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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베르테르 효과

누군가가 유명 연예인의 죽음을 알려준다. 대낮에 웬 헛소리냐며 면박을 주었더니 당장에 확인해보라며 불만 섞인 표정이다. 찾아든 인터넷은 만인의 연인이다시피 했던 망자의 사진으로 첫화면부터 도배되어 있다. 경제적인 압박감을 못 이기고 죽음을 택했다는 이야기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추측도 모자라 상상에 가까운 말들까지 활개를 친다.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나 기구처럼 날아다니는 대중의 입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죽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모방 심리를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괴테의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생각났다. 한 사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주인공의 순애보적인 자살로 끝을 맺는 소설 속의 이야기가 동쪽의 작은 나라인 우리나라에까지 나비효과처럼 번지어 나갈까 염려가 되어서다.

가까운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도 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다들 좋아라하는 연예인이 남긴 이야기들로 상다리가 휠 지경이다. 그 중에는 그들의 화려한 모습과 남은 가족들을 염려하기도 했다. 대충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나는 내놓고 죽은 자를 강한 어조로 대했다. 죽은 자를 다루는 방송가의 상식도 문제 삼았다. 사람의 가치에 높낮이가 있을 수 없지만 자연사도 아닌 자살을 앵무새처럼 방송하는 것은 무언지. 특히나 연예인들의 주검 주변에는 경사스러운 날로 오해할 정도로 걸음하는 촬영인파도 탓했다. 고인을 기리는 뜻에서의 번잡함이라면 말할 필요가 없을 일이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카메라는 오가는 이들을 대상으로 동영상을 찍기에 바쁘니 민망할 따름이다. 이는 망자를 기리는 것이라기보다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으로까지 보인다. 

생명을 가진 것은 어느 것 없이 죄다 동시에 죽음을 선고 받는다. 제한된 삶을 살거라는 예고를 받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갈무리 하기에 따라서 길어지기도 한다. 우리들이 하잘 것없다고 짓밟는 잡초만 해도 그렇다. 언제 보았나 싶던 자리에 수북히 무리를 짓던 그들도 또 다른 계절을 두고는 제 모습을 거둔다.

엄밀히 따지면 이는 내일을 기약하려는 자연의 이치요 환경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꽁꽁 언 겨울날을 맞아 자식 같은 이파리들을 죄다 떨어뜨리며 제 식솔들을 외면하는 나무의 잔혹사도 그런 이유요 과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찾아오는 또 다른 계절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지난날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두 번 다시 고개를 디밀수 없도록 최악의 환경을 만들어 주지만 않는다면 제 삶을 억지로 마감하지는 않는다. 이와 달리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 중에는 본인의 죽음에 자식들의 생명줄까지도 근저당 잡히듯 하는 경우가 있다. 이 부분에서는 식물들에서와 같이 고개를 끄덕여 줄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변화가 잦다. 하루에도 수백 번 갰다 흐렸다를 반복한다. 물론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나 모든 이들이 잘못되거나 살기가 힘든다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삶은 화창할 때 보다는 우울할 때가 더 많다. 여지것 살아온 것처럼 살지 못한다고 죽고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삶을 거둔다면 세상은 그 뒷치닥거리에 바쁠것이다. 

높은 곳, 전망 좋은 곳으로 올라가 다시 한 번 세상을 바라보면 해도 뜨고 달도 뜬다는 것을 안다. 그것뿐만 아니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다. 미운사람이 있으면 이쁜 사람이 있다. 높디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의 바다를 내려다보듯한다면 타인이 조금은 이해되고 인생이 그렇게 암흑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남보다 더 낮은 곳에 자신을 세워둬 볼 일이다. 그것도 아니면 세상과 나를 향하여 상상력의 색안경을 끼거나 자기 최면을 걸어 보면 어떨지. 물론 착각이라는 병명의 상태에까지 다다르는 것은 멀리해야할 일이지만 미세한 먼지 한톨까지도 잡아들이는 현미경으로 내 삶을 관조할 것이 아니고 긍정의 망원경으로 세상의 지평선과 수평선을 바라보면 안될까.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부정의 뜻을 안고 있는 'no'도 앞 뒤 순서를 바꾸면 'on'이라는 긍정의 의미를 가져오고 ‘자살’도 바꾸면 ‘살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고전이 된지 오래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문자에 있어서도 받침과 점 하나가 엄청난 차이를 갖고 온다. 나와 너, 남과 님, 돈과 독 등의 단어를 한번 떠올려 보았으면 싶다. 단어들의 한 획을 어디에 붙이느냐에 따라서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뜻은 절묘하게 달라진다.

그렇다. 이렇게 생각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크게는 삶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제 목숨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갈등이 없을 수 없지만 쌓지 않아도 될 담을 쌓거나 필요하지 않은 구덩이를 더 이상 파지 말자. 그 담이 거대한 장막이 되고 그 구덩이가 범위를 넓혀 길을 바꾸거나 우리를 덮치는 자연재해로까지 번져 우리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또 있다. 열 달 동안 배속에 넣어두고 살았을 내 부모의 삶은 어떻게 될까. 물론 죽어가는 많은 이들은 남은 사람들 앞으로 미안한 마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산 자의 가슴 한 구석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한다. 

희미한 기억 하나가 생각난다. 방송에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나라들 중에서 전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영방송에서의 이야기고 보면 허투로 들리지 않았다. 산 목숨을 함부로 진흙탕에 내어던질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물론 생목숨을 팽개치기까지 고통의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줄 안다. 그래도 자살이 미화되거나 용서되지는 않는다.

꺼져가는 생명줄을 붙들고 나날이 전쟁을 치루는 환우와 그 가족들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면 사치요 억지일까. 단지 어떠한 상황에 서 있더라도 삶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깊다보니 이런 말도 하게 되고 옷에 붙은 찐득이처럼 죽을 각오로 세상 속으로 나를 내몰도록 권하게 된다. 

내 생명을 던질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면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바를 마지막 한 번 더 참은들 무에 문제가 있단 말일는지. 나를 버려 얻는 것이 있다할지라도 그로 인해 받는 충격 등을 생각해본다면 구석진 곳에 나를 밀어붙이기 전에 눈높이를 한 단계 더 낮추면 된다.

또한 생명은 나라는 대명사와 같은 뜻으로 이해들하지만 좁게는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넓게는 지구촌으로까지 연결이 되어 있다. 현대인들이 감기처럼 안고 있다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도 예외일 수 없다. 이 또한 시설물과 같은 물리적인 대책보다도 주변인들이 관심이라는 보약과 치료제로 나서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자살 전염효과가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주변 챙기기에 나서는 우리가 많아져 양질의 베르테르 효과가 넘쳐나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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