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07 (화)

  • 맑음동두천 -0.2℃
  • 구름많음강릉 7.8℃
  • 맑음서울 3.2℃
  • 박무대전 1.3℃
  • 박무대구 3.8℃
  • 구름조금울산 8.0℃
  • 박무광주 6.0℃
  • 맑음부산 11.8℃
  • 맑음고창 2.4℃
  • 맑음제주 10.8℃
  • 맑음강화 2.2℃
  • 맑음보은 -0.8℃
  • 맑음금산 -1.5℃
  • 맑음강진군 6.5℃
  • 구름많음경주시 3.5℃
  • 맑음거제 9.6℃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동서양의 옛날 신화나 전설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돌아보지 말라’라는 주제(모티프)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지옥에서 어려운 사명(mission)을 천신만고 끝에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주인공이 마지막 탈출의 끝부분에서 “절대로 돌아보지 말라”라는 사항을 지키지 못하여 돌이 되어 버리거나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는 세계 곳곳의 민담이나 전설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돌아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런 이야기에서 ‘돌아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지옥 마당을 빠져나오는 주인공의 뒤에서 도대체 무슨 소리가 들렸기에 그걸 끊지 못하고 돌아본다는 말인가. 당사자에게는 아무리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부르는 소리 아니겠는가. 예컨대 육친으로서 애틋하기 그지없는 자식의 외마디 부르짖음이라면 어떻게 안 돌아보겠는가. 절대적 사랑을 쌓아 온 연인이 울부짖으며 함께 데려가 달라는 고통의 호소라면 어떻게 끊어버리겠는가. 산다는 것은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끊을 수 없는 인연들을 쌓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차원을 벗어난 신과 같은 존재들은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신적인 존재에게는 ‘돌아보지 말라’ 따위의 옵션이 따라붙지도 않는다.

 

그렇다. 단칼에 자르듯이 끊는 일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소설가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는 담배 끊기의 어려움을 특유의 유머로 구사하였다. 그의 말은 이러하다. “세상에서 담배 끊기처럼 쉬운 일은 없다. 나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도 벌써 수십 번 끊었으니까.” 

 

무언가를 끊게 하는 힘은 순간의 단호한 결단에서 비롯되는 것 같지만, ‘끊기’를 마침내 성공시키는 것은 그 끊음을 이어져 가게 하는 데에 있다. 그간 담배를 끊어 왔던 시간, 그 시간에 대한 존중이 ‘담배 끊기’를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이어져 오던 것을 끊는 것이 어려운 만큼 끊음 그 자체를 쭉 이어가려는 것도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다. 끊음과 이어짐이 각기 서로의 내부에 들어 있어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섭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유신이 기생 천관녀를 가까이하다 끊게 되는 이야기에도 평상인 같지 아니한 신화적 요인이 있다. 이 이야기는 고려 명종 때의 문인 이인로가 쓴 설화문학집 ‘파한집(破閑集)’에 실려 있다. 원문을 쉽게 번역한 대목을 소개한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람과 교유할 때 명심하도록 날마다 엄한 가르침을 더하였다. 하루는 김유신이 기생 천관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이에 어머니는 김유신과 얼굴을 마주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주야로 너의 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공명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의 영광이 되어야 하거늘 지금 너는 술을 파는 아이와 함께 유희를 즐기며 술자리를 벌이고 있구나” 하면서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김유신은 즉시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그 집 문 앞을 지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다. 하루는 그를 태운 말이 옛길을 따라서 천관의 집에 이르고 말았다. (천관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눈물을 흘리며 나와 맞이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깨우친 바가 있어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은 버리고 되돌아왔다. 그녀가 원망하는 노래를 한 곡 지었는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경주에 천관사가 있는데, 즉 그 집이다.

 

- 엄광용, <역사 속의 여인들>/월간 조선 2019.12

 

무엇이 김유신에게 ‘끊음’을 요청하는가? 표면으로는 어머니의 가르침이지만, 그것은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으로 나타나는 동양적 경세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렇게 보면 끊어짐을 겪어내는 천관녀의 모습이 짠하다. 천관사를 지어 그녀를 달래려 한 신라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끊다’로 행해지는 이데올로기,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 것일까. 아니, 그마저도 김유신의 아우라를 더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인간의 ‘끊는 행위’에는 인간의 두 가지 심리가 있다. 하나는 살려는 의지의 심리에 닿아 있다. 개과천선한 폭력배가 “이 어둠의 세계에 발을 끊겠다. 새 인생을 살겠다.”라고 하는 것은 의지를 ‘끊는다’로 보여주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끊는 행위’가 좌절이나 절망의 심리에 연결된 경우다. ‘극단적 선택’이란 것도 끊는 행위이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기 때문이다. 삶이 혹독한 좌절을 맞아 목숨을 끊는다면 생으로서는 이처럼 치명적인 변화가 또 어디에 있으랴. 그러고 보니 인간만이 끊을 수 있구나. 

 

작가가 작품 쓰기를 끊는 것이 ‘절필’이다. 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시인 백석의 절필을 그린 작품이다. (물론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이 작품에 대한 수많은 정의 중 하나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어쩔 수 없이 절필에 이르는 백석의 ‘작가로서의 마지막 일곱 해, 즉 1957년에서 1963년에 이르는 시기, 그의 현실과 내면을 따라가며 헤아려 보는 작품이다. 

 

소설(fiction)이 어떤 진실을 큰 울림으로 불러오는 데는 사실(fact)보다 단연 앞선다. 사실만으로는 보여 줄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치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인물의 고뇌를 향하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백석이 절필을 향하는 마음, 절필과 대면하는 그의 현실이 너무도 아리고 무겁게 다가와서 나는 그에 대한 연민과 그가 처한 억압 현실에 대한 절망적 분노 사이를 서성거렸다

 

1957년은 북이 개인 숭배의 통치를 본격적으로 밀어붙이는 해이다. 소련에서는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노골적 개인 숭배가 사라지던 즈음이다. 북은 이런 풍향이 밀어닥칠까 하여 소련 유학생들을 소환하고 대대적인 사상강화 운동을 한다. 작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과 수령을 절대 찬양하는 작품 쓰기를 강요한다. 백석은 고뇌한다. 그는 시를 쓰지 못한다. 동요를 쓰거나 시를 번역하는 일로 작가 동맹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소임을 유지한다. 그러나 당국은 작품을 쓰지 않는(못하는) 그를 닦달한다. 여러 차례의 자기비판에서 거듭되는 경고를 받으면서 그는 마침내 양강도 삼수로 쫓겨간다. 삼수 관평리에 있는 양 치는 축사에서 일하는 작가 파견원이 된 것이다. 그는 이미 시를 잊었다. 

 

그의 절필을 상상력으로 복원해 가는 작가 김연수의 고뇌는 곧 시인 백석의 고뇌일 터인데, 참으로 아프고 아름답다. 백석은 ‘글 쓰는 자아’를 조용히 서서히 지워나가는 듯하다. 절필이 특별한 의지라고 할 것도 없다. 시 쓰기는 저절로 끊어진 듯해 보인다. 이 경우 시를 끊은 그에게서 ‘끊다’는 타동사로 느껴지지 않고 자동사로 느껴진다. 그 어떤 의지적 절필보다 훨씬 더 막막하고 공허하여 마치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가듯이 시가 시인으로부터 조용히 철수해 버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절필이 찾아온 것처럼 보인다. 백석의 절필이 어떤 경지인지를 소설 한 대목에서 공유해 보기로 하자.

 

구름이 걷힌 밤하늘 쌓인 눈 위로 달빛이 쏟아진다. 사무실 옆 양들이 자는 축사(畜舍)로 양들을 몰아넣고 나니, 새로 쌓인 눈 위에 양의 발자국이 찍혔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백석은, 이곳 삼수(三水)군에 오던 날 혜산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그를 시인 백석으로 알아본 삼수읍 초등학교 교원 서희에게서 들었던 자신의 시,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를 노트에 썼다. 그 제목 왼쪽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던, 그 시의 글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그대로 받아적었다. <중략> 그리고 그 옆으로 오래전 자신이 쓴 또 다른 시구를 적어 내려갔다. 글자들이, 문장들이, 사투리와 비유들이, 저마다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보기가 참 좋았다. 그게 좋아 백석은 페이지를 넘겨 또 썼다. 백석은 쓰고 또 썼다. 다행히 밤은 길었으므로 백석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원한다면 평생 써온 시들을 모두 그 노트에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한 편의 시를 쓰고 쭉 읽은 뒤, 종이를 찢어 난로에 넣고, 그 불꽃을 바라보는 일을 반복하다가 그는 노트에 ‘관평(舘坪)의 양’이라는 새로운 시의 제목을 썼다. 마찬가지로 그 왼쪽으로 글자들이 쭉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보이는 대로 받아 적었다. 다 적고 나니 마음에 흡족했다. 그리고 그는 종이를 찢어 난로에 넣었다.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쓴 그 시도 포르르 타오르다 이내 사그러들었다.

 

-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7쪽/일부 표현은 필자 조정

 

백석은 시를 끊었다. 하지만, 끊지 않았다. 끊지 않았지만 끊었다. 절필했지만 그는 썼다. 궁벽한 삼수의 추운 달밤 축사에서도 저렇게 신들리듯 쓰지 않는가. 그는 계속 쓰면서도 절필한다. 아침이 오기 전에 바로 태워버림으로써 절필한다. 이후 그는 더 오래 살았지만, 그에게서 시를 쓰는 일은 전해지지 않는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노라면, 백석의 절망은 위대해 보인다. 끊는다는 일 속에 이런 위대한 인간의 절망이 있구나. 아름다운 좌절이 있구나. 그의 절필 자체가 한 편의 우주 같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관련기사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