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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추억 속의 김밥

어린 시절 소풍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려 잠을 설치게 하는 말이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시작하는 소풍 때는 비도 잦아서, 며칠 전부터 비가 올까봐 노심초사하기 일쑤였다. 자다가 깨고 또 자다가 깨도 날은 더디게 밝고, 희뿌연 새벽빛으로 햇살의 끄트머리라도 발견하고픈 마음에 밤새 뒤척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소풍 때 가장 기대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도시락이었다. 지금은 동네 어디서나 흔하게 팔고 사는 것이 김밥이지만, 그 당시는 특별한 날(소풍같이) 특별한 재료로 만드는 것이 김밥이었는지라 그 맛은 지금의 김밥과는 절대로 비교할 수 없다. 소풍날 아침 밤새 뒤척이느라 피곤한 몸이, 번개라도 맞은 듯 번쩍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머니가 싸고 계시는 김밥의 고소한 참깨 냄새 때문이었다.

소풍을 가서도 모두 둘러앉아 서로의 김밥을 한 개씩 바꿔가며 먹었다. 신기하게도 각 집마다 김밥 맛이 어쩌면 그리도 다른지, 비슷비슷한 재료로 쌌음에도 짜고 달고 비릿하고 새콤한 그 맛들은 100인 100색이었다. 물론 김의 안쪽에 항상 달걀을 김만큼 넓게 펴서 놓고, 그 귀한 쇠고기를 볶아 넣은 우리집 김밥이 가장 맛있었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이젠 아이들도 다 자라 김밥을 쌀 일조차 없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지금까지도 모이면 두고 두고 어린 시절의 그 김밥 맛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당시 많은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우리 어머니 역시 소풍 때면 늘 선생님 도시락을 챙겨주셨다. 서울 한 구석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5남매를 키우시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그 귀한 김밥을 싸주시면서 선생님께는 항상 오곡과 밤, 대추로 윤기를 낸 찹쌀밥에 겉절이를 비롯한 몇가지 반찬을 싸주셨다. 나를 포함한 언니, 동생 모두는 어머니가 싸 주시는 선생님의 도시락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선생님께 맛있는 김밥을 드리고 싶은데 왜 그 꺼뭇꺼뭇한 찹쌀밥을 드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죄송스런 마음에 쭈뼛쭈뼛 도시락을 내밀곤 혹시 오곡찹쌀밥이라고 실망하실까봐 한걸음에 도망치곤 했다. 다행이 선생님들은 다른 친구들이 드린 도시락의 김밥은 종종 남기시면서도 내가 드린 찹쌀밥은 남김없이 드시곤 했다. 나중에 좀 더 자라서 깨닫게 된 것은 소풍날 야외에서 먹는 깔깔한 김밥보다 입에 착착 붙는 오곡찹쌀밥에 훨씬 더 어머니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체험학습의 계절이다. 요즘은 일 년에 여러 번 체험학습을 간다. 그래서 아이들의 모습도 변했을 법한데 야외체험학습에 대한 기대는 여전한 듯하다. 며칠 전부터 날씨 걱정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다. 

체험학습 날, 아이들의 점심 도시락을 살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간편하고 맛있는 김밥은 여전히 대세다. 그런데 한 개씩 집어먹어보니 그 맛이 그 맛이다. 그저 모두 찝질하고 들큰하기만 하다. “어디서 샀니?” “**천국이요.” “**네 김밥이요.” “**분식이요.” 등등 동네 김밥 집 이름이 모두 나온다. 어머니가 싸 주신 사람은 단지 서너명 뿐이다. 물론 선생님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들도 아예 없다. 학년부장 선생님들이 아침에 김밥 집에서 같은 학년 선생님들 숫자만큼의 김밥을 사서 온다. 참 간편하고 살기 좋아졌다. 

지난번에 형제들끼리 모였을 땐 ‘요즘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 무엇을 추억할까’라는 이야기를 했다. 여기 저기 한 명 아니면 둘 정도밖에 안 되는 형제 자매들이니 알콩달콩한 자기들끼리의 추억거리도 많지 않을 것이다. 현장체험학습에서 먹었던 김밥은 추억거리가 될까? 이집 저집 모두 같은 김밥 맛에 특별한 감회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김밥이 그저 같은 김밥이 아니라, 아이들 숫자만큼 도깨비처럼 신비하고 독특한 여러 가지 맛임을 알 리가 없다. 선생님께 도시락을 싸드린 기억도 없으니 선생님에 대한 향수 비슷한 것 또한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가난한 시대의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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