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강의실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가운데, 사회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움의 길로 들어선 성인 학생과 외국인 학생들이 대학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고 있다. 내가 맡았던 강의실도 절반가량은 사회생활을 경험한 학생들이었다. 자녀가 결혼할 나이가 된 학생도 여럿 있었다. 자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떡을 가져와 함께 나누는 날이면, 강의실에는 수업 이야기와 더불어 살아온 날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을 다시 책상 앞에 앉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가정과 일터에서 이미 많은 역할을 감당해 온 이들이 낯선 전공 용어를 익히고, 과제를 준비하고, 시험을 치르는 수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은 인간의 욕구를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과 소속 욕구, 존중 욕구, 자아실현 욕구로 설명한다. 그 가운데 자아실현은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펼쳐 가려는 욕구이다. 배움으로 하나를 이루면 다음 가능성이 보이고, 어제보다 성장한 자신을 만나면 또 다른 도전을 꿈꾸게 된다. 내게 성인 학생들의 학구열은 이러한 성장의 욕구가 삶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해가 일찍 저무는 겨울날의 수업이었다. 창밖에는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는 개방형 직위 채용에 응시했다. 연령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우리 사회의 원칙이 실제 채용 현장에서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나이보다 전문성과 경험, 직무수행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은 오랜 시간 현장을 지켜 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문을 열어 주는 의미 있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1차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면접장에 들어섰다. 1명을 선발하는 자리에 8명이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류전형에서도 탈락자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최종 후보로 면접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학교에 있을 때 나는 학생을 평가하며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나의 면접 역시 결과보다 그 과정에 얼마나 충실했는가가 중요했다. 합격을 향한 조급함보다는 주어진 기회 앞에서 준비한 것을 후회 없이 보여 주고 싶었다. 5명의 면접위원이 전문성과 조직 운영, 리더십, 지역사회 건강증진사업 등에 관해 차례로 질문했다. 나는 간호학 박사이자 간호사로서 쌓은 보건의료 전문성, 학교장으로 조직을 운영한 행정 경험, 대학 강의와 지역사회 건강교육을 통해 이어 온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답했다. “신종감염병이 발생하면
사진은 눈앞의 한순간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과거와 그 뒤에 이어질 미래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사진 속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사연과 시간의 깊이도 온전히 보여 주지 못한다. 하나의 거대하고 평평한 화강암 바위가 품어 온 세월과 가치를 어찌 사진 한 장에 모두 담을 수 있을까. 수천 년 동안 흐르는 물을 받아 내며 몸을 깎고,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과 이애기를 기억해 온 바위의 이야기는 사진만 남아 있다. 금강산을 갈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정부의 햇볕정책과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등으로 남북 화해의 물꼬가 트이면서 1998년 11월 18일, 동해항에서 금강산 관광선이 처음 출항했다. 처음에는 배를 타고 북한의 장전항으로 들어갔고, 2003년부터는 버스를 타고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육로도 열렸다. 나는 금강산을 두 번 찾았다. 한번을 바닷길로, 또 한 번은 통일교육으로 육로로 다녀왔다. 첫 번째 방문을 앞둔 전날, 우연히 금강산 사진전을 보았다.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운 금강산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사진이니까 저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겠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튿날 실제 금강
밤중에 도착한 메시지를 늦게 확인했다. 아침에야 쓰게 되는 답장이 늦은 까닭은 한국어교원 양성과정의 온라인 강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100시간의 이론과정을 이수하고, 이어 20시간의 실습을 마쳐야 국가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내년부터는 실습이 현장 중심으로 바뀐다는 정보를 접하고 서둘러 올해 과정에 등록했다. 국민내일배움카드로 교육비 일부를 지원받아 시작했지만, 추석을 지내느라 이틀간 강의를 듣지 못한 대가는 컸다. 밀린 강의가 산처럼 쌓여 며칠 동안 밤을 온전히 내어주어야 했다. 평생 한글을 읽고 쓰고 가르쳐 왔으니 한국어 공부쯤은 익숙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어를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문법과 발음 원리를 이론으로 풀어가는 공부는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사용하던 말을 ‘왜 그렇게 쓰는가’ 설명하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배움이었다. 누군가는 이 나이에 왜 다시 자격증 공부를 하느냐고 묻는다. 공부할수록 자격증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증서가 아니라, 새로운 봉사를 시작하기 위한 작은 열쇠라는 생각이 든다. 퇴임 후 간호대 초빙교수로 근무하면서 다문화간호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다. 결혼이주여성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무료로 제
추석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작천정 계곡을 찾았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세월은 아이를 부모로 만들었지만, 계곡을 이루는 너른 바위는 옛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가뭄으로 계곡에 물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시원한 물속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기대했던 터라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물속에 잠겨 있던 거대한 바위가 온몸을 드러냈다. 계곡 전체가 하나의 큰 바위 놀이터가 되었다. 물이 없어 비어 보였던 계곡은 오히려 더 넓은 놀이터와 살아 있는 자연 교실을 내어 주었다. 작천정은 ‘작(酌)’에는 술을 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계곡 바닥에는 크고 작은 홈과 굽이진 물길이 새겨져 있다. 흐르는 물이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바위를 다듬어 만든 자연의 작품이다.넓고 반반한 바위가 마치 옥판을 펼쳐 놓은 듯하고, 오랜 세월 물살에 깎인 바위 구멍은 술잔과 술을 따르는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전해진다.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가 글을 읽으며 마음을 닦았다고 전해지는 곳으로경치가 아름다운 유원지를 넘어 자연과 학문, 선비의 절개와 배
‘초롱이’는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 교육 채널에 등장하는 개구리 주인공이다. 초롱이는 어린이들과 함께 숲속을 여행하며 중독과 감염병을 예방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어려운 내용을 일방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이솝우화의 동물 이야기 형식에 재미와 상상력을 더해 창작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고 있다. 마약이나 술, 담배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린이들이 “왜 먹으면 안 되나요?”, “우리 몸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나요?”라고 물었을 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뇌의 보상회로, 중독이 일어나는 과정, 술이 몸속에서 분해되며 생기는 유해물질, 손을 씻지 않았을 때 병균이 퍼지는 과정 등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 속에 담았다. 동화의 주제를 정하고 장면을 구성하며 대사를 쓰는 과정에는 AI가 함께한다. AI는 아이디어를 나누는 친구이자 자료를 정리하는 비서이고, 궁금한 내용을 찾아 주는 지식 창고이기도 하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나는 마치 ‘이동식 교육 콘텐츠 기획실’을 운영하는 사람이 된 듯하다. 그러나 이야기의 방향을 정하고 내용을 선택하는 일은 온전히 교사의 몫이다
가을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책가방을 들지 않고 학교에 갔다. 머리에는 청색 머리띠를 두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들어섰다. 책가방 없는 등굣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했다. 운동회는 대개 추석 무렵에 열렸다. 타지에 나가 있던 가족들이 고향을 찾아오는 때라 온 가족이 함께 운동회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한 달 전부터 달리기와 무용, 응원 연습을 했다. 운동장은 아이들의 구령과 발소리로 가득했고, 청군과 백군의 함성은 가을 하늘 높이 퍼져 나갔다. 초등 1학년 때 나는 여섯 명이 함께하는 현대무용 공연에 뽑혔다. 키가 작아 맨 앞줄 가운데에 섰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자리는 어린 나에게 무척 무담되었을까, 아니면 철없어 담담 했을까?돌이켜 보면 그때 받은 관심과 칭찬 속에서 내 자존감도 작은 싹을 틔웠을 것이다.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던 날 추석에 큰언니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가 날마다 기다렸다. 연습을 마친 뒤에도 언니가 타고 올 저녁 버스를 기다리는그리움은 지금의 표현으로 사무침 같은 것이었다. 인내가 어려운 시기 지금의 손녀손자가 초1학년 또래의 정서였다.‘오늘은 언니가 올까.’ 어린 마음에 품었던 그리움은 해마다 추석
“안녕하세요, 교수님. 지난번 자기소개서와 면접 준비를 도와주신 덕분에 합격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 학생에게서 반가운 문자가 도착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흘린 땀과 새로운 출발을 앞둔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에게도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귀한 선물이었다.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취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전공과목을 다룬후 자기소개서 작성과 면접 준비에 관한 내용을 미니 특강으로 하였다. 취업을 앞둔 학생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는 일부터 어려워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몇 장의 서류에 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학생들에게 자기소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표현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진솔함’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구체적인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글의 힘이 약해진다. 반면 작고 평범해 보이는 경험이라도 그때의 생각과 행동, 그로 인해 달라진 점을 진솔하게 담아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된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보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앞판과 뒤판을 정성껏 깎고 붙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바이올린 소리통을 완성했다. 아직 현을 얹지도 않았는데 나무를 쓸어보는 손끝에서 벌써 맑은 선율이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에는 바이올린제작학과가 있다. 강의 일정을 고려해 학부에 입학하면서 나는 가르치는 교수인 동시에 배우는 학생이 되었다. 건물과 건물을오가며 가르치고 배우는 생활은 낯설지만 설레는 도전이었다. 다시 학생의 자리에 앉으니 미처 보지 못했던 교육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바이올린 제작은 날카로운 도구를 익히는 일에서 시작된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붙이는 모든 과정이 새로운 세계였다. 처음에는 칼을 쥔 손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나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깎이기도 했다. 마음이 앞선다고 나무가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었다. 서두르면 흠집이 생기고, 작은 실수 하나가 다음 공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나무 앞에서는 기다림과 집중이 필요했다. 호기심은 열정으로 바뀌었고, 그 열정은 오랫동안 작업대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바이올린 제작의 역사에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특히 1700년부터 1720년대 중반까지는 그의 ‘황금기’로 불린다. 이
딸이 20년 만의 대학 동창회에 간다고 했다.초등학교 1학년인 쌍둥이와 함께 여행을 겸해 1박으로 다녀올 계획이었다. 금요일 하루는 학교에 체험학습도 신청했다.‘아이들까지 학교를 쉬게 하면서 꼭 가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딸에게 이번 동창회는 단순히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었다. 결혼 10년 동안 쌍둥이를 키우며 가사와 육아에 온 힘을 쏟아온 딸이었다. 잠시나마 ‘누구의 엄마’와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오랜 친구들 앞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나는 두 아이가 엄마에게 쓴 편지를 보고서야 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게 되었다. 글씨가 반듯한 아이는 편지지를 가득 채웠다.“엄마, 매일 행복하게 지내자. 언제나 엄마가 슬프면 말해. 사랑해.”동그랗게 그린 엄마 얼굴 주위에는 사랑의 표시도 가득했다. 다른 아이는 이렇게 썼다.“엄마, 언제나 기쁘게 살아. 엄마 슬픔 다 알고 있어. 용기 내. 사랑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쓴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깊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와 표정 속에서 엄마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까지는 몰랐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방법으로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이번 교육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방송교육이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보건선생님께 한 가지를 부탁했다.“방송실에 학생 몇 명만 앉혀 주세요.” 교육은 상호작용이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강당에서 학생들과 얼굴을 마주하면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강의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 보이면 다시 설명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질문을 던진다. 웃음이 터지면 잠시 기다렸다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것이 살아 있는 수업이다. 하지만 방송교육은 다르다. 한 번에 천여 명에게 같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강사에게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교실의 학생들이 집중하고 있는지, 내 말을 이해했는지, 어느 대목에서 마음이 움직였는지 알기 어렵다. 자칫 40~50분 동안 강사 혼자 화면을 향해 말하는 일방적인 교육이 되기 쉽다.그래서 나는 방송실 안에 ‘작은 교실’을 만들기로 했다. 여섯 명의 학생이 의자를 펴고 내 앞에 앉았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 선생님이 여러분을 보면서 이야기할 거예요. 여러분 얼굴은 방송에 나오지 않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친구들에게 들릴 수 있으니 잘 듣고 대답해 주
강원도의 한 교육지청에서 연락이 왔다. 오전에는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오후에는 교육청으로 이동해 관리자 연수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때 나는 40대였다. 에너지와 열정으로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교육계가 기억하는 나와 내가 기억하는 나는 아마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 열정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이제는 학교 현장 밖에서 그동안 쌓은 경험과 전문성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 시절 강원도로 가는 길은 지금처럼 편하지 않았다. 하루 전에 출발하거나 밤차를 타야 했다. 마침 밤 12시 반에 출발해 원주에 새벽 5시쯤 도착하는 야간열차가 있었다. 학생들 눈높이에 맞춘 교육을 준비하려면 일주일 전부터 움직여야 했다. 특히 흡연예방교육을 위해 콩나물을 직접 키웠다. 생수병에 담배를 다섯 개비, 일곱 개비씩 풀어 넣고 조건을 달리해 콩나물을 키웠다. 담배에 노출된 정도에 따라 콩나물의 성장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담배가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기 위한 교육자료였다. PPT만 들고 가는 강의가 아니었다. 담배, 모형담배, 살아 움직이는 금붕어, 타르실험용 빈생수병을 비롯해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살면서 예기치 않은 위기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당황이 아니라 지혜일 것이다.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날이 있다. 그날의 긴박함이 내 기억 속에 아주 강하게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교사 연수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달력과 수첩에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 교육을 하루 앞둔 날이라고 생각하며 차 시간표까지 확인해 놓고 있던 아침,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선생님, 지금 오고 계시는 거죠?” 담당 장학사의 전화였다.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만요.” 전화를 내려놓고 급히 공문을 확인했다. 세상에, 연수일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그날이었다. 달력에 날짜를 잘못 적어 놓은 것이다. 더구나 내 강의는 오후 시간 전체를 맡고 있어 다른 강사와 순서를 바꿀 수도 없었다. 그때부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노트북을 챙기고 머리를 감은 뒤 화장품 몇 가지를 가방에 쓸어 담았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 택시를 잡아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간곡하게 세웠다. 다행히 기사님이 내 절박한
내가 사는 광역시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흡연·마약·음주 예방 특강을 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랫동안 학교와 보건 현장에서 쌓아 온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이라 흔쾌히 수락했다. 강의를 준비하기에 앞서 학교 홈페이지부터 둘러보았다. 학생 수는 1000여명, 남녀공학의 큰 학교였다. 화면 속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야 마음이 움직일까?’먼저 제목부터 고민없이 정했다. '뇌는 한번을 기억 한다' “담배 피우면 안 된다”, “마약은 위험하다”, “술은 몸에 나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이미 수없이 들어 온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는 ‘하지 마라’는 금지보다 왜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고 스스로 선택하는 근육을 길러 주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이 지향하는 중요한 목표도 건강수명을 늘리는 것이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질병에 걸리지 않고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그러기 위해 청소년기에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건강 습관 가운데 하나는 우리 몸과 뇌를 해치는 물질을 처음부터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흡연 교육의 방향을
요즘 네일아트는 하나의 패션이자 문화가 되었다. 색도 다양하고 디자인도 화려하다. 작은 손톱 위에 그림을 그리고 보석을 붙이는 것을 보면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인공의 아름다움이 궁극적으로 닮고자 하는 것은 자연이 가진 색과 조화가 아닐까. 아무리 화려하고 정교한 네일아트라 해도 어린 시절 봉숭아꽃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느꼈던 그 감성까지 따라오기는 쉽지 않다. 네일은 시간이 지나면 손톱이 자라면서 경계가 생기고 다시 손질해야 하지만, 봉숭아물은 손톱이 자라는 시간과 함께 조금씩 밀려나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연스럽게 남아 있다. 어린 시절 여름이면 우리 집 대문 양쪽에는 해바라기가 자랐다. 내 키를 훌쩍 넘어선 해바라기는 담장보다 높이 자라 한여름 햇살을 향해 커다란 얼굴을 들고 있었다.그 아래에는 봉숭아꽃이 피었다. 봉숭아꽃과 잎을 따서 돌로 곱게 찧어 손톱 위에 조심스레 올렸다. 잎으로 손가락을 감싸고 실로 동여매면 밤새 손끝에 꽃물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하나씩 풀어볼 때의 설렘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얼마나 물이 들었을까?” 조심스럽게 잎을 벗겨내면 손톱마다 붉은 봉숭아물이 곱게 배어 있었다. 그 작은 변화가 얼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