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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도산서당, 그리고 도산서원

 

[박광일 여행작가·(주)여행이야기] 도산서원은 역사 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안동에서도 손꼽히는 답사 장소다. 최근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그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었다면 올해 가을 도산서원은 각처에서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게 됐을지도 모른다. 역사 유적은 과거 역사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 역사는 때로 다양한 시기, 다양한 층위가 겹쳐있는 경우가 나타나곤 한다. 최근에는 어떤 역사 유적이 보존되고 유지되는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는 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산서원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적어도 세 개의 시기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세운 시기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무척 아꼈으며 긴 시간, 노력을 많이 들여 공간을 꾸몄다. 그러니 도산서당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도산서원 이해의 핵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도산서당이 생기고 유지된 시기다. 1570년, 퇴계 사후 제자들이 서원을 짓는 것을 결정하며 사액을 받고 도산서원이 됐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의 상당 부분이 이 시기와 관련이 있다. 보통의 역사 유적이라면 여기서 끝나겠지만 하나의 시기를 더 살펴봐야 한다. 국가 차원의 관심을 받으며 1969년 이후 이른바 ‘도산서원 보수정화’와 안동댐 건설 이후 도산서원 주변이 변경된 모습이다.

 

퇴계 스스로 고르고 만족했던 ‘터’

 

이런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도산서당을 지을 당시 본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동시에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문화유산의 갖는 본래 의미를 살피지 않는다면 그 본질이 가릴 수 있음도 생각해 보려고 한다. 더불어 현재 우리가 만나는 역사 유적은 어떤 경우에는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짓기 전 이미 여러 번의 서실, 서당을 짓고 운영한 적이 있다. 34세 때 지산와사를 시작으로 양진암(49세), 자산정사(50세), 한서암(50세), 계상서당(53세), 귀몽대(56세)가 그것이다. 이런 건축 이력은 스스로 공부하기 위한 공간을 만든 것에서 시작했지만 퇴계의 명성을 듣고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사람이 늘어나며 서당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 공간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작은 규모로 한계가 있었으니 더 큰 서당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왕 서당을 규모 있게 짓기로 했으니 퇴계 스스로 만족할만한 공간을 구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도산서당의 터를 찾은 것은 제자들이었는데 퇴계가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확정했다. 서당 터를 정하는데 까다로운 취향을 보여줬던 퇴계가 만족할만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전의 계상서당이나 한서암이 있던 곳과 달리 너른 시야를 가진 곳이었으며 고향 집과 청량산, 그리고 존경하는 선배였던 농암 이현보를 찾기에도 편한 길목이었다. 퇴계는 58세 되던 해에 설계도를 바탕으로 도산서당 건축을 시작했다. 시공에 참여한 이는 법련이란 승려였으며 법련이 입적하면서 정일이란 승려가 이어갔다. 그렇게 60세 되던 해에 도산서당 건물을 완성했다. 퇴계가 머물 완락재와 서당을 관리할 사람이 머물 암서헌을 포함하는 3칸의 조그마한 건물이다. 
 

 

이어 학생들이 머물 기숙사 역할을 하는 농운정사, 그리고 또 하나의 서재인 역락서재(역락재)와 서당 전체를 관리할 고지기가 머물 하고직사까지 4동의 건물이 완성되며 도산서당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도산서당은 지역 이름을 딴 것인데, 이 지역을 도산(陶山)이라고 한 까닭은 질그릇을 굽던 곳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산이 접힌 모습이 빚은 것처럼 보여 도산이라고 한 것 같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만큼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니 도산서당과 함께 자그마한 연못인 몽천, 그리고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와 난초를 심고 즐길 절우사, 그리고 주변 풍광 곳곳에 이름을 붙여 이 지역을 사랑스럽게 여겼다. 제자들을 기르며 말년을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장소가 된 것이다.
 

1570년, 퇴계 사후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으로 바뀐다. 흥미로운 부분은 퇴계를 모신 서원이 조선 시대에 31개나 됐으니 중심은 당연히 도산서원이 돼야겠지만 시기상으로 첫 번째 서원은 도산서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 의외지만 영천의 이산서원이 퇴계를 모신 첫 번째 서원이다. 그 배경에는 이산서원 운영에 퇴계가 깊숙이 간여하며 ‘이산서원 원규’를 정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이산서원이 제향할 인물을 정하지 못해 따로 향사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산서원은 1573년, 사액을 받음으로써 퇴계를 모신 첫 번째 서원이 됐다.
 

도산서원 설립 논의는 퇴계의 3년 상이 끝난 1572년,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나 여러 제자가 참여하며 논의가 길어졌다. 1574년에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돼 다음 해, 완성됐다. 정부에서 도산서원으로 사액 받았으니 당대의 명필 한호의 글씨다. 도산서원은 강학 공간인 전교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곧 박약재와 홍의재가 자리를 잡고 제향공간으로 상덕사를 둬 퇴계(나중에 월천 조목을 추가 배향)를 제사 지냈다. 목판 등을 보관할 장판각, 제사 준비를 위한 전사청, 그리고 서원을 관리할 사람이 머물 상고직사가 완성되며 도산서원 영역이 갖춰지게 됐다. 

 

1969년 보수정화사업으로 큰 변화

 

이후 책을 보관할 공간이 부족해지며 1819년 동광명실, 1930년 서광명실을 지으며 현재의 모습이 됐다. 도산서당 영역에서 아쉬운 점은 바로 이들 동서광명실이다. 바람이 잘 들고 서원 내 동선상 유리한 곳을 골랐다고 하지만 전교당 마당에서 멀리 보이던 경치를 막아버렸다. 대체로 옛 건물이 산에 기대 지을 때는 경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도산서원의 마당은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원 가운데 병산서원을 좋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는 만대루에 올라 강을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장점으로 꼽는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조금은 동선이 복잡해 보이는 편이기도 하다. 사당인 상덕사가 한쪽에 치우친 느낌을 주는 것도 도산서당 위 공간을 활용해야 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도산서원은 도산서당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서광명실과 동광명실 앞으로 공간을 설정해 두 지역을 분리했다. 그런 점에서 옛사람들은 도산서원을 구경할 때 서당을 거쳐 자연스럽게 서원으로 향하며 그 시간의 변화를 느꼈을 것이다.
 

 

도산서원은 1969년 보수정화사업을 거치며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먼저 유물 전시관인 옥진각이 들어서며 서당과 서원의 영역은 완충지대 없이 붙어버렸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서당을 지나치고 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다. 또 담장을 모두 권위적으로 바꾸면서 서당이나 농운정사에서 밖으로 향하는 시선이 모두 차단됐다. 여기에 더해 1976년 안동댐이 생기며 강에서 서원을 향해 올라오던 경사지는 넓은 마당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지금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처음 서당을 지을 때 생각했던 부분과 많이 달라졌다. 그런 점에서 도산서원 답사를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 속 변천 과정을 바탕으로 당시 모습을 상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느 시기, 적절한 논의를 거쳐 도산서당, 그리고 도산서원의 모습을 일부라도 찾았으면 좋겠지만 당분간은 이런 방식으로 답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처음 도산을 찾았을 때 퇴계처럼 걸음을 걸을 때마다 주변 풍광과 건물의 조화를 상상하다 보면 도산서당을 지을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도산서당 완락재에 앉아 싸립문을 통해 농운정사를 오가는 제자들을 보는 흐뭇한 퇴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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