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인생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가 있다. 나이를 한두 살 더 먹을수록 삶이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음을, 때론 나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흘러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살면서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참 쓸쓸해진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면서 후회만 켜켜이 쌓일 때, 앞으로 걸어갈 길도 뿌옇게 흐린 안개뿐 별다른 희망이나 반전이 기대되지 않을 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인생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거리의 악사와 꽃 파는 소녀그런데 여기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르는 노래가 그런 나약한 인생에게 눈물 나게 아름다운 순간을 선사한다.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다시금 삶에 대해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조용한 거리에 한 남자의 거친 기타 연주와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구 하나 쳐다보는 이 없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난한 악사 ‘그’(글렌 한사드). 한 손엔 꽃바구니를 든 채 그의 앞에 멈추어 서서 노래를 듣던 ‘그녀’(마르케타 이글로바)는 진심어린 박수로 그의 노래에 화답한다.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도 없지만 음악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거리의 악사’와 ‘꽃 파는 소녀’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낮에는 청소기 수리공으로, 밤에는 무명의 악사로 살아가는 그는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와 아픔을 자신의 노래로 뱉어낸다. 체코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인 그녀는 어머니와 어린 딸과 함께 낡은 공동 주택에서 산다. 거리에서 꽃을 팔거나 가정부 일로 생활을 이어가는 그녀는 한 아이의 엄마라고 하기엔 너무나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남편과 헤어진 그녀는 그의 노래 속에 숨겨진 사랑의 상처를 첫눈에 알아챈다.
자신의 고장 난 청소기를 수리해 달라며 그를 다시 찾은 그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에게 실연을 당했느냐고 묻는다. 처음엔 낯선 이와의 대화를 거북해하던 그도 차츰 이 씩씩하고 솔직한 소녀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아직도 옛사랑을 잊지 못했으니 그런 노래를 부르는 거 아니냐고, 그녀가 장난스럽게 추궁하자 그는 즉석에서 만든 노래 ‘Broken Hearted Hoover Fixer Sucker Guy’(상처입고 어리석은 청소기 수리공)를 들려준다.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이 난데없는 소동에 승객들이 흘끔거리지만, 그들에겐 서로 친밀해지는 계기가 되어 준다. 이렇게 두 주인공이 서로 감정을 교류하며 각자의 내면을 보여주게 만드는 매개체는 바로 ‘음악’이다.
그와 그녀를 이어주는 음악그녀는 그의 음악에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진심으로 응원해준다. 그도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와 피아노 연주에 매료되며 그녀가 음악을 사랑하는 영혼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그는 그녀의 격려에 힘입어 데모 음반을 만들어 런던에서 오디션을 볼 결심을 한다. 그녀는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달라는 그의 부탁에 떨리는 마음으로 밤새 노래를 흥얼거린다.
피아노를 살 형편이 안 되는 그녀는 알고 지내는 한 악기상점의 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치면서 음악에 대한 아쉬움을 달랜다. 비록 팍팍한 현실에서 하루 한 시간밖에 누릴 수 없는 사치이지만, 그녀는 이 작은 공간에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연주자이다.
그렇게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이들이 함께 노래를 만들고 부를 때이다. 그녀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그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 그가 자신처럼 가난한 친구들과 함께 스튜디오에 모여 열정적으로 데모 음반을 녹음하는 장면, 며칠에 걸친 밤샘 녹음을 마치고 초췌한 모습으로 찾은 바닷가에서 어린 아이처럼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들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순간만큼은 더 이상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그로 인해 너무도 즐거운 인생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순간을 남긴 짧은 만남영화 <원스>는 곳곳마다 박혀 있는 서정적인 노래와 연주가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음악영화’이다. 하지만 음악이 멋진 배경음으로 깔리지도, 세련되고 화려한 뮤지컬을 선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너무도 소박하고 때때로 거친 느낌을 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이다. 그와 그녀가 부르는 노래,함께하는 연주들에서도 가공되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소박하고 꾸밈없는 음악들은 두 주인공의 눈빛과 손짓 속에서, 그들의 가난하고 아픈 현실 속에서 온기를 뿜어낸다. 그들이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음악이 주는 위로와 기쁨을 온 맘과 몸으로 누릴 줄 알기 때문이다. 비록 가난한 청소기 수리공이자 무명의 악사라는 그의 삶이, 홀로 아이와 노모를 부양해야 하는 고달픈 이민자로서의 그녀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에겐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그 음악이 인생 역전을 가져다주지 못할지라도, 그들의 열정과 꿈이 무심한 세월을 따라 어느 순간 사그라질지라도 그들은 음악으로 인해 위로받고 즐거워하며 사랑을 나눈 순간이 있었음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데모 음반 녹음을 마친 그와 그녀는 멀리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서로에 대한 마음이 깊어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형편을 잘 알기에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을 아낀다. 여자가 체코 말로 “Miluju tebe”(밀루주 떼베-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나지막하게 말하자 남자가 그 뜻을 묻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마음은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이에게 친아버지가 필요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그도 그녀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만, 런던에 있는 옛 애인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새 출발을 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외로운 인생에 잊히지 않을 아름다운 순간을 남긴 채 각자의 길을 향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는 그녀가 악기상점에서 치던 피아노를 그녀의 집에 배달시키고 런던으로 떠난다. 카메라가 어느 공동 주택의 창가를 비추면 아이를 안은 남편을 뒤로 한 그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고 있다. 뚜벅뚜벅 걸음을 내딛던 그의 뒷모습과 빈 거리를 응시하던 그녀의 표정. 쓸쓸하면서도 고요한 생의 의지가 느껴지던 그 모습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면서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삶이 선사하는 빛나는 순간들이 영화는 이야기와 음악이 마치 식빵에 발린 버터처럼 서로에게 스며들어 꾸밈없는 자연스러움과 생동감을 선사한다. 여기에는 감독과 배우 모두 실제 뮤지션이라는 점이 한몫했다. 영국의 인디밴드 ‘더 프레임즈’의 리드 보컬인 글렌 한사드, 그리고 ‘더 프레임즈’의 게스트로 앨범작업을 함께 한 체코 출신의 소녀 마르게타 이글로바가 남녀 주인공 역을 맡았고 감독인 존 카니는 ‘더 프레임즈’의 베이시스트 출신이다.

이렇게 오랜 친구이자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니 <원스>의 음악에서 진심어린 감동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실제 삶에서도 음악으로 인해 기쁨과 고통을 맛봤을 그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당연히 뜨겁고 충분히 위로가 된다. 영화 속 그들의 일상은 피곤하고 행색은 남루하지만,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할 때 그들의 얼굴에선 빛이 난다. 기타 하나, 피아노 한 대 뿐일지라도 음악은 그들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영화 <원스>는 지나간 과거의 한때에 붙잡혀서, 바꿀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좌절해서 현재 내 앞에 놓인 빛나는 순간들을 놓치지 말라고 말한다. 음악을 잘해서 또는 음악이 내게 돈과 명예를 가져다 줘서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기에 주인공들이 행복했던 것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과 성공에 연연해하지 말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라고….
*영화정보*
제 목 : 원스(Once)
감 독 : 존 카니
출 연 : 글렌 한사드, 마르케타 이글로바
관람등급 : 전체관람가
제작연도 :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