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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이란 기행(4) 페르시아의 진수 페르세폴리스



  이번엔 페르시아의 진수 페르세폴리스가 있는 시라즈를 탐방하기로 했다. 오후 5시에 출발하는 야간 버스를 타기로 했다. 테헤란에서 약 1,000km 떨어진 이란 남동부에 속해 있는 도시이다. 약 12-13시간 걸리니 다음날 새벽녘에 도착하니 숙박비도 벌고 좋은 경험도 하고. 중간 중간 휴게소에 서는 바람에 여러 가지로 편리했다. 이곳 장거리 버스는 대부분 볼보버스로 편의 시설이 대단히 좋다. 의자를 젖히면 거의 침대에 가깝다.  무사히 도착해 택시를 흥정해 페르세폴리스로 향한다. 시내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페르시아 문화재 중 최초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문화재이다. 필자도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을 찾았지만 워낙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단 하루 만에 이곳을 탐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예로부터 시라즈는 ‘페르시아의 얼굴’로 알려져 왔다. 중국 옛 문헌에는 파사(波斯)’로 기록된 ‘페르시아’는 원래 이란 남부 지역을 일컫는 ‘파르스’에서 유래한 말인데, 파르스의 심장부가 곧 시라즈와 그 주변 지역이었다. 오늘날도 파르스는 이란 28개 주 가운데 인구 400여만 명의 큰 주로서, 그 주도 역시 시라즈다. 요컨대 시라즈는 페르시아를 잉태하고 키운 요람인 셈이다. 사실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 중엽 파르스에서 출범한 아케메네스 왕조 때부터 2500여 년 동안 이란의 대명사였다. 숱한 왕조가 바뀌어도 이곳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늘 ‘페르시아’란 전통 개념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러다 팔레비 왕조 때인 1935년 국호를 ‘이란’으로 바꿨다. 페르시아인 대부분이 기원전 2천년께 남러시아에서 이란 고원으로 흘러들어온 인도-유럽계 아리안의 후예들이므로, 그들 이름을 따서 ‘이란’을 택했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요람답게 시라즈는 오랫동안 나라의 터줏대감 노릇을 해왔다. 아리아인들이 기원전 7세기 이란 서북부 함단에 첫 국가 메디나 왕국을 세웠지만, 기원전 6세기 중엽 남부 파르스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 왕조에 멸망당한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기원전 550~333년)는 인더스 강에서 이집트까지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는 첫 세계적 통일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은 왕도를 초기에는 시라즈 북동 130㎞ 지점의 파사르가데(‘페르시아인의 본영’이란 뜻)에 두었다가, 30여년 뒤 동쪽으로 75㎞ 떨어진 페르세폴리스로 옮긴다. 뒤이어 출현한 파르티아(안식국: 기원전 248~기원후 225년)는 헬레니즘의 온상으로 페르시아적 순수성을 얼마간 희석시켰다. 그러나 뒤이어 파르스에서 일어난 사산조(기원후 226~651년)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조의 계승자로 자부하면서 조로아스터교(배화교)를 국교 삼아 역사적 정통성을 되찾으려는 페르시아 주의를 표방했다.

  이후 아랍-이슬람군의 정복으로 나라는 망하고 이슬람화한다. 이란인에게 7세기 중엽부터 15세기 말엽까지 약 800년 동안은 아랍족, 몽골족, 튀르크(터키)족 등의 지배를 받은 수난기다. 고유의 파할레비 문자 대신 아랍 문자가 쓰이고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는 이슬람교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고유의 얼과 혼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인구 1백만의 시원한 고원 도시 시라즈는 다른 도시에 비해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오기 때문에 특히 보안에 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라는 정보를 갖고 있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탐방에 나섰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어느 일본 여행객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외국인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엔진이 꺼져서 차가 섰는데 기사가 조금만 밀어달라고 하기에 의심 없이 내려서 밀어줬는데 시동이 걸리자 차는 손님 보따리와 함께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다리우스 왕의 통치 시의 (521-486 BC) 페르시아 제국은 중근동 지역을 통일하였는데 그 범위가 동쪽의 인더스 강에서 나일 강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황제는 많은 부족과 인종을 다스려야 했고 영토를 20여개의 주로 나누고 각주는 황제가 임명하는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들에게는 외교문제부터 행정, 재정권의 행사까지 누릴 수 있는 자치권이 주워졌다. 다리우스 왕의 겨울을 위한 궁성인 페르세폴리스에서 새해맞이 행사와 각국의 사절단을 접견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되어 기둥, 벽면 등 일부만이 남아 있으나 당시 페르시아의 국력을 절감케 하고 그 때의 중근동 건축양식이 혼합된 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예로 궁정은 경사가 완만한 언덕 위에 계단식으로 지었는데 이것은 바빌로니아식이고 궁성 정문 양옆에 만 들어 놓은 날개 달린 황소는 아시리아식이다. 성내의 넓은 집회장에 세워 놓은 여러 줄의 석조 기둥은 이집트 에서 도입한 방식이며 이러한 절충식 건축 양식은 제국 시대의 문화적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유리문을 지나 계단을(Grand Stirway) 오르면 한 쌍의 황소가 궁성 정문 양 옆에 세워져 있다. 이전에는 정문, 후문과 성으로 이어지는 삼면에만 금속장식으로 덮여진 두 짝의 커다란 나무문이 있어 궁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입구였기에 모든 방문자들은 왕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이곳을 지나가야 했다. 후문에는 한 쌍의 날개달린 황소의 조각이 지키고 있고 외벽은 두터운 진흙 벽돌로 만들어졌고 많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닥사스 문(Xerxes gateway) 의 오른편은 매우 크고 아름다웠던 건물인 아파다나 (Apadana)인데 다리우스 때 건설을 시작 하여 Xerxes 때 완공하였고 왕이 사절단과 귀족을 접견하던 곳이다. 72개 기둥중 13개는 아직도 서있고 오르는 계단에는 아름다운 조각이 되어 있는데 아케메니드 왕국(Achaemenid Empire, 559-331 bc)의 20여개 주의 사절단의 모습과 귀족, 군인, 말, 전차들인데 이들은 왕에 대한 영원한 충성의 증표로 은, 금제품, 무기, 보 석, 각 주의 특산품을 선물하였고 조각에서는 언뜻 느껴지지 않지만 옷, 머리장식과 머리 스타일, 수염 등으로 그들의 인종과 특유의 인격을 잘 표시 했다. 계단은 정면과 왼편에만 있는데 현재는 이슬람 혁명시 파괴된 조각들에 대한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와서 더 깊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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