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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와 놀부의 공통점을 말해 보라는 질문에 한 초등학생이 이렇게 답을 한다. “팔자의 기복이 심하다.” 재치 만점이다. 대개 공통점을 말하라면, ‘같은 성씨이다’, ‘제비와 인연이 깊다.’ 등을 댄다. ‘팔자의 기복이 심하다는 건 흥부나 놀부나 인생에서 반전(反轉)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이 학생의 인생을 읽는 지혜도 대단하다.

 

내가 보았던 영화 중에 반전의 묘미를 인생론적 깊이로 다가가게 해 준 영화가 있다면,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를 들겠다. 1996년 제작, 에드워드 노튼(Edward Harrison Norton)과 리처드 기어(Richard Tiffany Gere)가 주연한 이 영화는 법정 영화의 일종이다. 나는 이 영화를 수년 전 TV에서 보았는데, 몰입해서 재미있게 보았다. 개요는 이렇다.

 

시카고에서 존경받는 가톨릭 대주교 러쉬맨이 피살된다. 현장에서 붙잡힌 열아홉 살의 용의자는 에런이다. 변호사 베일은 에런의 순진함을 보고, 그를 무보수로 변호하려 한다. 검사 시절 베일의 동료이었던 여검사 자넷이 이 사건의 검사를 맡으면서 팽팽한 대결이 시작된다.

 

베일이 만나 본 에런은, 자신은 범인이 아니며, 현장에 그 누군가가 있었다고 말한다. 겁이 많고 말을 더듬는 에런을 보며, 베일은 특유의 촉으로 무죄임을 확신한다. 그러나 이후 검사 측의 치밀한 수사가 이루어지면서 에런에 대한 의문점은 다시 부각된다. 새로운 증거들을 두고서 베일은 에런을 만나 이를 확인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에런은 광기의 분노를 베일에게 드러내며 심신상실의 상태로 빠진다. 깨어난 에런은 자신이 그랬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변호인 베일은 에런의 정신 감정을 병원에 의뢰한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에런을 범인이 아닌, 정신 질환자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판사와 검사는 베일의 주장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정에서 베일은 검사에게 에런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비디오 테이프를 준다. 물론 무죄를 얻기 위한 전략이다. 검사는 이 증거 자료로 에런을 매섭게 추궁한다. 에런은 법정에서 발광하며 검사의 목을 조르는 난폭함을 보이고 정신을 잃는다. 에런이 정신 질환자임이 법정에서 입증된다. 에런이 퇴정하고, 판사는 에런의 무죄를 선언한다. 정신병원 입원 치료 후 석방할 것을 명한다.

 

다음날 베일은 구치소에 있는 에런에게 말한다. 너의 정신질환이 인정되어 너의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무죄 판결이 났다. 그때, 에런이 무심결에 말한다. 법정에서 자기가 목을 졸랐던 검사가 큰 부상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전해 달라고 한다. 이 대목이 엄청난 반전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베일은 육감으로 에런이 이상하다고 느낀다. 그렇다. 정신 발작 질환자는 발작 중에 행한 일을 기억할 수 없다. 에런이 했던 말이다. 그런데 에런은 법정에서 자신의 정신 발작 중에 한 일을 저렇게 정연하게 기억하다니!

 

나가던 걸음을 돌려 베일이 에런에게 이 모순을 따진다. 에런이 말한다. “그동안 내가 이중인격자의 이중성을 연기한 걸 당신은 몰랐느냐? 몰랐다면 당신은 미숙한 변호사이다. 대주교를 살인한 이후 내가 행한 연기는 내가 생각해도 예술이다.” 에런은 베일을 조롱한다.

 

그 목소리를 뒤로하며 베일이 에런의 방을 나오는 데서 영화는 끝난다. 명 변호사로서 세간의 명성에 집착하며 재판에 임한 그는 에런의 유죄를 눈치챘던 건 아닐까. 그래서 정신질환자임을 보여 주어 무죄를 구하려 했던 것 아닌가. 이 엄청난 반전이 그의 자업자득임을 뒤늦게 발견했을까. 욕망이 불러오는 인생사 반전의 소용돌이를 응시해 본다.

 

아일랜드의 작가로,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 -1989)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읽어보면 참으로 막막하고 단조롭다. 희곡으로 읽기가 너무 무덤덤하여 연극으로 보곤 했다. 연출가들은 이 희곡을 어떻게 무대의 극으로 보여 주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베케트의 이 작품을 무대 위에 상연된 연극으로 세 번 보았다. 이 연극은 극단 산울림이 신촌 ‘바탕골’ 소극장에서 수십 년 동안 무대에 올렸었다.

 

나는 베케트의 연극이 부조리극으로서 실존주의 사상을 담았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를 나만의 체험적 감수성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비평가들이 각기 특색 있는 해석과 재해석을 내어놓았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와 몰이해의 중간쯤에 있는 듯했다. 다만 의미 있는 ‘지적 허영’을 구가할 수 있다는 점, 그것 하나는 분명했다. 그 허영은 나이가 들면서 허영으로만 떠돌지 않고, 무언가를 오래 응시할 수 있는 태도로 전이되었다.

 

이 연극에는 ‘고도(godot)’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이 나온다. 그들은 떠돌이다.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시골길에 두 사내는 ‘고도’란 미지의 인물을 기다리는 중이다. 고도는 곧 온다고 하면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고도를 끊임없이 기다리면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독자나 관객은 단연 ‘고도’가 누구인지를 해석의 관심사로 삼는다. 일찍이 이어령 교수는 작품을 이렇게 해석했다.

 

“대체 고도는 누구인가. 그들은 왜 무엇 때문에 기다리는가. 외마디 말로 주고받는 단조로운 대화, 나무 한 그루밖에 없는 무대, 대체 이것은 연극이기라도 한 것인가.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을 보고 나온 사람들은 엉터리 속임수에 놀아났다고 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고 신문들의 평은 대단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당시 관객들은 ‘고도’를 신(神)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베케트는 이 연극에서 신을 구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자기 작품의 해석에 대해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는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지만, 삶의 의미와 삶의 무의미를 동시에 깨닫는 인간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단조로운 이야기인 듯하지만, 해석의 깊이와 다양성은 무한하다. 그것이 재미라면 재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반전이라고는 없는 이야기이다.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목적도 이유도 잘 드러나지 않는 ‘기다림’을 인생에 대한 암시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그 어떤 반전도 들여놓지 않는 이야기로서 주목한다. 반전이 없는 이야기는 매양 재미없는 이야기일 뿐인가. 반전이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도대체 어떤 인간과 어떤 인생을 반영할 수 있는가. ‘반전의 인생사’, 그 기저에는 모든 반전을 수렴하는 ‘생의 본질’이 ‘무반전(無反轉)의 방식’으로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변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지는 단조로운 것들은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어떤 본질’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고도를 기다리며’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작가가 빈번한 반전을 구사하면 이야기는 타락한다. 막장 드라마는 지나치게 반전에 의존하는 데서 생긴다. 작품에 반전이 부당하게 많이 등장하면, 작품은 부자연스러워진다. 그 부자연스러움은 바로 삶의 본질이 왜곡된 데서 생겨난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가 ‘반전’에 의존하여 흥미를 끌려고 하면, 통속해지기 마련이다. 반전에 유혹을 받는 작가는 삼류 작가이다. 객석도 마찬가지이다. 반전을 소비하고 싶은 관객은 삼류 관객이다.

 

인생사 모든 곳에 반전이 있다. 당면한 고난을 물리치기 위해 반전을 꾀하는 것은 그 의지가 돋보인다. 인간이 삶을 향해서 던지는 순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반전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나의 운명을 가로막고 나타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으로 나타난 반전이 나를 가로막는다. 횡재(橫財)든 횡액(橫厄)이든, 그렇게 찾아오는 ‘횡(橫)의 운수’가 바로 ‘운명적 반전’이다. 어쩌겠는가. 이런 때야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변화 없는 ‘보편의 본질’에 순종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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