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6 (금)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기고> 16년 vs 2년… 교육열 이기는 절실함

2002년 1월17일 오전 10시 5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미국 콜로라도대(University of Colorado at Boulder) 캠퍼스의 겨울 공기를 가르며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며 강의실로 뛰어들었지만 수업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였다. 강사는 싸늘한 눈길로 힐끗 지각생을 쳐다보더니 계속 수업을 진행했다.

학과명은 통합마케팅커뮤니케이션(Integrated Marketing Communication), 과목명은 브랜드 전략이었다. 강사는 빌 와인트로브. 당시 쿠어스 맥주 부사장이었던 와인트로브는 미국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마케팅 전문가였다. 브랜드위크가 선정한 ‘올해의 마케터’에도 이름을 올렸다. 쿠어스 맥주 본사가 콜로라도 주에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서 그를 강사로 영입한 것이다.

와인트로브는 혹독할 정도로 과제를 많이 줬다. 나는 지각을 만회하려고 정말 열심히 첫 과제의 페이퍼를 만들어 제출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점수는 C+였다. 대학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점수였다. 그는 페이퍼 끝에 빨간 글씨로 “당신은 마케팅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적어 놨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이 아팠다. 그의 지적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콜로라도대의 한 가운데 록키산맥을 마주보는 중앙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주로 도서관 3층에서 책을 보고 페이퍼를 썼다. 어느 날 밤늦게까지 페이퍼에 몰두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넓은 도서관 안에 나 혼자 앉아 있었다. 3월 7일 중간고사에서 93점을 받았다. 의기양양했지만 성적표를 받아보니 B였다. 와인트로브에게 쫓아가 항의했다. 그는 “A는 94점부터”라고 일축했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의 말이 맞기에 참았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존경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마케팅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자였고, 강의를 통해 그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주 한 주가 지나며, 내 페이퍼 점수는 B에서 A를 오가기도 했고, 4월 11일에 제출한 페이퍼에는 처음으로 ‘Excellent’라는 빨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5월 2일 기말 시험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월드컵 분위기 속에서 공부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싶었다. 일주일 뒤 인터넷으로 기말 성적을 확인하니 내가 들은 세 과목 모두 A를 받았다. 브랜드 전략도 거짓말처럼 A라고 찍혀 있었다. 나는 그날 와이트로브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나는 IQ도 높았고 고등학교 때까지 성적도 좋은 편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갈 때 평균 학점이 2.0도 안됐다. 특별히 공부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30대 후반의 나이에 멀리 콜로라도까지 날아가서 모욕을 참아가며 공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부를 하고 싶은 확실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전공했고, 신문사에서도 주로 정치부에서 일했기 때문에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신문 민영화 작업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정치·외교·군사에서 경제·금융·비즈니스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케팅을 꼭 공부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당시 저널리즘 스쿨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는 학교는 전 세계에서 둘 뿐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콜로라도대였다. 콜로라도에서 보낸 2년 동안 나는 한국에서 16년 동안 학교를 다닌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많이 공부했다.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교육자들은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최선의 교육은 학생들 스스로가 절실하게 공부할 필요성을 느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런 절실함은 어린 학생들이 느끼기 쉽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교육이 어려운 것 아닐까.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