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외아들을 둔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기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또 그러면 추운 다락방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다시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아버지는 결국 아들을 추운 다락방으로 올려 보냈다.
추운 겨울날, 부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은 아내의 약한 마음을 헤아리고는 마음은 아프겠지만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는 다시 데려오면 안 된다고 조용히 말했다. 아내는 남편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들이 걱정돼 다락방 바닥에서 이불도 없이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아들 옆에 말없이 조용히 누워 팔베개를 해주고 꼭 끌어안아 주었다.
원칙과 사랑의 이중주
필자는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동을 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즉 엄하게 원칙을 지키면서도 사랑을 베푸는 이중주의 아름다운 하모니와 그 속에 숨겨진 교육적 사랑의 방정식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서 가정과 학교에서의 비뚤어진 교육방법에 대해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됐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학교에서 부모와 교사들이 자식과 학생들을 지도하는 방식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가정교육을 보면 많은 부모들이 엄격함을 상실한 채 자식들을 무원칙적·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이 무한한 자식 사랑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부모들이 나중에 자식들로부터 버림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잘못된 자식사랑으로 인해 자식도 버리고, 부모 자신도 버림받게 되는 이중적 비극을 초래하기 쉽다. 이른바 상호공멸이다.
한편 학교교육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 성장기의 학생들은 항상 진리와 삶의 문제로 방황하며 고뇌한다. 교사는 이런 학생들을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 구도자적 자세로 그들과 함께하면서 동반자로서 고뇌할 때 교사와 학생의 삶 모두가 보장되며, 서로 일깨움을 주고받음으로써 진리의 공동생산이 가능해진다. 즉 동붕동행(同朋同行)의 자세, 이른바 상호공생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육현장은 어떠한가? 교사와 학생이 상호불신하기도 하고, 학생이 교사를 경찰에 신고하기도 하고, 학생상호간에 폭력과 왕따가 난무하기도 하고, 때로는 많은 교사들이 열악한 현장근무 여건에 교육을 포기하기도 하는 그런 곳이다.
학교가 왜 이렇게 됐을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원칙을 지키는 엄격함과 언 가슴을 녹여주는 사랑 간의 조화 상실이다.
교육의 원형은 참된 가정에서
흔히 우리는 교육의 원형(原型)을 참된 가정에서 찾곤 한다. 다시 말해 학교교육에서 꼬인 문제의 해법을 가정교육의 방법들 중에서 찾기도 하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 가정교육은 엄부자모(嚴父慈母)를 그 근간으로 했다. 옳음과 그름을 대표하는 아버지는 엄해야 하고, 배려와 사랑을 대표하는 어머니는 자애로워야 한다. 강함과 부드러움, 차가움과 따스함, 사랑과 정의 이 두 가지가 녹아 있는 곳이 가정이었다. 다시 말해 엄부와 자모의 절묘한 이중주가 온전한 가정을 이루고, 온전한 아이로 영글게 하는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위기에 빠진 우리의 공교육이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교육방정식이 되살아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엄한 교사를 질책하는 학부모들이 사라져야 하고, 학생의 실존적 삶에 동참하면서 사랑을 나눌 수 없는 교사들이 사라져야 한다. 아울러 맹목적으로 자식들을 사랑하는 부모들도 사라져야 하며, 원칙을 지키는 엄격함을 상실한 교사들도 사라져야 한다.
엄부와 자모의 이중주!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교육문제를 푸는 하나의 교육방정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