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7 (수)

  • 맑음동두천 26.0℃
  • 구름많음강릉 28.0℃
  • 구름많음서울 24.5℃
  • 맑음대전 25.8℃
  • 맑음대구 26.1℃
  • 맑음울산 22.5℃
  • 맑음광주 25.0℃
  • 구름조금부산 21.0℃
  • 맑음고창 25.3℃
  • 구름조금제주 18.9℃
  • 구름조금강화 22.5℃
  • 맑음보은 25.4℃
  • 맑음금산 26.8℃
  • 맑음강진군 22.8℃
  • 맑음경주시 28.3℃
  • 맑음거제 21.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꼭꼭 숨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인 신라 천 년의 도시 경주, 시내 한복판에 산처럼 솟아있는 무덤들과 여기저기 널려있는 절터, 우뚝 솟은 탑에서 혹은 소홀히 지나치는 작은 산이나 들길에도 재미있고, 아름답고, 슬픈 천 년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신라’를 찾아, 그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찾아 아주 특별한 여행을 떠나 봅시다.


한반도 끝에서 시작한 신라, 기지개를 켜다
신라 천 년의 세월 안에는 ‘신라’라는 한 나라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힘을 키워서 삼국을 통일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또한 어떻게 스러져갔는가를 완벽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진한, 즉 경상북도 지역에서 12개의 작은 나라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기원전 57년). 촌장이 지도하는 촌락공동체에서 출발한 사로국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 4세기 무렵에는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676년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거쳐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통일 과정에서 외세의 도움과 한반도 남쪽을 차지하는 데 그친 불완전한 통일이었지만 최초의 민족 통일국으로서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는 여섯 부족의 촌장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초기 왕들은 박·석·김씨가 번갈아 왕위에 올랐고 사로국의 영역도 경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신라가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하여 임금을 선출하였고, 이러한 시기에는 더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엔 힘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설화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탄생한 천 년의 역사가 시작된 ‘나정’은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우물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 아늑하던 이 곳은 지금 발굴조사가 한창이어서 들어가 볼 순 없지만 우물 터, 건물 터 등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신라 천년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랍니다.

석탈해와 월성

탈해가 신라에 와서 살집을 찾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은 호공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탈해는 밤중에 몰래 호공의 집 주변에 숫돌과 숯 등을 묻고서 다음날 호공의 집을 찾아가 이곳은 자기 조상의 집이니 돌려 달라 주장했지요. 결국 탈해와 호공은 서로 다투다 법으로 결정하기로 하고 관가를 찾아갔습니다. 탈해는 그 집은 자기 집이 틀림없으며 집주변을 파보면 알 수 있을 거라 큰소리쳤겠죠? “나의 조상은 대장장이인데 잠시 멀리 떠나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차지한 것이니 집 주변을 파보면 알 수 있다”고 말이에요. 결국은 탈해의 꾀에 호공은 억울하게 집을 뺏겼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2대 임금인 남해 차차웅에게까지 알려졌대요. 탈해의 지혜를 높이 산 남해 차차웅은 자신의 딸과 탈해를 혼인을 맺게 하였습니다. 이로서 탈해는 임금의 사위가 되었지요.
그 후 파사 이사금 때에 이곳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습니다(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이라고도 하지요). 월성에 가면 성벽을 따라 파놓은 인공해자를 볼 수 있습니다. 월성 안에 있는 석빙고는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로, 원래 월성 서쪽에 있던 것을 영조 때 옮겨 지은 것이에요.
월성과 첨성대 중간에 나무가 우거지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이랍니다. 탈해왕 시절 서쪽 숲에서 우렁찬 닭울음소리가 나서 찾아가보니 나뭇가지에 금빛 궤짝이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울고 있어 궤짝을 열어보니 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금빛 궤짝에서 나왔다 하여 성이 김씨가 된 김알지랍니다.

신라의 기틀을 다지다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 이르러 나라의 기틀을 갖추고 왕을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김씨가 왕의 자리를 독차지하게 되었으며 ‘여러 우두머리 중에서 대장’이란 뜻을 지닌 마립간을 왕의 호칭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왕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고구려, 백제와 맞설 만한 힘을 갖춘 것은 아니었답니다.
신라는 5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倭)의 침입으로 곤경을 당할 때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며 신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답니다.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간섭하거나 신라 땅에 고구려 군대를 주둔시켜 신라를 간섭하고 지배하려 하였지요.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 백제의 비류왕과 신라의 눌지마립간은 나제동맹을 맺게 되었고, 드디어 신라는 조금씩 고구려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한편 힘을 강화해가기 시작합니다.
경주 시내 여기저기 산처럼 불쑥 솟아 있는 거대한 무덤들을 보았나요? 마립간과 왕족들의 무덤이랍니다. 대릉원은 미추왕릉으로 추정하는 무덤을 비롯하여 천마총, 황남대총 등 돌무지덧널무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천마총은 하늘을 나는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가 발견되어 붙은 이름입니다.
최근에는 ‘천마가 아니라 상상의 동물인 기린을 그린 것이다’라는 주장이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말다래는 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을 말합니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는 삼국시대 신라의 유일한 그림으로 바로 이 무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천마총이랍니다. 이외에도 그릇에 담긴 채 발견된 달걀이나 화려한 금관 등 여러 가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금관, 금귀걸이, 토우, 금동신발 등 신라왕릉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평지무덤의 왕, 황남대총은 남과 북의 고분이 표주박처럼 붙은 표형분으로 부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굴 결과 남편의 무덤인 남분이 부인의 무덤인 북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남분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 인골과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15세 전후의 여성의 인골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남편의 무덤에서는 도금한 금동관이 출토되었고 부인의 무덤에서 순금제 금관이 나온 사실이지요. 북분에서 부인대(부인의 허리띠)라는 글자가 새겨진 허리띠 장식품이 나온 사실로 미루어 북분이 부인의 무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겠지요. 무덤의 주인공이 소지왕이니 내물왕이니 하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직 누구의 무덤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답니다.
미추왕은 13대 왕으로 김씨로는 최초로 신라왕이 된 인물입니다. 미추왕릉은 다른 고분과 다르게 담장이 둘러있고 삼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14대 유례왕 때 이서국 군사들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한 일이 있었지요. 온 힘을 다해 적을 막던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갑자기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는 사라졌습니다. 군사를 뒤쫓아 가보니 군사들은 간 데 없고 대나무잎만 미추왕의 무덤 앞에 수북이 쌓여 있으므로 미추왕이 도왔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 미추왕릉을 ‘죽장릉’이라 하였고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부르는 이 무덤들은 땅 속에 모래와 자갈을 깔고 나무로 만든 관을 놓고 그 관 위에 다시 나무로 만든 곽을 씌웁니다. 곽과 관 사이에 금관이나 허리띠, 귀걸이 등 껴묻거리를 넣고 나무 곽 주위에 자갈돌을 쌓아 진흙을 덮어 다진 뒤 마지막에 흙을 쌓아올린 형태로 삼국 중에서 신라만 이런 무덤을 만들었답니다. 어마어마한 돌무더기가 쌓여 있어 도굴하기가 어려웠겠죠? 한편, 굴식돌방무덤은 사람이 사는 집처럼 돌로 방과 통로를 만들고 입구에 문이 있어요. 무너질 염려가 없으니 입구만 찾으면 도굴하기가 쉬운 구조랍니다.

신라의 발전, 분황사와 황룡사
6세기 초 지증왕 때 농업생산이 크게 발전하였고 국가의 모습이 날로 새로워짐에 따라 나라 이름도 신라(新羅)라고 새로 정했습니다(503년). 법흥왕 때에는 법률을 발표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집권적 왕조국가로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진흥왕 때는 신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가야연맹 지역을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략하여 한강상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후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마저 빼앗아 명실상부한 한강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신라는 독특한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를 마련하여 지배층의 지위를 보장하였고, 성골만이 왕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진평왕에겐 딸만 셋이 있었는데 큰딸이 왕위에 올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됐습니다. 선덕여왕 재위시 당나라(태종)와 고구려(연개소문)는 끝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백제(의자왕)와 신라(선덕여왕)도 치열한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답니다. 또한 여자가 왕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반란과 당나라의 비웃음을 극복해야 했던 선덕여왕은 부처의 힘을 빌려 적을 물리치고 여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분황사와 첨성대를 세웠고 황룡사 9층탑을 세웠으리라 여겨집니다.
분황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승 원효와 황룡사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한 자장이 머물렀던 곳입니 다. 분황사는 이름 그대로 향기 나는 황제의 절이라는 뜻입니다. 분황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탑이 삼국 시대 가장 오래된 탑 중 하나이지요. 분황사 모전석탑은 안산암이라는 돌로 벽돌모양을 본떠 쌓은 탑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허물었던 탑을 조선시대 승려가 수리하려다 오히려 더 손상이 되었고,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보수되었으나 원형대로 복원되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9층 또는 7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여러 차례 파괴되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탑에서 나온 사리함에는 여성(선덕여왕)을 상징하듯 바늘과 가위가 나왔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황사를 나서면 눈앞에 드넓은 잔디밭이 보이지요? 이곳이 바로 황룡사터입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때 새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을 짓고 황룡사라 하였답니다. 진흥왕 때 이곳에 커다란 부처님(금동장륙상)도 만들었으며, 진평왕 6년(584년)에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금당을 세웠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황룡사 9층목탑에 오르는 꿈을 꾸면 과거에 합격하는 행운의 꿈이라 여겼답니다. 황룡사는 총 면적 2만 여평으로 동양 최대의 사찰이며 진흥왕 때 시작하여 선덕여왕 때까지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되었습니다. 신라 역대 임금이 절에 와서 고승의 설법과 강의를 받는 등 신라 최고의 사찰로 유지되었으나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버렸습니다.
황룡사 터를 발굴하던 어느 날 목탑의 심초석 밑에 있는 사리구멍에서 사리기구가 사라졌습니다. 심초석을 옮기던 중 날이 저물자 발굴팀은 다음날로 일을 미루고 일정을 마쳤답니다. 그날 저녁 기회를 노리던 도굴꾼에 의해 사라진 것입니다. 수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행히 금판에 쓰여진 탑지는 찾았지만 나머지 사리기구는 영영 사라져버렸습니다. 탑지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황룡사 창건에 대한 기록과 일치하여 <삼국유사>의 진가를 확인해주었지요.

부왕의 은혜, 감은사와 대왕암

감은사는 문무대왕이 부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고 이곳에 절을 세우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아들인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따라 완성한 사찰이지요. 금당터 아래를 보면 빈 공간이 있는데 용이 되신 아버지를 위해 물길을 파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금당 앞에 우뚝 솟은 쌍둥이처럼 생긴 두 개의 탑이 있습니다. 수십 개의 돌로 조립된 통일신라 초기의 탑이지요. 두 탑의 당당한 모습에서 삼국통일 후 신라의 시대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대종천이 흘러드는 감포 앞바다 일대를 신라 사람들은 동해구라 불렀습니다. 왜구가 이곳으로 자주 침입하여 당시 방어의 요새로 중요하게 여겼답니다. 이곳에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마무리한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있는데 대왕암이라 불립니다. 죽어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동해를 지키겠으며, 장례는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검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지요. 유언에 따라 대왕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이곳에 매장하였다고도 하고, 뿌려졌다고도 합니다. 대왕암이 있는 곳에서 바다 건너 언덕에 정자가 한 채 보이는데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이견대입니다.

통일신라의 전성기, 불국사와 석굴암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삼국의 백성을 아우르게 된 통일신라는 보다 앞서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의 통일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당나라를 통해 교역이 빈번해지면서 서역과의 교류도 활발해져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라 문화는 통일 이후 장기간의 평화를 바탕으로 성덕왕에서 경덕왕 때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높은 문화수준을 기반으로 석굴암과 불국사, 에밀레종을 탄생시켰지요.
신라 사람들의 소망이 한 곳에 모아져 불국사와 석굴암이 탄생했습니다. 설화에 의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이라는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모량리의 가난한 집안 출신 대성이 전 재산인 밭 한마지기를 부처님께 시주하고 죽게 되었는데 명문가에 환생하였습니다. 그는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서 석굴암을 지었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불국사와 석굴암은 국가적인 대사업이었습니다. 경덕왕은 이 절을 지으면서 당대의 고승이며 국사인 표훈과 신림에게 조언을 구하고 완공 후에는 이곳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두 절이 창건된 시기는 통일 전쟁을 치른 후 100년, 정치적·사회적으로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문화가 골고루 발달한 때였습니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힘들게 토함산을 올랐겠지만 우린 차를 타고 갑니다. 창밖을 한번 보세요. 멀리 동해바다에서 밀려오는 구름과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습니다. 토함산이란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이랍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을 지나야 석굴암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본래 이름은 석불사였고, 원래는 암자가 아닌 독립된 절이었습니다. 석굴암은 300여 개나 되는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인공석굴로, 예배와 공양을 하는 네모난 공간과 본존불이 놓여진 동그란 공간을 통로를 통해 연결해 놓았습니다. 석굴암 후실 중앙에는 본존불이 앉아있고 본존불 주위의 둥근 벽을 빙 돌아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보살상과 제석천, 범천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통로에는 사천왕을 조각하였는데 부처님의 나라를 동서남북에서 지키는 신이지요. 전실에는 금강역사와 팔부신중을 조각하였습니다. 조각들의 표정과 동작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어 벽에서 걸어 나오는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요. 천년을 끄떡없이 버텨온 석불사는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를 바른 뒤부터 석굴 안에 이슬이 맺히고 곰팡이가 피어 조각들이 훼손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후 정부에서도 대책을 세웠지만 습기를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지금처럼 유리벽을 세우고 석굴을 밀폐시켜 냉방시설을 들여놓게 되었답니다. 현대의 최첨단 기술이 천 년 전 신라인의 과학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몰락하는 신라, 포석정
세월이 흐르면서 신라 내부에서는 여기저기서 불평,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도 골품제도에 막혀 뜻을 이룰 수 없었으며, 비참한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는 왕실과 귀족들 간의 권력 쟁탈전은 지방 통제력의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착취와 억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지고 정부의 간섭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서 힘을 키운 호족들은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궁예와 견훤이지요.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신라는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가 고려에 항복하는 935년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포석정은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유상곡수연을 하던 곳입니다. 유상곡수연이란 구불구불한 수로에 흐르는 물 위로 술잔을 띄워 잔이 머무는 곳에 앉아있는 사람이 시를 짓는 놀이입니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의 기록에도 나오는데 남아있는 유적이 거의 없어 포석정의 유적이 중요한 연구자료로서 가치를 지닙니다. 포석정은 927년 음력 11월에 경애왕이 비빈과 신하들을 데리고 잔치를 즐기다 견훤에게 잡혀 자결을 강요당했다는 이야기의 장소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경애왕이 잔치를 벌였다는 때는 추운 겨울입니다(음력 11월). 또한 9월에 견훤의 공격이 있어 왕건에게 원군을 요청했던 급박한 상황에서 술판을 벌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요. <삼국유사>에 보면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춤을 추었는데 왕의 눈에만 보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남산의 신이 보였다는 것은 곧 국가적인 행사를 하는 신성한 장소임을 의미하지요. 견훤의 공격이 감행될 때 경애왕이 질펀하게 잔치판을 벌인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위해 신께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기록으로, 또 구전으로 이어져 오지만 누구에 의해서였든 사실 그대로가 아닌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기정사실화해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라의 몰락에서 이어져 오는 얘기도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그것에 깃든 우리 조상의 훌륭함과 왜곡되지 않은 바른 역사를 알아내 공부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역사가 숨 쉬는 우리의 땅, 한번 슥 지나오며 사진 찍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더 많은 관심과 애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알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