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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해야할 순간들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

세상엔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많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운이 안 따르는 경우도 있고, 밤 잠 설쳐가며 노력했지만 능력의 한계로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어질 법하다. 실제로, 어떤 결과나 목표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바라던 그것을 얻지 못했다면 허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성공이나 원하던 결과가 아니라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최선을 다해 달리던 길 위에서 잠시라도 뒤를 돌아보며 자신과 주변을 성찰할 수 있다면…, 어떨까. 세상이 조금은 달라 보이지 않을까. 막막한 인생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비주류를 조명하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은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경기를 소재로 삼았지만 스포츠 영화의 상투적인 관습을 버리고 인간 드라마의 성취를 이룬, 잘 만들어진 대중 영화이다. <우생순>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연장전에 승부던지기까지 가는 명승부를 벌였지만, 아깝게 패배해 쓰디 쓴 눈물을 삼켜야 했던 여자 핸드볼팀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핸드볼 국가 대표팀 감독 대행 직을 맡게 된 혜경(김정은)은 팀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오랜 동료이면서 라이벌이었던 미숙(문소리) 등 노장 선수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왕고참 혜경의 지도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세대 선수들의 불만이 노장 선수들과 신진 선수들 사이의 불화로, 급기야는 거친 몸싸움으로까지 번지자, 핸드볼 협회는 남자 핸드볼계의 스타 안승필(엄태웅)을 후임 감독으로 임명한다.

<우생순>은 신선하지만 위험한 모험을 시도한 영화이다. 한국에서는 별 재미를 못 본 스포츠 영화에 그것도 축구나 야구가 아닌 비인기종목 핸드볼, 그나마 심판의 편파 판정에 시달리다 결국은 지고 만 경기로 아쉬움을 남긴 아테네 올림픽을 택했다. 스포츠 영화라면 으레 떠오르는, 역경을 이겨내고 감격스런 승리를 움켜쥔 이야기가 아니라 고군분투했지만 눈물을 삼켜야 했던 실화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연출자가 임순례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이유에 대해 고개가 끄덕여지게 될 것이다. 전작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세 친구>를 통해 잔잔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리는 감동을 선사했던 그는, 초라한 무대와 막다른 뒷골목을 서성이는 비주류, 소외된 이웃들의 현실을 가감없이 담아내며 그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보여 준 감독이다.

그러니 <우생순>을 통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소재에 이미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인기종목인 핸드볼에 여자, 비주류 중에 비주류를 선택한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명백하다. 고난을 딛고 일어선 영광의 순간이 아닌 패배한 경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들이 결코 패배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힘겹게 은메달을 따고도 코트에 주저 앉아 서럽게 울어야 했던 선수들의 사연을 들려주면서 그들의 등을 쓸어 준다.

아줌마의 땀내가 진동하다

<우생순>의 핸드볼 여자 국가대표팀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명색이 7회 연속 올림픽에 진출한 국가대표팀이지만 그 이름값이 무색하게도 올림픽 본선에 나갈 팀 전력에 차질이 생기자 은퇴한 고참들을 긴급 수혈해야 하는 판국이다. 비인기종목이라 국내에 실업팀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보니 생겨난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다.



결국 92년도 승리의 주역이었던 선배 선수들, 미숙과 정란(김지영)이 팀에 합류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들이 백전노장인 아줌마 선수들이라는데 있다. “아니 태릉이 경로당이야?” 후배의 이 한마디는 태릉에서 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명확히 보여 준다. 체력과 실력에서는 뒤지지 않지만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이유로 그들은 퇴물 취급을 받는다. 이렇게 선 후배간의 신경전, 유럽식 선진 훈련 방식을 새롭게 도입하려는 감독과 기존의 한국식 훈련법을 고수하려는 노장 선수들 간에 갈등이 커져 가면서 대표팀 내엔 균열이 생겨난다.

영화에서 이런 위기 상황을 해결할 돌파구를 찾는 중심축은 노장 언니들, 바로 아줌마들이다. 이들은 각자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고 당당하게 경기장에 선다. 혜경은 감독으로서의 자질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혼 경력이 발목을 붙들게 되어 해임되고 만다. 하지만 미숙의 충고를 받아들여 명예회복을 위해 선수로서 팀에 재합류한다. 감독과의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같은 여자로서, 언니로서 후배 선수들의 처지와 고충을 이해하고 보살펴 준다.

화려한 전적에 빛나는 최고의 핸드볼 선수, 미숙의 현재 상황은 최악이다. 팀이 해체된 후 마트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게 된 그는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일터에 업고 다니느라 눈칫밥을 먹는다. 동료 선수였던 남편은 사업을 하다 망해 빚을 진 채 숨어 다닌다.

혜경의 도움으로 선수로 복귀한 후에도 미숙은 아이를 코트 옆에 세워둔 채 운동을 해야 한다. 혜경과 정란의 든든한 방어막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눈칫밥을 먹이는 엄마의 마음은 서글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숙은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잠시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지언정 코트위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는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땀을 흘리며 끝까지 달린다. 한편, 우리 사회에서 조롱거리로 불리우는, 소위 ‘아줌마’스러운 행동을 보여 주는 것은 정란이다. 뽀글파마에 목소리큰 그는 버릇없는 후배 머리채 잡고 싸우기, 새치기하기, 보약 챙기기 등의 행동으로 눈총을 받지만 한 치 부끄러움이 없다. 그런 정란의 아줌마 근성은 역도부의 강짜를 이겨내고 후배들을 지키는 힘이자 삭막한 선수촌 생활에 웃음을 가져다주는 묘약이다. 사회적으로 폄하되기 일쑤인 평범한 아줌마 정란은 경기장에서 당당히 제 몫을 해낸다.



그들, 최선을 다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혜경, 미숙, 정란이 그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이다. 은퇴한 선수들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정신적, 신체적으로 우수하다. 안승필이 제안한 과학적 훈련 방식을 그들의 몸은 뛰어넘어버린다. 아줌마들의 강인한 몸은 안승필의 비웃음과 그 잘난 상식의 틀을 깨버린다. “한국형 핸드볼 한물갔다고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는 혜경의 말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몸을 단련시키고 끈끈한 결속력으로 팀이 하나되는 것이, 뛰어난 기술보다 먼저라는 것을 시사한다.

<우생순>은 드라마틱한 실화가 주는 공감대 위에 잘 짜여진 각본, 인물들의 조화로운 앙상블을 추구하는 연출이 빛을 발하는 영화이다. 각 배우들은 탄탄한 연기력으로 캐릭터에 대한 집중력을 살리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인물은 미숙이다. 뭘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는 것은 없는 그의 현실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막막해지지만 그의 투혼에 진심으로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이기든 지든 먹고살려고 미친 듯이 뛰었다”는 미숙에게 핸드볼은 혜경처럼 자존심을 건 운동이 아니다. 사회적 지위나 조촐한 가정의 안식이 없는 미숙에게 핸드볼은 밥을 버는 행위다. 핸드볼 선수로서의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가진데다 승패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는 일꾼의 미덕까지 가진 미숙. 그런 그가 설 자리가 없는 현실. 그것이 가슴 아픈 것이다.

생애 최고의 순간

덴마크와의 결승전 마지막 승부던지기. 남편의 자살 기도 소식을 듣고 짐을 싸 숙소를 떠났던 미숙이 돌아와 코트 위에 선다. 이후 경기의 승패를 가른 클라이맥스를 보여 주지 않고, 후경(後景)의 인물들의 움직임과 카메라의 안팎으로 넘나드는 선수들, 그리고 미숙의 표정을 담아낸 마지막 장면들은 잊기 힘든 감정적 여운을 남긴다.

결승전의 이 장면이 가슴을 치게 하는 것은 단순히 금메달을 놓쳤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승을 했어도 팀은 해체되었던, 밥벌이를 위해 원치 않는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그들의 과거가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현실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그들에게 주어진 그 시간을 ‘그들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부른다. “지는 경기를 하는, 인기 없는 경기에 목숨 거는 여자들을 통해 최선을 다했을 때의 감동을 만들어내고 싶었다”는 어느 인터뷰에서의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최선을 다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그 기쁨을 경험하게 해준다. 경쟁 사회에서 너무도 쉽게 무시되는, 화려한 결과가 아닌 땀 흘린 과정이 소중하게 기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노련함과 끈적한 연대감,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언니들, 1인 3역을 거뜬히 해내는 아줌마들의 편을 들어준다. 임순례 감독은 주류 사회에서 무시받고 퇴물 취급받는 이 언니/아줌마들을 더없이 따뜻하게 격려하고 그들의 인생에 찾아온 최고의 순간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씁쓸한 현실에 놓인 <우생순>의 인물들을 빛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감, 동료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안쓰러움, 그런 감정들이다. 노장 언니들이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걸면서 서로 삐걱거렸던 팀원들도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감독은 선수들 편에 서게 되고, 아줌마라고 무시하던 후배들이 존경의 눈빛을 보내다. 가슴 뭉클해지는 이 순간들은 어쩌면 영화적인 판타지일수도 있겠지만, 냉정한 현실에서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 감독의 태도는 신뢰를 준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당신의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감독 : 임순례
출연 : 문소리, 김정은, 엄태웅
개봉 : 2008. 1. 10
관람등급 : 국내 전체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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