 이러한 담장의 표정에는 한국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라며 경복궁 꽃담의 자연미를 극찬하였다. 매화 꽃 봉오리를 머금고 있는 늙은 매화나무와 매화나무 가지에 걸린 달, 거기에 놀러온 새가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고, 난초, 국화, 대나무, 석류, 연 등의 형상 무늬를 집어넣은 자경전 꽃담은 바로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한국미의 극치이다. 그리고 왕비의 침소였던 교태전 뒤편 아미산 동산을 연결시킨 꽃담은 우아하면서 단아한 국모의 성품을 느끼게 하고, 운현궁 꽃담은 묵란도를 즐겨 그리던 흥선대원군의 미의식을 눈치 챌 정도로 단아하면서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꽃담이 있지만 궁궐의 꽃담은 왕과 왕족을 위한 의미를 포함한 무늬들이 많이 표현되어 똑같은 재료로도 궁궐 주인을 위한 충성스런 백성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앞으로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한국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스럽고 분방한 마음으로 꽃담을 새겨 넣을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건축 양식이 서구화, 현대화되면서 계산된 크기와 계획된 무늬와 재료로 담장이 만들어지거나, 담장 없는 빌딩이 하늘을 솟아오르고 있다. 우리에겐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도 있지만 전통문화를 계승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결코 꽃담은 감상품이 아니다. 울타리가 필요 없는 아파트 생활에 익숙할지라도 우리나라 꽃담의 정신과 아름다움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김철수 | 경남 거제중앙고 교사, 사진작가 바다와 만난 수 만년의 세월 사람이 살면서 발길이 생기고 발길이 많이 묻힌 곳에 큰 길이 생겼다. 문화와 생활을 아우르는 길은 동해안을 따라 부산에서 함경북도 온성군까지 이어져 7번 국도가 되었다. 바다와 어우러져 길게 뻗친 7번 국도는 풍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있는 석호를 가득 안고 있다. 석호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자연유산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에 의해 만들어졌다. 빙하기에 바닷물이 크게 줄어들어 해수면이 크게 낮아진 곳에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동해안에는 큰 골짜기들이 생겨났다. 그 후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빙하가 녹고 바닷물의 높이도 높아져 이전에 만들어 놓았던 골짜기에 물이 차게 되면서 움푹 들어간 지형인 만(灣)을 만들었다. 먼 바다에서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올라왔다 다시 내려갈 때 한 쪽으로 휘어져 내려간다. 이런 파도의 힘으로 바닷가의 모래들이 계속 한쪽으로 밀려나 만의 입구에 모래로 이루어진 둑(사주, 사취)이 만들어지게 된다. 계속 모래가 쌓이면 둑은 커지게 되고, 결국은 만의 입구를 막아 버린다. 그래서 석호의 물은 담수의 물도 아니고 바닷물도 아닌 그 중간을 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강릉의 경포호와 풍호, 주문진의 향호, 양양군의 포매호와 순포, 속초의 청초호와 영랑호, 고성군의 광포호, 봉포호, 송지호, 화진포호, 북녘 산하의 감호, 삼일포, 시중호 등이 있다. 문학과 어울려진 석호의 백미는 경포호지만, 자연과 어울려진 풍광의 아름다움은 속초 북방에 분포하는 석호들에 있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품었던 지하수들이 뿜어 나와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 만들어진 여러 호수들. 이 호수들에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다. 예로부터 절경의 금수강산은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 하늘의 뜻을 이어받고 기개를 높이는 매개체로 이용되었다. 신라의 화랑들은 높은 산과 깊은 골에서 심신수련을 통하여 나라 사랑과 삶의 의미를 공부하였다. 그들이 즐겨 찾던 곳 중 하나가 관동과 관서를 나누는 백두대간의 대줄기인 태백준령이다. 신선이 머무는 아름다운 풍경 1만 2000개의 봉우리와 여러 계곡으로 이루어진 금강산에 아름다운 호수가 위치하니 그곳이 삼일포이다. 북녘의 산하에 놓여 있는 삼일포는 조선시대 정철이 노래한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신라시대에 금강산에서 무술을 연마하던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 등의 네 화랑이 서라벌에서 열리는 무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다. 그들이 처음 머문 곳이 삼일포인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3일 동안 놀다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이 이곳에 머문 흔적은 호수 가운데 위치한 정자의 이름인 사선정과 가까이에 위치한 해금강 총석정에 위치한 육각으로 된 네 기둥의 이름인 사선봉에 남아 있다. 아름다운 삼일포는 천연기념물 제218호로 백두산의 삼지연, 통천의 시중호와 함께 북측의 3대 호수에 속한다. 삼일포를 뒤로 하고 남으로 내려오면 구선봉 아래에 '나뭇꾼과 선녀 이야기'의 무대가 된 감호가 나타난다. 멀리 거진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구선봉이 보이고, 그 아래에 보이는 작은 호수가 감호이다. 남측에서는 떠나버린 선녀를 기다리는 나무꾼의 심정으로 남방한계선과 휴전선 사이의 버려진 경작지에 자연습지를 복원하고 있다. 남측의 가장 북방에 위치한 석호는 화진포인데, 둘레 16㎞의 대부분에 해당화가 자라고 있어 말 그대로 꽃의 호수이다. 남측의 석호 중 가장 규모가 큰 화진포는 중평천과 월안천이 호수로 흘러들어 담수호를 이루고 있는데, 호수 주변에는 백사장과 소나무숲이 넓게 펼쳐져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기에 많은 별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화진포를 거쳐 해안을 따라 내려오면 죽왕면에 송지호가 위치하고 있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개발되고 있는 송지호는 맑은 물과 소나무숲 및 산봉우리가 조화되어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호수로 재첩이 잡히고 있어 여름철에 재첩잡이 체험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이곳은 호수 중간까지 만들어진 목도를 통해 송지호의 아름다움을 접하게 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고성군에는 봉포호와 광포호가 위치하고 있는데, 봉포호는 대학을 설립하면서 대부분이 사라지고 일부가 대학의 진입로 주변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담수화되었다. 속초 시내에는 청초호와 영랑호가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청초호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하는 유일한 석호로 작은 배들이 드나드는 내항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전국의 항만 중 오염도 1위를 차지하였던 청초호는 강원관광엑스포를 열면서 호수의 1/3이 매립되어 사라져 고니들의 보금자리인 갈대숲이 사라졌지만 하수 처리 시설이 설치되면서 수질은 좋아진 상태이다. 영랑호는 속초시 장천동, 금호동, 영랑동 일대에 있는 호수로 둘레가 8㎞에 달한다. 삼일포에 머물던 네 국선이 이곳을 지나는 중 영랑이 이 호수의 아름다움에 취해 무술대회에 나가는 것도 잊고 이곳에 머물면서 고기를 잡고, 뱃놀이를 하면서 풍류에 취해 오랫동안 머물렀기에 영랑호가 되었다고 한다. 영랑호 주변에는 차량이 다닐 수 있는 호안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드라이브, 도보여행, 자전거하이킹을 할 수 있으며 도심지 속의 작은 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넓게 펼쳐진 습지대는 없지만 그런대로 자연의 운치를 느낄 수 있고, 그 운치를 더하는 속초팔경의 하나인 범바위가 있다. 주변에 콘도미니엄과 유원지가 조성되어 경관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범바위에서 바라보는 영랑호의 전경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범바위는 바위의 모양이 범 형상을 닮아 붙여진 이름인데, 속초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바위로 알려져 있다. 해질 무렵 하구 쪽에서 영랑호를 바라보면 설악산의 울산바위와 어울려진 낙조는 이곳이 선경(仙境)임을 알게 해 준다. 바닷가 식물들의 수줍은 유혹 시냇물과 바닷물 및 육상이 만나 만들어진 석호에는 다양한 환경이 나타나 여러 종류의 생물이 살고 있다. 담수와 해수가 만나기에 담수에 사는 잉어, 향어, 메기, 붕어, 가물치와 바닷물에 사는 연어, 황어, 은어, 학공치, 숭어, 도미가 함께 살고 있다. 또 이들을 먹이로 하여 살아가는 철새들이 찾아 겨울에는 특별히 백조의 호수가 된다. 몸이 희어 백조로 일컬어지는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 흑고니, 큰고니가 다수 찾고 있다. 석호에 나타나는 식물의 종류도 다양한데, 육상식물, 물에서 살아가는 식물, 바닷가식물들이 어울려져 살아가고 있다. 육상식물로는 소나무가 가장 많이 자라고, 물에서 살아가는 식물에는 갈대, 물억새, 달뿌리풀, 부들, 질경이택사, 솔방울고랭이, 순채, 매자기, 송이고랭이, 세모고랭이, 창포, 큰고랭이, 부채붓꽃, 노랑꽃창포, 부처꽃, 마름, 이삭물수세미, 말즘, 민나자스말, 개발나물, 눈양지꽃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부채붓꽃은 붓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가면서 일부 분포지가 나타나는 희귀한 붓꽃으로 5~7월에 꽃이 청자색으로 피며 꽃잎이 다른 붓꽃류에 비해 넓다. 우리나라에서 특정야생식물로 지정된 희귀종이며, 북측에서도 부채붓꽃 분포지인 함경남도 부전군 백암리에 있는 부채붓꽃밭을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눈양지꽃은 우리나라 동해 바닷가에만 나는 여러해살이풀로 5~8월에 노란색의 꽃이 잎겨드랑이에 매달린다. 이곳에 나타나는 바닷가 식물에는 갈대, 청비녀골풀, 수송나물, 해당화, 갯완두, 갯메꽃, 갯방풍, 순비기나무, 좀보리사초, 쇠보리, 해란초, 지채, 갯씀바귀 등이 있다. 해당화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이 지는 작은 나무로 바닷가 모래땅이나 산기슭에서 높이 1.5m까지 자라며, 뿌리에서 많은 줄기가 나와 큰 무리를 이루며 자란다. 꽃은 홍색으로 5개의 꽃잎이 지름 6~7㎝ 정도로 줄기 끝에서 피며, 열매는 새들의 좋은 먹이가 된다. 순비기나무는 중부 이남의 바닷가에 자라는 상록 관목으로 줄기는 눕거나 비스듬히 자라면서 전체에 회색빛이 나는 흰색의 잔털이 퍼져 있다. 꽃은 진한 자주색이고 이삭 모양으로 모여 나며, 열매는 약용으로 잎과 가지는 목욕용 향료로 이용된다. 특히 순비기나무는 해변을 망토 모양으로 덮는 역할을 하여 해변을 이루는 모래를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갯방풍은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굵은 황색의 뿌리가 모래 속에 깊게 들어가며 높이는 20㎝ 내외로 자라고 꽃은 6~8월에 줄기 끝에 펼쳐진 우산 모양으로 뭉쳐난다. 전체에 흰털이 가득 나고, 뿌리는 약용으로 사용한다. 해란초는 여러해살이풀로 7~8월에 꽃이 피며 꽃대에 연한 황색 꽃이 달리며, 열매는 둥글고 씨에는 두꺼운 날개가 달려 있다. 주로 바닷가 모래땅에 자라고 꽃이 난초와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해란초라고 한다. 해당화 피는 꽃의 호수, 화진포 '황금물결 찰랑대는 정다운 바닷가, 아름다운 화진포에 맺은 사랑아~' 한때 유행하였던 이씨스터즈의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이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처럼 화진포는 희망과 아름다움이 흘려 넘치는 낙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호인 화진포를 둘러보는 것은 석호에 살고 있는 생물과 석호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화진포는 소금의 농도가 낮아 수면이 잘 얼지 않고,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 물과 넓은 갈대밭 및 주변에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다. 쉴 수 있는 넓은 공간과 먹이가 풍부하여 철새들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화진포의 대부분은 도로와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자연성을 많이 잃었지만, 도로변마다 해당화를 심어 꽃의 호수라는 이름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습지대가 형성되어 다양한 석호 생물을 관찰하기에 좋은 곳은 화포리 장평 부락과 잣골 사이에 개설된 일주도로이다. 이곳의 습지대에서 갈대, 해당화, 쉽사리, 부채붓꽃, 흰여뀌, 눈양지꽃, 벌노랑이, 개발나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 일주도로에는 조용한 곳을 찾는 철새들도 많이 날아오고, 사람의 왕래도 적은 곳이다. 다시 이 길을 돌아 나와 송림 사이에 위치한 이기붕과 김일성 별장을 찾아가 보자. 김일성 별장에서 바라보는 광활한 화진포해수욕장의 모습은 더욱더 우리 가슴을 풀어헤치게 한다. 해수욕장에는 많은 바닷가식물들이 살고 있는데, 갯방풍, 좀보리사초, 쇠보리, 수송나물, 해란초, 갯메꽃, 갯씀바귀 등이 있다. 다시 차량을 이동하여 화진포교 위에서 이곳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그 주변에 있는 이승만대통령의 별장도 가보자. 화진포와 해수욕장을 굽어보는 위치에 해양박물관이 위치하는데, 이곳에는 바다에 사는 어류, 조개류, 갑각류의 표본들이 전시되어 있다. 모두가 지켜야 할 민족의 보물 보름달이 휘영청 쏟아지는 밤이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두레박을 타고 내려오는 석호. 가끔씩 화를 내는 바다와 높은 산이 만나 날씨의 변덕이 심한 이곳에 예전부터 사람들이 살아 왔다. 석호에 기대어 먹을 것을 얻고, 동해의 구름과 안개를 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온 사람들. 그들에게 석호는 삶의 터전이자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선경의 세계였다. 사람의 힘으로 쉽게 만들 수 없기에 그 값어치가 뛰어난 이곳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첫째, 많은 생물들이 석호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석호에 살고 있는 생물은 석호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기에 석호는 보호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나라 최대의 휴양지인 동해안은 산과 바다가 어울러져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있다. 이 낙원에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 만든 석호는 더 아름다운 운치를 더하여 준다. 셋째, 새들이 날고 있는 석호를 보면서 아름다운 심성을 싹 틔울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따뜻한 마음을 글로서 전달하는 석호의 값어치는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 동해안에 있는 남과 북의 석호들이 만나는 날, 민족의 혼과 웅지가 다시 한 번 떨쳐지는 날이 되리라. 이처럼, 바다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늪인 석호는 낙원이면서 희망의 땅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이처럼 귀중한 땅인 석호가 사라지고 있다. 선조들이 지켜 물려준 석호, 우리도 우리 후손들에게 반드시 물려주어야 한다.
나무, 새 2008년 4월! 한국인 최초 우주인이 러시아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납니다. 경쟁률만 18,000:1. 요즘엔 이벤트 상품으로 우주여행권도 등장하였으니 바야흐로 우주탐험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 상황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옛사람들이 우주라고 여겼을 하늘을 바라봅니다. 저 멀고 높은 하늘세계에 우리 사람들이 근접할 수는 없을까? 옛사람들의 이러한 염원에 답하기라도 하듯 신수(神樹)가 등장했습니다. 시베리아의 세계수(World Tree)나 우주나무(Cosmic Tree), 단군신화의 신단수(神檀樹)가 그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나무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교통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지금껏 산신제를 지내고,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고, 무당들이 신대라는 대나무를 통해 신내림을 받는 것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신성한 나무를 길게 잘라 만든 것이 바로 장대입니다. 나무나 장대가 신과 교감하는 통로였다면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전령입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새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컸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三足烏)는 태양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까마귀입니다. 기러기는 소식을 전해 주는 새이자 부부 간 백년해로의 상징이었습니다. 때와 시를 알리는 닭은 희망찬 출발이나 상서로움의 상징이며, 원앙은 부부 간 금슬의 상징으로, 까치는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주고 꿩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새로 알려져 있지요. 이웃한 나라에서도 새를 신성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일본 신사의 상징이랄 수 있는 도리이[鳥居]는 신이 사는 세계 ‘천(天)’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하늘의 신에게 사람의 뜻을 전달해 주는 새가 그 위에서 쉬어가라는 의미이지요.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인 가루다는 불교에 수용되어 팔부신중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이 가루다는 사람의 몸에 새의 머리를 하거나 전신이 새의 형상을 띠기도 하지요. 전남 구례 연곡사 서부도는 상륜부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그 상륜부에 봉황 네 마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동부도와 북부도에서도 상륜부에 머리 부분이 훼손된 봉황을 볼 수 있는데, 이 봉황 네 마리가 혹시 4천하(天下)를 상징하는 가루다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봅니다. 한편 연곡사 부도의 상대석에는 가릉빈가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가릉빈가는 극락조라고도 불리며 사람의 머리에 새의 형상을 하고서 극락정토에서 그윽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심양 고궁 청녕궁의 정문 앞에는 7m 높이의 신간(神竿)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거주하던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나무장대가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윗부분에 있는 자그마한 용기에 쌀과 잘게 썬 돼지내장을 담아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던 만주족의 전통에 의합니다. 만주족의 이러한 풍속은 누르하치가 위험에 처했을 때 까마귀떼가 날아와 전신을 감싸주는 바람에 살아날 수 있었다는 데서 연유합니다.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몸을 독수리의 먹이로 주는 ‘천장(天葬, 鳥葬)’이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지요. 그들은 사람의 영혼이 독수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솟대=장대+새 솟대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나무장대나 돌기둥 위에 얹은 신앙대상물입니다. 그러니까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새,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나무를 상징하는 장대나 기둥이 결합된 것이죠. 지역에 따라서 짐대, 수살대, 진또배기, 거릿대, 솔대, 당산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단독으로 세워지기도 하고 장승이나 선돌, 돌탑 등과 함께 세워지기도 하죠. 이 솟대의 기원을 내부적으로 찾는 시각은 삼한시대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신성한 공간 소도(蘇塗)에서 비롯됩니다. 소도라는 공간에서 장대에 새를 올린 솟대의 형식이 나왔다는 거죠. 솟대를 세운 이 곳은 신성한 곳으로 여겨 죄인이 들어와도 잡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각은 현존하는 솟대가 남부지방에 치중하여 분포하기에 북방유입설에 맞설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솟대문화는 만주, 몽고, 시베리아, 일본 등 북아시아에서 고루 보이는 보편화된 샤머니즘 문화라는 점입니다. 솟대의 새는 대부분 오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오리는 천계(天界)의 신과 왕래하는 사신이요, 물새이기에 농사에 절대적인 물을 관장하여 홍수와 화재를 막아주기도 합니다. 알도 많이 낳으니 풍농, 풍어, 다산까지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철새로 남북을 오가는, 즉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새로 받아들여져 옛 가야 땅에서는 사자(死者)를 저승까지 동반하는 의미에서 오리 모양 토기를 부장하곤 했지요. 솟대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액막이 즉,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기 위함입니다. 이 경우에는 단독으로 보다는 당수나무, 장승, 돌탑 등 다른 마을 지킴이와 같이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신 중심의 상당신(上堂神)과 함께 마을 하당신(下堂神)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죠. 강릉 진또배기는 경기도나 충청도 등지의 솟대가 주로 장승의 하위개념으로 들어선 것과 달리 당당하게 단독으로 강문(江門)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장대 위 물오리가 육해공(陸海空)에 두루 능한지라 바람, 물, 불의 삼재(三災)를 막아주기를 토속신에게 기원하며 풍년과 풍어를 빌었던 것이죠. 솟대만 있으면 외롭고 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장승이나 돌탑 등에 묻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보다 본연의 임무에 더 충실할 수 있죠. 따라서 독립형 솟대는 혼자라기에 더 막강하고 자생력이 강합니다. 하늘을 향해 쭉 올라간 장대는 마치 수묵화에서 한 획에 선을 그은 듯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한편, 과거시험에서 급제자를 내면 솟대를 건립하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 솟대의 새에 붉은 색을 칠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문과 출신자의 경우는 솟대 위의 새를 학으로 부르고, 무과 출신자의 경우는 봉황이라고 불렀다네요. 이러한 풍속은 오리[鴨]가 ‘甲’과 ‘鳥’가 결합된 말로 새 중에서 으뜸가는 새이자, 과거시험에서의 으뜸인 장원급제를 의미하는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PAGE BREAK]안녕과 복을 가져다주는 돛대 액막이로서, 과거급제 기념으로서 솟대를 세웠다지만 한편으로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도 솟대가 등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행주형(行舟形) 지세의 마을이 있습니다. 주로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이나 물돌이 마을이 대부분인데 이런 지형에는 돛대를 세워야 배가 안정적으로 운항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돛대로 솟대를 세웠던 것입니다. 큰 마을에는 돛대가 여러 개 있으면 좋다고 하는데 울산 언양 어음리에는 무려 다섯 개의 솟대가 들어섰다고 합니다. 이 행주형 솟대를 찾아 마을 어르신들을 상대로 솟대의 행방을 수소문해보았으나 결국은 실패였습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던 새마을운동 시절에 일부 사라지고 또 경지정리를 한다며 흔적 없이 밀어버렸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럴까요? ‘언양 불고기’로 유명한 이 일대는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이동하면서 상권이 위축되었고 또 고속철 건설로 엄청난 높이의 교각이 들어서 있어 곧 배가 침몰할 듯 정신없습니다. 어디 이곳만 그러하겠습니까. 흔적 없이 사라진 수많은 솟대가 어디 여기뿐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나무로 솟대의 문화재지정 문제입니다. 나무의 특성상 현존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동제가 계승되고 있는 지역일지라도 향후 그 전통이 단절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있다면 문화재지정을 서두르거나 적어도 그 솟대를 이어갈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강구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북 군위군 부악면 한밤마을은 부림 홍씨 집성마을로 팔공산 줄기로 둘러싸인 분지형 마을로 이곳도 선형(船形)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솔숲에는 진동단(鎭洞壇)이라 해서 약 4m의 돌기둥에 돌로 만든 오리를 올려 두었습니다. 이곳 역시 마을의 지세가 바다에 떠있는 배 모양이어서 오리처럼 물에 잠기지 말라는 의미로 돛대형 돌기둥을 세워두고 오리를 올려둔 것입니다. 이렇게 배와 관련한 지형에서는 우물이 많으면 배 바닥에 구멍이 나서 침몰하는 격이라 우물이 적고 대개 무거운 돌담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흙담이 많이 보입니다. 전북 부안읍 내요리에서는 ‘당산할머니’ 혹은 ‘짐대할머니’로 불리는 돌기둥이 이 마을의 수호신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당산이 풍수적으로 배의 형국인 내요리에 안녕과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배가 거친 풍랑에 안전하기 위해서는 큰 기둥을 꽂아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에서죠. 매년 정월 보름에 주민들이 이 당산에서 마을의 복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고 줄다리기 후 동아줄을 당산에 감는 ‘짐대할머니 옷 입히기’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옷을 입혀주면 그 해의 농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절로 간 솟대 부안 동문 안 당산과 서문 안 당산은 숙종 15년(1689)에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동문 안 당산에서 ‘당산하나씨’, ‘짐대하나씨’ 라고도 부르는 솟대당산에는 머리를 바다 쪽으로 향하고 있는 오리가 앉아 있는데, 이는 마을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정월보름이면 줄다리기를 하고난 후 당산에 줄을 감는 옷을 입히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서문 안 당산의 ‘할아버지당산’ 받침돌에는 성혈과 같은 ‘알받이구멍’이 있는데 당산제를 지낼 때 쌀을 담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합니다. 쌀을 오리알로 동일시하여 풍요와 다산을 바라는 염원입니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당산’은 반쯤 부러져서 윗부분을 볼 수 없습니다.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에서는 특이한 형태의 돌기둥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28년에 건립된 돌솟대로 민간의 솟대문화가 사찰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주목할 수 있지요. 왜 솟대가 절로 들어왔을까요? 그 까닭을 이야기하기 전에 당간지주가 어떤 것인지를 언급해 봅시다. 장대를 높이 올려 꼭대기에다 새 대신 당(幢)이나 번(幡)을 달 수 있는 장치를 두고 장대가 쓰러지지 않도록 고정시킨 것이 당간지주입니다. 이 당간지주는 다른 나라를 통해 들어왔지만 지금은 우리나라만큼 당간지주 문화가 발달한 곳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국판 불교의 특징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지요. 사찰이란 이름도 찰간지주 즉, 당간지주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당간지주는 주로 절의 경계에 위치하여 특정 종파나 사찰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이곳이 성소(聖所)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신성한 공간이었던 소도에서 비롯된 솟대 또한 우리 마을이 액을 피하는 성소임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우리 솟대신앙이 불교와 결합하여 당간지주로 발전하였음을 추리할 수 있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전국의 당간지주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요즘 TV에서 마빡이 개그가 유행합니다. 이 마빡이 개그가 옛날 민요에서 유래하였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옛날 아버지들이 시집간 딸을 처음 찾아갈 때는 다듬잇돌을 메고 갔답니다. 딸은 아버지가 선물한 다듬잇돌에 다듬이질을 해가며 다음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씨에미 마빡 뚝딱, 씨누이 마빡 뚝딱, 씨할미 마빡 뚝딱, 씨고모 마빡 뚝딱…” 역사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떠나는 시대이지만 그 이전에 도 소박한 마음으로 나무를 통해, 솟대를 통해 우주와 교통하려했던 민초들의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방학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 울산 옥현초 교사
뭔가를 배우는 활동은 즐거운 ‘놀이’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힘겨운 ‘노동’에 해당하는가? 아마도 사람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질 것이다.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에게는 배우는 활동이 놀이일 것이다. 배우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배우는 활동은 힘겨운 노동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교육을 연구하며,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모두가 배우는 일을 즐긴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며 풍요로워질까 생각하곤 한다. 미국에서 이루어진 한 조사에서, 지금하고 있는 일이 ‘일’처럼 생각되느냐 ‘놀이’처럼 생각되느냐 물어보았더니, 6학년 아이들이 학교 공부는 일 같고 운동 시합은 놀이 같다고 약속이나 한 듯이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아이들의 경우도 이러한 질문에 대해 크게 다르지 않게 대답할 것으로 생각된다. 오호 통재라. 왜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놀이가 아니라 일처럼 느껴진다는 말인가? 인간은 한편으로 누가 뭐래도 ‘배우는 존재’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배우는 활동을 놀이처럼 즐기는 것은 불가능한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배우는 것을 놀이처럼 즐기는 존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필자의 직업의식 때문에라도 인간은 배우는 것을 놀이처럼 즐기는 존재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온갖 질문을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적어도 배우는 활동을 가리키는 ‘교육’은 인간에게 놀이와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배우는 일 자체가 좋아서 희열을 느끼며 배우는 활동에 몰입하는 것을 한 번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학교교육’은 교육의 특수한 형태이다. 특정한 내용만이 특정한 방법으로 가르쳐지고, 특정한 방식으로 가르친 내용을 평가하며, 평가 결과는 여러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교육이 이처럼 특정한 방식의 학교교육의 형태로 포장되어 제공될 때, 교육은 학생들에게 더 이상 놀이일 기능성은 줄여든다. ‘놀이로서의 교육’은 ‘노동으로서의 학교교육’의 형태로 바뀐다. 그 자체로 좋아서 참여하는 ‘놀이’라기보다는 뭔가를 대가로 얻기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노동'으로 변질된다. 우리 아이들한테 학교에서 노동을 즐기라고 권하기는 쉽지 않다. 노동을 즐기라고 권한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이 말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일 지도 알 수 없다. 교육은 원래 놀이가 아니라 노동이라고 학생들에게 강변해야 하는가? 교육이라는 노동은 일류대학의 입학, 좋은 직장, 사회적 명예와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설득해야 하는가? 학생들에게 교육이라는 ‘노동’의 휘황찬란한 수많은 혜택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면서 힘든 노동을 감내하라고 훈화해야 하는가? 교육은 힘겨운 노동이며, 교육이라는 노동이 가져다 줄 미래의 혜택을 상기하면서 ‘노동으로서의 학교교육’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방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인 방안은 지나치게 암울해 보인다. 왜냐하면 교육이라는 노동이 가져다 줄 미래의 혜택은 소수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모두가 미래 지향적인 사고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노동에 참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말이다. 교육은 원래 놀이였는데, 학교교육으로 포장되면서 노동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가? 모두가 자신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뭔가를 배우는 배움의 향연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한가? 학교교육이 ‘노동’이라기보다는 ‘놀이’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소수만이 성공하고 대다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학교교육의 성격을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학교교육의 모습으로 혁신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새 학기부터는 좀 더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노동보다는 놀이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교사를 포함한 모든 교육계 인사들이 ‘노동으로서의 학교교육’을 ‘놀이로서의 교육’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시도했으면 좋겠다. 교사와 학생 모두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적 가치를 향유하면서 한바탕 신명나게 교육적 놀이를 잘 놀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근자에 들어 공무원 장외투쟁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을 꼽는다면 1998년 11월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열린 ‘교원정년단축 반대 전국교육자 총궐기대회’가 아닌가 싶다. 7만여 명도 더 되는 교원들이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초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쿠데타적 정년단축 철회’를 외쳤다. 교원들의 처연하기까지 한 공분(公憤)이 표출됐지만 언론은 짐짓 이를 외면했다. 조선일보에 사진 한 장 달랑 실린 것이 전부인 것으로 기억된다. 신문․방송은 연일 ‘노령교사 1명을 퇴출하면 젊은 교사 2.5명을 채용할 수 있다’는 앵무새 같은 보도를 내보냈다. IMF사태로 경제는 파탄 나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때에 이보다 더 확실한 여론몰이는 없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심리를 부추긴 행태는 교육계의 어떠한 논리와 주장도 먹혀들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당시 이해찬 장관과 교육부 고위관료들의 언론플레이가 무용담처럼 넘쳐나기도 했다. 교육계는 대패(大敗)했고 정년은 3년이나 싹둑 잘려나갔다. 물론 교단을 뒤로한 교원들 대신 젊은 교사가 2.5배로 충원되지도 않았다. 정년단축의 결과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우리 교단을 황폐화시켰으며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새삼 아픈 기억을 더듬는 것은 ‘공무원 연금 개혁’을 둘러싼 작금의 논쟁이 교원 정년단축 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공적(公敵)의 범위가 공무원 모두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른바 개혁 논리부터 보자. 한 신문에 실린 찬성론자의 주장이다. “국민연금에 비해 ‘덜 내고 더 많이 받아오던’ 공무원연금을 국민연금과의 형평을 고려하여 수급액을 낮추겠다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공무원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이 시기에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업이라는 하나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청춘을 바쳐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공무원들의 집단이기주의는 안 된다.” 다음은 개혁에 저항(?)하는 한 공무원의 반론. “국민연금 대상자는 월 소득액의 4.5%를 납부하지만 공무원은 8.5%를 내고 있다. 그래도 연금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공무원들은 전혀 고통분담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먼저 연금 부실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부가 공무원의 동의 없이 쓴 7조 원의 기금을 메우고 또한 그간의 공로보상을 어떻게 할지 납득할 만한 대책을 세운 후 대화에 응해야 한다.” 논지의 요약에 한계가 있을 수 있으나 핵심은 이런 것이다. 국민들 입장에서야 손해 볼 것 하나 없는데 반갑지 않을 리 없다. 게다가 공무원연금의 엄청난 적자를 국민세금으로 보전해 줘야 한다는 말까지 더해지면 공무원의 논리는 맥을 출 수 없게 된다. 이 정부의 주특기인 ‘편 가르기’가 마침내 공무원과 국민을 나누고 있다. 교원과 국민이 나눠졌던 시기를 생각하면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500년 전에 도입된 ‘윈-윈’ 전략 오늘날 기업경영에서 금과옥조처럼 강조되는 ‘윈-윈(win-win)’ 전략은 이미 5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의 자녀교육에서 강조되었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은 삶의 주도적인 원리로 ‘상호 이익을 도모하라’는 인간관계 기술의 핵심원리를 가르쳐왔던 것이다. 이는 조선 최초의 ‘여중군자(女中君子)’를 며느리로 두었던 운악 이함 가문의 ‘지고 밑져라’라는 가풍에서 대표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는 ‘대접 받고 싶거든 먼저 대접을 하라(마태복음 7장 12절)’는 성경구절을 연상케 한다. 이 구절은 세계 최대 부자들을 배출한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에서 고전으로 통하는 바로 그 율법이다.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박사(박약회 회장, 퇴계학연구소 이사장)는 이 가문의 17대 종손이다. 이 박사의 할아버지는 당시 어린 손자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과 사귀거나 일을 할 때는 네가 지고 밑져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쳤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남을 밟아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데 이 박사의 할아버지는 그와 정반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이 박사는 ‘지고 밑져라’ 가풍을 기업 경영에 적용해 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이 박사는 한때 학원재벌로 통하기도 했다. 1970년에 동업자와 함께 학원을 개업했는데 몇 차례 위기를 겪다 급기야 문을 닫아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그는 궁리 끝에 동업자에게 “학원을 계속 운영하려면 추가 증자를 하거나 빚을 얻어야 한다. 이 빚은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는 단안을 내렸다. 이 같은 결정에는 “남과 더불어 일할 때는 희생하고 손해도 볼 줄 알아야 결국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교훈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자 동업자는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그가 하는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싹텄다. 결국 학원은 크게 성공해 장안의 명문으로 떠올랐다. 이 박사는 80년대에 삼보컴퓨터를 우리나라 IT업계의 선두주자로 일구었지만 자금난을 겪다 경영에서 손을 떼야만했다. 이 역시 역설적으로 ‘지고 밑져라’ 가풍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3대에 걸쳐 영남 대표하는 학자 배출 재령 이씨 운악 이함(영해파, 1554~1632) 가문은 석계 이시명(1590~1674)이라는 학자를 배출하면서 명문가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운악 종가는 의령현감을 지낸 이함에 이어 석계 이시명갈암 이현일밀암 이재 등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대학자를 배출해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이들은 영남에서 높은 벼슬보다 더 존경받는 대유학자로 우뚝 섰다. 운악 이함은 56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특이한 이력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운악의 며느리인 정부인 장씨를 주인공으로 그린 이문열의 소설 〈선택〉에는 운악 이함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운악은 임진왜란으로 왜구가 침공하자 집의 창고를 풀어 굶주린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공이 창고를 풀어 기민(飢民)을 먹인다는 소문이 나자 부황난 사람들이 문간이 비좁도록 몰려들었다. 또 물자를 명군에 조달했다. 그 공으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되자 나라가 어려울 때 세운 작은 공로에 의지해 벼슬살이하는 걸 구차하게 여기신 공은 마흔일곱의 연세도 늦다 아니하시고 과거에 응하셨다. 그만큼 당신의 학문에 대한 믿음도 있으셨을 것이다…(중략)… 복시(覆試)를 당당히 지나신 공은 선조 임금께서 친히 임하시는 전시(殿試)에 이르러서도 막힘이 없었다. 정대(庭對, 대과의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답하는 책문)의 말을 올리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고 곧아서 감탄한 시관(試官)이 장원으로 뽑고 임금께 올렸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책문을 보신 선조가 공이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 하여 과방(科榜)에서 이름을 빼게 하고 파직까지 명하셨다. 그 뒤 여러 해 공은 벼슬 없이 지냈으나 선조 36년에 다시 대신의 추천이 있어 의령현감으로 나가셨다. 그러다가 선조가 돌아가시자 공은 다시 한 번 과장(科場)을 찾으셨다. 광해군 원년 공은 쉰여섯의 연치(年齒)로 문과에 급제(합격)하시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공은 벼슬살이가 싫어지셨고 광해조의 난정이 조짐을 드러내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89~95쪽) 운악은 선조 때 장자의 말을 인용해 과거시험에 불합격된 토정 이지함처럼 그 역시 불합격 당한 것이다. 선조는 장자를 무척 싫어한 것 같다. 당시 선조는 “유교경전에도 인용할 말이 많은데 어찌 장자의 밝지 못한 내용을 인용하느냐”며 토정을 불합격시킨 적이 있었는데 운악 역시 토정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운악은 이에 굴하지 않고 무려 56살에 과거시험에 다시 도전해 합격했다. 이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자녀교육에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운악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과거시험에 다시 도전한 것이 아니라 선조에 의해 억울하게 낙방했기에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방편이자 자녀들에게 귀감을 보이기 위해 다시 과거에 나섰을 것이다. 조선 최초로 ‘여중군자’ 칭호 받아 석계는 운악의 셋째 아들로 퇴계의 정통 학맥을 이은 인물인데, 병자호란 때 나라가 치욕을 당하자 경북 영양 석보에 은거하며 살았다. 이 가문은 석계에 이어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 갈암의 아들 밀암 이재 등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학자를 배출하면서 영남의 명가로 우뚝 서게 된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석계의 부인인 정부인 장씨(1598~1680,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내 정부인의 품계를 받음)가 회자되고 있다. 계모로 들어와 전처소생의 1남2녀 등 모두 7남3녀를 키운 장씨는 효행, 학문, 예술 등을 고루 갖춰 신사임당에 버금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은이 쓴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이란 책 서문에도 정부인 장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에서 가장 모범적이요 대표적인 부인 한 분을 말하라 하면, 두말없이 율곡선생의 어머님 사임당 신씨 부인을 내세울 것이요, 혹시 어진 어머니를 말하라 하면, 저 신라 때 김유신의 어머니 만월(萬月), 또 어버이에게 효도한 여성을 헤아린다면 신라 때 지은(知恩), 그리고 다시 학문이 높고 시문에 능한 부인을 찾는다면 고구려의 여옥(麗玉), 글씨를 잘 쓰시었던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의 따님 장씨 같은 이들을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장씨는 퇴계 학맥을 이은 경당의 외동딸로 아버지에게 〈소학〉 등을 배워 시문과 경사에 능했다. 그렇지만 여성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던 장씨는 집안에서 그 역할을 찾았다. 특히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 있던 석계에게 후진양성에 힘쓸 것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자칫 산촌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석계는 부인의 내조에 힘입어 학자로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자녀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장씨는 아버지와 남편, 아들과 손자 등 4대에 걸쳐 정통 퇴계학맥을 잇게 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 이문열은 바로 석계의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의 12대손이다. 그는 에서 이문열 자신을 있게 한 장씨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자신의 재주 숨긴 채 명문가 이뤄 장씨는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유일하게 ‘여중군자’ 소리를 들었던 여성이다. 당시 사대부들이 이름도 불려주지 않았던 여성에게 그들의 이상형인 군자 칭호를 부여한 것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가문경영에 일가를 이룬 장씨를 현대 기업경영에서 보자면 최고의 인재를 키워낸 뛰어난 ‘인재전략 컨설턴트’로 금녀의 벽을 뛰어넘은 최초의 여성 CEO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인 장씨는 문화관광부에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고 자녀 교육에 귀감을 보였다며 ‘이달의 문화인물(1999년 11월)’로 선정하기도 했다. 장씨의 아버지 경당은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학맥을 잇는 유학자로 장씨를 직접 가르쳤다. 무남독녀로 부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장씨는 남자로 태어났다면 입신양명에 나설 자질을 지녔다고 한다. 경당이 자신의 집에서 가르친 제자 중의 하나가 석계 이시명이었는데, 경당은 그를 훗날 사위로 삼은 것이다. 이시명은 당시 27세로 남매를 둔 홀아비였는데, 경당은 이 제자에게 19살 외동딸을 재취부인(再娶夫人)으로 시집보냈던 것이다. 석계의 자녀들 중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은 외조부인 경당에게서 배워 퇴계 학맥을 이었다. 장씨는 병자호란으로 수치를 당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남편에게 “공께서 세상을 버리고 숨으셨으니 마땅히 시와 예로써 자손들을 가르치셔야 하는데 어찌 세월을 그냥 보내십니까? 아이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고 예의를 익히게 하여 앞날을 밝히시고 뒤를 열어주는 일을 어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 말을 듣고 후학들을 힘써 지도했다. 남편과 자식을 통해 여성인 자신이 이루지 못한 길, 즉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기르는 일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칭찬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고 시를 지어 손자를 칭찬하기도 했다. 장씨는 자신의 재주를 숨긴 채, 한 가정의 평범한 가정주부면서도 자녀들을 대학자로 키웠다. 그렇지만 자녀들에게는 늘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있지만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을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기뻐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퇴계의 학문을 잇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은 장씨 역시 과거시험 공부보다 〈소학〉의 본질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하기를 더 바랐던 것이다. 퇴계의 가르침대로 장씨 역시 근본이 없으면 학문이나 재력, 명성 모두 모래성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공부보다 먼저 행동거지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했다. 재물이 아닌 의리 중시하는 교육 장씨도 요즘 어머니들처럼 같은 고민을 했다. 요즘 대부분 어머니들은 행여 아이의 기를 꺾을까봐 아이의 행실이 잘못되어도 꾸짖지 않는다. 그렇지만 장씨는 먼저 아이에게 존귀한 것이 있음을 먼저 가르치고, 이어 아이의 기상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이의 기를 꺾을까봐 과잉보호에 나서면 결국 버릇없는 아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이의 기상을 기른다는 것은 그 꿈을 다듬고 북돋아주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의 젊은 어머니들을 보면 그 둘을 모두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존귀한 것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이의 기를 죽이는 것으로 잘못 알아 겁나는 것이 없는 아이를 길러놓는다. 아이의 욕구를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이의 꿈을 키워주는 것으로 믿어 절제할 줄 모르고 참을성 없는 심성을 부추긴다. 그래서 겁나는 것 없고 욕구를 절제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공공의 장소에서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며 소란을 떨고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도 제 아이 기 살아 있는 것만 좋다고 웃는다. 기껏 나쁜 버릇만 길러놓고 기상을 길렀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164~165쪽) 장씨는 또 아이들에게 재물을 쫓다보면 인간관계를 해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는 오늘날 강조되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몸을 가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게 재물이나 물고기는 향기로운 미끼 때문에 죽고 선비의 아름다운 이름은 재물로 상한다. 재물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서는 값이 없다. 남이 모두 넉넉할 때 내 재물이 많은 것은 자랑과 여유가 되지만 남이 모두 없는데 홀로 많이 가짐은 재앙일 뿐이다. 남이 모두 굶는데 홀로 가득한 곳간은 마침내 화를 부르는 문이 될 뿐이니 너희는 그 이치를 알아 재물을 대하도록 하라. 의리는 무거운 것이고 재물은 가벼운 것이니, 재물은 지금 없다 하더라도 뒷날에 다시 생겨날 수 있으나 의리는 한번 깨어지면 되살리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찌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취하는가.”(168~169쪽) 운악의 셋째 아들인 석계는 부인 장씨의 자녀교육에 힘입어 다시 일가를 이루어 분가를 하게 된다. 현재 운악 가문은 이용태 삼보창업자가 종손이고, 분가한 석계 가문은 이돈(李燉)씨가 13대 종손으로 일가를 이루어오고 있다. 석계가의 종가도 석계가 태어난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가 아니라 그가 은거했던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있다. 이곳에는 그의 후손인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관이 있다. 수많은 명문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가문의 토대를 쌓는 이른바 ‘가문주식회사의 CEO’의 존재 여부이다. 가부장적 신분사회에서 대부분 명문가의 경우 그 역할을 남성이 맡았다. 하지만 남성중심의 사회 속에서도 수많은 여성들이 주역 못지않은 조연역할을 했다. 정부인 장씨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창밖에 소소히 내리는 빗소리 / 소소한 그 소리 자연의 소리(窓外雨蕭蕭 / 蕭蕭自然)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 내 마음도 자연 그대로 일세(我聞自然聲 / 我心易自然) 이 시로 인해 정부인 장씨는 후대인에게 ‘부인 중에서 현명한 유학자(閨閤中賢儒)’라는 평가를 받았다. 즉, 여중군자라는 것이다. 또 장씨는 우리나라 최초로 요리책을 쓴 여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1673년에 요리책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을 썼다. 이미 10살 때 ‘소소음(蕭蕭吟)’이란 시를 쓴 정부인 장씨는 요즘으로 보면 요리에 정통한 전업주부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인이자 자녀교육의 CEO였던 것이다.
김경원 | 저자 [문제] 괄호 안에서 자연스러운 표현을 고르시오. 1. 허구헌 날 밥그릇 (다툼만/싸움만) 허고 앉아 있는 놈들 좀 보게. 2. 갑돌이와 갑순이는 늘 1, 2등을 (다투는/싸우는) 라이벌이다. 3. 개 두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다투는/싸우는) 장면이 볼만했다. 4. 그 친구는 말로 (다퉈서는/싸워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대다. 5. 고래 (다툼/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풀이] ‘다투다’는 어디까지나 말로 시비하는 것 매일같이, 아니 시시각각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부딪히며 다투거나 싸우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그런데 ‘권력싸움’이 아니라 ‘권력다툼’인 것은 왜일까? 그리고 ‘파벌다툼’이 아니라 ‘파벌싸움’인 까닭은? 또 ‘부부다툼’이 아니라 ‘부부싸움’인 것은 어째서일까? 실로 ‘다툼’과 ‘싸움’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먼저 ‘다투다’는 의견이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서로 따지며 옥신각신한다는 뜻이다.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아이들 교육 문제로 아내와 다투다”, “돈 문제로 집안 사람들끼리 심하게 다투었다” 등에서 ‘다투다’는 어떤 사안과 관련해 상대를 누르고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행동인데, 다행스럽게도 이때 이기고자 하는 의지는 ‘말’로만 나타난다. 즉, ‘다투다’는 상대의 감정을 언짢게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말로 시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 말을 할 줄 모르는 동물들은 ‘싸우기는’ 해도 ‘다투지는’ 못한다고 봐야겠다. 한편 ‘싸우다’는 사람이나 동물이 힘이나 무기를 써서 상대를 공격하여 이기고자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이때 ‘무기’에는 ‘말’이라는 수단도 들어간다. 따라서 ‘친구와 싸운다’나 ‘칼로 싸운다’ 같은 용례와 더불어 ‘말로 싸운다’는 표현도 성립한다. ‘다투다’ 안에는 이미 말로 치고받는다는 전제가 들어 있으므로 ‘말로 다툰다’는 표현은 어색할 수밖에 없으나 복합어로서 ‘말다툼’이나 ‘말싸움’은 모두 훌륭하게 성립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이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은 힘이 센 놈들끼리 싸우는데 뜻하지 않게 사이에 끼여 애꿎은 피해를 입는 경우를 뜻한다. 필자는 어릴 때 이 속담을 들은 뒤로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진다”와 곧잘 헷갈렸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고래 싸움’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듯싶다. 고래 두 마리가 거대한 몸집을 서로 부딪쳐 싸우면서 바닷속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상상했더라면 그런 혼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래들이 벌이는 수중 소동이야말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3자인 새우를 피해자로 만드는 원인일 테니 말이다. 여기서 조금 장난기를 발동해서 ‘고래 다툼’을 떠올려보자. 두 마리 고래 사이에서 끼이끼이 하며 고성(?)이 왔다갔다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흥분한 다혈질 고래라면 삿대질도 하고 몸부림도 칠 터이니 바닷속이 꽤나 시끄럽고 물살이 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만 왔다갔다하는 시비인 바에야 새우 등이 터지는 비극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듯하다. 물론 ‘다툼’이 ‘싸움’으로 번지면 새우의 안존이 위태로워질 터이니 눈치빠른 새우라면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으리라. 이렇게 ‘고래 싸움’이냐 ‘고래 다툼’이냐에 따라 새우의 등은 무사할 수도 있고 터질 수도 있으니, 여기에 ‘다툼’과 ‘싸움’의 큰 차이가 있다. ‘다툼’보다 ‘싸움’의 규모가 크다 이렇게 새우 등이 터지느냐 마느냐 하는 절실한 문제에서 충분히 알아챌 수 있듯이, 어쨌거나 말로 싸우는 편이 물리적인 완력으로 싸우는 것보다는 덜 격렬하다. 물론 한마디로 상대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독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력 자체만 따져보건대, 아무리 심한 말이라도 상대를 땅바닥에 쓰러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투다’와 ‘싸우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수단의 차이는 겨루는 주체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투다’는 개인들 사이에서 일대일로 벌어지는 대립이나 갈등을 나타내는 데 비해 ‘싸우다’는 나라와 나라, 아군과 적군, 관군과 의병처럼 집단과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큰 규모의 대결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즉 “이라크와 미국이 싸운다”, “죽창을 들고 적과 싸웠다” 할 때 ‘싸움’은 ‘전쟁’이나 ‘전투’와 동의어가 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갈등이 표현되는 격렬함의 정도에서도 두 낱말 사이에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죽자사자 ‘다툰다’고 한들 ‘싸움’이 발산하는 격렬함에 비하면 약과일 따름이다. ‘싸움’의 대상이 더 고차원적이다 ‘다투다’가 주로 개인들 사이에서 사적이고 일시적인 사안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의견 대립을 의미하는 데 비해 ‘싸우다’는 윤리적인 견해나 정치적 입장을 둘러싸고 공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대립하는 경우를 포함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다투다’는 감정적인 측면이 강하고 때로는 좀스러운 갈등이라는 느낌을 주는 반면, ‘싸우다’는 갈등의 면모가 거창하고 대단하게 느껴지는데다 때로는 정신적 분투나 내면적 투쟁처럼 추상적인 차원까지 아우르는 어감이 있다. 그래서 ‘싸우다’에는 가난, 굶주림, 고통, 죽음, 병마, 추위, 유혹, 자신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맞서 그것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거나 시련을 참아낸다는 뜻이 들어 있다. “조국의 발전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 “시베리아에서 겨울을 맞이한 군대는 살인적인 추위와 싸워야 했다”, “자유는 피 흘려 싸워야 얻을 수 있다” 등이 모두 이런 경우다. ‘다투다’와 ‘싸우다’는 공격성에서도 차이가 난다. ‘다투다’가 상대를 제압해서 쓰러뜨리려고 하기보다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초점을 두는 데 비해 ‘싸우다’는 기필코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싸우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자기 발아래 상대의 무릎을 꿇려야 하니,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의 오기와 승부욕이 따라붙을 수 밖에 없다. 목표가 초점이면 ‘다툼,’ 상대가 초점이면 ‘싸움’ 앞에서 왜 ‘권력싸움’이 아니라 ‘권력다툼’이며 왜 ‘파벌다툼’이 아니라 ‘파벌싸움’이냐는 질문을 던졌었다. ‘다투다’는 남보다 앞서거나 상대를 이기기 위해 서로 겨루되, 어디까지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긍정적인 뜻이 강하다. 즉 ‘권력을 다투다’, ‘왕권을 다투다’, ‘수석을 다투다’, ‘우승을 다투다’, ‘선두를 다투다’, ‘앞을 다투다’, ‘주도권을 다투다’ 등에서 ‘다투다’는 상대를 꺾어 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권력, 왕권, 수석, 우승, 선두, 앞,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따라서 ‘다툼’이나 ‘싸움’이 따라붙는 복합어의 경우에 앞에 오는 말이 어떤 목표를 제시하는 것일 때에는 응당 ‘다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뜻을 좀 넓힐 때 ‘시간을 다툰다’는 관용 표현을 얻을 수 있다. “한시를 다투는 긴급한 출동”, “1분 1초를 다투는 위급한 수술”에서처럼 짧은 시간이라도 되도록 아끼려고 애쓸 때 ‘다툰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목표가 초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고도의 정확성을 다투는 기술”, “1mm를 다투는 정밀성”같이 아주 미세한 차이로 성패가 갈릴 때 ‘다툰다’는 말을 쓰는 것도 똑같은 맥락에서다. 한편 ‘싸움’의 경우에는 대결의 상대가 표면으로 떠오른다. “최선을 다해 싸운 경기였다”, “강한 팀을 맞아 힘겹게 싸웠다”에서 ‘다투다’가 아니라 ‘싸우다’가 쓰인 까닭은 승리라는 목표 자체보다는 상대를 염두에 둔 전투적 대결의식과 승부욕에 초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차이점이 또 하나 있다. ‘다투다’는 엇비슷한 힘을 소유한 이들끼리 대등한 관계에서 갈등하는 것인 데 비해 ‘싸우다’는 힘이나 실력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와 대결하는 경우에 쓰인다는 것이다. ‘부부다툼’이 아니라 ‘부부싸움’인 까닭 그렇다면 목표가 앞에 제시되어 있는 ‘밥그릇싸움’의 경우에는 왜 ‘밥그릇다툼’이 아닌 걸까? 그 까닭은 ‘밥그릇’이 단순히 먹을 것이나 이익을 비유했다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이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밥그릇싸움’이라는 말에는 정당하지 못한 목표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비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다툼’ 앞에는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목표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밥그릇’과 달리 긍정적인 대상인데 어째서 ‘사랑다툼’이 아니라 ‘사랑싸움’인 걸까? 여기서는 ‘사랑’이 쟁취의 대상이 아니라 갈등의 주체라는 데 열쇠가 있다. 즉 ‘사랑싸움’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서로 부딪치며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렇게 대결의 주체가 앞에 붙었기 때문에 ‘사랑다툼’이 아니라 ‘사랑싸움’이 된 것이다. ‘소싸움’, ‘닭싸움’에서 ‘소’와 ‘닭’이 대결의 주체인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부싸움’이다. ‘부부다툼’이면 좋았을 것을, 왜 하필 ‘부부싸움’이 된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해답은 부부라는 갈등의 주체가 전면에 등장하고 또 ‘상대’가 초점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부부라도 일단 ‘싸움’을 벌인 이상 우열을 가리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다투다’가 그저 남보다 더 잘하고자 하는 것이어서 상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는 않는 데 비해 전투성과 공격성을 전제로 하는 ‘싸우다’에서는 진 쪽이 쓰라린 피해를 입게 되어 있다. 따라서 ‘부부다툼’이 아니라 ‘부부싸움’이 된 까닭은 무릇 이런 갈등이 상대의 가슴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어서인지도 모른다. 실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요약] 다투다 ∙개인들 사이의 일대일 대립만을 가리킴 ∙말이 주요 수단 ∙대등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 경쟁, 비교적 일상적인 대립 싸우다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 대결을 두루 가리킴 ∙말보다는 힘이나 무기가 주요한 수단 ∙제압을 목적으로 한 격렬한 대립 [답] 1. 싸움만 2. 다투는 3.싸우는 4.싸워서는 5.싸움
변수란 | 일본 동경한국학교 파견교사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수업이 끝난 후 학급 아이들을 잠시 남게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담임선생님이 남으라고 하면 야단맞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들 좋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보충 학습을 위해서 혹은 교실 청소를 위해서 반 아이들을 남게 하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게 되었다. 잠시 남으라는 말에 되돌아오는 첫 마디가 “저, 학원가야 하는데요”다. 그래서 요즘은 청소도 수업이 끝나고 하기가 힘들다. 한 분단에 열 명이나 되건만 청소를 할 수 있는 아이는 고작 한두 명이다. 거짓말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현 상황이 그렇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특기적성교육은 수업이 끝난 후 바로 시작이 되고, 개인적으로 학원에 가는 아이들도 학교에서 머뭇거릴 시간은 좀처럼 나질 않는다. 청소야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미리 해둘 수도 있다지만 보충 학습(보습)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학원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남기를 꺼려하는 것에는 씁쓸함마저 느끼게 된다. 입시 전쟁을 비롯한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 등 비정상적 교육열은 일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중·고교의 입학시험이 있는 일본의 경우 학원 수강에 있어서는 한국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다. 제법 오래된 통계이기는 하나 93년에 실시된 구 문부성의 조사에 의하면 500만 명이나 되는 초·중학생이 학원에 다닌다고 나와 있다. 컴퓨터다, 영어다 해서 배울 것이 더욱더 많아진 지금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숫자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이렇게 학원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 가는 것일까? 일본의 교육행정학회장으로 있는 유우키 마코토씨는 그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그 첫째는 진학과 학력 획득을 위한 경쟁, 둘째 학원을 통한 학교교육의 보상, 셋째는 최근 높아지고 있는 사립 중·고교 지향을 들고 있다. 사립 중·고교로의 진학률이 높은 지역일수록 학원에 다니는 비율이 현저히 높게 나와 있다. 일본의 한 일간지에서 얼마 전 ‘학원의 존립 여부’에 관한 여론 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 6344명 가운데 약 80%가 학원은 ‘학력 향상을 위해서 있는 것이 좋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초·중학생 자녀를 학원에 보내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학원에 보내는 이유’에 대해 조사한 결과 ‘중·고교 수험을 위해서’라는 답변이 2135명 응답자 가운데 약 60%로 가장 많았고,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해서’, ‘학교 수업을 따라 가기 위해서’, ‘기타’가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 또한 ‘다니고 있는 학원의 종류’에서는 ‘진학 학원’, ‘보습 학원’, ‘기타’의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여 복수 회답을 가능하게 한 결과 응답자 1920명 가운데 ‘진학 학원’이 65%, ‘보습 학원’이 25.2%, ‘기타’가 16.1% 순으로 나타났다. 교재비 등을 포함한 학원비 지출액 조사에서는 3만 엔 이상이라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30%를 넘어서고 있다. 위 여론 조사의 결과처럼 평소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다니는 보습 학원보다 입시를 위해 다니는 진학 학원 수강률이 몇 배나 더 높은 것은 사립이나 이름 있는 중·고교로 입학 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부터 진학 학원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보호자의 의식에는 공립학교의 전반적 분위기에는 만족하고 있으나 수업의 질적, 양적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보호자들의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학교의 기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학교는 원래 지·덕·체 3요소를 아우르는 전인교육을 실시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최근에 와서는 정보교육까지 포함되어 교육과정 내용이 훨씬 많아졌다. 이에 반해 진학 학원 및 보습 학원은 상급 학교로의 진학 및 학력의 보강, 향상에만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학교와 학원의 존재 의의가 다르다. 의무교육1) 으로서의 공립 초·중학교 교육은 모든 아동·학생들에게 최저한도에서의 교육을 평등한 시각에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요즘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적 여유가 있으니 수강료가 비싼 학원에 쉽게 보낼 수 있고 고액 과외도 주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경제력과 학력은 비례한다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언젠가는 학교 무용론이 가시화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학급의 남자 아이 한 명이 결석을 하는 바람에 그날 실시한 국어 시험을 혼자만 보지 못했다. 그 다음 날 등교한 그 아이에게 오후에 남아 시험을 보고 하교하도록 지시했더니 수학 학원을 가야 해서 남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참을 그 아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니 내일도 다른 학원이 있어서 안 되겠고, 모레쯤엔 남아서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쩔 땐 ‘그래, 모르는 건 학원에 가서 배우거라’, ‘학원 숙제도 많은데 학교 숙제는 조금만 내 줘야겠지?’라고 교사로서 무책임한 말을 할 때도 솔직히 있다. 물론 화가 나서 한 말이긴 하지만 학원에 의존하는 것은 책임 방치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지난 호에서 일본 어느 지역의 중학교에서는 학원 강사를 불러 보습을 하게 하는 등의 활동으로 학력 향상을 도모하고 있는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이 또한 교육 행정이 학원에 접근하고 있는 한 단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일반화가 되면 그다지 모양새는 좋지 않은 일이라 여겨진다. 어떻게든 공교육의 본질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체능과 같이 현실적으로 학교에서 전문적 교육이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한 교과 공부는 학교에서 마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의무교육 기간 동안 만큼은 학교에서 보충 학습 등을 통해 학습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수업을 끝내고 또 보충 학습을 한다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들이 하교한 후에 본격적으로 학급 업무를 보거나 교재 연구 등을 해야 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몸은 좀 고될지언정 아이들이 학교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의식 없이 학원을 오가는 일은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학교 수업을 좀 태만히 해도 ‘학원에 가니깐 괜찮다’라는 인식이 심어지면 그 아이는 계속적으로 학교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런 아이들은 학원에 가도 여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학력 향상 또한 기대하기 힘들다. 결국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또 다른 학원을 찾게 되고 이중 삼중의 학원 수강은 불가피해진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빼앗기게 되고 보호자들은 보호자대로 교육비 지출에 부담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교육에 관한 근본적 의식의 전환이 없는 한 학원은 계속적으로 늘어갈 것이고 학교보다 학원을 더 신뢰하는 보호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학원은 이제 더 이상 학교의 보조 기능을 하는 장소가 아닌 메인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고 고착된 사회 풍토로만 치부해서 간과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이야말로 공교육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한계점으로 지적되어 온 부분을 다채로운 시각에서 해결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