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학년 1반 담임을 배정 받고 2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특활부장에 학년부장, 담임까지 맡아 정신 없던 차에 그날은 특기·적성담당 외부 강사와 면담이 있어 무척이나 바빴다.
점심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담당 강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다가오더니 "선생님, 저 스타킹 사러 문방구에 가야 되는데 외출증 좀 끊어주세요" 했다.
언뜻 보니 우리 반 학생이 아닌 것 같아서 "얘야, 지금 선생님이 바쁘거든? 기다렸다가 너네 담임한테 외출증 끊어 달래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기요…" 하면서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한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들었나 보다 생각한 나는 다시 한번 "얘! 너네 담임한테 가"하고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학생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우리반 담임 선생님이에요…."
순간 머리가 띵하면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갔다. 아뿔싸! 애들 얼굴과 이름을 다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반 희숙이가 아닌가. 늘 단발머리를 나풀대던 그 애가 그날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열심히 외출증을 쓰는데 이번에는 그애가 "선생님! 거기에는 제 이름 써야되는데요"라고 말한다. 정말 그랬다. 당황한 나머지 학생이름란에다 내 이름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희숙이를 돌려보내고 난후 강사 선생님과 어떻게 나머지 면담을 끝냈는지 모르겠다. 오후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저녁에 수화기를 들었다.
"희숙아, 오늘 점심 때 정말 미안했다. 사실 네 이름 알고 있었는데 오늘 머리 묶고 오는 바람에 선생님이 잠시 헷갈렸나봐. 이제부터 네 이름 꼭 기억할게. 너와 나 사이에 아름다운 추억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미안해."
"저 사실은 오늘 속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이렇게 전화해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저도 선생님 못잊을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프닝은 끝났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접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