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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예비시인 다혜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이내 편지를 쓰기로 작정해버렸다. 제자에게 편지쓰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그 기억조차 까마득하다만, 요즘 흔해빠진 문자(쉿,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는 문자메시지는 보낼 줄 모른다.)나 전화통화로는 속 깊은 이야기들을 다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야.

  그래, 섬진강을 다녀온 기분이 어땠니, 소정의 시는 두 편 썼니? 사전 약속 때문 나서긴 했지만, 솔직히 대학교 백일장에서 상을 받지 못한 너의 한 일자(一字) 굳은 표정을 보며 운전하는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좋기는커녕 반짝이는 시상(詩想)을 위한 사제동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이었단다.

  더구나 네 옆에 선아가 있어 선생님으로선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단다. 너를 달래고 위로하다보면 상 받은 선아 입장에서 ‘너만 이뻐하는’ 선생님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

  “너 얼굴 펴지 않으면 진짜로 섬진강 안 간다!”

  세 번쯤 경고했을 때인가. 너는 평소의 미소를 담기 시작했다. 마침내 섬진강 구담마을에 도착, 강가를 찾았다. 서녘 수줍은 햇빛이 물살을 갈라 은빛 찬란함을 뿜어냈지. 구담마을 옆구리에 끼고 웃음지으며 남쪽으로만 달음질치는 섬진강물이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어.

  그러나 정작 나의 시선을 어지럽힌 건 허공을 향해 뛰어오르는 석양의 물고기 같은 다혜 너의 눈망울이었다. 어느새 입이 노란 함박만해진 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섬진강은 예비시인 다혜 너에게 다가 갔으리라!

  순전 네 덕분으로 선생님은 두 편이나 시를 썼단다. 이 편지와 함께 내일이라도 너에게 보여줄 수가 있지만, 솔직히 선생님은 시인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시상이 떠올라 펜가는 대로 정리를 해둔 것뿐이니까.

  “선생님, 여행까지 했는데 시가 안써지면 어떻게 해요?”

여행을 떠나기 전 네가 말했지. 나는 너에게 걱정도 팔자라며 가벼운 핀잔을 주었다. 공모전에 응모하려는 시를 쓰기 위해 강을 찾아 나선 것이지만, 그야말로 안써지면 어떻게 하겠니, 별 수 없는 일이지!

  고3이라 그럴까. 가만 생각해보면 너는 꽤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10대 소녀이다. “이런 경비 학교에서 나오는 거예요” 따위를 물으며 내게 죄송스러워하는 것도 그렇단다. 사람은 체면이 있어야 하는 동물이다만, 그것이 아직 너의 몫은 아니지. 먼 훗날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한 채 안부 전화라도 하면 되는거지. 

  지난 번 다녀온 1박 2일의 전국영랑백일장에서도 너만은 그런 모습이었다. 네가 시간 대기 어렵다고 하여 교직 25년만에 처음으로 1박 2일의 백일장을 계획한건 사실이다만, 내가 내켜 한 일이거든. 네가 부담을 느끼고 죄송스러워 할 일은 아니란 애기야.

  오히려 노래방에서 너희들은 최고였다. ‘왕신세대’인 너희들이 트로트로 선생님의 흥을 살아나게 할 줄은 꿈에도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거든. 더구나 선희가 블루스 음악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르고 네가 나의 파트너로 나서 발이 밟히지 않을 정도의 스텝까지 뗄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니?

  네 말처럼 재미있는 영랑백일장 참가였는데도 다혜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건 또 어쩔 수 없구나. 일반부에서 나만 우수상을 받고 너를 비롯한 4명은 아무 상도 못 받았으니 말이다. 특히 시인이 되고자 하는 다혜 너에겐 그런 마음 가득하단다.

  예비시인 다혜야.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다. 또 실망할 것도 없다. 앞으로도 백일장은 많이 있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은 다 나가게 해줄 테니까. 너로선 나에 대한 죄송스러움보다 한 편이라도 더 쓰는 자세가 절실해야 되지. 

  문제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공부란다. 눈썹이 휘날리는 노력이란다. 그 누구도 고작 몇 편의 습작만으로 시인이 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만큼 시인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사람이니까.

  네가 일정 수준에 올라있는 건 사실이지만, 똑같은 시도 심사위원의 관점이나 취향에 따라 당락이 갈린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싶구나. 관념이나 추상성의 소녀적 감수성만으로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 당락에 일희일비(-喜-悲)하기보다는 꾸준히 정진하는 예비시인이라야 조만간 ‘예비’를 떼어낼 수 있음을 명심했으면 한다. 

  너의 입이 다시 한 일자가 된다해도 어쩔 수 없구나.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폭넓은 독서이다. 시깨나 쓰는 녀석이 김영랑이나 안도현시인을 들어본 적 없다니, 나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시작(詩作)의 수준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 강과 관련된 좋은 시 썼니?”

  이렇듯 다음날 출근이 몹시 기다려지는 건 처음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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