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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B와 대화하고 있다. A가 말한다. “그 사람들, 이단 집단이야.” “이단은 아니래.” “이단이라던데?” “이단 아니라니까.” “그럼 뭐야?” “이단 아니고, 삼단이야. 삼단!” 이견으로 긴장이 감도는가 했는데, 급전직하 맥 풀리는 대화로 변전한다. 서로 헛웃음이 번진다. 이단임을 주장했던 A는 B가 ‘삼단’ 운운하니, 너 지금 장난하는 거냐고 역정을 내려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B의 우스갯말에 그 이단을 더 치명적으로 희화화하는 의도(이단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비아냥거림)가 들어 있다. 삼단이라는 말에 묘미가 아주 없지는 않다. 말의 소리나 의미를 엉뚱하게 비틀어서 우스갯말로 만드는 전형적인 예다.       


국민이 다 아는 우스갯말을 나는 늦게야 듣고서,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었다. 친구가 가르쳐 준다. “1 더하기 1은 뭐지?” 나는 별생각 없이 ‘2’라고 대답한다. 친구는 ‘너 이런 거, 잘 몰랐지’ 하는 표정으로 말해 준다. “2가 아니고, ‘과로’야 ‘과로’!” “그게 왜 과로야?” “이미 일이 있는 데에 또 일을 더 해야 하니, 그러니 과로라는 거지.” 웃기는 구조는 좀 단순해도, ‘피로 사회’로 치닫던 시대상을 담고 있다. 친구가 다시 말한다. “그러면, 2 더하기 2는 무엇이 될까?” 이걸 ‘4’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건 알겠는데,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친구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남은 모르고 나만 알 때는 그 의기양양함을 숨기기 어렵다. “뭐기는 뭐야 ‘덧니’지. 있는 이에 또 이가 덧붙었으니, ‘덧니’가 되는 거지.” ‘2’를 ‘이(치아)’로 살짝 갈아치운 것이다. 그렇구나. 덧니가 되는구나. 요즘은 치과에 가서 유치(乳齒)를 때맞추어 빼니, 덧니 가진 아이들이 없다. ‘과로’는 바로 들어오고, ‘덧니’는 왠지 낯설고 낡은 느낌이다. 현상이 없어지면 말도 조용히 사라진다. 


이런 우스갯말은 말소리와 말뜻을 일부러 비뚤어지게 주물럭거려서, 정상적인 말의 쓰임을 살짝 비틀어 놓음으로써,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잠시 웃기는 하지만, 생각할수록 재미가 솟아나, 견디지 못하게 빠져드는 유머까지는 아니다. 말 사용의 규범과 질서를 살짝 어겨 보는 데서 오는 가벼운 재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의가 번뜩이는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식의 유머가 그들의 감수성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다소 억지스럽게 난센스를 만들어 즐기는 이 말놀이가 좀 따분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서는 이를 ‘아재 개그’라고도 한다. 나이 든 아저씨뻘쯤 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유머라는 것이다.


아재 개그도 그 나름의 시대적 진화를 한다. 광복 이후 대중들에게 크게 인기가 있었던 이른바 ‘만담(漫談)’이란 장르에서 웃음을 만들어 내는 패턴이 지금의 ‘아재 개그’와 상당한 유사성을 지녔다. 내가 기억하는 장소팔·고춘자 콤비의 만담이나, 구봉서·배삼룡 콤비의 만담은 아재 개그의 저장고 같은 느낌을 준다. 지금의 박명수나 조세호의 유머 스타일에도 아재 개그의 전통이 모르는 중에 서려 있다.


내가 40여 년 전 듣고 자못 경탄했던 것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구원받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사람은?’ 정답은 ‘십 원 받은 사람’이다. 자본의 가치를 우선하던 세태를 본다. ‘헌병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답은 엿장수이다. 엿판을 지게에 지고 시골 마을을 돌아나가는 엿장수 아저씨는 돈이 궁한 시골 마을에 빈 병(헌 병)을 다 거두어 가며, 그걸 엿으로 바꾸어 주었다. 궁핍한 시대의 풍경이 아재 개그에 걸려 있다. 지금은 그런 엿장수도 없고, ‘헌병’이란 말도 없어졌으니(‘군사 경찰’이란 말로 바뀌었다.) 아재 개그도 자기의 시대를 증언하고는 수명을 다한다. 

 

어린이들이 잘 쓰는 감탄사 등을 이용하여, 세대 구분 없이 즐기는 아재 개그도 있다. 이런 개그다. “소나무가 삐지면 무엇이 되지?” 정답은 ‘칫솔’이다. 고정관념의 구덩이에 덜컹 빠지게 하는 것도 있다. “20층 높은 빌딩에서 세 사람이 떨어졌는데 부상자가 한 사람도 없다. 왜 그럴까? 모두 사망자이니까.” 이 개그에는 재난 범주에 포함되는 말(부상자/사망자)끼리의 관계를 살짝 몰각하도록 하는 전략으로, 쓴 웃음을 만들어 낸다. 제법 머리를 쓴 우스갯말이다. 

 

‘아재’는 아저씨라는 말의 애칭쯤으로 쓰는 말이다. 아저씨이기는 한데, 아저씨보다는 훨씬 더 정겹고 친숙하여, 마치 형제나 친구처럼 마음 편한 관계임을 담고 있는 말이 ‘아재’이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남자 형제들을 부르거나 가리킬 때, ‘아저씨’를 쓴다. 촌수로는 삼촌(三寸)인데, 요즘은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고, ‘삼촌’이라 부르는 경향을 본다. 언어 규범에 맞게 쓴다고 할 수는 없다.


‘아저씨’ 또는 ‘아재’는 꼭 삼촌 촌수에만 쓰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촌 형제들 즉, 5촌 촌수의 남자 어른들도 아저씨라 불렀다. 이런 식으로 7촌·9촌 등의 홀수 촌수 남성들은 모두 아저씨라는 말로 불렀다. 촌수가 멀어지면 ‘아저씨뻘’이라는 표현으로 촌수 관계를 나타내었다. 물론 그런 아저씨들도 얼마든지 ‘아재’로 불릴 수 있다. 


요지는 이렇다. 아재(아저씨)는 가까운 촌수이든 먼 촌수이든, 나보다 높은 항렬의 어른을 뜻한다. 그러므로 아재 개그는 그런 어른 세대들이 쓰는 좀 고리타분한 우스개로 인식된다. 참신함이나 영향력(impact)이 2% 모자라는 유머라는 뜻이 은연중에 들어 있다. 아재 개그로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재 개그의 아재는 꼭 아저씨만 뜻하는 건 아니다. 직장의 상사, 학교의 선생님, 동문회의 선배, 고향의 어른 등 폭넓게 적용된다. 꼭 남자만 뜻하지도 않는다. 아줌마 중에도 아재 개그의 달인들이 많다. 


아재 개그의 미래는 어떨까. 아재 개그도 미디어 생태와 문화 변이에 따라 눈부시게 진화한다. 유튜브(YouTube)에도 아재 개그는 풍성하게 등장한다. 젊은이들 감각에 맞는 엔터테인먼트 문화로도 자란다. 아재 개그 퀴즈대회도 열리고, 아재 개그 배틀 유튜버도 있다. 인터넷에는 끊임없이 개발되는 아재 개그 아이템 창고도 있다. 젊은이들이 주인공이다. 아재 개그에 몰입하는 여학생들과 초등학생들도 의외로 많다. 아재 개그는 우리말의 음운·형태·의미·어휘 등에서 장난치고 놀 수 있는 소스가 무한정 들어 있음을 잘 활용한다. 그래서일까. 학생들이 접근하기 좋다.


인기 있는 아재 개그 유튜버에서 금세 이런 걸 찾아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잡아당기는 자석은 ‘노약자석’이란다. 추장보다 높은 사람은 ‘고추장’이란다. 흑심이 가득한 놈은 연필이란다. 보내기 싫을 때는 주먹이나 가위를 내란다. 가장 빠른 떡은 ‘헐레벌떡’이란다. 설날 세뱃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사람은 ‘설거지’란다. ‘가다’의 반대말은 ‘노가다’란다. 


어떤가? 고리타분한가? 오히려 참신하고 현란하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이를 만들고 즐기는 이들이 젊은이들이라니, 아재 개그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한다. 

 

정작으로 아재 개그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바는 따로 있다. 아재 개그가 지탄받는 이유는 아재 개그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아재 개그를 구사하려는 상황이나 심리에 있다. 상하 권력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모인 상황에서 권위적인 윗사람이 구사하는 아재 개그는 자칫 폭탄이 되기 쉽다. ‘나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야!’ 하는 걸 과시하려는 욕구가 앞서면 더욱 그렇다. 아랫사람들은 그 아재 개그가 재미가 있든 없든, 그 아재 개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든 아니든, 윗분의 아재 개그에 무조건 웃어드려야 한다.      

  
권위주의 의식이 강한 분들일수록 성취동기도 강한 편이어서, 반드시 웃기고야 말겠다는 의도가 지나치게 강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억지로 무리하게 웃기려는 것까지도 불사한다. 이런 아재 개그를 듣고, 정말 우스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반응을 보여 드려야 하는, 아랫사람들은 마침내 아재 개그에 대해서 넌더리가 나는 것은 물론 적개심까지 느낀다. 억지로 웃어드려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연민을 느낀다고나 할까. 


이제, 아재 개그의 비극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이런 권위주의 어른들일수록, 그가 가진 권력이 강고하면 할수록, 자기가 정말 좌중을 충분히 웃기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누가 찔러서 눈치채게 해 줄 수도 없다. 그저 예의로 웃어드리는 것을 진짜 너무너무 재미있고 우스워서 웃는 걸로 더욱 굳게 믿는 것이다. 이거 재미없는 거 본인만 모르는 격이니, ‘벌거벗은 임금님’이 따로 없다.      

  
좋은 유머의 순기능은, 좌중 그 누구도 마음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 좋은 유머는 좌중 그 누구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만약 누구 하나를 좀 망가뜨려서 나머지 모두에게 엄청난 즐거움을 선사하더라도, 그 유머는 실패한 유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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