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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한국교육신문 정은수 기자] 인헌고를 시작으로 정치편향 교육이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선거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부의됐다. 한국교총은 학교의 정치장화를 우려하며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 패스트트랙 법안으로 지정된 선거법 개정안은 27일 90일의 심사기간이 종료되면서 국회 본회의에 자동으로 부의됐다.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의원정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선거연령의 만 18세 하향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국교총은 그간 지속해서 교실의 정치장화 조장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만 18세 선거연령 하향 및 선거운동 허용법’으로 규정하며 이에 반대해왔다. 교총은 “만 18세 선거법은 단순히 선거연령만 한 살 낮추는 게 아니라 고3 학생들의 선거운동과 정치활동을 허용해 교실이 정치장화할 수 있다는 국민적 우려가 크다”는 입장이다. 학생의 선거운동과 정당 가입·활동을 허용하고 있는 개정안이 통과되면 학생들이 특정 정당과 후보자를 지지, 반대하는 선거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할 수 있게 되며, 학생 간 찬반 갈등이 교실에서 본격적으로 표출될 여지가 있다. 여기에 정치권과 시민·사회세력까지 가세해 학교 내로 들어온다면 교사들마저 정치편향 교육 논란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 교총이 가장 우려하는 지점이다. 학생들이 정치사범으로 내몰릴 우려도 있지만, 그에 대한 예방·보호대책이 없는 것도 문제다. 선거운동의 허용 범위와 처벌 조항이 매우 복잡하고 모호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유언비어의 SNS 게시, 흑색·비방활동, 인기·모의투표 등 수많은 부정선거 사례에 노출될 경우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교총은 다른 법률과의 충돌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현재 민법에서는 성년연령을 19세로 명시하고 있고 청소년보호법도 19세 미만을 청소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교총은 18세 선거연령 하향을 따로 다루지 않고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법안에 포함시킨 것은 이런 논란을 피하기 위한 의도로 비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교총은 이런 문제점을 중심으로 선거법 졸속 추진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2일 국회 앞에서 가질 계획이다. 기자회견에는 교총 외에 △대한사립중고등학교교장회 △한국초중고사학법인협의회 △한국교육삼락회총연합회 △학교바로세우기전국연합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 △바른교육권실천행동 △전국학부모단체연합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모임 △좋은학교바른교육학부모회 △교육과학교를위한학부모연합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전국학교운영위원회연합회 △자율교육학부모연대 등 교육단체와 범시민사회단체연합을 비롯한 다수의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할 예정이다. 한편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패스트트랙 법안을 정기국회 종료일인 10일 이전에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선거법 개정안 부의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법안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교육신문 정은수 기자]정부가 결국 지난해 대입 개편 공론화 결정을 뒤집고 정시 수능위주 전형을 더 확대하기로 했다. 교총은 대입제도를 정권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개편하지 못하도록 법률로 명시할 것을 요구했다. 교육부는 28일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쟁점이었던 대입 전형 간 비율은 학종과 논술 위주 전형 쏠림이 있는 서울 소재 16개 대학에 수능 위주 전형을 40% 이상 확대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논술 위주 전형과 어학·글로벌 등 특기자 전형 폐지도 유도하기로 했다. 학종은 자기소개서와 비교과활동은 폐지하기로 했다. 대학은 세부평가기준을 공개하고 1인당 평가 시간을 확보하고, 고교는 교사 평가·기록 역량을 강화하고 불공정 기재에 대한 엄정한 징계기준을 적용키로 했다. 또 사회적 배려 대상자 10% 이상 선발을 의무화하고 수도권 대학에서는 지역균형 전형 10% 이상 선발하고 학생부 교과 위주로 선발하기로 했다. 방안이 발표되자 교육계의 비판이 쏟아졌다. 교총은 이날 입장을 발표하고 “전 법무부장관 자녀의 입시 부정과 도덕성 문제는 도외시한 채, 결국 대입제도만 또 뒤바꾸고 밀어붙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교총은 “공론화 결정을 파기하고 정권의 입맛에 따라 대입제도가 또 바뀌었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며 “그럼에도 교육부는 새로운 수능체계를 2021년까지 마련해 2028학년도부터 적용하겠다는 재개편 예고까지 해버렸다”고 개탄했다. 이어 “대학입시라는 국가 교육의 큰 틀은 한번 정하면 쉽게 바꿀 수 없도록 법률로 명시해 제도의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정시 확대는 전형 간 균형 차원에서 공감한다”면서도 “지난해 공론화 과정에서 45%가 주요하게 제시됐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정권의 요구에 떠밀려 특정 학교만 적용하는 급조된 정책을 발표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정 대학의 40% 적용을 위해 결국 재정을 무기로 대학의 선발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태도 지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비교과영역 폐지에 대해서는 “지난해 공론화 과정을 통해 기재 범위를 대폭 축소했음에도 한 번 시행조차 해보지 않고, 아예 미반영하는 것은 학종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과 학교의 다양한 교육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학생부 기록의 공정성을 위해 ‘연수’ 외에 별다른 대안 없이 불공정 기재 시 엄정히 징계하겠다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교총은 “이런 상황에서 징계기준만 강화하는 것은 학생의 다양한 정보 기록에 부담으로 작용해 학생부 기록 자체를 위축시킬 수 있다”며 “교원 증원 등 고교교육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선순환을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 모임’은 “정시 40%와 확대를 서울 소재 16개 대학으로 한정한 것은 납득할 근거 없이 어중간하게 절충한 총선용 정시확대”라고 비판했다. 특히 “비교과영역을 폐지하면 학생부교과전형과 다를 바 없고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의 정성평가 요소는 유지돼 불공정 여지는 남긴 최악의 대입전형”이라고 혹평했다. 실천교육교사모임도 “교육을 총선용 정략으로 접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면서 “40%에는 객관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으며, 교육부가 집중 관리하겠다는 대학과 나머지 대학의 차이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교육적 설명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또 “교육부가 대학 서열화를 공인하면서 사교육계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새”라는 의혹도 제기했다.
품위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을 지칭한다. 어떤 사람이 고상하고 격이 높은 인상을 지니면 품위가 있다고 칭찬함은 물론이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교사의 경우에는 ‘사표(師表)’로 삼아 진정으로 사도(師道)를 걷는 스승으로 예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반(反)하는 경우는 교사로서의 품위 유지의 의무를 어긴 것으로 간주되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도 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교사의 품위유지 위반이 사회문제화 되는 시대도 헤아리기 쉽지 않다. 예컨대, 각종 스쿨미투에 등장하는 막말, 제자와의 성관계로 파격적인 비윤리적 행위, 각종 학교폭력 사건 및 비위에 의한 송사, 내신 성적의 조작 및 시험지 유출, 학생부의 의도적인 기록 수정 등 수많은 범법 행위 내지 교사의 품위유지 의무를 망각한 온갖 사건들이 풍미하고 있다. 이른바 교사로서의 품위를 먹칠하는 사건, 사고가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있다. 교사는 어린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지도자이다. 단지 자신의 행위 자체의 과오나 불명예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후유증이나 여파는 동심을 멍들게 하고 오염시킨다. 이는 어린 인생을 망가트리는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기에 그 심각성은 여타 사건과 비교하기가 적절치 않다. 교사는 어린 학생들이 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다른 직종의 여타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도 교사에게는 반드시 품위 있게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학교의 관리자로서 늘 소속학교의 교사 제위에게 ‘거울을 보는 교사’ 되기를 강조한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용모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기를 권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돌아보아 당당한 교사는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교감 발령을 받고 지인들의 축하를 받을 때였다. 냉철하고 지성을 갖춘 모 교사가 “교사의 품위를 잃지 않고 권위 있게 살아온 그간의 노고가 대우를 받는 것 같습니다. 부디 관리자가 되어서도 품위를 유지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축하와 덕담을 해주었다. 이 말 속에 연거푸 ‘품위’라는 단어를 강조하던 것이 가슴에 와 닿았다. 결국 품위라는 단어는 어느 교사의 가슴 속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언행의 나침반으로 작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건데 필자가 품위를 유지한 교사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두 가지만이라도 철저하게 준수해온 행동철학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첫째, 타인이 없는 곳에서는 절대로 그 사람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삶의 원칙을 고수해 왔다. 절대 타인에 대한 비판이나 나아가 험담은 숨어서 비겁하게 하지 않았다. 둘째, 불필요한 말을 삼간다는 절제심이다. 인간의 불행은 입에서 시작된다는 평소의 믿음과 말이 많으면 그중에는 반드시 쓸데없는 말이 있어 화의 근원이 된다는 믿음을 간직해 왔다. 지금도 필자는 말실수로 인해 구설수에 오른 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자평한다. 여기엔 한때 말실수가 준 아픈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여학교에서 근무하던 때, 남자에 대한 일종의 기피증세 내지 혐오감을 보이던 담당학급의 한 여학생에게 생활지도 차원에서 ‘아버지가 안 계시니 특히 행동에 조심하라’는 충고가 사단이 되어 홀로된 학부모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던 경험이 있다. 그 후 평생 교사생활에서 신중한 언어 사용의 절대 지침으로 작용해 왔다. 교사의 품위 유지는 어렵고도 또한 단순할 수도 있다. 학생과 학부모 앞에서 지식인답게 언행일치를 추구하고 한 마디 말에도 신중하게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역지사지하는 것이다. 동료 교사와의 관계에서도 칭찬은 진심을 담아서 하되 절대로 뒷 담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일상행동의 근간으로 삼으면 습관화되어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교육자의 품위를 지키며 사는 것이 나중에 그 어느 보상보다도 의미 있는 삶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가 무엇인지, 어떤 것이 옳은지에 대해 답을 하기 어렵다. 옳다고 믿었던 것이 그른 것이 되기도 하고,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주류의 보편적인 생각이 되기도 함을 경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자체가 정치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삶을 조금이나마 풍요롭고 정의롭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이 정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편향교육으로 고통받는 학생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나름의 담론을 갖고 생각을 나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필요한 과정이다. 교육의 현장에서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고 익숙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학교 교육은 철저히 정치 중립적이어야 한다. 하나의 사실에 접근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가르쳐주되 어느 하나의 정치적 입장만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헌법 명시된 것처럼 공직자의 정치적 중립성은 엄정하게 지켜져야 하는 부분이다. 서울 인헌고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수업 중 정치편향 발언을 들었다는 학생이 100명 가까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당한 문제를 제기한 학생은 따돌림을 당한다고 한다. 소신을 이야기했다가 학교에 의해 지탄받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들을 지켜주어야 함에도 교육청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린 학생들이 학교를 고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어려움이 있었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어느 쪽 입장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정치적 문제가 학교에서 문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정치적 중립이 보장되지 않고 특정 학생들의 생각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교육자로서,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행동이 분명하다. 물론 교사도 개인적 정치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입장이어야 한다. 이를 수업을 통해 전달하고 강요한다면 분명한 위법인 것이다. 아이들은 배워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알려주어야 한다. 교사 개인의 신념을 전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고, 그것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면죄할 수는 없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인헌고에 대한 감사를 진행한 결과를 발표했다. 학교의 잘못은 없으며 상식적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는 하였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이러한 교육청의 판단에 불복한 학생은 삭발시위를 하기도 하였으며, 마라톤 대회에 영상이 찍힌 학생들은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을 학폭위에 신고했다는 뉴스도 보았다. ‘정치’라는 첨예한 부분의 담론이 학교에 들어왔을 때 생기는 혼란을 인헌고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학교의 정치적 중립성은 혼란을 막아주기 위한 보루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선거연령까지 낮춘다니 걱정 이번 사태의 문제를 제기하는 관점을 누군가는 적폐라는 낙인으로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치적 판단과 결정이 가치 중립이 보장되어야 하는 학교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 5년간 교사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각 시·도교육청에 제기된 민원만 300여 건에 달한다. 엄연히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기준을 감독조차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학교의 정치편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거연령을 만18세로 낮춘다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있다. 고3 학생까지 선거권뿐만 아니라 선거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학교에서 생길 혼란과 반목을 고려하여, 학제 개편과 함께 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학교는 결코 정치의 공간이 돼서는 안 된다.
교육부에서는 전국적으로 180여만 명에 이르는 위기 청소년의 지원을 위해 2008년부터 1, 2, 3차 안전망을 구축하여 운영 중이다. 1차 안전망으로서 전국 초, 중, 고등학교에는 위클래스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고, 2차 안전망으로는 교육지원청마다 위(Wee)상담센터를 구축하고 운영 중이다. 특별히 대구에는 병원 위센터를 만들어 정신건강증진에 더욱 힘쓰고 있어 전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3차 안전망으로는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지원 제도 위기 청소년을 위한 정책으로 1차에서 3차 안전망으로 잘 구축되어있다. 이는 청소년 정책으로 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우수한 제도로 인정받는다. 필자는 이 제도의 처음부터 이 업무에 종사하여왔고, 위클래스와 위센터를 구축하여 운영해본 경험과 학생상담지도 이론에 비추어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위센터는 단위학교 위클래스 상담실에서 의뢰한 학생에 대해 솔루션(해결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단위학교 위클래스 상담실은 1차 안전망 역할을 하고, 지역교육청에 설치된 위센터는 2차 안전망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1차 안전망인 위클래스 상담실에서 의뢰한 사례에 대해서 2차 안전망에서는 그에 대해 더이상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원스톱(One Stop)으로 지원하여 “아하! 이러면 되겠구나!”라는 확신이 생기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일부 위센터에서 여러 가지 행사 준비에 에너지를 빼앗기거나 흥미위주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하여 운영하다 보니, 정작 힘써야 할 내담자의 핵심 문제 파악이나 지원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둘째, 위클래스에서 심리평가를 의뢰하면 위센터에서는 가능한 빨리 답변해주어야 한다. 단위학교에서는 전문적인 심리평가가 쉽지 않다. 학생 상담활동에 소극적인 학생이나 학부모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체계적인 지원을 위해서는 심리평가가 필요하지만, 상담 인력이 혼자 근무하는 위클래스에서는 이를 수행하기 어렵다. 1차 안전망에서 내담자의 심리평가를 의뢰하면 2차 안전망인 위센터에서는 적어도 2주 내에 답변을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2차 안전망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 전문인력(임상심리사) 혼자서 100여개 학교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고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운영방법을 모르고 하는 얘기이다. 필자는 위클래스를 운영할 때, 학교와 임상심리전문가 자격이 있는 대학교수 및 상담센터와 연계하여 심리평가를 실시해온 경험이 있다. 역할수행에 맞는 지원도 필요 자녀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 학부모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설명하면, 일부 학부모는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며 부인하거나 소극적으로 응하는 경우가 있다. 카운슬러는 참으로 난감하다. 이럴 때 외부전문가의 의견과 심리평가 결과를 설명해주면 학부모의 태도가 변하여 카운슬러의 의견을 수긍하고 협조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현재 전국에 200여 개가 넘는 위센터에서는 2차 안전망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교육부에서는 세계적으로 탁월한 위기 청소년 지원을 위한 위(Wee)상담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이 시스템이 빛을 발하도록 위센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 바란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학생에게 필요한 미래의 핵심 역량은 무엇일까? 전 세계 석학들의 연구 결과는 6가지로 종합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문제해결 및 혁신능력 둘째, 학습을 위한 ICT의 사용능력 셋째, 지식 구축능력 넷째, 숙련된 의사소통능력 다섯째, 자율 규제 및 평가능력 여섯째, 협업능력이다. 이러한 핵심역량을 구축하기 위해 가장 앞서가는 집단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단연코 글로벌 기업이다. 하지만 보수성이 강한 학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대로는 시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출 수 없다는 절박감,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와 지식들이 학교, 아니 교육시스템을 압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국제적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집단지성을 추구하고 미래를 예견하며 미래의 주인공이 될 청소년들을 위한 미래교육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기업의 사훈으로 ‘모든 사람과 조직이 더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마이크로소프트사(MS)는 한물간 1990년대의 슈퍼스타에서 AI를 접목한 클라우드로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3대 회장 체제로 경영권의 승계를 이룬 MS사는 지능형 클라우드와 지능형 에지를 계발하면서 전 세계 고객의 성향에 맞게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려는 야심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나 “문화로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집단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집단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표를 더 많이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라고 주장하는 Satya Nadella 회장의 말은 압도적인 기술과 그 기술에 대한 선도적인 문화를 창조하는 기업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 미래의 기업이 발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세상의 변화,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준비시켜야 할 시대적인 사명을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오늘날 존재하는 직업의 50% 이상이 기술역량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이내에는 직업의 77% 가 혁신적인 기술역량을 요구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학생들은 이러한 직업에 대비하려는 기대 또한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고등학교의 60% 만이 컴퓨터 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 기술 격차는 놀라운 변화와 변화의 배경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의 유치원생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대학 과정을 공부하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역할에서 일하며, 역사상 가장 복잡한 환경, 사회 및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학습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잠시 미래의 교실로 가보자. 교실에서의 모든 순간은 삶의 가장 인상적인 경험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사는 모든 학생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식으로 문제 해결 기술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는 학생들이 학교와 삶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준비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다. 사회적, 정서적 기술의 플랫폼과 함께 학습에 대한 더 많은 학제적 접근방식을 통합하여 미래의 과학자, 프로그래머, 예술가, 건축가뿐만 아니라 그들이 아직 가지고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까지 만들 수 있도록 변화된 경로를 열어 줄 것이다. 즉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초등학생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중학생에게는 창조 동기를 부여하며 고등학생에게는 새로운 기술을 연결하기 및 역량 키우기에 집중하는 교육과정을 운영할 것이다. 따라서 교사들의 적극적인 마인드와 혁신 프로그램을 활용한 교육은 학생들이 더 많은 것, 나아가 모든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범용 한국금융투자자보호재단 전임연구원] 개인 신용등급을 1~10등급으로 나눠 대출 심사와 대출금리 결정에 활용하는 시스템인 신용등급제가 곧 사라질 예정이다. 신용등급별로 분류기준이 다른데 1~2등급은 우량등급으로 신용거래가 많고 거래실적이 우수한 사람, 3~4등급은 거래실적은 부족하나 등급 상승 가능성이 많은 사람으로 분류된다. 5~6등급은 현금서비스 이용 경험이나 연체 경험이 있는 사람이며 7~8등급은 주의등급으로 대부업체 거래가 많거나 단기연체 경험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으로 신용카드 발급 가능성이 낮다. 9~10등급은 위험등급으로 현재 연체 중이거나 연체 경험이 많은 경우에 해당된다. 은행·카드회사 등 금융회사들은 대출, 신용카드 발급, 신용거래 개설 등을 결정할 때 신용등급을 참고한다. 따라서 신용등급이 낮으면 각종 금융거래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신용등급 6등급 이하는 시중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기 힘들고, 7등급 이하부터는 신용카드 발급이 거절된다. 또한 신용등급별로 대출금리가 다르게 적용돼 신용등급이 낮으면 높은 금리를 적용받는다. 전국은행연합회의 시중 3개 은행 일반신용대출 신용등급별 금리현황(2019년 8월 기준)을 살펴보면 1~2등급의 평균 대출금리는 연 3.24%이지만 9~10등급은 9.70%로 약 3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신용등급별 특징 등급 구분 의미 및 특징 1~2등급 최우량등급 오랜 신용거래 경력과 다양하고 우량한 신용거래 실적을 보유하고 있어 부실화 가능성이 매우 낮음 3~4등급 우량등급 활발한 신용거래 실적은 없으나 꾸준하게 우량 거래를 지속한다면 상위등급 진입 가능하며 부실화 가능성은 낮은 수준임 5~6등급 일반등급 비교적 금리가 높은 금융업권과의 거래가 있는 고객으로 단기연체 경험이 있으며 부실화 가능성은 일반적인 수준임 7~8등급 주의등급 비교적 금리가 높은 금융업권과의 거래가 많은 고객으로 단기연체 경험을 비교적 많이 보유하고 있어 부실화 가능성이 높음 9~10등급 위험등급 현재 연체 중이거나 매우 심각한 연체 경험을 보유하고 있어 부실화 가능성이 매우 높음 1점 단위로 세심하게 환산 이처럼 개인의 신용을 등급으로 나누다 보니 등급 간 문턱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예컨대, 신용등급은 7등급이고 신용점수는 629점인 사람은 신용등급은 6등급이고 신용점수는 630점인 사람과 사실상 큰 격차가 없음에도 대출 심사 때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제도권 금융회사들이 통상 6등급까지만 대출을 해주는 경우가 많아 7등급은 대부업체나 사금융을 이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준이 너무 포괄적인 신용등급제 대신 세분화된 신용점수제가 등장했다. 신용점수제는 1000점을 만점으로 하며 모든 신용을 1점 단위로 환산한다. 개인이 신용이 어느 등급인지 대략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신용상태를 반영해 세심하게 점수로 환산하는 것이다. 신용점수제 도입으로 신용 관리나 대출금리 산정이 보다 정확하게 이뤄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625점과 626점이 같은 신용등급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둘을 다르게 구분한다. 즉 세분화된 신용점수를 기준으로 신용 상태를 파악하기 때문에 대출금리도 각자의 신용점수에 따라 정교하게 책정할 수 있게 돼 이전처럼 1점 차이로 낮은 신용등급을 받아 더 높은 금리를 적용받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이미 올해 1월 4일부터 국민, 우리, 신한, 하나, 농협 다섯 개 은행이 신용점수제 평가체계를 도입했고 내년도에는 전 금융권에 도입될 예정이다. 상환이력, 신용거래 등 반영 신용점수제는 신용등급제보다 세밀한 만큼 보다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신용평가는 상환이력(연체 여부), 부채 수준(대출, 신용카드), 신용거래 형태 및 기간 등 다양한 요소를 반영해 이뤄진다. 관리를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신용점수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신용점수는 신용평가사(CB)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접속에 4개월에 한번씩, 1년에 총 3회까지 무료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카카오뱅크나 토스 같은 앱에서도 신용점수를 무료로 확인할 수 있으니 본인의 신용점수를 정기적으로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건전하게 신용거래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인데 신용카드 보유 개수와 신용점수는 무관하다. 단, 단기간에 여러 장 발급받으면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으로 평가돼 영향을 줄 수도 있으므로 좋은 신용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환능력에 맞게 신용카드를 꾸준히 사용하면 된다. 신용카드 사용이나 대출 등의 금융거래가 없는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의 경우 보통 중간등급의 신용점수가 적용되는데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를 연체 없이 월 30만원, 6개월 이상 사용한다면 신용평가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공공요금 및 보험료, 통신비 등 비금융 분야에서도 연체 없이 활발히 활동했을 경우에도 신용평가에 긍정적으로 반영될 수 있다. 신용평가 최대의 적은 ‘연체’ 대출을 받아야 한다면 은행을 먼저 이용하는 것이 좋다. 카드사, 캐피탈, 저축은행, 대부업권 등에서 대출을 받거나 현금서비스를 이용하면 제1금융권인 은행을 이용할 때보다 신용평가에 불리하게 반영될 수 있다. 또 은행에서는 저신용자를 대상으로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새희망홀씨’와 같은 대출도 별도로 취급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신용점수가 낮아 은행 대출은 안 될 거야’라고 지레 생각하지 말고 은행을 먼저 방문해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연체된 대출이 여러 건 있다면 연체돼 있는 금액이 적은 대출보다 연체기간이 긴 대출을 먼저 상환하는 것이 좋다. 연체는 그 기간이 길수록 신용평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만약 연체기간이 같다면 금액이 큰 것부터 상환하는 것이 신용평가에 더 유리하다. 그리고 연체를 갚았다고 해서 바로 신용점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소액이거나 단기더라도 연체가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신용등급제에서 신용점수제로의 전환은 기존 신용등급 평가방식으로 인해 불이익을 입었던 이들에게는 환영받을 일이다. 하지만 평가방식이 정교해질수록 실제 신용평가 시에는 더욱 까다로운 평가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만큼 신용관리에 대한 책임감은 커진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신용관리에 소홀했거나 관심이 적었다면 현재 자신의 신용상태와 신용관리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 보고 신용점수제로의 전환을 계기로 더욱 신용관리에 힘을 쓰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일찍이 독립운동에 눈떠 최초의 여기자로 기층 민중의 고단한 현실 발굴 ‘여학교 교장은 여자로’ 신념… 女權 신장에 앞장 해방 이후 독립운동·근대여성 역사 기록으로 남겨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최은희는 1904년 황해도 백천에서 ‘백 간이 훨씬 넘는 고대광실’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말을 빌면 “개화에 앞장선 혁명가요, 풍운아”인 아버지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향리에 3개의 학교를 세울 만큼 개화를 받아들인 선각자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시기의 다른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어린 시절에 ‘총각’으로 불렸다. 고향인 창동(彰東)소학교 여학교에 입학하면서 출생지인 은천면(銀川面)의 이름을 따서 은희(銀姬)라는 이름을 비로소 얻었지만, 학교에서 다시 은희(恩喜)로 고쳐줘 이것이 평생의 이름이 됐다. 이처럼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배제와 차별은 그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집안의 족보를 본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를 알아차린 아버지는 오빠들에게나 읽힐 책이라고 해서 그녀에게 좌절을 안겼다. 나중에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여름방학에 집으로 온 그녀에게 아버지는 집안의 가보로 내려온 옥돌 도장함을 준다. “가문을 지키지 못할 딸이지만, 네 동생은 아직 어리고…”라며 말끝을 흐리는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의 아버님 흉중을 헤아릴 길이 없다”고 말한다. 어리고 병약한 그의 남동생은 17세의 나이로 조사(早死)했지만, 집안을 이을 후손의 앞날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딸에게 가보를 물려주는 아버지에게서는 스러져가는 가부장제의 쓸쓸한 잔영이 배어난다. 아버지의 이러한 회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그녀는 자서전에서 부계인 ‘탐진 최 씨의 상조(上祖)들’을 여러 장에 걸쳐 상세하게 적어 뒀다. 최은희는 자신의 학생 시절은 “소녀다운 기분도 없었고 낭만도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저 열심으로 공부하고 우리의 힘을 모사 유사지추(有事之秋)에는 국권 회복을 조금이라도 돕겠다는 결심 뿐”이었다는 것이다. 1980년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하면서 그녀는 “나는 지금 생각해도 내가 공부를 하려 학교를 다녔는지 배일 운동을 하러 학교를 다녔는지 분간할 수 없다”고 적었다. 실제로 그는 1919년의 3·1운동에서 다니던 경성여고보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구한말 관립 한성여학교의 후신으로서 경성여고보는 식민지 여성 교육 전범으로서의 중요성을 지닌 만큼이나 이 학교에서 만세 시위는 일제의 여성 교육을 부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1917년부터 최은희는 당시 기독교 중앙감리교 전도사이자 나중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와 연락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강연회와 좌담회 등에 참석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28일 최은희는 박희도에게서 3·1 독립선언서 한 장을 전달받고 내일 정오에 전체 학생들과 탑골공원으로 나오라는 말을 듣는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결사대원들과 함께 선언서를 펼쳐 본 최은희는 “우리가 갈망하던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서로 손들을 붙잡고 감격과 흥분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고 술회한다. 학교에 의해 잠긴 기숙사 문을 강제로 부수고 만세 시위에 참여해 경복궁을 향해 가는 시위 도중 흰 두루마기에 학교 모자를 쓴 제일고보 남학생이 권련을 빨면서 지켜보는 모습을 본 그녀는 그대로 뛰어올라 보기 좋게 뺨을 갈겼고, 불의의 습격을 당한 그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남학생들이 달려들어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엎어 놓고 때려줬다. 당시 졸업반이었던 그녀는 졸업 증서를 주려는 교장에게 마룻바닥에 침을 뱉고 돌아서며 일본 연호를 쓴 졸업장 따위는 받지 않아도 좋다고 교장실을 뛰쳐나올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하고 기개가 있는 여성이었다. 석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만세 시위에 참가해 징역 6개월에 2년의 집행유예를 받아 출감했다. 특별 복권된 이후 도쿄 유학을 가서도 최은희는 학교의 특별 행사나 학급 회합에서 자랑스럽게 한복을 입고 다녔다. 도쿄의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에서 공부하던 그녀는 1924년 여름방학에 귀국했다가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 여기자로 조선일보에서 일하게 된다. 서울에서 이광수를 방문한 그녀는 그의 부인인 의사 허영숙(許英肅)이 황금정(지금의 롯데호텔 부근)에 사는 부호의 집에 왕진한 이야기를 듣는다. 노산으로 산고를 겪은 부호의 부인이 무사히 해산했는데도 왕진료가 비싸다는 이유로 지급을 미루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최은희는 자신이 해결해 보겠노라고 나서서 이튿날 그 집에서 온종일 버틴 끝에 마침내 왕진료를 받아내고 말았다. 요즘 언론계 말로 하자면 이른바 ‘뻗치기’를 한 것이다. 그녀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계기는 이 일에서 비롯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상재 사장, 안재홍 등이 주필이 돼 대대적 개혁을 하고 있었는데 부인 기자의 등용도 그 하나였다. 그러나 여자들이 쓰개치마를 벗지 못하고 길에서 남자와 마주치면 길옆으로 비켜주던 시대에 “활발하고 담대하고 기민하고 글줄이나 쓸 줄 아는 젊은 여성” 기자를 구하지 못하던 차에 이 일을 계기로 이광수가 추천을 한 것이다. 당시의 여기자로서는 가장 오랜 기간인 8년을 재직하면서 그녀는 정치부, 사회부, 학예부를 거쳐 학예부장까지 역임함으로써 전문직 직업여성으로서의 선구 역할을 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부인견학단을 조직해 공장과 감옥, 학교 등을 견학하고 현상 변장 탐방 기자를 하는가 하면 기근 구제 여류 음악회를 주최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민간 신문 최초로 ‘가정란’을 3면에 신설하고 ‘첫 길에 앞장선 이들’을 찾아 26회에 걸쳐 연재하는 등 서울의 구석구석을 무대로 생생한 기사를 발굴, 보도해 가정 부인에게 유용한 상식과 여성의 위상, 여권신장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가 하면 무선전화 공개 시험 방송에서 아나운서를 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울 상공을 비행하는 이채로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1925년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 때에는 각 사회단체와 부인단체, 각 권번의 기생들로 부인구호반을 조직해 왕십리에서 아흐레 동안 주먹밥을 먹고 구내 벤치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구호 활동에 주력했다. 서울의 빈민굴이나 아편굴, 유곽이나 대구의 창녀굴과 같이 식민 지배의 최저변에 위치한 기층 민중의 고난과 비참한 현실을 발굴해 이를 일반에 널리 알리고자 했다. 자서전에서 적었듯이 삼천리강산을 무대로 고달픈 줄도 모르고 타고난 정열을 발휘한 것이다. 1927년에는 근우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창립과 함께 서기와 중앙집행위원·재무부장을 역임하면서 4년 동안 일했다. 1930년 근우회가 해체된 이후에는 별다른 단체 활동을 하지 않고 결혼한 이후 1932년 병으로 신문사에서 퇴임했다.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 14년 동안 그녀는 가정에 전념하고 사회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일제 말 전시 동원의 협력과 친일의 시련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 대부분의 지식인 여성과는 달리 해방 이후 친일파 문제에서도 당당하게 행동했다. 해방 이후 그녀는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는데, 크게 보아 이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여성의 권리 향상과 남녀평등을 위한 운동이고 두 번째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활동, 마지막으로 국방 후원을 위한 캠페인의 조직이다. 대한부인회와 대한국방부녀회, 그리고 여자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마지막의 활동은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앞의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 보면, 첫 번째의 영역에서 그녀의 활동은 교육계에서 시작됐다. 입으로만 여권을 부르짖지 말고 쟁취할 각오로 일해야 한다는 지론에서 그녀는 “여학교 교장은 여자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의자 점령하기 운동을 조직했다. 특수 사립학교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초등학교나 여학교에서 여자 교장을 채용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그녀는 여권실천운동자클럽을 조직해 세 명의 관립 여자 교장(여자사범학교의 손정규, 무학여고의 차사백, 경기여고의 고황경)을 탄생시키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6년 8월에는 클럽의 추천과 교섭으로 최초의 공립초 여교장으로 교동초 교사 오정화가 삼청초 교장으로 임명됐다. 나아가서 그녀는 여성의 입각운동이나 여성군수 임명을 청원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4·19 이후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조선일보에 기고한 ‘부인시론’을 통해 그녀는 “깡패 기질이 농후한 남자 중·고등학교 교장”에 대신해 여자 교장을 임명하고, 애국애족에 불타는 숨은 여성 인재를 대폭 등용하라고 주장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는 어머니날을 제정하기 위한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바쁘고 고달픈 어머니들이 다만 하루라도 모든 시름 다 잊어버리고 활짝 웃는 얼굴로 유쾌한 날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피난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백과사전을 참조해 가며 1952년 대한부인회에서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했다. 1955년 이승만에 의해 관제화 되면서 어버이날이 되자 그녀는 “독특한 어머니의 공과 덕과 은혜를 감사하기 위한 날을 관에서는 무슨 의미로 아버지를 끌어들여 어버이날 또는 가정의 날이라 하여(…)술에 물 탄이 물에 술 탄이 처럼 싱겁고 향기 없고 절실함이 없는 뒤범벅 개떡을 만들어 놓았다”고 개탄했다. 1950년대 후반 이후에는 독립운동의 역사와 기억의 보존을 위한 활동을 주도했다. 1958년 3·1절 기념행사의 하나로 정부 공보실이 주관한 3·1운동 사건 사료 공모에 응모해 당선된 원고를 ‘근역(槿域)의 방향(芳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각 학교에 배포해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르치는가 하면 1967년에 들어와서는 서울 시내에 3·1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나머지 생애에서 무엇을 조국에 바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그녀는 “망각 속에 사그라져 가는 그날의 분노와 저항을 되새기고 그날을 기려 정의와 조국, 자유와 독립의 상징인 민족의 날로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독립공원의 조성”을 제안했다. 3·1운동 기억의 장소 조성은 그녀가 많은 애정을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이었지만, 구체화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그녀는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과 한국근대여성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70 노년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10년에 걸친 각고 끝에 전3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1979년에 출간한 ‘조국을 찾기까지’가 그것이다. 1984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용인공원묘지에 묻힌 그녀의 묘비에는 1984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의 ‘횡설수설’과 이튿날 자 조선일보 ‘만물상’이 새겨져 있는데, 전자의 칼럼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이기도 했던 최여사는 단순한 기자에 그치지 않고 20세기의 우리 사회를 폭넓고 치열하게 살다간, 우리나라 여성의 ‘불꽃’과 같은 상징적인 존재”라고 적었다.
[한국교육신문 김예람 기자] 정치편향 교육 논란을 제기한 서울 인헌고 학생이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사퇴를 요구하며 삭발에 나섰다. 인헌고 김화랑 군이 주축이 된 전국학생수호연합(이하 학수연)은 23일 오후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삭발식을 진행했다. 삭발에 앞서 학수연은 “K교사는 전교조 수석부위원장, 전국 국어교사모임 회장, 태양의학교 공동 대표 등을 맡으며 재직하던 학교에서 반미, 반일, 반원전, 페미니즘, 성왜곡, 조국‧문재인정부 찬양, 친북 등의 편향적 사상주입을 교육현장에서 주동해왔다”며 “K교사의 행적은 그 어떤 제3자가 보더라도 교사의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지키는 것이 아닌 훼손하고 방조하고 조장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러한 자의적 판단에 따른 주입형 교육을 묵인하고 조력한 교육청과 교육부 또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조 교육감은 인헌고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있었던, 그리고 동조해왔던 정치공범”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전국학생수호연합의 대표를 맡은 김화랑 군의 삭발식이 이어졌고 일부 시민들이 “우리가 정말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고 울기도 했다. 삭발식 후 김 군은 “우리가 지적해온 사상주입에 대해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사과나 반성은 없었고 오히려 학생 간 갈등을 부추겨 그 뒤에 숨어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 일을 계기로 공교육 현장에서 자행되는 사상주입에 대한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하고 과감한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공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이런 목소리가 관철될 수 있도록 전국 각지 학생들과 더 많은 연대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앞서 서울시교육청은 지난달 22일부터 이달 20일까지 인헌고 학생과 교사들에 대한 특별장학을 실시하고 “특정 이념이나 사상을 강제로 가르치거나 정치 편향적, 정파적 교육을 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주의, 경고 등 행정처분이나 특별감사를 의뢰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교총 등 교육계는 ‘부실조사’라며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를 실시해 달라고 요구했다.
교총 “특정인 특혜… 취소해야” 서울교육청 논란 커지자 ‘보류’ [한국교육신문 김예람 기자] 서울시교육청이 내부형 B형(무자격 교장)으로 임용된 교장만을 대상으로 해외연수를 추진했다가 특혜 논란이 일자 결국 계획을 취소하고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달 ‘2020년 현장지원형 학교장 역량강화 해외연수 추진 계획’을 발표하고 올해 내부형 B형으로 임용된 교장만 연수 신청이 가능하도록 제한했다. ‘행정형 교장 모델 창출’이 주목적으로 내년 1월 중 이들 15명을 대상으로 교육선진국 방문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방문국과 일정 등은 참가자 자율로 정하도록 했으며 추진근거로는 내부형 교장공모제 확대와 교장‧교감 임용방식 다양화라는 ‘제2기 교육감 공약 사업’을 들었다. 문제는 올해 서울지역에 임용된 무자격 내부형 공모교장은 총 15명이며 교육청의 연수 추진계획 상 대상자도 15명 내외로 사실상 이들이 신청만 하면 보내주는 특혜성 해외연수라는 것이다. 특히 15명의 교장 중 12명은 전교조 출신으로 알려졌다. 교총 등 교육계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교총은 “연수대상을 내부형 B형으로만 한정한 것은 무자격 교장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불공정한 정책”이라며 “이들만 보내는 것이 교장‧교감 임용방식 다양화 추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조차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행정형 교장’을 위한 해외연수라면 목적에 맞게 모든 교장을 대상으로 하되 선정과정과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며 “교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은 물론 교육감의 권력 남용으로 볼 수 있는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교총은 또 “연수 일정을 스스로 정하도록 한 것 또한 연수의 목적이 불분명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며 “외유성 해외연수로 변질, 혈세낭비로 지적될 수 있음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계속되는 논란에 결국 서울시교육청은 연수를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우선 내년 1월 추진은 불가능한 상황이고 관련 예산 등을 보면서 계획을 마련하겠다”며 “현재까지는 아무 계획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특혜 논란 때문이냐는 질문에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최근 '한국사립대총장협의회'가 2020학년도 대학등록금을 인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사립대총장협의회는 전국 153개 4년제 사립대총장들이 가입한 굴지의 단체다. 사립대총장협은 결의서를 통해 2009년 대학등록금 동결 정책 시행 이후 지난 11년 간 대학재정은 황폐화되었고, 교육환경은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며 2020학년도부터 법정 인상률 범위 내에서 등록금 자율책정권을 행사해 등록금을 인상하겠다고 공표했다. 현행법상 대학들은 직전 3년 기간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평균의 1.5배 이하 수준에서 등록금을 인상할 수 있게 돼 있으나 정부와 타 대학 눈치를 살피다 보니 이 조항은 거의 사문화되었다. 사립대총장협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시설 확충과 우수 교원 확보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대학 총장들이 등록금 동결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은 처음이다. 이와 같은 사립대총장협의 2020년 등록금 인상 추진에 대해서 교육부는 즉각 제동을 걸었다. 만약 사립대가 등록금 동결 방침을 어기고 인상을 추진할 경우 재정 지원을 감축하고 적립금 실태 감사를 하는 등 적정한 통제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대학의 미래 문제 중 첫 번째로 대학의 구조 조정을 꼽고 있다. 수년 내에 고졸자수와 대입자수(정원)가 역전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대학이 자율적 구조 조정을 하지 않으면 결국 도태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한국의 대학들은 현재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구조조정 위기를 헤쳐 가며 세계 대학과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현재 대학은 지금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한 질적인 혁신을 요구받고 있으나 그런 혁신이 일어날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다. 등록금은 11년째 동결돼 2008년과 비교해 0.6% 오르는 데 그쳤다. 지난해 사립대 연간 등록금은 평균 718만 원으로 드러났다, 학생·학부모들에게는 엄청난 부담 금액이다. 물론 대학 등록금을 일률적으로 통제할 것이 아니라 국가 장학금 확충 등 교육예산 확충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다. 지난 11년 간 대학 등록금 동결로 대학의 교육 여건과 환경이 현저하게 피폐해졌다는 주장에도 일견 이해가 된다. 대부분 사립대의 경우 그동안 유능한 교수 인력의 영입은 차치하고 연구·개발 예산과 도서 구입비 등 기초적 비용조차 줄인 상황이다. 전체 사립대의 연구·개발 예산 규모는 2017년 4470억원으로, 2011년(5397억원)보다 되레 감소했다. 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초래된 불가피한 결과다.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판국에 국내 대학들은 생존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한국 대학의 국제 경쟁력은 더욱 더 떨어질 수 밖에 업는 현실이다. 미래학자들과 교육 전문가들은 인구절벽시대를 맞아 사회적 변화와 함께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한국 대학이 2030년께 큰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즉 앞으로 10여젼 뒤에는 한국 대학의 3분의 1에서 4분의 1 정도는 운영이 심각해지고, 심할 경우 폐교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대학은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에 대한 해법도 제시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대학 등록금 인상과 교육환경 개선은 단선적 연계가 아니다. 대학의 감싸고 있는 다양한 조건과 요소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들이 위기 원인을 제대로 진단해 대학 교육 및 운영 혁신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등록금 인상만이 유일한 해결책 인 양 주장하고 있다. 대학 재정은 올 8월부터 도입된 소위 강사법(고등교육법시행령) 시행으로 더욱 악화되고 잇다. 제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인공지능(AI) 전문가 초빙이나 빅데이터 연구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사립대총장협은 2020학년도부터 법정 인상률 범위 내에서 등록금 자율책정권을 행사하겠다는 복안이다. 최근 교육부는 고졸자수와 대입자수(정원) 역전을 앞두고 감축해야 할 대학 정원이 정부가 손대기 어려운 규모라며 구조조정을 시장에 맡기겠다고 발표했다. 대학 생존은 부실 대학은 도태되고 경쟁력 있는 대학들은 학사운영과 학생 선택권 등에서 자율권을 갖고 스스로 혁신할 수 있는데서 결정된다. 인위적인 등록금 동결과 책정 등 교육부의 온갖 규제 아래서 꼼짝하지 못하며 재정 지원이라는 피상적 먹여주기식 지원으로는 한계가 있다. 급변하는 시대 대학의 공공성 강화와 책무성을 담은 미래 비전이 중요하다. 대학의 비리 및 비위 행위에 대한 반성과 성찰도 선행돼야 한다. 대학 스스로 혁신의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 21세기 미래 인재 양성의 기지이어야 할 대학의 경쟁력 추락은 곧 국가 경쟁력의 동반 추락을 의미한다.대학이 시대 조류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면 미래 희망은 없다. 대학 교육의 혁신과 함께 대학 재정 운영의 투명성이 강화가 우선돼야 한다. 정부 정책에 역행하여 등록금만 인상한다면 대학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더 높아질 것이다. 정부의 재정 투자도 확대될 수 없다. 대학 등록금 인상 주장이 교육 환경 개선이라는 등잔불 밑에서 벗어나 대학 경쟁력 강화와 미래 인재 육성이라는 망망대해를 지향해야 한다. 이제라도 사립대총장협은 교육부와 머리를 맞대고 현실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유념해야 할 점은 4년제 사립대 등록금 인상은 곧 4년제 국공립대, 전문대 등 모든 고등교육기관의 등록 인상과 연계된다는 점이다. 학생·학부모들의 무담을 줄이고 대학경쟁력, 교육경쟁력 등을 강화할 수 있는 묘안찾기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대학은 교육환경을 넘어 교육경쟁력 강화를 지향해야 한다.획기적인 고등교육 정책 혁신 방안과 대학 경쟁력 강화 방안을 마련한 뒤에 정부의 고등교육 재정 확대를 요구해야 하고, 나아가 대학 등록금 인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
[한국교육신문 한병규 기자]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 조상호(서대문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서울특별시교육감 행정권한의 위임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에 대해 관내 학교들의 반발은 커지는 양상이다. 조례안이 학교장의 권한을 축소해 학교 자율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조례안은 ‘교육장 및 학교장에게 위임된 행정권한을 공익적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교육감 및 교육장이 직접 행사하게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행정권한 위임에 관한 조례안’은 제6조(소속학교장에게 위임하는 권한)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규정에 해당하는 사항을 개정해 필요시 교육감과 교육장이 직접 권한행사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개정 조항은 ‘제6조 9호 각급학교의 소관 행정재산의 운용·유지·보존 및 사용 허가’, ‘제6조 13호 교육과정(교과서 포함)에 기재되지 아니한 내용의 교수’에 관한 권한에 대한 부분이다. ‘제6조 9호’의 권한을 교육장과 교육감에게 이양할 경우 현재 학교시설개방 및 이용에 관한 사항에 대해 학교 현장의 상황과 환경을 고려해 판단하도록 학교장의 권한으로 된 부분을 교육감의 마음대로 일괄 개방하도록 권한행사를 할 수 있게 된다. 현재도 학교시설을 장기간 이용하는 특정 모임이나 단체 등이 지방의회를 통해서 압력을 행사하거나, 지방의회는 개방하지 않는 학교를 대상으로 ‘학교시설 개방 및 이용’과 관련한 자료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등의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또 ‘제6조 13호’의 권한을 교육장, 교육감에게 이양한다면 학교 상황 고려 없이 선출직 교육감의 성향에 따른 교육내용에 대해 교수하게 된다. 최근 정치편향 수업 논란으로 학교현장에 혼란과 갈등이 적지 않은 만큼 신중하게 고려해야할 사항인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교총은 성명을 내고 “불분명하고 광범위한 의미의 ‘공익적 목적’이란 미명 하에 교육감이 권한을 직접 행사한다면 학교장의 권한을 언제든지 축소하고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첫발을 내딛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주는 막연함은 걱정과 불안감을 증폭시키곤 한다. 지난해 9월 첫 발령을 받은 이나리 경기 서연유치원 교사도 그랬다. 신설 단설유치원으로의 발령은 모든 게 처음인 신규 교사에게 모험과 다름없었다. 첫 발령지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 동료들도 초임이었다. 수업부터 생활 지도까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교권 문제 대처방법과 교원의 의무와 책임, 유아교육 정책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이 교사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 설레면서도 걱정이 많았다”면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동료들과 함께 교총을 찾았다”고 했다. “유아들을 가르치다 보면 교사의 자율에 맡기는 부분이 많아요. 생활 지도도 함께 이뤄져야 하는 상황이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죠. 원감·원장 선생님과 함께 한 자리에서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그때 교총 이야기를 접했어요. 교사로서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걸요.” 이 교사는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교총의 문을 두드린다. 가령 아동학대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을 때, 유치원 교사로서 아이를 어떻게 보호하고 도울 수 있는지를 문의하는 식이다. 교육활동을 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관한 법률 지식도 미리 알아뒀다. 교총 회원이 된 지 일 년 남짓이지만, 누구보다 만족도가 높은 이유다. 그는 “공연, 여행 등 복지 혜택을 활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귀띔했다. 이 교사는 퇴근 후 마음 맞는 동료들과 공연을 보러 가곤 한다. 최근에는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다. 여행을 계획할 때는 교총 복지플러스 홈페이지에 들어가 할인·우대 혜택이 있는지를 먼저 살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가입한 덕분에 유익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점이 좋다”면서 “매달 회비를 내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든 적 없다”고 했다. “교총은 교원들의 권리와 입장을 대변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단체와는 성격이 다르단 걸 알았거든요. 기간제 교사 정규직 임용 등을 앞장서서 막은 것도 교총이었고요. 사실 모든 게 처음인 신규 교사들이 의지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하고 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추천하고 있는 걸 보니, 홍보대사가 된 것 같기도 해요.” 이 교사는 2030 연수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했다. “전국에서 모인 학교급별 교사들을 만나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는 동료의 참가 후기 덕분이다. 그는 “더 많은 신규 교사들이 이런 내용을 알고 똑똑하게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한국교육신문 김예람 기자] 수년에 걸쳐 제주도 내 교원들을 상대로 상습적인 민원을 내고 고소‧고발을 일삼은 학부모들이 결국 구속됐다. 이들의 계속된 민원에 제주A초는 학사행정이 마비되는 등 극심한 행정마비를 호소한 바 있다. 교총 등 교육계는 “늘어나는 악성 민원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효과뿐만 아니라 그동안 교권을 사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교총과 17개 시도교총이 발로 뛴 협치의 결과”라며 환영했다. 제주지방경찰청은 아동복지법 위반과 업무방해, 보험사기 방지 특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이들 학부모 부부를 구속했다고 19일 밝혔다. 이들 부부는 2014년부터 초등학생 자녀를 이용해 학교를 상대로 상습적이고 고의적인 민원을 제기하고 교원들에게 허위사실로 고소‧고발을 수차례 낸 혐의를 받는다. 이들은 허위진단서로 35회에 걸쳐 3300여 만 원의 보험액을 부당 수령하는 한편 자녀에게 강제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고 허위 진술을 강요하는 등 보험사기와 아동학대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밖에도 무고, 명예훼손, 업무방해,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현재 자녀들은 아동복지시설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특히 A초 교직원들은 수년 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들은 자녀의 학교폭력에 대한 학교의 정당한 학사업무에 무리한 처리 방안을 요구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자 수백 건의 민원을 냈고 관련 교직원을 상대로 한 고소‧고발, 소송도 계속 냈다. 민원 처리와 경찰‧검찰 조사에 학사행정이 마비됐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교장과 담임, 부장교사는 정신과에 다니며 약물치료를 받기도 했다. 교사들의 교육활동이 위축되면서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는 물론 학부모들까지 학교 전체가 고통을 호소했다. 이들은 이밖에도 5년 동안 자녀 전학으로 도내 3개의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이전 학교에서도 유사한 상습, 반복적인 고의 민원과 교직원을 상대로 한 고소‧고발을 일삼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교총은 2018년 10월 “악성 민원으로 인한 교육의 황폐화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며 강력 대응해왔다. 해당 사건을 ‘교총 교권수호 SOS지원’ 1호 사안으로 선정해 학교와 교원들에 대한 법률적 지원은 물론 시위와 항의 등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대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교총은 그동안 제주도교육청 앞과 국회 앞 기자회견은 물론 국회 앞에서 교권 3법의 조속한 통과를 요구하는 릴레이 1인 시위도 벌였다. 교총의 줄기찬 요구에 결국 제주도교육청은 학부모의 상습‧고의 민원을 전담할 민원대응단 TF를 구성하고 민원인의 의견을 직접 청취하고 답변서를 쓰는 등 해결에 나섰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관련 글이 올라오면서 사회적인 공감대를 얻어내기도 했다. 김동석 교총 교권복지본부장은 “그간 학교현장에 확산됨에도 당연한 학부모의 권리로 잘못 인식돼왔던 악성민원에 경종을 울린 당연한 결과”라며 “학교와 교원의 어려움에 무관심했던 교육당국을 기자회견과 항의방문을 통해 일깨우고 교권3법 개정 실현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이 사건을 계기로 사실과 다른 악성민원에 참지 말고 교총의 도움을 받아 반드시 고소‧고발해 대응해주길 바란다”며 “교총은 법률상담과 소송비 지원을 통해 현장 악성민원 근절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아이 대산이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3월이었다. 1997년부터 불어 닥친 우리나라 최대의 외환위기인 IMF를 극복해내느라 나라는 끙끙대었고, 3년간의 긴 육아휴직을 끝낸 나는 복직을 하던 해였다. 대산이는 5학년 3반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5학년 3반 담임을 맡은 것이다. 하얀 피부에 약간 각진 얼굴, 동그란 눈을 가진 그 아이는 키와 몸은 또래의 중간 정도였고, 온순했으며 예의 바른 아이였다. 공을 다루는 몸놀림이 날렵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특별히 내게 다가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불과 몇 개월 전인 4학년 때 어머니를 갑자기 여읜 사실이었다. 별다른 내색도 없이 성실하고 씩씩하게 생활하는 것 같았지만 그 아이에게서 웃는 모습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같은 또래의 아들을 둔 까닭에 대산이를 보면 안쓰러웠고, 어린 아들을 두고 눈을 감아야 했을 대산이 어머니 생각에도 그 안타까움이 더했지만 나 또한 대산이 앞에서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만에 학교로 돌아와 다시 아이들 앞에 선 나는 마치 새로 발령을 받은 신규교사 마냥 기대감과 떨림, 의욕과 열정으로 아이들과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물론 지금처럼 그때도 고만고만하게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도 있었고 약속과 규칙을‘소 닭 보듯’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아이들과의 생활은 더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부상이 말썽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다친 아이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그것도 학교가 아닌 가정에서. 날마다 안전지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월요일에는 두 명의 아이가 동시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다. 한 친구의 집에서 둘이 함께 놀다가 서로 싸워 한 아이는 다리를, 다른 아이는 어깨를 다쳤다는 것이다.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일들이 거듭되자 아이들은“선생님, 우리 반 이름 바꾸면 안 돼요? 작년에 5학년 3반 학생 한 명이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대요. 재작년에도 5학년 3반에서 사고가 났대요. 우리 반 친구들이 자꾸 다치는 것도 우리 반이 5학년 3반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반 이름 좀 바꿔 달라고 하면 안 돼요?” 허무맹랑한 주장이요 논리 같았지만, 친구들이 자꾸 다치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교육해오면서 별다른 문제나 크게 다친 아이들이 없었는데 이런 일이 계속되니 실은 나도 마음속으로‘왜 이러지?’ 생각해 오던 터라 아이들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이들의 말에 무턱대고 동조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고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였지만, 아이들의 요청도 있고 해서 교감 선생님께 슬쩍 그 이야기를 전하기는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차츰 안정되어 갔고 그 이야기는 기억 속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그동안 우리는‘UFO는 있을까?’와 같은 주제로 열띤 토론도 하고, 암사동 선사주거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체험활동과 운동회 등으로 우리들만의 멋진 추억을 쌓아가며 어느덧 겨울을 맞이했다. 제법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아이들이눈싸움을 하자고 했다. 거절할 내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니까. “선생님, 쓰레받기 가지고 가요. 쓰레받기로 눈싸움하면 더 재미있어요.” 한 아이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나는 아이들이 건네준 쓰레받기를 가지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몇몇 아이들은 옆 반에서 쓰레받기를 빌려오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쓰레받기로 하는 눈싸움은 꽤 재미있었다. 눈을 뭉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이 절약되었고 눈덩이에 맞아 다칠 염려도 없었으며 쓰레받기로 흩뿌려준 하얀 눈은 마치 눈 세례를 주는 것 같았다.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다 보면 으레 선생님을 집중 공격하는 적군이 생기는 법. 하나둘씩 나를 공격해 오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내게 어느새 아군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산이가 아군이었는지 적군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즐거운 시간 속에서 마음껏 소리 지르며 웃을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대산이의 일기 속에‘누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산이의 중학생 누나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었다. 우리 반의 일기는‘일기대화장’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속마음을 주고받던 우리들의 비밀 통로였다. 일기 속 누나는 대산이의 공부도 가르쳐 주고 집안의 일을 맡아 해 주고 있는 듯했다. 온순하던 대산이에게서 다소 반항적인 마음이 드러나고,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고민이 들어있는 일기대화장에 선생님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을 함께 담아 답글을 써주곤 했다. 대산이가 말하는‘누나’는 대산이 아빠의 여자친구인데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아서 대산이가‘누나’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아직 엄마를 잃은 슬픔을 안고 있을 대산이가 겪을 혼란이 느껴졌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대산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산아, 힘들지?”대산이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듣고만 있었다. “선생님이 네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네가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힘들고 어렵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너희 아빠가 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너와 누나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셨을 거라 생각해.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아빠의 뜻을 받아들여 주면 좋겠다. 선생님이 항상 너를 응원하고 있는 거 알지? 방학 잘 지내!” 대산이는 작은 소리로 “네.” 대답했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대산이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개학을 앞두고 낯선 사람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자신을 경찰이라고 밝힌 상대방은 00초등학교 5학년 강대산의 담임 선생님 맞느냐고 물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나쁜 짓을 할 아이는 아닌데 느닷없이 경찰이라니 신경이 곤두섰다. “네, 맞는데 왜 그러시죠?” “그 아이가 사망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예감에 들어있는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어떻게요? 어쩌다가요?” 나의 질문에 경찰이 전해 준 내용은 나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아산만방조제 부근에서 자동차가 물에 빠져 대산이네 가족 네 명이 모두 익사했다는 것이었다. 밤에 길을 잘못 들어 돌아나가는 과정에서 후진기어를 넣은 채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바람에 차가 물로 추락하여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말도 안 돼.” 나는 연신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개학 날 나는 우리 교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 교무실에 엎드려 울고 또 울었다. 반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어떻게 그 아이의 자리를 바라보아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그렇게 있을 수도 없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대산이의 책상 위에는 하얀 국화가 놓여 있었다. 대산이는 끝내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렇게 대산이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대산이를 잃은 나의 방황은 6개월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새 학년도가 시작되었고 1학년 아이들을 맡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도 퇴근 때쯤이면 어김없이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대산이를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음에 마음 아팠고, 그 추운 물속에서 숨져가며 대산이가 겪어야 했을 두려움과 숨 쉴 수 없어 받았을 고통이 자꾸만 떠올라 퇴근길에 참 많이도 괴로워하며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 정리를 하다가 5학년 3반 아이들과 암사동 선사주거지에서 찍었던 단체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에 아이들은 모두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란히 두 줄로 서 있는데 오직 대산이만 맨 뒤에 홀로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대산이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대산이만 사진에서 오려냈다. 그 순간 그것은 대산이를 두 번 죽게 하는 일인 것 같아 사진을 모두 잘라야만 했다. 이제 20여 년을 가슴속에 애잔하게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 것은 사랑하는 그 아이 대산이에게 세상의 빛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살아있다면 31살 어엿한 청년이 되었을 우리 대산이가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고 싶어서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대산이의 흔적을 여기 남겨두고 싶은 까닭이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 열두 살로 살아있는 아이, 그렇게 보내기는 너무 아까웠던 아이, 지금도 보고 싶은 아이, 우리 대산이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어서다. “ 대산아, 너는 행복한 아이야.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너를 기억해주는 선생님이 있으니까.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오래도록 나를 기억해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거든. 하늘나라에서 마음껏 웃고 행복하렴!” ------------------------------------------------------------------ 2019 교단수기 공모 동상 수상자 수상 소감 이제 그 아이를 보낼 수 있다 똑똑! 하늘 문을 두드려 대산이에게 수상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묻고도 싶었다. “대산아, 네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하늘 저 너머 기쁨으로 상기된 대산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제는 그 아이를 자유롭게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묶여진 내 마음을 풀어줄 수도 있겠다. 대산이는 내게 늘 아픔이었으니까. 조금씩 다가오는 교직 생활의 끝자락에 서서 돌이켜보니 아이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남는다. ‘후회를 줄이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관심과 시선을 돌려야 하는 이유이다. 교문 앞 ‘아침맞이’를 나서는 내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 아이들은 또 어떤 이야기를 품고 올까? 파란 가을하늘 같은 아이들이 내게로 온다. 참 예쁘다.
지난 14일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이번 주부터 4일간(11.18~11.21.) 2학기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수시모집 전형이 끝난 상황에서 2학기 기말고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래서일까? 일부 아이들을 제외하고 시험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심지어 십 분도 채 되기도 전에 답안지에 인적사항만 체크한 뒤 엎드려 자는 아이들. 더군다나 수시모집에 최종 합격한 아이들은 시험 그 자체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다만 시험에 참여하는 데만 의미를 둬 염려되었다. 수능이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시험이라 다소 여유는 없겠지만, 모든 교과가 수능시험 이전에 시험 범위까지 진도가 나간 상태라 조금만 관심을 두고 준비한다면 뜻밖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험을 치르고 채점을 끝낸 일부 과목의 경우, 예상보다 점수가 낮게 나와 교과 담임을 놀라게 했다. 문제를 쉽게 냈음에도 아이들의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며 화내는 교사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과목은 성적이 바닥을 쳐 선생님의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어시험이 끝난 뒤 아이들의 성적이 궁금하여 채점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영어 과목 또한 다른 과목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성적이 매우 저조했다. 모든 학급의 영어성적 평균이 1학기 때보다 많이 떨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수시모집에 최종 합격한 아이의 영어성적은 무려 30점 이상 차이나 놀라게 했다. 그리고 시험을 거의 포기한 듯 점수가 20점 미만인 학생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수시모집을 포기하고 오직 정시 모집을 목표로 공부한 아이들의 영어성적은 1학기 때보다 많이 향상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시 모집은 3학년 2학기 때까지의 성적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그 아이들이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시험이 끝난 뒤, 성적이 떨어진 몇 명의 아이들을 별도로 불러 그 이유를 물었다. 수시모집에 최종 합격한 아이들의 경우, 2학기 내신이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거의 시험을 포기했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별 고사(면접, 논술, 적성 고사 등) 준비로 기말고사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 대부분은 수능시험이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기말고사에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답했다. 아마도 그건, 모든 학교가 3학년 대입 전형자료 생성 작업 일을 맞추기 위해 기말고사 일정을 일찍 앞당겼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선생님은 수시모집 최종 합격과 관계없이 모든 아이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만에 하나 학과에 적응 못 해 재수할 경우, 3학년 전(全) 성적이 반영된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것보다 고교 시절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학생으로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일깨워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더 큰 문제는 기말고사 뒤 아이들의 생활지도이다. 아이들은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무질서한 행동을 일삼게 될 것이고 이는 곧 교실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아이들의 이런 행동이 1, 2학년 재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해보아야 할 것이다. 학년 말까지 아직 기일이 많이 남아 있다. 이에 수능 성적 발표일(12월 4일)까지 가채점 결과를 근거로 정시 모집에 따른 진학지도가 철저히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등교하여 무료한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학교 차원에서 다양하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8일 오후 국회입법조사처 주최로대학입학제도의 공정성 강화를 위한 대안 논의 간담회가 개최 됐다. 박남기 대한교육법학회 회장이(왼쪽 첫번째)"범위형 대입제도 '문제 해결 접근'에서 '문제 예측 접근'으로"라는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김영화 교장 선생님은 11월 18일(월) 오후 일곱 시 송파수련관 교직원식당에서 ‘학부모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번 간담회에는 30여 명의 1학년 학부모님들이 참석해 ‘소통과 공감’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펼쳤다. 본격적인 간담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학부모님들은 본교 1학년 학생들이 마련한 시낭송회를 감상했다. 1학년 김태훈 군의 자작시 낭송과 이준식 군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함석헌 시)’를 김선진 군의 기타연구에 맞춰 낭송해 학부모님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학부모님들은 학생이 시 낭송을 끝낼 때마다 연신 박수갈채를 보내며 여고시절 문학소녀로 돌아갔다. 한 학부모님께서는 오랜만에 시를 들으니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며 서령고의 다양한 교육활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간담회에 들어간 김영화 교장 선생님은 학교 경영 중점 사항으로 수업의 내실화, 학생의 기본생활 습관 정착(교복 입기, 등교시간 준수), 자존감 향상, 적극적인 신입생 유치, 변화하고 개혁하는 학교 추구를 강조했다. 또한 학교 개선 및 지향점으로는 학부모가 학교의 홍보대사가 되어줄 것과 교육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학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협조를 당부했다. 아울러 최근 들어 학교 현장에서 교사와 학교가 너무 휘둘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교사와 담임 선생님들께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학부모님들은 이구동성으로 학교, 학생, 학부모가 삼위일체가 되어 학교와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학교에 대한 건의사항으로는 정시확대로 인한 대비책 마련, 야간자율학습 후 교통 안전문제, 기숙사 시설 개선, 진로지도의 다양화 등을 주문했다. 이에 대해 김영화 교장 선생님은 적극적으로 학교 경영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간담회는 우리 학생들의 미래 교육을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협력해가며 책임지고, 소통하기 위한 자리로, 본교는 앞으로도 자주 이런 기회를 자주 마련해 학부모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당면한 문제점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갈 예정이다.
아동과 여성의 교육을 주장한 교육자이자 언론인 독립청원서 작성‧낭독 후 총독부 제출…재판 받아 전당포서 시계, 금가락지 팔면서 가족‧교육에 헌신 교사 순환근무제, 정치‧군사에 치중된 교과서 비판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문일평만큼 그 이름 앞에 부르는 명칭이 다양한 인물도 많지 않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민족주의 사학자, 반아카데미즘적 대중 저술가, 조선학 운동의 선구자, 한국 차문화(茶文化)사의 시조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거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아동과 여성의 교육권을 주장한 참교육자. 문일평은 고종 25년인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오랜 무관 전통을 지닌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꽤 부유했었다. 부친 문천두는 ‘천석꾼’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문일평은 만11세가 되던 1899년 3살 연상의 김 씨와 결혼해 김 씨로부터 한글을 배웠다. 이후 1904년 열 여섯 살이 될 때까지 고향 의주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문일평은 단발을 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 출석하면서 서양문명에 대한 동경심이 커져만 갔다. 실제로 1905년에는 용암포에서 증기선을 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마침 발발한 러일전쟁으로 미국행이 좌절됐다. 실제로는 여행권과 여권 등의 문제로 인천항에 내리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인천을 통해 경성에 도착한 문일평은 미국 대신 일본 유학을 계획했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1905년 봄 경성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과 고베를 거쳐 도쿄에 도착한 것을 보면 그의 외국 문명에 대한 동경심과 이를 배우고자 하는 학구열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만 17세였다. 일본어 능력 없이 도착한 도쿄에서 그는 미국인 선교사의 소개로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 청강생으로 입학했고 이후 세이소쿠학교(正則學校)로 옮겼다. 이곳에서 유학 중 네 살 아래인 이광수와 동갑내기 홍명희를 만나 평생 동지가 됐다. 세이소쿠학교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를 졸업한 것이 1908년이었다. 졸업 후 귀국해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 고향 의주에 유여대가 세운 양실학교, 경성에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언더우드 교장, 김규식 교감이 운영하던 경신학교 재직 중에는 최남선의 광문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상동청년회에서 운영하는 토요학교에서 이만규 등과 함께 지리를 가르치는 등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 당시 부인 김 씨를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켜 신식 교육을 받게 하는 등 여성 교육에 대한 평소의 관심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문일평이 22세가 되던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그는 다시 미국 유학을 추진했지만 이룰 수 없었다. 22세 청년 문일평은 불법적 한일병합에 반대해 광화문 네거리에서 항일 연설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총독부에 한국침탈의 부당함을 항의하는 투서를 해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전력으로 미국 여행권을 얻는 데 실패했고 문일평은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11년 와세다대학교 고등예과를 거쳐 정치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안재홍과 김성수를 만나 교류했다. 당시 안재홍과의 만남은 문일평이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공부를 마치지 못한 문일평은 1912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대공화보사라는 신문사에서 일하며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조소앙, 홍명희, 정인보 등과 사귀었다. 그가 쓴 논설이 호응을 얻은 것이 후일 언론사 활동에 큰 바탕이 됐다. 당시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지속하던 독립운동과 언론 활동을 위해 고향에 남겨 뒀던 가산을 대부분 처분했기에 1914년 귀국한 후에는 궁핍한 생활이 그를 기다렸다. 고향에서 3.1운동을 맞이한 문일평은 경성으로 올라와 3월 12일 종로 보신각 앞 사거리에서 애원서라는 형식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낭독한 후 총독부에 제출한 행동으로 재판을 받았다. 8개월 복역 후 출소한 1920년경부터 그는 언론활동과 교육활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1920년대 초반은 일본이 문화정치로 방향을 선회한 직후로 보통학교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기관의 증설을 통한 식민통치의 기반 조성에 총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조선인들의 근대 교육을 향한 열정이 조성되기 시작한 즈음이기도 하다. 병합 직후 반일 감정으로 증가일로에 있던 서당의 숫자가 감소하고, 총독부 인가의 공사립 보통학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문일평은 경성의 중동학교(1922년), 송도의 송도중(1923~1925년)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여기에서 최규동, 이만규 등과 친분을 쌓았다. 일평이 세 번째 일본 유학에 오른 것은 1925년 8월이었다. 동경제국대학의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에서의 청강생 생활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귀국한 그는 1927년에 중외일보 논설부 기자로 일하며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직을 겸했다. 신간회가 출범하자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이후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겸직하는 등 지속적으로 교육과 언론활동을 겸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1931년 즈음에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신문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사임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 임시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기 그의 활동 중 훗날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식민사학자들 주도의 청구학회와 진단학회 참여였다. 참여 이유나 탈퇴 이유는 명료하지 않으나 그의 민족주의 역사관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눈에 띄는 이력으로 남아 있다. 1932년 평북 정주 출신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자 문일평은 1933년에 편집고문으로 들어갔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이광수는 부사장이었고,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고 있었다. 이후 문일평이 타계하는 1939년까지 일본 유학을 함께 했던 이들 3인은 조선일보에서 함께 글을 썼다. 문일평의 인간미를 가장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자료는 바로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입사한 이듬해인 1934년에 그가 쓴 일기다. 문일평 1934년; 식민지 시대 한 지식인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2008년에 번역 출판된 그의 한문체 일기는 그가 언론인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내야 했던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고민과 일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일기에서 보이는 문일평의 모습은 몇 가지가 특히 인상적이다. 첫 번째는 그의 가난이다. 일기 곳곳에 묻어있는 그의 생활고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전당포 출입이 잦았고 회사에서의 가불(임금 당겨쓰기)도 반복됐다. 1월 28일 일기에는 “돌아오는 길에 질옥(필자: 전당포)에 가서 손목시계 맡긴 것을 찾아 왔다”고 썼고, 2월 27일 일기에는 “오늘 며느리가 금가락지를 35원에 팔아 경도에 있는 동표에게 돈을 부쳤다”고 했다. 3월 16일 일기에는 손녀 “혜경이가 부민의원 7호실에 입원했다. 30원을 가불해 먼저 열흘 치 병원비 14원 50전을 냈다”는 모습이 보인다. 가족들 교육비와 병원비 때문에 스스로는 통증을 참아야 했다. 3월 31일 일기를 보자. “오늘부터는 손목 통증이 점차 전체 팔뚝까지 펴져 때때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그치지 않는다. 진료를 받으려고 하나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스스로 연민을 느낄 뿐이다.” 헤어날 길이 없는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가난이었다. 결국 8월 30일 일기에는 “출근해서 대미관계 50년사를 썼다. 외상값 독촉이 매우 심하다. 처리할 방법을 모르겠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래도 그가 포기 못한 것은 술과 역사자료였다. 숱한 나날 술을 마셨고, 대학도서관을 찾아 자료를 찾고 베껴 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4월 30일에 임시 교사직에 지원했던 며느리의 사령장이 나왔고, 5월 2일 부임했다. 어린 아이를 두고 멀리 양천까지 출퇴근해야 하는 힘든 일이었지만 가난에서 조금 벗어날 기대 때문에 기쁜 모습이 역력했다. 그날도 30원을 빌렸다. 아마도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일기가 보여주는 두 번째 모습은 그의 가족 사랑과 자녀 교육열이다. 8월 18일 일기는 일하는 며느리에 대한 애정이 보인다. “잉어 두 마리를 1원 20전에 사서 어항에 풀어놓았다. 며느리에게 먹이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신문사에 가사 2원을 빌려 남대문시장에 갔다. 장어 몇 마리를 사가지고 와서 며느리에게 먹였다. 매우 허약하기 때문이다.” 그의 일기 곳곳에는 일본에 유학 중이던 아들 동표의 학비 걱정과 학업 중단 염려가 넘친다. 그런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그가 보인 또 다른 모습은 민족 교육에 대한 헌신이다. 아들 동표의 학비 요구로 가장 힘들던 시절인 4월 12일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오산 가족이 이제 불을 때지도 못할 지경이라고 하기에 한때의 곤란이라도 펴도록 춘원에게 말하여 나와 함께 10원을 마련하여 보냈다.” 가불이 반복되는 가난 속에서도 오산학교 학생들의 난방비를 후원했다. 며칠 후인 4월 26일 그는 “월급이 빚을 갚을 만큼 되지 않는다. 지난달 혜경이의 병원비와 동욱이의 신학년 학교 용품 등에 돈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라고 낙담하고 있다. 문일평의 교육자로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그의 아동, 여성교육, 교사, 교과서를 보는 관점이다. 조선일보 주최 경성 유치원연합원유회에 즈음한 글에서 그는 “오늘날까지 조선 습속의 그릇된 점으로 말하면 첫째 어린이를 어른의 소유로 알았었고, 둘째 어린이를 어른과 같이 만들려고 하였었고, 셋째, 어린이를 어른이 압박하였었다. 그러나 어린이의 인격적 존재를 인정하야 아무쪼록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기르되 좀 더 높이 대우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으니 이는 실로 신시대의 도덕적 요구로서 우리 조선인이 신생활을 함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어린이에 대한 대우부터 철저하게 고쳐야만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그는 어린이의 최고 두통거리인 보통학교 입학시험제를 폐지할 것을 제안했다. 문일평은 교육에서의 남녀 기회균등을 주장했다.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운동을 지지하며 쓴 글에서 그는 남자의학전문학교가 4개이고, 경성제대 의과까지 합치면 5개에 이르지만 여자의학전문학교가 1개교도 없는 것은 일대 모순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적어도 1~2개의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이 긴요함을 역설했다. 문일평의 교육을 보는 시각이 시대에 맞고 교육학 이론에 부합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주장은 교과서와 교원 인사에 대한 소견이다. 그는 교육에서 교사와 교과서가 지닌 중요성에 주목했다. 교과서 문제에서는 내용이 지나치게 정치군사 방면에 치중하는 경향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문화방면에 좀 더 치중하는 것이 시대에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과제라는 점에서 그의 교육자적 시각의 훌륭함을 보여준다. 교원 문제에서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교사들에 대한 순환 근무의 문제였다. 사상적화(思想赤化)나 부패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하던 기계적 순환근무제를 그는 비판했다. 무릇 교원이 한 지방에 오래 근무할수록 피교육자에게 이익을 줌이 많을지언정 폐해를 끼칠 일은 적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 근거였다. 피교육자 개인과 그 환경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교육의 근본이라는 그의 주장은 당시뿐 아니라 현재의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문일평은 1939년 4월 3일 일본어 신문 ‘국민신보’가 창간되던 날 지병이던 화농성염증(急性丹毒)으로 종로구 내자동에서 사망했다. 위대한 역사학자이며 교육자가 떠났다.
[한국교육신문 한병규 기자] 서울 A초가 성범죄자 등 출입에 빈번히 노출되는 문제가 잇따르자 학교구성원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정문 폐쇄를 결정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재개방을 요구하고, 지역 시의원도 학교 측의 문제로 돌리면서 서로 갈등을 겪고 있다. A초는 정문 진입로가 외길인데다 입구에서 등교하는 학생과 주차장을 이용하는 교직원 및 지역주민 차량이 서로 교차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교통사고 위험이 크다는 입장이다. 학교 반경 1㎞ 이내에 7명의 성범죄자도 거주하고 있다. 이처럼 학생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는 사정이 있음에도 학부모와 지역주민 2000여 명은 △학교 정문을 개방, 학생들이 통학하고 주민도 이용할 수 있게 하고 △학교 체육관도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라며 민원을 제기했다. 해당 지역구시의원 역시 학교와 지역교육지원청, 서울시교육청측에 정문 개방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서울시교육청은 학교 정문 개방 및 체육관 개방의 타당성 조사를 마쳤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교육청은 “양측이 대립하고 있어 지금으로서는 책임 있는 자료를 제시할 수 없다”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오히려 행정감사 대상으로 선정해 비판을 받고 있다. 시의회 교육위원회는 A초 교장을 의회 증인으로 출석시켜 정문폐쇄 문제와 관련이 없는 20여 항목의 과도한 답변 자료를 요구했다. ‘학교장 권한 무력화’ 논란이 일고 있는 ‘서울특별시교육감 행정권한의 위임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도 발의한 상태다. 이에 대해 서울교총(회장 전병식)은 “학교는 학생교육을 위한 배움터이자 가장 안전한 공간이 돼야 한다는 제일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됐으면 정문을 폐쇄하는 조치를 내렸을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교총은 시교육청과 시의회 교육위원회의 편향적인 논리도 지적했다. 이들은 “본 사태를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합리적 해결방안을 제시해야 할 시교육청이 오히려 정치권 입김에 휘둘려 학교를 압박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했다. 이어 “시의회 교육위원회도 학생 안전을 최우선해야 함에도 주민 민원을 이유로 학교 시설물을 개방하라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요구”라며 “주민의 편의가 학생안전보다 더 중요시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