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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022 교단수기 동상] 불비례

 

대학에서의 4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불비례이다. 한문 투의 문체에 대해 배우던 중 나온 그 단어를 소재로 교수님께서 나지막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교수님께서 당신의 교수님께 편지를 올릴 때면 항상 마지막에 쓰곤 한다는 불비례, 예를 갖추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 예를 갖추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주신 사랑에 비해 예가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좋은 스승님께는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워지는지도 모른다. 교직에 나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숨 쉬다 보니 부끄러움이 커져만 간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음을 알 때 느껴지는 감사함이 함께한다.

 

나에게는 예를 갖출 수 없는 선생님이 계신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시간이었다. 쉬는 시간에 공놀이하다가 늦게 들어와 움츠려 있는 아이들에게 호통 대신 "앉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갑갑했을까"라는 말과 함께 등을 두드려주시곤 했다. 선도부 선배들이 두발 검사를 하는 시간에는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들어와 선배들을 물리시며 우리에게 찡긋 신호를 보내셨다.

 

제주도로 떠난 수학 여행에서는 녹색지대의 ‘준비 없는 이별’을 열창해 모두를 놀라게 하셨다. 그때부터 나의 마음에는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누구나 그렇듯 고등학교의 시간은 느리지만 빠르게 갔다. 체육관에 모여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발표되는 순간, 얼마나 환호했는지 모른다. 선생님께서 나의 담임 선생님이 되셨다는 사실에, 앞으로 남은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낼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잊지 못할 마지막 1년이 시작되었다.

 

나의 고3 시절은 비평준화 시대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모의 평가가 끝난 후 가채점은 당연하며, 다른 지역 학교와의 평균 점수와 바로 비교됐다. 몇 주 뒤 성적표가 나오면 1등부터 20등까지의 등수와 성명, 표준점수가 학교 게시판에 걸렸다. 게시판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아이들의 목표였고, 미래의 나의 모습보다는 당장 점수에 목마른 것이 현실이었다. 지난달과 다르게 이름이 올라가지 못한 아무개는 그날 점심을 먹지 않았다. 이름이 올라간 아무개는 으스대며 떠들다가 친구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받았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문화에 동화되고 있었다. 숫자가 주는 부담감에 힘겨워했고, 일희일비했다.

 

그러나 국어 시간만은 나에게 피난처였고, 위안의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수업은 항상 시와 함께 시작됐는데, 부드러운 저음으로 읽어주시는 시는 그날의 이미지가 되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시는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이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지만,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구절이 어린 나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여쭤보진 못했지만,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를 정하셨을까. 너무 늦지 않게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기를 바라셨을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구절로 인해 나의 세계가 흔들렸던 것만은 확실하다. 시를 쓰는 이유, 읽는 이유, 읽어 주는 이유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던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름도 괴상한 여름 방학 보충 수업 기간이었다. 학기 중과 달라진 것은 야간 자율학습을 안 하는 것이 유일한 이 기간에 아이들은 지쳐갔다. 보충 수업이 끝나면 2학기가 시작된다. 고등학교 3학년에게 여름 방학은 없다는 말이 현실화됐다. 보충 수업 종료를 며칠 앞두고, 우리 반의 누군가 장난스럽게 던진 계곡에 놀러 가자는 말에 선생님께서 흔쾌히 응하셨다. 장소 섭외와 학부모님의 허락, 아마도 관리자분들의 허락까지 도맡으시며 1박 2일의 여름 방학이 추진되었다. 시원하게 내리치는 폭포수를 보며 아이들은 환호했다. 선생님께서 힘들게 얻어 주신 기회라는 생각은 스무 살에서 한 살 모자란 우리 모두가 하고 있었나 보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나름의 질서도 지키며 해방감을 즐겼다. 계곡에서 선생님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깔딱 메기를 낚던 순간, 모닥불을 피워놓고 수박을 먹으며 선생님의 기타 소리를 듣던 순간이 눈에 선하다.

 

수험 기간 중간에 풀어지면 면학 분위기가 나빠진다는 누군가의 우려와는 다르게, 모두가 언제 계곡을 다녀왔냐는 듯 다시 의자와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선생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같은 교실의 친구들은 어느새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가 되었다. 지쳐 잠든 아이들에게는 다가오셔서 어깨를 주물러주시던 선생님도 함께 하셨다.

 

그 해도 변함없이, 수능 시험의 1교시 시작종이 울렸고, 4교시 끝 종이 울렸다. 나의 수험 생활을 평가하는 숫자를 바라보며, 그를 인정하고, 그와 타협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융 계열에 종사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던 나에게 어느 순간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고, 그 길을 보여주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그렇게 국어교육과에 지원했다.

 

1학년 수업을 듣던 중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교육 1호관 앞이니 잠깐 나오라는 말씀에 수업을 마치자마자 선생님 차에 올랐고, 선생님은 나를 이끌어 서점으로 향하셨다. 서점으로 향하는 내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선생님의 대학 시절 교수님들께서 아직 교편을 잡고 계셨고, 교수님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 상황이 새로웠다. 왜 서점으로 향하셨나 했더니, 임용 시험 준비 서적을 한 아름 사주시곤, 책 표지에 응원의 문구를 적어주셨다. 제자의 희망으로 국어교육과에 지원하게 했지만, 좁아진 임용문에 걱정이 많으셨나 보다. 대학 새내기에는 아직 임용이란 먼 일로 느껴졌지만, 선생님의 사랑만큼은 진심으로 다가왔다.

 

군에 다녀와 임용 시험을 진지하게 마주했다. 대학의 교육과정이 만들어 놓은 길에서 벗어나는 동기, 선배, 후배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시험 준비를 시작했고, 두 번의 시험을 연달아 낙방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없어지면, 자존감도 근거를 잃어버린다. 바닥이 된 자존감으로 마지막 일 년을 버텼고, 그렇게 준비한 세 번째 시험에서 1차 합격을 했다. 1차 합격자를 대상으로 학과에서 마련해 준 수업 시연장에서 몇 년 만에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선생님께 수업을 보여드린다는 사실에 2차 시험장에서보다, 지금 이 순간에 더 잘하고 싶었다. 제자의 수업 시연을 참관하신 후 평가의 자리에서, 평소 같지 않은 선생님의 떨리는 음성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제자의 수업을 마주한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합니다." 따뜻한 눈으로, 진심을 담아 전하시는 한 마디에 빨갛게 상처 났던 내 마음도 초록색으로 변해갔다.

 

첫 발령을 받은 지 5년이 흘렀다. 나의 삶에서 새롭게 부여된 여러 역할에 대한 기대에 잘 부응했는가는 의문이다. 공식적인 입시 상담에서, 비공식적인 복도와 운동장에서 교사를 꿈꾸는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들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대부분 "선생님은 언제부터 국어 교사가 꿈이셨나요?"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주어진 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한결같은 내용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이 국어를 가르치셨어."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되묻지 않는다. 아이들도 교사를 꿈꾸게 된 이유가 비슷할 것이다. 지금도 많은 스승은 새로운 교사를 만든다.

 

높은 곳으로 영전하신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교직원, 아이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실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신다. 또 교정을 아름답게 가꾸려 노력하실 것이다. 그렇게 자연을 사랑하신다. 나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선생님께 드리는 불비례라는 단어 뒤에는 무한한 존경이 숨어있다.

 

김재곤 선생님께

제자 이민호 불비례(不備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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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서로 아끼고 위해주는 소중한 만남

 

선생님의 허락도 구하지 못하고, 선생님과의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추억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은, 그때와 지금의 감정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 더욱 분명해지는 시간이었다.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며, 수상 소식과 제자의 부족한 글을 전해드렸다. 수기를 읽으신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마음을 울린다.

 

"서로를 아끼고 위해주는 만남,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정답고 알뜰한, 애틋한 인연만큼 소중한 것은 많지 않으리라 믿는다."

 

전국의 선생님이 이번 해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아이들과의 인연을 시작했고, 어느새 마무리를 향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등교해 수업을 듣는 아이들을 보면, 스승과 제자의 만남, 인연은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도 생긴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아이들을 위한 마음을 차근차근 풀어내고 계실 선생님들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지금까지 내가 받아온 사랑을 기억하며, 이제는 사랑을 주는 것에 익숙해지겠다. 알뜰하게 아이들을 사랑하겠다. 언제나 아이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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