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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신동호 | 월간 편집장 dongho@donga.com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퍼뜩 놀라게 된다.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이런 식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 결국 최초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도 변을 당해 대가 끊이지 않고 자식을 낳아 잘 키웠다는 것을 뜻한다. DNA 통해 ‘이브 가설’ 입증 과학자들은 인류 최초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약 15∼20만 년 전에 태어났다고 하니까 나는 아담과 이브의 1만 대 후손에 해당한다. 결국 2만 명이나 되는 직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것이니 이 분들을 모두 초청하면 아마 장충체육관을 빌려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인류사의 99%를 석기 시대 사람으로 살았다. 이 기간 동안 태어난 아기가 야생 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전염병으로 죽지 않고 성년인 20세까지 살 확률은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지금 이 순간 존재할 수 있는 확률은 0.5를 계속해서 1만 번 곱해야 나온다. 이 숫자는 아마 사막에서 모래 한 알을 찾는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1만 세대 가운데 처음으로 아담 할아버지와 이브 할머니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된 최초의 세대이다. 우리는 정말 행운아인 셈이다. 모든 현대 여성이 15만∼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여성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이론을 흔히 ‘아프리카 기원론’ 또는 ‘이브 가설’이라고 한다. 이 학설은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분자생물학자인 앨런 윌슨 박사가 다양한 인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해 1987년에 내놓아 ‘다지역 기원론’을 믿어왔던 인류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DNA만 가지고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 비밀은 미토콘드리아 DNA에 있다. 사람 세포는 핵 속에 인체의 설계도를 담은 DNA를 갖고 있다.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다. 에너지를 생산하는 ‘세포 내 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는 1만6500개의 염기로 구성된 자신만의 DNA를 갖고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핵 속의 DNA와 달리 어머니에서 딸한테 모계로만 유전되면서 조금씩 돌연변이가 일어난다. 따라서 현재 지구 전체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종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돌연변이 정도를 조사하면 인류 최초의 어머니인 이브가 언제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특이하게도 아프리카 인종 집단 내에서는 미토콘드리아 DNA의 유전적 다양성이 다른 대륙의 아시아인, 백인 집단보다 훨씬 높다. 이를 통해 동부 아프리카인 케냐와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인류가 출현해 여러 갈래로 인종 집단이 나뉘고, 이 중 일부 집단이 다른 대륙으로 진출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남성도 아프리카에서 최초 출현 이어 1995년 미국 애리조나 대학의 마이클 해머 교수팀은 남성을 통해서만 유전되는 Y염색체를 분석해 전 세계 남성이 18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아버지에게서 유래했다고 발표했다. ‘이브’에 이어 ‘아담’도 찾아낸 것이다. 흔히 현대인을 황인, 흑인, 백인종 등 3개의 인종 집단으로 나누지만 이는 피부색으로 나눈 것일 뿐 유전자로 보면 훨씬 다양하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인류유전학자 브라이언 사이키스 교수는 2001년 ‘이브의 일곱 딸들’에서 전 세계의 미토콘드리아 DNA형을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퍼져 나간 33개 집단으로 분류했다. 이중 유럽인은 7개 집단, 아시아인은 6개 집단이다. 그래서 유럽인은 7명의 딸로부터 유래했고, 동양인은 6명의 딸로부터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사이키스 교수는 미토콘드리아 DNA 유전자를 분석해 자신이 러시아 니콜라스 황제와 핏줄이 연결돼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 인물이다. 아프리카 기원론이 나오기 전까지 인류학계에서는 180만 년 전부터 각 대륙에 살던 직립 인간, 즉 호모 에렉투스가 각각 독자적인 진화의 길을 걸어 오늘날의 다양한 인종 집단이 됐다는 다지역 기원론이 대세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기원론이 등장하면서 다지역 기원론은 퇴출 일보 직전까지 몰린 상태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발견된 수십만 년 전 자바원인의 두개골 화석을 분석한 결과 이들은 현대인의 직접 조상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필자만 하더라도 수십만 년 전 아시아에 살았던 자바원인이나 베이징원인이 현생인류의 직계 조상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의 직계 조상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내려져 가고 있는 것이다. 1856년 독일 네안데르탈 계곡 동굴에서 처음 발굴된 네안데르탈인도 아프리카 기원설이 등장하기 전까지 현생인류의 직계 조상이라고 믿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독일의 인류유전학자인 스반테 파보 박사가 1997년 이 네안데르탈인 화석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는 공통점이 없는 전혀 별개의 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는 50만∼60만 년 전에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사촌지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프리카에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가 각 대륙으로 대탈출을 시작한 것은 5만 년 전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 이미 네안데르탈인은 유럽과 중동 지방에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은 어떻게 해서 갑자기 사라진 것일까? 그동안 다지역 기원론을 지지하는 인류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 게 아니라 현생인류와 피가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흡수됐다고 생각해 왔다. 네안데르탈인과 별개인 현생인류 하지만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DNA 분석 결과가 나오면서 네안데르탈인의 몰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과 함께 살던 시기에 네안데르탈인은 꾀바른 현생인류와 대항해 살아남기 위해 매우 복잡한 도구 기술을 급속도로 개발해 낸 흔적도 나타나고 있다. 유럽인들이 천연두를 퍼뜨려 면역성이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살시켰듯,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면역성이 없는 질병을 퍼뜨려 멸종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최초의 인류는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살았을까? 그 모습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16만 년 전의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의 두개골 화석을 통해 더듬어 볼 수 있다.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생물학자인 팀 화이트 교수팀은 동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강가 계곡에서 현생인류의 직계 조상으로 보이는 16만 년 전의 화석을 발견해 어른 2명과 어린이 1명의 두개골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고 2003년 발표했다. 아프리카 기원설의 가장 큰 약점은 DNA 증거는 있지만 화석 증거가 없다는 점이었다. 특히 10만∼30만 년 전의 인류 화석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고리를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이 중 가장 완벽하게 복원한 남자 어른의 두개골은 현대인과 크기와 모양이 비슷했다. 구인류는 원숭이처럼 눈썹 부위의 뼈가 툭 튀어나와 있지만 이 두개골은 덜 튀어 나왔다. 두개골의 크기는 현대인보다 약간 컸다. 화석은 발견된 지역의 말로 ‘형님’이란 뜻의 이달투를 붙여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로 명명됐다. 함께 발견한 수백 개의 석기와 물소 뼈를 통해 볼 때 이들은 복잡한 손도끼와 돌날로 하마나 물소의 살을 잘라내 육식을 했고 식물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디서 기원했을까? 물론 우리의 조상도 아프리카를 탈출한 사람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흔히 한국인은 순수한 단일민족이고 모두 단군 자손이라고 세뇌 교육을 받는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의 교과서를 보았더니 지금도 여전히 ‘단군이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해서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쓰여 있다. 신화를 진짜 역사처럼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단일민족이란 그릇된 인식을 어려서부터 심어줘 외국인을 배타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한지 되짚어보아야 한다. 한민족은 적어도 두 개 이상, 서너 개의 다른 인종이 융화돼 형성됐다고 보는 견해가 지금은 더 우세하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외국인이 귀화를 했다.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성씨 중 외국인이 귀화하면서 새로 만든 귀화인 성(姓)은 442개로, 286개인 토착성의 1.5배에 달한다. 공식적으로 집계가 되는 귀화 성씨만 하더라도 중국계를 위시해 여진, 위구르, 몽고, 일본, 베트남, 아랍계 등 의외로 다양하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꼽히는 장영실만 하더라도 고려 때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의 후손이다. 과학 기자로 일하면서 한민족의 기원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2002년과 2003년 여름, 국내 고고학자, 유전학자, 지질학자 등과 함께 한민족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북방계 아시아인의 기원지라고 생각되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일대와 알타이 산맥을 답사했다. 비행기를 5시간이나 타고 가서 만난 시베리아 원주민이 우리와 구별이 어려울 만큼 얼굴이 비슷한 것을 보고 한민족의 주류가 북방계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부리야트족, 알타이족은 한국인처럼 북방계 몽골리안이다. 다리가 짧고, 두터운 지방층을 갖고 있다. 또 얼굴이 평평하며, 코가 낮고, 입술이 작고, 눈꺼풀이 두텁고, 눈이 가늘다. 이런 생김새는 열 손실이 적고 눈을 보호하기 때문에 추위에 강하다. 서울대 의대 이홍규 교수는 당뇨병을 연구하면서 북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의 유전자와 체질이 유사하다는 데 주목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 유전자로 한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을 해오고 있다. 이 교수는 ‘추위에 적응된 북방계 몽골리안의 체질’이 빙하기 때 시베리아에서 형성됐다고 생각한다.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기 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북방계 몽골리안들은 시베리아의 어디에선가 매우 오랫동안 고립돼 살면서 추위에 적응된 체질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나라마다 민족 건국설화 갖고 있어 시베리아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이곳에 사는 소수민족들이 모두 우리의 단군설화나 금와왕 이야기와 같은 민족 건국설화를 저마다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터키에서 중앙아시아, 알타이 산맥을 거쳐 몽골과 만주, 한반도로 이어지는 알타이 문화권에서 말로 전해오는 구비문학이 우리의 전래동화나 민담과 모티브가 매우 유사하다. 알타이어 문화권은 지난 2000년 동안 흉노, 고구려, 돌궐, 몽골, 금, 청, 오스만 같은 대제국을 건설해 유라시아를 동서로 연결하며 대륙의 주인 역할을 해왔을 뿐 아니라 멀리 아메리카 대륙까지 개척했다. 그러나 한국인은 북방에서 온 북방계 몽골리안의 혈통만 이어받은 것은 아니다. 폴리네시아나 인도 등 남방계 아시아인의 유전자도 일부 섞여 있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는 한국인의 체질을 네 가지로 구분했는데 이것도 한민족의 혼혈 특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서울대 의대 이홍규 교수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민족에게 남방계의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한국인의 미토콘드리아 DNA와 Y염색체를 분석한 서울대 홍성수 박사와 단국대 김욱 교수는 그 비율이 대략 15∼20%라고 생각한다. 홍 박사는 일본 학자들과 함께 서울과 제주에 사는 한국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는데, 이 가운데14.5%는 폴리네시아 등 남태평양 토착민에게 나타나는 유전 형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보면 한국인은 대체로 ‘북방계’ 몽고인종의 유전자를 이어받았지만, 남태평양 집단의 유전자도 15% 가량 이어받아 결코 단일 민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한국인 중에서도 북방계 남방계로 나뉘어 북방계와 남방계는 얼굴도 다르다. 미술과 해부학을 전공한 ‘얼굴 전문가’ 서울교대 조용진 교수는 한국인 가운데 80%는 북방계 그리고 나머지 20% 가량은 남방계의 얼굴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남방계는 진한 눈썹, 쌍꺼풀, 짧은 코와 큰 콧방울, 두터운 입술, 많은 수염, 네모난 얼굴, 굵은 머리카락, 검은 피부를 갖고 있다. 반면 북방계는 눈썹이 흐리고, 코는 길지만 끝이 뾰족하며, 쌍꺼풀이 없고 눈이 작으며, 입술이 얇은 게 특징이다. 고 정주영 씨, 정치인 권노갑 씨, 정대철 씨가 전형적인 북방계이고, 김우중 씨, 한화갑 씨는 남방계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쉬리에서 연기 대결을 벌인 한석규는 북방계, 최민식은 남방계 특징을 갖고 있다. 남방계나 북방계나 모두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아시아로 진출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방계는 빙하기 이전에 한반도 등 동아시아에 이미 들어와 살고 있었고, 북방계는 시베리아에서 오랫동안 빙하에 갇혀 있다가 약 1만 년 전쯤 빙하기가 끝나면서 서서히 한반도에 진출해 융합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한반도 최초의 주인은 북방계가 아닌 남방계였다는 것이다. 충무 앞바다의 욕지도와 연대도, 통영 앞바다의 늑도 그리고 오키나와의 패총과 유적에서 발견되는 두개골은 실제로 남방계의 특징을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인종이 융합됐지만 주류를 이루고 지배층이 된 것은 북방계여서 남방계 혈통은 거의 흡수가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남방계가 한국인의 유전 형질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환웅이 쑥과 마늘을 먹고 여인이 된 곰과 결혼해 한민족의 시조가 된 단군왕검을 낳는다는 단군신화는 북방계가 남방계 부족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수만 년 동안 섬에 고립된 채 갇혀 살지 않는 이상 단일 민족은 만들어질 수 없다. 단일 민족이 좋은 것도 아니다. 인간도 그렇거니와 생물은 한 지역에 오래 고립돼 외부의 유전자가 유입되지 않으면 급격한 환경 변화가 왔을 때 적응하지 못한 채 멸종하는 경우가 있다. 더욱이 인간은 먼 곳에서 인구가 유입되면서 다양한 기술과 문화 그리고 언어를 흡수하게 된다. 한민족이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고립된 채 살았다면 아마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곽해선 |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eon.net) 지난해 우리나라는 재작년처럼 경제가 내내 좋지 않았다. 단, 이렇게만 말하고 지나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최근 우리 경제의 부진은 특히 소비가 부진한 데서 비롯되는데, 소비도 국내 소비와 해외 소비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을 공급자로 놓고 볼 때 국내의 소비, 즉 국내수요(내수)는 매우 부진했던 게 사실이다.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에서의 판매 상황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지만, 도소매 매출실적이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계속 줄었다. 그러나 해외 소비 쪽은 사정이 완연히 달랐다. 작년에 우리나라 기업으로부터 상품 수출을 요구하는 해외수요는 우리 기업과 정부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높았다. 산업자원부가 1월 1일 잠정 집계한 ‘2004년 수출입실적’(통관기준)을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무역은 여러 가지 새로운 기록을 낳았다. 작년, 내수 부진 속 수출은 최고 기록 지난해 우리나라는 수출과 수입 실적 모두 사상 최대 기록을 냈다. 에 나타났듯이 수출액은 2542억2000만 달러로 전년보다 31.2% 증가했고, 수입은 2244억7000만 달러로 25.5% 늘어났다. 연간 수출 2500억 달러대는 캐나다, 중국, 벨기에, 홍콩 등에 이어 세계 12번째이고 지난 95년 수출 1000억 달러를 달성한 이후 9년 만에 2.5배로 늘어난 기록이다. 수출 규모로 순위를 매기면 세계 12번째지만, 우리보다 앞서 2000억 달러대에 들어선 벨기에와 홍콩은 중계무역 비중이 높으므로 이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이제 세계 10대 수출국이다. 지난해에는 또 연간 수출증가액 604억 달러로 종전 최고기록이던 2003년의 313억 달러에 견주어 두 배 가까이 많았다. 하루 평균 수출액도 9억1000만 달러로 2003년의 6억8000만 달러를 훌쩍 넘어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전년 대비 수출증가율 31.2% 역시 우리나라가 이른바 3저(저유가, 저금리, 달러 약세)로 불리는 유리한 해외경제 여건을 맞아 호황을 누렸던 1987년(36.2%)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수출액에서 수입액을 뺀 무역수지 흑자도 297억5000만 달러로 전년도 149억9000만 달러의 배에 달했고 1998년(390억 달러) 이후 6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렇게 수출이 활약(?)을 해 주었기 때문에 작년에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률은 극심한 내수 부진에도 불구하고 4%대를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년 한 해 수출의 경제성장 기여율은 2003년에 이어 90%대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경제를 굴려가는 두 개의 바퀴 가운데 내수라는 한쪽 바퀴가 2년 넘게 동력을 잃은 가운데 수출이 나머지 바퀴를 굴리는 견인차 역할을 한 셈이다. 수출이 그렇게 잘 되었다면 체감경기는 왜 여전히 나쁜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여기에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한다. 수출은 주로 대기업이 맡는데, 대기업은 우리나라 전체 고용의 작은 부분을 담당할 뿐이다. 고용의 90% 가량, 압도적인 부분은 중소기업이 맡고, 중소기업은 내수 시장에서 활동한다. 내수가 부진하면 중소기업 경기는 부진할 수밖에 없다. 단, 수출이 잘 되면서 수출경기가 내수시장까지 흘러들어간다면 사정은 나아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대기업을 위주로 수출을 많이 하고 수출경기가 호조를 보이면서 중소기업을 위주로 한 내수시장이 그 덕을 보는 식으로 경기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같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해외수요와 국내수요의 연결이 끊긴 상태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 침하, 과대한 가계부채 누적 등으로 내수시장의 구매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데 있다. 우리나라 무역의존도 세계 70위 그나마 심각한 내수부진으로 작년에 깊이 가라앉을 뻔했던 우리 경제를 연 4%대의 경제성장이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수출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경제는 최근 한층 더 수출, 곧 무역에 의존하게 된 셈이다. 우리 경제에서 무역은 얼마나 중요할까? 어떤 나라의 대외교역, 곧 무역이 그 나라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가리켜 무역의존도(貿易依存度, degree of dependence upon foreign trade)라고 부른다. 무역의존도는 수출액과 수입액의 합계를 명목 국내총생산(명목GDP=경상GDP)으로 나눠 백분율로 나타낸다.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무역의존도 = (수출 + 수입)/명목GDP 무역의존도가 약 69%라면, 국민경제가 연간 100원을 번다고 할 때, 그 중 69원은 수출액과 수입액을 합한 금액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경제의 무역의존도는 지난 1993년 48.1%로 바닥을 찍고 이후 상승 추세를 지속해 2001년 69.1%를 기록했다. 세계 174개국 중 70위다. 2002년에도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는 66.0%로 OECD 국가 중 7번째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무역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벨기에로 166.2%. 슬로바키아, 체코, 아일랜드, 헝가리 등도 100%를 넘는 수준이다. OECD 국가 중 무역의존도가 가장 낮은 나라는 미국으로 18.2%. 일본도 18.9%로 낮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경제가 무역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 그런데 무역은 해외 경기 변동을 잘 탄다. 따라서 무역의존도가 높을수록 그 나라 국민경제는 해외 변수에 취약하다. 거꾸로 무역의존도가 낮으면 경제가 무역보다는 국내 경기에 의존하므로 해외 변수의 영향을 덜 탄다. 무역의존도는 수출액과 수입액의 합계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실은 수출의존도와 수입의존도를 합한 개념이다. 수출의존도는 수출액이 국민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 수입의존도는 수입액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낸다. 우리나라의 수출의존도는 2001년에 35.6%. 세계 174개국 중 56위다. 1990년대 초 수출의존도는 28%였다. 최근 10년 사이 국내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한층 높아진 셈이다. 수출, 몇 개 시장 의존도 높아 무역의존도와 마찬가지로 수출의존도가 높아지면 그만큼 국민경제가 해외 경기를 타기 쉽고 대외 경제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힘이 약해진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상대인 미국의 경기가 나빠진다 하자. 경기 악화는 미국의 수입 수요를 줄이고 그만큼 우리나라의 대미 수출은 줄어든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경제 전체에 즉각적인 타격을 받는다. 우리나라의 수출 시장은 크게 미국·일본·EU 등 3대 선진국 시장과 중국·동남아·중동·중남미 시장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미국·일본·EU 등 3대 선진국 시장의 비중이 우리나라가 상대하는 세계 수출시장 전체 가운데 절반이다(1996년 40.7%, 2000년 47.3%, 2001년 45%). 나머지 절반의 수출시장은 중국·동남아·중동·중남미 지역으로 이루어진다. 수출시장을 국가별로 보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수출을 가장 많이 받아주는 나라는 미국이고 그 다음이 일본이다. 2000년만 해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약 376억 달러, 일본에는 약 204억 달러를 수출했다. 이 해 우리나라가 수출을 많이 한 10개국의 수출액 총계는 1184억 달러. 주요 10개국 상대 수출액 가운데 대미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약 32%, 일본은 약 17%다. 두 나라를 상대로 한 수출액이 두 나라를 포함한 10개국 상대 수출액의 절반쯤 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우리나라의 수출 구조에 특기할 변화가 생겼다. 중국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상대국이었던 미국과 일본을 제치고 2003년 마침내 제1위 수출시장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젠 우리나라가 무역과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중국(홍콩 포함)이다. 그 다음이 미국, 일본, 대만 순이다. 무역을 해서 흑자를 보는 상대국도 주로 홍콩을 포함한 중국, 미국, 대만, 영국 등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무역흑자는 여러 나라와 골고루 무역을 벌여 얻는 결과라기보다 이들 몇 개 나라에서 얻는 결과다. 즉, 소수 국가에 무역흑자를 의존하는 정도가 심한 것이다. 어떤 나라의 무역흑자가 소수 몇 개국을 상대로 한 무역흑자에 의존하는 정도를 무역흑자 편중도라고 부른다. 무역흑자 편중도는 무역흑자가 편중된 일부 국가로부터 얻은 무역흑자 총계가 전체 무역흑자 전체에서 얼마나 되는지를 비율로 나타낸다. 우리나라는 무역흑자 편중도가 높고,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1998년 54.6%이던 것이 1999년 94.6%, 2000년 244.1%, 2001년 273.1% 등으로 최근 들어 한층 큰 폭으로 높아지고 있다. 2001년 일본의 무역흑자 편중도는 214.5%, 중국은 174.2%다. 10대 무역흑자국에 대한 편중도 역시 2001년 한국 340.9%, 일본 253.1%, 중국 190.6%로 3개국 중 우리나라가 가장 높았다. 수출 품목 편중도 갈수록 높아져 무역흑자를 소수 몇 개 나라에 너무 많이 의존하다 보면 그런 나라를 위주로 해외 경기가 침체하거나 주요 무역 상대국과 관계가 나빠질 때 무역에서 낭패를 보기 쉽다. 이런 문제를 줄이려면 평소 수출·무역흑자 상대국을 널리 다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흑자 편중도의 내용도 문제다. 주요 흑자 상대국으로부터 얻는 흑자 비중이 높아져서라기보다 흑자 상대국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 얻는 흑자폭이 줄어드는 바람에 편중도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이후 5대 흑자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무역흑자는 213억~288억 달러로 200억 달러대에 머물고 있지만 전체 무역흑자는 1998년 390억 달러, 1999년 239억 달러, 2000년 118억 달러, 2001년 93억 달러로 점차 줄어들고 있다. 무역 상대국뿐만 아니라 수출 품목 면에서도 우리나라는 편중도가 높다. 우리 기업들이 수출하는 품목은 갈수록 반도체, 철강, 컴퓨터, 유화, 자동차, 직물, 선박, 의류, 무선통신, 정밀기기 등 10대 품목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 수출 상위 품목 가운데는 반도체, 컴퓨터, 무선통신기기 등 정보기술 관련 제품으로 품목이 집중되어 있다. 컴퓨터, 자동차는 경기 변동이 심하고 반도체나 유화제품도 시장가격 등락이 큰 편이기 때문에 전체 수출의 불안정성이 높다. 수출을 여러 품목에 걸쳐 골고루 하는 나라는 국제 경기 변화에 대응하기가 비교적 쉽다. 국제 경기 변화에 따라 수출이 잘 안 되는 품목이 생기는가 하면 수출이 잘 되는 품목도 생기므로 그만큼 경기 변화를 덜 탄다. 그러나 단 몇 개의 품목에 수출을 집중하는 나라는 해외 경기 변동에 대응하는 힘이 약하다. 수출이 집중된 품목의 국제 수요가 줄면 즉시 수출 전체에 타격을 입고 무역수지가 나빠진다. 경제가 수출과 무역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화할수록 무역의 체질을 튼튼하게 할 필요성이 높아진다. 무역의 편중도를 낮추는 것이 그 한 가지 해법이다.
조현호 | 울산 향산초 교사 3월 새해맞이 새 학년이 시작됩니다. 교사는 일 년에 두 번씩 새해를 맞이합니다. 첫 번째는 신년(혹은 구정)의 시작인 1월 1일이요, 두 번째는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초입니다. 1월 1일이 산술적인 의미의 새해라면 교사에게 실질적인 새해는 바로 3월초라 하겠습니다. 선생님들! 3월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호에서 소개할 친구는 수천 년을 한자리만 지키고 살아온 다소 우둔한 녀석입니다. 이 친구는 작심삼일(作心三日), 인간처럼 간사한 마음도 없이 그저 큰 몸집에 이런저런 상처를 안고도 개의치 않습니다. 믿음직한 모습으로 한 자리를 지키면서 한민족의 역사를 지켜온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그는 바로 암각화입니다. 암각화란 말 그대로 바위 표면에 그림을 새긴 것을 말합니다. 예부터 특이한 형상을 하거나 잘 생긴 소위 ‘몸짱’ 바위는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생명수랄 수 있는 강가에 위치한 바위는 신에 대한 제(祭)의 공간이자, 종족 번영을 위한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의 기원장으로 신성한 공간이었습니다. 대개 암각화 전면에 의식을 치르기 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암각화는 내용으로 보아 사실적인 암각화, 추상적인 암각화, 신상 암각화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실적인 암각화는 각종 동물과 인물상을 실감나게 묘사한 반구대암각화가 대표적입니다. 추상적인 암각화는 동심원이나 사다리꼴 등의 독특한 문양으로 꾸며진 천전리암각화가 대표적입니다. 신상 암각화는 고령 양전동암각화가 대표적이고 대부분의 암각화가 이 부류에 포함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국내 암각화 중 국보로 지정된 울산의 암각화 두 곳을 찾아 떠나고 다음 호에서는 우리나라 암각화의 대세라 할 수 있는 신상 암각화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기하학 문양과 낙서 제가 살고 있는 울산은 흔히들 공업도시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입니다. 울산은 선사시대부터 찬란한 문화를 가진 역사도시입니다. 신설학교를 지으려고 땅만 파면 선사시대 유물과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는 바람에 개교에 상당한 차질을 빚을 정도입니다. 이런 울산에 국보가 두 점 있는데 모두 선사시대 암각화입니다. 천전리각석은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학계에 보고된 국내 최초의 암각화입니다. 반구대암각화와 같은 지류인 대곡천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장마철 물이 불어 개울을 건너지 못하는 경우 외에는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습니다. 주변 넓은 바위 곳곳에 약 1억 년 전 공룡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인근에 원효가 주석했다는 반고사터도 있습니다. 높이 2.7미터에 폭이 9.5미터로 듬직한 외모에 표면은 점토질이라 미끈한 피부를 자랑합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를 옆에서 보면 절을 하듯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암각화가 수천 년을 견디어 온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앞으로 기울어진 형세이기에 빛이 잘 들지 않고 비를 피할 수 있어 풍화의 피해를 덜 입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랫부분을 중심으로 바위면이 깎이거나 박락(剝落)하는 현상이 심각해 안타깝습니다. 윗부분은 나무뿌리가 암각화를 위협하고 있고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암각화 표면에 흔적을 남기기도 해 이런 상태로 관리가 될 지 의문스럽습니다. 이 암각화는 가로로 2등분하였을 때 상단에는 동심원이나 마름모, 우렁무늬, 물결무늬 등 기하학적인 문양이 주를 이루고 일부 동물이나 인물상도 보여 전형적인 암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단에는 책을 펼친 듯한 모양의 명문을 중심으로 곳곳에 낙서를 해둔 듯 글자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하단 명문 부분을 일컬어 ‘서석(書石)’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식 문화재명인 ‘천전리각석’에는 상단의 암각화부분과 하단의 서석부분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추상파들이 남긴 천전리암각화 천전리각석을 새긴 기법은 다양한데 동물과 사람 등에서 보이는 면각기법은 신석기 말기, 각종 기하학적 문양 등 선각기법은 청동기, 하단 명문부분의 기마상 등은 철기, 300여 자의 명문은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근 주민들의 말로는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만 해도 그 가치를 모르고 낙서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 한 곳에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상단의 기하학 무늬에 대한 해석은 분분합니다. 워낙 추상적인 내용이라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으려면 더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하지요. 다만 동심원은 고령 양전동암각화와 함안 도항리암각화에서도 보이고 있어 농경사회적 태양숭배사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뭇잎처럼 생긴 문양은 생산을 상징하는 여성의 성기를 묘사했다고 보는 시각도 일반적입니다. 당시 이런 수수께끼같은 기하학적 문양을 바위에 나타낼 수 있었던 선사인들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이 문양을 남긴 이들도 추상파라 할 수 있겠죠? 하단의 명문은 추상적인 암각화보다는 더 많은 연구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찾은 모 교수의 말처럼 이 서석에만 박사급 논문이 수두룩할 정도로 연구가치가 큽니다. 하단 가운데쯤에 자리한 책 모양의 명문을 주목합니다. 한쪽 면은 갈문왕이 법흥왕 12년(525)에 이곳을 방문하여 놀다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각명한 것이고 다른 면은 8년 후 다시 이곳을 찾아 그때를 회상하는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밖의 명문에는 화랑들의 이름이 많이 보여 화랑들이 이곳을 수련도량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천전리암각화에 나타나는 독특한 문양들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지난 여름 6학년 아이들과 이곳을 찾은 후 암각화에 등장하는 원, 네모, 마름모가 가지는 의미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문양을 암각화를 새긴 사람들의 감정을 나타낸 것으로 이야기했는데, 원은 원만함이나 기분 좋음을 의미하고 네모는 그와 반대, 마름모 또한 생각의 한정, 화가 난 모습 등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한 추상적인 도형들이 선으로 연결되어 암각화에 나타나는 것은 그러한 감정들이 서로 연관되어져 기분이 좋았다가 나빠졌다는 등의 해석을 보였습니다. 해외손님 맞는 반구대 반구대(盤龜臺)를 국보 제285호인 반구대암각화의 줄임말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반구대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반구대가 어디냐고 물으면 한 10여 분 걸어가야 한다며 친절하게도 반구대암각화를 가리키는 사람들이 제법 있지요. 한실마을에 있는데 한실을 한자화한 것이 ‘대곡(大谷)’입니다. 반구대의 유래는 대곡천과 어울린 산세가 거북이가 목을 쏙 빼고 기어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습니다. 집청정이나 반구서원에서 반구대쪽 산세를 바라보면 옛사람들이 반구대라고 이름 붙인 까닭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언양과 경주를 잇는 35번 국도에서 4킬로미터 더 달려 반구대 계곡에 들어서면 수정같이 맑은 대곡천과 암벽, 울창한 숲이 조화되어 마치 선사시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됩니다. 반구대가 지닌 아름다움을 수억 년 전 공룡들도 알았던지 주변 바위에는 그들이 유유자적 하다 남긴 발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또한 포은 정몽주가 언양에 유배왔을 적 자주 찾았던 곳이고 정구, 이언적과 같은 명현들도 뛰어난 경치를 보러 왔었습니다. 반구대를 ‘포은대’라고도 일컬음은 포은 선생에서 유래하며 지금도 그의 영모비가 남아 있습니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으며 그들은 반구대 암벽에 ‘반구’라는 각자와 학 그림, 성명, 유허비 등을 각인해 두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포은, 운학재, 회재 삼현(三賢)을 모셨던 반고서원은 현재 ‘반구서원’이란 이름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반구대까지 들어가는 길이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접근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타 지역 선생님들께서 방학을 맞아 큰마음 먹고 반구대암각화를 찾았다가 정작 반구대암각화는 보기는커녕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하고 투덜대며 돌아오기가 쉬웠습니다. 어렵게 반구대까지 진입을 해도 정작 암각화는 물에 잠겨 버려 문화재 안내문만 읽고 오기 십상이었죠. 지금은 지난해 11월에 반구대 진입도로가 정비되어 길이 넓어지고 암각화 조형물도 설치해 놓고 주차장도 말끔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올해 중으로 인근의 천전리각석까지 원시문화산책로도 정비되어 개방될 예정입니다. 반구대암각화가 처한 최우선인 문제점이 바로 대부분 물속에 잠겨 있다는 점입니다. 1965년 대곡천 하류에 준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연중 심한 갈수기 외에는 육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근래에는 암각화 대형사진을 세워 두어 암각화 실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5월 27일부터 6월 24일까지 한 달여 기간 동안 암각화 실물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 울산에서 국제행사인 제57차 국제포경위원회(IWC) 연례회의가 개최되는데 그 기간 동안만 댐의 수위를 낮추어 회의 참가자 및 관람객들이 근접 관람할 수 있도록 수자원공사와 협의되어 있습니다. 반구대암각화를 못 보고 돌아가신 분들이나 반구대암각화를 찾고자 하시는 분들은 국내 포경산업의 전진기지였던 장생포에 건립되는 고래박물관 관람과 더불어 반구대를 꼭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사실적 묘사의 극치, 반구대암각화 반구대암각화에는 가로 10미터, 세로 3미터 되는 미끈한 바위면을 중심으로 200여 점의 그림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크게 인물상, 동물상, 기타 배 같은 물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물상은 탈을 쓴 가면, 물짐승을 잡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기잡이 하는 어부 등이며 동물상은 사슴, 호랑이, 멧돼지, 고래 등이고, 물상은 배, 그물, 덫 등입니다. 바위에 새겨진 동물과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고 역동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천전리각석을 상하로 양분했다면 반구대암각화는 좌우로 양분해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왼쪽에는 면각기법으로 새긴 고래 중심의 바다짐승이 많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선각기법의 호랑이, 사슴 등의 들짐승이 주가 됩니다. 이제 그림을 자유롭게 감상해 봅시다. 작살 맞은 고래가 깜짝 놀라 하늘로 날아갑니다. 그를 따라 다들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데 고래 한 놈만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입니다. 튀는 그 놈만 선각으로 그렸네요. 또 다른 녀석은 새끼 고래를 업고(배고) 활주합니다. 호랑이는 울타리에 갇혀 있고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래 사냥을 합니다. 바위 제일 윗부분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바짝 든 녀석이 멀리 망을 보고 있고 시선을 밑으로 내리면 여자인 듯한 인물이 사지를 펼쳐놓고 대담한 자세를 보입니다. 다른 한쪽에선 사슴이나 멧돼지 등 뭍짐승들이 떼 지어 분주히 이동하고 있습니다. 천전리암각화에서 보이는 인물상(가면)도 보이네요. 자손의 번식, 사냥에서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선사인들의 염원이 이 바위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제 반구대암각화는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그 역동적인 모습들이 도자기를 중심으로 디자인 되더니 이제는 엘리베이터나 건물벽화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인으로, 세계 속의 디자인으로 발돋움하기에 손색 없는 자랑거리입니다. 늘 한결같이 2005년 1월 새해가 지났건만 안타까운 일들이 올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육계의 수장될 자들은 최단 재임기간 신기록에 도전하는 듯합니다. 위가 이러니 현장에 있는 교사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어떻겠습니까. 그뿐입니까. 40년 만에 공개된 한일협정 문서를 들여다보니 부실 투성이입니다. 암각화는 수천 년을 한결같이 이 땅을 지켜왔습니다. 비록 무생물이지만 한결같이 우리 땅에서 벌어진 역사를 꿰뚫고 오늘도 우리들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초부터 낌새가 불길합니까? 걱정 마십시오. 우리들에게 있어 새해는 3월이요, 우리들의 희망은 아이들입니다. ‘올해는 어느 선생님이 우리 반 선생님이 될까?’ 하며 우리들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새해에는 그 친구를 닮아 늘 한결같은 선생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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