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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2014 교단수기공모 은상>가슴 아린 28년 전 기억, 행복한 마침표를 찍다

2013년 햇살 따뜻한 어느 봄날. “교감 선생님! 전화 받아보세요. 제자라고 하는 분이 바꿔 달라는데요?”라며 옆자리의 행정 실무사가 전화를 돌려줬다.

“저, 혹시 이우창 선생님 아니신가요? 저 영국(가명)인데 기억나세요?”

수화기 저편에서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멍했다. ‘영국이의 소식을 영국이 목소리로 직접 듣다니….’

“기억하다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순간 나는 27년 전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중요한 일들을 교육 일기처럼 써 놓은 옛날 자료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후 두 번째 학교에서 4학년을 담임했던 1986년 3월 어느 날, 세련돼 보이는 어머니와 함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입을 야무지게 꽉 다문 영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젓한 사내 녀석이 우리 반에 전학 왔다. 영국이의 모습은 내가 느낀 첫 인상처럼 자신감이 넘쳤으며, 기존 학생들보다 발표나 행동이 훨씬 활발했다.

그때부터 5월까지, 영국이는 결석은 물론 지각 한 번 없이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며, 우리 반에서 1등을 도맡아 할 정도로 성적도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러던 영국이가 6월 초순부터 하루, 이틀 결석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유를 물으니 그 때마다 감기가 심해서 그렇다고 했다. 매일 매일 검사하는 일기에서도 별다른 징후를 발견할 수 없었기에 “날씨가 따뜻한데 웬 감기니? 건강해야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6월 말 쯤, 영국이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봤다. 방과 후 교실에 남겨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엄마 말씀에 대들어 엄마한테 맞은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젊고 세련돼 보이던데 애한테 왜 이렇게 심하게 매를 드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얘기를 꺼리는 것 같아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우리 앞으로는 일기장으로 대화하자”는 약속을 하고 상담을 마쳤다.

그 날 이후 대화 일기장을 통해서나마 영국이에게 힘과 용기를 주려고 영국이가 써 놓은 일기보다 더 많은 양의 내용을 매일매일 기록해줬다. 나의 관심 덕분인지 영국이는 학교도 빠지지 않았고 아주 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하면서 여름 방학을 맞이했다.

방학 중에는 영국이도 잘 지내겠거니 생각하고, 나 역시 방학을 보람 있게 보내고 개학을 맞이했다. 그런데 개학날, 영국이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면서 하루 이틀을 보낸 후에 안 되겠다 싶어 동네 아이들을 시켜 알아봤더니, 영국이 어머니께서 문은 열어주지도 않은 채 ‘영국이가 아파서 학교에 못 간다’는 말만 하셨다고 했다.

삼일 째 결석이 계속되자 걱정스런 마음에 나는 영국이 집을 방문했다. 영국이 어머님은 영국이가 친척집에 갔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영국이를 외국에 이민 보내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민을 보내더라도 결정되기 전에는 학교에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고 집을 나왔다. 영국이집을 나오다가 옆집에 사는 작년 제자 희선이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음료수라도 한잔 하고 가시라며 붙잡는 바람에 집에 들어가게 됐다. 자연스럽게 가정방문 일을 얘기하다가 영국이네 집 사정얘기를 간접적으로 듣게 됐다.

가정은 부유한 편이나 영국이 아버지는 전 부인과 이혼했으며, 지금의 부인은 영국이의 새어머니이고, 새어머니가 본인 핏줄인 아들을 낳고나서 전처 자식들인 영국이와 영국이 누나 에게 체벌과 욕설을 하며 심하게 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누나는 집안 청소도 하고, 갓난아이도 돌봐주고 하니 좀 나은데, 영국이한테는 유독 심하게 한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집을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아마 자기 친자식에게 유산이 상속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고 했다.






한참 동안 멍하니 듣고 있으려니, 그동안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라고 자부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영국이가 결석 할 때, 아니 종아리에 멍이 들었을 때만이라도 주의를 조금만 더 기울였더라면 어린 마음에 이런 상처와 아픔이 덜 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자신이 밉고, 영국이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체되면 안 되겠다 싶어 퇴근시간까지 기다려 영국이 아버지를 만났다. 같이 있을 땐 엄마가 애들한테 잘 대해 줘서 이런 일을 잘 몰랐다가 최근에야 대강 알게 됐다고 했다. 새로 낳은 아이도 있고 그렇다고 또 이혼을 하기는 힘들고 해서 할 수 없이 영국이를 외국에 입양시키는 일을 알아보고 다닌다고 했다.

영국이 어머니가 이민이라고 한 얘기도 아마 입양이었던 것 같다. 영국이 아버님께 “영국이를 찾으면 우리 집에서 당분간 데리고 있겠다” 했더니 고개를 숙이시며 고마워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도움, 인근 파출소 경찰들의 협조를 얻어 4일 만에 영국이를 찾을 수 있었다. 영국이의 모습은 눈만 반짝일 뿐 얼굴도 수척해있고, 옷도 얼굴도 엉망으로 더러워진 모습이 그야말로 거지 그 자체였다.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 집에서 얻어먹고, 헛간에서 몰래 자고, 다른 동네 교회에서 잠도 자면서 생활했다고 했다. 나는 영국이를 자취집에 데리고 가서 목욕도 시키고, 밥도 해서 먹였다.

학교에서는 페스탈로치가 나타났다고 선의의 놀림을 받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뿌듯했다. 더불어 마음 한 쪽에서는 ‘저 녀석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라는 걱정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오후와 저녁시간에는 결석으로 뒤쳐졌던 학업을 보충했고, 아침에는 규칙적으로 동산에 올라가 산책하면서 장래 희망에 대한 이야기, 가족은 소중한 것이라며 부모님을 이해시키는 이야기, 영국이의 훌륭한 장점들을 이야기하는 등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냈다. 또, 영국이에게 꾸밈없는 내 생활이나 솔직함을 보여주고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주려고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갈 때에도 데리고 다녔다. 멀리 공원에 가서 놀이기구도 타고, 솜사탕도 사먹고, 라면도 같이 끓여 먹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따라왔던 영국이는 어느새 우리집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으며, 성적도 1등을 되찾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이 아버지가 본인이 신경 쓰겠다며 이제 집으로 데려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와 철저히 약속을 한 후 영국이는 집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로 나는 영국이 아버지와 영국이의 생활에 대해 수시로 연락했다. 물론 등교 후 영국이는 나의 차지였으며, 2학기 동안 나의 관심은 온통 영국이에게 쏠려 있었다.

그 해 하얀 눈이 내리던 12월 초순이었다. 옆 도시에서 살고 있던 영국이의 고모가 찾아오셨다. 가족회의 결과에 따라 영국이를 본인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고모에게 세심하게 살펴봐 줄 것을 부탁드리면서 영국이가 고모 집에서 안정적으로 지내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5학년 진급 후에도 고모 집에서 아주 건강하게 잘 생활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새 담임선생님도 영국이가 훨씬 밝아졌다는 얘기를 해 주셔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던 5월의 어느 날, 영국이가 학교에 갑자기 나오지 않더니, 그 소식마저도 알 길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고모 집과 영국이 집에 들러 봤더니 두 군데 다 이사를 가고 없었다. 흘러 들리는 얘기로 영국이가 외국으로 갔다는 소문만 들을 수 있었다. 아마, 결국은 입양이었나 보다. 연락도 않고 가버린 영국이나 그 주위 사람들에게 느끼는 서운함보다 ‘그 어린 녀석이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생활할까?’하는 안쓰러움과 걱정으로 마음이 아려왔다.

그렇게 영국이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런데 그런 영국이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자신의 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 나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만나자고 약속한 날 예쁜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건장한 남자가 학교로 찾아왔다.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걱정했던 입양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집과 고모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에 입사했다가 다시 공부해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대도시 초등학교에서 부장교사로 근무하는 멋진 선생님이 돼 있었다. 누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했다. ‘그 시골에서는 잘 사는 집이었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는데 중학교 졸업이라니….’ 마음이 아팠다. 그 날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앞으로 자주 연락하자고 약속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몇 달 후 전화가 왔다. 자신의 결혼식에 주례를 부탁한다며, 우리 집 근처로 여자 친구와 찾아뵙겠다고 했다. 처음엔 “사회적 유명인사도 많고, 같은 학교에 교장선생님도 계시는데 왜 보잘 것 없는 나에게 그 중요한 주례를 부탁하니?” 했더니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오늘 이런 자리는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라면서, 포기하고 싶을 때 마다 항상 선생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바르게 생활하려고 노력해 왔다고 했다. 또, 선생님처럼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해 주고 싶어 회사도 퇴사하고 선생님의 꿈을 이루게 됐다며, 이 38세 노총각의 주례는 꼭 선생님이 해주셔야 한다며 간청을 하기에 결국 승낙했다.

2013년 12월 1일, 나는 난생 처음으로 주례석에 섰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영국이의 앞날을 진심을 다해 축복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2014년 9월 16일 아침 출근길에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제 색시 닮은 예쁜 딸을 낳았어요. 제일 먼저 선생님께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어 전화 드렸어요” 라는 영국이의 상기된 목소리를 들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게 바로 교사로서 느낄 수 있는 보람이 아닐까?’ 그리고 마음 속 기도를 올렸다. 영국이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이제는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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