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32,350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교사의 심리 들여다보기 우선 아래 문제를 살펴보자. -------------------------------------------------------------------------------------------- [문제] 다음 중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학생들의 유형은? ①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는 좀 못하는 학생 ② 선생님 말 잘 안 듣고 공부는 잘하는 학생 ③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 ④ 선생님 말 잘 안 듣고 공부도 못하는 학생 -------------------------------------------------------------------------------------------- 이런 문제의 답으로 거의 모든 선생님들은 당연히 ③번을 첫 번째로 꼽는다. 선생님 말을 잘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학생들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만일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학생유형을 순서대로 고르라면 어떻게 될까? 나의 경우는 ③ → ① → ④ → ②의 순서로 놓겠다. ④번과 ②번의 순서를 놓고 잠깐 고민을 했다. 말은 안 들어도 공부를 잘하는 것이 나을까? 말도 안 듣고 공부도 못하는 편이 나을까? 부모입장에서 보면 ② → ④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사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④ → ②가 낫다. 한 문제를 제시하고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공부의 결과(거의 시험성적)보다는 학교생활 과정에서 ‘얼마나 교사의 말을 잘 따르는가’가 교사에게는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공부를 잘 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생활지도를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교사의 말을 잘 안 듣는 학생들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교사의 심리가 드러난다. 교사의 말을 잘 듣는 학생들은 공부의 결과와 상관없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이 교사의 속마음이다. ③번 학생들은 자기할 일을 잘 해나가면서 가끔은 선생님이 바쁠 때 눈치껏 도와줄 준비도 되어있는 학생들이어서 이런 학생들에게는 고맙고 사랑스러운 감정이 저절로 우러난다. 한편, ①번 학생들에겐 측은지심이 생겨서 애정을 갖고 더 격려를 하게 된다. ‘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잘 할 수 있어’라고 하면서. 문제는 교사의 말을 잘 안 듣는 학생(②)이 공부를 잘하게 되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생각에 얄미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간혹 초등학교 고학년 교실에서는 공부는 곧잘 하는 학생이 지능적으로 교실 분위기를 안 좋은 방향으로 주도하면서 수업방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담임교사 시간에는 자제하다가도 교과교사 시간에 주로 그런 행동을 한다. 이런 학생들이 시험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공부 잘하는 것’이 결코 곱게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선생님 말 잘 듣고~’는 바로 생활지도 측면을 말한다. 교사의 하루 들여다보기 교사는 가르치는 일, 즉 수업이 교사의 할일 중에 가장 중요하고 최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임은 누구나 다 안다. 그래서 정규수업 시간 외엔 어떻게 하면 학습내용을 더 쉽고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하루 근무시간 8시간 중에서 중학년을 기준으로 할 때 수업진행 시간 평균 5시간, 점심식사 지도 1시간, 동학년 협의사항 30분 정도(사안에 따라서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전체 교사협의 시간 5~10분(30분을 평균 내어서), 공문처리 평균 1시간(공문내용에 따라 통계 조사 수합 및 의견 정리 과정), 학습부진아 지도시간 하루 1시간 30분 정도, 담당한 업무처리 30분~1시간, 학생개별상담 30분 정도…. 이렇게 되면 당연히 정시 퇴근은 어려워진다. 또 깊이 있게 교재연구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교재연구를 제대로 하려면 집으로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해결되기 때문에 신체적으로는 피곤하지만 곧 회복이 된다. 교사는 어느 집단보다도 우수한 집단이다.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에 입학하려면 상위권 중에서도 앞서 있어야 합격할 수 있고, 4년 동안 교양, 전공, 실습 등의 쉽지 않은 훈련과정을 거친다. 대학졸업 후 교사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임용고사라는 매우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교육학, 논술, 영어, 컴퓨터, 수업시연 등 이 모든 관문을 너끈히 통과한 사람이 발령을 받고 교단에 설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준비도에 따라 재수를 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이들을 만나면 요즘 초임교사들은 참으로 많은 준비를 하고 교단에 서기 때문에 초임답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들은 업무처리도 매우 능숙하게 하며 쩔쩔 매면서 이리저리 물으러 다니는 모습도 거의 볼 수 없다. 아주 당당하고 뚜렷한 주관을 갖고 교단에 선다. 이러한 교사가 좌절감을 경험할 때가 있다. 바로 생활지도의 대상이 되는 ‘말 안 듣는 학생들’ 때문이다. 학습지도로 인해 교사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거의 없다. 학생생활규정 그 이후 들여다보기 서울의 경우 2010년 9월부터 학교에서는 체벌금지와 맞물려 교사, 학부모, 학생 토론회를 거쳐 학생생활규정을 새로 정했다. 여기에는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이 학교에서 함께 보호받고, 힘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 대화에 의한 설득과 합의를 통해 학교 내의 질서와 규칙으로 권위를 세워나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 규정이 새로 정해진 후, 학교마다 단계적인 벌칙 절차가 있어서 학급에서의 단계적 지도에 불복하거나 변화가 없을 때에는 성찰교실로 가서 상담을 하고 그래도 변화가 없을 때에는 부모면담을 하도록 되어 있다. 학생생활지도에 부모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절차인데 이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학교에서 말을 잘 안 듣는 학생에게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면 그래도 즉효를 볼 수 있어서 그동안 교사들이 많이 애용했었다. 그런데 만일 학부모가 학교에서의 호출에 응하지 않거나 학교의 규칙을 무시한다면 그런 학생들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 학생생활규정이 학교에서 권위를 유지하려면 학생, 학부모, 교사가 이 규칙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단계적 적용에 대해 부모가 긴장감을 가지고 협조해야 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이 생활규정 발표 이후, 세 가지 반응이 보인다. 어떤 교실은 이전보다 분위기가 더 엄숙해져서 정말로 수업시간에 잡담을 하거나 방해를 하던 학생이 조심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떤 교실은 그 이전이나 이후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반면, 어떤 교실엔 교사를 끊임없이 시험해보려는 눈빛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 매스컴을 통해 체벌을 하지 못한다는 제한을 마치 교사가 힘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담임시간에는 버릇없는 행동을 못하다가 교과교사 시간에는 눈치를 봐 가면서 무질서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떤 행동이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지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 [상황] 6학년 도덕과 8단원 ‘평화통일의 길’ 단원을 다루는데 한 여학생이 느닷없이 ‘선생님, 남북한이 38선 때문에 분단되었죠?’한다. 다른 학급에서도 발견된 오개념이었기에 수정해줄 필요가 있어서 ‘저 학생의 질문에 보충설명을 해줄 수 있는 사람?’하고 물어보며 다른 학생에게 설명할 기회를 준 후에 좀 더 보완할 필요가 있어 역사적인 배경 설명을 시작했다. 그 여학생은 자신의 오개념을 수정해주고 있는 교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흔들흔들 싱글싱글 서 있다가 설명 도중에 갑자기 ‘선생님, 나 그런 거 몰라도 돼요. 그러니까 그만 설명하세요’라고 한다. 평소 수업태도가 안 좋던 아이이긴 하지만 학생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수정해주는 교사에게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교사의 의도를 무시하는 아이의 태도가 심히 걱정스러워 맥이 빠진다. -------------------------------------------------------------------------------------------- 이렇듯 고학년 교실에서는 개인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말을 내뱉는 아이들로 인해 한 시간 수업을 진행하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저학년은 저학년 나름대로의 문제행동들이 있겠지만 특히 고학년에서 더욱 심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이러한 문제행동들로 인해 선생님들마다 모이면 나름대로 경험한 학생들의 불량스런 태도관련 이야기로 걱정이 많다. 앞의 상황예시는 불량스러운 행동은 수반되지 않은 한 예에 불과하다. 여기에 행동까지 불량스러우면 힘들다 못해 교사는 감정적으로 화가 나고 간혹 상처를 받기까지 한다. 학생들의 문제행동을 참다못해 교사의 감정이 고조가 되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고 교사도 인간인지라 돌발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다음 기사를 보자. -------------------------------------------------------------------------------------------- 꾸짖는다고 … 중학생이 여교사 폭행 자신을 꾸짖는다는 이유로 중학생이 40대 여교사를 주먹으로 수차례 때려 해당 교사가 10일 넘게 학교에 출근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인천 서구 모 중학교에 따르면, 지난 10일 오후 7시쯤 1학년 20명이 듣는 ‘방과 후 수업’ 시간 때 김모(13)군이 시간제 계약직 교사 이 모 씨를 주먹으로 때렸다. 당시 김 군은 자신이 듣는 다른 방과 후 수업이 끝난 뒤 이 씨의 수업을 듣고 있는 친구를 보러 이 교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김 군은 복도에 서서 수업이 진행 중이던 교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넣은 채 친구를 바라봤고, 이씨가 “수업에 방해되니 나가라”고 2차례 주의를 줬다. 그래도 나가지 않자 이 씨는 복도에 나가 김 군 뺨을 때렸고 김 군은 주먹으로 이 씨 얼굴을 3〜4차례 가격했다.…(중략) - 조선일보 2010년 11월 22일 자 A10면 -------------------------------------------------------------------------------------------- 자, 이런 상황은 학교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교사의 충고나 권면을 쉽게 무시하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거듭하며, 반성을 하더라도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반성이 아니라 형식적인 반성만 하면서 오히려 내성만 키우는 상황이 현장에서 되풀이 되는 것이 요즘 학교의 현실이다. 학생들은 심각하고 진지해야 할 상황을 ‘봉숭아 학당’으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행동에 교사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어느 정도 주었는지, 자신의 행동이 표준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등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 상황에서도 아이들을 웃기는 행동으로 적당히 넘어가려는 잘못된 영웅심을 갖고 있다. 교사의 화 다스리기 이런 상황에서는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생활지도를 제대로 하려면 교사의 감정관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학생들의 행태로 인해 속상해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결국 교사만 손해를 보게 된다. 상황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교사에게 요구된다. 잘못하면 어린 아이들의 속없는 행동에 교사가 약이 오르게 되고 그러한 상황을 구경하듯 바라보는 다른 학생들에게 점점 권위만 떨어져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다음과 같은 사이클이 반복된다. -------------------------------------------------------------------------------------------- 아이들의 문제행동에 화를 냄 → 아이들은 장난 식으로 받아들임 → 교사는 점점 더 화를 냄 → 아이들은 구경하듯이 바라봄 → 교사의 권위가 약화됨 → 생활지도는 점점 어려워짐 -------------------------------------------------------------------------------------------- 생각만 해도 답답해지지 않는가? 그래서 이번 연재를 통해 2011년 한 해 동안 생활지도를 잘 하기 위해 먼저 교사의 감정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함께 알아보려고 한다. 이어서 교실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행동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사례별로 살펴보고 이런 문제행동을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아이의 발달특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성장환경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노력도 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 문제행동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주도성을 발휘하도록 하려면 교사가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도 알아보자.
급격히 부각된 ‘창의성’ 2010년 1월 교육과학기술부는 ‘창의와 배려의 조화를 통한 인재 육성-창의 인성교육 기본방안’을 중점 과제로 발표했다. 일선 학교에서는 당장 내년부터 창의적 체험의 활동시간을 늘려야 하기에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회사원부터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서 창의성이 강조되더니, 이제 교육에서도 창의성은 중요한 덕목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교육에서 창의성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 최근 일은 아니다. 교육목표로써 창의성 함양이 문서화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1955년 제1차 교육과정 보건체육과에서 ‘창의성을 기른다’는 지도 방침을 수립한 이후부터, 모든 제도권 교육기관의 교육과정 총론에서는 창의성을 언급해왔다. 이는 창의성이 예전부터 이미 중요한 교육 지향이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그렇게 반복적으로 거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의성 교육이 달성되지 못했기에 근래의 가장 절실한 교육목표로써 대두된 것 또한 알 수 있다. 요즘 ‘창의성’이 크게 부각된 이유는 분명하다. 앞으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창의성’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미래학자가 21세기에는 창의적 인재가 필요하다고 하고, 기업에서도 창의적 인재가 국가 경쟁력을 강화시킨다고 이야기한다. 한 기업 CEO는 ‘창조적인 소수의 인재가 미래를 먹여 살린다’고 까지 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것으로 회자되는 인물은 미국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 아이패드 등의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고, 앱스토어라는 새로운 IT 생태계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가장 혁신적인 창조자로 그를 떠올린다. 애플의 제품 덕분에 우리나라 하드웨어 업체와 정보통신 업체는 위기상황을 겪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 중에서도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한 설문조사에서 대학생이 꼽은 국내 최고의 창의적인 인물로 안철수 카이스트 교수가 뽑혔다. 스티브 잡스와 안철수 모두 현재 경제체제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혁신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닮았다. 창의성을 저해하는 우리나라의 교육 창의성에 대한 요구는 시대적인 절박함에서 나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창의성’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창의성의 정의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여러 환경에 접목되는 창의성은 문제들을 뚝딱 해결해 줄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이야기되기도 했다. 창의성이란 말이 너무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면서 식상해진 것도 사실이다. 창의성이란 말만 많았지,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창의성이 증진됐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 오히려 한국에서 창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사회는 “창의성을 저해하거나 억압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교육 · 사회적 요인들을 많이 언급한다. 교육적 요인들은 주입식 교육, 평준화 교육, 창의성을 무시하는 교육 등이고, 사회적 요인들은 관료주의 성향, 고착되고 경직된 사회 분위기, 개방성 부족 등이다. 기존 체제로는 우리 사회에서 도저히 창의성을 길러 낼 수 없을 것 같다. 한 논문에서는 아예 동양과 서양의 교육을 비교하면서, 동양의 교육방식이 창의성을 저해하는 교육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시아 대부분 국가의 교육방식은 노력, 인내, 끈기를 강조하는 기술습득 교육이다. 좋은 성적을 위해 반복과 암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감정을 억제하고, 작업과 놀이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반면 미국의 경우는 탐구, 조작, 실험, 위험 감수, 개방적 과제, 사고의 수정 등 교육에서 새로움과 다양성, 기회 제공을 강조한다. 예컨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강조하는 ‘일기쓰기’만 보아도, 동양권에서는 주제의 적합성, 도덕성, 근면성과 조화 등을 강조하지만, 서양에서는 풍부한 상상력과 독창성에 강조점을 둔다고 한다. 결국 아이들의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기존의 우리 교육환경 전반을 바꿔야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스트레스가 된 ‘창의성’ 문제는, 교육당국이 창의성을 기르자는 선언만 했을 뿐, 아직까지 별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교육학자들은 앞으로 창의성마저도 주입식으로 교육시키지 않을까 우려한다. 실제로 몇 년 전부터 강남을 중심으로 창의성 교육을 한다는 사설 학원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활동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쉬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창의적 체험활동을 하게 해 학생들은 더욱 피곤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평가해 대학입시에 반영한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창의성이란 새로운 스트레스와 고민거리가 되어버렸다. 일반적으로 창의성 연구에서 강조하는 것은 호기심, 몰입, 개방성, 독자성, 위험 감수, 실패와 장애에 대한 인내심, 모호함에 대한 인내심 등이다.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아이들에게 창의성을 발현할 기회를 제공하고, 교실 안에서도 보상과 칭찬 등을 통해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워주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은 이러한 경험들이 낯설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호기심이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니었다. 암기 위주의 수업에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호기심은 스스로를 더욱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교육현장에서는 질문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아이들은 질문이 잘 생각나지도 않거니와 왜 질문을 해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른다. 어차피 알아야 할 것은 선생님과 교과서가 알려주고, 아이들은 그것을 잘 외우기만 하면 된다. 오히려 아이들 사이에서는 질문이 수업시간을 연장하는 눈치 없는 행위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질문이라도 통용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원하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진다. 그래서 잘못된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교사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질문시간이 되면 경직된다. 질문을 하는 아이는 튀는 아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들은 질문하는 모험을 꺼리게 된다. 모험 기피, 안정된 삶을 꿈꾸는 아이들 창의성은 모험심으로 시작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시도 속에서 창의성이 발현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실패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다. 경쟁이 심화되고 사회적 안전망이 더욱 축소되는 사회에서 실패란 곧 죽음으로 인식된다. 아이들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그래서 오히려 ‘혼자 튀는 것’보다는 집단 안에서 동질감 유지에 몰두한다. 친구들과 다른 생각을 하기보다는 친구들과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친한 친구들을 따라하는 동료문화가 청소년기에는 더욱 발달하게 된다. 심지어 그 문화적 속성이 경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학원에 가는 것을 선호한다. 학원은 대부분 단기간 빠르게 지식을 암기하여 성적을 향상시키는 것을 학습 원리로 활용한다. 이 안에서 배움에 대한 인내심이 발휘될 여지는 없다. 오로지 학원 강사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수동적으로 암기하는 교육과정을 선호한다. 모순적이게도 경쟁적인 분위기가 숨 막히게 답답하지만 오히려 편안하기도 한 것이다. 최근 대학생들은 스펙 관리라는 경쟁을 통해서 자기 증명을 한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고시, 토익시험 등의 점수를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찾아간다. 경쟁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창의성이란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입시라는 틀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아이들에게 창의성은 국 · 영 · 수 중심으로 공부하기도 바쁜데 또 갖춰야 할 새로운 종류의 스펙에 불과하다. 아이들은굳이 스티브 잡스가 되려는 꿈을 꾸지도 않는다. 최근 아이들의 직업관을 살펴보면 공무원, 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부모세대에서부터 시작한 경제위기 경험과 선배 세대(현재 20대)의 스펙 경쟁을 지켜보는 아이들에게는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러한 직업관 속에서 창의성이란 불필요하거나,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가 된다. 창의성을 일반적인 직군에서도 발휘되는 보편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특이한 직종에서 발휘되는 능력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창의적인 롤모델의 성공사례를 제시하면 그러한 롤모델을 닮기 위해 추종했지만, 요즘은 오히려 그러한 롤모델은 나와 다르다며 분리한다. 창의적이라고 말하는 선배 세대들의 노력과 열정은 자신과는 무관한 이야기일 뿐이고, 그러한 롤모델처럼 고생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아이들에게 창의성은 경쟁에서 뒤처지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하거나 쓸모없는 모험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에게 창의성은 ‘별 일 없이 살고 싶은’ 자신들에게는 걸맞지 않는 공포스러운 능력이다. 그러나 변화의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지는 불안한 사회에서 창의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누구나 창의적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에게 굳이 창의성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창의성은 인간의 여러 능력 중에 하나일 뿐이지 모든 능력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모두가 창의적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창의성을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지면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환경이 만들어지면, 중요한 질문은 ‘과연 어떤 창의성이 더욱 필요한 것인가’일 것이다. 창의성 연구의 선도적인 연구자 중 하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 연구팀은 ‘훌륭한 전문직업인 되기 연구 프로젝트(The Good Work Project)’에 참여하면서부터 창의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훌륭한 직업인이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일을 질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High quality)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선 스티브 잡스나 안철수 같은 기업 경영인의 경우 자신의 분야에서 더 높은 이익을 얻기 위해 창의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일이 사회적으로 책임감(Socially responsible)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예로 마하트마 간디,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사람을 든다. 칙센트미하이는 연구의 취지문에서 창의적인 젊은 영재들이 앞으로 사회적인 책임감, 가치관, 목적을 갖고 훌륭한 직업인이 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목적이라 밝혔다. 즉,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창의성(Humane creativity)’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는 교육적 사명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아이들이 창의성을 기르기를 바란다면, 창의성의 시초에 대한 고민부터 해야 한다. 점점 무기력해지고 자신감을 잃어가는 아이들에게 창의성을 기르라고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창의성이 왜 필요한지부터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창의성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같은 새로운 능력이 아니라, 이미 아이들 안에 내포되어 있는 잠재성이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떠한 창의성을 길러 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사로서의 고민을 시작해야 할 시기이다.
40년 전 기억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지리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아프리카 지역의 열대우림 기후 풍토와 자연환경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흥미를 느낀 것은, 사람이 이것에 물리면 한없이 잠을 자게 되는, 이른바 수면병을 일으킨다는 흡혈 파리인 체체파리(Tsetse fly)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우리들의 흥미를 확인하신 선생님은 약간의 신명을 띠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질문인 듯 의문인 듯 말을 했다. “선생님, 그거 아프리카에 직접 가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순간 선생님의 낯빛이 달라졌다. 그 당시는 텔레비전이 귀한 시절이고, 자연 다큐멘터리 동영상 하나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학생으로서는 품어봄직한 의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 보지도 않고 아프리카를 다 아는 척 말하는 것 아니냐’는 다소 불손한 태도가 묻어나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질문은 ‘지식에 대한 의문’이었지만 그것은 곧 ‘선생님 인격에 대한 의문’으로 오해받기에 족한 것이었다. 당신의 지식이 신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선생님의 신명은 일시에 사그라졌다. 선생님은 “건방진 녀석!” 하고 짧게 되뇌시고는, 문제의 친구를 앞으로 불러내었다. 분기를 참지 못하신 선생님은 녀석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몇 대 세게 쳤다. 그러고도 모자란다고 생각하셨는지, 교탁 옆에 꿇어앉아서 수업을 받도록 했다. 요즘 같으면 금세 체벌 시비가 분분해졌을 것이다. 만약에 선생님이 아프리카에 가보셨던 분이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직접 체험한 아프리카 지식을 더 유연하고 더 너그럽게 소개하면서, 오히려 그 학생의 호기심 많은 질문 태도를 칭찬해주셨을지도 모른다. 깊이 있고 든든한 지식은 그것을 전할 때 너그러움의 덕성까지 함께 베풀게 한다. 좋은 지식은 반드시 그것을 실천함에 덕성을 동반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그런 지식의 모습을 두고 ‘지혜’라고도 한다. 얼마 전 외우(畏友) W교수의 홈페이지를 우연히 들어갔다가 나는 매우 감동적인 글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W교수에게 온 편지글이었는데, 나는 이 글을 읽고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더불어, 나의 옹졸한 교수 철학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편지에 나타난 W교수의 인격도 감화를 주기에 충분했고, 편지를 보낸 사람의 지혜와 덕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이 편지에 나타난 W교수의 언행이 20대 후반 청년 교사로서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니 가벼운 선망의 감정이 일기도 했다. 편지는 이러하다. -------------------------------------------------------------------------------------------- W교수님께 어린 까까머리 소년은 교실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선생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도 저편 끝에서 계단을 다 올라온 선생님이 소년의 교실을 향하여 성큼성큼 다가올 무렵 소년은 교실 안을 향하여 같은 반 아이들에게 크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늑대다 ~! 늑대 출현 ! 늑대다!” 그때까지 수선스럽던 아이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 앉고, 늑대라고 외치던 소년도 후다닥 자기 자리를 찾아 갔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서 소릴 지른 탓인지, 늑대라고 불리게 된 것을 알아챈 선생님은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출석부로 머리를 톡톡 어루만지듯이 두드리며, “내가 왜 늑대냐?” 라고 말씀하셨고,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칠판에다 짤막하게 세 개의 단어를 적으셨습니다. “Homo Homini Lupus!” “호모 호미니 루푸스! 이건 라틴어인데,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라는 말이란다. 잘 생각해 봐. 어차피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 부분이 많아. 나를 늑대라고 부른 네놈도 늑대일 테고….” 묘하게 재미있는 표정과 웃음을 지으시며 선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어린 소년은 기억합니다. 선생님을 늑대라고 부른 죄를 묻지 않고 웃으며 자상하게 이런 지식을 말씀해주신 그 선생님을 평생 기억하게 되었고, 선생님이 해주신 ‘호모 호미니 루푸스’라는 말도 평생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힘들고 지치고 사람에게 시달리거나 극한의 대립과 경쟁에 시달릴 때마다, 선생님이 오류중학교 국어선생님이셨을 때 하셨던,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인생의 어려운 상황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류중학교를 1회로 졸업한 ‘허○○’이라는 학생입니다.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던 아이였고, 지금도 종종 선생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인데, 어처구니없게도 나이 46세가 되도록 선생님을 찾아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오류중학교 동창 들과 만나 술을 마실 때면, “야, 우리 옛날 선생님들 좀 찾아봐라. 언제 한번 모시고 소주나 한잔 하자. 난 너무 보고 싶다. 그 분들! 특히 그 늑대 이야기해 주시던 선생님 보고프니 좀 찾아봐라.”, “그래 그러자” 라고 얘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한국을 오래 떠나 살았기에 세월만 그저 흘려보내 버렸죠. (중략)… 저는 오류중학교 이후에, 중경고등학교와 부산에 있는 국립 한국해양대학교를 다녔고요. 대학을 졸업하고는 외항상선의 항해사로 4년간 수십 개 나라를 돌아다녔고, 그 후엔 주로 서울과 노르웨이를 오가다가,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꽤 오래 살다, 2000년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해양대학교에선 해양문학회라는 동아리에 참가해 어쭙잖은 글들을 쓰곤 했었는데, 아마도 중학교 때 선생님에게 받은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홈피에서 선생님 삶의 궤적을 주욱 보고는, 역시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느꼈습니다.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학문하는 곳에 가 계시는 것 같고, 어울리는 일과 공부를 하며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너무나 뵙고 싶군요. 가능하면, 7월 초순, 중순 사이에 꼭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7월말에는 어린 아들을 제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일본 열도 종주를 나설 것인데, 그 길을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선생님 시간이 허락되시어 저녁 식사에 약주까지 모실 수 있다면, 그야말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옵니다. (선생님이 까까머리 소년에게 가르쳐 주신 유식한 문자를 평생 써먹으며 삽니다.) 미친 듯이 일하며 정열적으로 세상을 주유하며 살아오다가, 마흔네 살 되던 해 겨울, 오토바이 한 대 끌고 콜롬비아로 가서 남미대륙의 최남단까지 100일 간 안데스 종주를 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었고요. 선생님은 제 삶에 짧지만 불꽃처럼 반짝이는 큰 의미를 준 몇 안 되는 소중한 분 중 한 분이십니다. 불쑥 글을 올리는 무례함을 용서해주시고, 30년 전 그 까까머리 소년을 어루만져 주시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늑대처럼(?) 제 눈앞에 나타나 주시길 소망합니다. 늘 건강히, 열정 속에 정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Homo Homini Lupus!(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이처럼 명료하고 냉철하고 건조한 라틴어 지식 명제를 그처럼 따뜻하고 너그럽고 윤기 있는 지혜의 메시지로 변용해 다가가게 해주다니. 나의 감동은 오로지 그것이다. W교수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교수법의 마력을 배웠을까. 생각해 보건대 그것은 무슨 수업모형 차원의 교수 공학적 마인드로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지식을 사랑하는 W교수의 사람됨이 아주 자연스럽게 빚어낸 것일진대, 그것을 굳이 교수법이라 말하기보다는 그의 의사소통 철학(방식)이라 일컬음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선생들에게 있어서 지식이란 무엇이겠는가. 지식은 단순한 전달 내용 그 이상의 것, 이를테면 감동의 기제로 존재할 수 있다. 나는 위의 편지를 읽으면서, 모든 지식에는 그것을 가치 있게 하는 어떤 덕성이 보이지 않게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과 덕성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본다. 내가 지닌 지식이 어떤 덕성을 발효하게 하는지 나는 이제껏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가르치는 지식의 덕성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경지로 나아갔을 때, 비로소 그 지식은 나의 참된 가르치는 힘이 되는 것 아닐까. 그것은 일종의 감화의 힘이다. 지식과 지혜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러나 ‘지식 사랑’은 ‘사람 사랑’과 서로 다르지 않다. 지혜로 승천하는 지식의 자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할 것이다.
어느 성당의 행사장, 주교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입장을 했다. 그 주교는 “미사를 수천 번 봉헌했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한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 “젊은이들의 기쁨을 위해 망가지기(?)로 했다”고 말해 참가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대기업의 CEO들이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통해 사소한 일상과 취미를 공개하고 어떤 유명인은 TV에 출연해서 성형수술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여자 연예인들이 일반인들도 꺼리는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을 서슴없이 보여주는 것들이 이제 특별한 뉴스거리가 아니다.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는 것이 유행했던 과거와는 달리 ‘나도 당신과 같다’라는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매개체인 것 같다. 며칠 전, 우리 학교 재경동창회 정기총회, 900여 동문이 모인 자리에서 필자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어설픈 실력으로 색소폰 연주를 했다. 조용필의 ‘친구여’와 조니 호튼(Johnny Horton)이 1959년에 발표한 ‘All for the love a girl’ 두 곡이었다. 다소 매끄럽지 못한 연주였지만 그야말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것은 격려의 의미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녀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 시절의 근엄한 교장이 아니라 친근하게 보이는 나의 모습에서 공감의 포인트를 찾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경영의 본질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다. 특히 학교는 일반 기업체 등과는 달리 관리자와 교사, 교원과 학생, 학교와 학부모 등 온통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 곳이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바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진지한 관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여건과 역량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공감’에 대한 통찰이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유독 자신과 같은 것을 선호하는 이 시대에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한번 건네 본다. 자신의 시각에 빠진 사람은 남을 빠뜨릴 수 없다. 상대방의 시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식에 빠진 사람은 남을 유혹할 수 없다. 자랑할 때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 송치복 생각의 축지법 중에서 손끝에서 마음으로 --------------------------------------------------------------------------------------------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셔서. /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 요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지었다는 시다. 아이의 시에서조차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린 아버지들의 슬픈 자화상이 그대로 담겨있어 이 시대 아버지들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한다. 서울신문 2007년 12월 17일 자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에서 초등학교 3학년에서 고교 3학년생까지 750명을 대상으로 ‘학교교육 및 생활관련 고민거리’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가 있다. 그중 ‘학교와 가정의 고민거리’를 묻는 객관식 질문 중에서 담임교사와의 대화는 ‘종종 한다’는 응답이 23.9%로 나타난 반면 ‘전혀 없다’가 27.2%, ‘별로 없다’가 46.3% 등 대화를 하지 않는 경우가 73.5%에 달해 학생과 교사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한, 고민을 의논하는 상대로 응답자들은 ‘친구’(48.4%)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것은 어머니(24.0%)나 아버지(0.7%), 혹은 ‘두 분 모두’(13.9%) 등 부모라고 말한 응답(38.6%)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특히 ‘없다’는 답변도 6.8%나 됐고, 여학생의 경우 아버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학교와 가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잘 대변하는 대목이다. 특히 아버지와 고민을 나누는 여학생이 거의 없다는 통계는 여학교 교장으로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인간관계의 커뮤니케이션은 설득이 아니라 공감이고 정체성 확립이다. 따라서 본인 취향의 아버지가 아니고 딸이 자신의 속 무늬를 아름답게 그릴 수 있도록 자존감을 키워주는 아버지이기를 기대하면서 ‘부녀마음 나누기(손끝에서 마음으로)’라는 프로그램을 부임 첫해부터 실시하고 있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 이 행사에는 1, 2학년 학생 중 희망하는 부녀가 참가해 요리실습과 명상 프로그램 등을 진행한다. 가사실에서 아버지와 함께 스테이크를 만들고, 예절실에서 ‘마음 동산 꾸미기’라는 명상 프로그램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와 딸의 모습에 대한 명상, 한마음 체조, 촛불의식을 하고 딸이 아버지께 편지를 읽어 드리며, 따뜻한 공감과 소통의 시간을 가진다. 편지를 낭독하면서 우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히다가 끝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을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딸들이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김현승 시인의 아버지의 마음에 나도 울컥한다. …/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공감이란! -------------------------------------------------------------------------------------------- ‘남자의 자격’에서 만들어 준 할머니캐릭터가 너무 고맙다. 그 이후 부활 공연장의 객석이 꽉꽉 찼다. 그 전에는 오라고 해도 안 오던 관객이 빈자리도 없이 공연장을 메운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이 캐릭터가 ‘비웃음’의 할머니가 아니라 ‘친근감’의 할머니라는 걸. 내게 많은 걸 갖게 해준 프로그램이다. - 아시아경제 신문 2010년 4월 2일 자 -------------------------------------------------------------------------------------------- 가수 김태원의 인터뷰 기사이다. 김태원은 한국 록 음악의 대표 그룹 ‘부활’의 리더로서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약하고 약간 모자라는 듯한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다. 나는 1970년대 초인 대학 1학년 때, 5인조 록그룹을 만들어 대학축제에서 주가를 올렸다. 3부에 출연해 주로 Deep Purple의 ‘Highway Star’와 같은 하드 록(Hard Rock) 계통의 음악을 연주했다. ‘애드리브(Adlib)’을 연주할 때는 몰입의 경지(?)에 들어간 듯 온갖 폼을 잡으면서 신비주의랄까, 하여튼 뭔가 대단한 비밀스러움을 가지기 위해 관객들과는 거리를 두기도 했다. 아마추어인 우리가 이랬으니 프로들은 오죽했겠는가. 그런데 우리나라 록 음악의 황금기인 그때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팬들은 무게와 신비로움을 벗어 던진 ‘인간 김태원’에게 환호하고 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스타들의 모습에 공감하고 친근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나와 공감할 것’을 요구하는 오늘날 대중들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스페이스 공감, 문화 공감, 세대 공감, 낭독 공감, 대중 공감, 생활 공감’ 등 최근에 ‘공감’이란 말은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에서 이제는 정치 · 경제 ·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시대정신으로까지 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리하여 사람 사이의 유대를 강조하는 사상적 흐름은 이제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특히 최근에 출간된 제레미 리프킨 교수의 공감의 시대는 적자생존과 부의 집중을 초래한 경제 패러다임은 끝나고 이제 오픈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시대로서 ‘공감(共感)’을 이 시대 최고의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 이 공감의 시대에 따르면 공감의 감(感 · Pathy)은 다른 사람이 겪는 감정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그들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인 것처럼 느끼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공감은 사랑이다. 사랑이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라고 한다. 그게 완전한 사랑이라고 한다. 얼마 전,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중국 어느 세탁소 주인의 ‘다리미질’을 본 적이 있다. 입신의 경지였다. 자기 분야에서 끈기와 정직함으로 경지에 오른 달인에게는 비약이 없다. 그 사람의 다리미질에 대해서는 조금의 이견(異見)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기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그 사람의 노력은 신뢰할 수 있고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감은 신뢰이다. 사시사철 향긋한 쑥국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39년 동안 ‘딱 하루’ 문을 닫은 곳이라 했다. 그것도 딸이 거짓으로 아프다고 하는 바람에 속아서였다고 한다. 회갑 때도 새벽에 국을 끓여 종업원에게 맡겨놓고 서울의 아들 집에 당일로 다녀왔단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깨알 같은 소문들이 나를 유혹한다. 그래서 공감은 유혹이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 타인의 고통을 타인의 것으로만 간주할 때 이 세상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신을 위한 변론의 저자이자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말한다. “종교는 본래 사람들이 ‘생각한’ 무엇이 아니라 ‘행한’ 무엇이다. 과거 오랫동안 인류의 종교생활은 신의 영혼을 갈고 닦는 한편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줄 아는 방법을 일깨우는 과정이었다. 수행과 실천이 종교의 요체였던 것이다.” --------------------------------------------------------------------------------------------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산 기운 저녁에 더 좋아 나는 새들도 서로 더불어 돌아온다’ 도연명의 시 음주의 한 구절이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들고 남산을 바라보는 도연명(陶淵明)의 진실이 무엇인지 어렴풋하다. 나 또한 학교 정원에 서서, 무심하게 떨어지는 낙엽들이지만 수북하게 쌓인 모습이 괜찮다는 느낌을 받는다. 겨울비라도 오는 날이면 우산 없이 걸어가는 녀석과 함께 비를 맞으며 걷고 싶다. 종자기(鍾子期) 역할을 톡톡히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다른 나라 말들과 달리 웃음을 나타내는 말이 매우 발달해 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웃음을 나타내는 말들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마치 말하듯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고 이와 함께 우리는 이모티콘(^^)과 함께 보통 ‘ㅎㅎ’으로 웃음을 화면 위에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익명의 바다인 인터넷 환경에서 사용되는 ‘ㅎㅎ’은 기분 나쁠 정도는 아니지만 정확히 어떤 웃음소리인지 실제 음성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현실에서의 우리말 웃음은 웃는 사람이 누구냐, 어떤 상황에서 웃는 웃음이냐에 따라 실제로는 ‘하하’, ‘호호’, ‘허허’, ‘헤헤’, ‘흐흐’, ‘히히’로 다양하게 실현되는 것이 자연스러우나 화자에 대한 정보가 익명의 조건 속에 갇혀 버린 인터넷에서의 ‘ㅎㅎ’는 환산될 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웃음을 나타내는 말이 매우 발달된 한국어 실제 웃음으로 실현되는 우리말 ‘하하’는 젊은 남성들의 웃음을 가리키는 말이고 ‘호호’는 젊은 여성들의 웃음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허허’는 중후한 장년층 남성들의 웃음인데, 간혹 ‘후후’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후후’를 웃음소리로 인정하고 있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현재로서는 ‘후후’를 ‘허허’의 비표준적 용법으로 볼 수밖에 없다(물론 ‘허허’와 ‘후후’의 실제 뉘앙스는 약간 다르다. ‘허허’에는 노쇠함과 허탈함이 묻어 있는 데 비해서, ‘후후’에는 의미심장한 표정이 결합해 있다고 할까). ‘흐흐’는 주로 비열한 남성들의 음흉한 웃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물론 여성이라고 ‘흐흐’하고 웃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어찌되었던 ‘흐흐’에는 악당의 이미지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히히’는 흔히 사람이 아닌 귀신의 웃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히히’가 사람의 웃음을 나타내는 경우는 아이들의 장난기어린 웃음 혹은 순박한 청년의 멋없이 싱거운 웃음을 나타내는 경우이다. 이렇게 다양한 우리말 웃음소리를 ‘ㅎㅎ’ 하나로만 표현하기에는 인터넷이라는 표현 공간이 너무 옹색하지 않은가? 이렇게 세밀한 우리말 ‘ㅎㅎ’계 웃음들은 다시 ‘젊은이들의 거리낌 없는 웃음’을 나타내는 ‘아하하’, ‘여러 사람의 떠들썩한 웃음’을 나타내는 ‘와하하’, ‘원숙한 여성의 간드러진 웃음’을 나타내는 ‘오호호’, 할아버지들의 너털웃음이나 기가 막혀서 힘없이 웃는 웃음을 나타내는 ‘어허허’와 가소롭다는 뜻으로 웃는 웃음인 ‘에헤헤’, 비열하고 변태스러운 웃음을 가리키는 ‘으흐흐’에 이르기까지 그 확장의 영역이 놀라울 정도이다(표준국어대사전에는 ‘후후’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후후’만을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후후’는 쓰여도 ‘우후후’는 거의 쓰이지 않는 웃음인 것 같다. ‘우후후’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단순한 ‘우후훗’의 형태로 쓰이는 감탄사로 여겨진다). 인터넷 용어 ‘ㅎㅎ’가 따라올 수 없는 웃음의 다양한 표현 우리말 웃음에는 ‘ㅎ’계 웃음 말고도 ‘ㄲ’계 웃음과 ‘ㅋ’계 웃음이 있다. ‘ㄲ’계 웃음에는 아이들이나 여학생들의 해맑은 웃음을 나타내는 ‘까르르/까르르까르르’, 참지 못하고 숨이 넘어가면서 웃는 웃음을 나타내는 ‘까르륵/까르륵까르륵’이 있고, 젊은 여성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깔깔’ 웃음과,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껄껄’ 웃음, 아이들의 짓궂은 표정에서 나오는 ‘깰깰’ 웃음, 입을 꼭 다물고 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웃는 ‘낄낄’ 웃음 들이 있다. ‘ㅋ’계 웃음은 ‘ㄲ’계 웃음보다 더 입을 벌리지 않거나 적게 벌리고, 웃음을 참으면서 웃는 웃음들이다. 입을 다물고 입을 가리고 소리가 나오는 것을 막아보지만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길 없는 웃음소리들, ‘킥킥’, ‘키득키득’, ‘킬킬’, ‘키들키들’, ‘캘캘’ 등에 이르기까지 웃음소리를 나타내는 말의 영역에서는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다양한 것이 우리말이다. 우리말에서 웃음을 나타내는 말은 이뿐이 아니다. “방글, 방긋, 방그레, 벙글, 벙긋, 벙그레, 빙글, 빙긋, 빙그레”와 “상글, 상긋, 상그레, 생글, 생긋, 싱글, 싱긋, 싱그레”가 모두 웃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방글’ 웃음과 ‘상글’ 웃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을 뒤져 보면 ‘방글’ 웃음과 ‘상글’ 웃음의 차이를 금방 알아 챌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방글’의 뜻풀이를 “입을 조금 벌리고 소리 없이 귀엽고 보드랍게 한 번 웃는 모양”으로 하고 있고 ‘상글’의 뜻풀이는 “눈과 입을 귀엽게 움직이며 소리 없이 정답게 웃는 모양”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방글’ 웃음은 입을 벌리며 웃는 것이고, 상글 웃음은 눈을 크게 뜨고 웃는 웃음이다. 두 웃음 모두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의성어부터 웃음 짓는 모양에 이르기까지…무한대의 웃음표현 ‘방그레’와 ‘상그레’는 한번 웃은 웃음을 계속 짓고 있는 표정을 나타내고 ‘방글방글’과 ‘상글상글’은 ‘방글’ 웃음과 ‘상글’ 웃음을 반복해서 짓고 있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방글’과 ‘상글’이 유아기의 아기나 아동들의 해맑은 웃음이라면 ‘벙글’과 ‘싱글’은 성인들의 기분 좋은 웃음이다. ‘방글, 방그레, 방글방글’, ‘생글, 생그레, 싱글생글’이 한번 지은 웃음을 일정 시간 지속한 웃음을 나타낸 것이라면 ‘방긋’과 ‘생긋’은 입웃음과 눈웃음을 한번씩 살짝 지어주는 귀여운 웃음이고 ‘벙긋’과 ‘싱긋’은 입웃음과 눈웃음으로 전하는 매력적인 웃음이다. ‘방글’과 ‘상글’이 입을 벌리고, 혹은 눈을 뜨고 웃는 웃음이라면 ‘빙글’ 웃음은 입을 거의 다물고 웃는 것이고, ‘싱글’ 웃음은 눈을 가늘게 뜨거나 아예 감고서 웃는 웃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방글 웃음’은 입을 ‘방긋거리면서 웃는 웃음’이고 ‘상글 웃음’은 눈을 상글거리면서 웃는 웃음인 것이니, ‘방글 웃음’과 ‘상글 웃음’의 의미를 알고 보면 ‘상글방글’이나 ‘싱글벙글’의 의미는 국어사전을 따로 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상글방글’은 아이들이 ‘눈과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웃는 정답고 환한 웃음’이고 ‘싱글벙글’은 어른들이 ‘눈과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웃는 유쾌하고 상쾌한 웃음’인 것이다. 우리말에서 웃음을 나타내는 말들에는 그 밖에도 “발씬발씬, 벌씬벌씬, 새물새물, 시물새물, 시물시물, 새실새실, 시실시실, 실실, 씩, 피식, 픽(픽픽), 해죽(해죽해죽), 해쭉(해쭉해쭉), 헤실헤실, 히, 히물히물, 히죽(히죽히죽), 히쭉(히쭉히쭉), 힝힝…” 등등 조금 과장하자면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발씬발씬’ 계열이 웃음이 코를 벌름거리게 하는 모양을 나타내고 ‘새물새물’ 계열은 웃음을 참고자 하지만 참지 못해서 입술 한쪽이 들썩거리는 모양을 나타내며 ‘해죽’이나 ‘히죽’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슬쩍 한번 드러내면서 웃는 쑥스러운 웃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웃음과 표정이 있는 우리말에 어찌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가 있으랴. 혼자서 싱글벙글 하며 우리말 웃음의 이름들을 곱씹어 본다.
사실 돈에 대한 걱정의 상당수는 지금 당장 큰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알고 보면 굉장히 사소하고 단순한 데서 출발한다. 월급날을 떠올려보자. 월급날 기분이 어떠한가?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보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소득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적어도 월급날만큼은 즐거웠다. 그래서 과거의 아버지들은 월급날에 기분 좋게 과일 한 봉지, 치킨 한 마리를 사들고 귀가했다. 돈을 많이 벌진 못했더라도 한 달 동안 고생한 대가를 받아들고 뿌듯한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보다 소득이 많이 늘어난 지금의 월급날은 이전처럼 즐겁기는커녕 각종 결제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당장 새해 첫 월급날도 지난달 겨울옷 구입과 송년 모임 등으로 평소보다 지출이 많았던 탓에 카드 결제금을 메우기 급급하다. 그나마 남은 돈도 대출이자와 공과금으로 금세 빠져나간다. 열심히 벌지만 가족에게 가져다주는 돈보다 은행에 가져다주는 돈이 더 많으니 즐거울 리가 없다. 실제로 월급날 통장 잔액이 며칠이나 가느냐는 질문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가장 큰 원인은 신용카드 사용에 있다. 처음에는 지금 당장 지갑에서 돈을 꺼내 지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제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불결제를 한 달 유예시키면서 왠지 공짜로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즐거움도 주었다. 그러나 한 달 지불 결제가 유예되었기 때문에 남아있어야 할 돈은 지갑 속에서 오래 가지 못했다. 공짜로 얻는 즐거움 때문에 소비가 방만해진 탓이다. 이렇게 신용카드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이제는 신용구매가 아닌 외상구매를 하는 구조에 갇혀버렸다. 월급날의 즐거움을 없앤 두 번째 원인은 가계부를 쓰지 않는 것에서 비롯됐다. 이제는 가정경제를 기록해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진부하거나 구질구질 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까지 생겼다. 가계부를 쓰는 것이 나쁘지는 않으나 굳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하는 것과 기록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우리 집은 아낄 게 없어요, 쓰는 게 뻔해요”라고 하지만 카드 고지서가 나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쓰는 게 뻔하다면 카드 고지서를 보고 놀랄 이유가 없다. “쓴 만큼 나왔네”하고 넘어가는 것이 맞다. 고지서를 보고 놀라는 것은 뻔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가계부를 쓰면 새는 돈과 불안함을 동시에 없앨 수 있다 재무상담을 받은 어느 주부는 매주 가던 마트를 가지 않는 실천을 해보았다고 한다. 예산을 세워 지출하다가 마지막 주에 생활비가 너무 부족해서 큰맘 먹고 버텨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냉장고를 뒤져 식탁을 차리고 당장 급해 보였던 생활용품 구매도 조금 미뤘다. 그는 일주일간의 생활이 약간 불편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을 넘겨 쓰레기통으로 가던 것들이 사라졌고, 생활용품도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냉장고를 뒤져야 하는 등의 불편함을 겪기는 했으되 예산대로 생활했다는 뿌듯함이 남았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지출을 그간 몇 만 원 이상 해왔다는 사실도 느껴 예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고 한다.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심리적으로 커다란 안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가계부는 단지 매일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을 사후적으로 기록하는 금전출납부가 아니라, 미리 가정 경제의 틀을 파악하고 적절한 소비예산을 수립해 미래 재무목표를 세우는 도구이다. 가정경제가 과거와 달리 복잡해져서 머리로만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기록을 통해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또한 가계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면서 계속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는 행위다. 즉, 미리 예산을 세우면서 필요한 지출과 불필요한 것을 가르고 충동지출을 하면서 불필요한 지출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즉, 기록을 통해 미래 재무목표를 수립함으로써 목표의식을 환기하고 당장의 한정된 소득이 미래를 위해 적절히 잘 사용되어야 함을 되새길 수 있다. 돈을 비롯한 모든 자원은 의사결정 과정 없이 사용될 경우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에 낭비되기 일쑤다. 가계부는 바로 그렇게 허탈하게 새나가는 돈을 만들지 않기 위해 필요한 도구다. 따라서 이미 충동적으로 지출한 돈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예측하고 목표를 세우는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목표달성의 즐거운 동기부여가 전제된 상태에서 매월의 예산을 수립해 예산대로 생활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매월의 예산은 고정지출과 변동지출을 구분해서 세우는 것이 좋다. 고정지출은 매월 정기적으로 나가는 지출항목이다. 예를 들면 관리비와 식비, 교육비, 통신비, 교통비 등의 항목이다. 그에 비해 변동지출은 매월 다르게 소비되는 내역이다. 예컨대 제사나 생일, 각종 경조사와 명절 등에 지출되는 것들이다. 변동지출도 생각보다 연중 지출 규모가 작지 않다. 따져보면 거의 매달 새로운 변동지출 내용들이 있다. 미리 예산을 세워 놓지 않으면 매번 이번 한 번 만이라는 생각으로 큰돈이 새나갈 위험이 있다. 고정지출 예산은 수입이 가장 적은 달이라도 저축이 가능한 구조로 짜야 한다. 당연히 최소로 지출되도록 빠듯한 예산이 수립될 필요가 있다. 비정기 지출은 별도 통장을 만들어 예산대로 그 통장에서 꺼내 쓰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가정 경제의 흐름은 저축이 불가능한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을 기록을 통해 하나하나 해 나가다 보면 미래가 예측가능하게 굴러간다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나가는 돈들이 좀 더 중요한 사건에 제대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도 풍요로워 질 수 있다. -------------------------------------------------------------------------------------------- 1. 가계부는 금전출납부가 아니라 재무플래너! 많은 사람들이 가계부 쓰기를 실패하는 것은 가계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탓이 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계부를 돈을 쓰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가계부를 쓸 때는 가정 경제의 예측과 목표 수립, 목표 달성을 위한 계획 수립과 그에 따른 평가과정이 있어야 한다. 우선 최소 3년 이내의 목돈 지출에 대해서는 6개월 단위의 예측을 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적어도 3년 단위의 커다란 재무사건들을 예측해야 한다. 그런 후, 예상되는 목돈 지출 사건들을 재무목표로 삼고 그에 맞춰 현재의 자산 부채 상황을 평가해 목표 달성 여부를 평가해야 한다. 2. 고정지출과 변동지출을 구분하자 일 년치 전체적인 가계 재무구조의 균형을 위해서는 매월의 고정지출과 연간 변동지출을 구분해서 소비지출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가계부 쓰기 전에 고정지출이 최소화되도록 구조조정부터 하자. 보너스나 상여금이 없는 평달에도 저축이 가능한 구조가 균형상태이다. 연간 변동지출을 그때그때 월 소득에서 쓰려면 자금이 부족해 마이너스 통장에 의존해야 하거나 소비구조가 불규칙해져서 저축을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변동지출 예산을 미리 수립해 놓고 그에 맞춰 자금을 따로 만들어 예산에 맞게 지출해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매월의 소비 예산이 수립되어야 하고 그 예산에 맞춰 지출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 매일의 지출기록을 하는 것이다. 가계 결제 시스템은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를 활용한 선결제 시스템으로 만들어 놓고 가계 재무설계를 해야 한다. 3. 잔액이 안 맞아도, 가끔 건너뛰어도 괜찮다 가계부를 쓰다보면 하루 이틀 빼먹기도 하고 그러면 뭔가 숫자가 잘 들어맞지 않게 된다. 자연스레 ‘가계부는 우리 집과 안 맞아’ 하면서 어느 순간 ‘어차피 카드 명세서에 다 나오는데 뭐’하면서 가계부를 안 써도 되는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한 잔액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물건은 이번 달에 들여놨는데 돈은 일 년 열두 달 빠져나가고 있으니 맞을 리가 없다. 따라서 잔액을 맞추려는 욕심은 버리자. 잔액이 안 맞는다고 해서 100만 원 넘게 안 맞는 것도 아닐 테고 어차피 대세에 큰 지장은 없다. 대신에 전체적인 현금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 항목별로 어느 항목에 주로 돈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몇 월이 지출이 많고 몇 월이 지출이 적은지 등을 파악해야 한다.
2010년 서울교육, 참 바빴다. 옳고 그름으로, 흑백으로 귀결되지만 않는다면 그간의 논쟁과 갈등의 깊이만큼 새해의 희망은 크다. 교육의 관점 변화, 교사의 역할 변화가 이렇게 강조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현장의 어려움도 만만치가 않다. 커다란 황금알이라도 낳으려는지 산통이 크다. 최근엔 언론 매체를 통해 교권‧수업권 침해와 관련된 아이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이 자주 보도된다. 괴로워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나오고, 교권수호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단호한 의견이 덧붙기도 한다. 현재의 상황을 빚어낸 문제는, 우리 교육의 현실은 잘못되었으니 바꿔야 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에 발맞추기 위해 일전불사의 결연한 각오로 제시하는 단절과 비약의 교육정책들이다. 과잉(過剩)과 과속(過速)으로 쏟아지는 정책들이 부담스럽다. 정말 최선의 처방이라고 화려하게 혹은 간곡하게 설득도 하며 제시되었던 지난 정책들이 몇 년 못 가 무용지물이 되고 가차 없이 폐기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 가. 현장에서 는 또 몇 년 후를 생각하며 대처해야 할지, 학생이나 학부모 대하기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막막하기만 한다. 예측하기 어렵고 확신하기 어려운 미래사회의 특징 때문에라도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며 살아가는 창의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맞춰 설명하면 되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새 교육정책이 또 다른 복지부동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바라건대, 정책은 훌륭하다. 썩은 가지를 치고, 이전 시대에 소홀할 수 있었던 부분들을 끌어안는 것이 시작이라면, 이제 마음을 모으는 일에 우선적으로 힘써야 한다. 자율과 창의와 인성, 배려와 돌봄의 기능이 충실하고 조화롭게 수행되는 학교 현장에 학생만 있고 교사와 학부모가 없을 때가 문제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갈등은 필수지만 서로에게 보완될 수 없는 갈등은 낭비다. 우리 교육은 서커스단이 보여주던 외발자전거의 신기함에 빠질만한 연배는 넘어섰다고 믿는다. 훌륭한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몇 년 임기 동안이 아니라, 백년을 두고 노력할 각오를 해야 한다. 서두르지 마라, 그러나 멈추지도 말라는 말처럼. 지금은 순교자가 되려는 마음이 아니라 함께 가려는 마음이 필요할 때다. 교육은 먼 길이다. 이제 서울시교육청의 명칭도 ‘교육지원청’으로 바뀌었다. 이름 걸고 사기 치지 않겠다는 말도 있었다. 표현은 투박해도 그 각오와 자세가 얼마나 좋은가. 주어진 환경에 맞춰, 옷에다 몸을 맞추라는 시대, 절대권위와 대가족제도와 까라면 까고 찬물도 위아래를 찾던 시대는 분명 지나고 있다. 그렇다고 그 시절 막강함의 한 축이었던 교사의 위상과 역할변화에 대해 아쉬워만 하고 있지는 않다. 알게 모르게 몸에 밴 타성이랄까 관행이랄까 쉽사리 뿌리쳐지지 않는 관념 때문에 어렵고 낯선 부분도 있지만 변하고 있다. 선생님을 사랑하고 추억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여전히 존경받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말 그대로 환골탈퇴의 아픔을 각오하는 우리 서로에게 의심과 질책이 아니라 진심어린 격려의 말을 건네야 할 때다.
교과부가 체벌을 없애는 대신 심각한 문제학생에 대해 출석정지를 내리는 방안을 추진한다. 간접체벌은 일부 허용하는 쪽으로 관계 법령을 개정키로 해 체벌을 전면금지한 일부 시도교육청의 조례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9일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열린 ‘학교문화 선진화 방안 정책 세미나’에서 교과부 의뢰로 체벌 대안을 연구한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는 “심각한 문제행동을 보이는 학생에 대해서는 출석정지가 가능토록 하되 위센터나 위스쿨 등 교육청 시스템 내의 전문기관에서 대체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 교수는 “체벌금지를 하되 시행시기를 초중고에 따라 차이를 둬야 한다”고 밝혔다. 초등학생은 내년부터 체벌금지를 해도 큰 어려움이 없고 고등학생도 전두엽이 상당히 성숙해 이성적 접근이 가능한 만큼 체벌 대체방법을 시범실시하고 조정하는데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중학생은 이성적 접근이 어려워 2년여의 준비기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교사에 대한 첨단 인성교육 실시, 학부모상담제를 통한 정보교육 등을 제안했다. 이날 이규석 교과부 학교교육지원본부장은 “반복되는 문제행동을 보이는 학생에게 출석정지 등 이번에 논의된 방안 등을 도입하고 1월 중에 운동장 뛰기나 복도에 서있기 등의 일부 간접체벌은 허용하는 내용으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한 입법예고를 실시할 예정”이라며 “일부 시도교육청의 조례에 수정이나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교원들의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상담 콜센터, 단위학교 내 교육활동 보호 신속대응팀을 설치하고 학교안전요원을 배치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교육청이 내년부터 자율학습이나 방과후 학교에 학생을 강제로 참여시키는 학교에 종합감사를 실시하고 예산지원을 제한하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시교육청은 29일 방과후학교, 자율학습, 0교시 수업을 강제할 경우 행·제정적 제재를 강화한 지도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학생과 학부모의 실질적인 동의 없이 운영하거나 학년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율학습, 보충수업 형태의 방과후학교 참여율이 방과후학교 강좌전체 평균 참여율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으면 지침 위반으로 간주된다. 방과후학교 강의 내용을 선행학습 위주로 구성하거나 정규교과의 진도나 평가에 반영해 참여를 유도하는 사례도 집중 지도대상이다. 시교육청은 내년 2월부터 민원이 제기되는 경우 1단계로 장학사를 파견해 위반사례에 대한 시정지도를 실시하고 2단계로는 계약업무, 시설공사, 학교 회계 및 학사운영 전반에 걸친 종합감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3단계로는 해당 학교를 연구·시범학교 공모와 우수학교, 교원 표창 대상에서 배제하고 목적사업비 지원도 제한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학교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제약하려는 조치로, 사교육비 증가나 학력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교총은 “학운위 심의를 통과한 방과후학교 등 교육활동 마저 일부의 문제제기가 있을 경우 제재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은 학교의 자율성과 선택권을 제약하는 것”이라며 “해당 민원사항에 대한 지도뿐만 아니라 관련이 없는 계약업무, 시설공사, 학교 회계까지 종합감사를 하는조치도 지나친 처사”라고 꼬집었다. 더불어 “프로그램의 질에 따라 참여율이 달라질 수 있음에도 전체 방과후 참여율보다 10%포인트 높은 것을 지침 위반으로 간주한다는 기준이 부적합하고 일괄적 규제가 사교육비 증가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체벌금지 논란부터 무상급식 논란까지 논란의 중심은 소통의 부재였다.교육현장에서는 서로의 의견조율없이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짐으로써 소통이 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상대의 의견에 귀 기울였다면 소통의 부재라는 이야기 까지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의견을 소중히받아들일 때만이 소통의 문제는 쉽게 풀리게 되는 것이다. 2010년의 교육계 화두는 당연히 진보진영 교육감들의 대거 등장이었다. 교육정책이 일정부분 변할 것으로 예측은 했지만 이렇게 급격히 변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않았었다.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육현장의갑작스런 변화는 곧 학생들의 변화를 담보해야 했기에 큰 변화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어쩌면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교실의 붕괴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상급식을 두고 연일 반복되는 논란에 끼어들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학교가 어렵기 때문에 교육이 이려우니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책임전가는 곧 교육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교사의 한사람으로 그럴 마음은 전혀없다. 다만 이런 여러가지 사태를 접하면서 소통의 부재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이해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교육은 결코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학생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조치와 복지를 전면에 내세운 정책이 앞으로의 진행과정에서 어떤 부작용으로 돌아올 것인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정책의 실현을 위한 가치관의 논란속에서 학생들 역시 편할리 없다. 학생들의 가치관 역시 혼란을 겪을 것이다. 일반인들 마저도 체벌이 금지되어야 하는 이유와 무상급식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학생들의 가치관이 분명해 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통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교육현장에서 교사와 학생들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제대로된 교육이 될리 없다. 교육현장 이상으로 소통이 중요한 것은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는 과정일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면 그 논리에도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당성이 검증될 수 있다면 그 논리는 논리 자체가 충분히 받아들여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교육개혁, 교육혁신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좀더 범위를 축소하면 학교혁신, 학교개혁이라는 용어로 압축된다. 혁신, 개혁이라는 용어는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원래의 의미 자체를 따지기 이전에 학교에서의 교육혁신, 교육개혁이 타당한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육은 단기간에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의 생산성과는 거리가 있다. 시간이 흘러야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학교에서의 개혁과 혁신은 현재의 상황보다 훨씬더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 변화가 긍정적인 변화로 마무리 된다면 다행스럽지만 부정적인 변화로 마무리 된다면 그 시대에 학교를 다닌 수많은 학생들은 피할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부정적 변화와 긍정적 변화가 50:50이라면 과연 모험을 걸고 개혁을 시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충격적인 개혁을 피해갈 것인가를 깊이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교육을 보면서어쩌면 개혁을 인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여타의 분야에서는 환영받을 수 있는것이 개혁, 혁신이지만 교육에서 만큼은타당한 용어가 아니다. 지속적인'개선'이라는 용어가 좀더 타당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급작스런 개혁과 혁신이 소통의 부재를 가져오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시대에 소통이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만큼 소통은 어떤 정책을 추진하던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2010년의 교육이 소통의 부재로 이어졌다면 2011년의 교육은 소통이 통하는 교육이 되었으면 한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최근 문제학생 학부모에 대한 소환권 법제화를 추진하겠다는 발언을 해 논란을 낳고 있다. 곽 교육감은 27일 “문제를 일으킨 학생에 대한 교사의 학부모 소환권을 법제화하도록 교과부에 요청하겠다”며 “소환에 불응하는 학부모에게 벌금 부여 같은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체벌금지의 대안으로 학부모 소환권을 강제한다는 것에 대해 교육계는 실효성이 떨어져 실망스럽다는 반응이다. 서울지역 한 중학교 교사는 “뒤늦게 후속조치를 만들려는 것 자체가 체벌 전면금지로 인한 학교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교사의 강제 소환으로 학부모가 올 경우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기도 어렵고 결국 학교와 학부모의 신뢰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강제소환과 불응에 대한 제재조치를 마련하는 데에 있어 구체적 근거와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갈등의 소지가 된다고 덧붙였다. 더욱이 교육청 내부에서도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다. 시교육청 한 관계자는 “시교육청 자체적으로 소환제를 강제할 수는 없어서 시도교육감협의회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해 교과부에 법제화를 건의하려는 것으로 안다”면서 “그러나 외국처럼 학교에 소환되는 것을 직장에 출근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등의 제반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법제화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승걸 교과부 학교생활문화팀장도 “문제 학생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고, 그만큼 학교에 오기도 힘든 학부모인데 안 온다고 벌금을 강제로 물리는 건 실효성이 없다”며 “자칫 모든 책임을 학부모에게 전가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교사에게 학부모 소환권과 벌금 부가권을 부여하는 이 같은 방안은 2006년 열린우리당이 학교폭력 근절대책으로 추진하려다 학부모 인권침해 소지가 있어 무산된 바 있다.
교총은 학생의 학습권과 교권을 보호하기 위해 교육벌을 허용하고, 1교 1변호사 제도를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교총은 27일 ▲교권보호위원회 설치 ▲교원의 교육활동보호법 제정 ▲1학교-1변호사제도 운영 검토 ▲지속적 수업방해‧교칙위반 등에 대한 교육벌 허용 ▲교권침해대응 매뉴얼 제작 배포 및 교원연수 강화 등 ‘5대 교권보호 대책’을 발표하고, 교과부와 시도교육청, 국회의 노력을 촉구했다. 이같은 요구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체벌전면금지 조치가 학생들의 인식과 학교생활과 교사의 학생지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실붕괴 현상을 단순한 입시와 학업스트레스로 규정하는 시각에 대한 대안 제시라는 것이 교총의 설명이다. 이를 위해 학교와 교육청, 교육청과 경찰청(서)가 노력하는 교권보호위원회 설치나 투명한 문제해결을 위해 변호사 등 전문가를 통한 분쟁조정 방식 도입하고, 교사가 적극적으로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교육벌을 허용하는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 또 교과부와 교육청은 학생, 학부모에 의한 교사 폭언, 폭행이 발생될 때 해당 교사와 학교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교원침해 대응 매뉴얼을 행정당국이 만들어 배포하고, 교권관련 연수를 강화해야 한다고 교총은 설명했다. 김동석 교총 대변인은 “현행범이 아닌 경우 학교장의 동의 없이 체포할 수 없다는 불체포 특권이 교사에게 주어진 것은 교권 존중을 통해 학생의 학습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학생의 권한과 함께 문제 학생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등 교육벌 허용 움직임이 있는 만큼 교원에게 학생을 교육할 의무와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교과부와 교육청, 국회가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교총이 주5일 수업제 도입․정착을 2011년 핵심과제로 강력 추진한다. 올 7월 1일부터는 20인 미만 사업장까지 주40시간제가 도입되는 만큼 유독 교원만 제외하고 있는 현행 제도 개선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이를 위해 올 핵심 추진사업인 ‘교육개선 뉴아젠다’의 하나로 주5일 수업제를 이달 선포하고, 교섭과 입법청원을 통해 정부와 정치권을 압박해 나갈 계획이다. 2004년 주40시간제가 도입돼 2005년 7월부터 공무원, 교과부, 시도교육청, 시군구교육지원청까지 주5일제를 시행하면서도 학교는 정부, 정치권의 의지부족으로 5년째 월2회 주5일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근로기준과의 한 관계자는 “교원을 제외한 공무원은 이미 주40시간을 기준으로 이를 넘기면 초과근로수당을 지급하고 있다”며 “교원도 받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만큼 교원만 소외된 상황이다. 정동섭 교총 정책본부장은 “학교는 문을 열고 수업을 하는데 정작 이를 지원해야 할 교육행정청은 문을 닫는 모순이 5년간 지속된 셈”이라며 “이미 2005년부터 교육계는 교육과정 조정과 교육인프라 구축 등을 제안했지만 정부는 지금껏 준비한 게 없다”고 비판했다. 결국 교총은 주5일 수업을 뉴아젠다로 삼아 사회적 공론화를 끌어내고, 합리적인 대안 제시로 이를 관철시킨다는 계획이다. 동시에 20만 교원이 동참한 입법청원을 1월 중 진행하고, 현재 진행 중인 교과부와의 단체교섭에서도 수업일수 및 교육과정 조정, 학생 보호대책 마련 약속을 끌어낼 방침이다. 이에 대해 교과부는 “사회적 여건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안됐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 모 중학교장은 “놀토마다 각 가정에 교내 대체프로그램을 안내해도 전교생 1000여명 중 신청자가 20명이 안 된다”며 “여건보다는 의지부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교총은 주5일제 수업이 학생들의 창의인성교육 차원에서도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학교에서 할 수 없는 교육적 경험을 가정에 돌려준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도 주5일제는 보편화된 상태다. 가까운 중국은 1996년부터, 일본은 2002년부터 주5일 수업을 실시했고, 미국·독일·프랑스·캐나다 등의 나라도 주5일 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회원을 보호하고 회원에게 힘이 되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충북교총 제34대 회장으로 당선된 신남철 회인초 교장. 신 회장은 “최근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교권침해에 대해 법적 대응을 통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신 회장은 “교권이 떨어져 학생 생활지도가 어려워지고 각종 교육정책으로 교원의 사기가 크게저하돼 있는 상황에서 교원의 보호막과 교권확립의 구심점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회원들에 대한 복지혜택을 늘리는 데에도 힘쓸 계획이다. 신 회장은 “교총에 30년 이상 가입했다가 퇴직한 교원들에게 퇴직회원증을 발급해 지역의 문화시설에 대한 혜택을 계속 제공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며 “교총에 오래 가입하면 그만큼 복지혜택도 늘어난다는 것을 통해 교원들의 관심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회장은 청주교대, 한국교원대교육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충북자연사랑네트워크 운영위원, 전국초등교육행정연구회부회장, 한국교원대학교대학원동문회 충북지부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임기는 3년.
학교‧교사 권위 되찾아 바른 인성 교육해야 권위 실종 학교의 정작 비극 주인공은 ‘학생’ 2011년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감회가 새롭다. 새해에 뜨는 해라고 해서 작년에 떴던 해와 외견상으로는 다를 것 같지 않으나, 사실은 다르다. 새해에 뜨는 태양이 작년과 달리 새로울 수밖에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자연의 신선함일 터이다. 새해의 태양은 지나간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해요, 또 옛것을 보존하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해다. 2011년 새해를 맞이하여 왜 교육계의 절실한 어젠다와 화두가 없으랴. 흔히 교육계의 어젠다는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여 백년을 내다보며 계획과 실천방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백년이라는 것도 결국은 일 년 일 년이 켜켜이 쌓여 백년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금년 일 년의 계획을 이른바 ‘일년지소계(一年之小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결코 사소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금년 우리 교육계의 숙제는 무엇일까. 올 한 해 동안 우리가 학교교육을 통해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숙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 우리 교육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과제는 ‘권위(權威, authjority)’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학교의 권위 이야기를 하면, 혹시 권위주의를 떠올리거나 혹은 소통이 없고 위계질서로 이루어지는 ‘닫힌 사회’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권위란 사뭇 엄숙하고 소중한 그 어떤 가치다. 우리가 예의 없이 살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위 없이는 살수 없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우리사회가 한편으로는 발전과 번영을 거듭하면서도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바로 엄숙함이다. 우리는 어디에 가서 엄숙함을 찾을 수 있으랴. 결혼식에 가더라도 항상 떠들썩하고 장례식에 가서도 그리 큰 엄숙함은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엄숙함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선생님이 공부를 가르치고 학생들이 배우는 교실에서도 엄숙함은 실종되었다. ‘잠자는 교실’이야말로 그 생생한 사례일 터이다. 또 선생님이 일탈된 행동을 하는 아이를 지도하고 타이르는 데서도 반항과 불복종은 있을지언정 엄숙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형설의 공을 기리는 졸업식에서 엄숙함을 찾아볼 수 있는가. 우리학교 졸업식이 엄숙함을 잃어버린 지는 한 두 해가 아니다. 학부형이 선생님을 찾아와 자녀문제에 관해 의논을 할 때에도 진정성과 엄숙함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최근에는 이 엄숙함에 도전하는 또 다른 현상이 새롭게 불거졌다. 서울과 경기도 등 일부 교육청에서 학생체벌을 금지하는 인권조례 등이 발표되면서 학교와 선생님은 학생들로부터 권위를 가진 존재로 인정받기가 더욱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잘못된 행동을 야단치고 타이르는 선생님이 오히려 학생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감수해야하는 선생님으로 전락하고 ‘매 맞는 선생님’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참으로 참담하고 암울한 느낌이다. 학교와 선생님의 권위가 추락하는 마지막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학교와 선생님의 권위가 살아나야하는 것은 학교와 선생님이 편안한 입지를 다지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선생님의 그림자라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준칙이 학교에서 다시 살아 꿈틀거려야 한다는 것은 선생님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판단력이 미숙하고 인격을 도야해야할 단계에 있는 미성년자들을 올바로 인도하고 바르게 인성을 키우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학교와 선생님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가정에서 부모의 올바른 가르침이 자녀들에게 내면화되기 위해 부모의 권위가 절실히 필요한 이치와 마찬가지다. 우화에 나오는 청개구리 이야기에 우리 모두 친숙하지 않은가. 동쪽으로 가라면 서쪽으로 가고 남쪽으로 가라면 북쪽으로 가는 등, 사사건건 엄마 개구리가 시키는 것과는 항상 반대로만 행동하는 아기 청개구리가 어떻게 올바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권위를 갖지 못한 엄마 개구리와 권위를 인정하지 못한 자녀 개구리는 모두 가정교육 실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학교 사회도 이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선생님이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선생님의 지시, 가르침 하나하나가 학생들로부터 조롱거리와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선생님이 학생들로부터 욕설을 듣고 매까지 맞는 권위실종의 학교현장에서 정작 비극의 주인공은 학생들이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학교와 선생님으로부터 어떻게 학문을 배울 수 있으며 또 인격을 도야할 수 있으랴. 또한 그런 그들이 커서 우리 사회의 주인공이 될 때 우리사회의 품격과 질은 어떻게 되겠는가. 학교와 선생님의 권위회복이 교육의 과제이면서도 시대적 과제가 되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금년이야 말로 학교와 선생님의 실종된 권위를 되찾는 엄숙한 해가 되어야 한다. 학교와 선생님의 권위가 바로 설 때 비로소 교육의 권위가 바로 설 수 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우리 학생들의 인격과 인성도 바로 서게 될 것이다.
학교현장이 이렇듯 무너지고 교권이 추락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야말로 교실 위기, 교권 붕괴 그 자체다. 학생인권조례 및 체벌 전면금지 이후 초중고 학생에 의한 연이은 여교사 폭행 사건, 학생에 의한 여교사 성희롱, 폭언 동영상 유포, 음주, 흡연, 수업이탈, 염색, 파머, 교복 미착용 학생증가 등으로 교실이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특정 교원노조 등에서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및 체벌 전면금지에 따른 과도기적 현상으로 곧 나아질 것이라거나 학생들의 우울증, 입시경쟁 교육체제가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교원들은 그러한 낙관적 전망과 체벌금지와 학생인권조례 두둔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있다. 최근 교총이 전국 초중고 교원 406명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교권위기 및 학생이탈 행위가 과도기적 현상으로 곧 나아질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비율이 83%에 달하고, ‘체벌 금지 이후 학생 지도가 어려워 졌다’는 응답률이 94.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체벌금지가 교권실추 원인의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한 이유로 확인되고 있다. 현재 일부 학생들은 수업을 방해하고 교칙을 어겨도 교사가 자신을 벌할 수 없다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고, 교사는 그러한 문제행동 학생을 제재할 마땅할 방법이 없어 애를 먹고 있다. 수업을 방해하고 학칙을 어겨 엄히 야단을 치면 ‘곽노현 교육감에게 이른다’, 경찰에 신고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교사가 권위를 갖고 학생의 학습권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올 해 10월 7일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1998년 체벌을 법에 의해 금지한 영국은 전체 교사 중 70%가 학생들의 불량한 품행 때문에 사직을 고려한 적이 있고, 전체 교사의 92%가 자신이 재직하는 동안 학생들의 품행이 악화되었다고 응답하였다 한다. 매 맺는 교사, 무너지는 교권으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도대체 연일 언론에서 교권추락에 대한 우려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와 교육청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한민국 교사에게 국회의원과 같이 ‘현행범이 아닌 경우에는 학교장의 동의 없이 체포할 수 없다’는 불체포 특권을 부여한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교권존중을 통해 학생의 학습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교사 개인의 인권과 교권보호는 커녕 대다수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호할 아무런 안정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매 맺는 교사, 무너지는 교권으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정부와 교육청은 ‘교원의 교육활동 보호법’ 제정 등 교권보호 대책에 즉각 나설 것을 촉구한다.
*** 요즘 같았으면 폭력교사라고 쫓겨날 짓을 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잘 못 본 게 죄지! “장영길 ! 이리 나왔!” 선생님은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면서 화를 벌컥 내었습니다. 영길이는 무슨 일인지 몰라서 눈이 둥그레 가지고 엉거주춤 일어섭니다. “빨리 나와 ! 이게 뭐야 ? 넌 이 시험지를 두 번째 본 거야. 이거 .... 이게 뭐냔 말 야. 이 따위로 하니까 군내 경시 대회에서 75점을 맞아서 우리 학교의 점수를 까먹 더니 다시 본 시험지에서 요 모양이란 말이냐? 딴 사람은 몰라도 넌 이 시험지를 두 번째 본 게 아니냐? 그런데 75점이 뭐냐? 엉 이게 뭐냔 말이야?” 선생님은 붉으락푸르락 하시면서 영길이가 앞으로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미 손에는 넓이가 10cm, 길이가 90cm 쯤이나 되는 무서운 매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무서운 매를 들어서 사정없이 엉덩이를 두들겨 패는 무서운 분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교살에서 잠을 자면서 집에도 못 가는 생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무서운 매를 때리시면 반드시 왜 맞았으며,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지를 일러주시기 때문에 매를 맞을 때보다 나중에 꾸중을 들을 때 더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자기 잘 못을 뉘우치는 눈물이기 때문에 집에 가서도 매를 맞았다는 말씀을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우리들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하시고 계시는 분입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교실에서 잠을 자면서 하루 15시간 이상을 매달려 우리를 가르치시느라고, 코피를 쏟으시면서도 밤을 새워 시험지를 만들어서 우리 공부를 시키십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울 뿐 매를 맞는 것쯤은 조금도 무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우리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봐야 하는 때였으니까요. 만약에 공부를 잘 하지 못하면 중학교에 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도 없었던 시절에 더구나 시골 면 소재지에서 4km 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학교에서는 50명중 겨우 5,6 명이 중학교에 제대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공민학교라는 중학과정을 가르치는 무허가 학교에 가야 하는 그런 시절이기 때문에 6학년이 되면 요즘 고등학교 3학년과 똑같았습니다. 대부분의 도시 아이들은 집에서 과외를 받았지만, 우리 같은 농촌 구석에 있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시험지를 몇 장씩 풀면서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응용문제를 풀어서 시험을 대비하는 공부를 해야 하니까, 노는 시간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 무렵에 6학년 담임을 하시는 분들은 젊고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견딜 수도 없었습니다. 하루 8시간은 보통이고 밤이 되도록 수업을 하는데 중, 고등학교처럼 교대로 수업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온 종일 혼자서 연속으로 7, 8시간 수업을 해야 하는데, 우리 반은 그것도 모자라서 저녁을 먹고 밤 11시까지 교실에서 공부하고 11시 반이면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에 깨워서 아침운동은 30분 동안 시킨 다음에 아침 공부를 한 시간 마치고 집에 가서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을 두 개 싸 가지고 학교에 와야 합니다. 이렇게 하루에 자는 시간 5시간과 집에 다녀오는 시간 2시간해서 7시간과 잠시잠시 쉬는 시간 한 시간 정도를 뺀 나머지 16시간을 모두 선생님과 함께 교실에서 책과 시름을 하는 공부를 하고, 문제지를 풀고 외우는데 정신을 쏟아야만 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학급에서 5,6명은 날마다 보는 시험지의 점수가 평균 95점 이상을 받고 있으며, 나머지 중학교에 갈 아이들도 거의 평균 80점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만약 못 미치면 모자란 점수대로 1점에 한 대씩 매를 맞기로 약속이 되었고, 우리들은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였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여 지난 10월 마지막 주일에 군내 경시대회가 열렸습니다. 각 반에서 가장 잘 하는 사람 두 명씩을 추천하여 군내 20여개 학교의 대표들이 한 곳에 모여 시험을 봐서 우수 학교를 표창하는 2학기 경시 대회에 우리 반에서는 영길이와 경규가 참가를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가 아주 조금 차이로 2등을 한 것입니다. 한 두 문제만 더 맞혔어도 1등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만 영길이가 수학에서 겨우 75점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90점만 맞았다면 1등을 한 읍내 학교보다 앞설 수 있었는데 무척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2등을 하고 돌아온 아이들을 수고했다고 격려를 했지만, 영길에게는 매우 꾸지람을 하였습니다. “뭐야, 이렇게 쉬운 문제수학에서 처음 5번까지는 가장 쉬운 문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3문제를 틀렸음들을 틀렸으니, 이것은 네가 문제를 잘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냐?” 하시면서 꾸지람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군에서 본 시험지를 가지고 우리 반 전체 아이들이 시험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를 대표하여 출전을 했던 장영길이가 오늘 시험지에서도 또 75점을 맞은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본 순간에 “장영길, 이 녀석이 경시 대회에서 시험을 잘 못 봤다고 꾸중을 했더니 일부러 틀린 거지. 다른 아이들은 이 시험지가 처음이지만 영길이는 벌써 두 번째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하신 선생님은 요즘 말로 뚜껑이 열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 올라옴것을 느낄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장영길이가 앞으로 나가자 선생님은 “엎드려 뻗쳐 !” 하고 호령을 하시더니, 매를 들어서 영길이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리셨습니다. 아마도 열 대를 때린 것 같았습니다. 널찍한 매가 엉덩이에 떨어지는 순간 울려 퍼지는 무서운 소리는 교실을 쩌렁쩌렁 울려 우리들은 기가 죽어 고개를 들 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매를 맞고 있는 영길이 보다 더 움찔움찔 놀라는 아이들도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일어 서 !” 열대를 때린 선생님은 영길이를 일어 세우시더니, “이게 뭐냔 말이야. 이게 ? 그래 또 75점을 맞아? 네가 그것 밖에 안 되니?” 선생님은 조용히 타이르셨습니다. “...............................” 영길이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서 있습니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너에게 걸었던 기대가 너무 컸었기에 군 대회에 가서 망치고 와서 또 이런 결과가 나오니까 너무 어이없고 내가 지금까지 잘했던 네가 이렇게 엉터리없는 짓을 하는데 대해 화가 났었다. 좀 고생스럽더라도 여기 꿇어앉아 있거라. 이 시간 공부가 끝나고 이야기하자.” 하시고서는 영길이를 들여보내고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영길이는 그렇게 맞고 혼이 났는데도, 공부 시간 내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꿋꿋하게 공부만 하고 앉아 있습니다. ‘저렇게 맞았는데 아프지도 않나? 정말 괜찮은 것일까?’ 아이들은 모두들 그렇게 생각을 하며 힐끔힐끔 영길이의 눈치를 살핍니다.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엄살을 부리고 엉엉 울거나 지금까지도 훌쩍거리고 있을 것인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영길이를 보면서 ‘정말 지독한 아이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저녁을 먹으러 가려면 아직도 한 시간이 남았습니다. 영길이는 한 시간 반 정도를 그냥 꿇어앉아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공부 시간이 끝나고 화장실에를 다녀오라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저려서 제대로 일어서질 못했습니다. 이걸 보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저 영길이를 좀 부축해 줘라. 다리에 피가 안 돌아 좀 힘들 거다. 교실만 나가면 괜찮을 것이니 붙잡아 주어라.” 하셨습니다. 앞쪽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영길이를 부축하여 나갔다. 몇 걸음을 걷던 영길이는 다른 아이들을 밀치고 혼자 걸었다. 정말 몇 걸음 걷는 사이에 다리가 괜찮아진 것인가 봅니다. “야 ! 엉덩이 괜찮냐?” 선생님이 안 보이는 다음 교실 복도쯤에 가서 철이가 물었습니다. “아프긴 해도 괜찮아. 소리만 요란하지 별로야.” 영길이는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면서 곧은 자세로 걸어 나갔습니다. “와 ! 우리 선생님 지독하다. 그걸로 10대를 때리시다니......” “그 까짓게 별거냐? 지금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우리하고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자면 책을 읽으시더라.” “뭐 ? 그게 정말이냐? 난 자라는 말만 들으면 그냥 잠이 와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자 영길이는 “너희들이 자는 지 살피신 다음에 일기를 쓰시고 나서 책을 읽으시다가 주무신단 다. 그러고서도 하루도 우리보다 늦게 일어나신 거 봤니? 그런 분이야.” 지독히 매를 맞은 영길이는 아주 선생님의 자랑을 하려고만 덤볐습니다. “야 ! 영길이 넌 그렇게 맞고도 선생님 편이니?” 말썽꾸러기 규철이가 비꼬듯 말합니다. 그러자 영길이는 “그래, 난 선생님이 내가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으니까 밉지 않아. 왜 미울 수 있니 ? 나를 잘 되라고 가르치려고 그러시는 것인데 뭘....” 하자, 다른 아이들은 더 이상 무어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매를 맞은 영길이가 도리어 다른 아이들이 선생님이 밉다는 생각을 한 것이 이상하다고 말을 하니까,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바라본 들판은 벌써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실에서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은 들판에 보리 이삭이 저렇게 익기도 전이었습니다. 교실에서 자기 시작한지 한 달쯤 되어서 농번기라고 모내기철에 잠시 아이들이 학교를 쉬는 기간에도 우리는 계속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제 학교 공부를 시작한지 백일하고도 20일이 넘었고, 이제 마지막 한 달쯤이 지나면 중학교 시험을 보아야 할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날마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남쪽이라고는 하지만 벌써 11월이 되니까 날씨가 추워서 교실에서 잠을 잘 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가까운 마을의 아이들 몇 명은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가기로 하고 먼 아이들은 학교 사택에서 방을 빌어 여자들은 작은 방에서 남자들은 선생님과 함께 잡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 날마다 보는 들판이 누렇게 변해 가는 것도 모른 채 시간이 흘러 버린 것입니다. 잠시 아이들이 노는 시간이 되는가 싶었는데 “어서 들어와라. 얼른 끝내고 가야지?” 하시는 말씀이 들려 와서 우리들은 바삐 교실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시간은 지금껏 공부한 것 중에서 가장 많이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 주시면서 그 이유를 일일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한 시간이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빨리 지나고 집에 가야할 시간입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 얼른 가서 저녁을 먹고 오너라. 나머지 아이들은 저녁 먹고 저기 숙직실에 주전 자에 물 끓여 놓았으니 먹도록 하고...” 하시고는 무척 피곤해 하시면서 잠시 자리에 앉으시더니 “영길아, 이리로 와.” 하시면서 영길이를 데리고 숙직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영길이가 울고 나올 시간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니까요. 그런데 다음 날, 시험지를 받아든 영길이는 낯빛이 변하였습니다. 자기 시험지를 보니까 자기는 75점이 아니라 95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시험이어서 선생님이 일일이 채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단 저 분단이 바꾸어서 시험지를 채점하는데 가끔은 내 시험지를 네가 채점하고, 시험지는 내가하는 경우가 생겨서 눈짓을 하여서 서로 적당히 비슷하기만 하면 동그라미를 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이걸 눈치 채신 선생님은 분단끼리 바꾸어서 앞뒤로 한두 번 바꾸게 만들어서 누가 누구 것을 채점하는지 일일이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끔 채점을 잘 못하여서 맞는 것을 틀리게, 또는 틀린 것을 맞다고 하는 경우가 생겨서 채점을 한 사람의 이름을 시험지의 윗칸에 적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영길이가 채점을 한 경식이의 시험지가 75점인데 그만 선생님이 이걸 잘 못 보시고 영길이가 75점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영길이는 자기가 75점을 맞았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난번 실수 때문에 선생님께 매를 맞아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소리 않고 매를 맞았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아시고서는 자신의 잘 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매질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셨습니다. 영길에게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였지만, 영길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가 잘 못해서 2등을 해서 맞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고, 웃으면서 말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자신의 실수를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시면서 “내가 너무 감정을 앞세워서 잘 못 본 게 죄이구나.”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