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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일본의 저력, 그 ‘디테일’을 교육하고 교훈 삼자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평생을 항일(抗日)과 극일(克日)의 정신을 지침 삼아 교단을 지켜온 원로 교육자의 고백 하나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에게 일본은 오랜 시간 동안 ‘가깝고도 먼 나라 그 자체’였다. 뉴스에서 빈번하게 들려오는 독도 문제나 역사 왜곡 소식을 들을 때면 여전히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토종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종국적으로 이 글의 진의를 알아채게 되면 앞선 말과는 다른 상황에 “(당신도) 별도리가 없군요”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릴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치적 앙금을 잠시 내려놓고 교육, 문학, 그리고 스포츠 등 전반적인 영역으로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본 일본은, 세간에서는 “저무는 나라”라고 평가하거나 “대한민국이 일본보다 잘 산다”라며 다소 들뜬 기분에 있을지라도, 솔직히 ‘부럽고도 무서운 나라’라는 인상을 지을 수 없다. 참고로 필자는 금년 6월에 일본 홋가이도를 다녀와 느낀 소감을 일차적으로 언론 매체에 글로써 피력한 바가 있다. 특히 금년에 치러진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보여준 일본 축구의 발전 모습은 비록 상위권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축구 최정상 국가들과의 비등한 경기 운영에 우리로서는 부러움을 넘어 경외감마저 자아내게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아시아의 변방에서 벗어나 전방위적인 ‘탈아시아’를 이뤄냈을까? 현재까지 일본 출신 개인 노벨상 수상자는 총 31명이며, 이들 가운데 28명이 자연과학 분야에서 나왔다. 특히 2001년 이후에만 22명이 추가되어,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와 연구 환경의 선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 단체도 2024년 1개에 이른다, 이처럼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힘과 감히 월드컵 우승을 공언하기에 이른 근거에는 2025년만 해도 일본인 과학자 2명이 한꺼번에 노벨상을 받기도 한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들의 저력을 시샘 어린 눈이 아닌, 냉철한 교육자의 눈으로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손자병법의 저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이제는 무조건적인 반일(反日)을 넘어, 그들을 제대로 알고 뛰어넘는 진정으로 냉철한 극일(克日) 교육이 필요한 때라 할 것이다.

 

<​사례 1> 노벨 과학상 31명의 비밀에는 ‘기인(奇人)’들을 길러내는 엉뚱한 교육에 있다. ​대한민국은 매년 10월만 되면 이른바 ‘노벨상 앓이’를 한다. 예컨대, 고은 시인의 집 앞을 서성이고, 올해는 혹시나 하며 물리학상, 화학상 발표 화면을 새로 고침으로 한다. 반면 일본은 이미 화학 8명, 물리학 12명, 생리의학 6명, 문학 2명, 평화 2명(개인 1명+단체 1회 별도), 경제학 1명(일본 출신) 등 총 31명이나 배출했다. 반면에 대한민국은 문학 1명, 평화 1명으로 총 2명에 그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영광의 이면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흔히 일본인들을 ‘매뉴얼의 노예’라고 비웃곤 한다. 정해진 선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 고리타분한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문화에서 창의성의 정점인 노벨상 수상자가 무더기로 나올 수 있었을까? 여기에 일본 교육의 반전 매력이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일본 노벨상의 산실이라 불리는 교토대학(京都大学)에는 재미있는 전통이 있다. 학내에 굴러다니는 ‘기인(개성 넘치는 괴짜)’들을 학교 차원에서 보호하고 장려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유명한 교육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오타쿠 정신의 제도화’라고 부른다. 남들이 뭐라 하든 한 우물만 파는 바보들을 일본 사회가 진득하게 기다려 준다는 뜻이다.

 

우리는 2002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 씨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박사 학위도 없는 평범한 중소기업(시마즈 제작소)의 학사 출신 연구원이었다. 실험 중에 실수로 아세톤 대신 글리세린을 섞었는데, “아까우니까 그냥 실험해보자”며 던진 엉뚱한 시도가 단백질 분석의 신기원을 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다나카 고이치 자서전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한다』 중에서)

 

​만약 한국의 엄격하고 효율성 높은 기업이나 대학이었다면 어땠을까? “학사 출신이 비싼 시약을 낭비했다”며 경위서부터 쓰지 않았을까? 일본 교육과 사회의 저력은 바로 이 ‘실수할 수 있는 자유’와 ‘돈 안 되는 기초 학문에 수십 년간 묵묵히 예산을 지원하는 끈기’에서 나온다. 우리는 1~2년 만에 성과가 안 나오면 연구비를 깎아버리지만, 그들은 연구자가 평생 한 가지 주제에 매달려도 밥은 먹고 살게 해 준다. 우리의 ‘빨리빨리’ 교육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그들은 ‘묵묵히’라는 특유의 무기로 극복한 셈이다.

 

<​사례 2> 일본 축구의 ‘100년 대계’로 만화 같은 상상이 현실이 되기까지를 보자. 올해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보여준 일본 축구의 조직력과 세련미는 단연 압권이었다. 과거 한국 축구가 ‘투지와 정신력’으로 일본을 압도했다면, 이제는 기술과 시스템에서 일본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본 축구협회(JFA)는 이미 오래전 ‘JFA Centennial Plan(일본 축구 100년 선언)’을 발표하며 2050년까지 월드컵에서 우승하겠다는 로드맵을 공개했다. 처음 이 계획이 나왔을 때 전 세계는 “축구 만화 『캡틴 츠바사』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니냐”며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행보를 보면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 축구의 저력은 ‘두꺼운 저변’과 ‘정교한 매뉴얼’에 있다. 일본 고교 축구선수권 대회(일명 센슈칸)의 결승전은 매년 5만 명이 넘는 관중이 도쿄 국립경기장을 가득 메우며 전국에 생중계된다. 여기에는 엘리트 선수 몇 명만 쥐어짜는 구조가 아니라, 전국의 수많은 학생이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며 축구를 문화로 즐기고 있다.

 

​게다가 일본 축구는 유소년 시절부터 성인 대표팀까지 전 연령대가 동일한 패스 축구 철학(일명 재팬 웨이)을 공유하도록 교육 지침을 통일했다. 이로써 초등학교 감독이 바뀌어도, 고등학교 코치가 바뀌어도 아이들은 혼란을 겪지 않는다. ​한국 축구가 “정신력으로 뛰어라!”, “무조건 싸워라!”라고 소리칠 때, 그들은 “몇 도 각도로 패스를 주고받아야 공간이 열리는가?”를 수학적으로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축구를 단순한 체육이 아닌 ‘시스템 공학’으로 접근한 결과가 바로 오늘날 월드컵 우승을 넘보는 일본 축구의 야망의 실체라 할 것이다.

 

이제 상기 두 가지 일본의 사례가 ​대한민국 교육에 던지는 화두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기적의 시대’를 넘어 ‘시스템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대한민국도 참 대단한 나라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교육 열풍을 일으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고, 전 세계가 열광하는 K-컬처와 세계 최고 수준의 IT 산업을 일궈냈다. 하지만 보다 솔직해지자. 지금까지 우리의 성공은 천재적인 몇몇 영웅들, 예컨대 실력이나 역량이 월등하게 뛰어난 플레이어가 팀을 승리로 이끄는 ‘하드 캐리(hard carry)’와 국민들의 눈물겨운 ‘갈아 넣기(헌신)’ 덕분이 아니었던가?

 

​이제 그런 ‘기적의 약발’은 다해가고 있다. 저출생으로 아이들은 줄어들고, 학생들은 오직 의과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대치동 학원가에서 영혼 없는 문제 풀이 기계로 길러지고 있다. 반면 우리가 ‘아날로그의 나라’라고 놀리는 일본은 기초과학의 탄탄한 뿌리와 스포츠·문화의 두터운 저변이라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로 미래를 다져 그 결과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원로 ​교육자로서 제안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 교육도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두 가지 저력을 흡수해야 한다. ​첫째, ‘오타쿠(괴짜)’를 품어주는 관용의 교육이다. 모두가 똑같은 정답만을 찍어내는 수능 만점자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엉뚱한 분야에 미쳐서 밤을 새우는 ‘행복한 바보’들을 격려하고 응원해야 한다. 그 바보들이 훗날 노벨상을 받아오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둘째, ‘100년을 내다보는 시스템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춤을 추는 대입 제도와 일회성 성과에 급급한 체육 정책으로는 일본의 시스템을 이길 수가 없다. 초등학교 때 심은 씨앗이 30년 후 월드컵 무대에서 꽃을 피우도록 기다릴 줄 아는 어른들의 인내심이 절대 필요하다.

 

​일본 축구가 월드컵 우승을 목표로 달릴 때, 우리는 여전히 “일본전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감정적 가이드라인에 갇혀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진정으로 일본을 이기는 길은 해묵은 감정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치밀함과 시스템을 아끼지 않고 배워 우리 것으로 만드는 창의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웃 나라 일본 축구의 도약을 바라보며 배가 아프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높이 뛸 수 있는 구름판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31명의 노벨상 수상과 월드컵 우승을 꿈꾸는 일본의 원대한 계획은 결국 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온 ‘교육의 힘’에서 나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 교육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겉으로는 세계적인 기준에 맞추되, 속으로는 아이들의 개성과 시스템의 힘을 단단히 다지는 그런 교육 말이다. 일본의 저력이 부러운가? 그렇다면 오늘부터 우리 교실의 ‘엉뚱한 녀석’이라 간주하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눈길 한번 먼저 건네는 건 어떨까? 손자병법에 이르길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白戰不殆)”라 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우리에게 숙명의 배움을 전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동안 불가능할 것 같은 경제 측면에서 이제 일본을 따라잡고 1인당 GNP 지수는 그들을 앞지르는 기적을 일구었듯이 교육과 스포츠 측면에서도 일본과 진짜 멋진 승부를 펼치도록 의지를 다질 때가 지금처럼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을 얻은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제 일본의 저력에 더욱 디테일(Detail)한 연구로써 ‘지일(知日, 일본 알기)’를 통해 진정으로 멋진 한판의 승부를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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