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고등학교에서는 다음달부터 실시되는 정기고사의 시험문제를 의무적으로 인터넷에 공개해야 한다. 시험문제의 인터넷 공개가 가져올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인데 교육부에서는 충분한 검토는 물론이고 현장교사들의 의견도 수렴하지 않은 채 시행 계획을 서둘러 발표하였다. 최근 교육부에서 쏟아내고 있는 정책이나 제안들에는 현장교사들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고 있다. 참여정부 들어 참여를 구두선처럼 외치면서도 유독 교육정책에는 참여는 없고 일방적 발표만 있는 것 같다. 이미 각급 학교에서는 시험 종료 후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곧 바로 정답을 공개하여 채점에 정확성을 기하고 있다. 그야말로 학생이 OK할 때까지 객관적이고 타당하게 평가하고 있다. 물론 시험문제도 공개되고 있다. 이 문제지들은 학생은 물론이고 학부모, 심지어는 인근 학원의 강사들까지 다 볼 수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터넷 공개를 제안하는 정책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교육부에서는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이와 같은 정책을 제안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교사들의 문항제작 능력을 향상시켜 궁극적으로는 교과에 대한 전문성을 제고하도록 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기초적 문항으로 쉽게 출
해마다 이때쯤이면 슬슬 겁이 난다. 저녁 뉴스 시간이 두렵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 왜냐하면 마치 기획 시리즈처럼 언론에서는 교육 부조리가 계속 보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빌미는 늘 우리 교사들이 제공하고 있었으니까. 최근 몇 년 간 우리 교사들은 5월을 맞이하면서 살얼음판을 디디는 초조함으로 살아왔다. 교사들은 기득권에 안주한 대표적 저항세력으로 매도되었고, 반성과 개혁에는 미온적이었으며, 촌지수수를 비롯한 교육부조리가 끊어지지 않았고, 걸핏하면 거리에 나가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 대하여 누가 존경심을 가졌겠는가. 늘 개혁의 대상으로만 각인되었을 것은 뻔하다. ‘촌지에 무너진 스승의 날’이란 기사를 보면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스승의 날만 되면 촌지 수수 등 각종 교육부조리가 불거지면서 그 부끄러움을 감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날을 아예 휴업일로 정했다는 것이다. 고뇌에 찬 결정(?)에 동의하면서도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다. 제자와 함께 하지 못하는 ‘스승의 날’이란 자식들과 함께 하지 못한 ‘초라한 아비의 생일날’과 무엇이 다르랴? 그러나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된
우리 교육자들에게 미래지향적 교육방향 설정에 도움을 주고 지원해 주는 교육부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교원들의 근무 의욕을 고취하고 성취동기를 자극해 주는 교육부는 없고, 연일 엉뚱한 정책 제안으로 교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교육부만 있는 것 같다. 교육적 본질을 토대로 한 정책 제안과 소속공무원의 사기 진작방안이 제시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육부와 정부에서 내 놓은 의견마다 교원들은 투덜대면서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왜 그럴까. 교원들이 그들만의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 무조건 저항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들이대 문화’에 교원들도 어느 사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최근 교육부가 제시하는 제안들에는 하나 같이 교육적 배려가 없다. 교원들의 헛웃음을 자아내는 제안들만 연일 터져 나온다. 오늘은 고등학교의 시험 문제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정책이 나왔다. 이를 어길 시에는 시ꋯ도 교육청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엄포도 덧붙여졌다. 진지한 성찰과 논의가 없이 교육정책 남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왜 정기고사 시험문제를 인터넷에 올려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어떤 교육적 효과가 있고 또 어떤 부작용이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학교마다 ‘두발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학생들은 조금이라도 머리를 더 길게 하려고 기를 쓰고, 학교는 더 단정한 모습의 두발을 원하는 것 같다. 11일 경향신문에 실린 ‘인권 뭉개는 바리깡 폭력’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 학생들의 머리에 고속도로를 만들어 두발지도를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과 고작 통제 방법으로 내신성적 반영일까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학생들은 오는 5월에 대규모 집회를 통해 반 인권적 처사를 규탄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고 한다. 교육당국에서도 늘 두발 자율화를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이 요구하고 있는 두발 자유화는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있다. 예를 들자면 머리 모양의 자유화, 길이의 자유화, 색깔의 자유화 등을 요구하면서 모든 통제를 생리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두발자유화는 학생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부정적 측면도 많다. 머리 손질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수업 시간 내내 머리를 매만지느라 수업에 소홀히 하고, 시도 때도 없이 교실 뒤편의 대형 거울 앞에 늘어서서 머리를 손질하기도 한다. 하교 후에는 이
우리나라 헌법 제 31조 4항에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육의 자율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헌법에까지 명시한 이유는 교육이 정치도구화 되는 것을 경계하고 교육의 본질 구현을 강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육의 본질은 학습자의 잠재력을 개발 및 문제해결력 배양을 통한 바람직한 인간 육성에 있으며, 아울러 글로벌스탠다드(Global Standard)에 맞는 교육과정 운영을 통한 인재양성 및 지식 창출 등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위기에 직면하여 있다. 일부에서는 교장을 선발하는 데도 학교자치라는 미명아래 학부모나 지역위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학교운영위원회의 낙점을 기다리는 제도를 제안하고 있으며, 정부와 여당에서는 시도교육위원회에 통합하고 교육위원을 정당명부비례대표제에 의하여 구성하자고 한다. 이렇게 되면 시도 교육위원에 출마하려는 교원이나 교육전문가들은 자연스럽게 정당에 줄을 서야 한다. 이에 맞춰 자치단체의 교육은 특정 다수파 정당의 정강정책에 맞는 교육을
최근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는 호아킴 데 포사다가 쓴 라고 한다. 필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성공에 대한 지혜로운 성찰을 바탕으로 성공을 향한 꿈과 용기와 열정, 그리고 실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사실 성공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어떤 공식으로 도식화하여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 주변에는 달콤한 유혹(?)이 너무 많다. 그 달콤한 유혹에 빠져 있을 경우 성공을 예단하고 허점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종국에 가서는 기대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채 애만 쓰고 만다. 요즈음 정부 주도의 교육 혁신 과제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대표적 사례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민주적 리더십과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교장 선출보직제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리더십은 교육적 마인드의 문제이지 제도의 문제가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이 교장선출보직제가 유일한
최근 교장선출보직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정 교직 단체를 중심으로 환상에 가까운 주장들이 매스컴을 통해 전파됨으로써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개발독재시대에 만들어진 교원승진 임용규정으로는 새시대에 맞는 리더십을 창출할 수 없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인듯 한데 ‘개발독재시대’라는 거창한 수사를 앞에다 부쳐 놓고 국민의 순정한 감정을 일방적으로 오도면서 출발하는 자체가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현행 제도가 안고 있는 불합리한 요소와 반민주적 요소를 찾아내어 해결책을 찾아내는 이해당사자들의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실 어떤 제도를 마련하고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데에는 항상 혼란이 따르기 마련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가 ‘혁신’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크린스탠스 교수는 혁신의 의미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제시한 바 있다. 하나는 과거의 모든 관행을 페기하고 새롭게 뜯어 고치는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or)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제도의 문제점을 찾아 점진적으로 고쳐나가는 ‘존속성 혁신(sustaining innovation)이다. 기존의 승진임용제도를 폐기하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혼란과 갈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