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히 태양이 눈부신 가을날. 태양뿐 아니라 온통 들녘이 황금물결로 녹익어가는 모습이 그저 황홀하기만 하다. 오늘도 융단처럼 누렇게 펼쳐진 논가를 지나며 나 하나쯤 누워도 될 법한 것이 푸근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그 광경에 한 번 모르는 척 빠져보고 싶은 충동을 내리누르자니 못내 아쉽다.
얼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학교로 발길을 재촉한다. 아직 초록색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아이들의 빛깔이 싱싱하게 녹익어가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 나는 조금 더 싱싱한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서야한다고 한껏 목에 힘을 준다.
"오늘은 나무 줄기의 겉 표면을 관찰하는 공부를 하겠어요. 옆의 친구 얼굴을 잘 살펴보세요. 비슷한 얼굴도 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각자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죠? 나무들도 마찬가지랍니다. 우리 학교 운동장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이름표를 달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어요. 각 나무마다 어떤 모양의 겉 표면을 지니고 있는지 본을 떠서 살펴보기로 하겠어요. 모둠별로 주어진 종이와 크레파스를 가지고 밖으로 나갑시다."
그러자 한창 운동회 연습에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한 아이가 다가와 "선생님, 밖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그냥 교실에서 눈으로 보고 관찰해도 될 것 같은데…"하며 우물쭈물 한다. 밖으로 나간다고 하면 그저 좋아라 하고 함성을 질러대리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다른 것에 순간 당황스럽다. 왜 나가기 싫은 지 이유를 묻자, 아이 말이 밖에 나가는 것이 힘이 들어서란다.
아이는 운동회 연습하느라 밖에서 많이 움직였으니 교실에서 그냥 조용히 있고 싶단다. 그리고 혼잣말하듯 한 마디 더 내뱉는다.
"옷도 젖었고 귀찮은데…." 쯧쯧 저런.
만사가 못마땅한 듯한 그 얼굴 표정에 초록빛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한 마디가 목에 한껏 힘을 준 나의 기운을 모두 앗아가 버리고 만다. 가끔 대중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자잘한 소식 중에서 우리의 마음을 슬프다 못해 아연하게 만드는 것들이 적지 않다.
학교나 학원에 가기 싫어 친구에게 눈병을 옮겨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황당한 얘기, 몸이 아파 학교에는 못 갔지만 학원에는 안 갈 수가 없어 억지로 가는 아이들, 우왕좌왕하는 교육정책에 시달리게 할 수 없어 나라 밖으로 떠나고 보자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가는 아이들의 사연들….
그렇다. 모르기는 해도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조용히 교실에 앉아 눈으로 보고 공부하면 안 되냐며 반문하는 이 아이도 우리 어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무언가에 피곤했으리라.
'요즘 아이들은 옛날 우리 같지 않아'라며 혀를 차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왔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심은 것이 뒤늦게 결실을 맺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순간 한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나무에 매달려 나름대로 종이를 여기 저기 대보며 본을 뜨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나무에 핀 꽃 같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순간에 과연 아이들이 느끼고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오늘도 아이들의 머리와 가슴에 파종을 한다.
그것이 훗날 어떤 열매로 결실을 맺을 지는 몰라도 아이들에게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