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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이상태 |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1. 독도는 어디에 위치한 섬인가? 경위도상으로는 북위 37도14분18초, 동경 131도52분22초 지점에 있는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영토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에 속했으나 2000년 4월 8일부터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17번지로 바뀌었다. 독도는 울릉도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92km(약49해리: 최근 물이 빠졌을 때를 기준하면 87km임.) 지점에 있고 일본의 가장 가까운 섬인 시마네현 오키도(隱岐島)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60km(약86해리)떨어진 지점에 있다. 본토에서 볼 때는 동해안 울진군 죽변항으로부터 215km 지점에, 일본의 시마네현 사카이고(境港)로부터 220km 지점에 있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라는 두 개의 섬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36개의 암초로 독도의 총면적은 18만6121㎡(5만 6301평)이고 서도의 산 높이는 174m, 동도가 99.4m이다. 2. 독도는 언제부터 한국의 영토였는가? 신라 지증왕 13년에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병합한 AD 512년부터이며, 1500년전부터 우리의 영토이다. 거기에 비해 일본측 문헌에 독도가 처음 나오는 것은 1667년에 편찬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이다. 이 책은 출운(出雲:시마네현의 옛이름)의 관리[蕃士]인 사이토(齊藤豊仙)가 번주(藩主)의 명을 받고 1667년에 은기도를 순시하면서 보고들은 바를 기록하여 보고서로 작성하여 바친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독도를 ‘송도’로 ‘울릉도’를 ‘죽도’로 호칭하였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은주(隱州:은기도)는 북해(北海)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은기도라고 한다. 술해간(戌亥間: 서북방향)에 2일 1야를 가면 송도(松島)가 있다. 또 1일 거리에 죽도(竹島)가 있다. 속언에는 기죽도(磯竹島: 이소다케시마)라고 하는데 대나무와 물고기와 물개가 많다. 이 두 섬(송도와 죽도)은 무인도인데 고려(高麗)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出雲國]에서 은기(은기도)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 경계지는 이 주(은주: 은기도)로 그 한계를 삼는다” 위의 기록이 독도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책인데 독도와 울릉도를 모두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3.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우산(于山)과 무릉(武陵)의 두 섬이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아니해서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라고 불렀다.” 512년에 신라가 점령한 우산국은 울릉도와 우산도이며 우산도는 독도이다. 4. 동국여지승람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강원도 울진현 조에 “우산도·울릉도: 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한다. 두 섬은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우산도(독도)와 울릉도 두 섬이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조선왕조의 영토임을 밝혀 놓았다. 5. 조선왕조실록에는 독도에 관한 기사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태종 때에 김인우를 시켜 울릉도를 조사시키고 세종 때에는 그곳의 주민들을 육지로 쇄환시키고 피역자와 범법자가 섬에 들어가 살지 못하도록 공도정책(空島政策)를 썼다. 성종 때에는 삼봉도(독도임)의 존재가 조정에 보고되어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시켰고 삼봉도는 울릉도와 다른 섬인 삼봉도가 독도임을 확인하였다. 숙종 때에는 안용복의 활동으로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막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문서도 받았다. 정조 때에는 독도에 물개가 많이 서식함을 확인하고 ‘가지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6. 그 밖에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고문헌 자료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 군정편(軍政編)≫이 있다. 이 문헌에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영토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쓰시다)다.”라고 기록했다. 첫째 ≪여지지≫는 17세기에 유형원이 쓴 지리지이다. 둘째, “울릉도와 우산도가 모두 우산국 땅”이라고 밝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셋째,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쓰시다)다”라고 하여 우산도가 독도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7. 일본 정부가 독도를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도쿠가와 막부가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이다. 죽도도해면허는 일본의 백기주(白耆州)의 미자(米子)에 거주하던 오오다니(大谷甚吉)가 태풍을 만나 울릉도에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이후에 공도정책으로 울릉도를 비워둘 때이므로 이 섬이 무인도인 줄 알고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1616년에 죽도도해면허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으려고 운동하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백기주 태수직을 맡고 있던 송평신태랑광정(松平新太郞光政)이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이들은 1661년에는 ‘죽도근변송도도해건(竹島近邊松島渡海件)’을 청원하여 송도(松島 : 독도) 도해면허도 받았다. 위의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다. 만약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면 자국민이 자국의 영토를 출입하는데 무슨 면허가 필요하겠는가? 8. 안용복이 독도를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은? 숙종19년(1693)에 동래와 울산의 어부 약 40명이 울릉도에 고기잡이 갔다가 일본의 오오다니 가문에서 보낸 일단의 일본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일본 어부들은 조선 어부 대표를 보내면 협상하겠다고 하였으나,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 대표로 나서자 이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일본 은기도로 가버렸다. 안용복은 은기도 도주에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지적하면서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가는데 왜 납치하여 구속하는가?”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그의 상관인 백기주 태수에게 안용복 등을 이송하였다.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강조하고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 사람이 들어간 것은 일본인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며, 앞으로는 울릉도에 일본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자기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사항이었으므로 안용복 등을 에도(동경)의 막부 관백(최고통치자)에게 이송하였다. 안용복은 막부 관백의 심문에도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고 자기를 납치하여 구속하는 것은 부당하며, 도리어 일본 어부들이 조선의 영토인 울릉도에 들어간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 백기주 태수를 시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써주고 안용복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석방된 안용복이 귀국길에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이르니 장기주 태수는 대마도주와 결탁하여 안용복을 다시 구속하여 대마도에 이송하였다. 안용복이 대마도에 이르니 대마도 도주는 백기주 태수가 막부 관백의 지시를 받고 써준 문서를 빼앗고 도리어 안용복을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를 침범한 월경 죄인으로 취급하여 안용복을 묶어서 조선 동래부에 인계하고, 앞으로는 조선의 어부들이 일본 영토인 죽도에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안용복을 가둔 채 온건론자들의 주장대로 ‘귀국의 경지인 죽도’에 조선 어부들이 출어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국서를 보냈다. 사관(史官)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왜인들이 말하는 소위 죽도(竹島)는 곧 우리나라의 울릉도로 울릉도와 죽도는 1도2명(1島 2名)이므로 저들의 주장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숙종20년(1694)에 국서를 보내기를 “우리나라 백성들이 고기잡이한 땅은 본시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혹 ‘죽도’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하나의 섬에 두 가지의 이름이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귀국 해변 사람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여 울릉도에 왕래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 상호간의 우의를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엄중히 항의하였다. 숙종21년(1696) 1월에 대마도주가 바뀌어 막부 장군에게 인사차 들렀을 때 막부 장군은 대마도 신주 종의진(宗義眞)과의 질의 응답을 통하여 사태를 파악하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①죽도(울릉도)는 일본 백기로부터 거리가 약160리이고 조선으로부터는 40리 정도로 조선에 가까워 조선의 영토로 보아야 하며 ②앞으로는 그 섬에 일본인의 항해를 금지하며 ③이 뜻을 대마도 태수는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에 통고하도록 하였다. 9. 안용복의 제2차 독도 수호운동 안용복은 숙종 22년(1696)에 울산에 가서 울릉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다고 하면서 순천 송광사의 장사꾼 노헌(雷憲)과 이인성(李仁成) 등 16명을 모아 울릉도로 갔다.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하고 있으므로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래 우리 영토인데 어찌 감히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가? 너희들을 체포함이 마땅하다.”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리는 본래 송도(松島: 우산도,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를 잡으러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나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거짓말하였다. 안용복은 “송도는 곧 우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하고 이들을 꾸짖어 내쫓았다. 안용복이 이튿날 배를 타고 우산도(독도)에 들어가보니 일본인들이 솥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다. 안용복이 막대기로 걸어 놓은 솥을 부수며 큰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들이 모두 도망갔다. 안용복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로 들어갔다. 은기도 도주는 찾아 온 이유를 물었다. 안용복은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에 들러 울릉도와 우산도는 조선의 땅으로 정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 가기도 했는데 일본이 격식도 없이 우리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 태수에게 전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안용복은 이에 격분하여 배를 타고 백기주(지금의 시마네현)로 향하였다. 안용복은 이때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백기주 태수가 일본에 들어온 이유를 물으므로 안용복은 “전날 두 섬(울릉도와 독도)의 일로 문서를 받았음이 명백한 데도 대마도 도주가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 번 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침입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주의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이 때 마침 대마도의 도주 아버지가 백기주 관아에 머물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백기주 태수를 찾아가 “만약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니 이 상소를 올리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이에 안용복에게 그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우선 안용복에게 쫓겨 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하겠다.”고 약속하고 안용복 등을 귀국하도록 하였다. 숙종22년(1696)에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의 일부이며 일본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금지한다고 재확인하므로 논쟁은 종결되었다. 10. 근대에 들어와서 메이지 정부도 계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간주했는가? 메이지정부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하였다. 그 증거로 1869~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라는 문서가 일본 외교문서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메이지정부는 신정부 수립 후 1869년 12월에 조선국과의 국교 확대 재개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하기 위하여 외무성 고위관리인 좌전백모(佐田白茅)·삼산무(森山茂)·재등영(齋藤榮) 등을 부산에 파견하였다. 이때 외무성은 14개의 항목을 정탐하여 오라는 내용인데, 그 중 하나가 ‘죽도(竹島)와 송도(松島)가 조선의 부속(附屬)으로 되어 있는 시말’을 내탐해 오라는 지시사항이다. 이들이 귀국하여 보고한 ‘죽도와 송도가 조선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 보고서에서 송도(독도)는 죽도(울릉도)의 이웃 섬으로 두 섬이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라고 지적하고 많이 생산되는 물건의 이름을 들어 보고하였다. 이는 일본의 공문서에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한 자료이다. 11. 일본 내무성도 독도와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알고 있었다. 일본 내무성은 1876년에 일본 국토의 지적을 조사하고 근대적 지도를 만들려고 할 때 시마네현의 지적 담당자로부터 동해에 있는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현의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가, 뺄 것인가에 대한 질의서를 1876년 10월 16일자 공문으로 접수하였다. 일본 내무성은 5개월간의 조사 끝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고 태정관에게 최종 결정을 미루었다. 일본 내무성이 태정관에게 올린 질문서의 요지는 첫째 죽도(울릉도)와 그 밖의 1도에 대하여 지적(地籍) 편찬을 시미네현이 물어 왔고, 둘째 내무성이 시마네현이 제출한 서류와 또 1693년에 조선인 안용복이 일본에 들어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검토해본 결과, 셋째 내무성은 죽도(울릉도)와 그 밖의 1도가 일본과 관계 없는 곳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넷째 지적을 조사하여 일본의 판도에 넣을까, 뺄까는 중대한 사건이므로 태정관의 최종 결정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태정관은 이들 서류를 검토하고 내무성의 판단과 같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조선의 영토라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 1877년 3월29일 정식으로 내무성에 지령을 내렸다(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12. 일본이 독도를 송도라 하지 않고 리앙쿠르드암(岩)이라고 부른 이유는? 1876년에 일본인 무등(武藤平學)이 동해에서 울릉도 아닌 새 섬을 발견하였다고 하며 ‘송도개척건’을 청원하였다. 일본 해군성은 천성환(天城丸)이란 군함을 파견하여 1878년과 1880년 두 차례에 걸쳐 송도의 실체를 조사했으나 송도는 곧 울릉도임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울릉도를 송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전까지 독도를 송도라고 불렀으므로 독도의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여 프랑스의 포경선이 붙인 ‘Liancourt Rocks’를 취하여 ‘리앙쿠르드암’이라고 수로지에 표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본 일본 어부들이 ‘리앙코도(島)’라고 약칭하였다. 13. 울릉도 검찰사(檢察使) 이규원의 활동은? 일본 군함의 불법활동에 대응하여 조선 정부는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감찰사로 보내 공도정책의 폐기와 재개척 여부를 조사시켰다. 이규원은 배 세 척에 102명의 대규모 조사단을 편성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1882년 4월 29일부터 6일간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①울릉도에는 본국인이 모두 140명인데 전라도가 115명(82%), 강원도가 14명(10%), 경상도가 10명(7%), 경기도가 1명(0.7%) 순이고 ②본국인 중 선박을 만드는 자가 129명(92.2%),인삼 등 약초 캐는 자가 9명(6.4%), 대나무 베는 자가 2명(1.4%)이었고 ③울릉도에 침입한 일본인은 78명이었으며 ④울릉도의 장작지포에 ‘대일본제국 송도 규곡,명치 2년2월13일 기암충조 건립’이라는 푯말을 발견하였으며 ⑤나리동을 비롯하여 6~7곳에 주민을 상주시킬 수 있는 거주지를 조사하였다. 14. 울릉도 재개척 사업은? 1883년 3월에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使)’로 임명하여 1883년 4월에 최초의 이주민 16호 54명을 정착시켰다. 일본인들 중 불법 침입한 일본인 254명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 후 울릉도에 전임 도장(島長)을 두고 관리하다가 1895년에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바꾸었다. 15. 근대 문서 중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밝혀 주는 문서는 어떤 것이 있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울도군 설치에 관한 칙령인데, 그 내용은 제1조에 1900년 10월 25일자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며, 제2조에 울도군의 관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한 점이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竹嶼島)이고, 석도(石島)가 독도(獨島)를 가리킨다. 전라도 방언에 돌을 독이라고 하고 돌섬을 독섬이라고 부르는데 의역하여 석도(石島)라고 했기 때문이다. 16. 독도(獨島)라는 표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우산도라고 불렀는데, 1904년에 일본 군함 신고호(新高號)가 이 지역을 답사하고 쓴 항해일지에서 “송도(울릉도)에서 리앙쿠르드암을 한국인은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방[日本]의 어부들은 리앙코도라 한다.”고 기록한 것이 처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서 처음 발견된다. 신고함의 항해일지를 참고하면 1904년 이전부터 울릉도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 러·일 전쟁과 독도의 관계는? 1904년 러·일 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하여서는 독도가 전략적으로 매우 귀중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인식한다. 일본 해군이 설치했던 20개소의 해군 망루 중 두 개는 울릉도, 한 개는 독도에 설치하였다. 일본이 독도에 야심을 드러낸 것은 러·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18. 나카이(中井養三郞)의 독도어업 독점권은 어떤 목적에서 나왔는가? 나카이는 독도에서의 물개잡이가 이익이 많았으므로 독점권을 확보하려고 하였고, 일본 정부는 전략적 요지인 독도를 확보할 목적에서 이 사업이 추진되었다. 1904년 9월 29일에 해군성의 협조로 일본 정부의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의 세 대신에게 ‘리앙코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했다. 내무성은 한국정부와 국제적 여론을 고려하여 이 청원을 각하하려 하였으나 외무성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이를 허가해 주었다. 19. 일본 정부는 ‘독도 영토 편입’ 고시를 어떻게 하였는가? 1905년 2월 15일일의 훈령으로 시마네현의 지사에게 통고하였고,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자에 ‘다케시마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의 고시 제40호’로 “북위 37도9분30초,동경 131도 55분, 은기도에서 서북으로 85해리 거리에 있는 섬을 다케시마(竹島)라고 칭하고 지금 이후부터는 본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는 고시문을 시마네현의 에 조그맣게 게시하였다. 이 고시 내용은 지방신문인 에 1905년 2월 24일자에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20. 대한제국정부는 이 사실을 언제 알았는가? 1906년 3월 28일에 일본 시마네현의 은기도사 일행이 독도를 시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려서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독도 편입 사실을 알렸다. 21. 울도군수 심흥택의 조치 사항은? 심흥택은 깜짝 놀라 그 이튿날인 3월 29일에 강원도관찰사에게 긴급 보고하였다. 그 보고서에는“본군 소속 독도가 본부의 외양 백여리허에 있었는데….” “자운(自云) 독도가 이제 일본의 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차 내도했다.”라고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는 내부대신에게 보고했다. 내부대신은 “독도가 일본 속자라고 칭하여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그 이치가 없는 것이니….” 라고 말하였으며, 참정대신은 “독도가 일본 영지 운운한 설은 전적으로 전혀 근거없는 주장에 속하나….”라고 말했다. 대한매일신문이나 황성신문은 특보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울릉도의 바다에서 거리가 동쪽으로 100리 거리에 있는 한 섬이 있어 울릉도에 구속(舊屬)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領地)라고 늑칭(勒稱)하고 심사하여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22. 1951년의 ‘대일본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왜 누락되었는가? 제1차 초안(1947.3.20.)과 제2차 초안(1947.8.5.), 제3차 초안(1948.1.2.), 제4차 초안(1949.10.13.), 제5차 초안(1949.11.2.)까지는 독도가 명기되었다가 제6차 초안(1949.12.29.)에는 일본측의 집요한 로비로 인하여 오히려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표시되었다. 이 초안을 본 다른 연합국들이 강력히 항의했는데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의 항의가 있었다. 이 중 영국은 세 차례의 초안을 작성하여 미국 측에 항의하고 지도까지 작성하여 독도가 한국 땅임을 명시하였다. 사정이 이와 같이 전개되자 미국도 당황하여 제7차 초안부터는 독도의 영유권을 한국이나 일본 어느 쪽에도 명시하지 않은 채 합동초안(1951.5.3.)를 마련하여 독도의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23. 신한·일어업협정과 독도의 영유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협정의 제1조에 “이 협정은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과 일본 측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적용한다.”고 규정한 점이 문제이다. 이 어업협정은 고기잡이만이 아니라 EEZ의 기점·기선문제를 통해 영토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제15조에는 “이 협정의 어떠한 규정도 어업에 관한 사항 이외의 국제법상 문제에 관한 각 체약국의 입장을 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홍성근 | 한국외대 법대 강사·독도학회 이사 들어가며 독도는 2개의 큰 섬인 동도와 서도, 그리고 그 주변에 30여 개의 바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동도(0.0647㎢)와 서도(0.0954㎢) 등을 합친 독도의 총 면적은 0.186㎢(약 5만7000평)에 불과하다. 동도의 정상 부분을 제외하면 섬 전체가 급경사로 평탄한 곳이 거의 없다. 그리고 서도의 물골이라는 곳에서 물이 나긴 하지만, 배수가 잘 되는 암석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담수의 식수원을 찾기란 쉽지 않다. 또 나무가 자라긴 하지만 대부분 초목류로 집을 지을 만한 나무는 아니다. 또한 일구어 양식을 생산할 만한 땅도 없다. 섬의 규모가 작아, 섬 주변을 흐르는 해류의 영향을 바로 받게 되어 예상할 수 없는 거센 바람과 파도가 몰아친다. 특히 태풍계절에 동해 방면으로 진행하는 태풍이 거의 빠짐없이 독도를 강타한다. 기온은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지 않으며 연중 비도 많고 겨울에는 눈도 많이 내린다. 자연히 독도에서의 생활은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고, 거주(居住)는 거센 바람과 파도를 피해 어로작업이 쉬운 계절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과 환경으로 인해, 독도가 지금으로부터 250만 년 전에 형성된 섬이지만, 사람들이 상주하게 된 것은 불과 반세기 전인 1954년 독도의용수비대가 상륙하면서부터이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과 여건을 가진 ‘독도가 과연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가질까?’ 지금까지 ‘독도가 어떻게 이용되어 왔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 독도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독도에 대한 영토의식을 고양하여 독도문제 해결에 보다 적극적 자세를 가지며, 아울러 독도에 있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었으면 한다. 삶의 터전, 독도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이 있기 전까지 독도는 울릉도민의 평화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울릉도 재개척민(홍재현)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1883년 울릉도에 입도하여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치는 동안 모두 45차례나 독도를 드나들면서 미역 채취나 강치 잡이를 했다. 미역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울릉도보다 상대적으로 많고 품질도 좋다. 그리고 울릉도에는 산짐승이 없는 터라 주민들은 독도에 있는 강치 잡이를 통해 동물성 영양분을 보충하였다. 부기가 있는 몸이라도 강치를 먹고 나면 씻은 듯 그 몸이 나았다고 한다. 독도는 미역이나 강치 외에 전복이나 해삼의 어채지로도 이용되었다. 독도의 전복이나 해삼은 유난히 크다. 서도의 물골에 샘이 있어 그 물을 먹을 수 있고, 또 바람과 파도를 피하기에 적당히 들어간 지역이 있어 그곳에 막사를 치고 일정 기간 머무르며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작업은 주로 파도와 바람이 잔잔한 계절에 이루어졌다. 해방 후에는 주로 미역 채취가 이루어졌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을 때에는 그들이 미역채취권을 얻어 미역을 채취하여 운영자금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4년 최종덕씨와 1991년 김성도씨가 독도에 거주하면서 미역 채취뿐만 아니라 전복이나 해삼도 채취하였다. 또한 독도 주변 바다는 오징어가 풍부하여 울릉도 주민이나 동해안 지역 어민들의 주요 어장이 되었다. 최근 독도 어장은 울릉도 도동어촌계에서 직영으로 관리하며 미역 채취, 고기 잡이 등의 어로작업을 통해 수익을 얻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얼마나 긴요한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았는지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도경비에 나서는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에게 그의 할아버지(홍재현)가 한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독도는 울릉도 도민들이 문전옥답과 같이 애지중지하는 우리의 생활터전이니 기어이 너희들이 그 곳에 가서 싸워 독도를 지켜야 한다.” 독도는 이러한 삶의 터전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미군기와 정체불명의 비행기에 의해 자행된 1950년 전후의 독도폭격사건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약 3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1948년 6월 8일 사건과, 1952년 9월의 폭격사건은 당시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며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다. 특히 1948년 사건은 일본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여전히 미군의 통치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의 울분을 더 크게 자아내게 했다. 독도는 민족의 가슴에 더욱 애잔한 마음으로 녹아 들어가며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삶의 터전이 되었다. 독도는 이렇게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뼈 묻고 땀 흘리며 가꾸어 온 삶의 터전인 것이다. 군사 전략 요충지, 독도 울릉도 주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으며 살아온 독도는 일본의 침탈 시도 이후에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일본은 우리 정부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제정 러시아를 배제하고 한반도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1904년 2월 10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고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반도를 러일전쟁의 발판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1차 한일의정서’를 조인케 한다. 6개조로 된 이 의정서에는 전쟁중 일본의 활동에 대한 편의를 충분히 제공하며, 군사 전략상 필요한 경우 수시로 한국의 영토를 수용할 수 있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그에 근거해 일본은 우리나라의 곳곳을 한반도 지배를 위한 전쟁의 전략 거점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대한해협과 동해를 지나는 러시아 함대의 동향을 관측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일본 해군은 1904년과 1905년 울릉도와 독도에 통신시설 등을 갖춘 감시 망루를 설치하고 해저전선을 부설하여 일본과 연결하는 등 군사 전략의 요충지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의 결정과 그해 2월 22일 시마네현의 은밀한 고시를 통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이름하고 자국의 영토로 포함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독도는 일본 해군의 저탄장(貯炭場)으로도 사용되었다. 독도가 군사 전략상 중요한 위치였다고 하는 것은 1949년 당시 주일 고문(駐日顧問)이었던 미국인 시볼드(William Sebald)라는 사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대일강화조약의 초안 작성 과정에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명기할 것을 요청하며, ‘독도에 기상과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면 안보의 측면에서 미국에 이로울 것’이라고 미국을 설득한다. 시볼드의 로비에 힘입어, 그전까지 ‘독도는 한국의 영토’로 있던 것이 잠시 ‘독도는 일본의 영토’로 명기되게 된다. 하지만 다른 연합국의 반발로 결국 대일강화조약의 본 규정에서는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부분이 삭제되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과 일본, 러시아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동해에서, 독도는 바둑판의 화점(花點)으로 비유될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애국심의 표상, 독도 근현대사에 있어 우리 민족에게 있었던 시련이라고 한다면, 16세기말과 17세기의 왜란(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란(병자호란, 정묘호란)을 들 수 있다. 또한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열강의 침입과 일본의 식민지배, 1950년대 한국전쟁, 그리고 1996년 이후 IMF 금융위기 또한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 때마다 독도를 지켜낸 것은 국가가 아니라 안용복이나 독도의용수비대(대장 홍순칠)와 같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셨다. 특히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 경비에 나설 당시 독도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1948년과 1952년에 폭격이 있어 많은 선량한 우리 어민들의 희생이 그 곳에서 있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독도에 침입하여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말뚝을 세우고 가는 일도 잦았다. 당시 육지에서 한국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독도에서는 우리 어민들이 외세에 맞서 처절한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울릉도 청년들은 스스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독도로 갔다. 그들은 젊은이로서의 청청한 꿈도 접고 갓 결혼한 아내와 신혼의 단꿈도 멀리한 채 독도로 갔다. 자신들의 논과 밭은 물론이고 몸 바쳐, 생명 바쳐 삶의 터전인 독도를 지켰던 것이다. 우리는 독도를 보며, 그곳을 피와 땀으로 적신 우리네 할아버지,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분들 가슴에서 우리 가슴으로 이어지는 나라사랑, 겨레사랑을 한껏 느낄 수 있다. 해양관할수역의 발양지, 독도 바다 한 가운데 있는 대부분의 작은 섬들은 초기에는 물이나 연료 주입을 위해, 또는 임시 거처나 구아노(조분석: 鳥糞石) 채집 등 섬 자체를 이용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그런데 인구는 늘어나고 그에 비해 육지 자원이 감소하게 되자, 세계 각국은 해양의 식량 자원이나 에너지 자원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반응으로 해양법이 발달하게 되고, 대륙붕, 배타적 경제수역 등의 새로운 공간도 출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크기에 비해 광대한 넓이의 해양관할수역을 갖는 섬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었다. 실제 작은 섬이 갖는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넓이는 약 12만 5660평방해리나 된다. 섬은 국가간 해양경계 획정이나 자국의 해양자원 이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섬을 영유한 국가는 그 주변수역에서 어업 자원이나 광물자원과 같은 생물, 무생물 자원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며, 인공시설의 설치 및 사용, 해양과학조사, 해양환경의 보호와 보전 등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가진다. 1952년 1월 한국의 평화선 선언 이후 한일 정부간 외교적 쟁점으로 부각된 독도문제는 1965년 한일어업협정의 체결, 그리고 1996년 이후 있은 EEZ 경계획정 논의와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의 체결을 전후하여 더욱 가열되었다. 이는 독도영유권 이면에 해양관할권을 조금이라도 확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연유한다. 국제해양법상 섬은 당연히 12해리 영해와 24해리 접속수역을 갖는다. 하지만 그 섬이 인간이 거주 가능하고 독자적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느냐에 따라 200해리 EEZ나 대륙붕을 갖게 된다. 독도는 0.18㎢밖에 되지 않은 섬이지만, 그가 가질 수 있는 수역은 한반도를 담을 만큼 광대하다. 현재 독도 주변수역에는 풍부한 어업자원뿐만 아니라 가스 하이드레이트(Gas Hydrates)와 같은 무한한 양의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독도가 어느 나라의 영토가 되느냐에 따라 독도 주변수역에 있어 무수한 어업 및 해양자원은 독도를 영유하는 국가가 배타적 권리를 갖는다. 일본이 독도 침탈 야욕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천연보호구역, 독도 2005년 3월 현재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 독도 방문 대폭 허용 등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적극적으로 강화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기 전까지 독도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표면적 이유는 독도가 문화재보호법상 천연기념물 제336호 해조류(海鳥類)(괭이갈매기, 바다제비, 슴새 등) 번식지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또 ‘독도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자연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경부는 생물의 다양성이 풍부하거나 멸종위기의 야생동식물이 서식하는 지역을 생태보전지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특히 자연환경이 우수하고 희귀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도서의 경우, 특정도서로 지정하여 특별한 관리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독도가 포함된 것이다. 환경부는 독도와 울릉도 및 인근 해상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독특한 자연생태계를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이용을 도모할 목적으로, 최근(2002~2004년) 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로 논의한 바도 있다. 이처럼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릴 정도로 생태보고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곳에 예전에 그 많던 강치들이 다시 뛰어 놀게 된다면 그만한 해양생태공원도 없을 것이다7.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동인(動因), 독도 일본이 최근 독도의 날로 제정한 2월 22일은 일본이 독도를 편입했다고 주장한 1905년 2월 22일을 뜻한다. 일본은 아직도 1905년과 그 이후 한반도 식민 지배를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오늘의 ‘독도의 날’ 제정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독도문제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 과정에서 잉태되었다. 따라서 독도는 우리의 일그러진 역사를 다시 생각나게 하고, 한일관계를 급속히 냉각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일 양국은 1965년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비약적인 관계 증진과 상호 협력으로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로 인해 양국간 관계 발전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한일 양국이 공통된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한국은 불법이라고 함에 반해, 일본은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도문제는 이처럼 얽혀 있는 과거사 문제를 풀고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 중요한 동인(動因, motive)이 된다. 독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도문제의 실체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도문제의 실체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독도문제의 해결과정을 통해 독도문제의 실체와 아울러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공통된 평가를 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한일 양국이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더욱 성숙시켜 나가며 동북아와 세계 평화에 기여해 나갈 것을 기대한다. 맺으며 1994년 유엔 해양법 협약의 발효로 세계는 더욱 치열하게 해양주권과 관할권 확대 경쟁을 벌이고 있다. 더욱이 반폐쇄해(半閉鎖海)인 동해에서의 한일 양국의 이러한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여기서 동해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독도는 그 자체로는 작은 돌섬에 불과하지만, 한국의 관할 범위를 확대시켜 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차츰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신하여 일본의 군사적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독도는 일본의 세력과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안보적 가치도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첫 희생양이 되었던 독도는 국민과 민족을 통합시키며,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요소로도 작용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2002년 서울에서 있은 8·15 민족통일 남북공동학술토론회에서 ‘독도영유권 수호와 일본의 과거청산을 위한 우리 민족의 과제’라는 주제로 남북이 함께 논의한 바 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도가 가지고 있는 갖가지의 가치와 의미를 최대한 활용하여, 독도가 영토적 안정을 누리고 동시에 동해에서 우리의 입지가 더욱 공고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독도가 동북아에 있어 정의를 구현하고 평화를 영구히 정착시킴에 있어 귀한 도구로 사용되길 바란다.
윤철경 | 한국청소년개발원 복지정책연구실 1. 머리말 일진회 실태에 대한 한 현장교사의 보고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 일간신문을 비롯해 각종 언론매체가 학교폭력 문제를 보도하고 있고, 특집을 통해 학교폭력에 대한 진단과 제언을 쏟아내고 있다. 정부는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불태우며 연일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실 학교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제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학교폭력의 심각성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학교폭력의 특정 사건 발생 시마다 간헐적이나마 그 충격적인 단면들이 국민들에게 알려져 왔다. 이번에도 역시 일진회 실태에 대한 보고 이후,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보도하자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학교폭력 문제를 누가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해결의 주체는 누구인가?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정책 아이디어 부재인가? 정책 부재가 아니라 학교폭력 문제를 끈질기게 붙잡고 해결하려는 주체가 모호해서 해결이 어려운 것이다. 학교폭력 문제에 관여하는 중앙정부 부처만 8개에 이른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부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정책의제가 되지 못하며, 사안이 생길 때만 한 번씩 강조될 뿐 체계적인 대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학교폭력 문제에 전념하고 있는 민간단체나 기관도 몇 개 없다. 학교폭력 문제의 안정적 해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2004년 1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하 학교폭력법)을 법제화하고, 이에 따라 기본계획이 수립·발표되었으나 그 대책 또한 현실적인 조치가 부족하여 잘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가 어렵다. 본고에서는 학교폭력 실태에 대한 간단한 진단과 더불어, 정부의 학교폭력 정책현황을 살펴보고 학교폭력을 위한 정책을, 시급성과 중요성에 따라 재구조화 해보고자 한다. 2. 학교폭력 실태에 대한 진단 학교폭력법에 의하면 학교폭력이란 ‘학교 내외에서 학생 간에 발생한 폭행, 협박, 따돌림 등에 의하여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행위를 말한다(법 제2조 1호)’고 정의되어 있다. 동법 시행령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행위라 함은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 유인, 추행, 명예훼손·모욕, 공갈, 재물손괴 및 집단 따돌림 그 밖에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가하거나, 가하게 한 행위를 말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폭력을 당한 청소년은 학교에 가기를 두려워하거나 가지 않으려 하며, 친구를 대하기 어려워하고 때로는 가출을 하거나 정신적 증세로 인하여 병원이나 상담기관에서 치료를 받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경험하게 된다. 폭력이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렇듯 심각한 것이지만, 정작 가해청소년들은 놀이적 측면이 강하다. 가정과 학교에서 소외되거나 억압된 청소년, 분노가 쌓여 있는 청소년 등은 자신의 동료집단으로부터 비행문화를 받아들인 뒤 강력한 놀이집단으로 유착되게 된다. 그들은 이 집단에 소속되지 못했을 때는 누릴 수 없었던 소속감, 권력, 세상에 대한 지배감, 놀이의 쾌감 등을 얻고 즐기게 된다. 학교의 공식적·형식적 동아리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이 속한 생활세계를 지배하며 억압되어 왔던 욕구를 충족시키게 된다. 학생들 스스로가 진단하는 학교폭력 실태를 보면1) 일진회 등 학교폭력은 고등학교보다 중학교에서 훨씬 빈번하게 발생한다. 폭력의 사유나 사례는 매우 다양하며 폭력형태는 점차 잔혹성이 심해지고 있다. 다행히 일진회의 외형상 모습을 동경하여 가입을 희망하는 학생은 많으나 실제 가입은 그렇지 않다. 일진회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구성되며 지역에서 연합을 구성하고 있고, 패싸움을 통해 일진 간의 서열을 정하며 성인조직과 연계하고 있다. 연합을 통해 일일찻집 등을 개최하여 자금을 마련할 정도로 무모하다. 일진회 가입 이후 행동을 거부하거나 탈퇴하려고 할 때 집요한 협박, 구타, 괴롭힘 등이 발생한다. 학교폭력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가정과 학교, 사회문제의 복합적 요인에 기인한다. 가정과 학교의 기능적 결손과 학벌·학력위주, 입시위주 교육관 등이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개인적·가정적 요인으로는 학생의 자아통제력 및 타인에 대한 존중감 결여, 대인관계 부족, 가정폭력, 해체가정 증가 등으로 인한 가정에서의 교육기능 약화, 가해학생 학부모의 자녀에 대한 무관심 등을 들 수 있다. 학교적 요인으로는 입시와 출세위주의 교육경쟁으로 인한 학교환경의 피폐화를 들 수 있다. 인권·자율·책임을 중시하는 학교풍토 조성 미흡, 폭력예방 및 폭력 발생 시 대처에 관한 교육 미흡, 생활지도에 전념할 수 없는 교육현장 여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사회적 요인으로는 물질만능적이고 향락적인 사회분위기, 온라인·오프라인 상의 유해환경 범람, 매스미디어의 폭력성 등의 영향을 들 수 있다. 3. 정부의 학교폭력 대책 현황 정부가 학교폭력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대책을 수립해 온 지 10년이 넘었다. 1995년 정부는 학교폭력이 사회문제로 부각됨에 따라 교육부·검찰청·경찰청 등 관계부처별로 ‘학교폭력근절대책’을 수립·시행하였다. 1997년부터는 국무조정실 주관 하에 교육부, 행정자치부,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청소년보호위원회, 대검찰청, 경찰청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학교폭력 예방·근절대책’을 추진하여 왔다.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2004. 1. 29.)’제정을 계기로 관계부처 합동으로 추진해 온 ‘학교폭력 예방·근절 관련 업무’는 교육인적자원부로 이양되었다.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과 동법 시행령에 따라 현재 교육부에는 학교폭력대책기획위원회가 구성되어 있고 교육청에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전담부서를, 학교에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각급 학교별로 학교폭력 책임교사 선임 및 폭력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되어 있으며 상담실을 구비하도록 되어 있다. 동법은 5년마다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에 따라 지난 2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5개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학교폭력에 대한 각 부처의 관련 정책을 종합한 것으로 대단히 광범위하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5개년 계획 내용 교육부는 향후 5년 이내(2005∼2009년) 학교폭력의 25% 경감을 목적으로 매년 학교폭력 발생 건수를 5%씩 줄여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학교폭력 대책은 크게 5개 영역에 21개 과제의 세부 추진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1) 학교폭력 예방·근절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관련 추진체 간의 연계적 운영 활성화 ▲범정부 차원의 ‘학교폭력대책위원회’ 구성·운영 ▲지역단위 ‘학교폭력근절추진협의체’운영 활성화 ▲시·도교육청별 ‘학교폭력대책전담부서’ 설치·운영 ▲학교별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구성·운영 ▲경찰 주관 ‘학교폭력대책반’ 운영 ▲지역 사회 내 ‘폭력예방 협력망’ 운영 (2)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교육 및 지원 강화 ▲학교폭력 예방교육 강화 ▲학교폭력 피해 신고 및 상담의 활성화 ▲다양한 전문가를 활용한 예방교육 및 상담의 입체적 지원 ▲학교폭력 예방 시범학교 운영 및 우수 사례 발굴·보급 ▲학교폭력 실태조사 실시 ▲추진상황 평가의 내실화 (3) 교원의 학생생활지도 전문능력 제고 ▲교원 및 예비교원 대상 연수 강화 ▲학교폭력 예방·근절 우수 교원 및 관련 업무 담당자에 대한 우대 (4) 피해자 보호 및 가해자 선도 강화 ▲피해학생 치료·재활 지원 ▲가해학생에 대한 선도 프로그램 운영 다양화 (5) 범정부 차원의 사회적 분위기 조성 ▲학생의 ‘인권·자율·책임 중시 풍토’ 조성 ▲학교·학생 공동 주관 자율활동 활성화 ▲온라인·오프라인 상의 유해환경 집중 모니터링 및 지도·단속 ▲학교 내외의 학생 보호활동 강화 ▲계도·공모전 등 전개 ▲청소년·학생 복지 지원 ▲대안교육 확대·내실화 2) 최근의 정부 대책 교육부가 이상과 같이 학교폭력 기본계획을 입안·발표한 게 지난 2월이지만, 3월 일진회 사건 보도를 계기로 정부 각 부처는 이 외에도 각종 대책을 쏟아 내놓고 있다. 경찰청은 교육부·행자부·법무부 등과 공동으로 매년 3월과 4월, 2개월간 ‘학교폭력 자수 및 피해신고 기간’으로 정하고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전직 경찰을 학교에 파견하는 ‘스쿨 폴리스 제도’와 CCTV 설치 등을 5월부터 시범운영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법무부는 3월 25일부터 전국 335개 보호관찰소를 통해 일진회 가입 등 학교폭력에 연루된 보호관찰 청소년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야간 외출 제한명령, 집중보호관찰과 함께 심성개선과 정서안정을 위해 병영체험훈련을 실시하기로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교육부는 학교폭력을 학교평가에 반영하여 학교폭력 발생시 감점을 하고 선도시에는 가점 부여방식을 도입하겠다고 공표하였으며, 학교폭력을 모범적으로 처리한 학교나 교원에 대해 표창이나 국외연수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한 각 지역에 생활지도 담당교사와 경찰, 지역인사 등을 중심으로 초·중·고 지구별 통합협의회 90개를 조직하며 학교폭력 책임교사제를 강화, 운영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상과 같이 교육부를 비롯하여 정부 각 부처가 각종 정책의 시행을 발표하고 있지만 학교폭력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를 갖기가 어렵다. 그것은 과연 정부가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정책들을 얼마나 책임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10여 년간 정부의 학교폭력에 대한 정책적 대응은 다분히 전시적인 것이었다. 1996년에도 언론에 학교폭력이 집중 보도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각 부처는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온갖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스러웠으나 그 이후 흐지부지되었다. 2002년 말에도 이와 비슷한 조치가 있었다. 이번 사태 또한 그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학교폭력 대책으로 제시한 정책들은 즉흥적으로 황급하게 내놓는 설익은 대책들이며,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고심 끝에 내놓는 정책들이 아니다. 또한 정책 추진주체의 책임성과 의지가 뒷받침되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4. 학교폭력 해결을 위한 정책의 재구조화 지금까지 논의, 제시된 학교폭력 대책만 해도 너무나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서로 긴밀한 연결 없이 산발적·간헐적으로 수행되는 종합선물 세트 같은 대책으로는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어렵다. 학교폭력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책들 중 시급성과 중요성을 고려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정책의 로드맵을 설정하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또한 지속적으로 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효과적·효율적 학교폭력 대책 설정을 위한 몇 가지 기본 전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첫째, 가해-피해의 구분 없이 현재 학교폭력에 노출되어 위험에 빠져 있는 청소년을 조기 발견하고 개입·치료·선도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에 정책적 노력을 집중하여야 한다. 둘째, 폭력 청소년에 대한 사후처벌보다는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청소년에 대한 예방, 상담과 교육을 통한 청소년의 성장과 변화를 위해 정책적 노력을 하여야 한다. 셋째, 폭력예방과 폭력발견을 위한 효율적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교사뿐 아니라 학생, 학부모 등 교육관련 인적자원, 지역기관이나 시민단체 등을 충분히 동원하고 활력을 만들어 내는 데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 폭력에 노출된 청소년의 입장에서 시급한 것부터 논의하고자 한다. 1) 학교폭력에 대한 긴급 구호대책 가해-피해청소년 양편의 입장에서 학교폭력 대책으로 가장 시급한 것은, 첫째, 학교폭력을 조기에 발견하고 개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이다. 학교폭력은 그 실체가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지만 전국의 학교에 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교사나 학부모의 눈에는 가해학생들의 조직적 위협이 발견되기 어렵다. 그러나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학교폭력의 실체가 가장 쉽게, 먼저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피해학생, 또는 폭력조직을 인지하고 있는 제3자 청소년이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는 신고 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한다.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는 신고·상담전화를 통합하여야 하며, 신고자가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도록 신고자의 기밀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신고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학교폭력 신고 및 상담전화를 교실이나 학교화장실 등 학생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홍보하여 폭력신고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 또한 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원스톱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현재 폭력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초기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물론 감정싸움으로 번져 법정까지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피해신고의 접수와 전문가 그룹의 신속한 개입을 강화하는 대응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둘째, 학교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체제를 구축하여야 한다. 학교폭력 피해학생을 위한 상담 및 의료, 법률 등의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재 학교폭력법은 피해학생의 보호를 위해 ①심리상담 및 조언 ②일시보호 ③치료를 위한 요양 ④학급 교체 ⑤전학권고 ⑥그 밖에 피해학생의 보호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 등을 규정하고 있다. ①에서 ③까지의 조치를 위해서는 외부시설이나 전문가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외부시설이나 전문가를 활용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조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먼저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를 위한 요양 등에 필요한 치료비를 확보할 수 있도록 ‘구상권’제도가 필요하다. 즉, 시·도교육청이나 사립학교가 치료비를 먼저 부담하고 추후 가해 학생측에 그 비용을 청구하게 한다. 또한 피해학생의 긴급 피난성 결석에 대해서도 이를 출석일수에 산입시킬 필요가 있다. 현재 학교폭력에 의한 결석일수의 산입은 ‘일시보호’와 ‘치료를 위한 요양’에 국한시키고 있다. 셋째, 학교폭력 가해청소년에 대한 실효성 있는 선도교육 시스템이 강화되어야 한다. 경찰력을 동원한 일진회 조직 와해 등은 폭력에 대한 경각심 등으로 일시적인 효과는 있겠지만, 그에 가담한 청소년들의 변화를 유도하지 못하는 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학교폭력의 가해학생 역시 피해학생과 같이 사회적 도움을 필요로 한다. 폭력이라는 공격적 성향은 오랜 세월 누적된 분노의 표현이다. 폭력을 행사하게 되기까지의 잘못된 성장과정에서 자존감의 상처, 가정과 사회에 대한 건전한 소속감과 애착의 상실 등을 갖고 있으며 피해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치료를 필요로 한다. 현행 학교폭력 가해자의 처리규정은 폭력의 경중에 따라 사법적으로 처리되는 경우, 소년원 수감이나 보호관찰소 처우를 받게 되며, 학교 징계처리지침에 따라 학교봉사 및 사회봉사, 출석정지 등의 조치를 받게 된다. 가해학생에 대한 교정이 철저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일한 사건이 재발되는 경우가 많다. 보호관찰소 처우를 받는 청소년에 대한 대안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가해학생에 대한 지도는 일반학생과 달리 상당한 인내심과 전문성, 교육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가해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전문인력의 양성과 대안교실 운영이 필요하다. 교회, 사찰 등 종교시설과 종교인력을 활용한 대안교실 체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만하다. 교내봉사, 사회봉사 등에 처해지는 가해청소년의 경우 자신뿐 아니라 부모까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게 하는 조치 등이 필요하다. 2) 학교폭력 예방대책 학교폭력 예방대책은 학교수준에서 학생과 학교를 대상으로 실시함으로써 학교문화의 변화와 학교 내 인간관계의 변화와 성장을 도모하는 데 초점을 둘 수 있다. (1) 학교상담기능의 확충 및 강화 교육부는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하여 지역교육청별 2명 이내의 전문순회상담교사를 배치하기로 하고 교육청별로 필요한 인원을 모집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계획에는 상담인력으로 전문순회상담교사 외에 상담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 보건교사, 학교순회청소년상담사 등의 활용과 아울러 또래상담의 활성화를 내세우고 있다. 학교폭력법이 요구하고 있는 전문상담사의 인적자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방침이 없는 상태이다. 교원의 법정정원 확보율이 낮은 상태에서 사실 전문상담교사의 배치를 의무화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상담순회교사 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담임교사나 부모에게도 학교폭력 피해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하물며 학교전임교사도 아닌 교육청순회교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상담을 받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경정신과 의사, 청소년상담사, 사회복지사 등 청소년상담 관련 외부 전문인력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은 초·중등교육법 제22조, 동법 시행령 제 42조에 의한 ‘산학겸임교사’로 임명하는 것을 고려해 볼 만하다. (2) 학교교육과정에 반영하는 학교폭력 예방교육 실시 학교폭력법 제13조는 학교폭력 예방교육의 정기적 실시와 전문단체, 전문가에의 위탁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법 시행령에 따르면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학교장이 학교 실정에 따라 정하도록 되어 있다. 학교폭력 예방교육이 학교장의 재량에 맡겨진 것이다. 학교폭력 예방교육은 학교폭력 발생 후 대처보다 더욱 중요하다.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동기 때부터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린 시기부터 긍정적 대인관계, 대인간 갈등해결, 충동조절, 정서조절 등에 관한 교육과 법지식이나 폭력 발생시 행동지침 등에 관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행동을 습관화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이미 외국에서는 어린 아동기 때부터 여러 가지 예방교육을 학교수업시간에 실시하여 학교폭력에 대한 예방을 해오고 있다. 실제로 많은 개인기관이나 지역사회 기관들이 예방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시하고 있는데, 가장 효과가 큰 것은 학교에서의 정규교육과정에 예방교육을 포함시켜 실시하는 것이다. 학교교육과정에 반영하는 학교폭력 예방교육은 저학년·고학년, 중학교, 고등학교에 따라 차별화된 내용으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내용은 ①긍정적인 사회기술·감정이입기술·분노조절기술 훈련 ②충동통제 훈련 ③공격에 대한 대안행동 획득 훈련 ④스트레스 관리기술 ⑤사회적인 단서들을 해석하여 의도성을 정확하게 탐지하는 능력 등을 강화하여 사회적 상황에서 타인의 행동적 단서들에 대한 해석과 범주화 훈련 ⑥긍정적인 의사소통기술 훈련 ⑦역할 훈련 ⑧폭력과 관련된 위험에 대한 교육 ⑨또래의 압력에 대한 저항기술 훈련 ⑩문제해결기술 훈련 ⑪협상기술 훈련 ⑫학교폭력에 대한 통계적 정보를 제공하며, 폭력에 대한 잠재적 손익을 토론하게 해 봄으로써 학생들 스스로 싸움의 전조들에 대해 분석해보기 등과 같은 것으로 구성될 수 있다. (3) 학교의 건전문화 조성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학교의 공동체성을 살리고 학교를 정서적으로 따뜻하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학습공간으로 학교를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의 학교교육은 교육철학이나 가치관이 부재한 상태에서 오로지 입시교육을 목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학교폭력은 학생들의 건강한 문화의 부재, 따뜻한 인간관계의 부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활동욕구와 에너지 분출이 왕성한 청소년기에 입시와 시험, 경쟁 등으로 피폐화된 학교문화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분출시킬 기회를 찾지 못한다. 청소년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 있는 동아리활동, 문화예술활동, 청소년인권활동, 공동체활동 등 다양한 활동의 제공을 통해 역동적이고 민주적이며 공동체적인 학교문화와 인간관계를 강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3)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의 참여와 역할 강화 학교폭력 문제는 학교와 교사의 힘만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를 넘었다. 학교폭력은 교육적 해결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가정, 학교,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들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며 지역사회 단위에서 협의체가 함께 대응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먼저, 교사들의 의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교사들이 보는 일진회 회원들은 단순히 골치 아픈 문제아 정도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선배를 배경으로 하여 학교폭력을 행사하는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다. 교사들 역시 학생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학생들이 교사를 신뢰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 또한 일진회 회원들도 골치 아픈 문제아들로 인식하는 단계를 벗어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촉진해야 한다. 학교폭력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집단은 학생이다. 학생들이 일진회 등의 폭력문제에 대해 대안적인 시각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일진회 학생들과 일반 학생들은 서로 대화도 하며 어울릴 수 있는 관계이다. 학생회 등 기타 학생조직을 통한 토론문화 형성, 또래상담, 폭력에 대한 대안적 활동 등을 통하거나 청소년의 참여와 개입을 통해, 스스로 개혁해 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실제로 소위 일진회 ‘짱’이었던 학생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해당학교 일진회를 해체한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셋째, 학부모는 자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자녀와 솔직하게 대화할 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학부모들이 관심을 갖고 교사와 협력할 때 학교폭력의 사전예방이 가능하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학부모들의 자율적 소모임 등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넷째, 지역사회단체는 학부모, 교사, 전문가, 검·경찰, 학교, 시·군·구청, 교육청 등의 연계를 통해 청소년폭력을 사전에 예방하고 조기 발견하는 지역사회협의체를 구성, 활동을 촉진함으로써 청소년폭력 예방 및 추방을 위한 범시민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다. 학부모, 교사, 지역주민으로 구성하는 자율적인 순찰활동과 폭력 예방교육, 유해환경 정화 및 폭력추방 캠페인 등을 실시할 수 있다.
구자억 |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중국의 학교 현장에 외국어로 수업을 하는 쌍어교육(이중언어교육; bilingual education) 바람이 불고 있다. 중국 사회의 국제화에 따라 외국어 특히 영어의 중요성이 증대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말할 수 있는 인재양성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미 상해시·요녕성·산동성·광동성·강소성 등 여러 성에서는 수많은 쌍어교육 실험학교를 두어 운영하고 있다. 국제화가 쌍어교육의 주원인 ‘쌍어’라는 이름을 단 학급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으며, 사회에서는 ‘쌍어’반을 우수반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고, 쌍어교육을 실시하는 실험학교를 일류 학교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조류에 부응하듯 일부 학교에서는 쌍어반 운영을 학생 모집의 방법으로 활용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쌍어교육 바람이 일어남에 따라 쌍어교육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뒷받침할 연구기구도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교육부 교육과정교재연구소에 설립된 쌍어교육과정교재연구개발 센터와 소주(蘇州)시에서 설립한 쌍어교육연구 센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국 각지에서 쌍어교육에 대한 세미나가 개최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쌍어교육이 국가가 수행하는 중점연구과제 속에 포함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중국에서 쌍어교육은 교육부를 비롯한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추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및 학교에서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쌍어교육은 모국어 이외의 다른 언어를 이용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주로 이과 과목, 즉 초·중학교의 수학·과학, 고등학교의 물리·화학·생물 등의 과목을 중심으로 쌍어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중국 내에 쌍어교육 바람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의 경제 및 사회발전과 관계가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외국어 인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많아졌다. 즉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외국인과 능숙하게 말하고 교류할 수 있는 인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중국정부의 국제화 노력도 쌍어교육 바람이 불게 하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상해시의 경우 WTO 가입에 즈음해서 국제적 대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내어놓았다. 이를 위해 상해시는 ‘영어를 강화하고, 쌍어를 시험하며, 다양한 언어를 탐색하자(强化英語, 試驗雙語, 探索多語)’는 외국어교육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쌍어교육 담당 교사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현재 쌍어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몇 가지 방법을 통하여 양성되거나 충원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재직교사에 대한 쌍어교육 연수를 통하여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방법은 쌍어교육을 실시하는 대다수 지역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진 보편적인 방법으로서, 영어교사에 대해서는 다른 과목의 전공연수를 실시하고, 비영어 교사에 대해서는 영어연수를 실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이 여건이 되는 지역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방법으로서 교사들을 외국에 연수를 보내어 쌍어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어학능력과 교육방법을 배워오도록 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외국인교사를 초빙하는 형태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요녕성의 경우는 성 차원에서 외국인교사 500명을 직접 초빙해서 쌍어교육실험학교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부 지역에서는 외국인 교사를 채용해서 쌍어교육을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만으로는 급증하는 쌍어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확보하기에는 미흡한 형편이다. 당연히 국가 차원에서 쌍어교육을 담당할 교사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요녕성의 경우 성정부 차원에서 수학과 응용수학, 물리, 화학, 생물과학, 컴퓨터과학과 기술 등 5개 전공에 200명의 쌍어교육 전공반을 일반 대학에 설치하여 운영토록 하고 있다. 동시에 본과 학력의 초등학교 쌍어교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3년 과정의 중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학생 500명을 대학에 보내어 쌍어과정을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 한편 강소성의 강소외국어학교는 전국을 대상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모집하여 5년 과정의 쌍어교사를 양성하고 있다. 상해시에 있는 화동사범대학에서는 현재 수학, 지리, 교육 등 20여 전공에 쌍어과가 개설되어 있다. 이렇게 중국에서는 현재 다양한 방법을 통해 쌍어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쌍어교사 양성은 최근 몇 년간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직 그 실적은 미미한 편이나,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쌍어교육 교재는 무엇을 사용하는가? 현재 중국에서 쌍어교육을 위해 사용되는 교재는 외국에서 수입한 교재, 번역교재, 중국 내에서 자체 편찬한 교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자체 편찬한 교재는 출판사가 직접 편집, 출판한 교재, 특정지역에서 편찬한 교재, 각 학교가 편찬한 교재 등이 있다. 번역교재는 현재 인민교육출판사의 영어판 교재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 등이 있다. 그러나, 교육전문가들은 현재 중국 내에서 사용되는 쌍어교재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쌍어 교재 종류가 과목이나 학년에 따라서는 그 숫자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현재 수입, 자체 편찬, 번역한 쌍어 교재는 그 종류로 볼 때 적지 않은 숫자이다. 그러나, 학년이나 과목으로 구분하여 보면 그리 많은 숫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쌍어교육이 많이 실시되는 자연, 과학, 정보기술, 수학 등의 과목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종류의 교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교재 종류별 사용하는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재들이 다양하다 보니, 학교교육과정상에 제시된 내용의 용어가 교재별로 다르게 표기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했는가에 따라 학문에 대한 이해 및 용어 표기가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셋째, 초·중·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쌍어 교재가 대학과의 연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 내에는 북경대학, 청화대학, 난주대학, 화동사범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쌍어교육전공이 개설되어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대학들이 쌍어교육 전공을 개설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학교현장에서 사용되는 쌍어 교재는 대학과의 연계가 부족하여 교재 따로, 대학의 양성과정 따로인 현상이 발생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방법은 무엇을 사용하고 있는가? 현재 중국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쌍어교육방법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침투형이다. 일반 수업시간 중에 필요한 경우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자주 사용하는 수업용어 혹은 특정한 명사 술어를 학생들에게 영어로 강의하고, 중국어로 보충설명을 하는 방법이다. 둘째, 첨삭형이다. 중국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를 교체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혹은 중국어의 기초 위에서 영어로 보충해서 수업을 하는 방법이다. 또는 영어를 기초로 해서 수업을 하되 필요한 경우 중국어로 해석과 설명을 보충하는 방법이다. 셋째, 시범형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중국어로 수업을 하고, 일정한 내용을 선택해서, 일정한 시간동안 완전 영어로 수업을 하는 방법이다. 넷째, 선택과목형이다. 일부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편성해서 그 과목에 대해서는 영어로 수업을 하는 방법이다. 대학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현재 중국 내에서 쌍어교육 열풍이 일어나자 대학들도 쌍어교사를 양성하는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들이 사회적 요구를 간파하고 그것을 수용한 결과이다. 흑룡강성 가목사대학 교육계는 이미 2000년부터 2년 과정의 유아교육 전공에 쌍어전공학생을 모집하고 있다. 이 전공에서는 쌍어로 교육을 담당할 유치원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보면 외국어, 예술, 교육심리 과목 세 영역을 중심으로 그 중 외국어 과목은 영어발음, 회화, 독해, 듣고 말하기, 공공외국어 등의 5개 과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의 이수시간은 651시간으로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또 예술 과목은 무도, 음악원리와 노래, 건반, 성악, 회화 등 5개 과목, 340시간으로 전체 수업시수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교육심리 과목은 16개 과목으로 그 속에는 유아쌍어교육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2년간 이수하는 시간의 30%가 외국어로 이루어져 있음으로써 대학을 졸업하고 교육을 담당할 때 외국어로 강의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이 대학 2004년 졸업생의 경우 80% 이상이 영어를 사용하여 능숙하게 유아를 대상으로 수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양사범대학 유아와 초등교육계는 4년제로 유치원교사와 초등학교교사를 양성하고 있다. 이 대학도 쌍어교사 양성을 하고 있는데, 그 과정을 보면 2학년까지는 영어(듣기·말하기·쓰기·읽기), 전공영어 등을 개설함으로써 영어의 기초지식습득에 주력하고, 그 이후에는 전공과정 중 일부를 쌍어과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4년간 지속적으로 영어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 된다. 소주시 쌍어교육 사례 “소주실험초등학교는 쌍어교육을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학교이다. 2학년 수학과의 통계수업을 보면, 교사는 기본적으로 유창한 영어로 통계를 강의하고, 학생도 영어를 사용해서 교류를 한다. 2학년 과정의 학생이 기본적으로 모두 영어로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영어 수준은 상당히 높기 때문에 수업을 참관하는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소주시는 앞에 설명한 것과 같은 쌍어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2007년까지 150개 초·중·고등학교에 보급할 예정이다. 그리고 보급 결과를 참고해서 소주시 전체에 쌍어교육을 보급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서 소주시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다. 첫째, 쌍어교육연구센터를 설립하였다. 이 기구에서는 쌍어교육 교재, 교육방법, 교사양성, 쌍어교육 효과 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둘째, 교육행정기관 및 초·중·고등학교의 쌍어교육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이 외에 쌍어교육과정 개발, 교사양성 및 연수제도 수립, 쌍어교육 평가체제 수립 등을 준비하고 있다. 이외에 2004년 12월 중순 소주시는 제1회 쌍어교육제를 개최하였는데, 이 행사는 중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쌍어교육축제이다. 소주시는 이 행사를 통하여 시민들의 쌍어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를 시작으로 쌍어교육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이렇게 쌍어교육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이에 대한 찬반양론도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쌍어교육이 현재까지의 소모적인 외국어 교육형식에서 벗어나, 외국어 사용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그 구사능력을 배가시킬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반대자는 쌍어교육이 모국어 사용능력을 떨어뜨리는 등 학생들의 모국어 사유능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대하는 이들은 외국어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지 쌍어교육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의 쌍어교육은 그 필요성 때문에 더욱 확대되어 실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제발전 및 국제화에 대한 강한 의지는 제2외국어에 대한 중요성을 더 한층 부각시키게 될 것이고, 이것이 사회의 요구와 맞물리면서 쌍어교육이 학교교육의 보편적 형태로 자리잡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인간과 유전자가 흡사한 침팬지 침팬지는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를 개미굴에 넣고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여기에 개미가 까맣게 묻으면 꺼내 핥아먹는 영리한 동물이다. 인간처럼 집단을 이뤄 사냥하는 것은 물론, 사냥한 음식을 나누어 먹을 줄 알고, 돌과 나뭇가지를 도구로 사용한다.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쳐 주면 수백 단어의 수화도 할 줄 안다. 한국, 일본 등 국제공동연구팀은 2002년 침팬지의 게놈 지도 초안을 발표했다. 침팬지와 사람의 생명체 설계도를 열어보니 유전 정보를 기록한 DNA 염기서열 가운데 98.8%가 같았다. 침팬지와 인간의 염기서열 차이는 1.2%이다. 침팬지 다음으로는 고릴라, 오랑우탄이 인간과 가깝다. 고릴라는 사람과 DNA가 97% 같다. 최근에는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너무 흡사해 사람과 같은 호모(Homo)속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한 35억 년 전을 24시간 전이라고 보면, 사람과 침팬지가 한 몸에서 갈라진 600만 년 전은 3분 전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동물의 행동과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침팬지를 거울삼아 인간의 본성을 알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초기 침팬지 연구자들은 침팬지의 공격성과 잔혹성에 매우 실망했다. 야생의 침팬지들이 무리지어 다른 집단의 침팬지를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 침팬지 수컷들은 몇 마리씩 떼 지어 정찰을 하다가 혼자 떨어져 나와, 근처 다른 그룹의 침팬지를 발견하면 기습해 사지를 붙잡고 입으로 물어뜯고 돌로 쳐 죽인다. 침팬지 연구에 평생을 바친 여성 동물행동학자인 제인 구달은 1970년대에 아프리카 탄자니아 곰브 국립공원에서 침팬지 4개 집단 가운데 두 집단이 참혹한 동족상잔과 유아 살해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구달과 곰브 국립공원에서 1974년부터 침팬지를 관찰해 온 하버드 대학 리처드 랭햄 교수는 “수컷이 무방비 상태의 동족을 치명적인 공격으로 죽이는 것은 동물 사회에서 인간과 침팬지만의 유일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프로 사냥꾼인 사자나 호랑이의 경우도 동족끼리 싸우면 자기 자신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기 때문에 승부가 어느 정도 가려지면 싸움을 중단한다. 반면 사람과 침팬지들은 자신은 다치지 않고 상대방 동족에게 치명상을 가하는 전문 킬러라는 것이다. 동물행동학으로 노벨상을 탄 독일의 콘라드 로렌츠 박사는 1963년 ≪공격성에 대하여≫에서 인간의 행동은 굶주림, 번식, 두려움, 공격성이 결정한다고 썼다. 그는 2차 대전의 대학살도 인간 본성의 표출로 보았다. 그는 “사자나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도 자기 자신의 종족에 대해서는 무기를 쓰지 않도록 억제하는 능력을 진화시켜 온 데 비해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런 방향으로 진화하지 못했다.”고 통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침팬지에게는 공격성과 더불어 화해 본성이 있다는 증거가 많이 발견되면서 동물행동학자들이 인간을 보는 눈도 크게 변하고 있다. 침팬지는 쉽게 화를 잘 내며 흥분하고 공격한다. 그런데도 특이한 점은 침팬지들은 안정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 수십 명의 동물행동학자들이 지난 20년 동안의 연구 보고서 100편 이상을 묶어 2001년에 ≪자연의 갈등 해소≫란 책을 펴냈다. 보노보 침팬지는 성행위까지 인간과 흡사 이 책에는 침팬지, 보노보 등 영장류가 싸움 뒤 의식적인 키스, 껴안기, 섹스, 손잡기 등을 통해 화해를 모색하는 것을 밝혀낸 11건의 보고서가 포함돼 있다. 670번에 걸친 ‘짧은꼬리원숭이’의 싸움을 관찰한 결과 싸움 직후 10분 동안 이들 사이의 ‘몸 접촉 행동’은 평소보다 크게 증가했다. 또 격렬하게 싸웠던 암·수 침팬지가 10분 뒤 제3의 장소에서 껴안고, 키스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공격적인 침팬지들이 분쟁이 초래한 사회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해를 시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동물행동학자들이 영장류 사회에서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흔히 피그미 침팬지로도 불리는 보노보에 대한 연구가 1980년대부터 활발해지면서부터이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더불어 지구상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침팬지와는 달리 평화와 사랑을 즐긴다. 또한 침팬지가 남성 중심 사회를 이루는 데 반해 보노보는 여성 중심 사회를 이뤄 산다. 235종의 영장류 가운데 남·여가 서로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하는 것도 인간과 보노보뿐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은 마주 보고 하는 성 행위를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침팬지나 말, 개처럼 하는 후방위를 죄악으로 여겨왔다. 보노보가 사람처럼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독일 뮌헨동물원의 두 연구자였다. 동물이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1954년 이 사실을 논문으로 쓰면서도 비전문가는 볼 수 없게 라틴어로 발표했고, 녀석의 존재는 그 후 잊혀졌다. 보노보가 침팬지의 아종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1929년이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 들어 시작된다. 동물학자들이 아프리카 열대우림에 숨어 살며 몹시 수줍음을 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노보 집단 옆에서 살면서 하나 둘씩 이들의 생활 모습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노보는 평화와 자유분방의 상징 미국 에모리 대학 심리학과 프란스 드 왈 교수는 미국 최대의 동물원인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보노보를 연구해 1997년에 ≪보노보: 잊혀진 원숭이≫란 책을 출판했다. 지난 1982년에 ‘원숭이 정치학’을 통해 침팬지와 인간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남성 중심적 파워 정치학을 그렸던, 침팬지 연구가 드 왈 교수는 “보노보가 좀더 일찍 알려졌다면, 인간의 진화를 재구성하는 데 남성, 전쟁, 사냥, 도구, 파워 정치보다 남녀의 동등한 성 관계, 가족의 기원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인간이 침팬지류와의 공통의 조상에서 먼저 갈라져 나와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600만 년 전의 일이다. 그 뒤 침팬지류는 다시 침팬지와 보노보, 즉 피그미 침팬지로 갈라졌다. 현재 보노보는 자이르 강변 열대우림에서 1만 마리 이하가 생존하고 있다. 학자들은 보노보가 인간이나 침팬지보다 덜 진화해 이들 3종의 공통 조상의 원형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노보의 세계는 여성이 중심이고, 섹스를 통해 공격성을 스스로 통제한다. 또 독재자가 아닌 평등주의자이다. 보노보의 사회 생활은 섹스를 빼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의 성 해방론자들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보노보 웨이(bonobo way)’를 외치며 보노보처럼 자유분방하고 평화적으로 살자는 주장을 할 정도다. 보노보는 남녀는 물론 남-남, 여-여, 어른-청소년 등 어떤 조합으로도 섹스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하지만 새끼는 아주 드물게 5∼6년에 한 마리씩만 낳는다. 사람의 특징인 섹스와 생식의 분리가 보노보에게서도 나타난다.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섹스는 인간과 보노보만의 두드러진 행동 특징이다. 만일 섹스의 목적이 오로지 번식이라면 왜 사람들은 적게 낳고 더 많은 섹스를 즐기려 하는 것일까? 보노보는 아주 쉽게 성적으로 흥분한다. 먹이를 가져다주면 수컷은 성기가 발기한다. 음식이 오기도 전에 보노보들은 서로 상대방을 섹스에 초대한다. 수컷은 암컷을, 암컷은 수컷이나 암컷을 초대한다. 또 사슴을 잡았거나 익은 무화과가 많은 숲을 발견해도 이들은 5∼10분 동안 섹스를 하고 난 뒤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둘러싼 쟁탈전을 피하기 위해 섹스를 통해 먼저 돈독한 분위기를 만들고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것이다. 또한 다른 어떤 유인원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보노보의 가장 전형적인 섹스 패턴은 어른 암컷 간의 생식기 문지르기이다. 이때 이들은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처럼 소리를 지른다. 수컷은 서로 등을 돌려 엉덩이를 붙이고 음낭을 문지른다. 특히 레즈비언 섹스는 암컷의 사회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노보 사회의 섹스는 사교적 행위” 보노보나 침팬지의 암컷은 어른이 되면 다른 그룹으로 이주해 새끼를 낳고 동화돼 산다. 암컷의 이주는 근친교배에 의한 열성 유전을 막고, 다양한 유전자가 서로 섞여 그 종이 생존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보통 다른 집단으로 이주한 암컷 보노보는 나이든 암컷을 한 마리를 골라 성기 문지르기를 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간다. 상대가 답례를 하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젊은 암컷은 그 집단의 일원으로 동화된다. 동성애가 이주자의 사회 진입을 순조롭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새끼를 낳으면 그 젊은 암컷의 지위는 더 확고해지게 된다. 암컷 보노보는 수컷이 음식을 갖고 있으면 접근해서 섹스를 한다. 그리고는 섹스중 음식을 달라고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빼앗아간다. 보노보 수컷은 암컷이 먼저 음식을 먹도록 양보한다. 보노보 사회의 결속력은 암컷 사이의 결합에서 온다. 암컷들은 어떤 수컷이 특정 암컷을 괴롭히면 뭉쳐서 수컷을 쫓아낸다. 반면 수컷은 암컷에 집단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없다. 집단 내에서 어린 수컷의 지위도 보통 자기 엄마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수컷은 평생 엄마와 아주 가깝게 지낸다. 반면 침팬지 사회에서는 사냥을 통해 사회적 결속력이 형성되고, 영토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수컷이 중심이 된다. 또한 보노보 암컷은 사람처럼 언제나 섹스가 가능하다. 따라서 제한된 시간, 즉 발정기에 암컷을 차지하려고 수컷 간에 치열하게 벌어지는 내부 경쟁이 보노보 사회에는 거의 없다. 프란스 드 왈 박사는 “보노보 사회의 섹스는 호색이나 에로틱으로 해석되기 쉽지만, 나는 일상적인 애정 표현과 같은 일종의 사교적 행위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 보노보의 성 행위는 빈번하지만 성기 삽입 시간이 13초에 불과해 사람의 기준에 비하면 매우 짧다. 섹스와 번식의 분리는 긴밀한 남녀 관계와 사회의 기초인 가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제는 누가 이를 주도했느냐는 점이다. 흔히 여성은 섹스에 수동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여성은 수동적이라기보다 조심스러울 뿐이다. 여성이 조심스러운 것은 10개월의 임신과 출산 뒤 보육 등 섹스 이후의 엄청난 투자 시간을 감안할 때 상대방이 능력이 있고,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가리기 때문이다. 침팬지보다 인간과 더 닮은 점이 많은 보노보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섹스 능력을 진화시킴으로써 미숙아로 태어난 자녀를 돌보는 데 수컷의 참여를 유도해 냈고, 결국은 이것이 핵가족 형성과 질 높은 자녀 교육, 나아가서는 일부일처제에 기반을 둔 인간의 문명이 탄생하게 됐다는 이론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곽해선ㅣ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on.net) 일본에 발목 잡힌 한국의 무역 우리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하는 상품 무역에서 단 한 해도 연간 흑자를 내지 못해, 만년 적자국 신세다. ‘일본을 상대로 상품을 수출하고 받은 대금’에서 ‘일본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하고 내 준 대금’을 빼면 그 결과가 대일 상품수지(무역수지)가 된다. 대일 상품수지는 수출액보다 수입액이 항상 더 커서 해마다 적자를 보고, 매년 적자폭도 커지고 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대일 무역적자액은 145억 달러. 1980년대에는 353억 달러, 1990년대에는 1001억 달러로 대략 10년에 3배씩 규모가 늘어났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대일 무역적자는 2000년 114억 달러, 2001년 101억 달러, 2002년 145억 달러, 2003년 190억 달러, 2004년 245억 달러로 매년 연간 적자 신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해마다 적자를 크게 보면서 적자 누적액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일 두 나라가 대한민국 수립 후 국교를 재개한 것이 1965년. 그때부터 2003년 말까지 38년간 누적된 대일 무역적자가 무려 2070억 달러다. 달러 당 1000원으로 환산하면 우리 돈으로 200조 원이 넘는다. 2004년만 해도 우리나라의 상품 수출은 약 2542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였다. 수입은 약 2245억 달러를 해서 무역수지가 297억5000만 달러 흑자를 냈다. 그런데 대일 적자가 245억 달러다. 한 해 동안 세계를 상대로 상품을 수출해 번 돈이 일본 한 나라하고만 교역해 입은 손실과 맞먹는다. 이쯤 되면 ‘사상 최대의 수출’을 했고 무역흑자를 냈다는 얘기가 무색해진다.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4년간 우리나라가 세계를 상대로 벌어들인 무역흑자 총액이 427억 6300만 달러다. 이 금액은 2003년과 2004년, 단 2년간의 대일 무역적자와 맞먹는다. 14년을 일해서 번 돈을 불과 2년 사이 일본에 넘겨준 셈이다. 대일 무역으로 적자를 크게 보지만 않아도 우리나라 무역수지 흑자는 훨씬 커질 것이다. 그러나 대일 적자를 워낙 크게 내다보니 전체적으로는 아무리 무역흑자를 내더라도 흑자폭이 줄어든다. 미국이나 중국, 동남아, 유럽에 수출해서 버는 돈 중 상당액을 일본에 쏟아 붓는 꼴이다. 일본과의 무역, 왜 늘 적자만 보는가 대일 무역은 왜 늘 적자만 보는가? 우리가 유독 일본에만 수출을 못해서가 아니다. 유난히 일본에서 수입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일본을 상대로 해서는 우리나라도 매년 상당한 규모로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해마다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더 크다. 왜 일본을 상대로 해서는 수출보다 수입을 더 많이 할까? 우리나라 기업들이 완제품 제조에 필요한 부품, 소재, 생산설비 등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심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공업 분야 기업들이 원료를 가공해 완제품을 만들어서 수출하는 형태로 경제 성장을 꾀해 왔다. 공업 완제품을 만들어내려면 원재료(원자재) 외에 부품이나 생산설비(자본재) 등 중간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를 만들려면 액정화면, 반도체 칩 등이 필요하고 이들 부품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필요하다. 부품이나 생산설비의 상당 부분은 국내에 기술력이 충분하면 만들어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수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기업들이 공업 완제품 생산과 수출을 늘리면 늘릴수록 중간재·자본재 수입도 따라서 늘어나게 되어 있다. 기술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경제개발을 시작한 우리나라는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를 수입에 크게 의지해야 했다. 지금은 기술력 발달로 일부 중간재의 경우 국산품 자급도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수입에 의지하는 것들이 많다. 이런 경위로, 우리나라의 전체 수입 중 40∼50% 가량은 늘 중간재다. 문제는, 그렇게 수입하는 중간재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일본에서 들여온다는 데 있다. 전보다 꾸준히 줄어들고는 있지만 일제 부품·소재 수입은 여전히 우리나라 전체 부품·소재 수입의 30% 가까이 된다. 일본 다음으로 미국, 유럽에서도 많이 들여오지만 수입 중간재는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절반이 일본산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기업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의 태반을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다. 그 결과 대일 무역에서는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항상 크다. 또한 완제품 생산에는 중간재가 필수이고 중간재는 주로 일본에서 들여오므로 국내 기업들이 제품 생산과 수출을 늘리려면 언제나 그만큼 더 많은 중간재를 일본에서 들여와야 하는 구조가 생겼다. 그래서 수출이 늘어나면 대일 수입도 함께 자동으로 늘어나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대일 의존형 무역구조가 굳어졌다.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는 대일의존형 무역구조 아래서는 기업들이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 무역흑자를 내더라도 그 흑자의 상당 부분을 일본으로부터의 중간재 수입분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 중간재인 부품·소재의 대일 무역수지는 1988년 74억 달러 적자를 기록한 이래 2001년까지 계속 연평균 100억 달러 수준의 적자를 냈다. 2001년 대일 무역적자가 약 101억 달러였으므로 연간 대일 중간재 무역적자가 대일 무역적자의 전체 규모와 비슷했다. 이런 가운데 국내 경기와 대일 무역적자는 기계가 맞물려 작동하듯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국내 경기가 살아나 설비투자와 생산, 수출이 늘면 곧바로 부품·소재의 대일 수입이 늘어난다. 그 결과 대일 무역적자도 함께 늘어 무역수지가 흑자를 내더라도 흑자폭을 줄인다. 거꾸로 국내 경기가 침체하면 같은 이치를 거꾸로 밟아, 대일 무역적자도 줄어든다. 지난 1997년 대일 무역적자는 131억 달러였는데 이것이 1998년에는 46억 300만 달러로 크게 줄었다. 1997년 말 찾아온 경제위기로 국내 기업들이 일시 생산을 크게 줄이면서 대일 부품·자본재 수입을 40% 이상 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넘긴 뒤 수출이 활발해지자 대일 무역적자는 다시 1999년 82억 8000만 달러, 2000년 113억 6192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 2001년에도 대일 무역적자는 101억 2760만 달러로 전년보다 다소 줄었다. 이 해에도 국내 경기가 침체해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줄이면서 대일 부품, 소재 수입을 줄였기 때문이다. 불균형 무역·산업구조의 고착 무역구조는 산업구조를 반영한다. 중간재 수입을 일본에 의지하는 양상으로 무역의 불균형 구조가 굳어지면서 우리나라에는 산업도 일본 산업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불균형 구조가 함께 고착됐다. 무역과 산업의 극심한 대일 의존은 지난 수십 년간 거의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매년 총수입의 1/5 정도를 일본에 의존하고, 농수산물 등을 뺀 중간재나 최종 완성재의 절반은 일제 수입품으로 충당한다. 우리의 주력 수출업종인 전기·전자·반도체 같은 IT 분야, 그리고 산업기계·철강·금속 분야도 일제 수입 중간재를 특히 많이 쓴다. 우리나라의 대표 수출 상품인 휴대전화만 해도 그렇다.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국산 부품은 전체의 40% 정도에 불과하다. 반도체와 LCD 같은 핵심 부품은 30%를 일제로 수입한다. 이렇게 만든 휴대전화를 수출해 100달러를 벌면 그 중 30달러는 일본 차지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2003년 반도체의 대일 수출은 약 188억 달러, 반도체 부품의 대일 수입은 207억 달러로 20억 달러 적자다. 대일 무역적자 185억 달러 중 20억 달러가 반도체 부문 적자다. 수입 반도체 부품 중 상당수는 TV나 휴대전화, 기타 정보기기에 탑재되어 다시 수출 길에 오르지만 수출입 통계만 놓고 보면 반도체가 대일 무역적자에서는 큰 요인이 되어 있다. 실제로 최근 대일 무역적자의 70∼80% 가량은 반도체 등 IT 분야를 중심으로 한 부품·소재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수출하는 상품의 70% 정도는 철강·반도체·전기전자·제품·기계류 등 중화학공업 제품이다. 그러나 주력 수출품목인 전자·철강·화학제품 제조 분야에서 대일 수입의존도가 모두 30%를 넘는다. 일본은 주요 수출품이 승용차·반도체·컴퓨터·산업용 로봇·전자복사기 등 기술 수준과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모여 있다. 반면 우리나라 수출품은 반도체를 제하고는 기술과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선박·직물·철강 등에 모여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수출이 늘면 대일 수입도 그만큼 거의 자동으로 늘어난다. 수출을 많이 할수록 대일 무역적자도 커진다. 일본이 부품 수출을 중단하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우리 수출기업은 생산을 멈춰야 한다. 우리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가 수출인데, 우리의 수출은 일본 땅에 굵은 끈으로 묶여 있다. 대일 의존에서 벗어날 길은 우리나라의 무역이 일본의 손에 묶인 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기업들이 중간재·자본재 수입처를 다른 나라로 돌리면 되지만 이 일은 개별 기업들이 당장 해내기 쉽지 않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려면 중간재도 좋아야 하는데 일제가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수입 거래를 했던 까닭에 일제품에 의존하는 구조가 굳어지기도 했다. 워낙 대일 의존구조가 굳어지다 보니 요즘엔 황당하게도 ‘대일의존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 질 좋은 일제 중간재 덕에 우리 수출이 잘 되는 걸 일본에 감사하고 일제품을 더 가져다 쓸 일(?)’이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그러나 대일무역 불균형은 한·일간 기술력 차이가 주된 원인이므로 우리가 기술력을 키우면 해결될 수 있다. 일본은 대부분의 부품·소재를 자국에서 생산하는 이른바 풀 세트(full-set)형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다. 부품·소재 생산 기술을 기반으로 두고 있으니 일본은 기술력이 좋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완성품 위주 수출 전략을 채택해 부품·소재의 수입 비중이 높다 보니 부품·소재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 우리나라 부품·소재 기업의 설계 기술, 신제품 개발 능력, 신기술 응용 능력은 선진국의 70% 수준에도 못 미치고 생산기술 수준도 선진국의 80% 미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핵심 부품·소재를 주로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선진 기업들과 구별되는 제품을 개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가가치도 크게 낮다. 그 결과 9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수출이 크게 늘어나기는 했으나 수출단가는 일본에 비해 크게 떨어진 채 물량을 늘리는 양 위주 수출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나라에는 전자부품용 소재만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나 소재 관련 전문 연구소가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50인 이하 영세기업의 비중이 기계, 자동차, 전자 등을 중심으로 전체의 89.5%를 차지한다. 외국에서는 부품·소재 시장에서 대기업의 지배력이 높아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어서 기술 수준 개선이 요원하다. 기업 수나 종사 인구로 보면 국내 부품·소재 산업은 비중이 작지 않다. 2002년 4월 현재 약 9만 8000개의 제조업체 중 전기·전자·기계 분야를 위주로 3만 6000여 개 업체에서 약 123만 명이 일하고 있다. 사업체 수로는 전체의 36.7%, 종사자 수로는 전체의 46.4%로, 제조업 총생산액의 절반(48.2%)을 생산해낸다. 그러나 기술 수준이 낮기 때문에 부가가치를 높이지 못하고 기술의 해외 의존을 계속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기술의존에서 벗어나려면 국내 기업들이 연구개발 투자를 많이 해서 자체 기술력을 키우고 일본을 뛰어넘는 원천 기술을 확보해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소재와 기계류, 생산설비를 국산 기술로 마련해야 한다. 정부도 우리가 일본에 의지하는 부품을 국산화할 수 있도록 대체산업, 부품·소재 산업 육성에 나서야 한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우선 동양을 살펴보자. 고대 4대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그러하듯, 치수사업은 공통적인 중요 과제였다. 황하 문명의 경우, 치수사업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공로로 순 임금으로부터 임금 자리를 물려받은 우 임금에 이르러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를 ‘하(夏)나라’라 부른다. 유물로 실증된 중국 최초의 국가, 은(殷)나라 공자의 ≪시경(詩經)≫에 나오는 하나라는 기록상으로만 존재하지만 왕권이 강화되자 비로소 왕위세습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1500년경에 이르러 제17대 걸왕(桀王)은 말희에게 흠뻑 빠져 신하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위하여’를 외쳐댔다. 군주와 신하가 똑같으니 나라가 어찌 되었겠는가! 하나라는 결국 그들과 앙숙이었던 상족(商族)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은왕조(殷王朝)’의 시작이다. 은나라는 상족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므로 ‘상(商)나라’라 일컬어지며, 470여 년을 지속해 온 최초의 고대국가라 하더라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폭군 걸왕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하나라와 은나라의 성격상의 차이는 하나라가 기록상으로 알려진 최초의 고대국가라면, 은나라는 유물로 실증되는 중국 최초의 국가라는 점에 있다. 470여 년의 하나라 사직을 무너뜨리고 혁명적인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은나라는 처음부터 국가 건설에 대한 의욕이 대단하였다. 이러한 의욕이 은나라 시대의 유적과 유물의 발굴로 이어져 국가적 존재가 여러 가지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사실로 입증되었지만 말이다. 기원전 16세기경에 시작된 은왕조는 농업과 군사문제 등 나라의 중대사를 모두 신의 뜻을 묻고 난 다음에 왕이 결정하는 이른바 신권정치 시대였으며 점을 칠 때에 사용된 것이 바로 ‘갑골문자’였다. 갑골문자는 중국 최고의 상형문자이며 한자(漢字)의 조상에 해당한다. 이러한 갑골문을 통해서 은나라의 국세를 짐작할 수 있는데, 당시 산동 반도에 자리잡고 있었던 강씨족(羌氏族) 포로 300여 명을 한꺼번에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그 당시에는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흔했다). 앞에서 하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다만 기록에 의존할 뿐 물증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은나라의 경우는 하나라와는 달리 유적들의 발굴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갑골문자의 탄생과 봉건제도의 시작 1899년부터 지금의 중국 하남성 안양현 소둔(小屯)의 발굴과, 여기서 출토된 갑골문자 해독에 의해서 이것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의 유적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은나라는 청동기 시대였으나 귀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감히 만져볼 수도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 농민들은 아직 석기시대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석기를 이용한 농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투입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일 수밖에 없었으며, 생산성 향상이란 아예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은나라가 망해 가는 과정도 하나라의 경우와 똑같았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달기에게 흠뻑 빠져 나랏일을 멀리하고 폭정을 일삼았으며, 주지육림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사기(史記)≫와 ≪은기(殷記)≫에서 말하는 주지육림이란, 문자 그대로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과 같다.’는 군주들의 호화로운 주연을 그리 표현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희에게 흠뻑 빠져 주지육림의 설화를 남긴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이러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부덕한 금상(今上)을 폐할 때 내세우는 명분으로 삼았다. 주왕이 달기를 끌어안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동안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참담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즉, 은나라의 말기적 현상을 간과하지 않았던 서쪽의 주족(周族)이 들고 일어나 기원전 10세기경에 은왕조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때, 주족이 은나라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낚시꾼의 대명사가 된 강태공이 발탁되었다.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呂尙)이라는 사람이 주족의 문왕의 눈에 들었고, 문왕은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왕을 격파한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여상에게 ‘선왕 태공(太公) 이래로 기다리고 있었던 현자’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 정복하지 않은 은왕조를 두고 문왕이 병사하자,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에 올라 부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전쟁으로 국력이 극도로 피폐해진 은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기원전 1121년 ‘주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1121년 주족의 주나라는 은나라의 영토, 즉 황하 유역의 알짜배기 땅을 차지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막상 은나라의 땅에 왕조를 세우고 정복자로 군림했지만 망해버린 은나라 귀족들과 백성들은 ‘그래, 어디 한번 잘 해봐라.’는 식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쪽 변두리를 통치할 때와는 전혀 정치능력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통치할 땅은 넓어졌지, 인적 자원은 부족하지, 게다가 중원에는 여러 씨족들이 언제 도발해 올 지 모르는 데다가 망한 은나라의 귀족세력들이 언제 외부와 연결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킬 지 몰랐기 때문에, 주나라 왕실은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일종의 회유책, 다시 말해서 그들과의 제휴를 맺기로 하였다. 우선 주나라의 무왕은 은의 귀족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은의 왕자인 녹부(祿父)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고 제사도 허용하였으며, 은 왕조 시대의 관례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도 못했으니 대리만족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호의를 베풀면 만만하게 보고 기어오를 우려가 있으므로 무왕은 자기 동생을 녹부의 감시자로 삼아 영지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주나라 봉건제도의 시작이다. 정복한 은나라의 땅을 직접 통치하지 못하고 왕자를 내세워 위임 통치케 하는 등의 여러 조치들은 비록 무력으로는 은을 멸망시켰지만, 문화적으로는 갑골문을 창시한 은에게 흡수되는 상황을 말해주는 대목이며 정치적으로는 은나라의 신권정치를 대신한 봉건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일단 제후들에게 봉토를 주어 평상시에는 제후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자치권을 주는 대신, 제후들은 정기적으로 주의 왕실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자기 지역의 특산물을 바쳤다. 이것이 바로 조공의 기원이며,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주변국의 조공을 중요한 무역수단(외교수단)으로 삼았다. 서양 문명의 교차로, 메소포타미아 주변국의 파란만장한 삶 한편, 메소포타미아 주변에는 고대의 소아시아 국가들이 눈부신 활동을 하였는데, 페니키아 인의 활약으로 알파벳이 발명되고 헤브라이 인의 구약성서는 후세에 종교적·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는 모두 기원전 12세기경부터 동 지중해에서 활약한 해상 교역민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이 지역처럼 잦은 구조조정을 거친 곳도 없다. 바로 문명의 교차로였기 때문에 한 많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맞물려 긍정적인 의미로는 역사발전, 부정적인 의미로는 지역주민의 편안한 삶을 보장할 수 없었다. 지정학적 중요지역, 또는 문명의 교차로라 불리는 땅은 예로부터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지 않은 나라가 없다. 우리나라도 그 가운데 하나지만 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의 동남부를 중심으로 민족과 문명이 성장과 소멸을 거듭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 소아시아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고대사에 중요한 역할과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나라 또는 민족으로는 해상활동과 무역을 통해서 세력을 떨친 페니키아, 유일신 야훼를 숭배함으로써 서구 크리스트 교 문명에 공헌한 헤브라이 인,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마지막으로 통일한 페르시아, 그리스 고대문명의 기틀을 놓은 에게 문명을 들 수 있다. 현재 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 지역은 바다와 사막에 끼어 있어 커다란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지만, 동 지중해의 입구이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통로이며 먼 옛날부터 해륙무역의 요지였기 때문에,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민족사의 흥망도 그만큼 변화무쌍했다. 그만큼 이 지역은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침략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 지역은 각각 동진과 서진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가야 할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원래 이 지역에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가나안’이라는 민족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13세기 말부터 계통이 불명확한 해양민족이 침입함으로써 당시에 이곳에 진출하여 있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 세력이 쇠퇴하고, 그 뒤를 이어 페니키아 인·아람 인·헤브라이 인으로 일컬어지는 셈족 계통의 민족들이 활발한 교역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 세 민족은 모두 문화사적으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중요한 지역에서 살았다는 죄 아닌 죄로 한 많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알파벳을 발명한 페니키아 인 서양 세계에 알파벳을 전해준 페니키아 인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레바논 산맥 서쪽에 정착하여 시돈·티루스·베이루트 등을 중심으로 나라를 건설하여 지중해의 무역을 독점하고 많은 식민도시를 건설한 셈어계의 해양민족이었다. 지중해는 물론, 멀리 흑해까지 진출하여 엄청난 재물과 부를 끌어 모아 크게 번성하였으며 그들의 해상활동은 나중에 그리스인과 카르타고 인에게 견제를 받을 때까지 왕성하였다. 페니키아 인들이 건설한 시돈은 현재 레바논의 사이다(Saida)인데, 그들은 쌓아둔 재물로 온갖 사치와 퇴폐적이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성서에서는 시돈을 ‘부와 악덕의 도시’라 하여 여기서 ‘시도니즘(Sidonism)’이라는 말이 나왔다. 페니키아 문자는 이집트·바빌로니아 및 크레타의 문자를 기초로 한 표음문자이며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발전하는 동안에 오늘날의 알파벳으로 만들어졌다. 앞에서 이야기한 가나안 사람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자기들의 셈어 발음을 끼워 맞추어 ‘시나이 문자’라고 하는 표음문자를 만들어 냈다. 가나안 사람들이 만든 시나이 문자를 배운 페니키아 인들은 그것을 페니키아 문자로 사용하였고, 해상활동을 통해서 다시 그들의 문자를 그리스에 전함으로써 그리스 문자가 생겨났고, 마지막으로 로마에 전해져 로마 문자로 정립되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이 생겨난 것이다. 소위 최초의 서양인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의 전설에 의하면 테바이(테베)의 창업자 카드모스 왕이 처음으로 페니키아 문자를 도입하여 보이오티아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중계무역의 독점자, 아람인 가나안 사람들이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시나이문자를 만들어 냈다면, 아람인들은 ‘아람 문자’를 만들어 내었다. 기원전 1300년경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시리아로 이동하여 많은 도시국가를 세운 아람인들은 말과 글이 서로 맞지 않아 아람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람인들은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하여 내륙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쓰는 아람어가 상업상의 국제 공용어로 확산되었고, 나중에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나중에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 어가 공용어가 되다시피 하였다. 기원전 10세기로 추정되는 비문이 실제로 쓰였던 최고(最古)의 자료이며 나중에 헤브라이 문자와 아라비아 문자 등 서 아시아 여러 지방의 문자 성립의 조상이 되었다. 아람 문자는 멀리 몽골과 티베트·위구르·만주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사실은 가나안 사람들이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자신들의 발음을 끼워 맞춘 시나이 문자에서 파생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페니키아 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서, 아람인들은 내륙의 중계무역으로 동서양에 그들의 기록매체(문자)를 전파했으며, 중국의 갑골문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기록매체로서 한자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조현호ㅣ 울산 옥현초 교사 할미들이 만든 세상 영화 ‘마파도’에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남자를 다 잃고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다섯 노파가 등장합니다. 험한 바다와 싸워가며 억척스럽게 삶을 살아가는 그 영화 속 노파들은 각기 성격이 다르면서도 그네들만의 나라를 잘 통치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런 여성중심의 영화가 개봉되기 전 호주제 폐지를 포함한 민법 개정안이 지난 3월 초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습니다. 과도기를 거쳐 2008년부터 호주제는 완전 폐지된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제도도 바뀌어야 하겠지요. 바야흐로 남녀평등의 시대를 맞이하여 이번 호에서는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을 신화 속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생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성은 창세신화의 주인공입니다. ‘마고할미’는 단군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세상을 만든 창조신으로 지역에 따라 ‘노고할미’, ‘서구할미’ 등으로도 불립니다. 할미가 무슨 힘이 있나 하고 의아해 하실지 모르지만 할미란 ‘한+어머니’, 즉 대모신(大母神)을 이릅니다. 마고할미 신화는 특히 온갖 수모와 학대에 시달린 여성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아주 큰 덩치에 오줌을 누면 홍수가 지고 한숨을 쉬면 곧 태풍이 되었답니다. 깊은 남쪽 바다를 건널 때는 치맛자락이 적셔졌는데 젖은 치마를 벗어 월출산에 걸쳐놓으면 온 산이 덮인 채 캄캄한 암흑계로 변했습니다. 서해의 섬들은 그녀가 변을 보고 난 뒤에 생긴 것이랍니다. 할미의 힘이 엄청나죠? 이제 부안군 변산면 격포마을로 갑니다. 격포마을 해안가 돌출된 곳에 수성당(水聖堂)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서해를 다스리는 ‘개양할머니’와 그녀의 딸 여덟 자매를 모신 제당입니다. 조선 순조 1년(1801)에 처음 세웠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신화 속 개양할머니도 마고할미마냥 엄청난 여신입니다. 그녀는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하여 어부를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주는 자상한 여신으로 딸들을 8도로 시집보내었지요. 수성당 아래는 용굴처럼 움푹 팬 지형인데 거센 파도가 이곳에서는 잠잠해집니다. 어머니의 자상함이 그 억센 풍랑을 잠재우는 듯합니다. 개양할머니의 본적이 부안이라면 ‘설문대할망’은 본적이 제주도입니다. 할망은 옥황상제의 셋째 딸이라고도 하는데 한라산을 만들 때 조금씩 흘린 흙들이 한라산 자락의 오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할망은 빨래를 할 때 제주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빨래를 놓고 팔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빨래를 문질러 빨았다고 할 정도로 거신(巨神)입니다. 그녀는 아들을 무려 500명이나 두었는데 할망이 죽은 것을 알고는 모두 한라산 영실기암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제주도 사람들에게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주겠다 했거늘 명주 단 1필이 모자라 실패했다고 합니다. 마고할미나 개양할미, 선문대할망은 지역은 다르지만 실상 같은 성격의 창조여신들입니다. 생산만큼은 여신의 고유영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본향신으로, 여왕으로 웃손당은 금백조 셋손당은 실령조 맬손당은 소천국과 백조할망은 서울 남산 송악산서 솟아오던 임정국 님애기 소천국과 가부간 되난 아아전 오랐구나. 소천국 만나고 가부간 삼안 부배간이 렴살 때 아들 팔성제가 떨어질 듯 막동이는 배였구나….(이하 생략) 위는 제주도 송당 본향본풀이의 시작 부분입니다. 제주도 마을신 본향신을 모시는 본향당은 마을마다 분포되어 있지만 이곳 송당리의 본향당이 원조입니다. 사연인즉 금백주라는 여신이 소천국이라는 부신(父神)과 결혼하여 많은 자식을 낳고 살다가 죽은 후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당신이 되었고 그들의 자식들도 뿔뿔이 흩어져 제주도내 여러 마을의 당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백주할망은 서울에서 살다 제주로 넘어와서 이곳에 정착하여 본향당신이 되고 그 자손들을 번성시키는 정착여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습니다. 이런 본향당 주변의 나무에는 화려한 물색을 걸어두어 신목에 대한 예우를 받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최초의 여성지도자였던 여왕은 신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幾三事)를 보면 여왕의 선견지명이 돋보입니다. 그 중 생전에 자신이 아무 날 죽을 것이라고 예견하고는 자신을 낭산(狼山) 남쪽 도리천에 장사지내라는 주문은 후대 사천왕사가 건립됨으로써 확인됩니다. 그렇지만 성골의 남자가 다하여 덕만(德曼)이 왕위에 오른다고 했을 때 조정에서는 얼마나 논란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성품이 관인명민(寬仁明敏)하여 치세자로서 손색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첨성대,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구층탑 등 신라문화의 상징물들이 당대에 건립되었고 김유신이나 김춘추 같은 인물을 등용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합니다. 창세신화 속에서 여신은 생산력을 가진 창조자요 대모신의 너그러움을 지닌 존재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창세신화를 비롯한 여신이 등장하는 대부분의 신화에서 후속 이야기가 없어 이야기가 단절되기 일쑤고 설문대할망의 경우는 최후에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는 허망한 결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단군신화에서도 웅녀는 곰이 사람으로 환생했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정보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는 그녀로 인해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여자인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죄가 없었겠죠. 하지만 여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여신들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이 남성중심사회로 변해 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남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자들은 필요악적인 존재로만 전락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세상은 다시 남녀평등 혹은 여성중심으로 회귀하고 있으니 희망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승화된 사랑이 신화로 몇 년 전 안동 택지개발지구에서 무덤을 이장하던 중 남편을 잃은 아내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급박하게 써내려가 쓸 공간이 모자라자 윗부분까지 돌려쓴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중략)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정절을 강조하던 조선후기라지만 이토록 애절한 망부가를 부를 수 있었던 아내의 사랑이 숭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 남자 뒤에는 더 큰 여자가 있었습니다. 시조(始祖)라는 엄청난 남자 뒤에는 그의 어머니가 있었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남자 뒤에는 그를 뒷바라지 해준 아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모신앙(聖母) 혹은 신모(神母)라 불리며 지금까지도 추앙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로서 남편을 지극히 사모하여 그 사랑이 승화되어 여신이 된 이야기는 ‘치술신모 신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신라 눌지왕의 부탁으로 왕의 두 동생을 구출해낸 박제상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치술령에 올라 통곡하다 죽어 그 몸은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은을암에 숨었답니다. 나라에서는 그녀를 치술신모라 일컫고 제의를 모시도록 하였습니다. 선묘의 사랑 또한 극진했습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옆에는 선묘를 모신 선묘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의상이 중국 유학시절 머물렀던 집의 무남독녀 아가씨였는데 의상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절을 당합니다. 그러나 선묘는 의상에 대한 지원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의상이 신라로 귀국할 때는 황해에 몸을 던져 황룡이 됩니다. 이승에서 못한 사랑을 죽어서도 따라가겠노라고 하여 황룡이 되어 황해를 건너는 의상을 호위해 주고 부석사를 세울 때도 부석으로 잡귀들을 쫓아내어 주었고 최후에는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아래에 묻혔던 것이죠. 선묘의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한(恨)이 한(恨)이 되어 무속에서는 한을 품고 죽은 역사 속의 주요 인물들이 신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무속의 역할이란 것이 정상적인 죽음보다는 비정상적인 죽음을, 결혼한 사람보다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영혼을 달래는 것이 본분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안타까운 영혼들은 한이 깊어서 이승과 저승을 떠돌게 되므로 굿을 통해 이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한이 지나치면 그 폐해가 마을까지 번지게 되기에 동제로까지 확대되기도 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강릉단오제는 대관령국사성황신이 된 범일스님과 여성황신이 된 정 씨 처녀를 모시는 제의입니다. 범일국사는 강릉에 살던 정 씨 처녀를 호랑이를 시켜 몰래 업어 오게 하고는 자신의 처, 즉 대관령국사여성황으로 삼았습니다. 대관령여성황이된 정 씨는 또한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비정상적이고 험한 죽음이기 때문에 무속신앙이 관장하는 영혼이 된 것이죠. 사람들은 대관령국사성황과 여성황을 음력 4월 15일부터 단옷날까지 약 20일간 강릉에 있는 대관령국사여성황사에서 합신(合神)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굿판을 벌입니다. 조선 3대 누각의 하나인 밀양 영남루에는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는 아랑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유모를 따라 영남루로 달 구경을 갔다가 괴한의 핍박을 피하다 낙동강변 아래 대나무밭에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겁니다. 이후 밀양 부사로 부임하는 사람마다 첫 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데 한 부사가 이 사연을 듣고 관련자를 처벌하고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하기 시작하면서는 출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남루 아래에는 아랑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아랑사가 있으며 밀양지역 축제인 아랑제에서 규수를 뽑아 제향을 받들고 있습니다. 삼척시 원덕읍 신남마을에는 미역을 뜯으러 애바위에 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죽은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남근을 깎아 바치면서 풍어를 기원하는 풍습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 해신당 외에 고성군에도 시집 못가고 빠져죽은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고 풍어를 기원하는 등 동해안에는 바다와 관련한 여신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주도에도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혼령이 그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진 처녀당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남제주군 성산읍 신천리 현 씨 일월당은 오빠가 심한 풍랑을 맞아 불귀의 객이 되자 너무 슬픈 나머지 봉수대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현 씨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현 씨들의 조상신으로 모셔진 것이 마을을 지켜주는 당신으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릿발이 내린다는데 그 원혼들을 달래줌으로써 그 여신들이 바다를 지키고 산을 지키고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신들의 부활을 꿈꾸며 우리 국토 동쪽 끝 외로운 섬 독도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독도는 현재 우리 땅이고 천년만년 우리 땅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거라고 단정하기엔 상대방의 대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일본은 치밀하고 장기적으로 독도문제를 국제사회에 홍보함으로써, 비단 독도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빼앗으려는 고차원적인 술수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서해를 주름잡던 개양할미시여, 제주도를 만든 설문할망이시여, 그리고 우리의 마고할미시여, 동해의 여신들이시여…. 바다를 첨벙대던 그 거대한 몸집으로 막내둥이 독도를 지켜 주시고, 바다를 다스리는 인자함으로 우리 바다를 지켜 주소서….
대구 달서구와 달성군지역 40여개 초등학교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학력평가 시험을 치르면서 인터넷에 이미 공개된 문제를 그대로 출제해 물의를 빚고 있다. 30일 대구시교육청에 따르면 달서구와 달성군지역 40여개 초등학교는 지난 29일 2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생 수만 명을 대상으로 학년별로 동일한 시험문제를 사용, 학력평가 시험을 실시했다. 이들 학교들은 달서구 월성동 S초등학교에서 대표로 시험문제를 출제하게 하고 이를 일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초등학생 학력 평가는 단위학교별로 평가도구와 문항을 만들어 문제를 출제하고 자체적으로 평가하라'는 시교육청의 지침을 위반했다. 또 S초등학교에서 출제한 문제들은 대구 동부교육청이 제작, 일선 학교들에 참고자료로 배포한 CD-ROM 타이틀 '2004학년도 초등학교 교과학습 발달상황 평가문항'에 나와있는 기출문제를 그대로 사용했다. 동부교육청이 지난해 4천여만원의 예산을 들여 제작한 CD-ROM 타이틀은 학년별, 과목별로 30-50문항씩의 문제를 수록, 교육청 홈페이지로도 공개되고 있는데 S초등학교는 독자적으로 시험문제를 출제하지도 않고 이 가운데 과목별로 절반 이상의 문항을 그대로 쓴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이들 문제들은 상업적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어 사설학원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일부 사설학원에서는 이같은 규정을 어기고 버젓이 교재로 사용,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사설학원에서 배운 문제가 이번 시험에 그대로 출제되자 의아해 하기도 했다. 학생, 학부모들 사이에 이같은 논란이 제기되자 관할 남부교육청은 뒤늦게 감사반을 편성, 조만간 S초등학교를 비롯한 이들 40여개 초등학교에 대한 감사에 착수키로 했다. 이에대한 달서구 지역 한 학부모는 "공교육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대표적인 사례"라면서 철저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서울대가 2008학년도 정시모집에서 논술시험을 대폭 강화키로 한 것과 관련해 서울 소재 대학 입학처장들은 내신ㆍ수능 변별력 약화에 따른 당연한 조치라며 동조 입장을 피력했다. 그러나 수능시험이 자격고사로 전락하고 본고사가 부활하는 데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고려대 김인묵 입학처장은 "수능ㆍ내신에서 동일한 등급의 학생이 몇만 명씩 되기 때문에 학생 간 능력을 구분하기 힘든다. 교육부에서 내신을 강화하라고 하지만 어떻게 내신 하나만으로 학생을 평가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김 처장은 "(논술 강화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적인 현상과 같아 교육부도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못하고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며 논술 강화가 대세임을 피력했다. 연세대 박진배 입학관리처장은 "서울대가 논술을 대폭 강화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측한 부분이기는 하나 그렇게 빨리 시행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서울대의 방안에 대해 다음주 관계자 회의를 거쳐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경희대 이기태 입학처장은 "수능은 너무 객관적 지식을 물어보는 것에 불과하니 지원 학생의 주관적인 능력을 평가하려면 논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논술 강화 형태가 본고사 부활은 아니며 지식ㆍ암기 위주의 답이 아니라 창의적인 논리전개를 요구한다면 본고사와 거리가 멀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외대 김종덕 입학처장은 "교육부가 '3불 정책'(기여입학제ㆍ고교등급제ㆍ본고사)을 시행하는 상황에서 2008년도 입시에서 수능ㆍ내신에 있어 신뢰도 문제와 변별력이 떨어지는 만큼 논술과 적성검사를 최대한 활용해 입시에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능이 일종의 자격고사로 전락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숙명여대 박동곤 입학처장은 "서울대는 대부분 내신ㆍ수능 1등급 학생들이 지원하기 때문에 변별력 확보 차원에서 논술이나 면접을 강화하지만 내신이나 수능이 자격고사로 전락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강대 김영수 입학처장도 "현행 수능의 반영 비율을 조금 낮추게 됨에 따라 논술 비중이 약간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서울대와 같은 수능의 자격고사화나 본고사 부활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서울대가 2008년도 입시부터 논술시험을 강화키로 한 것과 관련해 본고사 형태의 시험이 도입된다면 행정지도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30일 "서울대는 '논술형 본고사'라고 했는데 실제 문제유형이 어떤 형태인지에 따라 3불정책에서 금지하는 본고사 유형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논술시험을 강화한다는 방침 자체가 3불정책 위반은 아니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금지하는 3불정책은 본고사 금지, 고교등급제 금지, 기여입학제 금지 등으로 이 가운데 본고사는 '국·영·수 중심의 필답고사'를 말한다. 하지만 논술시험이라고 해도 '어떤 내용을 증명하라'거나 '해석하라'는 식으로 구체적 수식 등을 요구하는 문제유형은 본고사에 가깝다는 것이 교육부의 해석이다. 교육부는 서울대가 2008년 입시안을 공식 발표한 것도 아니고 단지 언론보도만으로는 예단할 수 없으므로 서울대가 '새로운 논술시험'의 유형을 발표하면 이를 검토해 본고사 여부를 판단,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금지된 본고사를 실제 입시에 도입한다면 행정제재를 강구하겠지만 도입 이전이라면 행정지도를 통해 문제점을 개선토록 하면 된다. 서울대와 이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별도의 만남을 조만간 가질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교육부는 또 서울대가 '내신을 현행대로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해서도 "교육부가 추구하는 내신반영 강화와 다소 다른 입장이다"라며 서울대와 협의 테이블에서 이런 내용도 함께 논의할 방침이다. 한편 교육부는 이달부터 대학교육협의회와 한국교육개발원, 교육발전협의회 등과 함께 새 입시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세부적인 예시안 마련 등 모델 개발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갈 계획이다.
요즈음이 각급학교에서 한창 중간고사를 실시하는 시기이다. 특히, 그동안의 성적비리 관련 사고 이후 첫번째 시험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주의속에 시험이 실시되고 있다. 사실 성적관련 비리는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물론, 중학교에서도 사건이 있었으나, 고등학교의 경우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학교에서 1-2명의 교사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성적비리이지, 그 이상의 경우는 없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성적관련 문제는 고등학교에서 발생하고, 대책을 내세우는 것은 중학교까지 함께 책임져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처리방법이라고 하겠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등학교만이라도 집중적으로 지도·감독해야만이 뿌리를 뽑을 수 있는 것이다. 행정력이 중학교까지 미치게 되면 도리어 고등학교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경우가 이번만이 아니다. 예전에 교육과정이 시수 체제로 바뀌면서 수업시수를 잘 지키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경우가 있었다. 그때도 고등학교에서 수업시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중학교를 도리어 더 집중관리를 하는 바람에 중학교는 수업시수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고3학생들을 중심으로 수능이후에는 지금도 수업시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고등학교인데, 처리는 중학교도 함께,,,뭔가 모순이 있는듯 싶다. 이번의 성적비리 관련하여 시험방법을 다양하게 하는 방안도 중학교에서만 철저히 지켜지는 경우가 재연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학생두발 자율화 문제가 또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29일 저녁 KBS 2TV의 뉴스 투데이시간에 학생들의 두발 자율화 운동 관련 보도가 나갔다. 두발 자율화를 외치고 있는 학생들의 운동모습과 함께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의 입장도 함께 보도가 되었다.두발 및 각종 규제가 학생들의 학업과 청소년의 발달, 그리고 학교 교육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사실, 두발 자율화 문제는 이미 수차례 이슈화 되었었다. 두발규제가 일제시대의 잔재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이 두발자율화의 가장 큰 이유가 되었었던 것이다. 과거의 교복을 착용하던 시대에 시작된 것이 그대로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전반에 걸친 민주화 바람과 함께 학교내에서도 학생들의 인권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나타면서 두발자율화도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는 학생들의 공동체 사회이다. 학교에서는 다양한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이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길목역할을 하는 곳이다. 당연히 어느정도의 규제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이날 보도내용중에"머리를 짧게 잘라야 공부가 잘 되느냐, 그래야만이 학교폭력이 줄어 드느냐"등의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의 운동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면, 두발 자율화를 하면 공부가 더 잘 된다는 것인가. 두발 자율화를 해야만이 학교폭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인가를 묻고 싶다. 어느 것도 검증된 것이 없다. 두발을 자율화 하는 것이 그렇게 시급한 문제인가? 그렇게 해야만이 학교의 민주화가 이룩되고 학생들의 인권이 보장된다는 이야기인가? 두발규제 문제를 모든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현재와 같은 적당한 규제를 잘 따르고 있다. 규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모든 학생들이 원하는 것처럼 보도를 하는 것은 자칫 두발규제의 취지가 무색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도 여러번 이슈화 되었다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이 현재 학교교육에서 어느정도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현재와 같이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교복을 착용하고 있는데, 성인이 아닌 청소년층의 학생들이 두발을 자율화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만일 두발을 전면 자율화 할려면 우선적으로 교복을 자율화 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하겠다. 사실 교복이 더 큰 문제이다. 일단 전학을 가는 경우 20여만원되는 교복을 다시 구입해야 한다. 전학을 가는 학생들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부담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KBS는 학생들의 일방적 주장만 옹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교사들의 수업외, 생활지도나 인성지도의 부담감에 대한 어려움은 보도되지 않았다. 단지, 어느 교사의 인터뷰만을 내보냈는데, 그것도 두발을 심하게 단속하는 것은 교사가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만을 내보냈다. 분명, 그 교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은 모두 삭제되고 보도에 필요한 부분만 내보냈을 것이다.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의 두발 문제를 보도된 것처럼 심하게 단속하는 학교는 그리 많지 않다. 예전에 비해 많이 자율화 되었다. 적절한 개선은 필요할 수 있겠지만, 학생지도 차원에서 전면적인 자율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완전자율화를 꼭 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9일 경남도교육청의 학교내 자살사건 축소ㆍ은폐 실무지침 배포와 관련, 경남교육청에 책자 전량을 수거ㆍ폐기처분토록 하고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토록 지시했다. 또 30일 감사실 직원 2명을 현지에 보내 실무지침 제작경위와 실제로 지침이 적용된 사례가 있는지 여부 등을 현장조사토록 했다. 교육부는 타시도에서도 유사 실무지침 자료가 있을 경우 부적절한 내용이 있는지 면밀히 재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교육부는 그러나 "자료를 입수해 확인한 결과 축소ㆍ은폐를 지시한 내용은 학교폭력으로 인한 사망시 대처요령이 아니라 집단따돌림이 빚은 교내 자살사건에 대한 대처요령"이라고 해명했다. 교육부는 "99년부터 2003년말까지 학교폭력을 포함한 생활지도업무가 시도교육청에 이관됐다가 2004년 1월 29일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교육부로 다시 넘어와 문제의 책자 발간에 대해 교육부는 전혀 아는 바 없다"며 "진상조사 후 경남교육청의 부당한 업무처리가 확인되면 그에 따른 적절한 행정처분 등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임의기구인 시·도교육감협의회가 법정기구화 되고 교육감과 시·도지사가 교육 학예에 관한 사무를 협의하기 위한 지방교육행정협의회가 신설될 전망이다. 이런 내용들은 열린우리당 백원우 의원이 대표 발의한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에 포함된 것으로, 행정부는 구체안을 마련 중에 있다. 현재 임의기구인 시·도교육감협의회는 수시로 교육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교육부에 건의문을 내고 있다. 주로 서울시교육감이 회장을 맡고 있으며 별도의 사무국은 두지 않고 있다. 시·도교육감협의회의 법정기구화는, 지방자치법에 의해 1999년 설치된 전국시도지사협의회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전국시도지사협의회는 시도간의 교류 협력 증진과 공동문제 협의, 정부와 국회에 의견 및 법령 제출 등을 주요 기능으로 삼고 있다. 지방교육자치법개정안에 따르면 교육감은 상호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고 공동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전국적인 협의체를 설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협의체는 지방교육자치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법령 등에 관하여 교육부장관을 거쳐 정부에 의견을 제출할 수 있고, 협의체 운영과 기타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할 수 있게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협의회의 위상 강화와 더불어 시·도간의 협조 체제가 원활해 질 것”이라며 “시·도간에 기준이 달라 애로사항이 발생했던 전학 관계 조정 등 통일을 요하는 사항 등이 주로 협의될 것”이라고 밝혔다. 개정안에는 사무국에 관한 언급은 없으나 대통령령으로 관련 조항을 규정할 수 있으며, 교육부 관련 부서에서는 정원 확보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무국이 설치될 경우, 교육부 학교정책실이나 교육자치심의관실 등과의 역할 조정 등이 대두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초중등 교육 집행 업무를 시·도로 이양한다는 방침에 따라, 학교정책실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아울러 시·도교육감과 시·도지사 간에 교육 학예에 관한 사항을 협의할 수 있는 지방교육행정협의회 설치가 개정안에 포함됐다. 지방교육행정협의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해서는 교육감과 시·도지사가 협의해 시도 조례로 정하게 규정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학교 부지 확보, 일반회계에서의 급식비 지원 등 일반자치단체와 교육청간의 협조가 필요한 사항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런 필요에 따라 교육청에서 도청에 교육관을 파견할 수 있으나 경기도만 이 제도를 활용하고 있는 정도다.
학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초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학교폭력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사회문제로 비화하면서 5월2일부터 시범운영에 들어갈 스쿨폴리스(School Police.학교경찰)에 시선이 모이고 있다. 스쿨폴리스는 청원경찰 개념의 학교경찰. 퇴직경찰관과 퇴직교사 등 퇴직공무원, 덕망이 있는 학부모를 선발해 학교현장에 배치, 교내에서 발생하는 학교폭력 등 각종 비행을 예방하고 선도 및 단속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스쿨폴리스는 지난해 7월 시행된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제12조'의 '학교장은 교내에서 발생하는 각종 범죄나 비행 예방 및 선도를 하려고 상담전문교사 또는 전담책임교사'를 지정한다'는 조항과 초중등교육법 제19조(전문상담교사배치)와 제31조(학생징계)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부산지방경찰청과 부산시교육청이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학교폭력의 대처 방안으로 고심 끝에 내놓았지만 시범운영 돌입단계에 들어선 현재까지 제도도입 자체를 둘러싼 논란이 분분하다. 퇴직 경찰관 및 퇴직 교사라고는 하지만 '제복을 입은 스쿨폴리스'가 교내에 상주하는 것에 대해 교육계의 반응은 달갑지만은 않다. '어쩌다 우리 교육현장이 이 지경까지 왔느냐'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교육계 일부에서는 '선도'라는 학교측의 기본적인 책무를 저버리는 꼴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학교폭력을 끝까지 교육적 또는 선도 차원에서 접근해야지 범죄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스쿨폴리스가 대안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시범운영과정을 지켜볼 일이지만 과잉단속과 처벌위주의 학생인권침해, 교권 방해 소지에 대한 우려도 만만찮다. 전교조 부산지부 강병용(43) 정책실장은 "학교폭력의 척결을 위한 교육적인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지 스쿨폴리스를 둬 학생들을 감시.감독하고 단속하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려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스쿨폴리스제 도입과 관련한 학교와 경찰 간의 논의가 충분하지 않아 양 측간의 불협화음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금부터라도 공청회 등 다양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간 찬반논란도 가열되고 있는데 부산 K고 2년 김모(18)군은 "학교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학생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데 마치 전체 학생이 우범자인 것처럼 인식해 경찰을 학교에 상주시키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면서 "학교에 경찰을 상주시킨다고 해서 교묘하게 이뤄지는 폭력행위가 근절될지는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스쿨폴리스 도입에 이 같이 우려도 많지만 학교폭력의 심각성 때문에 유력한 대안으로 지적하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학부모들은 전적으로 환영하고 있다. 부산 G고교 김모(52) 교사는 "일선학교의 폭력은 이미 교사나 학부모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적이고 흉포하다"면서 "교권 침해 등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현재로서는 스쿨폴리스가 학교폭력을 줄이고 예방하는 유력한 대안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학부모 최모(37.여)씨는 "학교나 교사들이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스쿨폴리스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수의 여론은 스쿨폴리스가 유력한 대안으로 학교현장에서 환영받고 본래 취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공동운영주체인 부산지방경찰청과 부산시 교육청이 범죄단속이라는 측면보다는 대상이 학생들이며, 교육적 접근 원칙을 지켜야한다. 부산 H고 김모(45)교사는 "법적 근거에 맞게끔 처벌위주, 단속위주의 운영보다는 예방위주, 선도위주로 운영과 함께 가급적 학교측의 자율적이고 교육적인 대응을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 운영돼야만 스쿨폴리스가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산지방경찰청과 부산시 교육청은 초등 1개교와 중학교 3개교, 고등학교 3개교를 대상으로 3개월 가량 시범운영한 뒤 확대 시행할 계획이다. 부산지방경찰청 관계자는 "미국과 호주, 홍콩 등 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스쿨폴리스가 상당한 학내안정 효과를 거두고 있다'며 "시작부터 다소의 논란은 있지만 집단화, 흉포화, 성인범죄화 되고 있는 학교폭력을 근절하는데 스쿨폴리스가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남도교육청은 최근 불거진 위탁급식 업체의 급식비리와 관련, 직영 급식체제로 조기 전환 등을 골자로 한 급식비리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도교육청 조홍래 부교육감은 29일 오전 "최근 급식비리 문제가 야기된 데 대해 지도감독기관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 학부모와 도민에게 사과한다"며 "앞으로 이 같은 사례가 없도록 지도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밝혔다. 도교육청은 이에 따라 도내 104개의 위탁급식 학교 중 올해 15개교, 내년 51개교, 2007년 9개교, 2008년 21개교 등을 각각 직영으로 전환하려던 계획을 교육부 지원과 자체예산 투입으로 최대한 앞당겨 위탁급식 비리를 예방키로 했다. 이번 사건을 일으킨 위탁업체에 대해서는 급식계약을 해지하고 이 업체로부터 급식을 받은 학교는 빠른 시일 내 직영 급식체제로 전환하는 한편 다른 위탁급식업체와 간담회를 개최, 급식비리 예방과 학생 건강관리에 최선을 다 할 것을 주문할 계획이다. 특히 이번 급식비리와 관련, 공직자가 연루됐다면 철저히 조사해 책임 정도에 따라 엄벌하고 다른 위탁급식 학교에 대해서는 실태조사 점검 2개반(6명)을 구성해 이날부터 계약사항 위반 등 실태를 조사하고 비리혐의가 있으면 수사기관에 고발하는 등 엄정 대처할 방침이다. 이밖에 도교육청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위탁급식업체 선정, 식재료 검수시 신선도와 수량 유통기한 원산지 제조원 등의 확인 철저, 급식운영계획서와 급식물품 구입계획서에 대한 학교장의 지도감독 철저 등을 각급 학교에 전달토록 했다.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의심스러운 활동을 경찰에 신고하는 학생들에게 학교 당국이 최고 1천달러까지 상금을 지급하는 '미국 범죄 예방꾼 '(Crime Stoppers USA) 프로그램이 미국내 약 2천개 학교로 확산되면서 이런 일에까지 돈이 개입되는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도입된 것은 1983년이지만 최근 학생과 부모, 교사들의 관심이 교내 안전에 집중되면서 새삼 인기를 더해 가고 있다고 BBC 인터넷판이 29일 보도했다. 최근 총기를 난사한 16세 소년 자신을 비롯, 10명의 희생자를 낸 미네소타주 레드 레이크 고교 총기사건 이후 교내 폭력에 대한 공포가 또다시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과 학교들은 이 프로그램을 적극 두둔하고 있다. 최근 샌디에이고에 있는 스크립스 랜치 고등학교에서는 교내에서 모조품 기관총을 다른 학생에게 판 16세 소년이 다른 학생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무장 경찰관들에게 체포됐다.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이 가스추진 산탄총을 사고 판 두 소년은 범죄를 저지를 뜻은 없었고 총을 산 소년은 인근 골짜기에서 작은 사냥감을 찾으려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신고한 학생은 최고 1천달러의 상금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보상에 대한 세간의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범죄 예방꾼' 프로그램의 밀리 디앤더 회장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학생들이 아니라면 교내에 총기나 칼, 마약 등이 반입되는 지 여부를 알 길이 없다"면서 "제일 먼저 아는 것은 학생들"이라고 강조했다. 레드 레이크 고교 사건이 일어난 후 경찰 수사의 초점은 범인인 제프 웨이스의 범행 전 의논 상대였던 루이스 저데인에게 맞춰졌다. 그는 웨이스의 공격 계획을 들으면서도 그가 정말로 범행을 할 줄은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사건 후 레드 레이크 고교 학생들과 상담한 미네소타대학 교육심리학 교수 케이 허팅 월은 "학생들은 대부분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들은 것을 믿지도 않는다. 더구나 일종의 공동체 의식과 고자질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상금 유무에 관계없이 무기나 마약거래 등 심각한 사건은 신고하겠지만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이들의 판단은 때로 이상하게 꼬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학교 관할 경찰 관계자들도 "학생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밀고자로 찍힐 것이 두려워 입을 열지 않으려고 한다"며 "학생들은 익명으로 신고하고 익명을 유지할 수도 있는 만큼 학교의 안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일이 있으면 바로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