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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일 서울 광운전자공업고 교장


광운전자공고에 일진이 없는 이유
교사 초년병 시절, 그를 기억하는 학생들은 당시 그의 모습이 선생님이라기보다는 ‘형사’에 가까웠다고 회상한다. 해병대 부사관 출신으로 태권도와 씨름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과 큰 키, 쩌렁쩌렁한 음성까지 웬만한 운동선수는 저리가라였단다.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교무실 그의 자리 밑에는 늘 운동화가 준비돼 있었다. 학생들 인도하러 경찰서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오죽했으면 그의 남다른 모습을 눈여겨본 경찰에서 경찰 특채를 제안했을까.
그에 얽힌 전설은 수도 없이 많다. 그가 처음 이 학교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교내에 ‘그룹’이라고 불리는 음성적인 폭력 서클들이 존재했다.
“봄만 되면 그룹들끼리 주도권 다툼을 하느라 학교 주변에서 패싸움이 끊이질 않았어요.”
졸업한 선배들로부터 10년 이상 대를 이어 내려온 음성 서클들은 조직 폭력배들과도 연계돼 있었다. 그는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그룹’들을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저항은 완강했다. “무기정학이나 퇴학 조치가 내려지면 아이들이 몰려나와 학교 유리창을 깨부수고 교복을 찢고 그랬지요.” 그뿐이 아니었다. 그룹에서 학생들을 빼내려 할 때마다 협박전화도 받았다. 그중에는 “밤길 조심해라”와 “김관일, 너 목숨이 몇 개냐?” 등 목숨을 위협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의 집주소를 알아낸 아이들이 밤마다 찾아와 앞마당에 돌을 던져 장독을 깼다. 하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처벌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처벌에 앞서 늘 학생을 먼저 보듬고, 설득하려 노력했다. 어떻게든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선처하고 독려했다. 선생과 제자가 아니라 남자 대 남자로, 때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는 지원을 받아 도시락을 챙겨 주었고,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는 집에 데려와 직접 공부를 가르쳤다.
그에게서 진심을 발견한 아이들은 하나둘 달라졌다. 그의 손에 이끌려 폭력 서클에서 나온 아이들은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학내 폭력 서클들은 하나둘씩 와해됐다. 그렇게 3년 만에 광운공고 내 폭력 서클은 자취를 감췄다. 최근 학내 폭력 조직인 ‘일진회’가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광운공고에서는 일진의 ‘일’자도 없다. 모두 그의 교육 철학 덕분이다.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려 노력해야
그는 학생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처럼 체벌이 통하지 않는 때일수록 더욱 학생들과 호흡을 함께해야 해요.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상황을 보고 이해하지 않으면 아이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교사 시절 그는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자연을 찾았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터놓게 마련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수영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무창포해수욕장에서 3박 4일간 수영을 가르쳤다. 1년에 서너 번씩은 학생들과 근교의 산에서 야영을 했다. 그간 그가 야영을 지도한 학생 수가 2만 명, 교사는 2,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렇게 호흡을 함께하다 보면 그 아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 결핍이나 상처를 알게 됩니다.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고 진심으로 노력하고 도와주면 분명 그 아이는 달라집니다.”
그는 학생들의 생활지도에 어려움을 겪는 새내기 교사들에게도 비슷한 조언을 한다.
“말 안 듣고 속 썩이는 학급이 있다면 그 학급에서 가장 문제 있는 학생을 찾아 무엇이 그 아이를 힘들게 하는지 근심거리를 찾아서 하나만 해결해 주세요. 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되면 학생들 사이에 저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뭐든 해주실 분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생활지도의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교사 시절 그는 학교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교문 지도를 하고 일주일에 열여덟 시간씩 수업하고도 일이 터지면 밤낮 없이 달려 나가야 했다.
“생활지도 하며 안 가본 데가 없어요.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요.”
학교 앞에서 학생들의 돈을 뺏은 동네 청년들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는 각서를 받아내는가 하면 가출한 학생 하나 찾겠다고 북한산 자락을 온통 뒤지고 다닌 적도 있다. “흔적을 좇아서 홍제동까지 내려왔는데 그 지역 건달들이 이미 그 아이를 포섭해 데리고 있더라고요. 못 데려가게 막는 걸 뚫고서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지요.”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굣길에서 금품을 갈취하는 인근 학교의 퇴학생들을 잡았을 때 일인데요. ‘뭐하는 놈들이야’ 했더니 눈앞에 목공용 칼을 들이밀더라고요.” 그래도 끝까지 쫓아가서 일곱 명 중에 세 명을 잡아서 해당 학교로 인계했다고 한다.

선생이 버린 아이를 누가 보살피나?
그는 교사 생활을 하며 단 한 명의 아이도 포기했던 적이 없다.
“선생이 버린 아이를 어느 누가 챙겨주겠어요. 내가 그 아이를 포기하면 사회의 짐이 되고 나라의 짐이 돼요.”
그는 아무리 문제아라고 해도 나쁜 면은 그 아이 전체의 5%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95%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믿고 격려해 주면 분명 아이는 달라집니다.”
신기하게도 고맙다고 연락하는 제자들은 만날 사고치고 속 썩여서 혼내고 야단 쳤던 아이들이다. 끝까지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바른 길로 이끌려고 노력했던 ‘한 사람’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김 교장은 인생의 절반을 거친 아이들과 씨름하고 부대끼면서 보냈다. 이제는 좀 쉴 법도 하련만 그는 벌써 퇴직 후 계획까지 세워뒀다. 대안학교로 옮겨 제도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을 직접 지도하고 싶다고 했다.
“노작교육을 하면서 그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사회의 훌륭한 인재로 다시 한 번 키워내고 싶습니다.”
그의 교장실 책상 위에는 늠름한 해병대 시절의 사진이 놓여 있다. 그의 교직 인생과 해병대 정신은 분명 한 가지 점에서 통해 있다. 바로 포기를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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