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98,723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곽해선ㅣ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on.net) 지하경제란 ‘지하경제(underground economy)’란 거래 내용이 세무 당국에 포착되지 않아 세금 부과 대상에서 빠지고, 국민경제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경제 활동을 말한다. ‘공식경제(official economy)’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세무서에 신고하지 않는 경제 활동이라고 해서 다 불법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파출부가 노임을 받는 활동은 세금을 내지 않는 한 지하경제에 속하지만 불법은 아니다. 그래도 지하경제에는 불법 활동의 비중이 크다. 밀수, 마약 제조나 판매, 매춘, 사설 도박장 영업, 불법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이 가장 전형적인 지하경제 형태이기 때문이다. 뇌물이나 촌지라는 이름의 음성적 자금 거래도 불법 지하경제의 일부다. 기업 활동과 관련해서는 비자금이 불법 지하경제의 대표적 형태로 손꼽힌다. 비자금이란 출처와 용도가 가려진 돈을 말한다. 보통 기업들이 회계장부에 수입액을 실제로 번 것보다 적게 기록하거나 지출 액수를 부풀려 장부 밖으로 빼돌려 조성한다. 장부에 없는 돈이니 세무서에 신고하지 않고 주로 뇌물이나 촌지에 충당하므로 부정부패를 낳는다. 그렇기는 해도 지하경제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소비를 늘려 경제에 좋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자영업자가 물건을 팔아 소득을 얻고도 이를 신고하지 않는다고 하자. 말하자면 탈세를 하는 것인데, 해당 자영업자로서는 세금으로 나가지 않는 만큼 소득이 늘어 소비를 더 늘릴 수 있다. 하지만 지하경제로부터 득을 보는 이들은 탈세를 하고 국민경제의 성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탈세와 지하경제가 커지면 정부로서는 정당하게 거둬들여야 할 세금을 걷지 못한다. 자영업자들의 탈세가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 정부의 세수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생긴다. 세수가 부족해지면 정부는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게 한다. 세금을 더 내는 사람들로선 소득이 줄어드니 그만큼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비가 줄고, 소비 위축에 따라 기업의 판매가 줄고, 경기가 위축된다. 결국 지하경제가 커지면 부분적으로는 탈세자들의 소비를 늘리는 효과도 있지만, 공식 부문 경제로 자금이 흘러 국내 경제 자원이 생산적으로 쓰이는 것을 막고, 소비 증가 → 판매 증가 → 생산 및 고용, 투자의 증가 → 소비와 판매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막아 국민경제의 성장세를 낮추고 공식 부문 경제를 좀먹는다. 그 결과는 공식 부문 경제의 성장률 하락으로 집약된다.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 얼마나 되나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에서 밝힌 연구에 따르면, 지하경제 규모까지 포함할 경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실제보다 훨씬 높아진다.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전년 대비 4.8%로 추정되는데, 지하경제를 감안한다면 5.4%로 올라선다. 2003년에도 우리 경제는 전년 대비 3.1%의 저성장을 보였지만 지하경제를 합하면 5.1%로 훌쩍 뛴다. 이런 식으로 따지고 보니,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1997년 이래 지하경제로 인해 연평균 1.4%p씩 줄어들었다. 근년 국내 경제가 연평균 3%대의 저성장 늪에 빠진 데는 지하경제가 커진 탓도 한몫 단단히 한 셈이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 대규모 재정을 투입해 종합투자계획을 시행할 예정이다. 이 계획이 경기 부양 효과를 낸다면 약 0.2~0.3% 가량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데, 지하경제의 경우 경제성장률을 1%p 이상 줄였다는 것이므로 지하경제가 경제성장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2003년 현재 150조 원 정도로 추정된다. 2003년 국내총생산(GDP)의 21% 정도 규모다. 1998년 통계를 기준으로 하면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GDP 대비 약 16.6%로 선진국보다 약 1.6%p~7.7%p 높다. 미국은 GNP 대비 지하경제 규모가 1970년 2.6~4.6%에서 1998년 8.9%로 약 168% 증가했고, 호주,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은 지하경제 규모가 1960년대 GNP의 5% 미만에서 1998년 들어 GNP의 약 13%를 넘는 수준이다. 정확한 규모 파악이 어려운 지하경제 속성상 대략적인 추산으로는 2000년 이후 미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선진국의 경우 지하경제의 GDP 대비 비율이 10% 미만이고 일본, 영국,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홍콩 등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필리핀, 태국, 멕시코, 페루 등은 지하경제 비중이 매우 커 GDP 대비 50% 안팎인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지하경제가 커지는 이유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는 약 14%에서 19%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다 1993년 이후부터 규모가 꾸준히 줄어 1999년 GDP 대비 16%대까지 됐다. 그러나 1999년을 기점으로는 다시 상승세로 돌아선 추세다. 지하경제가 감소했던 1994∼1999년 사이에는 금융실명제 도입, 외환위기, 코스닥의 IT 주식 붐(Boom)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1994년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지하경제에서 움직이던 자금이 공식경제로 많이 유입됐고,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소비가 줄면서 주로 소비 부문에서 많이 움직이는 지하경제로의 자금 유입이 줄었다. 1999년 IT 붐으로 코스닥 시장에서 주가가 뛸 때는 지하경제 자금이 공식 부문인 주식시장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이 기간 동안 지하경제 규모는 약 18%에서 16%로 줄었다. 그러나 2000년부터 2003년 사이엔 지하경제 규모가 약 19.6%에서 약 21%로 증가했다. 한동안 줄어들던 지하경제 규모가 최근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편 경제정책에서 빚어진 부작용이 꽤 기여했다. 첫째, 지난 1998년부터 정부가 부동산 부양정책을 편 것이 지하경제 자금을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게 해 단기 시세차익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줬다. 1998년 이래 정부의 주택경기 활성화 정책은 간단(間斷)없이 이어졌다. 1998년 주택경기 활성화를 위한 자금 지원 방안으로 국민주택 중도금 5조 6400억 원을 지원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1999년엔 주택자금 지원조로 중도금 4조 원, 그리고 추가 지원금 1조 7522억 원 지원방안을 내놓았다. 주택구입 자금 상환액에 대한 소득공제를 확대했고 주택구입 자금 대출 금리를 낮췄다. 2000년엔 11조 7000억 원 상당의 국민주택기금 지원 방안을 내놓았고 분양중도금 대출 한도를 올리는 한편 대출 금리는 내렸다. 지방 건설 활성화를 위해 사업비의 50%까지 지원하고, 재개발 조합원에게는 이주 전세금을 신규 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건설자금 융자 이율을 내렸다. 2001년엔 신축 주택 구입 때 양도소득세를 면제하며, 부산, 대구, 천안 등 6개 신시가지 개발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1998년~2001년간에 걸쳐 부동산 경기 부양을 위한 정부의 재정지출 규모가 약 23조 원에 달한다. 이런 부양책을 거쳐 전국의 지가는 2002년에 전년 대비 16.4% 올랐고, 서울 강남의 지가는 27.4%나 올랐다. 둘째, 역시 내수경기 부양을 위해 금융정책 당국이 금리를 내리고, 낮게 가져간 정책이 지하경제 자금을 공식경제로 흘러가는 길목을 막는 데 한몫했다. 1990년대 말 연 8~9%이던 실질 이자율은 지속으로 하락해 2003년 약 1.8%대로 떨어졌다. 일부 지하경제 자금은 정부가 저금리를 유지하면서 재정지출을 늘려 주택 경기를 띄우는 것을 보고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지가 상승에 따른 단기 시세차익을 봤다. 셋째, 정부가 내수 경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신용카드 발급 남발을 방치한 정책 등이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면서 불법 사채시장을 키웠다. 신용카드 발급 남발은 신용불량자의 양산과 사채시장 규모의 확대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지하경제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용불량자 수는 2000년 약 284만 명에서 2003년 약 370만 명으로 약 78.5%나 급증했다. 정부가 신용불량자 문제에 대응한다며 2002~2003년 현금 서비스 한도를 줄이자, 돌려막기 등으로 신용불량을 면하려 했던 사람들이 대부업체나 카드 할인을 이용하는 사금융으로 몰리면서 이 기간에 사채시장과 지하경제는 규모가 한층 커졌다. 지하경제를 줄여나갈 대책은 최근 늘어나는 지하경제를 줄여나갈 대책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정부가 진정한 의지를 갖고 단기적으로 경제이득을 취하려는 경제 주체들의 투기적 경제 활동을 근절해 나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장기적으로 지하경제의 양지화를 촉진해야 한다. 부동산 시장의 성장은 공식경제의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하지만 전체 경제성장 정책을 수단 삼아 임시방편으로 부동산 시장 띄우기를 앞세우는 경기 대책은 자제해야 한다. 지하경제를 축소시키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경제의 형평성과 효율성을 향상시켜야 하는데 부동산 투기는 이를 저해하므로 부동산 투기 억제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사금융 시장의 양지화와 관리감독 강화도 필요하다. 신용카드 남발에 따른 불법 사금융 시장 발달로 인해 지하경제 규모가 커진 예에서 보듯이 건전한 사금융 업체 양성화가 필요하고 불법 사금융에 대한 규제, 단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건전한 사금융 업체에는 과감한 세제혜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양성화 방안과 함께 고리대금업체에 대해서는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노동시장의 구조적 개혁도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선 최근 실업률을 줄일 목적으로 근로시간 감축이 추진되고 있는데, 그 결과 비정규직 근로자 고용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근로자 수(임시직+일용직)는 1999년 652만 9000명이던 것이 2002년엔 731만 9000명으로 약 12.1% 늘었다. 그 결과 실업률을 줄이는 쪽으로는 영향이 미미한 대신 불완전고용자들이 가난한 가계를 사금융에 의지해 메워나가는 성향은 높아져, 결국 지하경제가 더 커지는 결과가 빚어졌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비정규직 근로자는 축소하고, 노령인구를 위한 일자리 창출을 늘리는 방향으로 노동시장 구조를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특히 노령인구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중요하다. 인구 노령화로 인해 노령 노동자들의 지하경제 참여가 가속화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하경제 참여 억제를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고령자 일자리 창출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학생과 성인을 상대로, 지하경제를 타기(唾棄)하는 방향으로 경제 규범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탈세와 체납 등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세금과 경제에 관련된 교육도 더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신동호ㅣ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급할수록 신중한 생각 적어져 우리 속담에 ‘급할수록 돌아가라.’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는 말이 있다. 영어에도 ‘천천히 서둘러라(Make haste slowly)’ ‘급할수록 돌아가라(The longest way round is the shortest way home)’라는 속담이 있다. 급할수록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면서 움직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전해져 내려오는 격언이다. ‘급하면 서둘러야 하는데 왜 돌아가라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져 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던 분이라면 박남준 시인의 아래 글을 보면 아마 조금 이해가 갈 것이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뒤늦게 그걸 기억해 내고는 부랴부랴 옷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선 날이 있었다. 한참 산길을 내려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정작 그 약속은 내가 어떤 물건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책상 앞에 꺼내 두고는 다급한 마음에 미처 가지고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그걸 챙겨서 내려갔다. 으으 저런,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져서야 또 한 가지 빠뜨린 것, 이번엔 주머니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꺼내 둔 지갑을 집어넣지 않은 것이다. 시간은 이미 늦고도 늦었다. 시간을 좀 줄이기 위해 아랫마을 아는 분께 들러 사정을 이야기하고 차비를 꾸며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진땀을 흘렸던 날이었다. 비로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급히 서두르는 경우 늦어지는 것은 단지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서두르는 경우 전체의 속도가 늦어지는 사실은 실험을 통해서도 증명이 된다. 운동장, 공공시설, 지하철 등에서 군중들이 먼저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치다가 밟혀서 목숨을 잃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1990년에는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보행자 터널에서 무려 1426명이 깔려 죽는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다. 이런 문제 때문에 공공시설이나 지하철 등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통행자의 흐름을 원활히 하고 부상자가 생기지 않도록 복도와 비상구를 잘 설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서두를수록 더 느려지는 이유 독일 드레스덴 기술대학 디르크 헬빙 교수와 헝가리 에트보스 대학의 타마스 비첵 교수는 위기 속 개인의 행동을 계산해 집단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겁에 질려 도망치는 군중들의 행동을 컴퓨터로 모의 실험할 수 있는 것으로, 공공시설을 안전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동안 과학자들은 사람이나 교통의 흐름을 유체로 파악해 모의 실험을 해왔기 때문에 예측 결과가 정확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빨리 출구로 도망치려고 몸부림칠수록 사람들이 빠져 나가는 속도는 실제로 느려진다. 왜냐하면 빨리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넘어진 사람이 장애물이 돼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든 프로그램으로 모의 실험을 한 결과는 이렇다. 위험이 없는 상태에서 45초 동안 초속 1미터로 방을 빠져 나갈 때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은 90명이다. 하지만 초속 5미터로 나가려고 하면 서로 몸이 부딪쳐 65명밖에 나가지 못한다. 천천히 움직여야 더 빨리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화재가 일어난다든지 하는 공포 상황이 되면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치열한 몸싸움 속에 200명 중 5명이 쓰러진다. 쓰러진 부상자는 장애물이 된다. 따라서 이 경우 문 밖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의 숫자는 44명으로 줄어든다. 군중이 많으면 비극은 더 커진다. 400명이 나가려고 몸싸움을 하게 되면 24명이 깔려 죽게 되고 부상자들 때문에 45초 동안에 3명밖에 빠져 나가지 못한다. 연구팀은 비상구 바로 앞에 둥근 기둥 하나를 놓으면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두 갈래로 분산돼 빠져 나가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복도의 너비가 일정해야 탈출에 효율적이란 사실도 알아냈다. 복도가 좁았다가 넓어졌다가 하면 사람들이 앞사람을 제치려 하다가 좁아진 곳에서 더욱 격렬히 충돌하게 돼 탈출구로서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같은 사람을 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흔히 ‘세상 참 좁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 ‘우연한 일이겠지’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만일 60억 명의 세계인 가운데 어떤 한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려면 중간에 몇 사람이 이메일을 중계해야 그 사람에게 전달될까?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필요할 것 같지만 정답은 6명이다. 세상은 매우 넓은 것 같지만 도처에 지름길이 존재한다. 세상 어디에나 지름길은 있다 2003년 콜롬비아 대학 수학자인 던컨 와츠 교수는 전 세계 수만 명을 상대로 서로 아는 사이를 통해 전혀 모르는 몇 명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실험을 실시해 결과를 발표했는데 대부분 5∼7명을 건너 메일이 전달됐다. 6명만 건너뛰면 누구하고나 연결된다는 이른바 ‘6단계 분리’ 이론은 1960년대에 하버드 대학 사회심리학자인 스탠리 밀그램 교수가 체계화했다. 1967년 밀그램 교수는 네브래스카 주의 오마하에 사는 사람을 임의로 추출해서 160통의 편지를 띄웠다. 그 편지를 최종적으로 받아야 할 사람은 보스톤에 사는 한 증권 브로커였다. 편지 내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편지는 보스톤에 사는 증권 브로커에게 전달되어야 할 편지입니다. 이 증권 브로커의 이름을 참조해서, 귀하가 알고 계시는 분 중 가장 이 사람에 근접한 사람 한 분을 골라서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는 보스톤의 그 증권 브로커를 향해 아는 사람에서 아는 사람으로 전달됐다. 160통의 편지 중 최종적으로 증권 브로커에게 전달된 편지는 42통이었다. 전달된 편지가 몇 사람을 거쳐서 도착했는지를 조사해 보니 평균 5.5명이었다. 그 뒤 밀그램은 아무리 넓고 복잡한 세상도 대체로 6단계를 거치면 모두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일컬어서 ‘6단계 분리’라고 한다. 6단계 분리에서 힌트를 얻은 미국 코넬 대학의 스티븐 스트로가츠와 콜롬비아 대학의 던컨 와츠 두 수학자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어떻게 ‘좁은 세상’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모형을 만들어 1998년 과학 잡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모형실험 결과 세상에는 지름길이 있었다. 두 수학자는 전력 송전망과 생물의 신경망 그리고 2만 3500명의 배우를 수록한 인터넷 정보은행 등 3개의 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몇 안 되는 지름길이 ‘좁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좁은 세상 효과(small world effect)’라고 한다. 지름길이란 어떤 조직이나 시스템에서 고착된 영역을 뛰어넘어 통신이 이루어지게 해주는 사람이나 부품을 말한다. 부서 간, 계층 간 장벽을 넘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해주는 사람이 대표적인 지름길이다. 어떤 조직이나 기업이 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여 있으면 발전이 없다. 그래서 집단은 다양한 외부의 세계와 연결된 사람들이 모일 때 가장 큰 힘을 낼 수 있다. 또한 관료적 조직에서는 지름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회사마다 건의함을 만든다. 의사소통의 마비가 자칫하면 엄청난 파국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1986년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의 사고이다. 이 사고는 매우 낮은 온도에서 견디지 못하는 고리가 부서지면서 일어났다. 조사 결과 우주왕복선 수리를 맡은 기술자들은 이 부품이 온도에 민감해 폭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런 우려를 정책 결정자에게 알릴 수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두 수학자는 만일 기술자와 미국 항공우주국 최고 관리들 사이에 지름길이 있었다면 이런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네트워크는 어디에나 있다. 뇌는 신경세포의 네트워크다. 조직은 사람의 네트워크다. 세계는 국가 간의 네트워크이다. 경제는 시장의 네트워크이다. 시장은 공급자와 소비자의 네트워크다. 미국의 네트워크 판매회사가 국내에서도 막대한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것도 ‘좁은 세상 효과’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네트워크로 생각하는 사람이 앞서 간다 전염병의 확산에도 지름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사스도 한 명의 환자가 바이러스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스 발생 초기에 중국 광동성에서 사스 환자를 치료하다 감염된 한 명의 중국인 의사가 2003년 2월 21일 홍콩 메트로폴 호텔에 투숙한 뒤 이 호텔에서 12명의 외국 투숙객이 감염됐다. 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홍콩,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베트남, 아일랜드로 퍼져 3월 26일까지 249명에게 사스를 감염시켰다. 단 한 명의 의사가 사스를 순식간에 세계로 퍼뜨린 것이다. 따라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에는 이런 지름길을 차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 인터넷 망의 정보 흐름도 선이 굵을수록 통신량이 많다. 인터넷망은 두뇌의 신경망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인터넷 망은 거대한 두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침팬지 행동을 연구해 온 미국 에모리 대학 프란스 드 왈 교수는 “침팬지 사회에서는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침팬지 사회에서도 혼자서 잘난 체하는 것보다 네트워크가 강한 침팬지가 잘 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일을 하다가 장벽에 부딪치면 인맥을 동원해 문제를 푼다. 세상에서는 인맥이 두터운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꼽힌다. 학연과 지연을 타파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세상 어디에도 학연과 지연이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연과 지연도 인터넷의 등장으로 점차 낡은 네트워크가 되어 가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지구촌에는 상상할 수 없이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네트워크 사이에서 광속으로 흘러가는 정보는 과거의 인적 네트워크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르다. 게다가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순식간에 지름길을 찾아내는 서치엔진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인터넷은 전 세계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통합하고 있다. 지식의 통합은 필연적으로 지능을 낳는다. 전 세계의 인터넷 망을 보면 1000억 개의 뉴런이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된 뇌와 모양이 매우 흡사하다. 지구적 규모의 인터넷 네트워크는 발전되면 될수록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는 뇌가 될 것으로 보는 과학자들이 벌써부터 생겨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맥이 두터운 사람이 잘 나갔지만 앞으로는 인터넷을 잘 쓰는 사람, 세상을 네트워크로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M/ 아시리아 인, 오리엔트 최초 통일 내륙 교역의 중심지로서 변화무쌍한 메소포타미아 지역, 그리고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조용하게 딴 살림을 차리고 있는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아시리아 인이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면서 상대방이 강하거나 힘이 비슷하면 정상적인 교역을 하지만 만약에 세력이 약한 도시를 만나면 힘으로 정복하는 셈어계의 유목민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 지역은 민족수 만큼이나 생각하는 것도 다른 모자이크 형 지역이어서 아시리아 인들은 교역과 정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과정에서 막강한 전투력과 우수한 철제 무기와 전차, 그리고 기병 등을 확보하여 기원전 7세기 중엽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세계를 최초로 통일하였다. 그런데 아시리아가 정복한 그들의 영토 내에 서로 다른 이질적 민족을 떠안았지만, 무조건 힘으로만 억누르는 강권통치로 피정복민의 목숨을 건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유일하게 일신교를 믿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종교적으로 혹독한 탄압으로 신음하였고, 살마네셀 왕 때 많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포로로 끌려가 수많은 고초를 당하였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11세기에 다윗 왕이 대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 왕이 죽자 나라는 북부의 이스라엘과 남부의 유다 왕국으로 나뉘어져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마침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민족들이 들고일어나 무자비한 정복자 아시리아에 대한 무장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 통일제국을 무너뜨린다. 이는 피지배 민족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든 결과였다.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 기세등등했던 아시리아가 붕괴되자 오리엔트는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 통일 이전에는 여러 민족과 도시가 난립하였으나, 이제는 크게 네 나라로 구조조정이 되었다. 즉, 이집트의 신왕국, 소아시아 지방의 리디아, 메소포타미아의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였는데, 신바빌로니아는 칼데아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 남부의 유다 왕국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에 한동안 아시리아에 예속되어 왕국 자체는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이제는 그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신바빌로니아의 네브가드네사르 2세가 기원전 586년 오갈 데가 없는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대규모의 유대인들을 그들의 수도 바빌론으로 끌고 갔는데 이를 ‘바빌론의 유수’라 한다. 그는 부왕이 추진하였던 거대한 태양신의 성탑을 세웠는데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재건이었으며 19세기에 독일의 탐험대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신앙을 종교로 승화시킨 헤브라이 인 그럼 아시리아에 정복당한 북부 이스라엘, 그리고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한 남부 유다 왕국의 백성들, 즉 지금의 유대 인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그들이 이룩한 종교가 서양문화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니 말이다. 고대에는 유대 인을 헤브라이 인이라 불렀다. 셈어계 유목민에 속하는 그들은 기원전 1850년경 아브라함의 영도 하에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섰는데 그들은 주변 각지를 전전하다가 심한 기근을 피하여 이집트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들어갈 때는 이집트 조정에서 봉직한 요셉 덕분에 환영을 받았지만, 나올 때는 노예의 신분으로 갖은 박해를 받다가 모세의 영도로 목숨을 건 민족의 대탈출이 이루어졌다. 이때가 기원전 1250년 무렵이었다. 모세의 뒤를 여호수아가 이어받아 기원전 1220~1200년 사이에 야훼가 약속한 땅 ‘가나안’을 정복하였다고 하는데, 여호수아가 죽은 뒤인 기원전 1200~1025년의 시대적 상황은 고대국가 형성 이전의 부족동맹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다른 민족과 같이 부족 동맹체에서 발전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때가 기원전 1025~586년까지의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사이다. 원래 부족동맹 체제였던 이스라엘이 서부 해안의 블레셋 족과 동부 요르단 산악지대의 암몬 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원함에 따라, 이웃나라의 왕정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그곳을 통합왕국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였다. 부왕(다윗)이 죽자 왕위를 계승한 솔로몬은 기원전 970~933년까지 통합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렸지만 여러 가지 실정으로 인심을 잃어 그가 죽자 통일왕국은 남·북, 두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북 왕국은 ‘이스라엘’이란 국호로 기원전 933~721년까지 유다와 베냐민의 일부 지파를 제외한 10지파가 모인 왕국을 이루고 후에 ‘사마리아’가 수도가 되었으며, 정통 다윗 왕가를 계승한 남 왕국 유다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다윗의 손자이며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함으로부터 약 346년간 20명의 왕들이 통치하게 된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완충지대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리엔트 세계의 패권다툼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말한 참담했던 바빌론의 유수,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는 한편, 신앙 차원에 머물러 있던 것을 종교로 업그레이드 하기 시작하면서 유대교 경전의 뿌리가 되는 모세 오경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모세 오경이란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가리키며 천지창조로부터 이집트 탈출과 40년간의 방랑생활 가운데 야훼의 백성이 되기 위한 모든 규범과 율법이 기록되었으며, 모세 이후의 여러 예언자의 예언서와 역사서·교훈서가 합쳐져 구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다. 즉,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의 모체가 되었으며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에게도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쉽게 말해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 신약성서를 추가하여 성전으로 삼은 종교가 그리스도교,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에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편집한 ‘코란’을 성전으로 삼은 종교가 이슬람교이다. 이렇게 성립된 유대교는 유대인의 생활을 근본부터 규정하고 있는 독특한 사고방식이고 인생관 그 자체이며 신앙생활의 중심은 모세를 통해서 유대 인에게 계시된 율법(토라)이다. 유대 인들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오래된 율법을 각 시대적 상황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해석과 주석을 달아 왔는데 이것이 ‘미슈나(반복)’이며, 다시 미슈나의 해석을 정리한 것이 ‘게마라(보완)’이고, 이 두 가지(미슈나+게마라)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탈무드(연구)’인데, 보통 유대인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탈무드이다. 탈무드 정신으로 이스라엘 공화국 재건 헤브라이 판 명심보감이 바로 탈무드이며 세계인들은 유대인을 일컬어 ‘가장 교육적인 민족’이라 하였다. 때문에 3000여 년의 핍박과 2000년의 무국적 민족, 심지어는 아돌프 히틀러의 민족말살정책(홀로코스트)의 대상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유대인의 비극은 이미 서기 70년대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79~81)가 로마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 시작되었다. 티투스는 로마의 통치에 거세게 반발하는 유대 민족주의자들과 그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말살작전을 감행하였고 그 이후 유대 민족은 디아스포라, 즉 나라 없는 유랑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유수시대’를 거치고 헬레니즘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개한 시오니즘 운동을 근세기에 이르러서는 제2의 건국운동으로 전개하여, 결국 서기 1948년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구현하기 위해 다윗의 별을 그들의 국기에 그려 넣고 이스라엘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무려 2000여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유대인들은 멸시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그들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종교를 지켜왔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주변을 포위한 절대 열세의 아랍 민족들과의 수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르면서도 꿋꿋하게 영토를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거듭되자 오히려 가자·골란 지역 일대로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의 저력은 그들의 교육, 다시 말해서 ‘탈무드’에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탈무드를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을 거듭하면서 다음 세대에 물려줌으로써 교육과 행동규범의 지침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마 유대교 랍비들이 경전의 시대적 해석을 게을리 했더라면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해 그들은 수용소 가스실에서 모세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절규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오리엔트 재통일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인도·이란어족에 속하는 민족이 페르시아만(걸프만) 동부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메디아(Media)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메디아는 기원전 8세기 말에 이란 고원의 북서부에 메디아 인들이 세운 왕국이며, 신바빌로니아와 함께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이란 전토에 걸친 땅을 차지했던 나라다. 기원전 500년경 키로스의 지도하에 반란이 일어나 메디아를 멸망시키고, 새로 나라를 건국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Persia)이다. 사실 페르시아 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페르시아라고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란 이름은 고대 그리스 인들이 이란의 서부지역을 ‘페르시스(Persis)’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즉 ‘페르시아’란 말이 그리스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면, ‘이란’이란 그들 스스로 이름을 붙인 ‘고귀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리안’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아는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525년에는 제26 왕조의 이집트도 멸망시켜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대 최후의 통일국가였다. 페르시아는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했던 아시리아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복지의 관습을 존중하고 자치를 인정하는 관대한 정책을 폈다. 덕분에 바빌론에서 집단적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특히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BC 522~486)의 치세에 화폐의 주조와 교통망의 정비로 광범위한 교역과 문화교류가 이루어지는 한편, 수사에서 사르데스에 이르는 ‘왕의 길’을 닦고 새 도읍지로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지만,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와의 ‘이소스-가우가메라 전투’에서 패하여 멸망함으로써 역사의 축은 오리엔트에서 서방세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 고대 페르시아 인들의 종교에 대한 지식은 주로 ‘젠드 아베스타’, 즉 페르시아 인의 경전으로부터 얻은 것이며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는 탁월한 종교 개혁가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조로아스터교의 교의가 키로스 시대(BC 550년)부터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정복까지 서아시아 지방의 주된 종교가 되었음은 확실하다. 마케도니아 왕정 치하에서 외국의 여러 사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조로아스터의 교의도 많이 변질되고 퇴색하였지만 나중에는 다시 교세를 회복하였다. 조로아스터교 역시 원래 하나의 창조주를 가르치고 있지만 다른 두 신을 창조하고 자신의 본성을 그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이원론적 교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우주의 역사는 ‘창조·혼합·분리’라는 3단계로 구분되는데, 현재의 세계는 ‘혼합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선신과 악신의 싸움이 천국과 지옥의 중간인 이 우주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대의 조로아스터교는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바빌론의 유수시대에 유대교에도 많은 영향을 줌으로써 신학적인 발전과 조직화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조현호ㅣ 울산 옥현초 교사 다리 이야기 ‘다리’에 관한 기억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봅니다. 어머니가 대뜸 ‘막내 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웃으며 이야기 하시길래 그 말이 진짜인 줄 알고 얼마나 섭섭해 했는지 모릅니다. 나만 주운 자식이라서 차별하는 것 같아 길을 걸어가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다리 밑으로는 수많은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퐁네프의 다리’나 ‘오작교’와 같이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기도 하고 ‘콰이강의 다리’ ‘자유의 다리’처럼 시대적 아픔이 흐르기도 합니다. 다리에는 다리 밑에서 주웠다는 탄생에서부터 ‘선죽교’의 참변과 같은 죽음도 있습니다. ‘삽교’, ‘벌교’ ‘석교’ 등 다리와 관련한 지명도 많습니다. 가장 원시적인 징검다리에서부터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건설된 엄청난 높이의 영동고속도로 다리도 있고 서해대교, 광안대교와 같이 바다를 횡단하는 초현대식 다리도 있습니다. 다리는 이곳에서 다른 저곳으로 옮겨주는 통로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과거로부터 이 시대를, 나아가 미래까지 엮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전설과 설화, 그리고 기록 속에 남겨진 옛 다리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효인가 불효인가 - ‘효불효교(孝不孝橋)’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 중에 ‘솔로몬의 선택’이 있습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읽어 보시고 솔로몬이 되어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경주 효불효교(孝不孝橋)와 관련한 전설입니다. 신라시대 한 여인이 남편을 일찍이 잃고 칠형제를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여인이 밤만 되면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밤에 아이들이 자고 나면 살짝 집을 빠져나가 남천(南川)의 찬 물살을 맞으며 건넛마을로 넘다드는 것이었죠. 어머니에게 새 남자가 생겼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의논 결과 개울에다 돌다리를 놓아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밤새 후다닥 서둘러 멋진 돌다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동트는 새벽에 집에 들어오던 그 여인은 개울에 다리가 놓여 있음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이 다리를 놓은 사람은 후세에 하늘나라에 가서는 별이 되었으면 하고 감사의 뜻을 전했죠. 아니나 다를까 이 아들들이 뒤에 죽어 하늘에 올라서는 북두칠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밤하늘 별이 되어 어둠을 밝히며 세상의 어머니들을 지켜준답니다. 아들들이 만들어준 그 다리를 ‘칠성교’라고도 함은 일곱 아들이 다리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어머니에게 다리를 놓아 드렸으니 효는 효인데,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자니 불효입니다. 그래서 이 다리를 ‘효불효교’라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효입니까, 불효입니까? 전설 속의 다리는 경주박물관 인근 일정교지라고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 기록에는 ‘궁의 남쪽 문천상에 춘양월정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춘양교가 바로 효불효교이자 일정교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인근의 월정교는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싹튼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정교와 월정교는 그 형태나 축조법이 매우 흡사하며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교각의 형태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배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발굴 결과 교각이 모두 3개소이고 불탄 목재와 기와가 수습되어 누각형 교량이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효인가, 불효인가’, ‘중이 파계하여 결혼을 했다’는 당시 신라에서 떠들썩했을 법한 이야기들이 지금도 남천 바닥 석부재에 묻혀 있습니다. 몸뚱이로 만든 놋다리 어너 연에 청계상에, 놋다리야 놋다리야 / 이 터전은 누 터이고? 나라님의 옥터일세 / 이 제애는 누 제애로? 나라님의 옥제일세 / 손이 왔네, 손이 왔네. 정상도에 손이 왔네 / 무슨 곳에 쎄애 왔노? 여기 곱게 쎄애 왔네 / 멧 대간을 밟고 왔노? 쉿댓 간을 밟고 왔네 / 무슨 옷을 입고 왔노? 백마사주 구두바지 고벡 니비 입었드네… (下略) 놋다리는 경상북도 일대에서 음력 정월대보름날 밤에 행해지던 부녀자들의 놀이로 기와밟기 또는 사람다리[人橋]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기와밟기’란 줄줄이 앞 사람의 허리를 껴안고 머리와 허리를 수그린 모습이 마치 기와지붕의 기와를 깔아놓은 듯 겹쳐져 있으며 그 기와지붕 같은 위를 밟고 지나간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울산지방에서는 ‘재넘자놀이’라고 부릅니다. 첫 구절을 공주님이 부르면 뒤 구절은 다른 여인들이 일제히 목청을 모아 노래 부릅니다. 놋다리는 사람 몸뚱이로 만든 다리입니다. 때는 공민왕 10년(1361)으로 10만의 홍건적이 고려를 침범한 뒤 왕과 왕비가 몸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온 12월 15일이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먼 길을 오느라고 고생한 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마을 여인들이 중계천(中溪川)에 줄줄이 늘어서서 놋다리를 만들어 공주를 밟고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이 놋다리가 마침내 안동 지방의 놋다리밟기 전통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놋다리밟기’는 지금도 축제 때나 학교 운동회 할 때 많이 즐기는 놀이입니다. 애달픈 연인들의 사랑이 흐르는 오작교 고주몽 편에는 주몽이 강을 건널 때 어별(魚鼈, 물고기와 자라)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동물들이 다리를 만들어 준 최초의 사례라 하겠습니다. 동물들이 만들어준 다리는 오작교(烏鵲橋)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옥황상제의 딸 직녀와 소몰이 견우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하고 후에는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일 년 중 칠월칠석날 단 하루만 은하수에서 만나는 처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다리가 없어 서로 만나지 못하고 눈물바다를 이루자 그 사연을 안 까막까치들이 모두 은하수로 올라가 다리를 만들어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는 이야기지요. 천상의 직녀와 지상의 견우가 만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함은 곧잘 남원부사의 아들 몽룡과 전직 기생의 딸 춘향이 사랑한다는 춘향전에 비견됩니다. 그래서 두 청춘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남원 광한루 앞 호수에는 오작교라는 돌다리가 있습니다. 호수의 물은 은하수요, 오작교는 까막까치들이 만들어주는 다리를 형상화 한 것이죠. 이렇듯 오작교는 젊은 연인들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오늘도 흘러갑니다. 그리고 사랑을 확인하고픈 현대판 견우들과 직녀들이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 ‘다리 밑에서 주운 아이’의 본적은 전다리 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에 속하는 순흥 지역은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는 곳입니다. 주세붕이 안향의 영정을 모시고 있던 사묘에 학사를 세우고 ‘백운동’이라는 이름의 서원을 만들었고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임금인 명종에게 새 이름을 지어줄 것을 건의하여 ‘소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지요. 학문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까닭입니다. 사방에서 글 읽는 소리가 쟁쟁하던 학문의 고장이요, 그 학문이 현실에 반영된 충절의 고장인 이곳에 청다리가 있습니다.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로 변했지만 이 다리가 바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이야기의 진원지입니다. 이곳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이들에게도 인간적인 고뇌가 많았을 터입니다. 이론과 현실에 대한 격리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유생들 사이의 불협화음도 있었을 터이고 혹자는 과락 판정을 받고 괴로워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이곳까지 왔건만 도중에 낙오자도 있었을 터이고, 술로써 학문을 논하던 주당파도 있었을 터입니다. 학문이야 불변의 진리에 가깝지만 그 학문을 쫓는 이들은 인간인지라 나름대로 고뇌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한창 피 끓는 청춘에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있다 보면 현지 여인들과 정이 들어 덥석 아이를 낳게 되기도 했겠지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키울 입장이 못 되는지라 이 아이들을 다리 밑에 내버렸다는 데서 청다리가 유래합니다. 혹자는 다리 밑에 버린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데도 ‘다리 밑에서 주운 아이’라며 데리고 가 양육하기도 했을 겁니다. 한편, 이곳에는 금성단이라는 제단이 남아있는데 이곳이 충절의 고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조 때 이곳 순흥에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단종복위 계획을 도모하다 들통 나는 바람에 순흥도호부 전체가 몰살되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피가 죽계수 10여 리를 붉게 물들였다고 하는데 ‘피끝마을’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순흥사람들은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고 참절당한 후 죽계수 아래 시체더미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 어린 아이들을 보고 관군들이 ‘이 어린애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하여 죽이지 않고 데리고 가 키웠다고 해서 청다리가 유래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배를 엮어 만든 배다리 잘 아시다시피 정조는 효성이 지극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을묘년(1795)에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과 아버지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8일간 행차를 떠납니다. 이 을묘원행길은 한강에 이르러서는 배를 잇대어 만든 배다리[舟橋]로 이동하였습니다. ‘노량주교도섭도’를 보시면 당시 상황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배다리는 폭군으로 알려져 있는 연산군도 애용하였습니다. 그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특히 청계산을 자주 들렀습니다. 청계산으로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했으며 그 때마다 배다리를 만들었는데 그때 동원된 배가 8백 척이었습니다. 또한 한 번 사냥을 가면 5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습니다. 를 보면 연산군 11년 10월 25일에 좌의정 박숭질로 하여금 군사를 감독하여 사냥을 하라고 보냈는데 박숭질이 돌아와 임금에게 바친 것은 꿩 한 마리였습니다. 이에 임금은 정승으로서 5만 명을 동원해 겨우 꿩 한 마리를 잡았다며 화를 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꿩 한 마리 잡으러 좌의정이 산을 타고 5만 명이 짐승을 몰러 다니고 한강에는 8백 척으로 만든 사냥 전용 배다리가 놓였던 것입니다. 물 위에 흙길이 떠 있는 섶다리 겨울철에 강원도 산간 지방에 가면 섶다리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보기 어려워졌고 그나마 다리로서의 기능보다는 전시용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섶다리야말로 ‘가장 다리 같지 않은 다리’라고 봅니다. 이 말은 가장 흙길에 가까운 다리란 의미입니다. 강원도 영월 주천면으로 떠나 봅시다. 섶다리는 나무와 흙으로 만든 다리이지만 흙으로 다져 밟고 지나기 때문에 흙다리입니다. 수량이 적고 강물이 얼어 배를 이용할 수 없는 겨울철에 한 때 사용하는 임시 다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리를 지나가면 흙이 주는 부드러움과 나뭇가지들이 만들어 내는 탄력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그 기분이란 풍선을 밟고 지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출렁거림이 미묘한 반동을 부추겨 기분 좋은 일이 막 생길 것 같습니다. 그 반동이 주는 느낌이란 콘크리트 다리에서 느끼는 기계적인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정감이 넘칩니다. 장날 술이 얼큰하게 된 마을 어른들이 섶다리를 건너오다가 도랑에 빠지기도 하였다는데 섶다리를 한번 밟아보신 분은 충분히 그 이유를 아실 터입니다. 그 푹신함에 일부러라도 자빠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다리입니다. 자연에서 얻은 나무와 흙으로 자연에 얼기설기 엮어 만든 다리, 그 자연산 다리는 여름철 물살이 사나와지면 휩쓸려져 다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바다 밑으로 걸어가는 해저다리 통영은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으로 예로부터 군사적 요지였습니다. 통영시내 아래 남쪽으로는 미륵도라는 섬이 있는데 통영과 미륵도 사이에 판데목이라는 좁은 지형이 있습니다. 이 목은 풍수학상으로 통영의 목구멍에 해당된다 하여 이곳을 틔우면 길하고 막히면 흉하다 하여 제208대 홍남주 통제사때 막혔던 목을 틔우고 그 위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러다 1927년 일제는 다리가 있던 자리에 해저터널을 팠습니다. 다리를 바다 밑에 설치한 것입니다. 1931년 7월에 착공하여 1년 4개월 만에 완공한 동양최초 해저터널은 길이 483미터, 너비 5미터, 높이 3.5미터이며 바다 양쪽을 막고 그 밑을 파서 콘크리트 터널로 만들었습니다. 터널 입구에는 ‘섬과 육지를 잇는 해저도로 입구의 문’이란 의미로 용문달양(龍門達陽)을 써 놓았습니다. 1967년부터는 철근 콘크리트 교량인 충무교가 개통되면서 해저도로를 통한 차량통행을 금지되었지요. 비록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다리이지만 우리나라에 유일한 해저터널이며 지금도 미륵도 사람들과 통영 사람들이 바다 밑으로 걸어 다니며 왕래하는 해저다리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다리들 낙산사가 화마에 휩쓸리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할지라도 수십 년, 수백 년을 이어온 문화재는 다시는 원상대로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이뤄 놓은 시간의 때는 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득세하는 요새, 옛다리 또한 주위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전국의 돌다리를 찾아갑니다.
5월 31일 오전 11시. 구룡포읍 병포리 방파제에서 경북 황성길 정무부지사, 이상득 국회의원, 정장식 포항시장, 경북도의회의원, 포항시의회의원, 해양수산유관기관장, 어업인, 학생 등 500여 명이 참석해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진취적인 해양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다. 구룡포 여중·고생 90명과 교사 8명도 바다의 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바다의 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해양 개척 정신을 함양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기념식을 마치고 넙치, 조피볼락 등 수산종묘 5만 마리를 방류하여 풍어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여름을 방불 하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어린 여학생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바다 주변의 환경 정화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땀 흘리며 휴지도 줍고 오물도 제거하여 바다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나니 학생들도 보람을 느끼며 즐거워하였다. ‘바다의 날’은 1996년 5월 31일에 제정되어 금년에 10회 째를 맞고 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반도국으로 바다와 함께 5천 년의 역사를 살아온 민족이다. 바다는 보이지 않게 인간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다량의 산소를 공급하여 주며, 수많은 어족과 해초류를 제공한다. 그리고 해저에는 석유를 비롯한 다량의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또 바다는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운송 길이 되어 주며, 시인 묵객들에게는 사색의 정원이 되어주고, 여름철에는 사람들의 더위를 식혀주는 해수욕장이 되기도 한다. 미래 사회의 자원개발 영역은 바다라고 한다. 이미 선진국은 해양자원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다의 날’을 맞아 우리 모두 바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바다를 가꾸고 보호하며 개척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는 1일 오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영유아보육과 유아교육 등 육아지원 정책개발을 위한 '육아지원 정책기획단'을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기획단장은 이경숙(李景淑) 이계안(李啓安) 의원이 공동으로 맡고, 유승희(兪承希.간사) 김현미(金賢美) 이인영(李仁榮) 김형주(金炯柱) 이기우(李基宇) 김우남(金宇南) 홍미영(洪美英) 의원 등이 참여한다. 기획단은 저출산 해법의 우선과제가 육아지원정책이라고 보고 올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 입체적인 육아지원정책에 대한 감사를 추진하고 내년 예산확보에 만전을 기한다는 방침이다. 또 여성경제활동 참여 및 출산율 제고를 위한 다양한 인센티브제를 도입하는 등 실효성 높은 육아지원 정책을 개발하는 한편 육아지원 '옴부즈맨'을 구성해 현장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고, 농어촌 육아문제, 방과후 아동보호 문제, 취업여성에 대한 육아지원 문제 등에 대한 간담회도 추진할 예정이다.
수능시험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 하는 2006학년도 수능시험 첫 모의평가가 1일 오전 8시40분부터 전국 1932개 고교와 240개 학원에서 일제히 실시된다. 이번 모의수능은 시험 성격과 출제방향, 출제 영역, 문항수 등이 오는 11월23일 치러지는 본수능과 같은 형식으로 실시돼 수험생에게 시험 준비도를 스스로 진단하고 보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행되는 것. 또 모의평가 출제, 시행, 채점과정에서 문제점을 파악, 개선점을 찾아 보완하고 채점 및 문항 분석 결과를 본수능 출제 및 난이도 조정에 반영하게 된다. 특히 교육인적자원부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교육방송(EBS)의 수능강의와 긴밀히 연계하겠다고 밝혀 이번 모의평가가 연계방법이나 반영률 등의 가늠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험은 영역별로 본수능과 똑같이 ▲1교시 언어(오전 8시40~10시10분) ▲2교시 수리(오전 10시40 ~낮 12시20분) ▲3교시 외국어(영어,오후 1시20~2시30분) ▲4교시 사회/과학/직업탐구(오후 3~5시6분) ▲5교시 제2외국어/한문(오후 5시35~6시15분)의 순으로 진행된다. 평가원은 "언어ㆍ외국어영역은 범교과적 소재를 바탕으로, 수리영역과 사회/과학 /직업탐구영역 및 제2외국어/한문영역은 개별 교과의 심화선택과정을 중심으로 출제했다"며 "교육방송(EBS) 수능강의와의 연계 내용 또는 정도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해 모의고사나 본수능과 마찬가지로 EBS 수능방송 및 인터넷강의에서 영역별로 80~85%의 문항이 직ㆍ간접적으로 연관될 것으로 예상된다. 평가원은 시험 직후 정답을 공개한 뒤 6월5일까지 이의신청을 접수해 심사를 거쳐 14일 정답을 확정하고 24일까지 성적표를 수험생에게 통보할 예정이다. 성적통지표에는 영역 및 과목별 표준점수, 표준점수에 의한 백분위와 등급이 표기된다. 교육부와 평가원은 본수능과 마찬가지로 수정용 테이프를 사용한 답란 수정이 허용되고 지난 3월말 확정 발표한 '수능 부정행위 방지 종합대책'에 따라 매교시 답안지에 일정한 길이의 시나 금언 등을 자필로 기재하도록 하는 필적확인란을 신설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올해 본수능부터 조직적인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해당 시험을 무효로 하는 것은 물론 향후 2년간 응시자격을 제한하는 등 '강도높은' 부정방지 대책이 시행된다고 강조했다. 평가원이 주관하는 2차 모의수능은 오는 9월7일 실시된다.
이번 수능 모의평가에 지원한 수험생은 언어영역을 선택한 지원자를 기준으로 재학생 51만4천826명, 재수생 9만2천639명 등 60만7465명이다. 따라서 올해 수능시험을 치르는 대부분 수험생이 응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7차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을 반영했으며 언어와 외국어(영어)는 범교과적 소재를 바탕으로, 그리고 수리 및 사회/과학/직업탐구와 제2외국어/한문은 개별 교과 내용을 중심으로 출제했다고 설명했다. ◆수험생 선택 경향 = 제7차 교육과정이 처음 적용된 지난해 수능시험부터 수험생들은 계열 등에 관계없이 자신의 능력이나 흥미, 진로, 필요 등에 따라 모든 영역과 과목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영역별로 언어(60만7천465명)와 수리(59만5천805명), 외국어(60만6천663명), 탐구(60만8천182명) 등의 영역은 대부분 수험생이 선택했다. 탐구영역을 선택한 수험생이 60만8천182명인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이번 모의평가에 지원한 수험생은 이 숫자를 넘어서는 것. 수리영역 수험생 가운데 수학Ⅰ 및 수학Ⅱ, 그리고 미적분을 포함한 선택과목까지 출제 범위에 포함되는 '가'형을 선택한 수험생이 17만9천893명(30.2%)인 반면 수학Ⅰ에서만 문제가 나오는 '나'형을 고른 수험생이 41만5천912명(69.8%)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회/과학/직업탐구 중 1개만 선택할 수 있는 탐구영역은 사회탐구를 고른 지원자가 32만858명(52.8%)으로 절반을 넘었고 과학탐구 20만2천399명(33.3%), 직업탐구 8만4천925명(14%)이었다. 제2외국어/한문을 치르겠다고 신청한 수험생은 10만2천242명으로 전체의 6분의1 정도였다. 전통적으로 쉽다고 여겨지는 영역이나 과목으로 수험생들이 쏠리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것. 수험생 중 특별관리 대상자는 약시 21명, 청각장애 87명 등 108명으로 이들에게는 확대 문제지나 듣기평가 대본이 제공됐다. ◆출제 기본방향 = 모의수능 출제위원단은 "7차 고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을 충실히 반영해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학능력을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언어 및 외국어(영어)는 범교과적 소재를 바탕으로, 수리 및 사회/과학/직업탐구, 또 제2외국어/한문은 개별 교과의 특성을 바탕으로 사고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특히 고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춰 출제, 학교수업에 충실한 수험생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내용을 출제했다고 출제진은 강조했다. 아울러 편중되거나 지엽적인 내용의 출제를 지양함으로써 고교 교육의 정상화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는 것. 이와 함께 단순 기억에 의존하는 문항보다 주어진 상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추리ㆍ분석ㆍ탐구하는 사고력을 측정하는 문제를 위주로 출제했으며 각 문항은 교육과정상의 중요도와 난이도, 사고 수준, 소요 시간 등에 따라 차등 배점했다. 출제진은 또 사회탐구 11과목, 과학탐구 9과목, 직업탐구 17과목, 제2외국어/한문 8과목 등 선택과목간 문항을 상호 비교하고 검토함으로써 난이도가 영역별로 서로 비슷하도록 애썼다고 밝혔다. 이전 수능시험에서 나왔던 기출문제라도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핵심 내용은 문항의 형태, 발상, 접근 방식 등을 다소 수정해 출제했으며 출제위원의 40%를 고교교사로 구성했다. 수험생들이 EBS 수능방송 및 인터넷 강의와의 연계 내용 또는 정도를 체감할 수 있게 했으며 그 방식으로는 영역 및 과목별 특성에 따라 지문을 확장 또는 축소하는 방법, 도형ㆍ삽화ㆍ그림을 이용하는 방법, 상황을 활용하는 방법, 중요 지식ㆍ개념ㆍ원리ㆍ어휘를 사용하는 방법 등이 동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