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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모교이자 중국의 대표적 명문인 칭화(淸華)대학교의 100주년 기념식에서 중국 명문대학과 선진국 대학들과의 격차를 언급함에 따라 칭화대와 영국 최고명문인 옥스퍼드대학교와의 차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25일 중국과 홍콩 신문들에 따르면 후 주석은 2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칭화대 100주년 기념식에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자칭린(賈慶林) 정협 주석,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등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함께 참석했다. 후 주석은 이 자리에서 "신중국이 출범한 지 60여년이 지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고등교육 시스템을 세우고 수억명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큰 성과를 거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은 아직 경제·사회 발전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고 선진국과 비교하면 뚜렷한 격차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후 주석은 중국이 인재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일류대학 몇 곳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중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주룽지(朱鎔基·83) 전 중국 총리도 지난 22일 모교인 칭화대를 방문해 중국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중국 최고 수준인 칭화대와 영국의 옥스퍼드대와의 격차는 어느 정도나 될까. 홍콩의 명보(明報)는 옥스퍼드대와 칭화대의 격차를 분석하는 기사를 실어 관심을 모았다. 영국의 타임즈 하이어 에듀케이션(THE)의 2010년 세계대학순위 자료에 따르면 영국 옥스퍼드대는 세계 6위를 차지한 반면 칭화대는 58위에 머물렀다. 중국에서는 베이징대와 중국과기대가 각각 37위와 49위에 랭크됐다. 또 홍콩에서는 홍콩대(21위), 홍콩과기대(41위)가 50위 이내에 진입했다. 100년 역사의 칭화대는 중국의 정·관계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칭화대가 배출한 역대 정계 인사로는 중국공산당 총서기 1명(후진타오 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 50명,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26명, 총리 1명(주룽지 전 총리), 부총리 9명, 성·부급 고급관리 280명, 전인대 상무위원장 1명(우방궈 위원장), 전인대 부위원장 7명 등 매우 화려하다. 그러나 칭화대가 배출한 인물들이 많기는 하지만 1096년 설립된 옥스퍼드대에 배출한 인재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 게시됐다고 명보는 전했다. 9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옥스퍼드대는 지금까지 7개국의 왕 11명과 영국 국왕 6명을 배출했다. 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동문만도 47명에 달하며, 53명의 각국 대통령 및 총리가 옥스퍼드대 출신이다.
충남도교육청은 현행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대체할 2016년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에 대비할 수 있는 영어 듣기능력 개발자료를 개발, 도내 모든 중등 영어교사에게 보급한다고 25일 밝혔다. 도내 현직 영어 교사들이 직접 개발한 자료는 EBS 전국영어듣기평가, 수능, TEPS, 토익, 토플 등의 듣기평가 문항과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듣기평가 성취기준을 바탕으로 총 420문항을 담고 있다. 특히 동일 유형별로 구성된 문항을 손쉽게 출력해 수업지도용으로 활용할 수 있고 35개 유형으로 편집된 실전 듣기평가 문제는 실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자료개발에 참여한 이진복 천안업성고 교사는 "전국에서 처음 개발된 이 자료가 고등학생은 물론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이 적용되는 현재의 중2 이하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 변화의 물결을 가속화시키는 중심축은 ‘인터넷’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은 이젠 일상생활의 필수요소로서 현대인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교육에도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문제는 인터넷 사용 양태가 과연 교육적으로 유의미하고 바람직한가에 놓여 있다. 인터넷 사용의 교육적 의미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의 관심과 필요에 따라 그 교육적 수준을 4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因터넷’으로서의 인터넷이다. 이런 차원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접속해서 그냥 보는 수준의 사람들이다. 인터넷은 본질적으로 네트워크(因)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데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정보는 정보 그 자체로서 독립성 또는 개별성을 띠고 있기도 하지만 그러한 독립적 정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망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이때 인터넷을 검색하는 도중에 발견된 정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부가시키는 과정이 곧 ‘교육적 활동’(학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정보검색 및 접속을 통한 과정에서는 그러한 유의미한 학습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인터넷 사용에 익숙한 사람들은 단지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능력(Know-Where)만을 습득할 수 있을 뿐이다. 정보를 통해서 교육적으로 성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둘째, ‘引터넷’으로서의 인터넷이다. 이런 차원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에 연계되어 있는 다양한 학습정보 및 자료를 반드시 다운로드(引)해서 특정 폴더에 저장하거나 인쇄한 후 자료를 읽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학습하는 사람들이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학습정보와 자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하이퍼링크화 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아나로그식 읽기 방식으로는 디지털식 학습자원을 소화해내기에는 여전히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사고와 고뇌의 과정이 병행되어야 하는 교육의 본질적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아날로그식 학습방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셋째, ‘忍터넷’으로서의 인터넷이다. 이것은 주로 인터넷의 전송속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인터넷의 대명사인 월드와이드웹(w.w.w)은 인터넷의 전송속도를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의 전송속도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적, 교육적 의미를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 기반기술이 발전하면서 데이터 전송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그 전송속도에 상응하는 인간의 학습속도는 생각만큼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학습활동은 ‘기다릴 줄 아는 여유’(忍)가 필요하다. ‘속도와 양’의 문제가 디지털 기술혁명 시대의 주요 관심사라고 한다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느끼고 생각할 줄 아는 ‘여유와 질’이 주요 관심사인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남보다 먼저 접속, 획득했다고 해서 네트워크상에 존재하는 정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정보는 네트워크상에 존재한다. 정보를 공공재로 인식할 때 누가 먼저 정보를 접하느냐의 문제에서 정보를 ‘남과 다르게 활용하는 능력’과 활용한 결과를 ‘남과 함께 나누는 능력’이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다. 인터넷의 보급 확산으로 인간의 정보처리의 질적 수준도 그만큼 높아지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는 교육적으로 매우 본질적인 물음에 해당한다. 정보량은 폭증하고, 그 유통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지고 있지만 창출된 지식의 내재적 가치와 효용가치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인간의 학습역량으로 승화되느냐가 보다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넷째 ‘認터넷’으로서의 인터넷이다. 이것은 인터넷을 단순히 중요한 정보수집 및 획득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지식을 창출하는 중요한 매개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인터넷상의 정보는 인간의 인지과정(학습)을 통해서 비로소 지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인터넷이 認터넷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상에서 빛의 속도로 유통되는 정보를 끌어안고 고뇌하는 교육적 노력이 필요하다. 광속으로 움직이는 인터넷상의 정보를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보면서 해당 정보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간파하는 순간적 독해력도 필요하지만, 주어진 정보를 접하면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자기만의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특정한 개념과 원리로 엮어서 의미 있는 학습구성체를 만들어 나가는 교육적 노력이 필요하다. 정보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창조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인터넷기반의 학습활동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은 사용자의 관심과 의식에 따라 인터넷을 서로 다른 수준에서 활용할 수 있다. 인터넷이 ‘정보의 보고’라고 하지만 그 사용 수준과 차원에 따라서 ‘쓰레기 창고’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아날로그 시대와 다른 디지털 시대의 학습능력, 즉 디지털리터러시(digital literacy)의 교육적 수준을 업그레이드시켜 나가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인터넷을 통해 유통, 활용되는 정보는 나 자신의 교육적 성숙이나 발달과는 별로 관계없는 별천지의 미디어 세계에서 존재할 뿐이다. 인터넷기반의 매개된 경험세계 속에서 실존적 자각과 함께 교육적 성찰을 토대로 한 본질적인 학습활동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교원 66.9% 올 7월 즉시 도입, 25.3% 2012년에 학부모와 교원 모두 주 5일 수업 전면실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사교육 증가와 학력 저하의 우려가 적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교원들은 올해 7월부터 전면도입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정의 수업시수를 축소하는 방안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한국교총이 3월 17일부터 4월 1일까지 전국 초·중등교원 2298명, 학부모 2323명, 초·중·고 학생 2442명을 대상으로 우편 설문조사한 결과 드러났다. ◆ 학부모 63.1% 전면 실시해도 사교육 현행 유지 = 주5일 수업이 전면 실시 후 자녀의 사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에 학부모 응답자 63.1%는 현행 유지, 24.6%는 주5일 수업에 관계없이 사교육을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월 2회 주5일 수업 도입 이후 사교육이 늘었는지를 묻는 설문에서도 부정적 의견이 72.6%(전혀 그렇지 않다. 36.4%, 그렇지 않다 36.2%) 긍정적인 의견 5.6%(그렇다 4.6%, 매우 그렇다 1.0%)보다 많아 사교육비 증가는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원도 주5수업으로 사교육이 증가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68.1%(전혀 그렇지 않다 20.8%, 그렇지 않다 47.3%)였고, 증가된다는 의견은 11.7%(그렇다 9.6%, 매우 그렇다 2.1%)였다. 또 주5일 수업 전면 실시로 인해 학력이 저하되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교원 응답자의 87.2%(전혀 그렇지 않다 38.4%, 그렇지 않다 48.8%)가 주5일 수업 도입이 학력저하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고 긍정적 의견은 3.1%(그렇다 2.6%, 매우 그렇다 0.5%)에 불과했다. 학부모 역시 주5일 수업 월 2회 시행 이후 학생들의 학습태도가 해이해지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이를 묻는 질문에 학부모의 68.8%(전혀 그렇지 않다 31.6%, 그렇지 않다 37.2%)가 해이해지지 않았다는 의견을 보였고, 해이해졌다는 의견은 7.4%(그렇다 6.4%, 매우 그렇다 1.0%)로 적었다. ◆ 교원 "수업일수 조정해야 " = 교원들은 압도적으로 주5일 수업 전면실시를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교원의 66.9%가 전 사업장이 주5일 근무를 시작하는 올해 7월부터 즉시 도입을, 25.3%는 시범운영을 거쳐 2012년 도입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원들은 주5일 수업제 조기 시행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으로 수업일수 조정(49.1%)을 꼽았고, 다음으로 지역사회 교육 인프라 구축(25.0%), 토요휴업일 운영을 위한 인력 예산 확보(13.0%), 돌봄 프로그램 강화(11.1%) 순으로 답했다. 아울러 주5일 수업 전면도입을 위한 수업시수 조정 방안으로는 교육과정 수업시수의 축소(60.1%)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봤으며 학교행사 축소를 통한 수업시수 확보(13.2%), 방학단축을 통한 수업시수 확보(10.2%), 토요휴업일의 수업을 주중에 실시(9.2%), 학교별 자율에 맡김(7.0%) 순으로 나타났다.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교권침해 및 학교 관련 분쟁 시 문제 해결을 위한 ‘1학교 1고문변호사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국교총이 대한변호사협회(회장 신영무)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1학교 1고문변호사제’ 1차 모집 결과 전국 251개 초중등학교가 고문변호사를 위촉하게 됐다. 교총은 1학교 1고문변호사제 운영을 위해 2월 10일~18일간 각급 학교에서 희망학교를 모집했으며, 대한변협과의 지속적인 실무위원회 및 회장단 간담회를 거쳤다. 이번에 위촉된 고문변호사는 학교 전담 법률고문으로 활동하며 교권 침해, 학생간 폭력사건 등 학교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분쟁과 법률적 문제를 공유하고 학교와 협력한다. 또 학교와 협의 하에 1일 명예교사 활동, 학교 대상 법률 교육, 학생-변호사간 멘토-멘티 운영 등의 활동도 하게 된다. 이외에도 교육관계법 상 단위학교에 설치, 운영되고 있는 학교운영위원회,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학교교육분쟁조정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에도 참여해 학교교육활동을 지원하고 각종 분쟁사안에 조정 및 화해, 중재역할을 맡는다. 이에 따라 고문변호사를 위촉한 학교에서는 ▲학생지도 및 학교운영과 관련한 학부모 등에 의한 폭행, 협박, 폭언 ▲학교안전사고 ▲교직원간 갈등 ▲징계·불리한 처분·교육권 침해 ▲명예훼손 ▲학교와 급식업체, 납품업체 등 외부기관 간 분쟁 등의 사안 발생 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김용직 변협 인권위원장은 “지역여건에 따라 신청 학교 모두 고문변호사를 위촉하지 못해 안타깝다”며 “교권 침해 등 학교의 어려운 점을 해소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고문변호사 위촉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신정기 교총 교권국장은 “고문변호사제는 법률문제 발생 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현장의 문제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2년 1월 28일자 새한신문(한국교육신문 전신)에는 “전두환 대통령은 109회 임시국회 본회의 국정연설(‘82.1.22)에서 올해를 ‘교권확립·교사양성제도의 개혁, 교육풍토 개선의 해’로 삼겠다”는 발표를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전 대통령은 이어 “사회는 교사를 존경할 줄 아는 상황이 도래해야만 비로소 교권이 확립될 수 있다. 교사들의 사회적 지위향상에 힘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또 5월 17일자 신문은 5월 11일 국무회의에서 5월 15일 스승의 날로 정하고 법정기념일로 공포했다고 하면서, 당시 문교부 차원에서 “홍보탑 설치, TV, 라디오, 신문을 통한 홍보, 모범교원 위로 행사, 옛 스승 찾아뵙기 운동, 은사의 밤 개최 등 다채로운 행사를 한다”고 보도했다. 10월 4일자에는 국회 문공위 심상우 의원이 ‘교권보호특별조치법’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심 의원이 발의한 법안의 주요내용은 ‘교원의 사회적 지위 우대와 보호, 교육활동의 자율성과 신분보호, 교육현장에서의 권위실추와 명예침해 방지, 각종 학교사고로부터의 정신적 불안해소, 교육활동을 위축케 하는 부당한 언동에 대한 가중처벌’ 등이다. 30여 년전에 제안된 교권보호법안이라고는 하지만 2009년도에 발의한 법안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다. 오히려 일괄 또는 사전에 제출된 사직서가 본의 아닌 수리에 의해 해임되지 않게 하고, 교원의 학생처벌도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처벌결과에 대해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하는 것들은 지금보다 적극적인 법안이다. 같은 날자 시론에서 당시 서울대 김종철 교수는 정기국회 개원에 앞서 ‘교권확립을위한특별조치법’제정과 관련하여 “교권확립의 문제가 이번에 특별조치법의 제정을 통하여 어떠한 매듭을 지어야 할 것임은 당연한 논리이며, 기필코 실현되어야 할 과제임을 우리는 확신한다”는 말로 당시 30만 교원의 간절한 염원을 밝히면서 각계각층의 동참을 호소했다. 11월 8일자에는 국회 문공위 활동과 관련한 기사에서 “정부가 교권확립의 해로 정했는데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실적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특히 대한교련(한국교총 전신)은 교권활동의 상징적 기관이라는 사실을 들어 “일선 교원들로부터 불신을 사는 일이 없도록 지원해 줄 것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결국 김 교수는 “교권보호특별조치법의 제정은 금년도에 성취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교권확립의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룩했다는 성취감과 미흡한 점이 적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는 것을 금할 수 없으며 새로운 전진을 다짐할 뿐이다”고 12월 27일자 시론으로 소회를 밝혔다. 이와 같은 교사의 교육권 확립 의지는 30여년이 지난 2009년 9월초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에 의해 “교원의 정당한 교육활동과 학생안전을 보호하고 또, 국가가 학생을 교육할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교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교원의교육활동보호법률안’ 발의로 이어졌다.
“낮은 자존감 학생의 자살률 더 높아” “세심한 관찰을 통한 칭찬이 해법” 최근 KAIST 대학생들의 잇단 자살로 자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자살은 극소수의 일만은 아니다. 통계청의 ‘2010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15~24세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순위가 ‘자살’(13.5%)로 꼽힐 정도다. 청소년들의 자살을 막기 위한 방법은 없을까? 최근 대구시교육청과 교과부의 지원으로 ‘학교 및 교육기관에서의 학생 자살 위기 관리 프로토콜’을 연구 개발한 김희숙 경북대 간호대학 교수(구미시정신보건센터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자꾸만 늘어나는 청소년 자살의 원인이 있을까요. “청소년 자살은 한 가지 원인보다는 다양한 스트레스성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자아가 형성되는 청소년기에는 개인의 자존감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죠. 얼마 전 대구에서 실수로 친구를 다치게 한 학생이 보건 교사의 꾸지람을 듣고 자살한 일이 있었어요. 이럴 경우 보통 교사에게 화살을 돌리는데 저는 학생의 자존감 부재가 더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낮은 자존감을 또 한번 다친 학생들이 야단을 맞은 후 순간적으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소년들이 자살을 생각할 때 사전에 징후를 보이기도 하나요. “자살하려는 청소년은 대부분 주변에 여러 가지 경고 신호를 보냅니다. 이러한 경고는 자살의 신호이자 도움 요청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넘겨버리기 쉽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면 충분히 사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약을 모으거나 일기, 문자 메시지로 어려움을 토로하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면 세심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또 갑작스런 행동의 변화, 식사나 수면 변화 등 간접적인 경우로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이러한 징후를 발견하게 됐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자살 징후가 보인다면 학생에게 먼저 다가가 관심을 가져 주세요. 학생과 대화하면서 현재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학생 스스로도 위기 상태를 표출하면서 자살 충동을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상태가 심각한 경우에는 학부모에게 알리고 전문가의 치료를 유도해야 합니다.”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자살을 막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프로토콜을 개발하면서 조사한 결과 학업 성적이 낮고 학교 만족도가 떨어지는 학생들의 자살률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학교 부적응 학생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이 아니라 학생이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그 이면의 배경에 관심을 가져주는 선생님들의 혜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앞서 자존감의 부재가 자살을 촉발한다고 하셨는데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칭찬이 중요합니다. 입에 발린 거짓 칭찬이 아니라 제대로 된 칭찬을 해야 합니다. 학생을 관찰하고 변화한 점이나 잘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해주세요. 똑같은 물 컵을 보고도 물이 반 컵밖에 없다고도 반 컵이나 있다고도 표현할 수도 있죠. 학생의 양면적 특성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자존감 배양과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자살 예방을 위해 하고 싶은 말씀은. “저는 자살에 관한 강의를 할 때 항상 자살 상담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상담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에 관심을 갖고 들어주는 것이거든요. 특별한 자격증을 갖춘 전문가의 상담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진솔한 대화가 청소년들의 자살률을 줄이고 우리 사회를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곳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해답은 전문가로부터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스스로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 자살 위기 관리 프로토콜’은 교과부 학생건강정보센터(www.schoolhealth.kr)에서 이용할 수 있다.
독일에서 교육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가 함께 연대해서 풀어가고 있는 공동의 과업이다. 때문에 초․중․고 뿐 아니라 대학까지 국가가 책임진다.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무상으로 대학을 운영하고 그 대학에서 성장한 인재는 후에 자신이 받은 혜택을 다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마인드다. 이러한 독일의 교육 이념이 몇 년 동안 심하게 흔들리면서 고요하던 대학이 시위와 수업거부 등으로 바람 잘 날 없이 시끄러웠다. 또 이로 인해 평소에 정치에 관심 없던 젊은 층이 대거 선거에 참여하여 독일 정치 기류의 변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최근 독일 정치계의 핵심 이슈는 대학 등록금 폐지다. 본래 독일은 대학 등록금이 없는 나라였으나 심각한 교육 재정 부족으로 지난 2006년부터 등록금제가 도입됐다. 등록금이 도입된 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우리 부모가 세금을 버젓이 내고 있는데 왜 등록금을 내야 하느냐”고 외쳐댔다. 세금을 내면 당연히 등록금을 면제받아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또한 사회 각계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종래에는 다시 폐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 학기에 500유로(75만원).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에게는 전에 없던 부담이 생긴 것이니 대학이 나름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등록금 도입 후부터 최근까지 많은 대학생이 졸업장 없이 상아탑을 떠났으며 특히 전혀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저소득층 학생들이 대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등록금 도입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보수 진영의 주장은 사회적 불평등이 이유였다. 대학 등록금을 받지 않는 것은 중상층을 위한 혜택이라는 논리다. 본인도 대학 교육을 받은 바 없고 자식도 대학에 보내지 않으면서 세금을 내고 있는 저소득층에게 불평등한 제도라는 것이다. 실제로 중상층 자녀의 대학 진학률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등록금 면제가 중상류층을 위한 특혜라는 주장은 얼핏 일리 있어 보이기도 한다. 독일 교육은 주정부의 소관이기 때문에 일괄적이며 통일된 정책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큰 흐름과 방향은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몇몇 주의 교육으로도 대략 독일 교육의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주마다 약간씩 다른 시기와 다양한 방비책을 내 놓으며 등록금을 도입했지만 대부분 주정부들은 무이자 학자금 대출을 대폭 확대하면서 누구도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는 사태가 없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kfw 국가은행에서 매달 650유로까지 무이자 융자를 받을 수 있게 했으며 상환기간도 대학 졸업 후 25년으로 결정했다. 또 저소득층은 매달 20유로까지 상환액을 경감할 수 있으며 더 어려운 경우에는 연기도 가능케 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광범위한 방안을 마련했음에도 독일 대학생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사회적 불평등을 위해 등록금을 도입한다는 보수의 주장과는 달리 없던 등록금이 생기자 부담이 가중된 저소득층 자녀들의 학업 중단 사태가 속출했다. 도입 직후부터 시끄러웠던 대학 등록금은 바이에른과 니더작센, 2개 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에서 다시 폐지된다. 올해부터 등록금이 폐지된 주에서는 학생카드비 130유로(20만원 정도)만 내면 대학생이 받을 수 있는 각종 사회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고 버스나 근거리 기차 등 공공 교통요금도 면제받는다. 그러면서도 생활비는 여전히 무이자로 대출받을 수 있다. 독일의 등록금 폐지를 위한 투쟁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었다. 등록금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도든 극좌든 진보 쪽이다. 독일 진보와 보수는 한국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까지 확연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누가 정권을 잡아도 정치는 큰 변화 없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회도 그 내면에는 어쩔 수 없이 보수에게는 보수의 논리가 있고, 진보는 역시 진보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든 보수든 등록금 폐지를 외면하면 정치적으로 무덤을 파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용모 자유화·체벌 금지로 학교 혼란 겪어 무상 급식은 저소득 가정 학생 등에게만 “2005년 학생 두발 및 복장 자유화가 시작된 후 선생님들은 생활 지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대만 타이베이의 교원 80% 정도가 가입된 타이베이교원협회(TTA:Taipei Teachers' Associations) 양이펑 회장은 “학생 용모 자유화 이후 교사가 설 자리를 잃고 학교는 무질서해졌다”고 말했다. 양 회장은 TTA 등 대만 각 지역 교원협회의 중심체인 NTA(대만교원협회)의 창립부터 함께 해온 인물. 현재 NTA의 이사를 겸직하고 있으며 그동안대만 교육부의 정책 결정이나 교과과정 기준 개발에도 관여해왔다. -대만 정부는 2005년 학생 두발 자유화를 선언한 바 있다.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두발 자유화로 인해 교사의 훈육에도 영향이 있었나. “법적으로 각 학교 권한에 따르게끔 돼 있지만 대만 교육부는 모든 학교에 학생의 두발 및 복장 규정을 없애도록 권장하고 있다. 학교 용모 자유화 뿐 아니라 법적으로 체벌도 금지돼 교사들이 학생 지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교육부는 ‘교사의 지도와 훈육 방법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으나 규정이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해 혼란만 가중시켰다. 결국 현장 교사들은 무력해지고 학교는 무질서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이유는 제대로 된 교육과 기강을 배우기 위한 것인데 학생 인권 침해를 이유로 제대로 된 훈육마저 막고 있는 상황이다.” -대만 정부는 2014년까지 ‘12년 무상 의무 교육’을 완전히 정착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무상 급식도 포함되는가. “아직까지는 초·중학교 9년 동안만 무상 의무 교육으로 하고 있다. 고등학교 포함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며 세부 사항은 조정 중이다. 학부모 단체 등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12년 무상교육이 말만 있고 구체적인 행동은 없었다며 정부의 조속한 실행을 촉구하고 있다. 학교 급식의 경우에는 모든 학생에게 무상으로 제공되지 않는다. 저소득 가정 학생이나 원거리 통학 학생임을 증명하는 정부확인서를 소지한 학생들만 무상 급식을 제공받을 수 있다.” -대만의 교원 양성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 “대만에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원)에서 교직 과정을 이수(고교는 26시간, 초교는 40시간)해야 한다. 교직 과정 이수 후 6개월간 교생실습과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교원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개별 학교에서 필기 시험, 면접, 수업 시연 등을 통과해야 교사가 될 수 있다. 예전에는 대만의 교사도 한국처럼 공무원 신분이었으나 시장 논리에 따라 교사들이 공·사립학교에서 자신의 일자리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실정이 됐다. 예비 교사들은 임용이 될 때까지 여러 학교를 다니며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이에 TTA는 학급당 학생수 감축, 교원양성 과정의 인원 조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대만 교육계나 NTA의 활동 중 가장 큰 이슈는. “주된 이슈는 좌파와 우파의 교육 철학의 갈등 문제다. 자유주의 전문가들은 학생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편에서는 학생들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지난 8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원장 성태제)에서 열린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정책 현황 및 전망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의 고민은 비슷했다. 호주, 캐나다, 핀란드, 영국, 프랑스, 일본과 우리나라 교육과정 전문가들은 “향후 국가 경쟁력은 교육과정 정책의 성패에 달려있다”며 “적절한 지식 전달과 행복하고 즐거운 교육과의 조화는 그러나 매우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7개국 교육과정 정책 전문가의 공통적인 고민을 정리했다. (1) 창의성, 어떻게 평가할까 영국은 2002년 1.1억 파운드를 들여 ‘창의적 학습’의 개발을 지원, 예술가들을 학교로 끌어들이는 ‘창의적 동반자제도’를 도입했다. 호주는 2008년 멜버른 선언, 프랑스도 2005년 ‘학교의 미래를 위한 방향성 및 프로그램에 관한 법률’을 통해 창의적 사고와 문화적 소양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틴 백스터 영국교육과정재단 이사는 “창의성이 미래교육의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 요소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지만 평가 문제에 봉착하면 교사들의 불만은 거세진다”며 “창의성 평가에 대한 고민은 여기 모인 사람들이 풀어야할 숙제”라고 강조했다. (2) 학교에 교육과정 자율권을 주라 마틴 백스터 이사의 “국가교육과정은 최소한의 기능만 담당하며 교육과정 개혁은 아래로부터 이루어져야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학생요구에 맞춘 융통성 있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호주, 수업시수 20% 자율 편성을 포함한 2009교육과정 개편을 주도하고 있는 우리나라 등 각국 모두 위로부터의 개혁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한 교육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핀란드 역시 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요우니 벨리예르비 핀란드교육연구소장은 “2004년 교육개혁을 통해 학년별 주당 수업 시수 편성을 탄력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며 “학교에 교육과정 자율권을 준 것이 핀란드 교육 성공의 한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3) 교사를 신뢰하라 일본, 영국, 캐나다의 대표들은 “교사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면서 공교육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캐나다 온타리오 교육연구소 장은희 교수는 “교사들은 늘어난 책임으로 인해 교수법을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며 “변화를 기다리지 말고 교사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히로시 카미요 국립교육정책연구소 교육과정연구센터장은 “교육이 정치가의 입김에 영향을 받으면서 교사의 역할이 줄어들고 공교육이 붕괴되고 있다”며 “교사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일본의 인성교육은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4) 역사, 예술, 기술, 그리고 체육 호주는 유치원부터 역사, 과학, 지리, 기술을 교육과정에 포함하고 있으며, 캐나다 온타리오 주도 영어, 수학, 과학기술, 체육, 사회, 역사지리, 예술이 초등 필수 교육과정이다. 프랑스는 감수성과 문화적 표현 능력을 국가적 표준으로까지 정해 반드시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 올 4월부터 초등을 시작으로 시행되고 있는 일본의 ‘2008 학습지도요령’은 도덕을 교육 서문에 추가하고 애국심 조성을 위해 역사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마틴 백스터 이사는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 교육과정은 결국 과거로의 회귀”라며 “생활 필수 기량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고 있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5) 다문화교육은 선택 아닌 필수 단일민족 국가로 꼽히는 핀란드조차도 다문화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 등 국제화 시대의 다문화교육은 공통 화두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요소가 되어 가고 있다. 이민자가 많은 호주와 캐나다는 다문화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다. 전체인구의 18%가 영어와 불어를 사용하는 캐나다는 물론 호주, 영국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안소니 메케이 호주교육과정평가보고위원회 부회장은 “아시아계 이민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 중국어, 일어, 인도네시아어 중 하나를 반드시 배우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석교사제의 법제화가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전교조의 반대로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전교조는 성급한 법제화를 반대하고 있다. 교장, 교감과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고, 수석교사제의 수업을 대체할 교사가 부족하다는 것이반대 이유이다. 여기에 또다른 승진경쟁을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도 하고 있다. 30년간 논의되었던 수석교사제의 법제화를 반대하는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법제화 후의 후속조치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워야 옳다. 학교현장에서 수석교사제가 시범운영되면서 어느 정도의 가시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교과부에서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가시적인 효과를 뒤로한 채 법제화 반대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승진경쟁이 더욱더 심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수석교사는 승진이 아니다. 전교조에서 주장했던 잘 가르치는 교사, 수업이 최고라는 취지에 너무나 잘 맞는 것이 수석교사제이다. 수석교사제를 왜 승진으로 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도리어 전교조에서 주장하는 공모형 교장이야말로 승진이 아니고 무엇인가. 교사에서 교장이 되는 것은 당연히 승진이지만 수석교사는 교사에서 교사로 된 것 뿐이다. 2급 정교사에서 1급 정교사가 된 것과 다름이 없다. 다만 모든 교사가 수석교사가 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 이는 교사들 중에서도 전문성이 좀더 높은 교사가 수석교사가 되는 것일뿐 승진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수석교사제가 도입되면 수석교사의 수업을 나머지 교사들이 떠 안아야 한다는 논리도 시작도 안 하고 시작되면 이런 문제가 있으니 안 된다는 논리이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수석교사제가 도입되면 나타날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문제가 있을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교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교사들의 수업전문성을 한단계 높일 수 있는 것이 수석교사제이다. 수석교사제가 도입됨으로써 현장교육의 많은 변화를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반대하는 것은 교단의 변화를 교사들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교단에서 누군가 해야 할일을 수석교사가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전문성을 좀더 신장시키기 위해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수석교사제인 것이다. 승진을 하지 않더라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제도가 수석교사제이다. 분명한 것은 수석교사제가 승진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궂은 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것이 수석교사제이다. 이런 제도를 부정하는 것은 전교조의 기본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나서서 법제화를 도와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싶다. 현장교원들 대부분이 찬성하는 제도를 왜 반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권투 시합 “얘, 너 쪼그만 게 또 까불어?” “까불다니? 네가 뭔데 이렇게 자꾸 내게 시비니?” “네가 자꾸 까부니까 그렇지.” “까불다니? 내가 너에게 뭘 어떻게 했길레 그러는 거냐?” “너 말야, 어제 오후에 친구들에게 그랬다며? 나쯤은 문제도 없다고?” “걔들이 그러던데, 날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다고 그랬다며.....” “짜아식들 그런 소릴 다 까 쳐먹었군.” “그래?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란 말이군.” “그래, 그랬다 왜? 내가 뭐 네가 무서워서 그런 소리도 못할 것 같으냐?” “그래? 결국 나에게 한 번 붙어 보겠다는 말이군!” “그래 임마! 네까짓 거 때문에 내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못난인 줄 알았다면 큰 잘못이지. 아무튼 붙고 싶으면 붙어 봐. 언제든지.” “좋아, 그럼 오늘 오후에라도 만나자. 난 뭐 네까짓 게 무서운 줄 아니?” “좋다. 그럼 오늘 오후에 하교 뒷산의 솔밭에서 만나. 한판 붙어 보자구.” 항상 말썽꾼인 경양이가 오늘도 무슨 일을 벌일 모양입니다. 덩치가 크고 힘 깨나 써 무서운 게 없는 종찬이의 이야기를 듣고 한판을 붙기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종찬이야 덩치가 얼마나 큰지 중학생만큼이나 크고 기운도 세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아이들과 별로 다투고 싸우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기어이 한 판을 붙기로 한 것은 항상 남들에게 싸움을 잘 붙이는 말썽이 경주의 장난이 작용한 것입니다. 경주는 심심해서 견딜 수 없는데다가 요즘 친구들 사이에 점점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종찬이에게 은근히 시기심이 발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양이를 부추기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얘, 경양아, 요즘에 종찬이가 은근히 주먹 자랑을 하면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아마 곧 너에게도 붙게 될 것 같더라.” “그게 무슨 소리냐?” “요즘에 종찬이가 한 사람씩 불러서 슬슬 다른 아이들과 함께 패를 만들고 있어 그런데, 네가 안 들어 올 것 같으니까 한 판 붙어서 항복을 받을 계획을 세운 것 같더라구.” “그럼 내게 한 판 붙자는 이야기가 아니냐?” “그래 너도 지고 싶지 않지?” “그럼? 나도 질 수는 없지.” 이렇게 부추겨 놓고서 이번엔 종찬이를 찾아가서 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양이가 남다르게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것이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경주에게 듣고 보니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구? 경양이가 내게 붙어 보겠다구? 제까짓 게 뭔데 날 마음대로 할려고 그러냐구? 그럼 제까지 건 뭔데 날 이렇게 깔아뭉개려고 해. 건방지게 제까짓 건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다구 그래. 내가 쪼그만 제까짓 걸 무서워 할 것 같애?” 종찬이의 성질을 건드리게 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종찬이의 이런 분한 마음에 한 이야기까지 몽땅 경양이에게 다 털어놓고 없는 이야기까지 더 보태어서 꼬아 붙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속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은 그냥 자기들의 성질들만 참지 못하고 덤벼들게 된 것입니다. 이 싸움엔 경주가 심판을 하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시간에 이 이야기는 아이들의 사이에 쫙 퍼졌습니다. 아이들은 제 각기 모여서 수군거리면서 “얘, 우리 이따가 살짜기 가 보자. 누가 이길 것 같으냐?” “그거야 뭐? 덩치가 있는데 종찬이가 이기겠지.” “야 싸움이 어디 덩치로만 하니? 경양이가 얼마나 깡다군지 넌 모르는 모양이구나. 저의 집 식구들도 아주 내 놨데. 너무 고집이 세다고.” “조용히 해. 너 그런 소리 함부로 떠들다가 경양이 한테 혼나려고 그래?” “뭐? 없는 이야기 했나? 정말인 걸.” “아무튼 이따 한번 가보자.” “그래. 얼른 청소나 마치고.” 이렇게들 떠들고 있을 때 여자아이들도 이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자 얘들은 싸움이라는 말만 들어도 말리고 싶어서 안달들이었습니다. “너희들 또 싸우려고 그러는구나? 선생님한테 일러 버릴 거야?” 여자아이들이 이렇게 안달이었지만 남자아이들은 오히려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을 하고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누가 이길까?’ 이것이 관심거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은근히 자기들을 괴롭히는데 손꼽히는 두 사람이 싸운다는 데는 누가 이기든 상관이 없이 한판 실컷 싸워 봤으면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힌 죄로 어디가 좀 터지고 부어 가지고 다니는 꼴을 좀 봤으면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만큼 종찬이나 경양이가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고 귀찮게 해왔던 것입니다. “이르긴 뭘 이르니? 우리가 누구 이야기 한 줄도 모르는 것들이 까불고 있어?” “누구든 싸우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야. 알았으면 말려야지?” “우리가 말릴 수 없는 싸움이야. 너흰 가만히 있어 까불다가 얻어터지지 말고. 가만두지 않을 걸?” “우리들에게 협박을 하는 거냐?” “아무튼 누가 그런 소릴 했다간 경양이 하고, 종찬이에게 맞을 각오해!” 이렇게 학급의 아이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이 다 알다시피 하였습니다. 다만 선생님께만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모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을 하던 것과는 달리 그래도 누구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공부가 끝나고, 청소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제각기 자기 청소를 빨리 마치고 구경을 할 양으로 열심히 청소를 하였습니다. 다른 날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깨끗이 청소를 마친 아이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슬금슬금 교문을 빠져나갔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어린이, 고무줄을 하는 여자아이들을 건드리며 낄낄거리는 어린이들로 운동장이 떠들썩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이들이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술술술술 교문을 빠져나가고 없었습니다. 학교가 산등성이를 조금 비켜선 자리를 파고들어 앉았기에 교문을 나선 아이들이 가는 길목이 훤히 내다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교문을 나서서 자기들의 동네가 있는 길목으로 나가지 않고 산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들이 눈치를 채시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비켜서 바로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길을 따라 약 100m쯤 가서 있는 길가의 풀밭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곳은 학교에서 아주 가깝지만 산이 가려서 학교도 보이지 않고, 다른 동네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이고, 뿐만 아니라 이 길을 다니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언젠가 '수풀 속의 식물들'을 공부할 때 여기로 와서 한번 공부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만이 잘 알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느새 아이들은 학급의 전체 아이들 중에서 불과 서너 명을 빼고선 모두 다 모여들었습니다. ‘이 많은 아이들의 속에서 싸움에 지는 것은 이제 영영 다른 아이들에게 무시 당하는 못난이가 되는 것이다.’ 둘은 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어이 상대의 기를 꺾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하였습니다. 특히 경양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쪼꼬만 것이 까불어!”하는 소리를 들어 왔고, 또 그것 때문에 자주 싸움을 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오늘 내가 종찬이를 멋지게 눌러 놓아야 다른 아이들도 나를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인데.’하는 생각으로 종찬이를 어디부터 공격을 할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 결코 질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싸움은 시작도 되기 전에 벌써 잔뜩 긴장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결과를 보기 전에는 누가 이긴다는 소리를 함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잘못 짚어서 싸움에 이긴 아이를 진다고 했다간 나중에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습니다. 한 학급의 아이들이 모여서 놀 수 있을 만큼의 넓이인 이 묘터에는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싸움이 시작되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싸움을 하지 말라거나, 어서 해보라는 소리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모두들 차분하게 아니 숨이 막히게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 다만 종찬이와 경양이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고, 심판을 보기로 되어있는 경주가 두 사람을 살피면서 언제 싸움을 시작하게 할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가 상대의 움직임을 눈도 깜짝이지 못하고 살피고만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덤벼들면 막을 수 있는 자세로 우선 자기를 보호할 생각을 먼저 한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경양이로선 덩치가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종찬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고, 종찬이도 경양이의 그 지독한 깡다구를 모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경주가 두 사람을 향하여 “자 이제 준비는 다 되었지? 이제 시작을 하면 마음껏 싸워 봐라. 여기 많은 학급의 친구들이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니까. 알았지?” “야! 너희들도 조금 물러 서 줘”하고선 아이들에게 조금씩 물러나도록 하였습니다. “자! 준비! 시이..” “잠깐!” 아이들은 금방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우렁찬 그 소리는 바로 선생님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꼼짝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듯이 누구 하나 무어라고 말을 하거나 움직이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차분하게 아이들의 앞으로 걸어 나오시며 “언제부터 이렇게 결투를 하게 되었어? 이거 안 되겠구먼, 아주 전교생 앞에서 결투를 하게 해줄까?”하시면서 얼굴에 웃음을 띄우셨습니다. 아이들은 조금씩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어느새 얼굴빛이 화기가 도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가만히 둘러 보시다가 “이 싸움은 누가 시킨 것이지? 경주지? 또 말썽을 부린 게? 또 심심해서 발동을 하였군. 왜 네가 싸우지 남을 싸움을 시켜? 응 아주 나쁜 사람이군!” 선생님은 벌써 다 알고 계시는 듯 경주를 지목하셨습니다. “아니예요. 제들이 싸운다 길레.” “그래? 그냥 싸운다고 그래서 심판을 보기로 했다 이 말이지?” “네.” “네에? 정말 그럴까? 한번 물어 보면 금방 알 일을 가지고 남자답지 못 하게 변명을 하려고 해?” 선생님은 싸움을 하려고 덤볐던 두 사람과 경주를 남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너희들은 같은 반 친구들이 싸움을 하려고 하면 말리는 게 아니고 구경을 하려고 이렇게 모여들어? 이게 그렇게 재미난 구경거리인가? 그렇담 여기서 짝을 지어 줄 테니까 한번 싸움들을 해 보실까?”하시면서 꾸중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꾸중을 듣고서 슬금슬금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선생님은 다시 아이들에게 “자 이제 아주 재미난 구경을 한 번 하실까? 오늘은 아주 선생님이 심판을 보아 줄 테니까 실컷 한 번 싸워 보시지?”하시면서 아이들을 빙 둘러앉게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빙 둘러 앉았습니다. 호기심도 생기고 선생님의 꾸중이 무서워서 그냥 갈 수도 없었습니다. “자 책 보자기들을 있는 대로 모두 풀러 내어라.” 선생님은 아이들의 보자기들을 모아서 종찬이와 경양이의 주먹에 간이 글로브를 만들었습니다. 책보자기들로 둘둘 말아서 풀리지 않게 해주시면서 “너희들 이제부터 30분 동안 싸움을 하는 거야! 그 대신 얼굴을 때리면 안 되고 만약 30분 동안 싸움을 계속하지 못 하면 내게 맞을 거야 알겠나?”하셨습니다. 아이들은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막상 싸움을 해야 할 종찬이와 경양이도 정말 싸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만 두고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건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또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왜 안 싸우고 있는 거야. 빨리 하지 못해?” 선생님의 독촉에 두 아이는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냥 계시지 않고, 매를 들고서 두 사람을 후려갈길 자세를 취하자 겁이 많은 종찬이가 먼저 경양이를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방을 얻어맞은 경양이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마구 덤볐습니다. 두 아이는 서로 지지 않으려고 계속 손을 내밀어 상대방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맨 주먹이 아닌 상태에서 서로가 얻어맞아도 별로 아프지도 않고, 견딜 만하였습니다. 이젠 두 아이가 서로 열심히 주먹을 갈겨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지 선생님이 정해준 30분이란 정말 엄청난 시간이었습니다. 단 5분도 못 되어서 벌써 아이들은 기운이 빠지는지 주먹을 날리는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눈치 챈 선생님이 다시 독촉을 하였습니다. “벌써 기운이 다 했어? 어서 해야지 다시는 싸움을 하지 않도록 두 사람이원 없이 싸우라고 오늘은 허락을 하였으니 안심하고 부지런히 싸워!” 선생님의 독촉이 떨어지자 다시 손을 뻗는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금방 다시 속도가 느려지곤 하였습니다. 두 아이가 붙어서 싸움을 시작한지 딱 15분 만에 두 아이는 모두 기운이 없어서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왜 더 이상 싸울 수 없단 말인가? 이제 그렇게 쓸데없는 싸움일랑 다시는 하지 않겠단 말이야?” 선생님의 물음에 두 아이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는 싸우지 않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내가 언제 싸우지 말라고 했나? 이런 쓸데없는 싸움일랑 하지 말라고 했지? 사람이 싸움을 하더라도 반드시 싸워야 할 이유가 있을 때는 싸워야지, 그러나 친구들끼리 이게 뭐냐?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이라면 얼마나 이 나라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이냐? 그런 보람 있는 싸움에서 용감히 싸우란 말야, 이런 쪼무래기 싸움일랑 웃음으로 넘길 줄 알아야 남자다운 남자가 되는 것이야”하시면서 두 아이의 손을 풀어 주면서 “약속은 잘 지켰군. 상대방의 얼굴은 때리지 않았으니.”하고 두 아이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웃음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종찬이와 경양이는 남아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좀 나누고, 나머지 너희들은 싸우는 친구를 말리기는커녕 싸우라고 시켜 놓고 구경을 하려고 했고, 이제까지 싸움구경을 하였으니 그 값을 톡톡히 해야 한다. 지금부터 여기에서부터 학교까지 산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를 모두 줍는다. 쓰레기는 한 사람이 한 아름씩 주워 가지고 교문 옆에 모여서 검사를 받는다. 알았지?” 아이들이 흩어지자 선생님은 세 사람을 불러서 “이경주! 넌 이제부터 다른 사람에게 싸움을 시키면 그땐, 아주 6학년 제일 덩치 큰 사람하고 권투시합을 시킬 거야. 알았지? 다신 그런 못 된 짓을 하지 않도록!” “예, 조심하겠습니다.” “조심하는 게 아니라 명심하라고? 알았지?” “넷.” “좋아. 넌 가봐. 쓰레기나 듬뿍 줍구.” 선생님의 꾸중을 듣고서 경주는 뒷통수를 긁적이면서 멀어져 갔습니다. “너희 둘은 교실로 와! 나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좀 해야 하니까.” 뒤에 남은 두 아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겸연쩍은 웃음을 나눴습니다.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의 쓰레기 줍는 것을 검사를 해주시고 있는 동안에 두 아이도 쓰레기를 한 아름 주워서 가지고 갔습니다. 쓰레기를 모두 모아서 불을 태우고 교실로 들어오신 선생님은 우두머니 앉아 있는 두 아이를 보시면서 “그 동안 뭘 했어?”하고 물으셨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보면서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기야? 우리 더러 교실에 있으라고 하셔 놓구서 하긴 뭘 했다고?’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시고선 “이런 못난이들 단 두 사람이 있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고 일부러 시간을 주었는데도 아무 얘기도 없었단 말이야?”하시고선 두 아이를 가까이 오라고 불러 세웠습니다. “너희들 싸운 것이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사람이 되어 가지고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자기가 다칠 줄 뻔히 알면서 싸움을 하려고 했다는 것은 너희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야. 정말 싸워야 할 일에 싸워야 해. 아까 말했듯이 육군사관학교라도 나와서 군인이 되어서 나라를 위해 싸운다든지 말야.” “김종찬! 넌 덩치가 크다고 아무나 때리고 싸움을 거는 모양인데? 그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야. 짐승이라면 힘이 센 놈이 약한 것들을 몰아내고 먹이도 빼앗아 먹고, 둥지도 빼앗고 하지만, 사람은 법이라는 게 있지 않니? 힘이란 깡패들의 세계에서나 쓰이는 법이지, 우린 법이라는 가장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지금 당장은 힘센 사람에게 한 주먹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법에 의해서 반드시 처벌을 할 수 있는 거야. 한 주먹 보다 더 크고 센 힘으로 몇 배의 무서운 벌을 주는 것이지. 또 함부로 싸움을 벌리고 약한 사람을 괴롭힐 거야?” “아닙니다. 인제 남을 안 괴롭히겠습니다.” “좋아! 남자대 남자로 약속 할 수 있지?” “네, 약속하겠습니다.” “그럼 가 봐.”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잘 가.” 종찬이가 뚜벅뚜벅 교실을 나가자 경양이를 보면서 “경양이 일로 와 봐! 난 경양이 너에게 몇 가지 할 말이 있어. 넌 가끔 어른들에게서 눈이 무섭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네에.” 경양이는 그게 무슨 큰 죄라도 되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으음, 그런 소리를 많이 들어 왔군. 더구나 그게 좋지 않은 소리로들 말이 지’하고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넌 눈빛이 무서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나쁜 인상을 주 기 쉽지. 그러니까 넌 아주 경찰이나 육사 같은 곳으로 가서 군인 생활을 하는 게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그 인상 때문에 항시 조금은 손해를 보게 되어 있으니까 앞으로 조심을 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 너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어디 가서라도 그렇게 인상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늘 웃는 얼굴을 해야겠다.” 경양이는 늘 이런 소리를 들어 왔던 것을 생각하면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난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할 것, 그리고 경찰이나 군인으로 나가서 활동을 할 것, 그리고 항시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 것 등을 잊지 말고 실천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다짐을 하여 보았습니다. 최근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이 군인이 되라던 아이는 지금 목사님이 되어서 돈독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땡, 땡, 땡." 자정 종소리와 함께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듯, 밤 0시부터 오전 6시까지 16세 미만 청소년들의 온라인 게임 접속을 자동 차단한다는 것이 바로 신데렐라법(셧다운제)이다. 이 법은 현재 여성가족부가 발의한 상태이며 활발한 의견수렴을 거쳐 조만간 제정될 전망이다. 이 같은 법이 발의된 것은 청소년들의 무분별한 게임몰입과 중독증상이 해가 갈수록 심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에도 청소년들의 게임 과몰입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시간이 지나면 게임접속시간을 알려주거나, 접속자의 피로도 등을 경고해주는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으나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리포터는 얼마 전 김제의 마늘밭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인터넷불법도박으로 벌어들인 110억원이란 거액을 마늘밭에 묻었다가 들통난 사건을 보며 인터넷게임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깊게 파고들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리포터도 가끔 무료한 생각이 들 때면 인터넷게임사이트에 접속해 바둑이나 오목을 두곤 한다. 리포터 생각엔 분명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접속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어느새한 두시간이 훌쩍 지난 것을 알고 깜짝 놀라곤 한다. 그만큼 인터넷게임이 재미와 스릴이 강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자제력과 인내력이 꽤나 강한 편인 리포터도 이럴진대 하물며 아직 미성숙한 청소년들이 인터넷게임에 접속했을 경우 그 중독성은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요즘 은둔형 외톨이, 사회 부적응학생, 자살자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인터넷게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것이 리포터의 추측이다. 학교와 집만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왔다갔다하던 리포터의 학창시절과 요새 청소년들의 생활을 비교해 보면 요즘 아이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무한한 정보와 각종 오락 및 스릴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니격세지감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치면 해롭듯이 청소년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라도 신데렐라법은 꼭 필요하다는 것이 리포터의 생각이다. 혹자는 신데렐라법이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게임산업 종사자들의 영업을 방해한다며 결사 반대를 표방하기도 한다. 또한 신데렐라법은 이미 베트남과 태국 등지에서 실시했으나 청소년들이 해외 게임 서버에 접속해 게임을 즐기거나 남의 아이디를 도용해 게임을 계속하는 등 실효를 거두지 못해 결국 사문화했다고 주장한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마다 늘어가는 방대한 온라인게임과 도박 및 음란사이트, 그리고 이러한 사이트를 제재할 마땅한 현실적 방법이 없는상황에서 신데렐라법이야말로 유일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리포터의 생각이다. 우리 기성인들은 청소년들이 좀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보살필 의무가 있다. 청소년들은 우리 다음 세대를 책임질 소중한 인재들이요 국가의 동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건강과 보다 낳은 삶의 여건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 어떤 방법이라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실행해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청소년들의 기본권과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처사가 결코 아니며 그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보살핌이기 때문이다.
수업은 교사의 생명이다.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는 말이 있다. 예전의 수업 방식은 “오늘은 교과서 제3장, 토론의 중요성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모두 책 59쪽을 펴 보세요”식의 진부한 시작이었다. 지금도 변함없이 이런 교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자보다는 “마가렛 대처 수상, 클린턴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두들 학생 시절 학교대표 토론 선수들이었습니다. 토론은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요? 오늘 같이 공부해보겠습니다”식으로 의외성 있게 시작하여 보는 것은 어떨까. 선생님들은 수업에 자신감 있게 학생들 앞에 서야 한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는 많은 경우 대중 앞에 서면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미덕을 중요시한다. 즉, “제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많이 부족하지만, 여러분보다 몇 년 먼저 공부를 했으니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식의 표현으로 강의를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교수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금물이다. 강의는 사람들에게 ‘이 강의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꼭 들어야겠다. 내게 큰 도움이 되겠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래야 학생들의 학습동기(motivation to learn)가 향상되어 배움이 잘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어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경우, 학기 초 첫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학기 말에 학생들이 할 수 있는 표현을 미리 유창하게 시연해 보이는 것도 효과적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이 수업을 통해서 선생님의 수업을 충실하게 들으면 자신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지를 느끼게 된다. 이럴 때에 학습 동기는 자라나게 된다. 이런 수업이 그러 쉽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먼저 수업을 멋지게 하는 선생님들은 어디가 다른가를 잘 관찰하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수업을 공개하는 선생님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전에는 수업을 공개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교원의 능력개발 평가에 학부모들의 참여가 시작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선생님도 배우지 않으면 어려운 시대이다. 수업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교사가 질문하고 선생님이 답하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이 질문하고 선생님이 답하고.. 명강의를 위해서는 강의실 커뮤니케이션 (instructional communication)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기”, “학생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강의하기”, “자신의 말로 이야기하듯”,“학생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가 기본”이며, “목소리의 빠르기, 크기, 높이, 길이, 쉬기, 힘주기에 유의할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을 전문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초등학생이 공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을 택하고, 꿈 많은 청춘 시절 학업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명문대 학생이 목숨을 포기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바늘 구멍만한 취업 문제로 인하여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들이 극단적인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기성세대와 그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가 아닐런지? 한 석학은 이같은 시대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솔직한 고백을 한 것을 들었다. 학생 자살이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갈수록 학업에 대한 중압감이 가중되고 있는데, 우리의 비뚤어진 교육현실이 자살을 불러일으킨 요인이 되고 있다면 교육정책이나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심도 깊게 분석하여 이에 대한 처방전을 내려야 한다.이를 바라본 전문가들은 이같은 자살 사건은 개인과 가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라며 정부가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초등학생 등 10대 초반의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라는 것이 한 연구기관의 보고이다. 서울의 초등학교 5~6학년생 15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80% 정도가 학원수업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어고나 과학고 같은 특목고 입시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특목고 입시를 위한 별도의 학원에 나가는 초등학생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우리 사회는 다원화되고 있지만 아직 청소년 사회는 다원화되지 못한 채 성적이라는 하나의 가치만 강요받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가 노력을 많이 하고 있지만 파급효과는 매우 느린 속도를 내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이같은 문제가 한때 심각했지만 국립대의 특권을 폐지하는 등 대학 개혁을 통해 서서히 해소해 가고 있다. 우리 나라도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여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뢰형성에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사회가, 일부 욕심 많은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정신적 탄력성을 부여하지 않은 채 영재교육을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영어교육을 비롯한 어릴 때부터의 과도한 경쟁은 아이들을 주눅들게 만들고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어른들의 욕심이 아이들의 상심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떼어내야 할 책임은 이 시대의 어른들이 갖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치유의 열쇠일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차세대 NEIS 사업을 위해 총 1711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2014년까지 운영 인프라 구축, 업무 프로그램 개발, 대국민 서비스 확대 등 18개 과제를 완료할 계획이며 작년에 나이스 노후 장비 교체와 정보 자원의 효율성 증가시키고 사업 예산 절감을 위해 삼성SDS컨소시엄에 의뢰하여 기존의 나이스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했다. 차세대 NEIS는 오류로3월 적용 초기에 실제적으로 운영이 되지 못했다. 너무나 많은 오류로 인해 도내 학교 오류 접수 건수가 100건이 넘는다는 보도가 발표되었고 학교 현장에서는 3월의 학교 교육과정 운영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다. 오류투성이인 허울 좋은 차세대 NEIS의 문제점은 기존 프로그램과 호환이 되지 않는 부분과 서브의 다운 현상, 응용 프로그램의 오류, 오류를 처리하기 위해 삼성SDS컨소시엄 개발팀에 직접 접수하여야 처리되므로 오류 처리 기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업무포털 시스템에서 나이스 화면으로의 전환에서 시스템 다운현상 등으로 교사들이 곤혹을 치르고 있다. 이와 같은 교육 현장의 어려움을 발생시킨 이유는 차세대 NEIS의 전국적인 3월 적용이 문제점이라 하겠다. 예전 나이스의 적용에서도 교육 현장에서는 전면 도입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떤 완벽한 시스템이라도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운영하면 오류와 에러로 인해 정상적인 교육과정 운영에 차질이 발생하는 것을 모두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세대 나이스 또한 작년 개발을 완료하고 준비를 하였지만 올해 3월 바로 전국적 적용은 교육현장을 힘들게만 하는 책임 없는 교육정책이라고 판단된다. 예전의 나이스 적용처럼 시범학교 운영 확대를 통해 1년간 미리 시범적으로 적용하여 오류와 에러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다음 해에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교원의 업무 경감과 교육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단독 서버 또는 그룹 서버로 운영되는 3600여대의 서버가 시·도교육청 단위로 통합되어 운영비 절감, 학부모와 학생들은 인터넷 상에서 손쉽게 성적과 출석·결석 정보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녀 교육에 관한 알권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3월부터 지금까지 교원의 업무 부담 가중, 교육행정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마침내 차세대 나이스 업무를 맡은 선생님이 관사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유족들에게 조의를 표하며 오류가 많아 업무가 진척되지 못하게 한 차세대 NEIS가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다 주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교과부도 3월 이전에 시범 운영을 마쳐 시스템의 안정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지적하지만 삼성SDS측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과부가 관리와 감독을 강화하여 3월 이전에 시범 운영을 마칠 수 있도록 관리해야 했다. 또한 오류가 많다면 운영 시기를 늦추어야 했으며 시범 운영 기간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않은 것도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전국의 지역교육청이 교육지원청으로 바뀐지 벌써 1년여가 지났다. 당초 목적은 교육지원의 기본 취지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선적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의욕적으로 추진되는 듯했지만 서울의 경우는 고등학교도 교육지원청의 관할로 들어오면서 도리어 업무가 가중되었다. 시교육청 소속에서 지역교육지원청 관할이 된 것이다. 모든 고등학교가 다 바뀐 것은 아니지만 많은 고등학교들이 지역교육청으로 들어왔다. 원래 지역교육청을 교육지원청으로 바꾼 것은 학교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교육지원청으로 명칭만 변했지, 달라진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지시일변도의 공문, 보고하라는 공문을 쏟아내는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장학사들의 성향에 따라서는 기본적으로 지원청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종전의 교육청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학교교육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학교교육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도 많다. 촉박한 일정으로 공문보고를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어쩌다가 단 하루라도 제 날짜에 공문을 보내지 못하면 학교에 연락을 해서 빨리 보낼 것을 종용하고 있다. 공문 도착이 늦어지면 장학사들은 반드시 교감에게 연락을 한다. 때로는 교감들을 언짢게 하는 경우까지 있다. 담당부서가 어딘지 명확함에도 교감에게 연락을 하고 있다. 담당부서를 명확히 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교감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업무도 교감을 찾아서 마치 교감에게 지시하듯이 하는 것은 교육지원청에서 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어쨌든 일정을 정해놓고 공문을 보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학교를 교육기관으로 보지 않고 하위 교육행정기관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수업을 팽개치고 공문보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 간혹 발생하기도 한다. 국정감사 때가 아님에도 학교에 독촉하는 공문들이 많다. 그것이 과연 옳은 방법인가 따져보고 싶다. 언제까지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데, 왜 보고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보고 날짜는 교육지원청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것일뿐, 일선학교와 단 한 마디라도 상의한 적이 있는가.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그날까지 제출인데 왜 제출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물론 이런 현상이 교육지원청에서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교육청의 지시에 따르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학교를 하위 교육행정기관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장학사들이야 그런 업무와 분위기에 익숙해 있을 수 있지만, 일선학교 교사들은 그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다. 도리어 수업을 하는 것에 익숙해 있을 뿐이다. 교육지원청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서는 지원청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뿐이다. 학교교육을 도와주어야 하는 교육지원청, 어느 것이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교육행정체제의 개편이 필요하다.교육지원청이 어차피 학교교육을 지원해야 하는 위치라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학교를 어렵게 하고 무조건 교감만 찾는 이런 행태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 일선학교 교사들에 비해 교감의 길이 보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을 학교에 지시하면 따른다는 생각을 버려야 진정한 지원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루빨리 지원기능을 갖춘 지원청의 모습을 보고 싶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무언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얼른 메모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런 아이디어는 순간적으로 떠올랐다가는 금새 사라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놓친 고기가 더 크다'고 했던가? 그 사라져 버린 생각을 다시 생각이 난다면 싶은 아쉬움이 한동안 떠돌 때가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새 학년의 선물로 이런 메모장을 마련해주고 멋진 메모를 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혀준다면 자녀는 평생 활용할 수 있는 생활의 지혜를 하나 몸에 지니게 될 것이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닌 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늘 메모를 해두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는 60이 넘은 필자는 아직도 가끔은 메모를 버리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는 것이 아쉬워서 지난해 가을에는 '메모의 기술'이라는 책을 사서 읽으면서 새로운 메모법을 익히려고 노력을 한 적이 있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고 보니 메모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런 순간적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멋진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으나 마나 생각이 날 때 곧 메모를 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메모할 수 있는 도구를 항상 지니고 다니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하자, 막상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을 하고 메모를 해두었는데,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왜 그것을 적었는지 무엇에 쓸 생각을 했던 것인지를 기억해 내지 못해서 결국은 폐기하고 마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은 그렇게 좋은 생각을 잘 기록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우선 멋진 아이디어를 잊지 않고 메모하는 버릇을 들이는 방법부터 생각해보자. 가장 먼저 항상 메모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옷을 입으면 항상 메모장이 주머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러면 가장 가까이 늘 지닐 수 있는 곳은 와이셔츠의 호주머니이다. 너무 많은 용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명함 크기의 조그만 종이를 몇 장 준비를 해 가지고 다니면 된다. 그렇게 작은 메모장이 쓰기 편하고 또 이용하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필기도구와 메모지를 늘 가지고 다니면서 생각이 나면 적어 놓는 숩관을 들이면 가장 편하고 쉽게 메모하는 버릇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사무실이나 집안에도 늘 메모할 수 있는 준비는 해두어야 한다. 우리 집에는 화장실에 작은 수첩과 볼펜이 화장지 곁에 걸려 있다. 이곳은 우리가 사색을 하는 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이며, 양손이 자유스러운 곳이다. 생리적인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는 만족을 얻는 순간에 우리 머릿속에서는 순간적으로 멋진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알키메디스가 목욕탕에 몸을 담그는 순간에 알키메디스의 원리를 발견하였듯이 말이다. 다음으로 나중에 분명히 쓸 수 있는 메모가 되도록 적어 두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메모를 하는 방법은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쓰고 나서 반드시 이것을 어디에 어떤 용도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것도 간단하게나마 메모를 해두어야 나중에 다시 실수를 하지 않는다. '빨간 장미 00상회 옆집 - 꺾꽂이용 가지를 주기로 했음 : 3월 말' '설날 아가가 때때옷을 안 해줬다고 토라져 옆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벽에 줄을 그으며 들어감)- (어린아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동화용)'라고, 쓰고 놔두어도 언제 어디에서나 분명하게 이용을 할 수 있는 멋진 자료가 되어줄 것이다. 위의 예문들은 내가 메모하여서 실제로 이용했던 것들이다. 항상 메모하는 습관을 지니는 것은 자신의 성공요인을 80% 이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고 한다. 메모를 하면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다든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리 준비할 수 있고, 아이디어를 개발하는데는 가장 필요한 요소라는 것을 안다면 자녀에게 가르칠 중요한 습관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조그맣고 별 볼일이 없는 듯하지만 이렇게 새 학년이 되면 자녀에게 무엇인가 좀 다른 무엇이 하나라도 익히고 발전시키는 기회가 되도록 준비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쫓겨난 무덤들 “여보시오. 김 교수, 이거 아주 조그만 성의니 받아 두구려!” 한 사장의 은근하고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유혹의 손길은 이렇게 뻗쳐 왔습니다. 김 교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 자존심을 내세워서 자신의 인격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이 재벌과 적당히 손을 잡고서 세상이 돌아가는 데로 흘러가고 말 것인가를 마음 속에서 결정하려 했습니다. 여우 같은 한 사장은 벌써 이런 눈치를 알아차리고서 또다시 손길을 뻗쳐옵니다. “김 교수, 이거 별 뜻이 담긴 것은 아니오. 그 흙단지가 얼마나 값진 것이라고 내가 그걸 욕심내서가 아니고, 다만 나의 이름으로 남기고 싶은 저 익운(새털구름이라는 뜻을 지닌 한 사장의 호이자 자신이 수집한 각종 문화재를 진열하여둔 개인 박물관)에 골고루 갖추어 두고 싶은데, 마침 이곳에서 이런 것이 나왔다니 반가워서 그러는 거라오. 조그만 것이오 받아두구려.” “한 사장님, 저의 사정을 좀 보아주십시오. 사실 저도 전국적인 발표와 이 조그만 항아리의 문화재적 가치만 아니라면, 아예 그냥 드리고 싶습니다. 제 발 40여 년을 쌓아온 학문의 길을 지킬 수 있도록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김 교수가 사정을 하며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애걸하듯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장의 끈적끈적한 시선은 김 교수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을 깡그리 다 읽고 있다는 듯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차근차근히 말을 합니다. “김 교수, 내 김 교수의 사정을 다 알고 있습니다. 요즘 딸아이의 혼수를 장만할 돈이 필요하다는 거 들어서 알고 있는데, 이거 조금 모자라면 내가 나머지를 책임지리다. 내가 뭐 안 되는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발굴된 저 토기들을 내게 주는 게 아니라, 나의 박물관에 진열하게 해달라는 거 아니오. 자,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구려. 그리고 내 이거 그냥이라도 드리고 싶었던 것이니 일단 받아두구, 정 마음이 편치 않을 때는 돌려주어도 좋겠오. 자 그럼 난 바빠서 이만.” 한 사장은 총총히 다방을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아!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이렇게 검은 돈 인줄을 알면서도 내 앞에 닥쳐 있는 일들이 나의 명예와 인격까지도 팔라고 하는구나.’ 김 교수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길게 소리를 내어서 내뿜었습니다. 김윤근 교수하면 우리나라의 역사학도들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국민들도 다 아는 고고학의 권위자이십니다. 그는 구석기시대 유물의 발굴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적어도 3만 년은 더 오래된 것으로 증명이 되었고, 그러므로 해서 우리 역사를 깎아 내려서 자기들보다 훨씬 역사가 짧은 나라, 그러니까 자기들의 문화와 역사를 따르고, 자기들의 지배를 받음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해오던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어서 온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역사학자입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닥쳐 있는 일이 많은 돈을 요구하는 일이고, 더구나 딸자식의 결혼식에 필요한 돈이니 안 쓰고 견딜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것쯤은 잘 알고 있는 김 교수입니다. 그러니 더욱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김 교수라면 아마도 한 사장이 내민 돈 봉투를 집어서 한사장의 얼굴에 던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참을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 있던 김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탁자 위에 놓인 돈 봉투를 집어서 속주머니 깊이 쑤셔 넣으면서, 혹시 누가 보고 있지나 않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살폈습니다. 아무도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는 안도의 한숨을 들이쉬며 다방 문을 나섰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고, 검은색 고급 세단의 뒷자리에 깊숙하게 파묻혀 있던 한 사장은 전화기의 스위치를 올리며, “네에, 한솔그룹 한이요”하자, 저쪽에서 반가운 듯한 밝은 목소리가 울려 왔습니다. “사장님, 저 박입니다. 지금 김 교수가 나가는데 봉투를 소중히 넣으면서 누가 보지 않나 살피기까지 했습니다. 성공하신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으음, 알았네. 어서 자네는 돌아가게. 이 일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네, 사장님. 제가 어디 함부로 입 벌리는 사람입니까?” 한 사장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자기가 아무리 훌륭한 학자라고 하더라도 지금 자식의 결혼을 앞두고 한푼이 없어서 쩔쩔매는 처지에 어쩌지도 못하겠지.’ 섬진강 물이 발원하여 약 16㎞를 달려오다가 구비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산골에 조그만 들판을 이루어 놓은 율어면이 있습니다. 이 면의 남동쪽 끝에 조그만 산골이 분지를 이루어서, 굽이굽이마다 산기슭을 따라 조그만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동 들판이 있습니다. 이 들판의 동쪽 산기슭에 한 골이 있고, 마을에서 산줄기를 따라 몇 백 m를 내려와서 산기슭에 널따란 벌판을 이루는 곳에 이형국 씨의 개간지가 있습니다. 한창 새마을 운동이 벌어지던 60년대에 이곳에 터를 잡고 국유지이지만 개간 허가를 받아서 일구어 사과와 배를 심어 조그만 과수원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국 씨가 사과밭에 거름을 주려고 나무 주위를 약 두자 깊이로 파고 있을 때 괭이에 딸그락거리며 무슨 그릇이 걸렸습니다. 형국 씨는 일을 하다가 잠시 허리를 쉬면서 무엇이 걸렸을까 하고 괭이로 살살 땅을 긁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괭이에 무슨 그릇 같은 것이 걸려 한 조각이 깨어져 나왔습니다. “이게 뭐야 ?” 형국씨는 다시 조심스럽게 그곳을 파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생전 처음 보는 조그만 흙 항아리가 나왔습니다. 밑받침이 약 5㎝ 정도나 되게 높음직 하고, 네 군데에 네모난 창 모양의 구멍이 뚫린 것이 아무리 보아도 요즘의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릇의 모양도 요즘의 것보다 약간 허리 부분이 굵고, 주둥이 쪽도 제법 높게 만들어진데다가 위쪽은 넓게 퍼진 모습입니다. 그러나, 형국씨는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남의 무덤을 파헤친 것이 아닐까 ?”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항아리를 사과나무 밑에 놓아둔 채로 나머지의 나무들에게 거름줄 구덩이를 다 팠습니다. 아직 이른 봄볕이 따사롭게 내리 쬐었지만, 하루의 일이 끝날 무렵에는 구름에 가린 하늘에서 비라도 뿌릴 듯 찌푸렸습니다. 형국씨는 그릇을 집으로 가지고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남의 무덤에서 나온 것을 집안에 들여다 놓기는 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이 지나도록 형국씨는 이 일을 잊은 채로 과수원을 가꾸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냥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딸 은화가 우연히 과수원에 나와서 아버지의 일을 돕는다고 하다가 이 항아리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이거 어디서 나왔어요 ?” “으응, 그거 거기 그 나무 밑에서 나왔는데, 아마도 거기가 누구 무덤이었나 보구나.” “아버지, 그럼 여기 좀더 파 봐요. 이런 것은 우리가 배우는 역사 시간에 많은 참고가 된데요. 우리 선생님은 옛날 사람들이 쓰던 화살촉이랑 그릇 같은 것들을 잘 모아서 가지고 다니시면서 공부시간에 우리에게 보여 주었어요.” 형국 씨는 딸아이의 부탁을 거절 할 수가 없어서 그러자고 나서서 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 조심하셔요. 무슨 소리가 났어요.” 은화가 소리를 치면서 가까이 덤벼들었습니다. “조심해라. 어디 내가 팔 테니까 넌 조금 기다려라.” 형국씨가 조심스레 땅을 파자 또 그릇이 나왔습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른 그릇이 세 개 더 나왔습니다. 한 개는 길쭉하게 생겼는데 모양은 거의가 비슷하지만 길이가 다르고, 약간 더 넓고 좁은 차이만 있었습니다. 은화는 그것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다가 물로 깨끗이 씻고 잘 닦아서 한쪽에 잘 간수를 하였습니다. 형국 씨는 그런 그릇을 방안에 들여놓으면 재수없다고 밖에다 내어놓으라고 하였고, 언니들은 귀신이 붙은 무덤에서 나온 물건이라고 무섭다고 하면서 “얘는? 너 그걸 뭐 하려고 그렇게 잘 모셔두는 것이냐? 어서 가져다 던져버려! 네가 안 가져다 버리면 우리가 가져다 버릴 거야”하고, 싫은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은화는 이것이 비록 무덤에서 나왔을망정 우리가 공부하는데 직접 보고 배울 것이라고 한사코 버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아무리 공부 시간에 쓸 것이라고 하여도 온 식구가 싫다고 하니 어쩔 수없이 밖에 내어다가 헛간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이튿날 은화는 그릇들을 잘 챙겨서 보자기에 싸 가지고 학교에 가지고 갔습니다. 식구들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가면서 가지고 가는 은화는 선생님이 귀중한 것이라고 칭찬이나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선생님도 이런 걸 어디서 주워 왔니? 하고 꾸중이나 하면 나는 이걸 어떡 하지?’하는 걱정도 되었습니다. 은화는 조심스럽게 선생님께 싸 가지고 온 그릇들을 보여드렸습니다. “선생님, 이런 것들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얘! 은화야, 이런 것이 어디서 나왔니? 이건 아주 오랜 옛날의 물건들 같은데? 아마도 이건 신라 초기나 그보다 더 오랜 가야시대쯤의 그릇인 것 같구나.” “잠시만 기다려 보아라, 이거 한번 찾아봐야겠구나.” 그릇들을 소중히 잘 간수하고서 학교 뒤에 있는 사택으로 가셨습니다. 잠시 후, 선생님은 대백과 사전을 가지고 오셔서 여러 가지 그릇의 모양이 있는 곳을 찾으시더니 “으음, 바로 이거군. 은화야, 이리 와봐”하고 은화를 불러서 책의 사진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그릇의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중에서 두 개의 그릇을 짚으시면서 “자, 보아라, 이 그릇들은 바로 이런 모양이 아니냐? 이 그릇들은 가야시대의 것들이고, 여기 이것들은 삼국시대, 그러니까 통일신라 이전의, 그릇들이라고 되어 있지 않니? 그래서 이것들은 아마 그 시대의 그릇인 것 같구나”하시면서 무척 반가워 하셨습니다. 은화는 선생님께 그 그릇들을 학교에 가져오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이구, 고마워라. 우리 은화가 아니었더라면 이 귀중한 문화재가 그만 박살이 나서 쓰레기가 될 뻔 하였구나?”하시며, 은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은화야, 이건 우리가 그냥 갖고 있을 물건이 아니란다. 이걸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서울에 있는 유명한 학자에게 알려 주어야 그 분들이 이걸 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게 되는 것이란다”하고 학급의 아이들에게 그릇을 보여주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라면 우리 고장은 모두 옛날 백제의 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본 이 그릇들은 어쩌면 이곳이 백제의 땅이 되기 훨씬 전에 벌써 가야의 땅에 속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이 그릇들을 서울의 대학교수님들께 알려서 좀더 자세한 것을 알아보아야겠지만.” “여러분, 이 그릇들은 아주 오랜 옛날의 무덤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은화가 아니었다면 이것들이 그냥 버려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을 함부로 보고 아무렇게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은화처럼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들을 잘 기억하고 지키면 이런 귀중한 자료를 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은화는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모두 전하자 아버지도 매우 기뻐하시면서, “우리 은화가 아주 훌륭한 일을 했구나. 그런데 그것도 이 아빠 덕분이라는 것은 잊지 말아라”하고 뽐내는 시늉을 하시더니 “참 그보다 선생님이 더 훌륭하시구나. 너에게 그처럼 칭찬을 해주시고 또 그렇게 아는 것이 많아서 너희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쳐 주셨구나”하고, 말씀을 하시자 은화는 자기가 칭찬을 받은 것보다 선생님을 칭찬해 주시는 것이 더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몇 달이 흘러가고 여름방학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동안에 그릇에 관해서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는데,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나서 갑작스럽게 선생님께서 은화네 집에를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늙수룩한 손님을 한 분 모시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손에 조그만 상자를 하나 들고 오셨습니다. “은화야, 아버지 집에 계시냐?” “예, 아버지 저기 과수원에서 일하시고 계시는데요.” “음 그래, 그럼 우리가 그리로 가지.” 늙은 신사 분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편지에 썼던 그 고마운 아이 입니다.은화라고 하는데, 가정은 어려워도 구김살이 없고 도회지 아이들과 달리 집안일도 잘 도와드리고, 예절도 바른 아이입니다. 자! 교수님께서 사오신 선물이다.” 선생님께서는 선물을 맡기면서 은화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똑똑하고 야무지게 생겼군. 너의 덕분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구나. 고맙다. 우리 어린 학생이 우리 역사를 다시 찾는데 크게 공을 세웠어.” 은화는 어깨가 으쓱하도록 기분이 좋아서 앞장을 서면서 “제가 아버지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릴께요”하고, 집 뒤를 돌아서 안내를 하였습니다. 저만큼 산비탈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은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버지, 선생님이 손님을 모시고 오셨어요.” “은화아버지 일하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울에서 교수님이 오셨어요.” “서두르지 마세요. 저희가 그리로 올라 갈 테니까요.” “거기들 계십시오. 제가 내려갈께요. 그릇이 나왔던 곳도 거기 집 가까운 곳이어요.” 은화아버지가 서둘러 내려오시자, 교수님과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서 계셨습니다. “알려드렸던 은화 아버지이십니다.” “은화 아버지 서울에서 오신 김윤근 교수님이십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하신 교수님이시고,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전 번에 그 그릇을 직접 보시고 또 그릇이 나온 곳을 확인하시고 싶으시다고 이렇게 오셨습니다.” “이 산골까지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김윤근입니다. 귀중한 물건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차분하게 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선 땀을 좀 식히시고 말씀을 드렸으면 하는데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 그늘이 좀 나을 것입니다. 은화야, 여기 앉으시게 멍석이라도 좀 깔고 시원한 냉수라도 좀 떠오너라”하며, 우물가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올려서 시원하게 씻는 모습을 보고 김교수도 나서시며, “그 물이 참 시원해 보입니다. 나도 물 맛 좀 봅시다”하고, 우물가로 다가 가셨습니다. 두 분이 정답게 물을 퍼주고 부어 주면서 손을 씻고 얼굴에 물기를 하시고서 멍석을 깔아 놓은 그늘에 마주 앉았습니다. 선생님은 교수님이 사오신 양주병을 가져오면서, “은화에게 저기 오이 밭에 가서 오이를 두어 개 따다가 씻어 오너라”하고, 술상을 간단히 차리게 하였습니다. 이제 국민학교 6학년이지만 은화는 집안 살림을 거의 하다시피 하는 아이라서 하나도 망설임이 없이 척척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한동안 서울의 이야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시던 교수님과 은화아버지는 월남에 간 우리 국군의 이야기로 옮아갔습니다. 은화아버지는 돈을 많이 번다는 꼬임에 은화 오빠가 월남에 가겠다고 한다고 한숨을 쉬시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 교수님은 자기 친척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을 하시더니 은화 오빠가 2대 독자이니 증명을 떼어서 붙이면 안 가게 될 것이라고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두어 시간을 이렇게 정담을 나누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하시다가 드디어 여기 오신 목적을 이야기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은화 아버지께서 저 그릇들을 발견하셨다는 곳이 어디인지 좀 알고 싶군요. 지금 저 그릇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인데, 더구나 이 지방에서는 나오기 힘든 것이란 말입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이 모양의 토기는 가야의 옛터인 경상남도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발견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고장에서 이런 것이 나왔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 되는 것이예요. 어쩌면 이 고장의 역사가 바뀌고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이 고장의 옛날 소속이 바꾸어지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로서는 매우 뜻깊은 발견이 되는 것이랍니다.” “우리 같은 농부가 무엇을 알겠어요. 그냥 땅을 파다가 그릇이 나와서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고 버리려고 했는데, 저 꼬마가 글쎄 선생님의 얘기를 기억하고서 꼭 가지고 가겠다고 하여서 보내드렸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귀중한 자료를 그냥 버리지 않고 신고하여 주셔서 우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곳을 좀 살펴보도록 하였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그럼 가시죠. 제가 안내를 하여 드리겠습니다.” 은화아버지는 교수님과 선생님의 앞장을 서서 과수원으로 안내를 하셨습니다. 세 분은 과수원의 가운데쯤에 있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 곁으로 다가가서 멈추어 섰습니다. “여기입니다. 이 나무밑을 이렇게 파는데 요 부분에서 처음 그릇이 나왔어요. 그 다음에 저 녀석이 파 달라고 해서 여기서 여기까지 팠더니, 요쯤에서 길쭉한 항아리가 나왔고, 저기에서 납작한 그릇이 나왔어요.” 손짓을 하여 가면서 설명을 하자 교수님은 수첩을 꺼내어서 대략의 그림을 그리면서 그릇이 나온 자리들을 표시하고, 간단히 그릇의 모양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줄자를 꺼내어서 그릇이 나왔다는 자리에 표시를 하고서 그릇들 사이의 거리를 재어서 적어 넣었습니다. “여기에서 뭐 조그만 것이라도 다른 것은 안 나왔습니까?” “예, 다른 것들은 별로 나온 것이 없었구요. 약간의 부스러기가 나왔지만 우리가 뭘 알아야죠. 그냥 쓸어 묻어버렸지요.” “그럼 여기에 그냥 묻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겠지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묻어버리고서 그 뒤로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어디 거기를 한번 파 보도록 합시다. 제가 파겠습니다. 삽과 호미를 좀 빌려 주시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은화아버지는 곧장 집으로 내려가서 삽과 괭이, 호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저를 주십시오. 제가 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팔 터이니 가르쳐만 주십시오.”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참고가 되는 것이 있을는지 모르니까 제가 차근차근 파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묻었으니 제가 파야 잘 알고 팔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제가 부탁을 드리는 만큼만 파 주십시오. 그것들이 묻힌 만큼만 파시고서 제게 주십시오. 우린 이런 일이 직업이니 파는 것쯤은 문제가 없습니다.” 은화아버지가 윗 부분의 흙을 파내고 속의 흙을 파기 시작하자, 교수님은 바짝 붙어 앉아서 나오는 흙의 모습을 세심히 살피고 계셨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제가 파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손을 내어 저으면서 호미를 들고서 구덩이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그때부터 꼬박 사흘 동안이나 구덩이에서 호미로 흙을 긁어내면서 조심조심 파내려 갔습니다. 그 동안에 조그만 그릇 조각과 다 부스러진 쇳조각이 몇 개가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사흘 동안의 작업의 결과는 아무 보잘것없는 것들이 약간 나왔을 뿐이었지만 교수님은 “이 다음에 겨울방학을 하면 학생들과 함께 와서 며칠 간 발굴작업을 해보겠습니다”하는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가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이 지난 다음에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이 고장 은화네 집에서 발견된 토기의 사진과 함께 자세한 이야기가 커다랗게 실렸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가야의 유물이 뜻밖의 고장에서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이동리에 있는 이형국(48세 농업) 씨의 과수원에서 가야시대의 것이 분명한 토기 3점이 지난 3월 하순에 과수에 거름을 주기 위한 구덩이를 파다가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의 권위자인 김윤근(서울 가락대 교수) 박사에게 감정을 의뢰해와서 조사를 하여본 결과 밝혀진 것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이 그릇들은 서남방을 향하는 전형적인 가야시대의 무덤 형태를 지닌 고총에서 발굴되었는데, 이 그릇들이 발굴되므로 해서 역사적으로 백제의 영토라고 생각해왔던 이 고장이 가야의 땅이었으리라는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이 그릇을 발견하고 그냥 버리려고 했던 것을 어린 국민학생인 딸 은화(12세:국교 6년생) 양이 한사코 보관을 주장하고, 학교에 가져와 학습자료로 제출한 것을 담임 선을수(38) 교사가 김 교수에게 감정을 의뢰하였고, 김 교수는 지난 23일부터 3일간에 걸친 현지 답사와 발굴을 해본 결과를 밝힘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신문의 기사를 들고 은화네 집으로 달려온 담임선생님은 은화를 불러 기사를 읽어주며 “우리 은화가 착한 일을 해서 신문에까지 났구나, 축하한다. 은화야”하며 은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한편으로 이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 여러 곳에서 김 교수에게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고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은 자세한 기록을 알고자 하는 사람, 직접 그 그릇들을 볼 수 없느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에 유독 관심을 가진 사람이 바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 한솔그룹의 회장이고, 익운박물관의 설립자인 한창달 씨였습니다. 그는 곧장 비서실장을 불러서 “이 실장, 이 기사 읽어보았오. 지금 이 기사를 읽어보니 그곳에 가야의 유물이 더 있을 것도 같은데, 한 번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김 교수를 만나서 그 유물을 우리 박물관에 둘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보시오. 돈은 얼마든지 낸다고 하시오“하고, 명령을 했습니다. “네, 염려 마십시오. 우리 박물관의 고문이신 강교수님과 함께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실장은 곧장 강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김교수와 만날 수 있게 주선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실장과 함께 자리를 갖자는 것입니다. “이 실장, 나 강 교수요. 지금 김 교수와 전화 연락을 했는데, 오늘 저녁을 함께 하자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녁 7시 고려호텔 커피숍으로 나오십시오”하고 금방 연락이 왔습니다. “이 실장 오늘 저녁엔 잘 좀 이야기를 해서 꼭 일을 만들어 보시오”하는 회장의 말씀을 듣고 이 실장은 무거운 책임을 느꼈습니다. “김 교수님 우리 고문님을 통해서 들으셨겠지만, 저는 한솔그룹의 한 회장 밑에서 일하는 비서실장 이충수입니다. 우리 회장님께서 김 박사님의 기사를 읽으시고 많은 관심을 기울이시면서 한 번 뵙고 인사를 드리라고 하여서 이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네에, 강 교수를 통해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 회장님께서 우리 역사학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또 익운박물관으로 해서 잊혀져 가는 귀중한 문화재를 잘 보관하고 수집을 해주신다는 점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실장은 이렇게 우리를 잘 이해해 주는 것을 보니까 오늘 일은 쉽게 잘 되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김 교수님 사실은 바로 그렇게 우리 한 회장을 잘 이해하여 주시기 때문에 이렇게 뵙자고 한것입니다. 한 회장님께서 그 기사에 나온 그릇들을 직접 보고 싶어 하시면서, 김교수님께서 힘을 써 주신다면 그걸 익운관에 진열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는 부탁이십니다"하고, 쉽게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습니다. “익운 박물관에 보관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이미 중앙박물관에 신고가 되어 있는 물건이 되어서 도저히 그렇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딱 잘라서 한 마디로 거절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따로 부탁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 실장님,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닐 뿐아니라, 이미 국가에 등록이 되어 있는 물건이 아니라도 이런 골동품은 그냥 거래를 할 수가 없는 물건이 아닙니까?” “저희가 이렇게 많은 물건을 수집하는 동안에 그런 기본도 모르고 어떻게 수집을 하였겠습니까?” 이 실장과 김교수는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하였습니다. 곁에서 강 교수가 “김 선배님, 우리가 어디 이런 유물을 한두 번 다루어 보았습니까? 그거 발표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선배님이 잘 처리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하고, 거들고 나섰습니다. 김 교수는 벌컥 화를 내며 “강 교수, 정말 못 쓰겠구만. 내가 이 분야를 40여 년이나 연구해 왔지만 자네 같은 친구는 오늘 처음일쎄. 그래 내가 나의 양심을 팔아야 옳다는 말인가?” “김 선배님, 너무 하십니다. 제가 어디 양심을 팔라고 하였습니까? 제가 고문으로 있고, 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유물을 수집하여 보관하는 곳이니 이왕이면 이곳에 보관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입니까?” “그만두게 나는 이런 자리에서 식사를 하면 소화가 안 되어서 반드시 탈이 나고 만다네. 그만 가보겠네.” 한 마디를 남기고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이 실장과 강 교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서 멍하니 창 밖만 쳐다봅니다. 이튿날 이 보고를 받은 한 회장은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이 실장, 어떻게든지 이 일을 만들어 보시오” 한마디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 실장은 한 회장이 이렇게 화를 내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 실장은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김 교수와 가까운 사람을 찾아서 김 교수에게 어떤 사람을 시키면 움직일 수 있는지, 아니면 김 교수에게 어떤 결정적인 어려움이나 잘못 같은 것이라도 찾을 수는 없는지를 샅샅이 조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드디어 이 실장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김 교수가 앞으로 20여일 후에 딸을 시집 보내게 되었는데 결혼 자금이 없어서 집안에서 여간 걱정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장은 곧장 이런 사실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결혼비용이 될 만큼의 돈을 집어주고 일을 마무리지을 속셈 이었습나다. 한 회장의 돈을 받은 김 교수는 그걸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지를 몹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과연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탑을 이렇게 허물어뜨려야 할 것인가? 그러나 안에 들어서면 돈 걱정 때문에 한숨 소리만 들리니 과연 나의 자존심만을 끝까지 지키는 게 옳을까?’ 이런 생각에 김 교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룻밤을 꼬박 세운 김 교수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곧장 강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강 교수, 지난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아주 우습더구만 아예 나를 무시하고 돈으로 나를 사려고 덤비더구만. 나는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몇 푼을 맡아 있는데 당신이 소개한 사람들이니 좀 전해 주시오”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돈을 돌려주고 난 김 교수는 허탈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 준 것 같아서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돈을 되돌려 받은 한 회장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이렇게 까다롭고, 거절을 당하였다는데 몹시 마음이 편치 못하였습니다. 한 회장은 며칠을 끙긍대며, 속을 끓이다가 드디어 한 가지 새로운 방법을 쓸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한 회장은 곧장 이 실장을 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내려보내서, 그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조사하게 하고, 그 땅을 사도록 하였습니다. 이 실장이 현지에 내려가서 조사를 하여 본 결과 그 땅은 개인의 땅이 아니고, 국유지여서 개인이 개간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 땅을 불하받으면 그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장, 며칠이 걸리더라도 그 땅을 불하 받을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고 올라오라고,알겠나?” 한 회장의 명령은 군대에서 상관의 그것보다도 훨씬 무서운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이 실장은 자신의 목을 걸고 이 일을 이루어야만 하였습니다. 군청에서는 “그깐 땅을 대그룹의 회장님이 무엇을 하려고 사려고 하느냐?”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실장은 담당 계원과 과장을 불러 저녁을 함께 나누며 “우리 회장님이 이 고장에 관심을 가지고 이곳에 투자를 하실 의향을 가지신 것 같은데, 잘 좀 도와주십시오”하고 은근히 한 회장의 막대한 재산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야 뭐, 그깐 쓸데없는 땅을 누가 가지고 있던지, 그것보다는 이 고장에 큰 공장이나 하나 지어서 고장 사람들에게 일터라도 주었으면 감사 하겠습니다”하고 도리어 어서 사도록 하라는 듯이 말을 하였습니다. 이 실장은 식사가 끝난 다음에 그들에게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용돈이나 하라고 내밀었습니다. 이 돈의 효력은 금방 나타나서 이튿날 국유지 불하 신청서는 아무런 말썽이 없이 쉽게 접수가 되었고, 빠른 시간 안에 연락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었습니다. 불하 신청서를 접수 시킨 뒤 약 2주일 뒤에 이 실장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이 실장이십니까 ? 여기 군청인데요, 실장님이 신청하신 불하 신청이 받아들여져 허가가 날 것 같습니다.” 이 과장은 곧장 한 회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 드렸습니다. 한 회장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이 실장 수고 많았어.” 한 달쯤이 지나서 이 땅의 불하가 결정되었다는 통지서가 한 회장에게 전달이 되었고, 이 땅에서 과수원을 가꾼 이형국 씨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이형국 씨 귀하. 귀하가 점유하여 개간을 한 땅은 국유지로서 그 동안 귀하가 개간 관리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정식으로 불하 신청을 한 한창달 씨에게 정식절차를 밟아 불하를 결정하였으니,1985년 12월 31일까지 현재의 땅을 인도 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서류가 전달이 되었습니다. 이형국씨는 서류를 들고 면사무소로 군청으로 다니면서 호소를 하였으나, 누구 한 사람도 어떻게 도와 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형국 씨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자 도청으로 찾아가서 사정을 호소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조처입니다.곧 조사를 하여 알려드릴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약 일주일이면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와서 일주일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다시 도청을 찾아간 이형국 씨는 그만 기가 막혀서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군청에 연락을 해봤더니, 그 땅은 허가도 없이 당신이 마음대로 개간을 하여서 몇 년 씩이나 그냥 농사를 지었다고 하더군요. 그럼 당신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어요. 반드시 신고를 하고서 세금을 내었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는데”하며 자기로서는 어떻게 도와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온 집안이 쑥밭이 되어버린 것을 보고 있던 은화가 마지막으로 해보겠노라고, 서울에 있는 김 교수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김 교수님. 우리집을 좀 도와주십시오. 이제 겨우 이 땅에 과일 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따게 되었는데, 이렇게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혹시 한창달 씨라는 분을 아시면 우리 식구가 이곳에서 살수 있도록 좀 부탁 해주세요." 김 교수는 편지를 받자 무서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창달, 이런 못된 사람이 결국은 그곳을 사서 나의 연구를 방해하려고 하는구나. 어디 두고 보자.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너희에게 기어이 본때를 보여 주겠다.” 김 교수는 이를 부드득 갈며, 다짐을 하였습니다. 김 교수는 신문사에 전화로 이런 사실을 알리고, 그 곳이 역사적 유물이 있는 곳이므로 유적지로 지정을 하여 개발을 할 수 없도록 해달라고 신청을 하였습니다. 김 교수의 이런 신청은 국가에서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권위가 있는 학자의 주장이었으므로, 곧바로 허가가 났습니다. 김 교수는 곧장 한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한 회장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토기가 발굴된 땅을 불하받아서 발굴하시려고 하셨다는데, 그만 그곳이 유적지로 지정을 받아서 함부로 손 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동안 그 땅을 불하받기 위해서 군청이며, 도청에까지 수많은 돈을 뿌리신 모양인데 만약 더 이상 그 땅에 대해서 어떤 짓이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당신이 한 일들을 모두 세상에 알리고 말겠소. 이제 더 이상 그 사람들을 괴롭히지 마시오”하고 자신의 말만을 마친 채 전화를 뚝 끊어 버렸습니다. 김 교수가 그 동안에 한솔그룹의 한 회장이 골동품을 수집하기 위해서 벌인 각종의 부정한 짓들과 이번에 은화네 땅을 사기 위해서 군청, 도청에다가 뿌린 부정한 돈과 도지사에게까지 골동품을 선사하는 야비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일일이 조사를 하여 다 알고 있다는 것은 강 교수를 통해서 훤히 알고 있는 한 회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김 교수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쯤을 모를 한 회장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가 있어서 그가 유적지로 지적을 하면 국가에서 하는 건설공사도 중단을 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후에 은화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은화 양에게. 이제 안심을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그곳을 유적이 있는 곳이니까 함부로 땅을 파거나 사고 팔아서는 안 되는 곳으로 지정을 하였으니, 땅을 산 사람들이 이제 그 땅이 필요가 없어졌단다. 부모님께도 안부 전하여라." 은화는 편지를 읽으며 환한 미소를 띄웁니다. 온 가족은 은화의 얼굴을 보며 궁금해 하지만 은화는 그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이며, “아버지, 우리 이제 괜찮대요. 김교수님이 이 땅을 지켜 주셨어요”하고는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서림초(학교장 이병로)는 3월 신학년도의 시작과 함께 독서교육 활성화를 통한 글로벌 미래 인재 육성이라는 학교교육목표 구현을 위해 아침 8시 30분부터 9시까지 전교직원 및 전교생이 참여하는 아침 독서 30분 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림초는 지속적인 아침 독서 30분 운동으로 동기유발 강화를 통한 독서습관 형성 및 내용 이해 중심의 독서능력 향상 방안 모색하고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독서와 사고 태도 함양을 위해 학교장 특색 교육사업으로 선정 운영하고 있는데 이의 정착을 위하여 학교에서 자체 구안 제작한 120페이지 상당의 독서록을 전체 학생 813명에게 배포하여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독서 활동의 이력관리에 철저를 기하여 초등학교 시절의 독서 이력부터 상급학교 진학 등에 중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통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 능력 신장으로 충남교육의 인재 상인 스마트 인재로 커 나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서림아침 독서 30분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이 교장은 “고등사고 능력 신장 및 미래사회 인재의 핵심역량인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의 배양 등은 많은 독서를 통해 길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며 학생들의 독서활동 지도에 진력하는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