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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기원전 221년 시황제의 통일 진제국은 이후 중국 역대왕조의 기틀이 되었으나 결국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전란에 시달려왔던 중국인들은 이번에는 전쟁의 고통 대신 급진적인 국정운영과 사상통제, 각종 노동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군주 한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외교력'이다. 만약 분쟁이 있을 때마다 무력만을 앞세운다면 비록 승리한다 해도 자국의 아까운 생명과 국가재산을 소모하여 자칫 망국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돈 한 푼 안들이고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도랑 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돈 줍는 셈이 아닌가? 소진(蘇秦)이 합종책(合從策)을 들고 나와 여섯 나라가 연합하여 북방 오랑캐 나라인 진나라를 고립시키려고 하자(한족 제후국의 입장에서), 진나라는 북방 유목민 특유의 탁월한 정보 수집과 분석력을 발휘하여 장의(張儀)를 발탁, 연횡책(連橫策)을 씀으로써 '진나라 말려 죽이기 작전'을 허사로 돌려놓는데 성공하였다. 즉 다른 여섯 나라 책사들의 술책이 진나라의 정보력을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진나라의 특징은 '존왕양이'의 이념을 전통으로 하는 제후국이 아니라, 서쪽 변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국력을 키운 흉노 계열의 '자주성가형 국가'였다. 다시 말해서 정통중화를 표방하는 나라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말이다. 진나라 제31대왕으로 즉위한 정(政)은 부왕인 장양왕(莊襄王)의 뒤를 이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일찍부터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섭정을 맡고 있던 재상 여불위(呂不韋)를 제거하고 말았다. 여불위는 원래 대상인(大商人)으로서 정의 부왕인 장양왕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구해준 인연으로 재상이 된 인물이었고 자신의 첩을 장양왕의 소실로 들여보내 자신의 핏줄로 하여금 진나라의 왕통을 이어가게 하였다. 쉽게 말하면 정의 생부가 사실은 여불위였다는 말이다. 이렇게 여불위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정(政)은 과감하게 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16년간에 걸쳐 여섯 나라를 차례차례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였다. 오랑캐가 이룬 중화의 기본 틀 진왕 정(政)은 춘추·전국이라는 복잡한 정치국면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함으로써 역설적인 말이지만 오랑캐(?)에 의한 한족(漢族)과 중화(中華)라는 이데올로기를 확립하였다. 다시 말해서 전국 칠웅이 패권을 다투던 지역이 통일제국이 됨으로써 '중국의 영역이 물리적으로 지정되어'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실체가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함으로써 중국 민족사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춘추시대에는 남방 오랑캐인 초나라가 중국에 편입되었고, 전국시대에는 서쪽의 변방에서 발흥한 진나라가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서부지역의 이민족도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편입되었지만, 이후의 중국은 중원의 한족 문화권과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으로 재편되었으며 양 문화권 간의 기나긴 충돌과 마찰이 시작되었다. 진왕은 중국을 통일하자 고민이 생겼다. 자신에 대한 호칭문제였다.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기존 여섯 나라 왕들을 낮추어 공(公)이라고 하자니 반발할 것이 뻔하고 그냥 두자니 똑같은 왕이니 체통에 문제가 있어 왕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서 임금 황(皇), 임금 제(帝)(= 곱빼기 임금), 즉 황제라 칭하고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시키고 화폐를 정비·통일하였는데, 이미 도량형과 문자, 화폐의 통일은 기나긴 분열시대와 전란시대를 거치는 동안 각국의 교류가 활발하였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또한 자신의 명령이 중앙은 물론 지방의 최말단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서 강력한 독재적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효율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담당할 행정기구를 설치하였다.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각기 군수·군위·군감이 관장토록 하였으며 중앙에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승상, 국방장관격인 태위, 검찰총장격인 어사대부로 구성되는 3공(三公)과 각 부서 장관에 해당하는 9경(九卿)을 두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시황제는 너무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매사를 챙기는 스타일의 통치형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황명이 제대로 집행이 되고 있는지 수시로 제국을 순회하면서 시시콜콜 점검하고 다녔다. 그 바람에 일선 관리나 백성들이 죽어났다. 일찍이 진나라는 상앙을 발탁하여 법가사상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철저한 사상통제를 함으로써 국민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국을 통일하고 보니 모자이크 국가가 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얌전하게 복종하고 있던 진나라 백성들도 물이 들 우려가 있어 법가사상을 더욱 강화하였고 그 책임자로 재상 이사(李斯)를 임명하였다. 시황제는 무리수, 아니 악수를 두기 시작했다. '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460여 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용서와 진기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살라버려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시황제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왜냐하면 비록 중원 물을 마신지 오래되지만, 원래 출신이 흉노계열이라 북방에 둥지를 틀고 있는 저들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위한 대 역사에 들어갔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시대에 완성된 것이며 길이 약 2400㎞, 높이 6~8m, 두께 4.5m이다. 그러나 정작 진나라 백성들은 흉노보다는 무자비한 노동착취가 더 무서웠다. 시황제의 열의는 대단했지만 너무 서둘렀다. 그렇지 않아도 망해버린 한족의 여섯 나라 백성들은 그를 자신들의 황제로 인정하지도 않고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민심을 달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는 격언만 알았지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아예 모르고 있었거나 잊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시황제는 안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신만을 위한 역사에도 백성들을 동원하여 고생을 시켰다. 호화로운 아방궁과 자신이 죽어서 묻힐 여산능 등,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각종 건설 사업을 벌였다. 비록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이 시황제가 남긴 여산능의 병마총과 만리장성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여 한몫 단단히 챙기고는 있지만 말이다. 백성들은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백성들의 천지개벽을 원하는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고, 실제로 연나라 출신의 형가(荊軻)가 시황제를 암살하려고 하였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제국을 순시 하다가 병으로 급사하고 권력의 공백기가 생기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백성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또 그 권력이 막강하면 막강할수록 그 권력자의 빈자리 때문에 한동안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 진의 멸망 불러온 농민반란 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趙高)가 승상 이사와 음모를 꾸며 시황제의 큰아들 부소(扶蘇)를 죽이고 막내아들 호해(胡亥 : 재위 BC 209~207)를 옹립하여 2대 황제로 추대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조고는 시황제의 철권통치를 한층 업그레이드하여 무자비한 잔혹정치를 폈다. 백성들은 싸우다가 죽던가, 아니면 무자비한 통치에 고생만 하다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처음에는 농민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지식인들이 이에 합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최초의 반란은 시황제의 사후 기원전 209년에 일어났다. 주동자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 하여 일명 '진승·오광의 난'이라 하는데, 그들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들은 농민들이 각지에서 합세하여 점차 세력이 커져 혁명군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황하 이남의 수십 개 성을 점령하고 세력을 떨쳤다. 진승은 처음에는 장군을 칭하다가 나중에는 '진나라 타도'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면서 옛 강국이었던 초(楚)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陳王). 진나라 장수 장감(章邯)은 기원전 208년, 대대적인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사직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것이니 만큼 조정으로서도 총력전을 폈다. 정규군을 농민군이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농민군은 거병한 지 6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결국 진의 멸망 그리고 유방과 항우의 패권다툼으로 이어지는 신호탄이 되었다. 유방 승리의 비결은 민심잡기 기원전 208년 장감(章邯)이 농민군을 진압하고 개선하였으나 이번에는 통일 이전 6국 세력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자칫하면 옛날의 전국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당시 환관 조고의 포악한 성격은 극에 달해 있었다. 승상 이사를 숙청하더니 이제는 황제 호해도 마음에 들지 않아 부덕한 황제를 폐하여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호해를 용상에서 내몰아 버리고 그 자리에 자영을 앉혔다. 한편, 초나라의 귀족출신이었던 항량(項梁)은 진승·오광의 군대가 거병하자, 경포의 군대와 합세하여 전선을 구축하고 초나라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으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장감(章邯)의 진압군에 패하고 항량이 전사하자, 그의 조카인 항우가 전권을 이어받아 유방(劉邦)과 연합하여 거록(鉅鹿)에서 장감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후 진 황제 자영은 국사를 농단한 환관 조고를 죽이고 국세회복을 꾀하였으나 민심이 떠난 사직을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어 결국 기원전 206년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의 사직은 3대 1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한편, 항우는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칭했으며 거사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의제(義帝)를 시해하자, 유방이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유방은 원래 강소성(江蘇省) 풍읍의 하급 관리(농민출신)였으며 처음 거병할 당시에는 그 세가 약했으나 항우가 거두어 자신의 휘하에 두었던 것이다. 출신성분이나 무력, 무공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유방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항우와 유방은 전우였지만, 적이 사라진 마당에 한쪽은 반드시 도태되어야 했다. 항우의 입장에서 본다면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었고 게다가 진의 황제(자영)가 유방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홍문(鴻門)의 위기를 벗어난 유방은 장량(張良)을 책사, 전략에는 한신(韓信), 정치와 행정에는 소하(蕭何)를 배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니 항우는 결국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내몰리고 말았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 氣蓋世)의 힘과 무용을 떨치던 초패왕 항우는 민심을 잡는데 실패하였다. 항우의 군대가 입성하면 백성들은 달아나기에 바빴으나 유방의 군대가 오면 수고한다고 물이라도 떠왔다. 초나라 병사들이 속속 대열을 이탈하자, 이내 항우는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몇몇 장수를 데리고 전전긍긍하다가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漢)과 초(楚)가 천하를 두고 다투는 장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곳곳에서 내기장기를 두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짧지만 굵게(?) 살다간 진(秦)은 서양에 'China'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국의 국가명이 되었다.
연세대학교 법대 대학원이 학생선발 과정에서 대학별 등급제를 시행한 것으로 드러나 비난을 받은데 이어 전형점수를 놓고 조작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법대 대학원 전형에서 탈락한 이가 '점수 조작'을 주장하며 교육부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학교측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조작설을 일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연대 법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지원했다 탈락한 A(61)씨는 28일 전형 당시 연대 법과대학 학장과 학과장이 성적환산점수(100점)와 토플환산점수(100점)를 합산ㆍ평가하는 서류전형에서 임의로 성적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대학원 2005학년도 1ㆍ2학기 입학 서류심사표를 증거로 제시하며 163점을 받은 모 지방대 출신 지원자는 떨어뜨리고 119점을 받은 연세대 출신은 합격시켰으며 아예 일부 지원자의 성적을 조작해 대학원 본부에 제출하기도 했다고 항의했다. A씨는 또 학장과 학과장의 요구에 따라 1천만원의 기금을 학교에 내고 식사비용도 부담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당시 법과대학원 소속인 B교수는 "점수를 조작한 것이 아니라 대학원 입학전형요강에 명시돼 있듯이 학업계획서와 진학동기 등 다른 요소를 감안해 점수를 가감했을 뿐"이라며 "대학원 전형시 학업계획서를 모두 제출하도록 돼 있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B교수는 "연세대 법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A씨가 자발적으로 기금을 내겠다고 해서 받았을 뿐 먼저 요청하거나 대가성이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고 강조했다. 백태승 현 법과대학 학장은 "서류심사에서 일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자체 조사를 통해 문제점이 명확히 파악되면 조속히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교육부는 A(61)씨가 최근 '연세대 대학원 석ㆍ박사과정 입학 전형 비리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진정서를 접수함에 따라 진상을 조사 중이라고 밝혀 조작논란은 교육부 조사결과가 나와야 진위가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교육혁신위원회가 28일 전주에서 연 '교원정책 혁신방안 토론회'에서는 교장선출제 도입 여부를 놓고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전북 전주시 교육정보과학원에서 학부모와 일선 교사, 사회단체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진안중학교 김종진 교장은 "교장선출 보직제는 학교행정의 전문성을 확보할 수 없고 책무성이 약화되는 문제점을 낳을 수 있다"며 "현행 교장 자격증 제도를 유지하면서 자격요건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북대 박세훈 교수도 "교장의 자격증 제도를 강화하되 제한적 공모제를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현행 제도를 부분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광삼 변호사는 "현행 교장 자격증 제도 하에서 효율적으로 교장 연수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익산교육시민연대 양민숙 사무국장은 "교장의 자격증 제도를 폐지하고 공모제를 실시하되 농어촌 벽지학교 등 공모 신청자가 없는 경우 초빙이나 파견제를 도입해야 한다"며 선출제에 찬성했다. 전주여고 정찬흥 교사도 "학교 구성원에 대해 민주적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교장으로 임용하기 위해 교장 선출 보직제를 도입해야 한다"며 "교장의 자격 요건을 10년 정도로 완화하고 교장 자격증 제도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야기하기 힘든가 보구나.(정서 되돌려주기) 그럼 선생님이 한번 이야기해볼까?/ 네./ 음~ 선생님은 지영이가 상담을 받는 이유가 지난번 지영이 학급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 때문인 것 같은데…지영이는 어떻게 생각해?/ ……침묵/ 대답이 없다는 것은 선생님 말이 맞다는 뜻이니?(해석)/ 네에. 맞아요./ 자, 그럼 지영이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야 지영이가 상담받기를 참 잘했구나하는 생각이들까?(화제 바꾸기)……" 이 대화는 도벽이 있는 학생과 교사의 상담사례로 실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현한 것이다. ‘초등학교 현장 상담대화기법’(학지사)은 이렇듯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일어나는 다양한 대화 상황을 채집, 이를 대본 원고로 정리하고, 배우 역할을 할 학생을 섭외해 연기를 지도, 2장의 CD로 제작했다. 청주교대 교육대학원 상담 교육과 1~3기 이석두 충북 영동 영동초 교사 등 40여 명의 교사들이 4년간 사례 채집에 참여했으며 대본은 침묵, 명료화, 내용 되돌리기, 요약, 정서 되돌리기, 저항다루기, 즉시성, 화제 바꾸기, 구체화, 직면, 정보제공, 자기 개방, 해석 등 14개의 상담대화기법별로 구성했다. 또 각 기법마다 두 개의 모의 상담 장면 과 다섯 가지 연습상황이 들어있어 자연스럽게 상담대화기법을 익히도록 했다. CD제작을 총괄한 박성희 청주교대 교수는 “아동과 하루 종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초등 담임교사는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아동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교육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며 “이 CD에 나온 방식을 참고해 아동과 대화하고 상담한다면 교육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의 교육부가 발표한 저소득층 자녀를 대상으로 한 방과 후 프로그램에 대한 기사를 관심있게 읽었다. 호주에도 이와 유사한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양국 간의 '방과 후 학교'에 대한 모습과 내용을 비견해 볼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호주 교육부는 지난 2005년 2월 첫 학기부터 전국의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수업을 마친 후 별도의 스포츠 시간을 마련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현재 1400개 학교가 참가중이며, 2007년까지 3250개 학교를 목표로 계획을 추진 중이다. 호주의 방과 후 프로그램이 신체 활동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이유는 호주의 아동 비만율이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5년 이후 비만아 비율이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해 2005년에는 2세 이상~10대 청소년 4명 중 1명이 비만 또는 과체중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다. 18세 미만 비만인구는 150만 명에 이른다. 이대로 간다면 2020년에는 성인의 80%, 어린이와 청소년의 3분의 1이 과체중 상태가 될 것이며 2025년에는 18세 미만 인구 절반이 비만화 된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호주 정부는 "일상 생활과 식습관 변화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이 사회적 차원에서 마련되지 않는다면 비만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결국에는 호주 사회 전체를 망가뜨리고 말 것"이라는 우려 하에 총 1억160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어린이 비만 바로잡기 4주년 계획에 돌입했다. 저지방 고야채식 위주의 식습관 개선과 스포츠 활동 강화를 양대 축으로 하는 호주의 어린이 비만관리 대책의 일환으로 '방과후 스포츠 학교' 가 탄생한 것이다. 호주 어린이들은 방과 후면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 채팅, 휴대전화로 문자메세지 보내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느라 대부분 집안에 틀어박혀 좀체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난 달 호주 언론은 인터넷 채팅과 휴대전화 문자 보내기로 학생들이 만성 수면 부족상태에 있다고 보도하며, 이로 인해 가중된 피로와 집중력 저하, 운동능력 부족 등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전했다. 게다가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어린이들의 신체 활동 시간이 이래저래 줄고 있다. 일을 하는 부모들일수록 교통사고나 유괴 등을 염려하여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방과 후면 자녀들이 가급적 집안에서 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01년 호주 인구조사국의 통계에 의하면 15세 미만 자녀를 둔 가정의 43%가 맞벌이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들의 자녀들이 햄버거나 피자 등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집안에만 있다보니 맞벌이 가정의 증가가 아동비만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무직자나 홀부모 가정, 저소득층 등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가정의 어린이들일수록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다. 바깥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자연스레 운동을 하던 예전과 달리 현대 사회는 축구, 농구, 럭비 등 어린이들의 스포츠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자녀들의 운동량 부족은 곧 부모들의 경제사정과 비례한다는 지적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의 '방과 후 스포츠 학교'는 고비용의 사설 클럽 위주로 짜여진 어린이들의 스포츠 활동을 학교로 끌어들여 학내에서 스포츠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저소득층 자녀들과 맞벌이 자녀들에게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 제공 취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방과 후 3시 부터 5시 반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각급 학교 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스포츠 단체, 맞벌이 가정의 자녀들을 저녁 때까지 돌봐주는 탁아기관과 연계되어 진행된다. 학생들은 별도의 가입비 없이 무상으로 각종 구기종목을 배울 수 있으며, 게임위주로 짜여진 흥미있는 프로그램에도 참가할 수 있다. 방과 후 학교는 그 분야의 스포츠 전문가들을 담당 지도교사로 구성하고, 1년 이상 아이들과 활동 해 온 경험이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보다 큰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인기 스포츠 스타나 유명 연예인들이 이따금 도우미로 학교를 방문하여 독려하는 기회도 마련하고 있다. 한편 호주 교육부는 이와는 별도로 호주의 모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1일 1시간씩 밖에서 여가 시간 보내기' 캠페인을 전개 중이다. 푹신한 소파와 컴퓨터에 붙박힌 듯 달라붙은 채 인스턴트 식품을 끊임없이 먹어대는 어린이들을 앉아있는 의자채로 들어 농구대와 수영장으로 밀어넣는 장면 등 우스꽝스런 연출로 메세지를 전달하는 정부 공익광고가 어린이들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대면 수차례 전파를 타고 있다. 어린이 비만을 지금 잡지 못하면 국민들의 정상체중 회복 기간은 5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우려에 힘입어 어린이가 병들면 국가의 미래도 없다는 결의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상태이다.
요즘 김진표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의 발언 (2006.2.13, ‘전문직은 교육만 알고 능력이 부족하다’ 제목 참조)에 대한 비판 댓글과 e-리포터들의 비판(2006.2.26, 서종훈 리포터 외)들이 쇄도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비판 의견에 대하여 견해를 달리하여 이렇게 글을 쓰고자 한다. 교육전문가를 많이 증원(배정)해야 교육개혁이 이루어 지는가? 일단 위와 같은 물음처럼 ‘교육전문가 증원(주요직위 보임) = 교육 개혁 성공’이라는 공식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똑같은 논리로 ‘일반행정전문가 증원(주요직위 보임) = 교육 개혁 성공’이라는 공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교육전문직이라 해서 능력이 모자라고 일반행정직이라 하여 능력이 출중하지도 않는다. 그 반대도 그렇다. 이에 대한 실례를 들어보자. 행정학에서 쓰는 용어로 ‘대표관료제’라는 것이 있다. 이는 임용할당제(Employment quota system)등을 통해 관료제와 국민 사이의 사회경제적 성격이 서로 일치하면 할수록 정책의 대응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기본적 전제로 하고 있으며, 배경적 대표성이 태도적 대표성으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실질적 대표성을 낳는다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대표관료제는 관료들이 출신집단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을 기대하는 적극적 대표와 사회의 인구 구성적 특징을 단지 상징적으로 반영할 뿐이라는 소극적 대표로 구분할 수 있다. 관료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사회전체의 것을 반영하는 정도는 소극적 대표성을 의미한다. (인터넷 다음에서 인용함) 위와 같이 사례를 든 이유는 대표관료제가 만능이냐는 것이다. 즉, 단지 교육전문직(교사출신 전문직이던 교장출신이던 간에) 출신을 교육부나 교육청 주요직위에 보직한다하여 교육현장의 소리를 100% 반영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물론 대표관료제가 수동적·능동적 대표성의 확보하고 조직의 대응성이 빨라지며, 관료제의 내부적 통제와 진보적 평등 이념의 실현에 기여 하는 등의 장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반대로 행정의 전문성과 생산성의 저하, 역차별의 우려(능력 있는 교육 비전문가가 임용되지 못하는 경우), 경험적 입증과 인사의 어려움, 행정 책임성 확보의 불확실 등의 단점이 있다. 미국에서 대표관료제를 채택하여 소수자인 흑인과 남미계 사람들을 공무원에 임용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이 같은 인종인 흑인과 남미계를 차별하고 무시한 사례는 대표관료제의 단점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인 것이다. 비단 이러한 사례는 멀리 미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과거를 봐도 드러난다. 과거에 교육부 수장을 자칭타칭 교육전문가라 불리운 교수출신을 임용했을 때에도 현재와 같은 교육의 어지러운 문제가 말끔히 해결 되었었는지 반문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교육부 수장을 교육전문가가 하던 비전문가가 하던간에 교육에 대한 올바른 철학이 확립된 사람이 올바른 사회 제도의 뒷받침과 국민의 성원 아래 교육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교육전문가더라도 교육철학이 잘못 서 있는 사람이 수장이 된다면 그 조직은 어찌될 것인가? 대부분의 국민은 장관이 어떤 출신이건 간에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그리고 국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현재 김진표 장관이 과연 그러한 인물평을 받는가에 대해서는 평가를 하지 않겠다. 필자가 세운 기준과 일선학교 교원 및 교육전문직들, 국민들이 세운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경제관료 출신을 교육부 수장으로 세워 효율성을 중시하는 행정을 하는것에 대해 찬성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교육부 중요보직을 전문직으로 보하였는가 일반직으로 보하였는가가 교육정책의 핵심은 아닐터이다. 우리 교직원의 눈으로 보면 심히 불평등하고 교육전문직을 홀대하는 듯 보이겠지만 제3자인 국민의 눈으로 보면 자기들끼리 단순한 밥그릇 싸움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누가 하던간에 올바른 교육정책을 실현해주면 되는 것으로 바랄 뿐이다. e-리포터들의 순수하고 좋은 의도가 자칫 변질되어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좋은 경우라면 교육에 대해 전문가이면서도 교육철학이 올바로 서있는 불편부당한 사람이 교육부 수장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19세기 말이래 계속된 간도논란은 영토 아닌 조선족 때문 만주국 설립된 1930년대에도 간도의 조선인 비중은 80% 간도협약 사실상 무효, 조·중 국경조약으로 영토문제 일단락 조선인 정체성 문제는 조선족 문제로 이어져 ‘현재 진행형’ 2004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한 카드로 ‘간도 되찾기’와 ‘간도협약 무효’가 제기되고 온라인에서도 간도문제가 이슈로 부각되면서 갑자기 간도는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땅’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간도협약 무효’로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간도가 단군 이래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지배한 땅이고, 17세기부터 주인 없는 땅으로 남아 있던 것을 19세기 후반 우리 민족이 이주해 개간해 왔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간도를 일본이 무력으로 강탈한 외교권을 빌미로 청국에게 넘긴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간도 되찾기’ 주장은 간도의 역사에 맹목적이고 간도에 대한 다른 견해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위험할 뿐 아니라 간도가 가진 영토문제 측면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간도의 진정한 의미를 은폐하고 있다. 사실 19세기 말 이후 간도가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현재의 조선족) 때문이었다. 2000년대 들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비중이 40% 밑으로 떨어지면서 그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었지만 이주 초기 이래 간도는 영토 귀속과 무관하게 ‘조선인의 간도’로 불렸다. 1915년 당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28만 명 가운데 70%가 넘는 20만 명이 간도에 살고 있었고, 간도 인구 중 조선인의 비중이 80%를 상회했다. 만주국이 설립된 1930년대에도 조선인의 비중은 80% 정도를 유지했다. 간도가 중국의 영토이든 일본의 영토이든 영토의 소속과 주민의 불일치는 간도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다. 또한 간도문제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 만주 침략의 일환으로 제기되었고, 간도 조선인은 만주 침략의 구실이 되었다. 러일전쟁으로 뤄순(旅順)과 다렌(大連)을 점령하고 러시아가 부설한 동청철도를 획득해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 일본은 제2의 러일전쟁과 조선 방어를 위해 간도의 전략적 중요성에 주목했다. 이미 러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조·청 국경교섭에 개입하였던 일본은 1906년 11월 박제순 참정대신이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보호’를 요청한 것을 구실로 일본군의 간도 파병을 결정했다. 청국, 러시아와의 마찰을 피해 1907년 8월 용정촌(龍井村)에 개설한 통감부간도파출소는 청국 관헌들의 폭압에 시달리던 간도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간도 점령의 첫 발을 내디뎠다. 1909년 9월 ‘간도협약’ 체결로 간도는 청국에 귀속되었지만 일본영사관의 영향력 확대와 친일세력 부식을 위한 각종 제도와 시설들이 조선인 ‘구제’라는 명목 아래 진행되었으며,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중국관헌과 마적에게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는 조선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 역시 일본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화기 위한 것이었다. 간도로 이주하는 조선인의 모습, 출처미상. 간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간도는 ‘조선인의 간도’ 역사이자 간도 조선인을 둘러싸고 조선, 청, 일본이 각축을 벌인 역사였다. ‘간도’라는 용어는 1885년 조·청 국경회담을 마치고 조선측 대표 이중하가 고종에게 올린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1877년 종성과 온성 사이 두만강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작은 땅을 주민들이 개간하고 이를 ‘간도’(間島)라고 불렀으며, 그후 종성, 회령, 무산, 온성 4읍의 주민들이 점차 두만강 맞은편의 개간지를 확대해나감에 따라 이를 통칭해서 간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1930년대에 간행된 윤정희의 ‘간도개척사’에 따르면 1880년 회령부사 홍남주가 기근의 구제책으로 두만강 맞은편의 토지를 개간하게 하고 이를 ‘간도’라 부르도록 했다. 처음 개간한 땅은 회령 서쪽 25리 되는 평야 100여 정보에 불과했으나 다음 해에는 길이 500리, 폭 40~50리에 달하였다고 한다. 1880년대 조·청 국경회담도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조선인들의 호소가 계기가 되었다. 청국이 들어선 이후 인삼과 약재를 캐거나 사냥을 하기 위하여 몰래 두만강을 넘나들기 시작한 조선인은 1860년대 연이은 대흉작과 전염병으로 대거 두만강을 넘었으며 집단 촌락을 형성했다. 1881년 만주를 개방하고 만주 개척을 시작한 청 정부는 처음에는 조선인들의 이주와 개간을 묵인하였으나 점차 청국의 풍습에 따르고 귀화할 것을 강요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쫓아내겠다고 위협했다.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이 국경이라고 생각하던 간도 조선인들은 청국의 일방적인 철수 명령에 반발,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호소했으며, 당시 종성에 머무르고 있던 서북경략사 어윤중이 정식으로 청국에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친 국경회담이 열리게 됐다. 그러나 국경회담이 양쪽의 대립으로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러일전쟁 직후 일본이 간도문제에 개입하면서 조선과 청 사이의 영토분쟁은 일본과 청 사이의 영토분쟁으로 전환되었다. 간도 조선인을 발판으로 만주 진출을 노리는 일본은 두만강 맞은편의 개간지를 가리키던 간도를 남만주 일대로 확대하고 간도가 청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리고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중심으로 새로운 행정조직을 갖추어 청국의 통치를 부정하고 조선인에 대한 조세권과 재판권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청국은 이에 대항해 통치조직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조선인의 이주와 토지소유를 금지, 통감부간도파출소의 활동을 저지하고자 했다. 간도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청·일의 국경분쟁으로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만주 이권과 조선인 관할권을 둘러싼 청·일의 각축이었으며, 결국 일본이 만주 이권(철도와 탄광)을 획득하고 조선인 관할권(재판권과 경찰권)을 청에게 넘겨주는 ‘간도협약’이 성립됐다. ‘간도협약’에서 규정한 한인 잡거구역. 붉은 색 표시부분이 조선인의 주거 및 토지소유가 합법화된 지역. 통감부간도파출소(1907~09)제작. ‘간도협약’으로 간도는 청국으로 귀속되고 조선인의 거주·이동 및 토지소유가 합법화되었으나 조선인을 둘러싼 청·일의 각축은 수면 아래에서 계속됐다.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일본영사관의 입회권(立會權: 일본영사가 재판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지조권(知照權: 중요한 재판의 경우 일본영사에게 알릴 의무)·복심청구권(覆審請求權: 부당한 판결에 대하여 일본영사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을 통해 조선인 통치에 개입하였으며, 상부지(商埠地: 외국인의 거주와 무역을 위하여 개방한 지역)에 설치된 일본영사관의 영향력 아래로 조선인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청국도 조선인의 거주를 잡거구역(雜居區域) 내로 제한하고 잡거구역 내에서도 귀화한 조선인에 한하여 토지소유를 허락하는 한편 조선인의 귀화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한 열강의 힘의 공백을 틈타 독일의 조차지인 청도(靑島)를 점령하여 중국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본은 21개조 요구를 중국에 제출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을 식민지화하고자 했다. 1915년 5월 21개조 중 하나인 ‘만몽조약’(남만주 및 동부내몽고에 관한 조약) 체결로 수면 아래로 내려가 있던 간도 조선인을 둘러싼 중·일의 각축이 다시 표면화되었다. ‘만몽조약’은 남만주 및 동부내몽고 지역에서 일본인의 토지상조권(土地商租權: 계약에 의하여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과 영사재판권을 규정한 것인데, 간도 조선인에게 토지상조권과 영사재판권의 적용 여부, 나아가 ‘간도협약’의 존폐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일본은 조선병합으로 조선인은 모두 일본인이 되었기 때문에 ‘간도협약’은 무효이고, ‘만몽조약’의 토지상조권과 영사재판권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에게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중국은 ‘간도협약’이 ‘특정지역’과 ‘특정인’에 대한 조약이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간도협약’이 불안정하게 되자 조선인의 지위 또한 불안정하게 되었으며, 이를 둘러싼 중·일의 각축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은 영사관 경찰을 늘려 ‘불령선인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학교, 병원, 금융기관을 설립하여 조선인 회유에 나섰고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를 조직하여 일본 세력을 부식시켜 나갔다. 중국도 이에 대항하여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의 토지소유를 단속하고 조선인민회의 해산을 촉구하는 한편 귀화절차를 간소화하여 조선인들의 귀화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조선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중국으로의 영토 귀속과 중·일의 계속되는 각축 속에서도 간도 조선인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1890년대 초 2만 여명에 불과하던 간도 조선인은 1907년에 7만 여명, 1910년에는 10만 여명, 1914년에 18만 여명으로 크게 늘어났으며, 1926년에는 35만 여명에 달하였다. 출신지는 간도와 인접한 함경북도 출신이 가장 많았고, 농사를 지으러 가족들을 동반하고 이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10년 이전에는 간도 남부 지역, 두만강 맞은편으로 이주하였으나 개간지가 부족하자 1910년 이후에는 간도 북부 지역, 국자가(局子街: 지금의 연변) 이북 지역으로 이주했다. 1930년대의 정책적 만주 이민에 따른 조선인 인구 증가를 제외하면 1910년대 초반에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이 가장 많았는데, 생활난에 따른 이주가 가장 많다고 조사되었다. 자연재해, 관리의 학정, 일제의 식민정책 등 다양한 원인들에 의하여 생활난이 가중되었고, 많은 조선인들이 개간할 땅이 많고 토지가격도 싸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면 토지를 소유할 가능성이 있는 간도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주한 조선인의 2/3 이상이 중국인 지주의 소작인이 되어 궁핍한 삶을 꾸려가야 했으며, 중국과 일본의 반복되는 회유와 통제, 중국관헌의 가렴주구와 마적의 횡포 속에서 수시로 생명과 재산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중국으로 귀화하는 조선인은 그리 많지 않아서 1930년이 되어서도 조선인의 귀화율은 14% 정도에 머물렀다. 간도의 역사가 드러내는 것, 즉 간도가 ‘조선인의 간도’라는 사실은 자극적인 영토문제 보다도 이국땅에서 어려운 삶을 꾸려가야 했던 조선인의 삶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간도 영토문제가 어제의 문제라면 간도 조선인의 삶과 정체성 문제는 오늘의 문제이다. 일본의 패전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으로 ‘간도협약’은 사실상 무효가 되고 1962년 조·중 국경조약으로 새로운 국경선이 확정되어 영토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간도 조선인의 삶과 정체성 문제는 오늘까지 조선족의 삶과 정체성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신냉전의 조짐이 보이는 지금, 동북아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 눈길을 돌려야 할 곳은 조선인·중국인·일본인이 대립, 공존했던 만주이며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해야 했던 간도 조선인의 삶이다. 필자소개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배성준 연구위원 * 다음 회는 윤휘탁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의 ‘동북공정, 중국의 동북아전략인가?’ 입니다.
2월 봄방학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위해 한걸음 다가서고 있다. 그동안 학교에서는 졸업식이 있었고, 이와 함께 새로운 식구(학생과 교사)를 맞이하였다. 입학식은 안했지만 이미 각 학교에는 최소한 졸업생의 자리를 메워줄 신입생 배정이 끝났다. 2월의 실질적인 수업일수는 1주일 남짓, 그런데도 1년 중 가장 빠르게 지나는 시기가 바로 2월이다. 다른 달보다 2-3일정도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달은 1년중 유일하다는 생각이다. 학부모들은 졸업식, 입학식때가 되면 그냥 학교를 방문하는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각 학교의 교원들은 그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보통 2월의 졸업식 준비를 위해 겨울방학에 돌입하기 이전에 여러가지 점검을 하고 실질적인 준비작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나머지 세부적인 준비를 위해 학교에 출근을 하게 된다. 물론 100%의 교사들이 모두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교원들이 맡은업무처리를 위해 출근하게 된다. 그러다가 2월 개학이 되면 1주일 남짓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졸업식을 마치게 되면 신입생의 배정을 받게 되고, 전·출입 하는 교사의 이동문제로 학교는 어수선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신입생과 새로 전입하는 교사가 결정되면 그때부터는 매일같이 회의를 소집하면서 새학기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이때는 거의 모든 교사가 나서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새학기 준비를 위한 각종 위원회에 단 한개라도 참가하지 않는 교사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학교를 보면 학교에 위원회가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이다. 업무분장, 담임배정, 교육과정 편성, 학교교육계획 수립에 예산심의를 위한 예산소위원회, 학교운영위원회, 교복공동구매 위원회, 인사자문위원회 등 실로 모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2월은 방학이지만 학생들이 학교에 나올 때보다 도리어 더 바쁘게 지내는 달이다. 그렇기 때문에 1년중 가장 빠르게 지나가는 모양이다. 그래도 교사들은 기쁘다. 새롭게 시작되는 새학기에 새로운 학생들과 새롭게 생활하는 그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사들, 그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의 앞날은 밝다는 확신을 해본다. 미래의 희망은 학생들이지만 교육의 희망은 교원인 것이다.
경기도 교육청이 수업료를 제때 내지 않은 학생을 출석정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조례 제정을 추진해 학부모단체 등 각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27일 도 교육청에 따르면 도 교육위원회는 지난 22일 회의를 열고 도 교육청이 상정한 '경기도 학교 수업료 및 입학금에 관한 조례안'을 찬반 논쟁끝에 가결했다. 이 조례안에는 '학교장은 수업료를 징수기일로부터 2개월 이상 내지 않는 학생에 대해 출석정지처분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교육위원회 조례안 심의과정에서는 위원들 사이에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처사'라는 의견과 '수업료 미납에 대한 제재근거를 두지 않을 경우 교육예산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의견이 맞섰으나 조례안은 결국 표결을 통해 가결됐다. 도 교육청은 최근 교육인적자원부가 초.중등 교육법을 개정하면서 초.중.고교의 수업료와 입학금에 관한 사항을 시.도교육감이 조례로 정하도록 위임함에 따라 이같은 조례 제정을 추진중이다. 도 교육위원회를 통과한 조례안은 조만간 도의회에 상정돼 심의를 거쳐 공포, 시행된다. 도 교육청 관계자는 조례안의 '출석정지' 조항에 대해 "수업료는 교육특별회계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수업료 미납에 대해 최소한의 벌칙은 두자는 의미"라며 "그러나 이 조례안이 시행되더라도 출석정지를 모든 미납학생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거나 남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수업료 미납자에 대한 출석정지 처분 조항은 기존 교육부령 '학교수업료 및 등록금에 관한 규칙'에 들어 있는 내용"이라며 "도 조례안은 이 규칙 조항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그는 "납부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업료를 납부하지 않는 경우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성실하게 수업료를 납부하는 학생과 비교할 때 형평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경기지부는 26일 성명서를 통해 "도 교육청이 수업료 미납학생에 대해 출석정지를 시키기 위한 조례안을 제정하려는 것은 비교육적"이라며 조례안의 즉각적인 철회를 요구했다. 열린우리당 경기도당도 27일 언론에 배포한 자료에서 "도 교육청 조례안은 돈 없으면 배우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조례 제정 추진 중단을 촉구했다. 도 교육청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수업료를 못내는 학생들에게 출석정지를 시키려 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조례 제정 추진을 비난하는 글이 잇따르고 있다. 도의회 교육위원회 소속 한 의원은 "도 교육청이 출석정지 등 처분조항을 명문화할 조례안을 상정할 경우 정말 돈이 없어 수업료를 납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선별할 수 있는 조항을 조례에 별도 삽입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3년 10월 경남 창원의 한 사립고교는 교육부령 규칙 규정에 따라 수업료를 미납한 학생 100여명에게 무더기 출석정지 조치를 해 물의를 빚었으며 2004년 인천.강원교육청에 대한 국정감사 등에서도 이같은 출석정지 조치 조항이 논란이 됐다. 지난해 도내에서는 1천100여명의 중.고교생이 12억여원의 수업료를 납부하지 않았으며, 지난해 수업료 미납액은 이보다 많은 17억원에 이를 것으로 도 교육청은 추산하고 있다.
수업 첫날. 교사라면 누구나 한 학기 동안 진행될 주제에 대해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수업주제에 대한 교사의 열정을 드러내 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방법론 문제에 해마다 부딪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교육과정평가원 교수학습개발센터(KICE-TLC)가 제안하는 첫 수업시간을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해 유용한 원칙과 방법 몇 가지를 통해 이번 신학기는 변신을 꾀해보면 어떨까. 수업 첫날은 한 학기 수업의 주춧돌을 놓는 시간이니까요. 수업분위기 만들기 과목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라=해당 교과목의 중요성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보다는 교사 자신이 그 주제에 왜 흥미를 갖게 되었나, 그것이 본인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왜 이 과목을 가르치는가 하는, 그 과목과 분야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사가 보여주는 학문에 대한 열정은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자극한다. 학생 소개카드 쓰기, 이름 외우기=이름, 주소, 이메일 주소 같은 기본 정보 뿐 아니라 이 과목에서 배우기를 원하는 것, 향후계획, 관심사, 취미 등에 관한 소개카드를 쓰게 한다. 첫 시간부터 학생의 이름을 부르고, 학기 내내 숙제를 돌려주거나 퀴즈를 볼 때, 기회가 되는대로 불러준다. 첫 시간에 4-5명을 한 조로 사진을 찍어 이름을 외우는 교사도 있다. 학생끼리 서로 소개할 시간 주기=학생을 3~5명의 그룹으로 나누어 서로 소개하게 한다. 학생 수가 많지 않다면 전체가 돌아가면서 한 가지 질문에 답하게 하는 것도 좋다. “이 수업에서 꼭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수업진행에 유용하다. 수업의 기준설정 수업 목표 토론=이 수업에서 한 학기 동안 무엇을, 왜 성취하고자 하는지 학생들에게 말해준다. 학생들에게도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그것을 이루는데 어떤 어려움이 예상되는지 가능하면 상세하게 말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학생의 모든 발언에는 관심을 표해 준다. 교사가 학생의 발언에 보인 관심은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의 참여를 촉진하는 가장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목표 나열/분류=학생들에게 이 수업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서너 개 나열하고 순위를 매겨보게 한다. 목표는 지식, 기술, 관심, 태도 어떤 것이어도 좋다. 인원이 많을 때는 소집단 작업으로 진행하고, 이러한 목표들을 전체차원에서 유목별로 분류/정리해 본다. 수업시간 활용에 대해 설명=매 수업시간이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를 가능하면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매 세션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가? 토론은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질문시간이 따로 있는가? 그냥 떠오를 때 질문해도 되는가? 등을 포함할 수 있다. 간단한 진단 테스트 실시=학생의 학습 준비도를 알아보기 위해 가능하다면 간단한 진단 테스트를 실시한다. 테스트는 성적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학생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임을 설명한다. 예컨대, 핵심개념에 대한 학생들의 친숙도를 테스트할 수 있으며, 동일한 테스트를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에 두 번 실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성취감도 느끼게 하고 수업효과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또 다음 수업을 위한 숙제를 내줌으로써 학생들의 수업 준비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한국의 어머니 상은 어떤 것일까? 얼마 전 최일화 리포터 글을 관심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최 리포터는 그의 글에서, “.......남존여비와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은.......한이라고 하는 독특한 정서를 가슴에 품어야했던 쓰라린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어머니들은 강인한 모성으로 자식들을 낳아 길렀고 그런 어머니들은 자식들의 마음속에 각별한 정서를 잉태시켰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늘 그 각별한 정서(?)의 뉴스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올 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늦둥이 자녀를 둔 30대 후반에서 4, 50대 후반 엄마들이 자녀의 한글교육 등 선행학습 준비 외에 입학하는 아이의 기를 안 죽이려 주름제거와 지방이식 수술 등의 성형수술을 해야 할 지의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이라는 것이었다. 뉴스를 보는 순간, 그럼 교사들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년 전의 일이다. 당시 근무하던 학교에 58세 되시는 기간 제 여선생님이 산가를 내신 선생님 반에 강사로 오셨다. 1학년 교실에 배정이 되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셨는데 어떤 아이가, “나는 할머니 선생님이 싫어요.” 하면서 책상위에 얼굴을 파묻고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인제 막 첫 아기를 출산하기 위하여 산가를 내신 선생님은 매우 젊으시고 아름다우신 선생님이셨다. 기간제 선생님께서는 교무실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계신 자리에서 태연하게 말씀하셨지만 그 순간 선생님께서 얼마나 난감하시고 무력감을 느끼셨을까? 생각이 들면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교감선생님이 곧 되실 분이신데 1학년에 배정이 되셨다. 당시는 소위 치맛바람이 거세게 불던 시절로 사투리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이시는 남자 선생님의 1학년 담임배정을 학부모들이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며칠 후 학년을 바꾸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지만 자녀라면 조금의 양보도 없는 냉혹한 현실 앞에 학교 측도 어찌할 수 없었다. 신학기가 되면 새로운 선생님이 배정이 된다. 아이들이 시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담임선생님께서 젊으시니?, 연세가 드셨니?” 라고 대부분의 어머니들께서 아이들에게 물어보실 것이다. 아니 나 자신부터 그와 같은 물음을 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이 집집마다 하나, 둘이니 얼마나 귀한 자녀들이겠는가? 일 년 동안 담임할 교사에 대해서 나이가 많고 적음에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이다. 화장대 앞에 앉았다. 염색한지 3주 밖에 안 되었는데 정수리부분과 앞 이마둘레에 귀 앞 쪽에 흰 머리가 쏙쏙 돋아나고 있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이크림을 찾아서 눈가 주름진 부분에 발라본다. 유달리 깔깔거리며 웃기를 잘 하니 양미간 사이 왜 이렇게 주름이 많은지...... 신학기가 되면 새로 맞는 아이들에 대한 기대로 늘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뉴스를 보고 거울 앞에 앉은 오늘은 왜 이렇게 우울한지. 우리 사회에 언제부터인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기준을 정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한 사람의 경험과 피땀 흘린 과정의 노력 및 흔적은 문제되지 않고 숫자로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결과에 더 비중을 두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나 자신이 어린이들을 바라볼 때 이런 편견을 가지지는 않았던가? 또 학부모회의 때 말이 잘 통하는 젊은 학부모님들과 주로 대화를 나누며 제 2선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시던 나이가 좀 드신 학부모님들을 교육에 열의가 없는 양 관심을 두지 않은 적은 없었는지 새삼 생각해 보는 오늘이다. .
매년 2월은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달이다. 정규교과수업의 보충학습으로 수업이 진행되어 심한 표현으로 ‘썩은 달’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교육과정은 겨울방학 전에 마치고 평가도 마치며, 고 3학생은 대학입시도 결정이 되어 2월은 어수선하기 마련이다. 개학 후 1-2주 학교에 나오면 졸업식준비와 학년말 수료식을 갖고 봄방학에 들어가며 교원들의 정기인사도 중 하순경에 발표되어 새로운 인적조직으로 구성되는 달이다. 교원들도 적어도 방학 전에 발령을 받으면 임지로 이사할 여유가 많아 좋고 학년과 사무분장이 맡겨지면 아이들이 오지 않는 방학 동안에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학년 초 밀도 있는 수업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장이 승진이나 전보발령으로 새로운 학교로 가서 1년간 운영할 교육과정을 구상하여 계획을 수립할 시간이 부족하다. 전임자 또는 전년도 계획을 가지고 학교운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장의 교육철학이나 특색사업이나 중점사업이 반영되지 않는 것이 문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봄방학을 없애고 겨울방학이 끝나면서 새 학년이 시작되도록 학기 조정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겨울방학의 시기나 기간 등은 더 연구를 하더라도 겨울방학에 들어가기 전에 교육과정을 모두마치고 학년말 종업식, 졸업식, 교원정기인사 발령까지 모두 마치고 방학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교원들의 지친 심신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간을 보름 정도 준 다음 새로 조직된 학교에 부임한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교육과정을 짜고 교무분장조직도 하고 새 학년의 교실 환경구성도 하고 학년 및 교과별 교육과정도 수립하여 새로 담당 할 학생들에 대한 생활지도 계획도 수립한 다음 입학식 준비까지 하여 새 학년을 맞이하도록 하면 어떨까? 오랜 관행을 갑자기 바꾸면 학교현장의 반발도 예상되나 학교교육과정을 학교장의 경영 마인드가 녹아 들어간 교육을 학교구성원과 함께 펼친다면 우리교육은 더욱 다양해 질 것이고 한 단계 도약하게 될 것이며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더욱 신뢰를 받을 것이다. 물론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할 수도 있고 문제점도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도 된다. 3월 한 달 동안 학년 초 준비를 하면서 수업이 소홀히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겨울방학 동안에 새 학년의 모든 준비를 한 다음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갑자기 전면실시는 어려울 것이고 시행착오도 예상되므로 시범적으로 실시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여 점차 확대하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사립대학 학생들과 재단측이 최근 인상 문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등록금의 학교간 연간 차이가 최대 158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27일 한국사학진흥재단과 각 대학에 따르면 서울시내 29개 일반사립대 간 올해 등록금(1년 기준) 격차를 보면 자연과학계열은 최대 158만원, 인문사회계열은 109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공학계열은 112만원의 차이가 났고 의학계열(2005년 기준)의 등록금 격차도 142만원이나 됐다. 학교별로는 이화여대가 자연과학ㆍ인문사회ㆍ의학ㆍ공학 계열의 등록금이 가장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 자연과학ㆍ인문사회 = 자연과학계열은 수평 비교가 힘든 예체능계열을 제외하고 인문사회ㆍ공학ㆍ의학계열과 비교할 때 학교별 등록금 차가 가장 컸다. 자연과학분야 등록금이 가장 비싼 학교는 올해 5.8%를 인상한 이화여대로 1년 치 등록금이 803만원인 반면 단국대는 645만원으로 두 학교는 158만원의 차이를 보였다. 이대 다음으로는 숙명여대, 서울여대, 고려대, 서경대 등의 순으로 높았고 세종대, 경희대, 덕성여대, 건국대 등이 단국대의 뒤를 이어 등록금이 쌌다. 인문사회계열에서 연간 등록금이 가장 많은 곳도 이화여대(652만원)로 세종대(543만원)보다 100만원 이상 비쌌다. 인문사회계열 등록금이 이대 다음으로 비싼 곳은 숙명여대, 고려대, 서울여대, 삼육대였고, 단국대, 덕성여대, 경희대, 건국대 등은 세종대와 함께 비교적 싼 것으로 분석됐다. ◇ 의학ㆍ공학 = 의대가 있는 11개 대학 중 의학계열 등록금(2005년 기준)이 가장 비싼 곳은 이화여대(929만원)로 경희대(787만원)보다 142만원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대부분 800만원을 넘는 의대 등록금의 경우 이화여대에 이어 성균관대, 고려대, 연세대, 건국대, 가톨릭대, 동국대, 한양대, 중앙대, 단국대 순으로 비쌌다. 공학계열도 100만원 이상 차이가 나 이화여대가 848만원으로 가장 높았고 단국대는 736만원으로 가장 낮았다. 이화여대에 이어 고려대가 847만원으로 800만원을 넘었고 서강대, 연세대, 성균관대가 그 뒤를 따랐으며, 낮은 곳은 단국대에 이어 한국외대, 세종대, 숭실대, 중앙대 등이었다. ◇ 주요 사립대도 100만원 이상 격차 = 고려대ㆍ서강대ㆍ성균관대ㆍ연세대ㆍ이화여대ㆍ중앙대ㆍ한양대(가나다순) 등 7개 주요 사립대 간 등록금 격차도 계열에 따라 최대 100만원이 넘었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계열 등록금은 이화여대, 고려대, 서강대, 연세대, 성균관대, 한양대, 중앙대 순으로 비쌌으며 이대와 중앙대 간 격차는 자연과학 127만원, 인문사회계열 59만원으로 파악됐다. 공학계열은 이화여대(848만원)에 이어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 성균관대, 중앙대 순이었고 중앙대(756만원)는 이화여대보다 92만원 쌌다. 의학계열(2005년 기준)은 의대가 없는 서강대를 제외하고 이화여대(929만원), 성균관대(910만원), 고려대(897만원), 연세대(889만원), 한양대ㆍ중앙대(834만원)으로 나타났다. 대학별 등록금은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에도 교육의 질은 등록금 액수에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한 대학 관계자는 "등록금 차이는 대학의 재정 형편과 교육여건, 인상률 협의 결과 등에 따라 학교별로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등록금과 교육의 질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교육부의 인사 정책을 보면 우리 교사들을 바라보는 교육부의 잣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교육부는 해마다 교육전문직 인원을 줄이고 대신 일반행정직을 승진 직체와 업무의 수월성이라는 점을 들어 우대하고 있다. 현재 교육부의 교육전문직의 일반직의 비율은 거의 15 : 85 정도로 일반직의 우위가 두드러지고 있다. 정작 교육정책의 주요입안자가 되어야 할 교육전문직들이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기형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사권은 부총리의 고유권한이라 할 수 있다. 부총리가 기용하고자 하는 인사코드가 무엇이냐에 따라 인사의 모습이 정해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처사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부총리 개인의 코드에 따라 결정된 인사코드가 자칫 교육문제 그 자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단순히 일반행정직의 승진 적체와 업무의 효율성을 재고하기 위한 처사라면 이는 쉽사리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90년대도에 비해 교육전문직의 수가 절반 정도로 축소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는 곧 교육현장의 목소리를 그나마 교육부에서 확보할 수 있는 이들을 점차적으로 배제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처사라 할 수 있다. 현장의 목소리 점차 외면하는 교육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현장의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교육정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90년대 중반 이후 끊임없는 교육정책의 실패와 혼선을 거듭해 왔다. 교육의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이유로 교육과는 전혀 무관한 이를 장관으로 기용해 겪었던 지난 90년대 중후반의 상황을 우리는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 휴유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우리 교육은 미국의 신실용주의 정책의 첨병 노릇을 자임하며 끊임없이 교사와 학생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그 결과는 지금 어떠한가. 학생은 학생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제 갈길을 잃어 가고 있다. 과연 이와 같은 모든 정책 실패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를 묻는다면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밀어붙이기식 행정우선 정책이 벌여 놓은 놀음판에 교사와 학생들만 책임과 의무의 짐을 지는 꼴이 되고 말았다. 교육현장 경험 없어도 교육전문가라? 해마다 일반교육 행정직이 고시와 7급과 9급직을 통해 선발되고 있다. 7급과 9급은 일반적으로 일선학교나 기타 행정 기관에서 교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설이나 재무 관련업무를 맡고 있다. 하지만 고시를 통해 선발된 인원은 교육부의 핵심 정책부서에 대부분이 바로 배치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 일선 교육 현장 경험이라곤 전무한 이들이 바로 교육정책이나 중요한 교육관련 부서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곧 우리 교육의 대부분의 중요한 정책이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20대 초반에서부터 기껏해야 30대 초․중반의 일선 교육현장 경험이 전무한 이들이 기껏해야 몇 년의 시험 공부를 통해 선발되어 우리 교육의 중요한 정책을 좌지우지 하는 셈이다. 과연 교육현장 경험이 대부분 전무한 이들이 세운 교육정책이나 방향이 제대로 교육현장에 접목될 수 있을까. 교육은 절대 이론만으로 안 된다! 교직에 발을 들여 놓은지 이제 10년 가까이 되어 간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잘 할 수 있을까에서부터 학급경영이나 업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들이 정말로 만만치 않은 일임을 뼈저리게 경험해 가고 있다. 몇 년간 임용고사 공부를 하면서 교육학이라는 과목을 정말로 열심히 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정작 교육현장에 와서 그런 교육학에서 배우고 공부했던 여러 가지 이론들은 정말로 대부분이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불과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교육전문가는 일선학교 현장에서 무수히 아이들과 부딪치고 어울리면서 스스로의 깨달음을 가지고 이를 아이들에게 실천할 수 있는 이들이다. 몇 년 외국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고, 혹은 교육과 관련된 여러 행정관련 공부를 했다고 교육전문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이론을 만들고 다듬는 데는 이와 같은 공부가 필요하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작 일선학교의 교육정책과 방향을 결정하는데는 이런 공부는 단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몇 년, 아닌 몇 십년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만들어 낸 경험과 노하우의 축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우리 교육부의 교육전문직 홀대는 바로 이런 소중한 교육현장의 경험을 가진 이들을 배척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는 또한 우리 교육부의 교육을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이기에 그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즉 교육은 그 나름의 현장 전문성이 없어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분야라는 일반행정 편의주의의 발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교육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면 대부분 교사를 그 대상의 제일선에 놓게 된다. 하지만 정작 교육정책을 만들고 결정하는 정책 입안자들은 이 개혁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교육은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실패가 따른다손 치더라도 그 실패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과연 우리 교육의 실상은 그러한가. 정작 교육전문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책의 결정과 입안에서 자꾸만 배제된 채 일선 교육현장의 경험이 전무한 이들이 우리 교육의 주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주체가 되는 이상 그 실패는 불보듯 뻔할 것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이 폐막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 새벽에 있었던 쇼트트랙 경기를 가슴 졸이며 지켜봤다. 한국 남자 쇼트트랙 선수들이 1992년 알베르빌올림픽이후 무려 14년 만에 남자 5,000m 릴레이에서 우승하며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해 뜬눈으로 새운 보람이 있었다. 시작 전부터 올림픽이 열린 이탈리아 관중들이 홈팀을 응원하는 열기와 노력의 결실이건만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독식하면서 시작된 심판들의 불공정한 판정 때문에 걱정을 했다. 더구나 얼음판 상황이 나빠 실격당하는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더 긴장되었다. 남자 500m 준준결승 경기에서 기대주였던 이호석 선수가 탈락하며 우려했던 염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더구나 결승 경기에서는 부정 출발로 스타트가 여러 번 지연되는 바람에 안현수 선수의 출발이 늦어져 앞선 선수들을 추월하지 못한 채 3위에 머물러야 했다. 준결승에서 중국선수의 실격으로 간신히 결승에 올랐고, 부정출발이 의심스러울 만큼 다른 선수들보다 한 발 앞서 출발한 미국의 오노가 우승해 더 아쉬웠다. 여자 1,000m 결승은 우리나라의 진선유, 최은경과 중국의 왕멩, 양양A가 올랐다. 출발부터 결승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까지 중국선수 두 명이 선두를 지켰지만 우리의 어린 선수들은 정말 대단했다. 진선유 1위, 최은경이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준결승에서도 실격문제로 최은경을 긴장시킨 심판들이었으니 추월과정에서 상대선수의 진로가 방해된 것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심판들이 모였을 때 혹 진선유 선수의 금메달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닌가 긴장했던 터라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111.12m의 아이스링크를 45바퀴나 돌아야 하는 남자 5,000m 릴레이는 역전과 역전을 거듭한 명승부였다. 뒤늦게 2위로 올라섰다 선두로 나섰지만 다시 추월당해 우승권에서 멀어지는 듯 했다. 더구나 캐나다 선수가 팔로 밀며 진로를 방해하는 등 잘못하면 넘어질 뻔한 위험한 순간이 두 번이나 있었다. 쇼트트랙경기가 열린 팔라벨라 경기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대역전극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졌다. 이미 1,0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건 안현수 선수가 결승선을 눈앞에 둔 마지막 코너에서 세계에서 혼자만 할 수 있는 총알 스피드로 중국과 캐나다 선수 사이를 빠져나가며 결승선을 통과하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중국의 국기, 미국과 캐나다의 국기를 양쪽에 거느린 채 우리의 태극기가 두 번이나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는 시상식은 정말 감격스러웠다. 이 순간만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였다. 이번 동계올림픽 쇼트트랙경기에 참가한 남여 10명의 선수가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선수들의 나이가 모두 25살 이하라니 우리나라 쇼트트랙의 장래가 든든하다. 더구나 안현수 선수와 진선유 선수는 우리나라 최초로 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3개나 딴 선수로 기록되며 이번 동계 올림픽에 3관왕 3명 중 우리나라 선수가 2명을 차지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 영광을 차지한 모든 선수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고생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모든 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말길 바란다. 한편 우리 선수들에게 유난히 엄하게 규칙을 적용하며 편파 판정을 일삼으니 심판들이 TV 화면에 보이기만 해도 불안했다. 현재 우리 교육계주변에도 심판의 역할을 그렇게 하며 오히려 망치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지? 또 오늘 우리 선수들이 쇼트트랙에서 감격적인 명장면을 연출하며 우승하는 모습과 같이 보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어린이와 교사 사이에 무척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최근 고등학생 3학년생들을 대상으로 다루는 백만장자의 첫사랑이라는 영화를 볼 기회를 가졌는데 교사들도 교육현장에 영향을 주는 영화와 드라마에 대하여 알도록 노력하자. 이 영화가 10대를 위하여 제작되고 이 과정에서 인기그룹 동방신기의 노래를 OST로 하고 있을 정도로 10대 학생들이 빠질 정도인데 과연 우리 교사들은 이런 영화에 관하여 얼마나 아는지 궁금하다. 우리 교사들은 이런 영화를 통화여 교육적 지도를 하여야 하여야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 사항을 고려하여야 하겠다. 첫째, 너무나 비교육적이다. 12세 아동들이 보기에는 학교폭력문제, 교사에 대하여 형님이라고 하는 것, 학생들이 나이트클럽에 술을 먹는 것, 학생들의 동거 등이다. 둘째, 농촌학교 고등학교 교육에 대하여 너무 나 부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학생 8명이 있고 공부하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밖에 영농후계자라고 하던지 농촌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하지 않을까? 셋째, 나는 남자도 하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이를 통하여 자신감이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넷째, 음식하는 것을 처음본다는 등 일하는 것이다. 10대들이 이 대사를 보고 어떤 것을 느낄 것인가? 돈도 동그라미가 12개가 있다는 등 건전한 경제의식을 갖는데 부정적인 것이 많다. 다섯째, 그중 1명은 정신지체 학습부진아 같은데 이 학생에 대하여 놀리고 그런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어 통합학급의 원취지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 교사들이 바쁘셔서 이들 영화를 잘 못보실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이 이런 영화를 보고 학교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교육적으로 지도하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면에서 교사들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필요한 영화를 보도록 하여야 하겠다.
경기도내 신설학교들의 규모 및 부대시설 등이 지역과 학교 급별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여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도 교육위원회 최창의 위원은 26일 다음달 개교하는 36학급 규모의 안산 K초등학교 부지면적은 2만1천600여㎡에 달하는 반면 같은 학급수의 동두천 K초등학교 부지면적은 1만3천900여㎡, 파주 M초등학교는 1만1천900여㎡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부지매입비를 제외한 순수 건축비도 학교별로 큰 차이를 보여 건물 연면적이 1만1천여㎡이고 학급수가 36학급인 동두천 D중학교는 건축비 87억7천여만원이 소요된 반면 30학급에 건축연면적 1만300㎡인 안양 L중학교는 학급수와 건축연면적이 동두천 D중학교보다 적은데도 건축비는 108억원으로 20억4천여만원이 더 투입됐다. 또 군포 N중학교는 체육관 및 다목적강당, 학생식당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인근 S중학교는 체육관.학생식당을 모두 갖춘데다 특별교실수도 N중학교보다 3개가 많았다. 이밖에 도서실과 시청각실의 개수와 면적 등도 학교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최 위원은 "같은 규모, 같은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라면 부지매입비는 몰라도 건축비와 부대시설 종류 등은 비슷해야 하는데 신설학교들간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도 교육청은 교육평등 차원에서도 신설학교의 규모 및 시설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초등학교 학생들도 활발히 성장하는 시기인 만큼 고교생 못지 않게 많은 체육활동을 필요로 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신설 초등학교에도 신설 고등학교와 비슷한 비율의 체육관 및 다목적강당을 설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도 교육청 관계자는 "예산 문제때문에 모든 학교에 체육관 등을 설치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 일부 학교만 개교당시 이같은 시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학교부지 면적 차이에 대해서는 "부지가 경사지에 있느냐 평지에 있느냐에 따라 부지 면적이 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鄭東泳) 의장은 24일 사립학교법 재개정 문제에 대해 "개정안을 고칠 수 없다는 우리당의 입장은 단호하다"며 재개정 불가론을 재확인했다. 정 의장의 발언은 한나라당이 이날 사학법 재개정안을 최종 확정해 국회에 제출한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정 의장은 이날 취임 첫 주 현장정치의 화두로 내건 '교육양극화 해소' 마지막 일정으로 전교조를 방문한 자리에서 사학법 재개정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정 의장은 "우리당과 한나라당 원내대표간 합의는 글자 그대로 재개정안을 내면 법절차에 따라 논의한다는 것"이라며 "시행하기도 전에 무슨 재개정 논의냐. 고칠 수 없다는 우리당의 입장은 단호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다만 법률가들이 일부 위헌적 요소를 지적하고 있어 당에서도 이 부분을 검토하고 있다"며 "한나라당이 헌법재판소에 끌고간다든지 할 경우 어떻게 방어할지 내부준비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실업계 고교 문제와 관련, "현재 실업계 학생 10명 중 5명이 급식비를 못낼 정도라고 한다"며 "실업계 학생에 대한 장학금과 별도로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하는게 중요하다고 대통령에게도 건의했다"고 말했다. 정 의장은 전교조의 이념편향성 논란 등을 의식한 듯 "전교조의 진정성은 이해하지만 강성이라는 인상이 있다. 좀더 열리고 합리적이라는 이미지와 내용으로 국민에게 다가서면 운동의 성과가 나지 않을까 한다"며 "전교조가 사학을 장악해서 학교를 이념교육화한다는 한나라당의 주장이 먹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촌평했다.
1600억원대의 빚을 안고 있는 서울시 교육청이 조직개편을 통해 간부자리를 늘려 교육계로부터 '간부직 늘리기 위한 조직개편'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새로운 교육환경과 교육행정 수요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다음달 2일 1실 2국 6담당관 9과 체제를 1실 3국 6담당관 11과 체제로 개편한다고 24일 밝혔다. 이번 조직개편을 통해 3급 직급의 평생교육국장 자리와 4급인 평생학습진흥과장 및 교육과정 정책과장 자리가 새로 생기고 5급자리도 3개나 만들어지며 승진인사도 이뤄지게 된다. 시 교육청 관계자는 "1999년 정부의 구조조정 방침에 따른 조직개편으로 기구가 대폭 축소되면서 일부 조직은 과도한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조직을 개편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계 일각에서는 작년말 현재 부채가 1천600억원대에 달하는 서울시 교육청이 올해도 지방채를 발행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재정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간부직을 늘리기 위해 조직을 개편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한재갑 대변인은 "현재 단위 학교의 경우에는 운영비가 부족할 정도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부도 위기에 있는 서울시 교육청이 간부자리를 확대하기 위해 조직을 개편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있다"고 성토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 유경수 선전국장도 "서울시 교육청이 간부자리를 확대하기 위해 조직을 개편하는 것은 정부조직의 몸집 줄이기 방침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가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