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선배는 전화기 너머로 작정한듯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나, 퇴직서 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야. 다만 아이들이 너무 이쁘고 마음에 걸려서 결단이 늦었던 거지. 알레르기 때문에 염색을 할 수 없어 백발인 나를 아이들이나 학부모가 좋아하겠어? 관리자들도 부담스러울 것이고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컴퓨터를 장난감 다루듯 하는 젊은 사람들과 내가 비교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냐?"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선배의 느닷없는 퇴직이라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오래 지켜보아 온 선배는 여러모로 타고난 스승이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래되고 막역한 지기인데 지난 3월부터 근무지가 달라 헤어져 지내왔다. 선배는 나와 달리 낯가림이 심했다. 그 탓인가. ‘퇴직’이란 단어를 비상약처럼 지니고 다녔으며 드디어는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평소 가슴앓이를 제법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데 막상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이야기를 접하고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좀 더 일찍 그 고통의 깊이를 알았더라면 이런 지경에까지 다다르지 않도록 할 수도 있었을텐데 사후의 약방문 같기만 하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주변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다 이제사 뒤늦은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만 했던 일들이 현실로 드러나자 모래더미에 묻힌 듯이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국가의 법이 바뀌면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금전적으로 손해라는 연금 이야기가 있기에 내 주장만 내세울 수도 없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전화내용을 들은 주변 동료들은 말릴 필요까지 있느냐면서 나를 탓했지만 사람 됨됨이를 아는 입장에서는 가래든 써레로든 퇴직만은 막고 싶었다.
선배는 아이들과의 공간을 신혼 방처럼 꾸민다. 대형 문구점에서 사온 것들로 대충 환경정리를 하는 사람들과 달리 구석구석 내 손길이 닿아야 하고 내 아이들의 작품이 나붙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학교 공개의 날에는 명절이나 축제를 앞둔 소녀처럼 마음 설레곤 했기에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거짓으로 하는 행동이나 생각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우아한 화분의 식물 보다는 야생화와 같은 소박한 꽃을 좋아하기로 유명하다. 따듯한 햇살이 머무는 창가에는 언제나 민들레로부터 갖가지 꽃들을 심어 두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청순하기 그지없다. 어려운 후배들을 위한 일에 기꺼이 두 손을 내밀어 주고 주변사람들의 아프거나 슬픈 마음 등을 구석구석까지 챙겨주던 자애로움, 다들 지친 마음을 손질하기 급급한 휴일이나 공휴일에도 못다한 일을 위해 기꺼이 출근하던 모습은 쉽게 잊을 수가 없다. 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눈높이를 맞추던 모습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으며 내 몸이 고달파도 세월을 거꾸로 먹은 듯 순백색의 젊은이로 살았으니 두 손 들고 퇴직만은 말리는 이유다. 이런 점은 숨기어 두었던 그 서류를 내 놓은 이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요즘은 서로의 양심을 믿기 보다는 동료나 학부모, 학생들에게 까지 ‘평가’라는 잣대의 칼을 쥐어준 것 같아 떠밀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다고 한다. 갈수록 메마르고 팍팍해지는 현실에 마음과 자존심을 다쳐 흑태처럼 까맣게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표 나지 않게 학급운영을 하는 교사보다는 밖으로 드러난 결과에 더 연연하는 듯한 교육 현실이 낯설기만 하다니 가슴이 저리다. 이런 여건들이 자신이란 물건을 팔고자 시장의 좌판 위에서 목청을 돋우는 것만 같아 뒷맛이 게운하지 않다는 것은 공감하는 바가 많다. 경제 논리가 교육과 상반되는 면이 있다는 것을 평소부터 이야기하던 내 입장은 내 생각을 타인으로 부터 듣는 것만 같다. 유유상종의 결과일까. 경우에 따라서는 본심대로 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를 평가하는 평가자라는 것 때문에 지나친 친절을 보인 것이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내 진심이 왜곡되는 일은 다른 원인들과 함께 목을 옥죈다는 고백도 곁들여 해 왔다. 공감이 되었다.
길은 숲 따라 난다는데 그 길 위에 알토란같은 아이들을 내려놓은 채 혼자 그 길을 가려고 한다. 그렇게 좋아 애지중지하던 교실 창가의 들꽃들과의 눈 맞춤도 이제는 시들해진건가. 멀어지려고 애를 쓰고 한 장의 종이 위에 모든것을 포기한 채 이렇게 강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아이들의 얼굴에 복사꽃빛 꽃망울이 여물어 가는 것을 지켜봐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데 가려고 한다. 후배들이 뿌린 씨앗이 옳은지도 확인해주어야 하건만 그 역할을 이제는 그만둘 준비를 하겠단다. 드디어는 아이들을 향해 뿌려주던 한줄기 생명수도 우리들에게 맡긴 채 이 곳을 떠날 채비를 들었으니 남은 이들은 무얼 보고 산역사를 배우란 것인지.
선배의 옷깃에서 묻어나는 체온은 따스했다. 들리는 음성은 주변사람들에게 보시시한 웃음을 머금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기에 붙들어야 하겠다. 더 이상의 갈등은 뒤로하고 이 직을 지켜달라고 매달려야겠다. 수족이 갈고리 같을지언정 선배의 손길과 온기가 필요한 곳이 너무도 많은 연유다. 급변하는 교직의 상황이 가슴 속에서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며 맥을 놓았지만 교직을 짝사랑한 성품을 알기에 이제는 목소리에 힘을 싣고 내놓고 좋아라하면서 여장부로 살아주면 안될까. 한편으로는 나이 들어서 이 직을 지키고 있는 것이 힘들고 아플 수도 있는데 그것도 모른 채 내 시름만 크게 생각하고 기댄 것은 아닐까. 혹여 편하다는 생각에 두 손을 내밀기보다 내 집착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한 것은 아닌가 뒤돌아본다. 봄이 조용히 겨울을 밀어내듯 마음의 불씨가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땅속을 두드리며 기지개를 켜고 나올 교실 창가의 민들레처럼 희망의 전령이 되어 달라고 하면 내 욕심이 큰 걸까? 누구보다 바쁘고 열심히 살아온 것을 알기에 숨고르기 할 여유를 기대해본다. 그 다음에는 우리들의 눈물 뚝뚝 흘리는 날을 막아 주던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