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몸담고 있는 학교는 인구 60만의 시 지역 외곽에 위치한 6학급짜리 작은 학교다. 이 작은 학교에서 올해 신학년도를 맞아 학구 외 타 지역 학생들의 학년 초 전출이 발생해 안 그래도 적은 수의 학생이 더 줄었다.
지난 해 동창회에서 기사 급여 등 비용 일체를 지불하는 적극적인 학교지키기 운동을 펼치고 교직원들의 열정적으로 일한 결과 학생 수가 학년말에 10명 정도 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학생 수가 늘자 소형버스 하나로는 타 지역 학생을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서게 되는 상황이 발상해 그동안 등교 시 한 번만 운행하던 통학버스를 새 학년부터 두 번으로 늘려 운행하게 됐다. 두 번에 나눠 학생을 등교시키다 보니 9시가 넘어서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40분 이상 통학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하고, 아침에 급우들과의 자유 시간도 누리지 못하는 빠듯한 상황은 원래 처음부터 초등학생들에게 무리였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학교는 집 근처에 있는 학교일 수밖에 없다. 모교를 지키겠다는 동창회와 지역민들의 열망에 대해 건전한 이성과 냉철한 교육적 판단 없이 학생 수 불리기에만 급급했던 단견에 따른 폐해가 봄이 되자 드러난 것이었다.
이 학교는 사실 작은 학교로서 나름 강점이 많은 학교다. 주변 풍광이 아름답고 시골의 학교들의 태반이 그러하듯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로 이 지역의 유일한 공공기관이자 지역 주민들의 문화, 교육의 센터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올해 부임해 얼마동안 생활을 해보니 그간 학교 변화의 이력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됐다. 평화롭고 강점이 많던 학교에 학업성취도평가, 학교평가 등 평가의 바람이 불어 닥친 것이다. 학업성취도평가 결과 학교 성적이 전국 하위권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교육의 본질을 추구해온 지역민의 자랑이자 쉼터이고 문화공간이었던 학교가 어지러워졌던 것 같다.
그동안 평균성적 이하인 학교에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학력향상형 창의경영학교라는 이름을 붙여 막대한 예산을 투입, 학력향상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었다. 3년에 걸쳐 이 작은 학교에도 1억원에 상당하는 예산이 투입돼 학력향상에 매진하게 됐다. 그러면서 모든 방과후학교 프로그램 등 교육적 프로그램이 수익자 부담이 아닌 공부담으로 처리됐다. 시내권 아이들이 전학을 오게 된 것은 이러한 영향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세상사 모든 일, 무리하면 탈이 나게 되는 법이다. 이번 학년 초에 있었던 일도 결국 무리하게 학력향상만을 앞세워서 탈이 난 결과다.
미래는 다양성의 시대라 한다. 다양성, 독창성, 개별성 등의 개념이 시대의 트렌드가 되고 문화와 풍토가 될 미래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며 학력향상만을 요구한다면 과연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필요한 소양과 자질을 길러줄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이야기라고 본다.
물론 예전에 한 때 주장됐던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는 논리도 융합형 인재를 필요로 하는 미래사회를 준비시키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한심한 주장이었지만, 한 가지 틀에 따라 학력향상만을 요구해서는 창의성도, 인성도 기를 수 없고, 다양성에 대한 존중도 키울 수 없다. 그렇기에 평가를 하더라도 그 결과의 해석과 활용에 보다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작은 학교는 작은 학교만의 강점이 분명 있다. 산과 들이 키워낸 시골 아이들, 풍부한 정서, 자연을 공감하는 능력 등 도시 아이들과는 다른 그들만의 강점이 분명히 있다. 이것이 미래를 살아갈 이 아이들의 힘이 될 것이다.
이들에게 강남 대치동에 사는 아이들과 점수 경쟁을 하도록 할 필요는 없다. 구름 모양을 보고 내일의 일기를 읽을 줄 아는 아이들, 동물의 울음소리, 몸짓 하나를 보고 내일의 강수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가진 아이들에게 전국 차원의 학업성취도평가 성적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평가를 하더라도 그 결과의 해석과 활용에 보다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원래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 미흡 학교를 창의경영학교로 선정할 때의 명분은 창의·인성교육과 학력향상 프로그램의 병행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진정 관심이 있다면 방점이 어느 쪽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 답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