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말하고 싶어 그 오래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한 것일까?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 오래된 미래”라는 ‘역사’의 본질을 보여주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현재의 삶이 유난히 고달프고, 그래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전망이 쉽지 않을수록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려는 성향이 강해지고, 이 지점에서 역사드라마가 만들어진다. 역사드라마는 오래된 과거 속의 인물과 사건들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내어 대화의 장을 만드는 가장 대중적인 방식이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되, 기록의 행간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거나 재현한 역사드라마는 언제나 당대의 사회 현실과 맞물려 의미를 획득하면서 지나간 과거를 현재화시키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한국의 역사인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기획 · 제작되어 호평을 받았던 <주몽>, <대조영>, <태왕사신기> 등이 그렇다. 특히 고조선 멸망 시기부터 고구려 건국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한 <주몽>(2006. 5 ~ 2007. 3), 단군신화의 ‘단군’과 고구려 강서고분벽화의 사신도에 그려진 사신(四神)이라는 환상적 요소를 현실화시켜 광활한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형상화한 <태왕사신기>(2007. 9 ~ 2007. 12)는 기존의 궁궐 암투 중심의 역사드라마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면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광개토태왕>은 2011년 6월 방영을 시작한 KBS대하드라마로 ‘담덕’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태왕사신기>가 ‘판타지 무협 서사’의 틀을 갖춘 ‘팩션사극’인 반면, <광개토태왕>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기록의 행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간 ‘정통사극’에 가깝기 때문이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이 결합된 신조어 ‘팩션(Faction)’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팩션사극’은 역사적 기록과 고증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가능성의 역사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유형의 역사드라마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역사드라마는 <용의 눈물>(1996. 11 ~ 1998. 5)처럼 왕조나 양반 중심의 정통사극이 주류를 형성했었다. 하지만 2000년대가 시작되기 직전에 방영되었던 <허준>(1999. 11 ~ 2000. 6)이 조선 최고의 명의(名醫) 허준의 일대기를 다루면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자 그동안 역사드라마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중인 이하 평민의 생활상을 다룬 일련의 생활사극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팩션사극은 역사드라마가 정통사극에서 생활사극으로 중심축을 옮기면서 나타난 새로운 흐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HDTV드라마 <다모>(2003. 7 ~ 2003. 9)는 팩션사극의 시발점이었다. 조선시대 관아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아 했던 ‘다모(茶母)’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방학기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다모>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기보다 작가의 창의적 상상력으로 조선시대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드라마의 흐름을 일거에 바꿔 놓은 작품이다. 조선시대 의녀 ‘장금’의 성공담을 다루면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대장금>(2003. 9 ~ 2004. 3) 역시 ‘의녀 대장금’이라는 ‘중종실록’의 기록을 모티프로 삼아 조선시대 여성의 생활상을 재구성한 팩션사극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처럼 사료(史料)가 충분하지 않다는 한계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극복하면서 창작된 일련의 팩션사극들은 ‘기록되지 않은 가능성의 역사’를 주목한 결과물들이다. 팩션사극의 등장은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에 한정되어 있었던 역사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을 삼국시대 이전으로까지 끌어올리면서 역사드라마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을 노래한 ‘서동요’를 모티프로 백제시대의 화려한 과학기술을 재현하겠다는 의도로 제작되었던 <서동요>(2005. 9 ~ 2006. 3)나, <선덕여왕>(2009. 5 ~ 2009. 12)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팩션사극은 또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되 ‘정사(正史)’라는 명목으로 강조되었던 일방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이면을 천착함으로써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병자호란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도망간 노비를 좇는 ‘추노꾼’을 비롯하여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인간의 몸과 자본의 상관성을 파헤친 <추노>(2010. 1 ~ 2010. 3)는 팩션사극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정통사극에서 생활사극으로, 그리고 다시 팩션사극으로의 변화 과정은 역사드라마가 당대의 사회 현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갈수록 깊어지는 정치 불신과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심화되는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모색할 수 없는 현실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과거로 돌린다. 하지만 근대 역사관에 입각한 정통사극의 계몽성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던 ‘해설’이 극적 기능을 상실한 채 사라진 것처럼, 정통사극은 이제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처분이 되어야 할 과거의 유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웅이면서도 패망국의 장군이라는 형용모순으로 일그러진 ‘계백 장군’의 일대기를 통해 백제사를 재조명하겠다는 계몽성을 드러내며 2011년 7월 방영을 시작한 <계백>이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한 것도 그래서이다. 대세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되, 계몽적이고 교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가능성으로서의 역사’를 통해 지금 이곳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팩션사극이다. 2011년 여름과 가을을 수놓았던 <무사 백동수>와 <공주의 남자>는 팩션사극의 현재적 의미를 제대로 보여준 역사드라마이다. <무사 백동수>는 조선의 무예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정도의 무예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무사 백동수’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출생부터 시련과 위기에 봉착했던 백동수가 고난을 극복하고 조선 최고의 무사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은 실의와 좌절에 빠진 21세기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희망을 선사한 영웅으로 해석된다. 반면에 <공주의 남자>는 조선시대 최고의 정적(政敵)이었던 수양대군과 김종서가 충돌하면서 발생했던 조선시대 최악의 쿠데타 ‘계유정난’의 참상을 자식 세대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미시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한 작품이다. 수양대군의 딸 ‘이세령’과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의 비극적인 사랑은 부모 세대의 정치 갈등이 자식 세대의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정치가 개인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감성적으로 강조한다. 역사드라마의 현재적 의미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력의 길항 작용에서 생성된다. 시청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 팩션사극의 주인공과 그들이 처한 극적 상황을 해석하면서 시청한다면, ‘가능성으로서의 역사’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남북국 시대 말기부터 후삼국 시대와 고려 초기까지를 배경으로 한 정통사극 <태조 왕건>이나 조선 최고의 명의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생활사극 <허준>을 독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 개국의 당위성을 강조한다거나, 허준의 영웅적 면모에 집중해 계몽성을 강조한다면 역사드라마의 즐거움은 상당 부분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왕건’이나 ‘허준’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줄 때, 시청자의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영웅적 면모를 주목하게 되지 않을까? 윤석진(尹錫辰) 2000년 8월 한양대 대학원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 - 연극 · 방송극 · 영화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양대 국문과, 동국대 문예창작과, 인천대 국문과,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등에서 강의를 하다 2004년 가을학기에 충남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현대희곡과 영상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2005년부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드라마 평론을 연재하고 있으며, 2010년 8월부터 트위터(@kdramahub)에서 새로운 방식의 드라마 단평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