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볕 좋은 날 진호는 교실 맨 뒷자리에서 초점 없는 눈빛으로 벽면의 시계를 응시하고 있다. 온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펴더니 이내 엎드려 잠을 청한다. 쉬는 시간에도 잠에서 깰 생각은 없다. 학교에 머무는 진호의 8시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간다. "학교 오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진호와의 면담에서 가장 기억나는 한 마디다. 학교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 윤서는 학기 초 친구 사귀기에 실패했다. 같은 모둠 내 그 누구도 윤서의 문제풀이를 도와주지 않는다. 윤서는 눈치를 보며 의미 없이 교과서 페이지만 넘긴다. 제출 시간이 임박해서 한 친구가 베껴 쓰라며 노트를 휙 던져준다. 윤서는 다급하게 답을 받아 적는다. 이 짧고 퉁명스러운 대화가 윤서가 친구들과 나눈 유일한 대화였다. "어차피 애들이 날 싫어할 게 뻔하니까요." 친구들은 윤서가 싫다. 공부도 못하지만 자기랑 코드가 안 맞는단다. 그런 이유만으로 윤서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고 잔인하다. 그런데 윤서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초등학교 수학시간. 스스로 한 번 풀어보자며 활동지를 나눠주자 민정이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하며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한다. 선생님은 익숙한 듯
2019-09-17 18:33올해 초반부터 기초학력의 개념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대부분의 질문은 답을 몰라서 묻기보다는 기초학력의 선을 어디까지로 긋는지를 ‘확인’하는 질문이었다.사실 학급 내 학습부진학생이 누구인지, 기초학력이 부족해서 현재의 학습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교사는 아무도 없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정책을 담당하거나,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이거나, 교육에 대한 각성을 유도하는 평론가들인 경우가 많았다. 3R에서 미래사회 역량까지 질문자들은 보통 세 가지 중 하나의 답변을 예상하는 듯 했다. 읽기, 쓰기, 셈하기(3R’s)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해당 학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데 필요한 최소의 내용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미래사회에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기본 역량이며, 삶의 기초기능 확보를 위해 전제되는 역량인지. 읽기, 쓰기, 셈하기라고 답하면, 겨우 공교육에서 그 정도의 최소만을 하겠다는 것이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데 필요한 최소의 내용이라고 답하면, 교육과정 상의 최소 내용이 무엇인지, 교육과정 자체가 최소는 아닌지, 최소가 정해지면 제시된 최소만 하면 되는지 등의 질문과 더불어 이런 것이 부족한…
2019-09-17 18:24때때로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면서 그 끝을 가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마무리를 잘하지 못해 인생의 중대사를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 인생에서 일의 성공이나 학업의 완성도 결국 처음과 끝, 시종(始終)이 있을 터인데 우리는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까? 필자는 일전에 학술발표대회 참석차 중국 산동성(山東省) 취푸(曲阜·곡부)에 간 적이 있었다. 취푸는 유가사상의 발원지로서 공자의 고향이다. 한국에서 함께 간 일행과 함께 공자의 유적지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황제의 궁궐과 같은 위상을 지닌 대성전(大成殿)이 있는 공묘는 규모의 웅장함과 그 속에 담긴 오래된 역사적 흔적이 필자를 압도했다. 공묘에 들어서자 대성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여러 단계의 석방(石坊)과 석문(石門)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한나라 고조 유방 이래 역대 여러 황제가 공자를 숭배하며 제례를 봉행할 때마다 세운 건물들과 비석들이 즐비했다. 그중 필자의 눈길을 유독 사로잡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첫 번째 석방에 새겨진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는 글씨였다. 마침 동행하던 유학을 전공한 선생님께 뜻을 물었다. 이 글씨는 음악에…
2019-09-10 10:48가끔 편애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학생들과 사적인 교류를 가지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저는 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이나 밥 사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집안형편이 좋지 않거나 편부모 가정, 조손가정에 있는 아이들을 학교 밖에서 자주 만나고 용돈도 쥐어주고 밥도 평소에 먹고 싶었던 것으로 고르게 해서 먹이고 그럽니다. 단순히 용돈 몇 푼 쥐어주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돈이 많은 편도 아니고요. 그저 그 아이들과 밥을 먹으면서, 아니면 간단하게 군것질이라도 하면서 제가 유일하게 가진 ‘말의 힘’으로 미력한 도움이나마 주고 싶은 것일 뿐입니다. 가장 평등해야 하는것은 교육의 기회 “선생님도 열 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진 그게 왜 그렇게 서럽고 부끄러웠는지 모르겠어. 사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선생님은, 학교를 다닐 때 정말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적어도 선생님이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평등한 것은 ‘교육의 기회’거든. 돈이 많고 적고, 아버지가 있고 없고 와는 상관없이 말이야. 선생님에게도 힘내라며 어깨 토닥이고 손 잡아주시던 선생님들이 계셨고, 그분들 덕분에…
2019-08-28 17:19“선생님, 국어 문법은 너무 어려워요.” 아이들이 문법 단원의 내용을 배울 때면 하는 푸념이다. 어떤 내용을 설명할 때는 영어 문법을 연결해서 설명해야 알아듣는다. 실생활의 언어에서 예시를 들어주고, 문법을 좀 더 재미있게 학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도 여전히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문법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사실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이미 생활 속에서 언어를 자연스럽게 쓰고 있기에 문법적인 부분을 굳이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이다. 사실 문법은 어렵다. 국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문법적으로 명확하지 않으면 관련 규정을 찾아보고 그래도 의문이 생기면 국립국어원에 질의해 가르치곤 한다. 문법 비중 약화에 대한 우려 아이들 말대로 ‘몰라도 잘 쓰고 있는데 왜 배워야 하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문법이야말로 학교 교육을 통해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다시피 통신매체의 변화에 따라 언어의 파괴가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 언어의 경제성 측면에서 줄여 쓰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지만, 원칙과 기준을 알고 변형해서 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SNS 공간에서 자신들만 알고
2019-08-22 10:36최근 정치공약 실현을 위해 학생과 학부모 의견은 무시한 채 무조건 자사고 폐지만 외치고 있는 교육부와 교육감들의 행태가 한심하다. 현실은 고교 무상급식에 지원할 예산이 없어 교육청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고, 당장 2학기에 학교 비정규직 처우 개선 약속도 지켜야 하고, 5년간 절반 부담하기로 한 고교무상교육 재원도 예산부족으로 불투명하다면서 말이다. 일반고로 전환하는 자사고에 400억 가량이 들어가는데 이건 지원해주겠다고 난리다. 눈 감고 귀도 막은 교육감들 학부모들은 국민의 소중한 혈세는 좀 더 필요한 곳에 쓰고 우리에게는 자율과 자유를 좀 달라고 했다. 아니, 있던 것을 가져가지 말라고 하는데 절대 안 된다고 돈 줄 테니 내 말대로 내 생각대로 하라고 너희의 자율은 시대적 사명을 다 했으니 나를 따르라고 한다. 우리의 생각은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렸다고 한다. 그래서 대화도 필요 없고, 청문회도 필요 없고, 협의나 소통도 필요 없다. 네가 변해야 한단다. 대화는 끊임없이 거부당한다. 우리 교육은 눈감고 귀 막고 입 닫은 정치인에 의해 산으로 가고 있다. 요즘 시대에 대학이 필수는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대학을 나
2019-08-08 16:25보건실에서 긴급한 전화가 울려왔다. 우리 반 학생이 크게 다친 것 같다고…. 지체 없이 보건실로 향했고, 잠시 뒤 한 학생의 등에 한 상우가 업혀 왔다. 상우는 발뒤꿈치 부상을 당했는지 혼자 걷지 못할 정도였기에 지나가던 3학년 선배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부축 의자에 앉아 보건선생님의 응급처치를 받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원래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아이인지라 조금 아픈 것 같다고 말하기에 그리 믿었지만, 정형외과 전문의에게 가서 진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보건선생님의 의견에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 학교폭력에 힘들어하던 아이 병원에서는 뒤꿈치에 금이 가고 갈라져 1차 의료기관에서는 치료가 어려워 천안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치료해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다. 담임으로서 걱정이 컸지만, 하루 뒤 상우 어머님과 통화를 통해 수술이 잘되었다는 소식에 그나마 안도했다. 요즘 상우가 반 친구들과 농담이나 장난치는 모습이 학기 초보다 훨씬 많아지고 밝아져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우가 중학교 당시 학교폭력에 힘들어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상담을 통해 알았다. 지금 고 2가 되었는데도 그때의 트라우마로 한 달에 1번 정도 서울의 병원으로 심리치료를 하러 간다는…
2019-08-08 14:043년 전 수원 모 초등학교 교사들 대상으로 인성교육을 간 적이 있었다. 강의 전에 가진 짧은 티타임 때 교감 선생님께 “선생님들은 교사로서 자부심도 크고, 삶의 의미도 높게 갖고 계시죠?”라고 질문을 했다. 교감 선생님은 놀랍게도 픽 웃으며 “요즘, 선생님들이 많이 힘들어 합니다”라고 하셨다. 필자가 놀란 이유는 그 당시는 교사가 결혼 상대자 선호도 1, 2에 오르던 때였기 때문에 교사라는 자부심도, 삶의 의미도 행복도도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힘들어하는 선생님 너무 많아 2019년 2월 말 교육부 통계를 보면 명예퇴직 교사가 6019명으로 2018년 2월 말보다 29.7% 늘었다고 한다. 이러한 통계를 접하고 최근 들어 초·중·고 선생님들과 빈번한 교류를 하면서 그날 교감 선생님 반응에 담긴 의미를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학교 현장에서 교직을 수행하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게 할까? 바로 과도한 스트레스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사람을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때로는 분노하게 만든다. 스트레스는 모든 심리적 증상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 감당하기 벅찬 스트레스가 명예퇴직을 부추기고 실행하게 하는 중
2019-08-07 15:09오늘날 우리는 카메라 기술에 의해 예술작품을 쉽게 감상할 수 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직접 가지 않아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Mona Lisa)를 보고 감상할 수 있다. 사진을 통해서 말이다. 영국 작가 매리 루이스 드 라 라메가 지은 동화(플랜더스의 개) 속 주인공 네로가 루벤스의 그림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장면에 우리가 슬퍼할 일도 없을 것이다. 카메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단면적으로 고정시키고, 그 이미지를 여러 번 재생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사진은 카메라에 의해 재생된 시각적 이미지이다. 이러한 사진의 기능은 예술작품의 가치를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 종교회화에서 드러나는 전통적 예술작품들의 신적인 이미지는 우리에게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런 작품들은 종교적 제의(祭儀)에 사용되었다. 회화사에서 근대라는 시대의 정신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예술작품의 제의적 가치는 쇠퇴하였다. 그러던 중 사진이 등장하면서 제의 가치는 완전히 밀려난다. 대신에 예술작품의 전시(展示) 가치가 전면화된다. 즉, 사진에 의해 제의 가치에서 전시 가치로 예술작품의 가치가 획기적으로 전화된 것이다. 이러한 예술작품의 시대적 변화를 예리한 지성을 통해 탐구한 사람이
2019-08-06 14:535년 전 처음 학생부장을 하게 됐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학창시절 학생주임 선생님들의 기억이었다. 모두 그랬던 건 아니지만 교문에서부터 위압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모습.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기에 강압적으로 아이들을 대해서는 안 될 일,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따라 학교 규칙을 바꿔갔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렴해 교복 디자인을 세련된 것으로 바꾸고, 두발 규정도 완화했다. 대의원회의와 학부모 설명회 등을 거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고 토론을 거쳐 내용이 풍성해졌다. 충분한 교감이 이뤄진 덕분에 바뀐 규칙의 시행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적었다. 좋은 정책도 강요하면 곤란 당시 가장 큰 혼란 중 하나가 급식 순서문제였다. (별거 아닌 문제 같지만, 남자 중학교에서 급식 순서는 매우 큰 일이다) 월별로 순서를 바꿔가며 운영해 불만을 줄여갔다. 하지만 월별로 일수가 다르고 학사일정에 따라 변경되는 경우도 생겨 아이들이나 지도교사 입장에서도 혼란스러운 것이 현실이었다. 아이들과 회의를 통해 3학년-2학년-1학년을 고정으로 1년간 운영하기로 했다. 특정 학년에게 유리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른 식사 운영 시간을 산술적으로 계산했고,
2019-08-05 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