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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부끄러움’에 대한 단상(斷想)

어른으로서, 교사로서 올바른 윤리의식 가지고 모범을 보여 왔나 고민해보자

윤오영의 수필 ‘부끄러움’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심리를 소재로 삼아 한국적이고 고전적 아름다움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미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먼 친척 오빠의 방문에 건넌방에 걸어둔 곤때 묻은 분홍 적삼을 들킨 소녀가 무안하고 부끄러워서 떠나는 오빠의 마중도 나오지 못하고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붉어진 얼굴에서 그 옛날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성정(性情)을 발견할 수 있다.

수업에서 이런 본문을 공부한 후, 학습활동에 들어갔다. 마지막 표현하기 문항은 ‘부끄러움’과 유사한 상황의 경험을 떠올려 보고, 특별히 감동을 느끼게 된 계기를 짧은 수필 형태로 써 보는 것이었다. 글쓰기 시간으로 준 10분이 지나자 이제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할 순서가 됐다. 짧은 시간이었기에 깊은 맛이 담긴 곰삭은 글이 나올 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있었기에 발표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두 서너 명의 발표가 끝난 후, 가운데 줄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현문이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늘 얼굴에 미소를 달고 사는 녀석이라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자신에게 발표할 기회를 달라는 미소처럼 보였다. 녀석은 평소에도 수업에 들어가면 강의에 집중하고 열심히 발표하는 등 활기찬 수업을 이끄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래 이번에는 현문이가 발표해볼까?”

녀석은 자신을 지목해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 거리낌 없이 “네, 선생님 제가 발표하겠습니다”했다.
다른 아이들의 발표에서는 성적이 떨어져 부모님께 부끄러웠다는 내용이 많았기에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제가 주변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특별히 감동을 받았던 일은 중학교 3학년 때 버스 안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저의 옆자리에는 중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후배가 앉아 있었고 버스는 손님들로 만원이었습니다. 버스가 종착지에 다다를 무렵 앞에서 기사아저씨와 한 할머니 간의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내용을 듣고 보니 할머니께서 버스비를 미처 준비하지 못해 다음에 돈을 내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뻘 되는 버스 기사 아저씨는 돈이 없으면 버스를 타지 말 것이지 왜 버스를 탔느냐며 다짜고짜 할머니에게 핀잔하며 무조건 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고 버스 안에는 많은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어색한 상황에서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후배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운전석으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버스 요금통에 넣으면서 ‘아저씨, 할머니 버스비는 이것으로 대신하고 나머지 돈은 혹시 다른 노인분들이 버스비가 없을 경우에 대신 낸 것으로 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나의 주머니에도 할머니의 버스비를 대신 내줄 만큼의 돈은 있었지만 괜히 나서는 것이 부끄러워 모른척하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후배는 직접 나서서 할머니의 버스비를 내주고 또 다른 노인들의 버스비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습니다.”

현문이의 발표가 끝나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격려의 박수를 쳤다. 부끄러웠던 경험을 짧은 시간에 실감나게 쓴 것도 대단했지만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린 후배에게서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래서 특별히 더 감동을 받았다는 대목에서 정작 부끄러워할 사람은 아이들에게 과제를 내주고 발표를 시켰던 나인 것 같아 아이들보기가 쑥스러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지만 다 같은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현문이와 같이 타고 있었을 버스에는 어른들도 많이 있었을 터인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어린 학생이 사태를 수습하게 만든 것부터가 모든 어른들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길을 가다 보면 담배를 피우고 아무렇게나 버리는 것도 모자라 차창 밖으로 꽁초를 버리는 어른들을 볼 때면 민망하기 그지없다. 침을 아무 데나 뱉고 커피를 마신 종이컵을 길바닥에 버리는 어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지 궁금하다.

그런 점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등교하면 학급 청소를 하는데 아이들과 함께 먼지를 마셔가면서 바닥을 쓸고 있는데 어떤 담임선생님은 교실 밖에서 청소하라고 소리만 버럭버럭 지르는 경우도 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라고 학급별로 용도에 맞는 쓰레기통을 비치했지만 정작 쓰레기 분리수거가 안 되는 곳은 선생님들이 쓰는 교무실 쓰레기통이라는 역설은 부끄러움을 넘어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되돌아보게 한다.

윤오영의 수필 ‘부끄러움’은 한국적인 미학으로서의 심리적 의미를 뜻하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어른들이나 특히 올바른 윤리의식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야할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진정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문해 본다.

그날 현문이의 발표는 교직생활 20년이 넘어선 어른이자 교사인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움의 의미를 새삼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수업을 끝내고 ‘그래 어른으로서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모습만큼은 절대로 보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아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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