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을 직업교육·훈련 교육과정과 자격 개발에 활용하더라도 최종 판단과 검증, 책임은 교사와 산업계 전문가 등 사람에게 남겨둬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AI가 노동시장 분석과 초안 작성의 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충분한 기준 없이 도입하면 일부 기관에 영향력이 집중되고 교육과정 결정의 책임 소재가 흐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발표한 정책 브리프 ‘직업교육·훈련 개발에서 AI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5대 원칙’에서 인간 중심, 다양성과 포용성, 책임성, 투명성, 데이터 품질·보안·보호를 핵심 기준으로 제시했다. 브리프는 25개국 대상 조사와 10개 국가 사례 연구, 약 80명의 관계자 인터뷰를 토대로 마련됐으며 21개국 관계자 117명이 참여한 워크숍을 거쳐 원칙을 보완했다.
OECD에 따르면 AI는 이미 직업교육 분야에서 노동시장 자료 분석, 직무·기술 연결, 이해관계자 의견 종합, 교육과정과 자격 기준의 초안 작성 등에 활용되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산업 수요를 교육과정에 반영하고 방대한 자료를 일관되게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현재 각국의 활용은 대체로 개별적이고 실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AI가 교육과정이나 자격을 직접 결정하기보다 대량의 노동시장 자료를 분석하고 기존 문서의 중복을 확인하거나 논의를 위한 초안을 만드는 준비 단계에 집중돼 있다는 설명이다.
OECD는 직업교육 교육과정과 자격이 일반적인 교수·학습 자료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고 봤다. 정부와 교육기관뿐 아니라 산업계, 노동계, 업종별 단체 등 여러 주체가 협의해 만들고 법적 기준과 품질보증 체계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정 결과가 학생의 진로와 취업, 기업의 인력 채용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만큼 AI가 생성한 내용을 전문가 검토 없이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원칙은 ‘인간 중심’이다. AI는 기술 수요 분석이나 문서 요약, 초안 작성 등을 지원하되 최종 교육과정과 자격을 승인하고 책임지는 주체는 교사와 교육과정 전문가, 산업계 관계자여야 한다. AI가 제시한 결과도 협의회와 전문가 검토,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 등 기존 절차를 거쳐 정확성과 현장 적합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AI를 도입해서도 안 된다고 봤다.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해결하려는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정하고, AI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 업무에 한해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활용 효과가 분명하지 않을 때 AI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책임 있는 선택으로 제시됐다.
독일 연방직업교육훈련연구소는 AI를 훈련 규정 초안 작성과 문서 비교에 시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AI가 법적·구조적 요건과 품질관리 기준까지 충족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준비 작업과 기술적 지원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네덜란드도 AI를 초안 작성과 중복 확인에 활용하지만 최종 자격 기준은 업종별 전문가 협의를 거쳐 승인한다.

두 번째 원칙은 다양성과 포용성이다. AI 활용이 디지털 역량과 재정이 충분한 대형 기관에만 유리하게 작동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중소기업과 소규모 직업교육기관, 디지털 기반이 취약한 지역도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공용 도구와 교육, 기술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는 직업교육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하는 교사의 역할과도 연결된다. OECD는 교사를 비롯한 교육과정 개발자와 산업 전문가가 AI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결과를 검증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자동 생성된 내용에 대한 의존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관과 교사 간 AI 활용 역량 차이가 교육과정 결정 과정의 참여 격차로 이어지지 않도록 지속적인 연수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책임성 원칙에서는 AI 사용을 누가 승인하고 과정을 감독하는지, 생성 결과를 누가 검토하고 최종 교육과정과 자격을 누가 소유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AI에 판단과 권한을 부적절하게 넘기지 않도록 사용할 수 있는 업무와 사용할 수 없는 업무도 사전에 문서화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투명성도 핵심 조건으로 제시됐다. AI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는지, 어떤 자료를 투입했는지, 결과를 어떤 절차로 검토했는지와 함께 한계도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이해관계자 의견을 종합하고 시각화하는 데 AI를 사용하면서도 생성 결과를 최종 합의가 아닌 토론을 위한 참고자료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다섯 번째 원칙은 데이터 품질과 보안이다. 교육과정과 자격 개발에는 학생·교원 정보뿐 아니라 기업과 고용시장 관련 자료가 활용될 수 있어 데이터 접근과 저장, 공유, 삭제에 이르는 전 과정의 관리 기준이 필요하다.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운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최신성과 대표성을 갖춘 데이터를 선별해야 편향된 결과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OECD는 각국 정부가 단편적인 시범사업을 넘어 직업교육 분야의 AI 활용 목적과 범위를 정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과정에서 교사와 산업계, 직업교육기관이 함께 지침을 만들고 역할에 맞는 연수와 기술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AI는 공동의 전문가 판단과 의사결정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해야 한다”며 직업교육 관계자가 교육과정과 자격에 대한 주도권을 유지하면서 신뢰와 포용성, 품질을 지키는 방향으로 활용할 것을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