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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교사 에세이, 한 페이지] 영혼이 깨끗한 선생님, 그들이 사는 세상

2010년이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운천이를 만났다. 운천이는 키가 컸으며 말수가 무척 많은 아이였다. 성적은 거의 바닥권이었고, 지난해 말에 전학을 와서 외곽 지역에 살고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 있는 학교에는 대부분 시내에서 거주하는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데 좀 의외였다. 노선버스를 타고 40분 정도를 가야 하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 아이와 처음 만난 날, 난 이런 농담을 했었다.

 

“최운천. 거기 살면 가까운 청풍중학교로 가지 왜 여길 왔냐?”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멋쩍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아이의 눈꼬리가 살짝 흐려지는 것을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추궁하듯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우리 애한테 전학 가라고 했어요?”

 

순간 당황했다. 처음 만난 후 친해지려고 그냥 농담 한 거라고, 정색을 하고 등 떠밀 듯이 아이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학교 생활이 싫은 아이가 학교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나온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였겠지만‘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운천이를 더 자세히 관찰하고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참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으며,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우려대로 이 녀석의 학교생활 적응은 쉽지 않았다. 워낙 배경지식이 부족하고 어렸을 때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기에 수업 시간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것도 어려워했다. 돌출 행동을 하거나 짜증을 부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 반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뿐 아니었다. 친구들과의 관계는 정말 최악이었다. 덩치도 크고 힘이 있는 아이였기에 다른 아이들이 쉽게 곁을 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성적도 신경 안 쓰고 멋대로 하는 아이라서 괜히 잘못 엮이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라도 날까 주저하는 분위기였다.

 

‘문제아 운천이’로 깊어진 고민

 

친구들과의 갈등은 잦은 싸움으로 연결되었다. 걸핏하면 흥분하고 약한 애들을 건드렸으며, 이른바‘빵셔틀’이라 불리는 나쁜 짓도 했다. 수업 시간에 몰래 나가 담배를 피우다가 걸린 적도 있었고, 학교 규칙을 어겨 벌점을 받는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벌점 따위 신경 안 쓰겠다는 그 녀석의 배포에 어떡해야 할까 고민한 적도 많았다. 작은 징계는 한두 번 있었지만 퇴학이란 게 없는 중학교에서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녀석을 제어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수시로 아이의 부모님을 학교에 불러 대화를 하고 가정에서의 지도도 부탁했다. 한때 아이에게 더 많은 정을 쏟고 의기양양하던 아버지도 아이와의 관계 맺기를 어려워했다. 알고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 후 어머니가 재혼을 했고, 지금의 아버지는 새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래도 새롭게 꾸린 가정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 아버지로서의 소임을 해내려고 노력하는 듯 했다. 그러나 현실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니 그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또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반에서 가장 작고 약한 아이였던 윤식이에게 또 녀석이 몹쓸 장난을 친 것이다. 그런데 이 장난이 그나마 노력하고 있던 나를 분노하게 했다. 학교 정원에서 작은 청개구리를 잡아 윤식이의 입에 넣게 강요했고, 그것을 보면서 몇 명의 아이와 함께 웃고 즐기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한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징계 처분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어지간하면 담임 교사로서의 책임감이 있기에 아이의 징계를 막는 편이다. 최대한 담임으로서 노력해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하거나 심하면 각서를 제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피해 학생 부모님의 민원도 그렇고, 그동안 묻어두고 넘어가 주었던 것들의 봉인이 풀린다면 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것만 같았다. 이런 비인간적인 가학 습관까지 묻어둔다면 이 아이의 장래는 암담할 것이라 생각했다. 먼저 전화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결연한 나의 의지를 말했다. 전화를 사이에 두고 우리 둘 간에는 절반 이상이 침묵과 한숨이었다. 일단 그날 오후 늦은 시간에 학생의 아버지를 불렀다.

학교에 온 학생의 아버지는 맨 먼저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선생님, 이거….”

“이게 뭐죠?”

“한번만 봐주세요. 꼭, 부탁합니다.”

얼핏 입구가 열린 편지봉투를 보니 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했다. 대충 어림해 봐도 50장 이상은 되어 보였다. 새 돈이 아닌 걸로 봐서 큰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있는 것을 챙겨서 온 것 같았다. 짜증이 났지만 순간 마음이 두근두근 거리는 게 이상한 감정이 생겨나는 듯했다. 지금까지 교사 생활을 하면서 돈이라는 것을 받은 적이 없었다. 스승의날에 작은 선물을 받기는 했지만 김영란법이 나오기 전이라 그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에 들린 봉투 하나

 

하지만 막상 돈이 앞에 놓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들고 온 사람의 성의와 그의 절박함이 떠올랐다. 눈동자를 굴려서 주변을 돌아봤다. 여기는 교실이라 우리 둘뿐 아무도 없었다. 봉투를 받자마자 바로 정색을 하면서“나는 이런 사람 아닙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호랑이는 굶어도 풀을 먹지 않습니다”와 같은 통쾌한 말을 하면서 상황을 끝내버리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게 멋져보이기는 했었는데, 나도 이런 상황이 되면 칼처럼 끝내버리는 촌철살인의 말 한마디로 나의 자존심을 과시하리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닥치고 나니 그렇게 되질 않았다.

단 몇 초의 시간이었지만 정지화면처럼 우리 둘 간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내가 말했다.

“이렇게 하시라고 부른 게 아닙니다. 그건 받을 수 없습니다”

얼굴빛이 바뀌는 학부모를 보고 계속 설득을 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그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이런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한 후 이런 말을 했다.

 

“운천이가 조금씩 나아져 무사히 졸업 하는 날,

그때 꽃 한 송이만 주세요. 그러시면 그건 받겠습니다”

 

결국 그 학부모는 봉투를 다시 집어넣었다. 이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에 대한 걱정과 대처 방안 등을 의논했고, 아이를 키우는 동업자의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걱정을 주고받았다.

그때 그 학부모의 마음은 이해한다. 엇나가는 자식을 보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아이를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능력 범위 내에서 돈이라도 쓰고 싶은 것이겠지.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서,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뒤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이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때 당시 우리 사회가 그런 행동을 용인했던 분위기도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날 이후 아이는 조금씩 달라져 그나마 나아진 것으로 기억한다. 학부모가 더 신경을 쓰고 마음을 쓴 만큼 사춘기를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학기를 마치지 않은 10월의 어느 날, 새로운 환경에서 아이를 키워보겠다는 마음에 전학을 갔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그 이후 난 그 아이를 잊어버렸다.

입시 등으로 3학년을 바쁘게 보내고 드디어 맞은 졸업식 날. 근사한 말로 마지막 종례를 마치고 아이들을 귀가시키자 전화가 울렸다. 바로 전학을 갔던 운천이 아버지였다. 어쩐 일이냐고, 반가운 마음에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아버지와 둘이 객지 생활을 하다보니 아이도 조금씩 나아졌다고 한다. 비록 실업계 고등학교지만 진학도 했고 이제는 제법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경써주신 선생님께 졸업식을 맞아 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다며 학교에 오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아버지는 그때 내 말대로 꽃 한 다발을 들고 학교에 오셨다. 그리고 만 원짜리로 가득한 봉투보다 더 소중한 마음을 내게 주셨다. 거칠지만 정성이 가득한 아이의 짧은 편지 한 통까지 들어있는 꽃 한 다발은 정말이지 내 최고의 졸업식 선물이었다.

 

나는 제자 운천이를 위해 학부모의 돈과 내 양심을 바꾸지 않았기에 지금 이렇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교단에 서 있다. 그리고 아이들과 웃고 부대끼며 오늘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교사로서 아이들과 마음의 소통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대한민국의 선생님들은 그 어떤 부정적인 청탁에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고결한 영혼을 소유하고서, 받는 것 대신 아이들에게 마음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나라 선생님들은 누구나 청렴하고 맑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 사람들이 앞에서 이끌어주는 한 이 사회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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