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늘 2층 베란다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까맣다 못해 칠흑처럼 어두운 머리를 양 갈래로 곱게 땋고서, 그녀는 까만 스웨터를 받쳐 입은 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그녀는 눈을 들어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으며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들어 있었던 하늘을 몰래 숨어서 보곤 했다. 하늘은 푸르고 깊디 깊은 심연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집 마당에는 무화과가 한그루 심어져 있었다. 무화과의 잎사귀는 달처럼 둥근 그녀의 모습을 닮았으며, 풀색으로 짙게 채색되어 있었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의 부끄러운 곳을 가린 무화과 잎은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의 부끄러움도 가끔 가려주었다. 우연히 소녀를 발견한 소년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홍자색으로 물들어갔고, 이제나 저제나 그녀를 한 번 만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숫기가 없었다. 그저 부끄럽고 용기가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소년은 5월의 문턱에서 소녀를 그렇게 만났다. 소년은 때때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에디뜨 피아프의 가냘픈 목소리에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잠을 못 이루는 날도 많았다.

소년과 소녀의 집은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대문을 마주한 집이었다. 간혹 그녀와 소년이 동시에 대문을 나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소녀는 보조개를 발그스레하게 피운 채 소년의 뜨거운 눈길을 애써 피한 채 좁은 골목길로 급히 사라지곤 했다. 소년은 멀어져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오늘은 말을 걸어야지 하는 다짐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나 다짐은 다짐으로 그칠 뿐, 소년은 그녀에게 단 한마디도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렇게 봄은 지나가고, 신록이 푸른 물을 뚝뚝 짜내는 여름이 찾아왔다. 무화과나무에선 소녀의 앙가슴처럼 도톰한 열매가 제법 열리기 시작했다. 연둣빛 열매의 표피에선 풀 향이 물씬 묻어나왔다. 그녀의 집 담벼락 위에는 희고 붉은 장미와 명황색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으며, 무화과 잎사귀가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소년은 다시 여름이 가기 전에 그녀를 만나리라 결심하고, 작고 초라한 방에서 서툰 솜씨로 편지를 적기도 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처음 건넬까를 고민하였으며, 첫 데이트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녀가 응하리라는 아무런 확신도 없이 말이다.
그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그래서 소녀는 베란다 밖으로 나와 뜨개질을 할 수 없었다. 소년은 그녀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여름이 훌쩍 지나가고, 무화과 잎새가 축축 늘어지는 가을이 다가왔다. 연둣빛 무화과 열매는 이제 홍자색 빛을 조금씩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껍질은 스펀지처럼 움푹움푹 들어가기 시작했다. 더러 무화과 열매가 그녀의 집 담벼락에서 길가로 떨어지기도 했다. 가끔 소년은 떨어진 무화과 열매를 집어, 양 손으로 살짝 벌린 후 들큼한 과육을 조금 맛보기도 했다. 그 들큼하면서도 쌉쌀한 냄새에서 조금이라도 소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해서 말이다.
여전히 소년은 소녀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으며, 여전히 혼자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낡은 책상 안 서랍에는 어느새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때론 소년은 그 편지들을 읽고 또 읽어보며 자신만의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일 뿐, 소년은 하루라도 빨리 소녀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소년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당시 소년이 소녀를 생각하며 즐겨 듣던 노래는 멜라니 사프카의 ‘The saddest thing' 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가녀린 몸매의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토요일이었으며, 소년이 소녀를 생각하며 밤새 편지를 쓴 날이기도 했으며, 마침내 소녀에게 전달하기로 결심한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집 앞에는 이삿짐 트럭이 있었으며, 소녀는 예의 까만 스웨터를 받쳐 입은 채 엄마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과 짐을 옮기고 있었다.
소년은 불길했다. 혹시. 아냐, 그럴 리가 없다. 하늘이 나를 생각한다면 이리도 쉽게 그녀가 떠나진 않을 것이다. 소년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학교로 향했으며, 하루 종일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날따라 오전만 하는 수업이 어찌 그리 길고도 지루한지. 시계 바늘을 손으로 후딱 돌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소년은 마지막 수업 종이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일어나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가랑비는 조금씩 내리고 있었고, 우산도 안 쓴 소년의 교복은 조금씩 젖어갔다. 집에 도착한 소년은 그녀가 살던 2층 집 베란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소녀가 늘 서성거리던 2층의 베란다에는 사람의 흔적이 깡그리 증발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이렇게 허망하게 가버렸다 말인가. 소년은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러나 소녀가 떠나버린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 잎새는 여전히 연둣빛을 띠고 있었다.
소년은 그녀의 집 담벼락을 밤늦도록 서성거렸다. 아직도 장미와 능소화는 탐스런 색깔을 지니고 있었고, 무화과 열매는 짓물린 몸을 지상으로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짓물린 무화과 열매 하나를 집어 들어 다시 그 과육을 씹어보았다. 들큼하면서도 쌉쌀한 맛은 여전했고, 비는 이제 채찍비로 변하였으며, 소년의 가슴에는 ‘The saddest thing'이 눈물겹도록 서럽게 흐르고 있었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연히 국제시장 앞을 지나가다 그때 소년의 가슴에 고이 자리 잡았던 무화과 열매를 샀고 그 날 밤에 이 글을 썼다.
가을은 무화과의 풀색을 닮은 채 내가 사는 아파트 베란다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