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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래핑 책(wrapping book)에 담긴 오만(傲慢)


최근 우리나라 출판계에는 소위 ‘래핑 책(wrapping book, 랩으로 아무나 펼쳐 볼 수 없도록 책을 싼 것)’이 많이 나오고 있다. 래핑 책(wrapping book)은 책의 상태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또한 타인의 지적 자산이 대가없이 노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래핑 책(wrapping book)은 연예인의 누드 화보집 등에 제한적으로 나온 것 같다. 일정한 돈을 내지 않으면 볼 수 없도록 랩으로 싸서 포장한 것이다. 만약 이를 일반 책과 같이 랩으로 싸지 않고 판다면 이를 공짜로 보기 위하여 서점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서점으로서는 실속 없이 분주할 뿐 이익을 실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자유롭게 개방되었을 경우 미성년자에게 미칠 수 있는 정서상의 해악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랩으로 포장된 화보집을 볼 때마다 그 속에 담긴 내용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더욱 증가되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런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으로 그 또한 판매 전략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일반 책도 랩으로 포장하여 판매대에 내놓고 있다. 얼마나 거창한 내용이기에 그런지는 모르겠다. 독자에게 무상으로는 단 한 페이지도 보여 줄 수 없다는 지적 재산에 대한 저자의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사서 보기 전에는 독자의 어떤 비판도 수용할 수 없다는 저자의 단호함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로서 서점에서 랩으로 싼 책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요즈음은 ‘고객 감동’이 기업의 경영 목표이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고객에 대한 서비스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마침내 철옹성처럼 단단한 아파트 소비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는 아파트 분양도 선 시공 후 분양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는 모델하우스를 지어 놓고 화려한 홍보자료를 만들어 요란을 떨면서 수요자를 모집하였지만 앞으로는 완제품 아파트를 소비자가 직접 찾아가서 요리저리 뜯어보고 선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판계에서는 이러한 소비 관행의 시대적 흐름을 역류하면서 래핑 책(wrapping book)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출판사나 작가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겠지만 독자의 측면에서 상쾌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점에 가면 래핑 책(wrapping book)은 쳐다보지도 않고 사지도 않는다. 때로는 사고 싶은 책도 있고 꼭 읽고 싶은 책도 있지만 꾹 참는다. 왜냐하면 저자나 출판사가 독자에게 보인 오만이 너무나 싫기 때문이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조금도 보여줄 수 없다는 저자의 오만이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오늘의 지성을 대표하는 훌륭한 저술가들이 독자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사람이 여전히 많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부분의 내용을 볼 수 있고 목차를 통한 전체적인 윤곽을 가늠하게하고 필요하면 선택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전체적인 윤곽이나 개요는커녕 목차도 볼 수 없게 하는 저자나 출판사의 오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래핑(wrapping) 도서 출판에는 어떤 고도의 판매 전략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독자의 미묘한 심리를 파고들어 판매효과를 부추기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와 같은 우둔한 사람의 눈으로는 저자나 출판사의 지적 오만과 자기 과시만이 보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저서에 대한 평가와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의도적으로 이를 차단하고 독자의 맹목적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저자로서 온당한 태도가 아니다. 당당하게 전부를 드러내 보이면서 독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독자들이 서점 한 구석에서 읽은 단 한 줄, 단 한 페이지에서 얻은 감동이 그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간다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독자의 눈과 가슴을 외면한 저자나 출판사는 절대로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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