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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라이프&여행] 익산에서 찾은 일제침탈의 역사

 

사람들에게 근대역사를 찾아 익산으로 떠난다고 하면 약간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보통 익산 하면 백제 무왕의 역사가 남은 곳, 곧 미륵사지나 왕궁리유적, 쌍릉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이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범주는 무척 큰 편이지만 익산 전체, 혹은 이리로 불렀던 그 일부의 공간은 근현대 역사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은 곳이다. 그러므로 개항장이 있던 군산이나 인천에 비해 덜 알려지긴 했지만, 익산도 그 시기 역사를 살필 때 중요한 공간이다.

 

군산 개항 후 몰려든 일본인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익산 지역이 역사에 크게 등장한 것은 백제 무왕과 관련이 있다. 무왕과 왕후의 주도로 미륵사를 짓고 왕궁리에 궁궐을 지었으니 그 유적은 지금도 남아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금마로 불린 시기였다. 그리고 고려 말 기황후의 외가라 하여 이 일대를 익주(益州)로 높였으며 그 이름이 바뀐 것이 지금의 익산이다. 이런 가운데 전주의 일부였던 남일면 일대가 1900년 전후, 익산에 편입되며 이리란 이름이 생겼다. 이리는 솜리로 부르기도 하는데 갈대밭 속에 숨어 있는 자그마한 마을, 솜 속에 들어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후 이리는 익산의 주요 공간이 되어 익산면으로, 그리고 이리읍과 이리시를 거쳐 1995년 익산군과 함께 합쳐져 익산시가 됐다. 이렇게 이리를 포함한 익산 일대에 큰 변화를 일으킨 사건은 옆 동네 군산의 개항이었다.

 

1899년, 군산이 개항되자 많은 일본인이 군산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다시 군산과 가까운 익산으로 모여들며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런 가운데 익산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이뤄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정면이 됐다. 일제는 1912년에 이미 경성부를 포함하는 12부를 중심도시로 만든 뒤 전국의 2500여 면 가운데 23개를 지정면으로 정한 것이다. 전라도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목포부와 군산부가 있었고 지정면은 전주, 익산, 광주였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익산은 광주, 전주와 비슷한 수준의 도시로 인정받았거나 혹은 그렇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가 자신의 구상에 맞게 행정구역을 개편하려는 의도였더라도 조금 놀라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에 익산을 중심으로 한 철도망의 존재는 크게 다가온다.

 

철도망의 중심이었던 ‘이리역’

 

지금 익산역은 1995년에 바뀐 이름이다. 처음에는 이리역이란 이름으로 1912년 호남선 건설과 함께 생긴 이후 1914년에 호남선이 완성되며 1915년, 영업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출발해 목포로 가는 호남선이 인근에 있는 전주 대신 익산을 지난 것이다. 1937년 완성된 전라선도 익산을 기점으로 삼아 여수까지 놓은 철도다. 장항선은 천안에서 익산을 잇는 철도이며, 군산선은 호남선의 지선으로 익산에서 군산까지 놓인 철도이니 일제강점기 이리역의 중요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익산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에 철도가 놓인 배경에는 익산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이점과 함께 일찍부터 일본인의 거주, 특히 일본인 농장주의 활동 근거지가 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915년 기준으로 익산(면) 인구를 보면 일본인이 2053명으로 한국인 1367명보다 많았다. 이 지역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던 일본인 농장주의 의견 내지는 이익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익산역 일대에 번화한 일본풍 거리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지금의 익산역 건너에 있는 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영정통’으로 불렀으니, 일본식 발음으로는 ‘사카에마치도리’다. 지금은 ‘익산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돼 있는 이 길의 중심에 익산근대역사관이 있다. 지금 역사관으로 쓰는 건물은 옛 삼산의원 건물이다. 근대건축물이 많은 곳임에도 근대역사관 건물은 금방 눈에 띈다.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의 창문에는 아치를 도입해 하얀색 장식을 해놓아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참고로 삼산의원의 삼산은 의사였던 김병수 선생의 호다. 김병수 선생은 군산의 3.1운동, 곧 3.5만세운동을 촉발한 인물이다. 군산 영명학교 졸업생인 그는 당시 세브란스 의전 학생으로 민족대표 중 한 명인 이갑성 선생을 통해 3.1운동 소식을 군산에 전하고, 독립선언서 95매를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 선생에게 전달했다. 이후 의사로 활동하며 여기 익산에서 병원을 낸 것이다. 그런 곳을 다시 근대역사관으로 꾸몄으니 역사의 흐름이란 묘하다.

 

2층으로 된 근대역사관은 익산의 일제강점기 모습을 살펴보기에 좋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물론 주요 독립운동가의 내력도 살필 수 있다. 조금 특별한 점은 익산 일대에 자리 잡은 일본인 농장과 농장주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를 보면 작은 규모의 농장은 수십만 평, 큰 곳은 수백만 평에 이르렀다니 정신이 어질어질할 정도다. ‘수리조합’과 그들이 만든 수리시설에 대한 내용도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수탈의 첨병, 일본 농장주의 흔적

 

수리조합과 관련 있는 역사 현장이 바로 옆에 있는 익산 왕도 미래유산센터다. 한눈에 보기에도 붉은 벽돌로 지은 근대건축물이다. 지금은 익산 지역의 문화유산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곳이지만 원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익옥수리조합 사무실이었다. ‘수리조합’은 일제침탈의 역사에서 조금 낯선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 수리조합의 조합원이 바로 일본인 농장주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비교적 저렴한 한국의 토지를 사들여 대규모 농장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리조합 주도로 운암제라는 댐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물이 등장했다.

 

익옥수리조합은 1920년에 생겼다, 그 중심에는 불이흥업주식회사를 운영한 후지이 간타로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일명 수리왕으로도 알려졌다. 이 지역에서 황등제와 대아저수지 등 관개시설 공사를 했고, 군산에서는 간척을 통해 600만 평에 이르는 농토를 확보했다. 당시 익옥수리조합의 농장주들이 소유한 토지는 3000만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제는 수리시설 건축 비용이 소작농에게 전가됐다는 점이다. 이들 수리조합에 소속된 농장에서 소작을 하던 한국 농민들은 높은 소작료를 내야 했다. 게다가 수리조합은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 중심으로 수리시설을 만들며, 강이나 하천을 이용해 농사짓던 한국 농민에게 피해를 입힌 것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수리조합 건물은 앞서 언급했듯이 다른 용도로 쓰고 있어서 외관만 볼 수 있다. 대신 수리조합에 관련한 내용은 근대역사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수리조합 건물 옆 창고는 지금 카페로 활용되고 있으니 잠시 쉬어가도 좋다.

 

이제 다음 답사를 위해 익산의 ‘주단 거리’, 곧 한복상점이 줄지어있는 거리를 찾아야 한다. 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도시의 골목을 걷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이렇게 근현대의 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에 도착한다.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주변에 몇 개의 기념 공간과 건축물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4.4만세 기념공원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익산의 가장 큰 만세운동인 1919년 4월 4일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곳이다. 물론 그전에도 익산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남부시장 장날에 맞춰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문용기 선생 주도로 이뤄진 이 날의 만세운동은 남전교회, 도남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 규모로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시위대 규모는 점점 커져 거의 1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시위대 진압이 시작됐는데 거기에는 헌병이나 소방관뿐 아니라 일본인 농장의 관리인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갈고리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했으니, 이 과정에서 문용기 선생 등 6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었다. 문용기 선생은 연설에서 “시민 여러분, 나는 죽어서도 우리 대한의 독립과 신정부의 건설을 위해 온몸을 바쳐 기도하겠소, 여러분을 대한민국의 신국민이 되도록 죽어서도 이 땅을 지키겠소”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지금 4.4 기념공원에는 문용기 선생의 동상과 그의 뜨거운 마음을 기리는 순국열사비가 세워져 있다.

 

순국 열사 기린 4.4만세기념공원

 

그렇다면 기념공원은 왜 여기에 있으며 농장 관리인들이 왜 시위 진압에 나섰을까. 이 장소가 바로 오하시 농장의 사택을 포함한 농장의 중심 영역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일본인 오하시는 익산에서 유명한 농장주였다. ‘익산의 오하시인가, 오하시의 익산인가’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익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달리 일본인의 농장이 시위대의 목표였던 것이다. 오하시 농장은 익산에서 단순한 회사가 아닌 수탈의 상징이며 식민지 권력을 대표하는 기관이었다.

 

이런 내용을 생각하고 이들 공간을 다시 살펴보자. 지금 기념공원 앞 번듯한 일본식 건물은 이 시기 오하시 농장의 사택 건물이었다. 기념공원 뒤에는 농장 사무실 건물이 있다. 사택 건물과 달리 완연한 일본식 가옥이다. 벽돌로 지은 옛 화교학교 건물 뒤에 있어 잘 살펴보아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화교학교 옆 길쭉한 건물 역시 오하시 농장과 관련이 있다. 창고라고도 하고 농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숙소라고도 한다. 한쪽은 새로 지붕을 올려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다른 한쪽에는 일본식 건물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처럼 익산역 앞, 그리고 한복거리 일대에는 일제강점기 역사의 흔적이 있다. 개항장이 수탈의 최종 관문이라면 익산은 수탈에 이르는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약간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일제강점기,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 국토가 편제됐으며, 그 뒤에는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농장주가 침탈의 첨병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익산을 살피는 것은 군산이나 인천을 보는 것과 다른 부분의 역사를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일제강점기, 일제 침탈에 이르는 연결고리의 하나를 익산에서 찾은 느낌이 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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