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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위대한 영상시인’이라 불리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예술이 태어나고 발전되는 곳은 이상을 향한 쉴 새 없는 동경이 가득 찬 곳이며, 예술의 주변으로 인간들이 모이도록 만드는 곳”이라고 했다. 이 글을 깊이 되새겨보면, 학교교육에 있어서 ‘예술을 향한 동경과 교육받고 모일 수 있는 곳’이 많은 나라가 바로 러시아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곳에는 분명 ‘예술의 주변’으로 많은 이들이 쉽게 모일 있는 체계가 마련돼 있다. 도시 내의 많은 공연장, 다양한 공연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의 공연 관람비와 더불어 다양한 분야의 학교 예술교육과 방과 후의 전문 예술학교가 있다. 러시아인들은 누구나 마치 예술분야의 전문가라는 느낌이 들만큼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 이는 학교 예술교육 체계와 질 관리로부터 나온다. 정부 자료를 보면 모스크바 내에 예술관련 교육을 수행하는 곳이 1491개소이며, 846개의 중등과정학교에서 예술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의 수는 38만 명이라고 한다. 차이콥스키 음악원 등 음악만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기관은 러시아에 491개가 있으며 이중 모스크바 한 도시에만 113개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또 전국적으로 1634만8945명(2010년 기준)의 학생들이 정규과정과 방과후 과정으로 예술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는 초·중등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예술교육에 노출돼 예술적 소양을 길러주는 교육을 받고 있다. 이런 음악교육의 경우 주 1~2회 일대일 레슨을 기본으로 이뤄지며 과목당 한 학기에 총 1000루블(4만 원 정도)만 지불하면 집 근처에 위치한 음악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학기말에는 학생의 실력향상은 물론 지도교사의 교습 능력을 함께 평가함으로써 체계적인 질 관리도 하고 있다. 또 다양한 공연시설에서 부담되지 않는 가격으로 세계수준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해 교육과 체험이 함께 이뤄지는 시스템을 갖춘 예술교육의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등 일부 유명 극장을 제외하고는 학생들에게 문화예술 공연 관람 할인이나 무료 관람 등의 혜택이 많이 제공돼 높은 수준의 음악과 발레공연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환경은 정말 부러울 정도다. 이렇게 관객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공연장이 많고 공연을 보러오는 많은 관객들이 있다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는 계속해서 예술 활동을 하고 활동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사회적 인프라가 되고 있다. 더불어 무상 수준의 예술수업을 통해 누구나 예술 관련 진로를 택할 수 있다. 예술계 특수 중등직업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연주가가 되거나 음악학교 교원이 돼 음악교육을 전수해주는 전달자로 활동하게 된다. 일대일 지도를 기본으로 하다 보니 많은 수의 교원이 필요한 환경 때문이다. 많은 수의 교원을 운영하다 보니 교원의 보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문제도 있지만 예술계 취업률이 매우 낮은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 예술계 졸업생들의 취업기회 확대 측면에서는 눈여겨 볼 필요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체육·예술교육 활성화에 다양한 정부차원의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특히 교육부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의 지원 하에 한국과 러시아 양국 교사 10명이 상대국에서 수업을 하고 학교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다. 비록 적은 수의 교사교류였지만 그동안 수학·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영·미권 국가로 한정됐던 교사교류 사업이 예술교육분야와 러시아 등 비영어권 국가로 확대된 것을 계기로 러시아 학교예술교육의 장·단점을 분석, 우리 학교교육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선생님들을 신뢰하고 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는 학교체제를 만들 때 인성교육도 가능하다.” 대통령직 인수위 교육분과 간사를 지낸 곽병선 박사는 박근혜정부의 교원정책을 논할 때마다 강조한 말이다. 그는 교사의 전문성 신뢰를 바탕으로 교권을 높인 독일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독일의 강력한 교권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현지 교육칼럼니스트 박성숙 작가에게 들어본다. 진학 시 성적보다 ‘교사 추천’ 우선 초등 4년 담임한 전문적 판단 존중 독일 대부분 주의 초등학교는 4년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실업학교인 레알슐레와 인문계인 김나지움으로 나뉘어 진학하게 되니 4학년은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다. 주나에 따라 혹은 도시나 학교별로 약간씩 차이가 나지만 평균적으로 학생 절반 정도는 인문계로 절반은 실업계로 진학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진학과정에서 학부모와 교사의 의견차이 때문에 종종 문제가 발생한다. 이유는 교사에게 학생의 상급학교 추천권을 준 그룬트슐엠프펠룽(Grundschulempfehlung) 혹은 레러엠프펠룽(Lehrerempfehlung)이란 제도 때문이다. 현재 16개 주 중 9개 주는 담임교사가 직접 추천하고 교장이 승인한 추천서가 진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노드라인베스트팔랜 주를 예로 들면, 주 학교법이 “상급학교는 4학년1학기 성적을 첨부한 교사의 추천으로 실업계와 인문계를 결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독일은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초등학교 때는 한 선생님이 4년을 가르친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사가 부모보다 학교생활에 관한 한 학생에 대해 더 많이 알 수도 있다. 노드라인베스트팔렌주도 초등학교가 끝나면 김나지움과 레알슐레와 하우프트슐레로 진로를 정해야 한다. 말이 초등학교 4학년이지 원서에 4학년 1학기 성적표를 첨부하기 때문에 4학년 1학기까지의 성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돼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진로를 결정하는 최우선 기준은 수업시간에 아이를 가르친 교사의 판단이라는 점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진학기준은 성적보다는 교사의 서면 추천이 우선이다. 성적은 추천이 문제가 됐을 때를 대비해 첨부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교사의 추천에 불만이 있는 부모나 학생이 구제 받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사의 결정을 거부하려면 재교육기관을 찾아 프로그노제운터리히트(Prognoseunterricht)라는 특별교육을 받고 학생의 상급학교 진학여부에 대한 전문 기관의 승인을 받든지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간단치 않은 과정이다. 진학 후에도 유동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실업계 학교에 진학했다가도 6개월 후에 바로 김나지움으로 옮길 수도 있고 김나지움에 갔던 아이들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면 6학년이 끝나고 레알슐레나 하우프트슐레로 전학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서를 쓸 때마다 불만이 있는 부모는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교사가 같은 점수를 받아도 학생의 가정환경에 따라 차별을 한다는 주장이다. 중산층 자녀는 김나지움으로 블루칼라 부모를 둔 아이들은 실업계로 추천한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 2세의 경우에는 그런 차별이 더 심하다고 한다. 필자는 이런 이야기를 큰 아이 초등 담임교사와 나눠 본 적이 있다. 교사는 그런 편견이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순전히 환경만을 보고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고 했다. 4년 동안 아이가 숙제를 어떻게 해오는지 어려운 과제를 줬을 때 부모가 도움을 줄 수 있는지의 여부까지 꾸준히 관찰하고 테스트해서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다. 불만 있는 사람들은 차별이라 단정 짓지만, 대부분은 교사가 나름의 교육적인 경험과 학생 유형에 맞는 적절한 진로에 대해 숙고한 후 내린 결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독일 사회가 이런 교사의 전문적인 결정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다. 교사의 추천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는 그래도 역시 성적이다. 그래서 학생과 부모가 받을 수 있는 성적에 대한 압박이 종종 문제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를 이유로 7개 주에서는 교사의 상급학교 추천서인 레러엠프펠룽과 학부모 진학상담을 의무가 아닌 권장사항으로 두기도 한다. 크고 작은 문제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회의 다수는 여전히 교사에게 제자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교권을 부여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후 임용시험에 임하는 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국의 교육위원회들은 ‘학교에 사회의 공기를 불어넣자’는 목표를 정하고 다양한 사회경력이 있는 교사의 채용을 늘리려 노력하고 있는 것. 물론 아직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교원이 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2012년 전국 공립학교 교원채용시험에서 기업 등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교사는 5.5%에 불과했다. 그래서2012년도 채용시험에서는 이를 위해 사회경력이 있는 응시생에게 1차 시험의 일부과목을 면제하기도 했다.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진 사회인 교사를 변화에 둔감하고 능동적으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 점점 고립돼가는 학교를 변화시키는 기폭제로 삼기 위함이다. 교사지망생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라는 외길에 바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조금 늦지만 다양한 사회경험을 쌓은 뒤 교직에 들어오는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2009년 와세대대를 졸업한 칸노우이노(菅野祐太)씨는 교사지망생이지만 먼저 기업에 취직했다. 대학 3, 4학년 때 요코하마시의 한 소학교에서 봉사활동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질책만으로 학생지도가 되지 않음을 발견한 것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난 뒤 교사가 되기로 결론을 내리고 이직희망자들을 지원해주는 기업에 취직했다. 당시는 리만쇼크의 여파로 직정을 옮기려는 희망자가 많아 이력서를 하루 천장 이상 읽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필요한 직업을 알선해 주는 고된 일이었다고 한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는 휴일을 이용해 피해지역에서 공부교실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도 했다. 작년 가을 3년 정도 근무한 회사를 퇴직하고 현재는 피해지역인 이와테의 방과후학습 교실에서 중학생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NPO 활동을 하고 있다. 교사가 돼 기업과 NPO활동에서 배운 좋은 점을 바탕으로 인재를 육성하는데 열정을 바치고 싶어 곧 교사채용시험에 응시하려고 한다. 시로타나오야(白田直也)씨는 올봄 교육격차의 해소를 목표로 하는 NPO가 파견하는 교원으로 나라시소학교에 부임했다. 그는 2010년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 기업에 취직했다. 학생과 세계를 연결시켜는 것이 교사의 가장 큰 임무라는 교육관 때문이다. 그가 다닌 곳은 음식점체인을 운영하는 기업이었는데 영업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교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많이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동경도 한 사립중학교 영어교사인 키노시타산다(木下山多)씨는 12년간 기업에서 근무한 경력 때문에 교사지망생 대상 강연회에 많이 초청받고 있다. 그는 “최근 2년간 교사가 되기 전에 사회경험을 쌓고 싶다는 교사지망생으로부터 상담을 많이 받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도 일본 학교는 폐쇄적이고 변함없는 칠판과 분필수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경력을 가진 교사가 현장에 투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학교를 변화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65%가 교사의 질이라고 대답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학교폭력, 이지매, 자살 등도 결국 교사가 주체가 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육개혁은 곧 교사개혁이다.
‘약탈 진상’등 연구자료 교사에 제공 "독도 교육 '조국 유산’물려주는 일" 2010년 한국교총이 ‘독도의 날’을 선포한 이후 해마다 10월 25일은 전 국민적인 기념일이 됐다. 선포식 당일 기념식장에서 언론의 관심은 주최단체장들에게 집중돼 ‘독도의 날’ 선포를 최초로 제안한 한 퇴직교장이 감동의 눈으로 선포식 장면을 지켜보는 모습은 포착하지 못했다. ‘독도의 날’ 선포의 숨은 공신인 이영위(사진) 전 서울 노원중 교장이 바로 그 주인공. 당시 이야기를 묻자, 그는 “공구영·장창식 전 교장이 이끄는 ‘독도지킴이 서울퇴직교장회’의 독도연구 편집위원으로서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당연한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 전 교장이 독도 문제에 주목하게 된 것은 2006년. 그는 “일본에서 열린 한 학생 교류 행사 자리에서 우리 학생들이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이 일을 계기로 퇴직 교장 몇 명이 뜻을 모았다”고 회상했다. 이후 교육부, 서울시교육위원회, 교과서연구재단, 각종 언론사 등을 찾아다니며 독도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독도교육’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 전 교장은 “제안할 때는 누구나 긍정적이지만 구체적인 결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 허무감이 밀려왔다”며 “국경수비대를 주둔시키고 실질적 점유를 했음에도 캄보디아에 영토를 넘겨준 태국의 사례를 알고 독도문제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 교장은 ‘독도지킴이 서울 퇴직 교장회’가 ‘서울 평생 교육동지회’에 통합된 지금도 독도를 지키기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4월내로 그동안 연구한 내용을 정리한 ‘일본제국의 독도 약탈의 진상’을 보완해 독도학교 등에 제공하고, 자료 활용을 원하는 누구에게라도 이메일로 보내줄 생각입니다. 독도를 가르치는 일은 우리 조국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모두 독도지킴이가 됩시다.”
마산제일고(교장 박근제)에서는19일~21일까지 3일간 학년별 학부모를 초청하여 세미나실에서 교육과정 설명회를 가졌다.진로상담부(부장 송유홍)주관으로 실시 된 교육과정 설명회는 1학년 학부모 150명, 2학년 학부모 114명, 3학년 학부모 125명이 참석하였다. 개회사에 이어 학교장이 교감과 각 부장교사와 담임을 소개하고 인사말에서인성교육과 학부모가원하는 학교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교육과정부장과 연구부장,학생부장,진학지도부장 등이학교 업무 전반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특히 김주영 학생부장은 선질서 후학습에 따른우리학교의 4무 운동(학교폭력없는 학교, 따돌림 학생없는 학교, 음주. 흡연학생 없는 학교, 휴대폰 소지 학생 없는 학교)에 대한 특별한안내가 있었고, 박남용 진학지도부장은 변화하는 대학입시에 학생과 학부모가 능동적으로 대처 하도록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마산제일고등학교(교장 박근제)에서는 2013년 3월25일(월) 천안함 폭침 하루를 앞두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동영상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내에 천안함 46용사를 추모하는 현수막을 걸어 국토를 방위하다 숨진 46용사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우리학교는 고 한주호 준위의 아들 한상기군의 모교이다.
교정에 아름다운 봄이 왔습니다
가정여자중학교(교장 장인섭)는 27일 천연 제설제의 필요성과 천연 제설제를 만드는 탐구방법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탐구토론대회는 3인 1팀으로 구성해야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데 모두 11팀이 참가하였다. 대회 진행은 발표팀, 반론팀, 평론팀으로 구성하여 발표3분 토론5분 평론2분의 시간이 주어졌으며 각 팀별로 발표팀, 반론팀, 평론팀에서 한 번씩 활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탐구한 내용을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발표하였으며 토론하는 자세도 상대편의 내용을 기초하여 사전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심도 있게 반박하는 등 수준 높은 토론을 벌였다. 이번 토론대회에서 1학년 엄정은 학생은 풍부한 기초 지식과 상식에 치밀한 사전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선배들의 발표에 대한 반박을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진행해서 학생들 뿐 아니라 심사하는 교사들도 놀라게 하였다.
경남 창원시 마산지역교원총연합회 정기 대의원회의가 2013년 3월 25일(월) 산호초등학교 과학실에서 열렸다.약35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정기 회의에서는 개회선언에 이어 회장인사가 있었으며 2012.결산보고 및 2013. 예산안에 대한 심의가 있었다.임원선출에 따라 회장에 배재권(산호초등학교교장) 부회장에 김태중(양덕초등학교교장), 변종현(경남대교수), 최옥선(합성초등학교교장)등이 선출 되었다. 이번 회의에서는 감사와 이사를 선출하여 1,420명의 회원을 가진 마산지역교원총연합회를 이끌어 간다. 기타 안건에서는 마산교총 회원 확보대책에 대한 토의가 있었으며 마산교총 체육대회 안건도 처리되었다.
사단법인 미래희망기구(회장 정진환)는 한국 마이크로소프트(대표 제임스 김)·재단법인 니어재단(이사장 정덕구)과 공동으로 글로벌리더십 영어 경연대회(GLEC)를 개최한다. UN협회세계연맹과 서울대 언어교육원, 리츠메이칸 아시아태평양대가 후원하는 이번 대회는 국내 초·중·고·대학생을 대상으로 논술과 말하기 두 부문으로 치러지고 있다. ‘상상하라, 그대의 아이디어가 세상의 난제를 해결하는 순간을’이라는 테마로 열리는 이번 대회는 유엔의 새천년 개발목표와 지속가능 개발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국제 개발·원조방안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대회 예선은 29일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iBT(인터넷 기반평가)방식으로 학교급별, 부문별로 진행되며 예선 기간 중 언제라도 인터넷으로 접수가 가능하다. 본선은 5월 25일과 26일 양일간 서울대학교에서 치러질 예정이며 접수기간은 5월 9일에서 20일까지다. 수상자들에게는 장학금을 포함한 총 4000만원 규모의 부상이 지급될 예정이다. 대상 수상자에게는 UN본부에서 진행되는 교육캠프 또는 UN협회 세계연맹과 미래희망기구가 주최하는 글로벌리더십 인재양성 캠프 참가비 전액을 지원받거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전 세계 IT경연대회 참관 등의 특전도 제공된다. 대회 본선 진출자들에게는 주최기관에서 공동으로 발급하는 인증서가 수여된다. 세부 내용은 홈페이지(www.gleader.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의=070-8280-1626
일본 초·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에서도 우리나라 영토인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한 교과서가 전방위적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고교 교과서 검정 결과에 따르면 일본사·세계사·지리·정치경제 등 사회과 교과서 21종 중 15종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기술했다. 지리뿐만 아니라 일본사나 세계사에서도 독도를 일본 땅인 것처럼 언급하는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점거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혹은 국제사법재판소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등 왜곡된 내용도 포함됐다. 일본이 이번 검정 결과를 통해 발표할 교과서는 내년 봄 신학기부터 4년 동안 사용될 예정이다. 특히, 지난해 1차로 진행한 39종에 대한 검정 결과 발표 때는 절반이 넘는 21종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기술된 바 있고, 일본군 종군위안부와 관련된 내용 역시 아예 생략되거나 간략하게 기술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지난해 고교 교과서 검정에서는 사회과 교과서 39종 중 22종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했는데, 올해는 극우 단체가 지원하는 후소샤 등은 검정 대상이 아니다. 올해는 시미즈, 짓쿄, 도쿄쇼세키 등 3개 출판사 교과서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기술을 추가했다. 특히 데이코쿠쇼인(帝國書院) 지리 교과서는 한국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도쿄쇼세키 교과서는 '독도가 분쟁 지역인 만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나 국제사법재판소(ICJ)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추가했다. 고교 지리 교과서는 작년 7종에 이어 올해 2종에 독도가 일본 땅으로 표기됐다. 이에 따라 초·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에서도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한 지리 교과서가 100% 사용된다. 교과서를 통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1997년 우익 단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발족하면서 본격화했다. 자민당 정부는 2008년 이들의 주장을 수용, 교과서 제작의 가이드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초·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통해 교과서에 독도 영유권을 기술하도록 사실상 강제했다. 일본 정부는 2009년 고교 교과서에도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주장을 확대하도록 했다. 또, 일본군 강제동원 위안부에 대한 기술은 일본사·세계사 교과서 12종 중 9종에 포함됐다. 과거보다 1개 교과서가 증가했다. 위안부 강제동원 과정에서 일본군의 책임을 더 명확하게 한 사례도 있었다. 시미즈(淸水)출판사 교과서에서는 '위안부로 연행됐다'는 표현을 '일본군에 연행됐다'는 식으로 바꿨다. 짓쿄출판사 교과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장면을 싣고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을 기술했다. 우리나라 정부와 사회‧시민단체는 심각한 우려와 함께 성명 등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을뿐더러 지난 과오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커녕, 영토교육을 빌미로 독도 영유권 주장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까지 적시하여 군국주의적 역사관을 더 노골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이는 한‧일 양국의 선린 우호관계를 부정하는 것이자,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반역사적 행위이다. 또한 실효적 지배뿐만 아니라 역사‧지리‧국제법적으로 너무나도 명백한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에 대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심을 다시 짓밟는 ‘선전포고’와 다를 바 없다. 최근 일본 정부와 자민당의 움직임을 볼 때 향후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많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강력히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일본 정부가 여전히 역사를 직시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 내용을 포함한 고등학교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킨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이의 근본적인 시정을 촉구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또 "일본 정부는 '역사에 눈감는 자,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아베정권의 보수화와 우경화가 우려가 아닌 현실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분명한 ‘선 긋기 외교’를 취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사태와 영토권 분쟁 해결에 대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원칙을 갖고, 일관성 있게 단호히 대처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독도의 우리 땅 명확히 하기 등의 노력을 보여주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이를 위해 범 정부 차원의 독도의 날 기념식 개최, 일본 교과서 역사 왜곡 알기 운동 전개, 전 국민 ‘독도는 우리 땅’ 홍보하기, 교육관련 일본 상품 안사기 전 국민 운동 등을 전개하고, 일본 관련 당국에게도 강력하게 경고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일본 정부가 역사 왜곡, 교과서 왜곡을 하지 못하도록 정당한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교육과정 운영의 기본이 교과서가 왜곡하지 않도록 외교적 협상과 조율울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추후에는 이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3월 27일 오후 6시 일본인 방문객 스즈키 히데오 외 7명이 본교를 방문하였다. 이들은 일본 토쿄 요미우리신문 문화센터에서 한국사 강의를 통하여 이웃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현재 어느 때보다한일관계가 굳어진 상태에서 한국 현지인의 역사의식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듣기위하여 필자를 찾아 온 것이다. 이에 필자는 최근 일본에서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와다 하루키(75·和田春樹) 도쿄대 명예 교수가 쓴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담화를 나누고 한일교류의 발전을 위하여 교육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와다 하루키는 “한국이 실효지배하는 ‘독도=다케시마’에 대한 주권 주장을 일본이 단념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며, 이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견해이다. 그는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일본의 전향적인 결단을 촉구했다. “이룰 전망이 없는 주장을 계속해서 한·일관계, 일본인과 한국인의 감정을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라는 주장이다. 그는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일본에서 지난 해 출간하여, 한국과는 독도를, 중국과는 ‘센카쿠=댜오위 제도’를, 러시아와는 북방 4도를 놓고 일본이 각각 벌여온 영토 갈등의 수준이 그 어느 때보다 악화되는 상황에서 나온 노학자의 영토 갈등 진단이다. 와다 교수는 “조선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는 일본으로서는, 다케시마(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이고, 한국의 지배는 ‘불법 점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의(道義)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의 독도 영유권, 일본이 빨리 인정하는 게 최선이라는 견해이다 이같은 와다 교수의 지적은 독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일종의 타협안이기도 하다.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한국 정부는 독도 주변 해역에서 시마네현 어민들도 어업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과 독도를 기점으로 경제수역을 선포하지 말 것을 제안한 내용이다. 그는 1966년부터 도쿄대에서 가르치다 98년 정년 퇴직하였으며, 한국과 북한 현대사 전문가다. 역사적 근거를 들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부당함을 역설했다. ‘독도=다케시마’의 점령은 일본이 1905년 1월 조선 침략을 가속화하면서부터 시작했음을 분명히 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자 연합국군 최고사령부가 46년부터 독도를 일본의 관리 영토에서 제외한 점도 확인시켰다. 나아가 52년 이승만 라인의 안쪽에 독도를 포함한 이후 오늘날까지 58년 동안 한국이 실효지배를 한 점을 중시했다.
충북 진천은 충남․충북․경기도의 경계에 위치해 교통이 편리하고 기름진 넓은 들에 물이 마르지 않아 생거진천(生居鎭川)으로 불렸다. 살기 좋은 곳에 역사유적과 자연관광지도 많다. 김유신탄생지와 태실, 길상사, 석장리 유적, 농다리, 이상설 생가, 보탑사, 정송강사, 배티성지, 종박물관, 초평저수지, 두타산 등이 진천의 볼거리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의 굴티마을 앞에 천년 세월의 물살을 이겨낸 농다리(충북유형문화재 제28호)가 있다. 농다리는 진천농교로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00여m의 돌다리이다. 교각을 세우고 돌을 반듯하게 깎아 만든 다리가 아니라 멀리서 보면 돌무더기처럼 보인다. 휴일에는 일부러 찾아와 다소 투박해 보이는 돌다리를 건너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농다리의 우수성과 역사를 알리는 농다리 전시관이 입구에 있다. 이곳에 세계 각국의 다리, 전설을 영상으로 구현한 매직 비전, 농교의 제작 원리, 사진전 등의 공간이 마련돼 있다. 농다리유래비와 원형복원사적비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면 농다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역사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얼기설기 얹어 놓은 것처럼 허술해 보이는 이 돌다리가 강한 물살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천년 세월을 이겨낸데 과학과 철학이 담겨있다. 하늘의 기본 별자리를 응용해 28개의 교각을 만들었다. 모양이 제각각인 사력암질 자석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고, 상단의 폭과 두께가 좁아지게 하여 물살의 영향을 덜 받도록 만들었다. 잠수교처럼 장마 때는 큰물이 다리 위로 넘쳐흐르게 하고, 물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구불구불 지네가 기어가는 형태로 만들었다. 천년정을 지나 농다리 방향을 바라보면 중부고속도로가 바로 앞이다. 너른 들판과 진천 읍내도 가깝게 보인다. 도로 위의 차들이 미호천을 가로지른 농다리를 내려다보며 씽씽 잘도 달린다. 정상의 농암정은 조망이 좋아 전망대 역할을 한다. 정자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쉼터로 좋은데 좌우로 지네가 기어가는 모양의 농다리와 용이 승천하는 형상의 초평저수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저수지 뒤편으로 보이는 산이 높이 598m의 두타산이다. 농다리에서 초평저수지로 가는 언덕에 돌을 쌓고 오색 헝겊을 걸어 놓은 성황당이 있다. 성황당은 용고개 일명 살고개 정상에 위치한다. 성황당에서 동쪽으로 내려서면 물가로 산책로가 이어지는 초평저수지가 물을 가득 담고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 진천군청소년수련원, 오른쪽으로 피서대가 보인다. 피서대에 옛 이야기가 전해온다. 저수지로 수몰된 화산리에 부자마을이 있었고, 마을에서 시주를 거절당한 것을 괘씸하게 여긴 스님이 ‘앞산을 깎아 길을 내면 큰 부자마을이 된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대로 하니 그곳에서 피가 나온 후 마을이 망하여 없어졌다. 이 일대가 용의 형상인데 스님이 용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을 깎아 길을 내게 하여 용을 죽였다. 용의 허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모인 곳이라 하여 피서대가 되었다. 4∼6월, 9∼10월의 토요일은 농다리에서 '토요 농다리 놀이학교'가 운영된다. 놀거리가 마땅하지 못한 어린이들을 위해 평생학습센터에서 땅 따먹기, 망 줍기, 고무놀이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날씨 좋은 날 농다리에 가면 오랜 역사와 자연풍경이 멋진 추억을 선물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교과서를 또다시 대거 통과시킨 검정 결과를 발표하자 교육부와 교총이 일제히 이를 규탄했다. 26일 일본 문부과학성의 ‘교과용 도서 검정조사심의회’에서 통과된 교과서는 지리 2종, 정치·경제 7종, 일본사 9종, 세계사 3종 등 총 21종으로 이 가운데 15종에서 독도 관련 기술이 포함됐다. 특히 그동안 독도 관련 기술이 없던 짓쿄(實敎)출판, 시미즈(淸水)서원, 도쿄(東京)서적 등 3종의 교과서에 처음으로 독도 관련 내용이 들어가 지난해에 이어 독도 관련 기술이 들어간 교과서가 또다시 늘어났다. 이번 검정 교과서에 종군위안부 관련 내용도 생략되거나 간략히 기술돼 역사왜곡에 대한 지적을 받고 있다. 교육부는 26일 즉시 검정 결과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명하고 이번 조치의 철회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서남수 장관 명의의 항의서한을 일본 문부과학성 대신에게 전달하도록 우리 외교부에 요청했다. 교총도 같은 날 일본의 교과서 검정결과를 ‘역사왜곡과 영유권 침탈’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교총은 또 새 정부가 일본과 분명한 ‘선 긋기 외교’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독도 특별수업, 교육자료 개발 및 보급, 교원 독도탐방 등 교원단체로서의 역할도 하기로 했다. 교총은 지난 2010년 10월 25일 ‘독도의 날’을 선포한 후 매년 독도의 날 기념식을 개최하고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나올 대마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 항의시위, 국제기구 서한 발송, 일본 문부과학성 항의서한 발송 등의 활동을 해 왔다.
“아버지 잘 못했어요. 용서해 주셔요. 제발 학교에 가게 저를 좀 내보내 주세요.” 창고 안에서 단 하나뿐인 아들 녀석이 울며 호소를 합니다. 그러나 유 사장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식당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불러 마당 청소를 시키고 식당 안과 홀의 바닥을 닦게 하고 진입로에서부터 혹시 부실 한 곳은 없는지 일일이 살핍니다. “얘, 아범아, 저 녀석 학교에 안 보낼 거야. 어서 보내 줘야지?” 할머니가 나서셔서 아버지를 달래 보십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못 들은 척 집 앞의 골목길과 진입로의 주변이 더럽지 않나 살피고 빗자루를 들어서 다시 한 번 정리를 합니다. 누가 보아도 깨끗하게 비질이 되어서 들어오면서 상쾌한 기분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만들라는 것이 늘 집안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입니다. 지금 창고 같은 커다란 방에는 이 집의 3대 독자 외아들이 갇혀 있습니다. 아버지 유 사장은 일부러 아들에게 이런 고통을 주어서 자신의 잘 못을 크게 뉘우치게 해주려는 계획입니다. 아무리 이런 벌을 주는 자신이지만 그래도 자식이 더구나 오직 하나 뿐인 자식이 저렇게 갇혀 있는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귀여울수록 자신이 할 일을 스스로 할 줄 알고 분명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지난번의 잘 못을 용서해 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아주 엄하게 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널 잘 못 가르친 것이야. 이렇게 우리 집이 잘 살게 되고 지 금 제법 돈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는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난 네가 쓸 곳에 돈을 쓰는 것은 용서를 해, 하지만 그렇게 함부로 돈을 가져다 제 멋대로 쓰는 버릇은 용서를 할 수 없어. 네가 너의 잘 못을 깨닫고 다시 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생기도록 하지 않으면 금 방 또 그러게 될 거 야. 그러니 아주 못된 버릇은 뿌리를 뽑아야 돼.” 아버지는 아들 성호를 불러서 이렇게 꾸중을 한 다음에 창고에 들어가서 자기 잘못을 깨닫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반성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가방을 뒤져보니 아이가 부모 몰래 돈을 가지고 다니면서 별로 쓸모도 없는 이것저것을 함부로 사 모으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직 어리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부모의 눈을 속이고 돈을 함부로 쓰는 버릇을 어려서 고치지 못하면 평생이 고달플 것이라는 것이 유 사장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자신의 잘 못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고 따끔한 벌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일부러 학교에 늦도록 해서 학교에서 늦게 왔다고 꾸중도 들어보아야 하고 자기 잘못으로 일어난 여러 가지가 불편하고 집안이 편하지 않으며, 학교에 가는 것까지 제 시간에 가지 못해서 꾸중을 들어서 자기 잘 못을 깨닫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유 사장이 지금 자기 아들 성호만큼 할 적에는 이 고장은 아주 사골 중에 산골로서 사람이 사는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시내를 따라 가느다란 오솔길이 나 있는 것밖에는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살 것 같지 않던 마을이었습니다. 산골길을 3km나 걸어 들어오면 이제 그 산골길에서도 가장 험한 돌고개 길이 나옵니다. 여기 돌고개 마을에는 모두 일곱 집이 살았는데, 그 중에서 유 사장네가 가장 들머리에 있고, 다음으로 김사장네이고 다시 한 고개를 넘어서 다섯 집이 있었는데, 이 마을은 완전히 산 속에서 하늘만 바라보이는 산골 중에 산골입니다. 이 유 사장네는 이 가난한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하여 유 사장의 할아버지가 이웃 마을에 머슴살이를 해서 일년에 열 가마 남짓한 쌀을 사경을 받으면 이것으로 유 사장과 어머니가 먹고살면서 모든 것을 다 써야 하였습니다. 유 사장의 아버지는 6.25 전쟁통에 전쟁터에서 죽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놀라 너무 화를 끓인 탓에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집안에 식구란 어머니와 할아버지만 남아서 유 사장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아이를 잘 기르도록 돈을 벌어다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젊은 아낙이 혼자 있으니 아무리 며느리라고 하지만 집안에 같이 살기가 여간 쑥스럽고 처신하기가 곤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서 먹고 자고, 생활을 하면서 사경이나 가져다주고 한 달에 한 두 번 들려서 옷이나 가져다 입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 사장의 어린 시절에 집안 형편이라는 것은 말을 할 수가 없이 가난하여 단 혼자뿐인 유 사장에게 운동화는 커녕 검정 통고무신도 자주 사줄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할아버지가 온 몸을 다 바쳐 고생해서 벌어오신 사경을 다 먹고 쓰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이것을 저축하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더욱 힘이드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남의 집 일을 하고 산비탈을 파서 곡식이라고 심어 보았습니다. 산골이라서 무엇 하나 잘 자라 주지 않은 땅이었지만, 콩과 팥을 심고 도랑을 지어 고구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조와 수수를 심어서 그것이라도 먹고 살아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골에서 비료도 주지 않고 더구나 산짐승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노루며 고라니 산토끼들이 곡식을 뜯어 먹고 멧돼지는 파 엎어서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산 꿩은 어찌 그리도 잘 아는지 고구마 같은 것이 조금 알이 들라치면 꼭꼭 파서 상처를 내어놓고 줄기를 잘라 놓았습니다. 그러니 일년 내내 농사를 지어 보았자 한 두 달의 식량도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봄엔 산나물을 뜯어다가 죽을 쑤어 먹고, 가을엔 산 열매를 따 모아서 요기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애야, 너 그렇게 해 보았자 먹을 것이 얼마나 생기더냐. 고생하지 말고 그냥 집에 있 거라. 너 너무 힘들어서 그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떡허냐?”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말렸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무엇이든지 해보려고 쉴새 없이 노력을 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자란 유 사장은 아직도 늙으신 어머니가 자신의 사업을 돕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쉬지도 않고 애쓰시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어린 시절 너무 애쓰시는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한 유 사장은 어느 날 어머니가 사 주신 통고무신을 집에서 신고 나섰지만, 울퉁불퉁한 냇가 길을 걷자니 어찌나 돌이 많은지 고무신이 남아 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안 보이는 구비를 돌아서면 이곳에서부터는 고무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맨발로 뛰었습니다. 흙바닥도 아닌 돌밭을 맨발로 걷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발이 조금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또 동네 아이들이 모두 다 가난하여서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남부끄러울 것도 없었습니다. 맨발로 달려 가다가 학교가 보이는 곳에 이르면 얼른 발을 씻고 신을 신었습니다. 태연하게 학교에 들어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아무도 맨발로 달려온 아이들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자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아들 녀석은 너무 편하고 너무 어린 짓만 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자가용으로 학교 앞까지 실어다 주면 운동장까지 들어가지 않는다고 실랑입니다. 다들 운동장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약속이 되어 있으니까 아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하게 공부하는 녀석이 공부에 열심이지 않고 장난감이나 사 모으고 딴 짓을 하기 시작 한 것입니다. 더구나 부모 몰래 돈을 가져다 쓰기 시작한 것은 용서를 할 수 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자라던 시절에 살던 것에 비하여 너무 호화롭고 풍요로움 속에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는 아이를 보면서 저렇게 자라면 나중에 돈을 허피 쓰는 낭비벽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하면서 걱정을 해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돈을 가져다가 낭비를 하기 시작한 것을 보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지금 살고 있는 이 집터를 사실 때에 어찌 했던가? 유 사장이 아직 어리고 어머니가 홀로 키우는 것을 보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서 먹여 살리는데 도무지 그래 가지고는 손주 녀석에게 무엇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면장님, 내가 저 어린 손자 녀석을 위해 땅 한 뙤기라도 마련해 주고 싶지만 어디 손에 쥔 것이 없잖소. 어떻게 좀 도와주시오. 지금 집을 지어 살고 있는 땅이라도 내 땅으로 만들어 남겨 주고 싶은데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할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면장님은 그 땅이 국유지이고 요즘에 별로 비싸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도와주는 방법을 써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그 땅을 산 것으로 매매계약서를 만들고, 땅 값은 2년 동안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를 해주면 그 사경을 갚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면장님이 돈을 내서 사 주고 할아버지가 2년 동안 면장님 집의 일을 맡아 하는 머슴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하늘을 날아갈 듯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2년 동안 열심히 면장 댁의 일을 하였습니다. 면장님은 그런 할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을을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밭을 하나 더 불하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할아버지가 남겨준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성호만큼 한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산과 들로 돌아다니면서 나물을 캐고 어머니의 나물 보따리를 들어다 드리기 위해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었습니다. 어느 날은 어머니의 나물 보따리를 들 수가 없어서 둘러매었다가 넘어지면서 뒹굴러서 몇 바퀴 구르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는 정말 이제 죽었구나 싶을 만큼 위험하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를 위해서 끝까지 따라 다니면서 집안 일을 도왔었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뿐인 아들 녀석이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딴 짓이나 하는 것을 보니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입장에서는 요즘 아이들이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것을 좀 사려고 해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모두 안 된다고만 하니 아이들에게 뒤진 것 같고 자기만 못난이 같아서 기어이 갖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이 자라던 시절의 일을 이야기 하셔서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고 더구나 지금 우리 집은 그 때처럼 가난뱅이도 아니고 동네에서는 제법 부자 소리를 듣는 집입니다. 그런데 자기 반 아이들이 다 가지고 노는 이 딴 오락기 하나를 사주지 않으니 뿔이 나고 그래서 어떻게든지 가져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유 사장은 자기가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당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맴돕니다. 가난하여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녀야 할 5학년이 되어서도 좀 채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너무 늦게까지 공부를 하면서 아이들이 굶는 것이 안타까워서 꼭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점심을 굶으면 한 창 자라야 할 너희들이 자라지 못하고,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서도 몸이 부실하여 일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야. 내일은 꼭 도 시락을 싸 가지고 오도록 해요.”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유 사장은 어머니께 그대로 말씀을 드려서 정말 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학교에 갔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기 위해 쌀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보나마나 잡곡밥을 쌌을 것입니다. 아침에도 좁쌀과 수수쌀이 조금씩 들어 있는 죽을 먹었는데 무슨 밥을 쌌을 리가 없습니다. 성호는 학교 가는 길에 집에서 한 참을 나오다가 다른 아이들이 보이지 않은 산기슭으로 올라가 살며시 도시락을 열어 보았습니다. 도시락에는 잡곡밥과 고구마 두 개가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그 도시락이 먹고 싶은지 공부시간에도 손은 도시락에만 가 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은 도시락을 만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성호는 얼른 손을 꺼내어 책상 위의 공책에 올려놓기를 몇 번도 더 하였습니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지 않은 날은 배가 고파 오는 것이 싫어서 점심시간이 되는 것이 가장 싫고, 가장 싫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넷째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도시락을 싸 온 아이들이 대여섯 명이나 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아이들이 무엇을 싸 가지고 왔을까 관심이 많았습니다. “야 ! 우리 분단에서 성호가 오늘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왔으니까 우리 성호 도시락 구경 좀 하자.” 반에서도 개구쟁이 노릇을 하는 학교 옆 동네 경수였습니다. 경수는 날마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으며, 계란부침이나 멸치 반찬 등으로 제법 맛있는 반찬까지 가지고 다니는 아이입니다. 경수는 얼른 도시락을 펴놓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쭈볏쭈볏 하는 성호를 보면서 아이들은 더욱 보고 싶어했습니다. 경수는 아예 성호의 도시락을 빼앗아 책상 위에 펼쳐 놓으려고 하였습니다. 성호는 도시락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꼭 붙잡고 버티었습니다. 이 때 뒤에서 명길이가 성호를 붙잡았습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한 바탕 소란을 피운 뒤에 기어이 성호의 도시락을 책상 위에 펼쳐 놓았습니다. “야 ! 이게 뭔 도시락이냐? 고구마 두 개,”하면서 경수가 그 중에서 한 개를 손으로 덜렁 집어서 입에 넣어 버렸습니다. 산골 고구마란 큰 것이 없이 계란 만큼씩 한 것이니까 한 입에 달랑 들어가 버렸습니다. 성호가 화가 나서 도시락을 붙잡으려 하니까 경수가 얼른 도시락을 빼앗아 들고 아이들을 향해서 “야 ! 이거 봐라. 성호 도시락은 잡곡밥 반에다가 고구마 두 개 뿐이다.”하고 좌우를 향해서 휘돌렸습니다. “야 ! 그게 어디 두 개냐 ? 한 개뿐인데?” 익살맞은 명진이가 소리치자 경수는 얼른 입을 가리키며 “한 개는 여기 !” 말을 하는 순간에 성호가 붙잡고 있는 명길이의 옆구리를 팔굼치로 쳐서 떼어놓고서 돌진하였습니다. “와 장창!” 소리와 함께 경수와 성호가 책상과 함께 쓰러지고 도시락은 넘어지면서 쏟아져 교실 바닥에 팽개쳐 지고 말았습니다. 성호는 이제 도시락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학급 아이들에게 모두 보여준 도시락은 이제 먹을 수도 없고 먹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넘어진 경수를 그 대로 깔고 앉아서 마구 주먹을 날렸습니다. 어디를 얼만큼이나 때렸는지 몇 대나 맞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마구 짓이겨 버리고 싶었습니다. 늘 잘난 척하는 경수가 밉기도 하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야 ! 선호야, 그만해!” 아이들이 엉겨 붙어서 성호를 붙잡고 말렸습니다. 성호는 화가 나서 마구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맞았는지 “아야, 말리는 사람도 때려 ?”하고 주먹이 날아왔습니다. 아이들이 말리기 위해 붙잡은 상태에서 성호는 몇 대의 주먹을 맞았는지 코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소동이 나자 아이들이 교무실로 달려갔고, 선생님이 교실로 달려 오셔서 소리를 치시고 나서야 겨우 교실을 조용해 졌습니다. 이렇게 야단이 났지만 집에 가서는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난 생 처음 싸간 도시락을 먹지도 못하고 싸움만 하여 코피를 쏟았다는 말을 들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속이 상할까 싶어서 꾹꾹 참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난은 계속 되어서 어려운 형편에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서는 고등학교를 갈 형편이 못되어서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산을 개간하여 농토를 넓혔지만, 남의 땅이라서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라에서 개간에 대해 상당히 권장을 하면서 이미 개간을 하여 일 군 논밭을 개인 앞으로 이전을 해 주는 특별법이 생겨서 그 동안에 개간하였던 땅들을 사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열심히 일한 덕분에 먹고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만큼은 되었습니다. 젊음을 바쳐 열심히 일을 하니 조금씩 재산이 모여서 부근의 땅을 조금 더 사 모으기도 하였습니다. 이럴 때에 이 고장이 국민관광단지로 지정이 되면서 땅값은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아 올랐고, 어렵게 살던 마을 사람들이 땅을 팔고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 사장은 자신의 땅은 할아버지의 피와 땀을 마련해준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이 땅을 팔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한 해가 지나기 전에 동네는 어느 새 한 두 채의 음식점이 생기고 날마다 모여드는 사람들로 음식점은 초만원을 이루어 한 달에 몇 천 만원을 벌었다는 이야기까지 들렸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땅을 팔라고 졸라대었습니다. 그러나 꼼짝을 하지 않은 유 사장에게 땅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어 올라 이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유 사장은 할아버지의 유산을 남에게 팔 수 없다고 버티고 있으니, 이제는 집 부근에 모두 음식점으로 변하여 가고 날마다 돈을 버는 재미에 온 동네는 노랫소리 흥겨운 놀이 마당이 되어 갔습니다. 노랫소리가 클수록, 오래 들리고 사람들이 들끓을수록 마을은 날마다 음식집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더 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집에서는 이제 유 사장에게 농사를 지을 것이 아니라 음식집을 하나 내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음식집을 만드는데 필요한 돈이 적잖이 드는데 쉽게 일을 벌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을 입구에 작은 밭을 팔아서 그 돈으로 음식집을 마련하였습니다. 기대했던 대로 음식집은 번창하였고 널찍한 터에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을 해두었으니 더 많은 손님이 찾아 들어서 정말 이젠 사람이 너무 찾아와 걱정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법 돈도 벌었고, 동네에서는 행세 할 만큼은 되었습니다. 다만 마을 입구에 작은 밭을 팔아서 자기 집을 짓고 음식점을 만들었지만, 할아버지가 주신 유산이라는 것 때문에 그걸 다시 사서 찾기 전에는 아무리 돈을 벌어도 할아버지께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온 유 사장은 자기의 하나 뿐이 아들 성호에게도 이런 할아버지의 은혜를 반드시 갚기 위해 저 마을 앞의 [동구 밖 집]을 사기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열 번도 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어린 성호가 이런 사고를 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르쳐 온 것이 헛것이었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생각한 유 사장은 한없이 성호가 미웠습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자기만큼이라도 생각을 하고 재산을 지켜 주기를 바랐는데 이게 어디 되겠는가 싶었던 것입니다. 이제 수 백 억을 부를 만큼 큰 재산을 가진 유 사장이 어린 아들에게 혹독하게 가르치는 것은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성호가 돈의 귀중함을 모르거나, 돈을 함부로 쓰는 버릇을 가질까 봐 걱정을 하고 그것을 바르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너무 어렵게 살아온 자신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임금이나 되는 것 같고 갑부가 따로 없다 싶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린 성호가 이런 환경에서 자라나면서 어려움을 모르기 때문에 가장 걱정거리 인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운 시절을 겪어보지 못하면 어려운 사람의 일을 알지 못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가르침을 일찍부터 몸에 익혀 주고 싶은 유 사장의 마음은 가장 근본적인 자식 사랑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옛부터 자식에게 천만금을 물려주어도 지킬 능력이 없으면 하루 아침거리 밖에 안 된다. 고 하지 않았던가? 유 사장은 아침을 먹고 성호가 학교에 갈 시간이 다 되어서야 성호를 나오게 하였습니다. 아침을 먹이고 차에 태워서 학교로 가면서 “너 어떠니? 지금 마음이 무척 괴롭지? 아버지도 괴롭다. 오직 하나 뿐인 자식을 그 렇게 가두어 놓고 마음이 편할 부모가 있는 줄 아니? 난 너를 믿었는데, 네가 부모 를 속이고 딴 짓을 한데 화가 난 거야. 오늘 공부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저녁에 아 버지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하자. 저기 저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했지?” 유 사장은 [동구 밖 집]을 지나치면서 성호에게 다시 못을 박았습니다.“예, 아버지, 할아버지가 사 주신 땅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늘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 난 저 땅을 팔아서 지금 많은 돈을 벌었지만 아직도 저 당 만큼을 벌지 못했 다는 생각이야. 적어도 저 땅을 되찾고 나서 남은 것이 번 돈이라고 생각하거든....” 날마다 지나는 길에도 유 사장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집 앞을 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문 앞에 성호를 내려놓은 유 사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되돌아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벌써 첫째 시간이 시작되었을 시간이었습니다.
광양여중(교장 김광섭) 정구부는 2013 전남 소년체전에서 금메달 획득하고, 제42회 전국소년체전 도대표 선발대회에서 우승하였다. 3월 28일(목) 순천 팔마정구장에서 열린 이번 대회에는 3학년 장서현. 민귀영. 박세리. 박세희와 1학년 이세희. 김혜미. 서현조 학생이 출전하여 순천여중과 대덕중과의 경기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우승한 것이다. 이에 앞서 문경에서 열린 전국 회장기 연식정구 대회 여중부 경기에서도 3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제42회 소년체전은 오는 5월 대구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교육에 관심이 많으신 분은 광저우를 꼭 방문하기를 권하고 싶다. 그분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교육의 방향을 짐작할 수가 있고 교육방침이나 교사상, 학생상, 교훈 등을 미루어 무엇을 중시하는지를 알 수 있어 도움이 된다. 중국 광주시월수외국어학교(廣州市越秀外國語學校)의 제1교문을 통과하여 100미터 이상 걸으가면 왼쪽 벽에 가로 2.5미터 세로 1미터 크기에 학교 교훈이 하나씩 모두 네 개의 교훈이 새겨져 있었다. 첫 교훈이 尙志(상지)였다. 尙志(상지)란 ‘고상한 뜻’이다. 열망, 포부, 염원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aspiration이다. 이 학교에도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이 큰 꿈을 가지는 것이다. 고상한 뜻을 품는 것이다. 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꿈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꿈이 없는 나라는 발전이 없다. 꿈이 없는 학교도 발전이 없다. 꿈이 없는 학생도 발전이 없다. 꿈을 가지되 큰 꿈을 가지게 하고 꿈을 가지되 고상한 꿈을 가지고 꿈을 가지되 나라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꿈을 갖도록 교육하고 있다. 이런 꿈을 가진 자는 최선을 다한다. 이런 포부를 가진 자는 열정을 다 쏟는다. 이런 염원을 가진 자는 지치지 않는다. 이런 꿈을 가진 자는 반드시 이룬다. 두 번째 교훈은 勵勤(여근)이다. 부지런함이다. 근면이다. 힘쓰는 것이다. 영어로는 diligence이다. 근면, 성실이다. 성실을 강조한다. 열정을 강조한다. 진실을 강조한다. 게으른 민족은 가난한 민족이 되고 만다. 부지런한 민족이 잘사는 민족이다. 열정이 있는 민족이 강한 민족이다. 믿음이 있는 민족이 화목한 나라가 된다. 성실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근면 성실이다. 이것이 이 나라의 전통이 되어 지금의 학생들에게도 강조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도록 교육하고 있다. 세 번째 교훈은 求實이다.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준말이다. 사실을 토대로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다. 영어로는 reality이다. (가상・허구가 아닌) 진짜, 현실적인 것, 실제적인 것, 실재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다. 결국 진리탐구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그들이 학문하는 바의 목표다. 네 번째 교훈은 創新(창신)이다. 새것을 만드는 것이다. 혁신이다. 쇄신이다. 획기적인 것을 선호한다. 영어로는 innovation이다. 창의성을 강조한다. 창의적 사고의 바탕 위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에 몰두한다. 이런데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앞서가는 인재가 많이 배출되고 나라가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는가 싶다. 교훈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꿈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고상한 꿈, 큰 꿈, 세계를 날아가는 꿈, 세계를 이끄는 꿈을 갖도록 하는 尙志敎育(상지교육)이다. 다음으로는 근면, 성실을 강조하는 교육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성교육(人性敎育)이었다. 인성교육이 되지 않으면 큰 인물이 될 수 없을 알고 사람됨 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면 근면교육이었다. 勵勤敎育(여근교육)이다. 다음이 꿈을 갖고 즉 목적과 목표를 갖고 좋은 사람이 먼저 된 후에 교과교육에 힘쓰도록 하였다. 진리탐구에 힘쓰게 하였다. 實事求是敎育(실사구시교육)이다. 실력 있는 사람, 탁월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시킨다. 끝으로 창의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창의인성교육과 맥락이 같다. 그들의 創新敎育(창신교육)이다. 창신교육이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갈 수 있다. 이웃 강대국의 교육을 알아야 우리가 앞서갈 수 있다. 우리의 잘하는 것은 더욱 발전시키고 잘못하고 있는 교육은 자꾸 바꾸어나가야 한다. 창의적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멀리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야 하겠고 세계를 흐름을 파악하는 눈이 열려야 하겠다.
27일 학생회가 주관하여 학교폭력 및 음주흡연 추방 선포식이 본교 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선포식에서 학생회장은 전교생이 작성한 학교폭력 및 음주흡연 추방 서약서를 학교장께 전달하고 난 뒤, 전교생과 함께 서약서를 합창하였다. 선포식에 즈음하여 학교장은 학교폭력이 사전예방이 중요한 만큼 학교폭력 근절에 모두가 앞장서 줄 것을 당부하였다. 새 학기를 맞이하여 열린 이날 선포식은 건전한 학교문화를 조성하는데 선생님과 모든 학생이 동참한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wee class 홍보 및 학교 폭력 예방교육 실시- 칠보초(교장 양원기) 에서는 18일부터 3월 27일 수요일까지 전교생을 대상으로 1학기 집단 상담을 실시한다. 학교 Wee class를 홍보하고 더불어 학교 폭력 예방 교육을 위한 이번 교육활동은 2013학년도에 새로 단장한 Wee 클래스실에서 진행된다. 이번 집단 상담활동은 전 학년 전 학생을 대상으로 할 만큼 그 교육 활동의 범위가 크며, 의미 또한 깊다고 할 수 있다. 새로 생긴 wee 클래스의 의미와 그 용도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은 친구들과의 관계 혹은 그 외의 다른 문제들로 인해서 끙끙 앓고 있을지라도 도움을 청하거나 받지 못할 수 있다. 이번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wee 클래스실은 어떠한 곳인지를 잘 알고 유사시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요즘 사회적으로 큰 우려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알게 되고 그 예방법과 대처방법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배우게 되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사실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순수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학교폭력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고 이로 인해 고통 받는 학생들이 생겨나는 안타까운 일들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마도 어리고 미성숙한 마음에 나와 다른 친구의 모습과 성격을 잘 포용하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드러내는 실수가 만드는 불협화음이 아닐까 싶다. 이번 칠보초등학교는 1학기 전 학년 집단 상담을 통해 무심코 내가 저지른 실수가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고, 이것이 학교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하였다. 또한 학교 폭력의 근절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안으로 서로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 안내하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할 경우 당당하게 내 주장을 말해야 한다는 일명 ‘Stop 법칙’도 소개하고 실연해봄으로써 적극적인 교육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단장되어서인지 wee 클래스실의 내부는 아늑하기만 했다. 사실 가장 바라는 바는 칠보초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wee 클래스실의 존재조차 모를 정도로 서로 행복하고 화목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아이들의 여린 마음에 생채기가 날 경우에는, 이 작은 상처가 큰 고름으로 커지기 전에 얼른 wee 클래스실을 찾아와 내면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을 때 정말 모두가 진정으로 바라는 행복한 학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월 말 대학 4학년인 큰딸은 대학가 근처 방학 동안 구해놓은 원룸을 정리한다며 일찌감치 상경했다. 그리고 올해 대학에 합격한 막내 녀석은 다행히 기숙사에 합격하여 기숙사 입소 가능한 날짜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짐을 챙겨 서울로 올라갔다. 두 아이가 떠난 후, 집안 분위기는 절간처럼 적막함마저 감돌았다. 두 아이 모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지만, 문제는 매월 들어가는 생활비였다. 대학생이 한 명일 때 잘 몰랐던 경제적인 부담이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막내 녀석은 하루걸러 전화를 걸어 돈을 요구해 왔다. 모든 것들이 학교생활에 필요한 것이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녀석과 전화를 끝낼 때마다 아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아! 돈 좀 아껴 써.” 아내는 기존에 작성했던 가계부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생활비를 반으로 줄였고 한 달에 두 번 실시했던 외식 자체를 아예 없앴다. 그리고 내게도 많은 것을 주문했다. 우선 퇴근 후 술 먹는 횟수를 반으로 줄이라고 요구했으며 용돈 또한 10% 삭감하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남편이 동참해 주기를 원했다. 월요일 저녁.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자, 안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심 아내의 친구가 아이를 데리고 집에 놀러 온 것으로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노크하였다. 몇 번의 노크에도 반응이 없기에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내가 모르는 한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행여 아기가 깰까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해줄 것을 주문하였다. 아내의 눈빛이 워낙 완강하여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조용히 안방을 빠져나왔다. 잠시 뒤, 아기를 재우고 나온 아내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내의 모습이 예전과 달리 많이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내는 가지고 온 가계부를 펼쳐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계부를 활용하여 살림을 잘 운영한 탓일까? 아니면 그 힘듦을 표현하지 않는 탓일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로부터 가계 어려움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점에 대해 늘 아내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아내는 가계부를 넘기며 내 봉급 한 달 치 지출 내역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지출되고 있었다. 나의 박봉으로 아내가 이 많은 지출을 어떻게 감당해 왔는지에 의구심이 생겼다. 그럼에도 아내는 나와 두 아이에게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살림을 꾸려왔던 것이었다. 새삼 아내가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아내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맞벌이였다. 아내는 지난 한 달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심사숙고 끝에 고른 일이 아이 돌보는 일이었다. 아내는 평소 알고 지내는 후배 아이를 돌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낮이 아닌 밤에 아이를 돌봐야 하기에 수면을 방해 받을지 모른다며 미리 나의 양해를 구했다. 갑작스런 아내의 돌발 행동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 일을 아내가 잘 해 낼 수 있을지에 의구심이 생겼다. 아이들 학비를 벌기 위해 맞벌이를 결정했다는 아내의 말에 처음에는 다소 의구심을 가졌지만 설명을 듣고 난 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 교육비 때문에 맞벌이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이 새삼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아기의 울음소리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일이 자주 발생할 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가정을 위해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참고 견디어 나갈 것을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