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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수포자의 증가추세가 심각하다 지난 8월 좋은교사운동이 중·고등학교 수학교사와 교육전문직 160명을 대상으로 2022 수학교육과정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것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학교사들은 미적분, 확률과 통계 등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게 하는 것보다 수포자(수학포기자) 해결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2020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 결과 중・고등학생의 ‘수포자’ 비율이 13%를 돌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현행 표집 평가가 시행된 2017년 이후 가장 높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원격수업과 등교수업을 병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학습 결손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국가수준의 공식 통계가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포자를 질병으로 보는 이상한 세상 그동안 여러 학부모와 학생, 수학 전공 교사들을 만나서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 “왜, 아이들이 수학을 포기할까요?”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었다. 아이들의 실력을 줄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학교나 학원 교사도 못 푸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출제하면서, 아이들은 수학 수업에 대한 흥미와 즐거움을 수학 시험의 허무함과 공포로 모두 포기해 버리는 자포자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 학생들의 수학과 과학의 성취도는 최상위권이다. 지난 2020년 12월 교육부에서 발표한 ‘국제 교육 성취도 평가 협회’의 ‘수학, 과학 성취도 추이 변화 국제비교 연구 2019’ 결과에 따르면, 한국 초등학교 4학년과 중학교 2학년의 수학, 과학 성취도가 국제적으로 최상위권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에는 58개국 초등학생 약 33만 명, 39개국 중학생 약 25만 명이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2018년 12월에 345개교의 학생 1만 2,101명이 참여했다. 한국 초4 학생의 수학 성취도는 국제 평균을 500점으로 봤을 때 600점으로, 58개국 가운데 싱가포르(625점), 홍콩(602점)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한국 초등학생의 성취도는 이 평가가 처음 시행된 1995년부터 수학 2~3위로, 꾸준히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학에 자신감이 있는 학생은 64%로, 국제 평균 76%보다 낮다. 수학에 흥미가 있는 학생은 60%로, 마찬가지로 국제 평균(수학 80%)보다 낮다. 한국 중2 학생의 수학 성취도는 607점으로, 39개국 가운데 싱가포르(616점), 대만(612점)에 이어 3위였다. 1995년 이 평가가 시작된 이래 한국 중학생의 수학 성취도는 1~3위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또, 수학 실력이 가장 뛰어난 ‘수월 수준(625점 이상)’ 이상 학생 비율은 45%로 나타났다. 한국 중학생 중 수학에 자신감이 있는 학생은 46%, 흥미가 있는 학생은 40%로 국제 평균(자신감 있음 57%, 흥미 있음 59%)보다 낮았으며, 수학 학습이 가치가 있다고 보는 학생은 70%로 역시 국제 평균(84%)을 밑돌았다. 한마디로, 한국 학생들의 수학 과목 성취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나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는 최저 수준으로, 잘하지만 억지로 공부하는 셈이다. 수포자를 병으로 몰아세우는 사회 인식 수학을 포기하는 이른바 ‘수포자’가 늘고 있는 가운데, 현장에서는 수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수학을 못하는 것을 병으로 보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게다가 학원이나 공교육 곳곳에서 수포자를 치료하겠다고 병원에서 쓰는 ‘수학 클리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수포자들을 더욱 회복되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린 것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우리 사회가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을 수포자로 매도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수학 평가 점수를 100점이라고 하면, 어떤 학생들은 50점에 접근하고도 만족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00점만 수학을 잘한다 생각하고, 50점대 학생은 수학을 못하고 따라가지 못하는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시선과 상처들이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누적되어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흥미는 더욱 떨어지게 된다. 학원들이 밀집한 건물의 카페에 들어서면, 학원 수업 시간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대부분 수학 문제만 풀고 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수학 문제의 수준이 쓸데없이 높아요.”, “너무 많이 배우고, 너무 깊게 배우고, 범위도 엄청 많아요.”라고 말한다. 최근에 학생, 학부모들은 지금도 배울 수학 내용이 너무 많으니 교육과정에서 덜어 내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수학 학계에서는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학 교육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치되는 형국이다.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을 예방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대안이 중요하다. 수학으로 바라보는 세상 읽기 수포자를 예방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등이 수학이라는 학문을 대하는 자세에 그 해답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수학 교과서의 원리, 개념, 증명 등의 다양한 수학적인 지식들을 세상 속의 자연 현상과 만나게 해서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야 한다. 수학 수업과 이 세상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우는 수학은 세상과 관련 있고, 가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교육과정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학수업이 이뤄지는 교실에서는 세상과 관련된 수학을 통해서 수포자들이 수학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만을 푸는 것은 수학의 본질이 아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성적, 대학수학능력시험 등에 자유롭지 못한 학생들은 수학 점수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수학 문제를 잘 풀어서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 다양한 유형의 문제를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하여 풀면서 학생들은 수학을,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이나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 아닌, 그냥 다른 학생들보다 난이도 높은 수준의 문제를 많이 해결하여 좋은 점수를 받아야 되는 과목으로 생각하게 된다. 학생, 학부모, 교사들은 “유사한, 동일한 문제를 엄청나게 여러 번 많이 풀어야 시험에서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학생과 학부모는 앞으로 펼쳐지는 각종 수학 시험에서 경쟁자인 다른 학생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문제만 반복해서 풀고,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만을 바란다. 그래서 학생들은 수학이라는 아름다운 과목을 그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무한정 반복해서 풀어야 하는 문제 투성이 과목이라고 낙인찍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수학에 대한 기본적인 즐거움, 호기심,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된다. 더 안타까운 점은 아직도 사람들이 수학이라는 과목이 많은 문제들을 풀어야 고입이나 대입 등 상급학교 진학에 유리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수학을 포기하는 교육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수학이 즐겁고, 재밌고, 세상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한민국을 책임질 학생들에게 수학은 너무나 중요한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또, 갑작스럽게 생기는 팬데믹 사태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도 수학의 본질을 즐겁게 알려 줘야 한다 수포자들이 없어지는 방법은? 수포자들이 제일 많이 발생하는 시기가 초등학교 3~4학년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많은 양의 수학 개념, 각종 복잡한 수학 문제로 인해 수학을 그냥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수학을 포기하지 않게, 수학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눈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줘야 한다. 수학이 아름답고, 수학이 즐겁고, 수학이 흥미있는 과목이라는 것을 알려 줘야한다. 그리고 학생, 학부모, 교사들의 수학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날려 버렸으면 한다. 세상 사는 이야기들을 통해 수학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실천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수포자에서 수학교사로 필자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완전 수학포기자였다. 그렇지만, 고1 때 수학을 담당하는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수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때부터 수학에 푹 빠졌다. 그렇다보니, 수학의 기초도 몰라서 거의 구구단부터 수셈까지 다시 시작하면서 독학을 거듭하여 결국 고1 때 수업에서 진행하는 진도까지 따라잡게 되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도움을 줄 만한 친구, 선생님, 부모 등이 없어서 상당히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끈기와 인내심으로 수학포기자에서 수학성공자로 거듭 태어났다. 수학성공자가 된 필자는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에 입학하였고, 수학교사로 교단에 서게 됐다.
‘안전하고 쾌적하다.’ ‘좁고 불안하다.’ 모듈러 교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모듈러 교실이란 교육부가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사업을 추진하면서 등장한 모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컨테이너 교실의 개정판에 가깝다. 사전적 의미는 공장에서 골조, 마감재, 기계 및 전기시설 등을 갖춘 건물을 완성해 학교로 가져와 조립한 교실이다. 좁고 답답하고...모듈러 교실의 한계 지난 7월 29일 교육부는 ‘교육회복 종합 방안’ 기본 계획에서 과밀학급 해소를 위해 학교신.증축에 모듈러 교실을 포함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일시적인 과밀 유형에 속해있는 학교에 모듈러 교실을 배치해 과밀학급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올 2학기 과밀학급 해소를 추진하는 학교 중 7% (91개교)에 해당하는 학교는 모듈러 교실을 통해 단계적으로 학급당 학생수를 감축하겠다고 했다. 모듈러 교실은 일시적인 또 즉각적인 과밀학급 해소 방법으로서 매우 효과적이다. 실제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학교 건물을 증축, 개축 하는 것 보다는 적은 비용으로 일시적인 대여를 할 수 있고 이른 시일내 일시적으로 과밀학급 해결이 가능하며 철거 후 재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자녀를 학교에 맡긴 학부모 눈에는 유튜브 등을 통해 보여지는 모듈러 교실 홍보 영상과 달리 보완해야 하는 단점이 너무 많다. 첫째, 창문 개폐가 약 15도 정도여서 자연환기가 되지 않아 아이들이 기침과 어지러움을 호소 하고 있으며, 화재 발생시 창문 밖으로 대피 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공기질은 문제가 없다는 게 교육당국 주장이지만 안전에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둘째, 천장이 2.6m로 본 건물에 비해 낮고, 냉.난방 시설도 취약해 여름철 수업시간이면 학생들이 더위를 호소하고 있다. 셋째, 학부모 참관 화상회의 시, 옆반의 소음이 들릴 정도로 방음에 열악하다. 음악 수업시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옆반 수업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모듈러 교실은 운동장 부지에 설치되어 있어 실외 체육수업 시 소음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넷째, 교실내부의 구조가 가로형태로 넓게 분포되어 양 끝에 위치한 아이들은 칠판이 보이지 않아 일어나 가운데로 와서 칠판을 봐야한다. 맨 앞줄에 앉은 아이는 칠판이 가까워 눈이 아프고, 맨 뒤에 앉은 아이는 등이 벽에 닿아 불편할 정도로 좁다. 조명 반사가 심해 전자칠판 등은 학생들의 시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다섯째. 운동장 부지에 설치되어 있어 실외 체육수업 시 교실 내부가 시끄럽게 방음에 취약하며, 반대로 실외 체육수업을 하는 아이들은 조용히 수업을 해야 하는 이중고가 있다. 여섯째, 계단 폭이 좁고, 화재 발생시 본 건물보다 대피로가 부족한 직사각형 복도식 구조로 구성되어 있어 안전에 취약하다. 실제 화재시에는 골든타임 안에 아이들이 무사히 대피할지에 대하여서도 강하게 의문이 든다. 학부모들은 이런 현실 적인 문제점을 여러차례 지적했다. 하지만 교육부 및 교육청에서는 이와 같은 시설적인 문제를 해결 하기보다는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사업 추진에 필요한 임시 교실과, 과밀 학급 해소를 위한 추가 교실 수요에 효과적이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문제는 또 있다. 지난 7월 26일. 교육부는 ‘안전하고 쾌적한 이동식 모듈러 교실 마련을 위해 관계 부처 간 협력 강화’에 따른 조달청 및 소방청 간 업무협약 체결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학부모들이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소방 안전을 지적한 데 따른 것이다. 이렇듯,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모듈러 교실을 교육부가 왜 각급 학교에 설치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떨칠수 없다. 이 때문에 학부모들은 과밀 학급당 정원을 3~4명이 늘어 난다 하더라도 문제점이 많은 모듈러 교실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한, 3~4명이 늘어난 과밀 학급 이더라도, 모듈러 교실을 사용함에 있어 더 나은 이유가 없는데 굳이 수십억의 예산을 사용하여 모듈러 교실을 설치하는데는 오히려 예산을 낭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교육당국은 과밀학급이 되면 선생님도 힘들고, 아이들의 학습권이 열악해진다며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모듈러 교실의 단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아이들의 학습권이 열악하다는 핑계를 삼아 행정 편의적으로 접근하려는 데 학부모들은 전혀 납득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과밀학급이기 때문에 학교를 증축해 달라는 민원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부족해 어쩔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 한다. 오히려 모듈러 교실을 설치해야 교사 배치가 가능하다는 말은 궤변이 아닐수 없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학부모들은 모듈러 설치에 대한 교육부, 교육청의 입장을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역별로 편차가 있지만 학급당 28~29명에서 3~4명이 늘어나 열악한 환경이 되더라도 운동장에 모듈러를 설치하여 운동장 없는 학교에 다니는 것 보다 낫다는 이야기도 학부모들 사이에서 나온다.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교육부가 ‘2022~2026년 제1차 교육시설 기본계획’에는 신설 학교. 신축 건물도 모듈러 교사로 짓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모듈러 교실에 대한 학부모들의 우려와 반발이 커지고 있는 지금, 무작정 밀어붙이기보다 모두가 공감학 수용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을 촉구해 본다.
너의 우주를 들어 줄게 (A.C.피츠패트릭 지음, 에리카 메디나 그림, 불광출판사 펴냄, 40쪽, 1만2000원) 우주여행에 대한 책만 읽고 또 읽는 마고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에 바쁘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어느 날 마고의 입에서는 엄마에게 아침인사를 하려 해도,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려 해도 우주에 관한 말만 흘러나오게 된다. 말문이 막힌 마고를 위해 엄마가 생각해낸 기발한 대화법으로 아이는 소통의 방법을 찾아간다.
달라질 거예요 (어맨다 고먼 지음, 로렌 롱 그림, 창비교육 펴냄, 32쪽. 1만3000원)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축시를 낭독한 최연소 시인 어맨다 고먼의 첫 그림책이다. 인종과 장애, 연령, 성별을 넘나드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 먼저 손을 내밀고 변화를 향해 나아가자며 화합과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흑인 소녀의 음악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알고 스스로가 세상을 달라지게 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노래한다.
낯선 기술들과 함께 살아가기 (김동광 지음, 풀빛 펴냄, 152쪽, 1만3000원)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유전자조작 등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 분야를 모두 따라잡기는 불가능하다. 이 책은 기술 자체에 대한 정보 전달보다는 기술을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법을 알려주는 데 주목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사회경제적 지원, 인공지능의 윤리적 가치, 신경과학을 맹신하는 사회 풍토 등을 논의하며 기술의 발전 방향을 성찰해 보도록 한다.
10대, 우리답게 개념 있게 말하다 (정정희 지음, 맘에드림 펴냄, 240쪽, 1만4000원) 24년간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현재는 장학사로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는 10대 청소년의 일상 언어에 집중했다. 청소년들의 톡톡 튀는 재치와 창의적 변주가 반영된 언어, 편의성이 높은 방향으로 진화돼 가는 것에 공감하면서도 무분별하게 복제되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에 우려하며 언어 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에 나설 것을 제안한다.
교사의 서재 (이한진 지음, 테크빌교육 펴냄, 347쪽, 1만8000원) 초등교사인 저자는 급변하는 사회, 흔들리는 교실, 매너리즘으로부터 교실을 지키려면 교사에게도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대와 현대, 동서양을 오가며 율곡, 키에르케고르, 박지원, 푸코, 마이크 샌델 등 44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명저 44권을 선별해 소개한다. 또한 진정한 배움, 바람직한 가르침, 행복한 교육, 정의로운 교육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44개의 주요 철학 개념을 교사의 생생한 일상에 대입시키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언택트 공부 혁명 (호시 도모히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28쪽, 1만4000원) 온라인 수업만으로 학생들을 아이비리그에 가장 많이 보내는 학교로 알려진 스탠퍼드온라인고등학교.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중·고등학생을 위해 설립한 이 학교의 교장인 저자가 자기주도학습을 실현하고 창의력과 융합사고,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미래형 인재를 양성하는 법을 소개한다. 나이에 따른 학년제와 획일적인 커리큘럼, 시험성적 중심의 평가가 모두 없는 이 학교의 성공비결을 소개하며 아이의 잠재력을 증폭시키는 지침을 전한다.
옆 반 선생님의 온·오프라인 학급살이 엿보기 (김선민 외 9명, 책장속북스 펴냄, 323쪽, 1만9000원) 옆 반 선생님은 요새 어떻게 수업할까? 코로나로 인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졌을 궁금증, 고민을 풀어내기 위해 저경력 교사부터 고경력 교사까지 10명의 교사가 지혜를 모았다. 학기가 시작하는 3월부터 겨울방학을 마무리하는 다음해 2월까지 1년간의 흐름에 따라 교사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34가지의 수업과 각종 교육행사 방법을 담았다.
교사의 말 (마이크 앤더스 지음,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펴냄, 256쪽, 1만5300원) 교사의 말 한마디가 평생 남는 상처가 되기도, 힘을 주는 응원이 되기도 할 정도로 교사의 한마디에는 아이를 성장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이 책에는 무심코 사용하는 익숙한 표현들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숨겨진 의미를 살펴보고 어떤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교사의 원래 의도와 진심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는 대화의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익히는 일과 배우는 일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은 ‘학습(學習)’을 ‘배워서 익힘’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풀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학습’을 ‘배워서 익히는 일’로 말하는 것은 마치 음식을 씹어서 먹는 일이 아니라, 먹어서 씹는 일로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익히는 일’과 ‘배우는 일’이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는 뜻풀이를 하게 된다. ‘학습(學習)’에서 ‘학(學)’은 깨치거나 본받는 일을 통해서 배움이 시작되는 것을 말하고, ‘습(習)’은 깨치거나 본받은 것을 익히는 일을 통해서 배움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학습(學習)’은 ‘깨치고 익히는 일’ 또는 ‘본받아 익히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학습(學習)’의 뜻을 제대로 알려면, ‘학(學)’과 ‘습(習)’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또렷이 알아야 한다. 학문(學問), 학자(學者), 학업(學業)에서 ‘학’은 ‘깨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학생(學生), 학도(學徒)에서 ‘학’은 깨치고 익히거나 본받아 익혀서, 그것이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철학(哲學)과 과학(科學)에서 ‘학’은 어떤 것에 대해서 깨친 것을 갈래를 나누어서 알음알이의 판을 차리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에 허신(許愼)이 만든 설문(說文)은 ‘학(學)’을 ‘깨치는 것(悟也)’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 때에 만들어진 강희자전(康熙字典)은 ‘학(學)’을 ‘깨치는 것(覺悟也)’으로 풀이하고, 덧붙여서 주자(朱子)가 ‘학(學)’을 ‘본받는 것’으로 말했다(朱子曰:學之爲言效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주자의 풀이를 좇아서, ‘학(學)’을 ‘본받는 일’로 새기는 일이 많았다. 정조(正朝) 때에 만들어진 전운옥편(全韻玉篇)은 ‘학(學)’을 ‘본받는 것’으로 보아서, ‘학(學)’을 ‘효(效)’로 풀이하고, 덧붙여서 ‘학(學)’을 ‘각오(覺悟)’, ‘수교(受敎)’, ‘전업(傳業)’, ‘상서(庠序)’를 두루 일컫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학(學)’은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 깨치거나 본받은 것을 익히는 과정을 거쳐서,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을 하나로 싸잡아서 일컫는 말이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학(學)’이 들어가는 낱말을 새길 때, ‘학’의 뜻을 ‘깨칠 학(學)’, ‘본받을 학(學)’, ‘익힐 학(學)’, ‘배울 학(學)’ 따위로 나누어서 경우에 맞도록 풀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람은 ‘학(學)’을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을 뜻하는 ‘배울 학(學)’으로만 새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학습’을 ‘배울 學’과 ‘익힐 習’으로 새겨서,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 말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까닭이 있다. 첫째로, 옛날에 한국 사람은 중국에서 가져온 한자(漢字)와 한문(漢文)을 익히는 일을 학문(學文)이라고 불렀다. 한국 사람이 한자와 한문을 익히는 일은 거의 모두가 글자나 문장을 통째로 외워서,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로써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한자와 한문을 공부하는 이들은 ‘학(學)’을 주로 배우는 일로 보게 되었다. 둘째로, 조선시대에 유학(儒學)이 크게 힘을 떨치게 되자, 선비들이 공부하는 일은 거의 모두가 사서(四書)와 오경(五經)과 같은 경전을 읽고 외워서, 몸과 마음에 잘 배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경전을 어떻게 배우냐에 따라서, 과거시험에 붙고 떨어지는 일과 정승판서가 되고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글을 잘 배우기 위해서 수십 번은 물론이고, 수백이나 수천 번을 거듭해서 읽고 또 읽어서 줄줄이 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에게 ‘학(學)’은 경전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이었다. 한국 사람이 ‘학(學)’을 ‘배우는 일’로 풀이하는 것은 나름의 사정에서 빚어진 것으로서, 그냥 그렇게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학습’을 ‘배우고 익히는 일’로 풀이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서, 그냥 그렇게 봐줄 수 없다. ‘익히는 일’과 ‘배우는 일’이 헷갈리게 되면,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이 모두 엉망으로 치닫게 된다. '익히다'의 옛말은 '니기다' ‘학습(學習)’의 뜻을 제대로 알려면, 한국 사람이 ‘습(習)’을 어떻게 새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습(學習)’, ‘연습(練習)’, ‘훈습(薰習)’, ‘습관(習慣)’, ‘풍습(風習)’에서 ‘습(習)’은 어떤 일을 거듭해서 몸과 마음에 익어서 배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습’을 ‘익힐 習’으로 풀기도 하고, ‘배울 習’으로 풀기도 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최세진이 만든 훈몽자회는 ‘학(學)’과 ‘습(習)’을 모두 ‘배우는 일’로 풀어서 ‘학’을 ‘배울 學’으로, ‘습’을 ‘배울 習’으로 새기고 있다. 그런데 선조(宣祖) 때에 간행된 한석봉 천자문(千字文)에 이르면 ‘학’과 ‘습’을 나누어서, ‘학’은 ‘배울 學’으로, ‘습’은 ‘익힐 習’으로 새기고 있다. 한석봉 천자문이 나온 뒤로 사람들이 ‘학’을 ‘배울 學’으로, ‘습’을 ‘익힐 習’으로 새기는 것이 굳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익히다’라고 말하는 것을 옛날에는 ‘니기다’라고 말했다. ‘니기다’는 ‘닉다’에 뿌리를 둔 말로서, ‘닉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니기는 일’, 곧 ‘익히는 일’은 어떤 일을 거듭하여 때가 흐르는 동안에 일이 깊어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열로써 감자를 익히는 것은 감자에 열을 더하는 일을 거듭하여, 때가 흐르는 동안에 감자에 열이 깊게 들어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이 기술을 익히는 것은 기술을 익히는 일을 거듭하여, 때가 흐르는 동안 기술이 몸과 마음에 깊게 들어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습’을 ‘익힐 習’으로 새겨서 ‘학습(學習)’을 풀게 되면, ‘학습’은 ‘學하고 익히는 일’이 된다. 이런 경우에 ‘학’을 ‘배울 學’으로 새기게 되면, ‘학습’은 ‘배우고 익히는 일’이 되어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배운 것을 다시 익히는 일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학습’에서 ‘학’은 ‘배울 學’이 아니라 ‘깨칠 學’이 되어야 말이 될 수 있다. ‘학습’은 ‘깨쳐서 익히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학습’을 ‘깨치고 익히는 일’이라고 말할 때, ‘학습’의 뜻을 제대로 알려면 ‘깨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또렷이 알아야 한다. 한국말에서 ‘깨치다’는 ‘깨다’와 ‘치다’가 하나로 어우러진 말이다. ‘깨치다=깨다+치다’에서 ‘깨다’는 사람이 잠에서 깨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사람이 잠에서 깨게 되면, 갖가지 ‘무엇’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이 절로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갖가지 ‘무엇’을 ‘어떠한 것’으로 ‘치는 일’을 통해서, ‘무엇’을 ‘어떠한 것’으로서 알아보고, 알아듣고, 알아차리는 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한국말에서 ‘학습(學習)’은 배우는 일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학습’은 ‘깨치고 익히는 일’ 또는 ‘본받아 익히는 일’ 또는 ‘깨치고 익혀서 배우는 일’ 또는 ‘본받아 익혀서 배우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코로나 강한 전파력 ... 스페인독감과 흡사 1918년 봄에 발생한 스페인독감은 당시 5천만 명 내지 1억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지금의 코로나19와 이웃사촌인 셈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우 1918~1919년 1차 대유행 때 공식적으로는 14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약 30만 명의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2차 대유행인 1919~1920년에도 공식적으로 4만 3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2차 대유행 당시 사망자가 1차 대유행보다는 적으나 치사율은 1차 대유행 1.85%에 비해 9.24%에 달하여 그 독성이 매우 강하였다. 치사율이 높으면 전파력이 약하고 치사율이 낮으면 전파력이 더욱 강한 특성이 있었다. 100년 전부터 확인된 마스크 위력 100년 전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페인독감에 대처했던 방식과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코로나19 대응의 유사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당시 사람들은 공기를 통하여 병독(病毒)이 전염된다고 알았기 때문에 공기전염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기침을 하거나 말을 할 때 전염을 차단하기 위하여 코와 입을 막는 호흡보호기(呼吸保護器), 입싸개, 입코덮개 등을 쓰고 다니기를 권장하였다. 이는 지금의 마스크에 해당되는데, 100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이 마스크 쓰기를 권장하였다니 새삼 놀랍기만 하다. 또 환자와 결코 같은 방을 쓰거나 침구를 같이 쓰지 말고 격리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학교·관청·회사 등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전염이 잘 되기 때문에 병이 유행할 때에는 출입을 삼가도록 하였다. 특히 병자(病者)가 있는 집과의 왕래를 금하여 전염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굳이 출입하려면 건강하다는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코로나가 유행할 때에 사람이 밀집된 곳을 피하도록 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환자를 격리하는 것과 같다. 공기에 있는 병독(病毒)이 목구멍과 콧속을 통하여 인체로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음식을 먹기 전후나 목욕할 때에 양치(養齒, 이를 닦음)하기를 매우 강조하였다. 양치가 병독을 확실하게 차단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논란의 소지가 있으나 위생(衛生)상태를 좋게 한다는 면으로 보면 타당하다. 둘째, 평소 조섭(調攝)을 강조하여 면역력을 강화시켰다. 평소 장위(腸胃, 창자와 위장)와 피부를 건강히 하고 술과 담배를 많이 하지 않도록 조심시켰다. 내 몸이 튼튼하면 그만큼 질병에 유리한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지금도 건강관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조석(朝夕,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심하게 변할 때에는 의복과 거처를 특히 주의하였다. 찬바람이나 야기(夜氣, 밤공기의 차고 눅눅한 기운)에 쏘이지 않도록 하며 열이 대단히 높아지면 소화기가 약해지기 쉬우니 연로한 노인일수록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먹도록 하였다. 노인이 고기를 먹을 때 평야수(平野水, 사이다)를 사다가 먹이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였다. 사이다는 고기를 연하게 하고 소화를 도와줄 수 있기 때문에 당시에는 많이 이용하였다. 지금도 일교차가 심하면 몸의 면역력이 저하되어 질병에 걸리기 쉬우므로 체온관리의 유의사항으로 많이 권장되는 방법이다. 평소 잘 먹고 잘 소화시키는 것이 건강유지의 기본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추운 날씨에 방문과 창문을 닫아 추위를 막는 것도 좋으나 위생에는 극히 좋지 못하므로 때때로 문을 열어 공기를 바꾸는 것이 매우 좋다고 강조하였다. 환기의 중요성을 말한다는 면에서 지금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또한 난방을 할 때에 방안이 건조되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당시에는 심지어 노서아(露西亞, Russia)에서 물 끓이는 용도인 사모바르(Samovar)를 사용하기를 권장하기까지 하였다. 온돌을 사용하는 가정에서 사모바르가 없으면 반드시 젖은 수건을 줄에 걸어두도록 하였다. 지금도 적절한 습도유지는 필수이다. 당시에는 담파고(淡婆姑, 담배)물로 더러운 것을 소독하거나 석회(石灰) 또는 목회(木灰, 재) 등을 살포(撒布)하기도 하고 끓는 물을 부어 소독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여러 종류의 소독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침구를 햇볕을 쏘여 소독하고 방도 자주 쓸어 깨끗하게 하도록 하였다. 또한 밥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고 햇볕을 자주 쬐도록 하였다. 적당한 햇빛은 바이러스를 죽이며 몸의 면역력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권장되고 있다. 셋째, 이상과 같이 조심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폐경(肺經, 폐의 경색)과 인후(咽喉, 목구멍)가 약한 사람이 걸리면 폐렴(肺炎)으로 진행되어 위험할 수 있으므로 즉시 격리하고 해열산(解熱散)과 같은 약을 써서 조속히 치료받도록 하였다. 지금은 평소 호흡기질환이 있는 노약자의 경우 코로나로 인하여 중증으로 변할 수 있으므로 격리하여 집중 치료받도록 하고 있다. 당시에도 예방과 치료과정에서 혼합백신을 사용하였다. 지금의 백신과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효용성에 대하여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또한 완치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의 피를 이용한 혈청주사로 치료하고자 하였다. 혈청주사는 지금도 코로나를 치료하기 위해 시도되고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또한 당시에도 축견(畜犬, 개)이 이 병에 걸릴 수 있으므로 개를 기르는 사람은 극히 주의하도록 하였다. 최근 코로나로 인하여 동물도 감염될 수 있다는 인수공통감염병(人獸共通感染病)이라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이상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방법이었는데, 당시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사용된 식이요법이 아래와 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있어 흥미롭다. 첫째, 병자(病者)에게 4시간마다 마시기 좋고 따뜻한 음식을 줄 것! 둘째, 우유를 주로 삼고 당분과 전분(澱粉, 綠末)으로 보조하며 토스트(toast) 또는 퓨레(Purée), 푸딩(pudding), 미음(米飮) 같은 것을 주며 아이스크림(ice cream)은 원하는 대로 줄 것! 셋째, 고기는 갈아 주는 것이 좋지만 과하게 주지 말 것! 넷째, 채소는 시금치(spinach), 아스파라거스(asparagus), 파스닙(parsnip, 설탕당근), 당근(carrot) 등을 농란(濃爛, 무르익음)하게 끓인 수프(soup)를 줄 것! 다섯째, 오렌지(orange), 애플(apple), 통베리(berry), 포도 등의 주스(juice)와 레몬(lemon)액이 모두 좋다. 여섯째, 설탕은 넉넉히 타 줄 것! 일곱째, 회복되면 커스터드(Custard) 같은 것을 쓰라. 계란은 떨어지지 않도록 많이 먹여라! 여덟째, 무엇이든 함부로 주지 말고 소화 잘 되는 것만 줄 것! 배탈·설사엔 보리차가 명약 영양이 풍부하면서 소화가 잘 되는 것을 충분히 섭취하여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100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사용한 방법이지만 대부분 지금 그대로 사용하여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아이스크림(ice cream)을 원하는 대로 주라고 한 것은 목에 열이 날 때 이를 식히기 위한 방법으로 보이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열이 심하여 냉수를 함부로 찾더라도 결단코 많이 주지 말며 끓인 보리차를 식혀서 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열이 날 때 보리차는 열을 내리게 하고 기혈순환을 좋게 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돌 이전의 어린 아기가 고열에 시달리거나 배탈이 나거나 설사를 하거나 밤새 울거나 할 때 가장 무난하고 보편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보리차이기 때문에 매우 타당하다. 보리는 가을에 심어 겨울을 지내고 봄에 자라 초여름에 수확하는 작물이므로 4계절의 기운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체질 불문하고 어린아이가 탈이 났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한의학의 관점으로 보면 몸이 냉한 소음인이 열이 난다고 차가운 것을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이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몸에 열이 많은 태음인이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여 병이 난 경우에는 열이 날 때 차가운 냉수를 먹어도 좋은 경우가 많다. 즉, 차가운 아이스크림은 태음인의 경우는 먹어도 좋으나 소음인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체질에 따라 그 처방이 다르다. 현재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100년 전에도 스페인독감이 그렇게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힘들었으나 위에 소개한 방법으로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그런데 그 방법이 현재 사용하는 방법과 상당 부분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과거의 경험을 잘 살피면 지금의 어려움에 제대로 대처하고 응용할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뿐이다.
물가가 오른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다. 예전에 200원 하던 빵은 이제 1,500원을 줘야 한다. 여의도에 있는 국숫집은 1인분에 1만2,000원을 받는다. 필자가 어릴 때는 1억만 있어도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2000년대에는 10년에 10억 모으기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10억이면 평생 먹고살 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10억으로는 서울에서 집을 사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30억 있으면 부자일까?’ 라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럼 계속 물가가 오르고 집값이 오르는 만큼 우리는 부를 맞춰서 키워나가야 한다. 하지만 월급의 상승속도보다 물가·집값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고 이를 따라잡지 못한 이들의 절망과 한탄이 가득하다. 금리를 왜 올릴까? 금리를 앞으로 얼마나 올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먼저 금리를 왜 올리는지 알아야 한다. 금리인상은 과열된 경기가 과속을 하지 않도록 적절한 브레이크 역할을 해준다. 경기가 과열되지도 않고 침체되지 않는 완만한 상승을 할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 금리인상의 핵심이다. 경기가 과열되면 소비가 늘어 기업의 생산과 투자가 증가하고, 고용이 늘면서 임금도 올라간다. 기업의 주가도 오르고 내 월급도 오르니 경기호황이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부작용도 있다. 기업의 이익과 개인의 소득이 늘었으니 물가가 상승한다. 그리고 주가만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가격도 상승한다. 즉 물가, 임금, 자산가격이 치솟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조금씩 상승하다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게 된다. 이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벌어지고 화폐가치는 급속도로 하락한다. 수레에 돈을 잔뜩 실어야 빵 하나와 바꿀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물가가 상승하고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면 누가 가장 불리해지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산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물가상승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그래서 국가는 물가·자산가격이 빠르게 상승하지 못하도록 이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금리인상을 하는 것이다. 금리인상을 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 금리인상을 하면 물가인상을 억제할 수 있다. 미국도 한국도 소비자물가지수가 급등하고 있는 추세다. 한 줄에 1만 원 하는 김밥을 보고 싶지 않다면 금리인상이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물가뿐만 아니라 부동산 가격 상승 속도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근 20년간 금리인상기에 주택가격도 증시도 같이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동안 경기호황이라는 엑셀 페달이 금리 인상이라는 브레이크를 이겼다. 또한 금리인상을 하면 은행 예금금리가 상승한다. 저축을 하는 사람은 이자매력이 더 늘어난다. 앞으로 추가 금리인상을 할수록 예금금리는 계속 상승할 것이다. 공제회 저축 이율도 올라갈 것이다. 그동안 저축 비중이 높았던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다. 금리인상을 하면 어떤 나쁜 점이 있을까? 금리인상이 좋은 역할도 하지만 나쁜 역할도 있다. 금리가 상승하면 대출이자 부담이 증가한다. 더구나 향후 추가 인상도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대출금리는 계속 상승할 것이다. 그럼 빚을 내서 투자를 한 사람들, 기업들은 이자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대출이자가 늘어나면 소비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든다. 그럼 기업들은 그만큼 매출에 타격을 받고 기존의 대출이자도 늘어나기 때문에 수익이 급감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증시 하락 원인이 될 수 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대출이자가 부담스럽다 보니 욕심을 내서 집을 사기도 어렵다. 그럼 금리상승기에는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 금리가 상승한다는 것은 유동성(돈)을 한국은행이 회수해 간다고 볼 수 있다. 즉, 원화가 귀해진다. 돈이 귀해졌기 때문에 예금이자도 올라가고 대출이자도 올라가는 것이다. 참고로 한국은 선진국 중 가장 먼저 금리인상을 했고 미국이나 다른 나라는 금리인상을 하지 않았다. 그럼 환율은 좀 더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환율이 낮아지면 외국인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한국에 투자매력이 생긴다. 오히려 한국 주식이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 되면서 달러가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이론과 다르게 금리 인상기마다 대한민국 증시는 고점을 기록했다. 물론 경기호황으로 인한 금리인상이기 때문에 증시만 좋은 것이 아니라 부동산 시장도 좋았다. 하지만 이번 금리인상은 호황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기업들은 호황을 누렸지만 자영업자, 프리랜서, 관광업체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채관리, 물가, 자산가격 과열상승 억제를 위한 금리인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나려고 하는 경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은 이런 우려로 아직 금리인상 시기를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선제적 결단이 효과를 볼지 부메랑을 맞을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보면 부채가 적은 기업, 부채비율이 낮은 지역의 부동산, 물가 또는 금리상승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기업, 국내 비중보다는 해외판매 비중이 높은 기업 위주로 투자하는 것이 금리인상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투자수단이 될 것이다.
소금호수가 그려 준 하늘의 모습 우유니 소금호수. 할 말을 잊는다는 표현이 어쩌면 가장 적확(的確)한 표현이 될 수 있을 법합니다. 나는 사람들 입에 그렇게나 빛나게 회자되던 곳, 그래서 살짝 미화를, 지나친 포장을 의심했던 그 우유니 소금호수에 섰습니다. 의심은 모독이었고, 현실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처음엔 탄성을, 이후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신비에, 진정으로 내가 현실 속에서 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표면은 벌집 모양의 다각형 결정체로 촘촘하게 얽혀있고, 그 위를 아주 일정한 깊이의 물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지평선이라 해야 할까요? 수평선이라 해야 하나요. 어찌하였건 그 너머로는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부터 땅인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소금호수가 그려내 주는 까닭이지요. 세상에! 이런 풍경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니요. 고산증, 숱한 날들과 흙먼지를 기꺼이 감수하고 이 머나먼 볼리비아 고원지대로 달려오는 이유를, 그럴 만한 가치를 비로소 알겠습니다. 그러나 우유니에는 환상적인 소금호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3,700m에서부터 근 5,000m를 넘나드는 고원 사막은 지각 변동이 빚어낸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과 수많은 호수들과 라마, 플라밍고 같은 생명들을 품고 있습니다. 1만 2,000㎢에 이르는 광활한 면적은 먼지와 모래와 바윗돌들을 헤집어, 달려도 달려도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눈을 뗄 수 없던 그 황량함이 야생성이 그저 신비롭고 낯선 즐거운 풍경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기적처럼 호수가 나타나고 그 속엔 많은 생명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소금호수 위에서 해지는 풍경을 보고, 우유니에서의 첫날 밤은 온통 소금으로 지어진 숙소에서 보냈답니다. 그리고 이틀째 밤 숙소에서도 세상에나! 별빛이 쏟아지는 사막 한가운데입니다. 황량한 고원 사막 한가운데 부려진 숙소라니! 우유니에서의 이틀째 해가 질 시간이 가까워져 옵니다. 해발 4,000m가 넘는 곳에 자리한 숙소는 마치 황야에서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적막만 남은 것 같은 곳에 웅크리고 있었지요.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눈앞에 소금호수가 펼쳐져 있고 고원 특유의 황량함이 영화처럼 펼쳐져 있으니, 평생 언제 다시 이런 멋진 숙소에 머물 수 있단 말인가요?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음울하고도 애절한 OST ‘콜링 유(calling you)’의 멜로디가 떠오릅니다. 먼지, 사막, 외로움, 인생, 기약 없는 기다림, 그리움들. 창이 드리워진 거실에 앉아 먼 풍경을 한참 바라봅니다. 일본인 젊은 친구가 주인집 아들인 듯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있다가 다시 창 쪽 풍경을 비워냅니다. 몇몇 거니는 사람이 보이고 이윽고 산 그늘이 드리워지면서 으슬으슬 몸이 추워지는군요.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내겐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흙먼지를 종일 뒤집어쓰고도 찬물로 대충 세면을 하고, 한 숙소에서 머물게 된 다른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일찍 침대 위에 몸을 뉘었습니다. 윙윙 바람이 시공을 스쳐 흐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판이 서로 부딪히고 먼바다였던 당신과 만나 이 낯설고도 높은 곳까지 떠밀려와 한세상 이뤘으나, 나는 다시 먼바다인 당신이 그립습니다. 당신을 향한 이 목마른 목숨을 어찌해야 할까요.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 이제 멀고도 먼 곳에 있던 당신과의 만남도 끝자락에 이르렀고 이틀 뒤면 다시 떠나야 합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 만남의 삯으로 평생 그리움의 신열에 고통스러울지라도, 꼭 보고팠던 마음 채우고 떠날 채비를 합니다.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생이 이렇게 가파른 비행을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하여 생은 또 지속되고 생의 끝날까지 다시 목마른 그리움, 그 힘으로 시간을 다독이는 생의 즐거움을 거듭 알겠습니다. 깨어있는 시간, 삶 속에 당신 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각성,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어느 사이엔가 그리움에도 많은 에너지, 열정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고 나는 그만 편안함과 지극한 일상성에 나를 묻어두고자 묶어두고자 하는 속삭임에 때로 귀를 내주곤 하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여행은 한없이 무뎌져 가는 그리움에 새로운 에너지를 채워 다시 일상의 관자놀이를 펄떡이게 하는 일임을 알겠습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향하는 버스 안입니다. 자다깨다를 몇 번 하면서 벌써 5시간을 달려왔는데도 길은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달려온 것을 네 곱 다섯 곱을 해야 이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놀라운 것은 5시간 가까이 달려왔는데도 황막한 황무지의 모습은 걷힐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푸른 잎을 가진 나무라고는 경유해온 도시에 야자수 몇 그루 본 것이 모두였을 뿐 생명의 기운이라곤 풀 한 포기 찾아보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리곤, 읽고 있던 책의 한 구절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며,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이라는 글귀를 말입니다.
가을은 뭐니뭐니 해도 붉은 열매의 계절이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산과 공원, 화단 등에서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도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 공원이나 주변 산에 비교적 흔한 남천, 산수유, 낙상홍, 팥배나무, 찔레꽃, 청미래덩굴, 덜꿩나무, 가막살나무, 산사나무, 마가목 등 열 가지를 골랐다. 가을에도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먼저 남천, 산수유, 낙상홍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를 쓰거나 정원수로 보기 위해 외국에서 들여온 재배식물이다. 그만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남천은 생울타리 등으로 많이 심어놓았다. 가을에 도심에서 탐스러운 빨간 열매를 원뿔 모양으로 주렁주렁 단 관목이 있다면 바로 남천이다. 주로 길거리 생울타리나 경계목 등으로 많이 심어 놓았다. 처음에 남천의 단정한 생김새를 보고 우리 자생종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중국이 원산지였다. 중국에서는 이 나무가 따뜻한 지방에서 나고 대나무를 닮았다고 남천죽(南天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 나무를 조경수로 수입하면서 이름에서 ‘죽’을 빼고 남천이라 했고 우리도 그 표기를 받아들였다(‘우리나무 이름사전’). 우리나라에서도 원래 남부지방에 심는 나무였는데, 의외로 내한성이 강한 것이 알려지면서 요즘에는 서울에서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특히 근래 많이 늘어난 것 같다. 사철나무·화살나무와 함께 서울 시내에서 가장 흔하게 보는 생울타리 나무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봄에 원뿔 모양의 꽃대에 하얀 꽃이 피는 것도 볼 만하다. 남천의 붉은 열매는 새들이 잘 먹지 않는지 봄까지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남천 열매를 겨울철 새들의 마지막 비상식량이라고 표현한 글도 보았다. 남천은 공기정화식물로서의 가치도 주목받고 있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남천은 새집증후군 원인물질인 포름알데히드 제거 능력이 뛰어난 식물이다. 거실이나 베란다에 배치하면 새집증후군 완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다. 남천은 다방면에서 뛰어난 팔방미인 나무인 셈이다. 붉은 산수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것은 늦가을 정취를 대표하는 풍경 중 하나다. 늦가을에 눈이라도 내리면 빨간 열매와 흰 눈이 대조를 이루면서 정말 아름답다. 초봄에 산수유 꽃이 필 무렵 산에 가면 비슷하게 노란 꽃이 피는 나무가 있다. 산에 있는 것은 생강나무일 것이다. 생강나무와 산수유는 둘 다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초봄에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노란 꽃봉오리를 내밀기 때문에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멀리서 보면 거의 비슷해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생강나무는 녹나무과이고 산수유는 층층나무과여서 과(科) 자체가 다르다. 생강나무는 짧은 꽃들이 줄기에 딱 붙어 뭉쳐 피지만, 산수유는 긴 꽃자루 끝에 노란 꽃이 하나씩 핀 것이 모여 있는 형태여서 다르다. 가을에 열매를 보면 두 나무의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산수유는 타원형인 빨간 열매가 열리지만 생강나무는 동그란 까만 열매가 달린다. 산수유를 논하면서 김종길의 시 ‘성탄제(聖誕祭)’를 빠뜨릴 수 없겠다. ‘어두운 방 안엔/바알간 숯불이 피고,/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이윽고 눈 속을/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 시에서도 표현하고 있듯이 산수유 열매는 옛날에 해열 약제로 쓰였다. 낙상홍은 이름 자체가 가을과 붉은 열매를 담고 있다. 잎이 떨어지고 서리가 내리는 추운 겨울까지 빨간 열매를 달고 있다고 이름이 낙상홍(落霜紅)이다. 키가 적당한 나무이고 열매가 보기 좋아서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낙상홍은 꽃이 연분홍색이다. 꽃이 흰색에 가깝고 열매가 훨씬 많이 달리면 미국낙상홍이다. 이 나무도 공원이나 화단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팥배나무는 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고, 요즘은 공원에 심어놓은 것도 볼 수 있다. 팥배나무라는 이름은 열매는 팥을, 꽃은 배꽃을 닮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5~6월 배꽃을 닮은 새하얀 꽃이 필 때도 좋지만, 역시 팥배나무는 가을에 수천 개 붉은 열매를 달고 있을 때 그 진가를 볼 수 있다. 열매는 물론 잎과 꽃으로 구분하기 쉬운 나무이니 한번 눈여겨보면서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다. 찔레꽃 열매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가을에 산기슭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열매다. 찔레꽃이 피는 그대로, 가을에 지름 0.8cm 정도의 붉고 둥근 열매가 많이도 달린다. 어려서 배고프면 따 먹은 추억의 열매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새들이 먹는 것은 사람이 먹어도 문제가 없다. 청미래덩굴은 전국 어느 숲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덩굴나무다. 지역에 따라 망개나무, 맹감 혹은 명감나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청미래덩굴은 꽃보다 요즘에 지름 1㎝ 정도 크기로 동그랗고 반들반들하게 익어 가는 빨간 열매가 인상적이다. 누르면 푹신하다. 덜꿩나무와 가막살나무 열매도 숲에서 또는 울타리나무로 쓰이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가막살나무 열매는 약간 길쭉하고 덜꿩나무 열매는 동글납작하다는데 열매만 봐서는 구분이 쉽지 않다. 대신 잎을 보면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가막살나무는 잎이 둥근 편인데 덜꿩나무는 잎자루가 없다시피 짧고 잎은 다소 길쭉하고 끝이 뾰족하다. 붉은 열매 무리에서 산사나무 열매를 빼면 서운해 할 것이다. 몇 년 전 이효리가 선전한 술 산사춘은 이 산사나무 열매로 만든 술이다. 산사나무는 잎에 결각이 깊게 나 있는 특이한 모양 때문에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산사나무 둥근 열매 끝 쪽에 꽃받침자국이 남아 있는 것도 구분 포인트다. 마지막으로 마가목 열매를 꼽을 수 있다. 원래 울릉도 성인봉 등 깊은 산에서 사는 나무였지만, 팥배나무처럼 요즘엔 공원에도 심어놓은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마가목이란 이름은 새싹이 돋을 때 말의 이빨처럼 힘차게 솟아난다고 마아목(馬牙木)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울릉도를 여행할 때 마가목 열매로 다양한 건강식품을 개발해 파는 것을 보았다.
“영일고요?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는 학교죠. 그리고 그런 기회를 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선생님들이 많은 학교고요.” 인터뷰하면서 최승훈 교장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가능성’과 ‘기회’였다. 학생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믿도록 하는 것, 각자의 재능을 살릴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 품성이 좋은 학생, 예체능에 소질이 있는 학생 모두에게 고루 기회가 주어지고 그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다. 그래서 최 교장은 지금의 모습으로 학생을 규정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학교라는 플랫폼을 통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당당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 교장은 교사를 신호등에 비유했다. 학생들이 원하는 길을 정확하게 안내해 주는 사람, 그리고 그들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존재여야 한다고 했다.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만들어내고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교사이기를 당부한다. 당장은 기대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실패를 두려워 말자’는 그가 좌우명처럼 간직한 모토이다. 최 교장은 영일고 7회 졸업생이다. 자신의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교장까지 오른 드문 케이스. 고교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은사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교사를 꿈꿨고 그리던 모교에서 교사의 길을 걷는다. 학생들이 제자이면서 새까만 후배이다 보니 더 애틋하다. 올해로 교직 31년. 교장으로서는 첫해를 보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영일고는 대대로 교감이 교장으로 승진하는 전통이 있다. 개교 이래 11명의 교장이 임용됐지만 1대 윤명기 교장을 제외하곤 모두 내부승진으로 임용됐다. ‘교육에 관한 한 모든 것을 학교에 믿고 맡긴다’는 설립자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다. 재단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이 명문 영일고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현 정명애 이사장은 자신의 집무실을 학교 도서관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본관 건물 입구에 위치한 이사장 집무실을 옮기고 그 자리에 도서관을 만들자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 정서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정 이사장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못할 게 없다”며 힘을 실어줬다. 최 교장은 임기 동안 학교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고교학점제 선도학교, AI(인공지능) 선도학교 등 앞서가는 영일고의 위상에 맞는 교육여건을 갖추고 현실적 과제인 대학 진학에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영등포 일대 제일이라는 의미를 가진 영일고. 이름 그대로 서울 서남부지역 최고의 명문 사학이다. 늘 깨어 있는 학교,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학교다.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건전한 지성과 교양을 갖춘 사람, 든 사람도 좋고 난 사람도 좋지만,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된 사람을 기르는 것. 영일고가 추구하는 인재상이다. 서울 강서구 등촌로에 위치한 영일고는 1971년 개교 이래 ‘창조적 사고, 자주적 행동, 강건한 체력’을 교훈으로 미래 인재 양성에 힘써온 전통의 명문 사학이다. 학생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가능성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교육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체계적이고 치밀한 진로교육 정평 실제 영일고는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생들에게 ‘자아 탐색과정 - 진로 탐색의 구체화 과정 - 진로 탐색의 심화 과정 - 진로 탐색 마무리 과정’ 등 4단계로 구성된 체계적인 진로탐색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자아 탐색 과정에선 진로 로드맵 구성을 위한 나만의 책 쓰기, 습관의 재발견,영일 동행 프로그램 등 다양하다. 심화 과정에서는 진로 스토리텔링 심화 과정, 나의 비전 찾기 경진대회 등을 진행해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는 기회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와 더불어 마을연계 프로그램과 유네스코 및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에게 개인-사회-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기능할 때 배움의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배운 내용들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 도움을 주는 인재로서의 역할을 중시한다. 홍콩·중국 등의 자매 결연 학교와 교류하면서 세계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는 2025년 전면 실시되는 고교학점제에서도 영일고는 앞서간다. 선도학교로 지정돼 지난 3년간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교육과정 선택권을 부여해 왔다.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등 제2외국어 교육에 강점을 보이고 있는 영일고가 독일어 거점형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뿐 아니다. 인근 학교와의 공유캠퍼스를 통해 인도네시아어·태국어 과정을 전국에서 유일하게 운영하는 학교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영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수업 유연화 교육과정. 기존 융합교육을 좀 더 교육과정에 녹아들게 업그레이드한 수업 유연화 교육과정은 영일고가 야심차게 도전하는 프로젝트이다. 2~4개 과목이 하나로 합쳐져 융합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웬만한 고등학교에서는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성공하기 힘든 것이 사실. 오치훈 연구부장은 “학생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현상을 파악하고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생각에서 도입했다”며 “코로나19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새로운 시도인 만큼 좋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 영일고는 지난 1학기에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을 기반으로 시범운영했다. 작품을 통해 ‘제한된 환경 속에서 인간의 대응 양상’을 살펴보는 데 중점을 뒀다. 소설 남한산성을 관통하고 있는 '고립'을 주제로 국어, 과학, 사회, 영어, 수학 과목까지 연결한 융합 수업을 기획했다. 또 영어과에서는 노벨 문학상 작품 ‘파리대왕’을 읽으면서 제한된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과 이에 대한 인간의 대응 양상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알아보는 수업을 진행했다. 교과목을 넘나들면서 학생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이 같은 실험과 시도는 미얀마 응원 프로젝트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세계인권선언을 학습하고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의 4개 국어로 된 ‘힘내라 미얀마, 영일비전 공동선언문’을 만들어 인권 선언의 의미를 살렸다. 또 미얀마 운동에서 보이는 상징적인 세 손가락의 의미나 구호 등을 알아보고 우리나라 광주민주화운동과 연결지어 군부독재가 나타나기까지 미얀마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교해 보는 의미에서 관련 영상과 사진을 꿈담카페에서 전시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영일고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코딩 프로그램, 글쓰기 프로그램, 전문 직업인 초청 강좌, 금융 경제 경영 콘텐츠 기획 제작 등의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진로를 찾아봄으로써 미래를 대비하는 역량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이외에 코로나19 이후 달라지는 학교 수업 방향에 발맞추기 위해 코딩 수업을 비롯한 다양한 IT 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첨단 수업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이같은 IT 인프라는 코로나19와 함께 시행된 원격수업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교사들은 수업 결손을 피하기 위해 많은 랜선으로 실시간 수업을 진행, 원격수업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지난 4월에는 원격수업의 질을 높이고자 주변 학교 중에서는 처음으로 학부모 대상 공개수업을 진행하는 등 수업의 질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영일고는 공부 잘하는 학교다. 흔히 말하는 SKY를 포함, 대학진학률이 60%를 웃돈다.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에 비춰볼 때 괄목할 실적이다. 진로진학 담당 부서와 교사들이 학생의 특성과 자질에 맞는 학과를 선택해 진학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결과다. 어느 대학을 가느냐보다 학생의 적성과 진로에 맞는 대학과 학과를 선택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학교 측은 밝혔다. 독서교육 등 인성교육도 풍성 학력만이 아니다. 인성교육 역시 으뜸이다. 활발한 독서활동과 다양한 예체능 활동까지 어느 것 하나 뒤처짐이 없다. 먼저 점심시간을 이용한 독서 활동 지원이다.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독서 활동을 함으로써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한 올해 개관한 청소년 문화 카페는 학생들이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각종 DVD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앞으로 뮤지컬과 다큐멘터리를 담은 영상 프로그램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계획도 마련돼 있다. 지역 사회와 연계한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프로그램은 영일고가 10여 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대표적 사업 중 하나다. 어르신들에 대한 공경심을 갖도록 하는 한편, 사회에서 소외된 분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일석이조의 교육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영일고는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방향을 안내하는 학교, 학생의 현재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믿고 공정한 기회를 주는 학교가 되기 위해 80여 교직원이 한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최승훈 교장은 “사람을 한자로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사람이란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야만 진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자기 스스로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교육, 혼자 선 후에는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교육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임용고시와 너무 다른 교육현장 법조인, 의료인, 학자나 교수, 엔지니어 등 전문화된 교육 과정을 거쳐 고도의 지적 작업을 성취해내는 직업을 보통 전문직이라고 한다. 우리 공교육의 교사들은 4년제 이상의 학사과정을 통해 교육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실습 과정을 통해서 국가가 인증하는 교사 자격을 취득하고, 거기에다 공립 교사의 경우는 ‘고시’라고 부를 정도로 어렵고 힘든 임용고사에 합격을 하여 공립 초·중·고 교사직에 진입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전문직이라고 불리는 다른 어떤 직종 이상의 고도의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매우 우수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초·중등 학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직은 전문직인가? 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일반인들도 그리고 우리 교사들도 단번에 그렇다고 말하지를 못한다. 교사는 ‘사’자로 끝남에도 일반인들도 전문직이라는 것에 쉽게 동의를 하지 않고, 교사들조차도 우리 교사직에 대하여 자신있게 전문직이라고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교사로 임직한 때부터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전문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체계를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임교사가 처음으로 교사를 시작할 때 교육에 관한 많은 전문적 지식과 기능을 우선 제대로 적용하여 활용하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씩 더 전문적인 업무를 해나가도록 하는 것이 전문직이 가져야 할 특징일 것이다. 그런데 현장에 나가면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만나게 된다. 교사 자격을 취득하고 교사의 첫발을 내딛는 교사와 내년에 바로 정년을 앞둔 30년 이상의 교사 경력을 갖춘 교사에게 요구되는 업무가 거의 동일하다. 고3 수업과 진학업무 같은 어느 정도의 경험을 통한 역량을 갖추어야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오히려 신임교사에게 주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한 일을 맡은 신임교사에게 자세하게 그 업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매뉴얼도 잘 갖추어지지 않은 채 맡겨지는 일이 허다하다. 왜냐하면 교사들에게는 매년 담당하는 과목과 담당하는 업무가 새롭게 주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업무 파악과 추진으로 인해 초임교사에게 제대로 업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 교육 경력의 연수에 따라 쌓여지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들을 별도로 요구하는 것이 특별히 없으므로 교사직을 시작하면서 교사 개인의 태도와 역량에 따라 전문가로 성장하는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62세까지 특별한 새로운 자격을 요하지 않는 직업의 안정성은 전문성에 대한 절실함을 느끼게 하지 못한다. 20대 후반에 첫 교직을 시작하고 몇 년 지나 30대가 되기 전 교사들은 교사로서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초임 때 갖춘 지식과 기능으로 62세까지도 직업 유지가 가능하다는 것은 직업적 안정성 측면에서는 유리할 수 있지만 전문성 신장이라는 내적 성장 동기가 있는 젊은 교사들에게는 그렇게 좋은 직업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젊은 교사들은 전문성에 대한 욕구 충족을 위해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박사 학위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30대 중반 이후의 교사들이 자신이 전문적인 교사로서 성장하기 위한 길로 유력하게 보이는 것이 ‘전문직’으로의 길이다. 사실 ‘전문직’은 교육공무원법상의 용어로는 ‘교육전문직원’으로 장학사·장학관·연구관이 여기에 해당된다. 교사로서의 자기 발전을 꾀하는 똑똑하고 유능한 교사는 이 ‘전문직’에 도전하게 되고 장학사나 연구사의 경력을 쌓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교감이나 교장으로 승진하는 유리한 길에 접어들게 된다. 어떻게 보면 교사로서 유일한 길로 보이는 ‘전문직’으로서 하는 일은 교육 자체에 대한 전문적인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고 교육 본연의 전문적인 업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전문직’에게 요구되는 자격과 실제 수행하는 업무를 보면 교육 그 자체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행정’적인 일에 치우쳐 있다. 17개 시도교육청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면 전문직이라 불리는 ‘장학사’에게 부여되는 업무가 기본적으로 10가지가 넘는다. 그리고 업무 표를 보면 장학사 담당 업무 아래 교사 출신이 아닌 일반직 출신인 주무관이 하는 일도 열거되어 있다. 그런데 전문직이라고 하는 장학사와 일반행정직원이 담당하는 업무의 성격과 곤란도에 있어서 큰 차이도 보이지 않는다. 교육의 전문성을 갖춘 자라는 의미가 담긴 교육전문직원은 분명 직급상 학교 현장에 있는 1급 정교사보다는 높아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데 창의적이고 전문적인 일이라기보다는 법과 규정의 적용과 행정적인 업무가 대부분이다. 물론 좋은 교육이 학교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런 교육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행정적·재정적 지원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교육 전문가가 되길 희망하는 교사 출신이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교육의 전문성을 갖추고 싶어하는 유능하고 똑똑한 교사들은 교육의 본업에 충실한 일을 맡아서 수행해야 한다. 교육청에서, 교육지원청에서 ‘전문’의 타이틀을 단 장학사와 연구사들 역시 자신이 해보지 않았던 영역이 대부분이라 우리나라 교육청의 전문직들은 야근과 밤샘이 일상처럼 되어 있다. 분명히 본인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학교 현장과 떨어져 있는 일인 줄 알면서 교감·교장이 되어 학교로 돌아갈 그날을 기다리며 참고 있는 것이다. ‘교육전문직’에 맞는 역할은 현장 교사들의 교수학습, 평가, 교육과정 운영, 생활지도 등을 관리하고 점검하기 전에 그 전문성으로 직접 학교 현장에서 가르치고 평가하면서 현장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평가도 그리고 성장과 발전의 변화를 기록하는 일 모두가 상당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서 멀어진 사람일수록 전문가 소리를 듣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전문직을 하고 학교 현장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학생들의 수업과 평가의 현장과는 떨어져 있는 교감과 교장으로 관리직에 바로 투입되게 된다. 교육전문직이 할 일, 행정직이 할 일 현재 학교 교육을 미래 사회로 이끌어갈 교육청과 교육지원청의 전문직이 하고 있는 일들은 곧 AI와 로봇 그리고 전문적인 행정직원에 의해서 대체될 것이다. 이제부터의 교육전문직은 교육 그 자체에 대한 전문가로 성장하고 그 전문성으로 학교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로 바뀌어야 한다. 교육청·교육지원청에서 근무하게 되는 교육전문직이 진정으로 교육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청 업무 중 교육전문가의 업무는 교육과정운영, 수업, 평가, 학생지도교사 중심으로 전환하고 행정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는 일반행정에서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교육전문직으로서 교육에 대한 전문적 역량을 갖추도록 하여 교감과 교장의 관리직으로 투입되기 전 학교 현장에 투입되어 실행을 통하여 학교의 질을 변화시키는 현장의 전문가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문직을 통해 교감·교장이 되는 것이 교사로서 전문가가 되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글로벌 미래 사회에 필요한 학생들의 바람직한 변화와 성장을 일으킬 수 있는 교육 본연의 업무에 대한 깊은 연구와 실행이 교사로서 전문가의 길을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행복이 찾아왔다 하고 느끼는 순간, 행복은 떠나버린다고 했던가. 행복은 그 순도가 높을수록, 오는 것도 모르지만 가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행복은 왜 그래? 도대체 행복은 왜 그렇지? 그렇게 물어 봤자다. 바로 그래서 행복이라는 거다. 행복의 본질이 그렇단다. 나는 이 말이 행복의 행복다움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알아차린 행복, 사방에 노출된 행복은 그냥 그대로 ‘변치 않는 행복’으로 내 곁에 있기 어렵다. 복이 나를 찾아 주어야지, 내가 복을 찾아서는 복이 피해서 간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행복도 복의 일종이니 여기에 해당한다. 복을 다루는 인간의 마음은 이기적이다. 일단 어떤 복이 내게 들어오면, 우리는 그 복을 더는 복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누려야 할 그 무엇이고, 그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되는 나의 소유물일 뿐이다. 돈처럼 말이다. 복을 준다는 복권을 두고 생각해 보자. 물론 복권도 행복이 될 수 있다. 다만 복권을 사기로 마음먹는 데서부터, 복권을 사서 일등 당첨을 꿈꾸는 데까지만 행복이다. 실제로 일등 당첨되는 순간, 행복은 조용히 떠나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 후 인생이 행복의 꽃길로 걸어갔다는 사람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복권 당첨이 화근이 되어 불행에 시달렸다는 사람은 많다. 배분을 놓고 가족이 불화하고, 더 큰 욕심을 부리다가 파산에 몰리기도 하고, 생긴 돈으로 허랑방탕 지내다가 가정이 무너진 경우도 적지 않다. 1908년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가 쓴 희곡 《파랑새(L'Oiseau bleu)》도 행복에 대한 유사한 인식을 담고 있다. 주인공 남매는 요정들과 함께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나선다. 어려운 고비를 넘고서 파랑새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 파랑새들은 이미 죽어 있다. 고난을 뚫고 여러 미지의 세계를 헤매어 보지만, 파랑새 찾기는 실패한다. 지치고 탈진하여 집으로 돌아온 남매는 놀라운 장면과 마주친다. 그간 집안 새장에 있던 회색 비둘기가 파랑새로 변해 있지 않은가. 그토록 찾았던, 바로 그 파랑새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남매 주인공은 딸을 잃은 불쌍한 할머니에게 그 파랑새를 준다. 마테를링크는 말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무심히 스치기 쉬운 내 주변에 있다. 행복은 사소한 일상 안에 숨어 있다. 행복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한다. 인간의 욕망과 행복 사이는 늘 불안하다. 좀 비장하게 말하면,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관계이다. 어쩌겠는가. 진실로 행복해지려는 자, 욕망을 버려라. 행복하겠다는 욕망조차도 버려라. 아침에 샤워하면서 혼자 무심코 불렀던 노래를, 출근해서도 무의식중에 종일 흥얼거리고 있다. 이러고 있는 나의 ‘심리적 자아(정서적 자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는 내가 나에게 노래를 들려주면서, 내가 나를 쓰다듬는 마음 안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남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노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억압도 없는 자유와 ‘자재(自在)의 자아’가 있다. 마음에 자유가 차오르고, 그 마음 안에 화평과 조화가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의 그림자가 잠시 내 마음에 비쳐든 것 아닐까. 행복은 이런 식으로 우리와 스치듯 지내며, 있는 것 아닐까. 이런 행복 인식을 두고 나는 ‘행복의 현상학(現象學)’이라 명명하고 싶다. 경험의 현상에서 길어 올린 행복, 그 행복을 만들어내는 순수 의식을 소중히 여기고 싶기 때문이다. 행복은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행복은 마음의 순정한 작용이다. 그 순정함은 나 자신도 행복이 와 있는 줄 미처 모르고 있다는 데서 행복의 정점을 조용히 만든다. 그리스를 여행했을 때다. 이탈리아 레체에서 열린 동양 정서학회에 참가하고, 아테네로 왔다. 호텔에서 아침 샤워를 하며, 나는 어떤 노래를 흥얼거린다. 무심코 나온 노래이다. 아침 식당에서도,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계속 그 노래가 나온다. 동행인 최 교수가 묻는다. “기분 아주 좋으신가 봐요?” 최 교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기분 좋은 것 그 이상의 무엇이 내 마음 안에 있다. 내 마음 안에 자유가 차오른다. 그 자유에서 오는 평화가 있고 조화가 있다. 딱히 여행에서 오는 기분이랄 수도 없었다. 노래 때문인 그 무엇이 있다. 나는 그때 그 노래를 좋아하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그건 행복이었다. 그땐 몰랐다. 우리 일행은 코린트 남쪽 60km에 있는 에피다우로스 원형 극장에 도착했다. 기원전 4세기에 지은 이 유명한 에피다우로스 원형 극장은 거대한 좌우 대칭의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지을 당시 좌석은 34단이었지만, 로마 시대에는 55단으로 더 높게 확장되었다. 이 극장은 자연 그대로의 소리 전달 효과가 뛰어나서, 음향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내는 육성을 극장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안내인은 우리에게 노래를 권하며 그 효과를 시험해 보라 한다. 나는 마침내 노래를 불렀다. 아침부터 웅얼거리던 노래를 그리스 에피다우로스 원형 극장에서 불렀다. 극장 계단 끝자리 띄엄띄엄 앉아 있던 이국의 관광객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그날 내가 부른 노래는 이수인 선생이 작사·작곡한 가곡 ‘내 맘의 강물’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이곳 에피다우로스에 오기까지 흥얼거렸던 노래도 물론 ‘내 맘의 강물’이었다.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새파란 하늘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국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가장 아끼는 내 애창곡이다. 멜로디가 얼마나 정감이 있는지, 어디에서 불러도 사람들 마음에 정 깊은 강물로 흘러가는 음률이 된다. 가사는 또 얼마나 곡진하면서도 절제가 아름다운지, 부르는 내 감정이 조용히 올라와 울컥해질 때가 있다. 시간과 존재의 무상함, 사람 사귐의 유한함 속에서도 우리들의 유정함을 기약하는 노래이다. 그런데 그날 무엇이 이 노래를 아침부터 웅얼거리게 했을까. 그 노래는 왜 나에게 와서 어떻게 ‘행복’으로 스며들었을까. 그걸 어찌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신은 참으로 오묘하다. 노래는 내가 행복해서 부르게 되는 건가. 노래 자체에 행복이 있어서 부르게 되는 건가. 어떤 마음의 순간에 서로 끌어당기는 것 아닐까. 그 어느 쪽이라 해도 노래에 몰입하여, 강물 같은 노래를 맘 안에 두면 행복하다. 도취 중에 가장 강하고 순정한 도취는 자기도취다. 자유에 기반을 두는 행복이란 적절한 자기도취를 요청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곡가 이수인 선생이 나에게 준 감화가 더없이 소중하다. 나를 선생의 노래에 눈뜨게 하여, 자유 감성의 자아를 발견하게 하고, 내 ‘마음의 밭(心田)’을 행복의 영토에 들게 해 준 분이다. 나는 ‘내 맘의 강물’ 이외에도 선생의 노래를 좋아한다. ‘고향의 노래’, ‘별’, ‘만월’, ‘석굴암’, ‘외가 가는 길’ 등은 내게는 이제 옴짝 없이 정이 든 노래들이다. 나는 선생과 어떤 사적인 만남도 인연도 없다. 오로지 노래를 통하여 그분을 아는 것이 전부이다. 이수인 선생은 ‘내 맘의 강물’을 비롯하여 150곡이 넘는 가곡과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방울꽃’, ‘아빠의 얼굴’, ‘목장의 노래’ 등 500곡이 넘는 동요를 만들고 가사를 붙였다. 그런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만큼 우리 애창 가곡과 동요도 메말랐을 것이다. 이수인 선생은 KBS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던 꼬마 조수미의 어머니에게 ‘춤’, ‘피아노’, ‘노래’ 세 가지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조수미를 ‘성악가’로 키우라고 조언한 결정적 멘토이기도 하다.(KBS 보도, 2021.8.23.) 얼마 전, 이수인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다. 내 마음 안에 행복을 고이게 하던 샘 하나가 사라졌다. 소천 소식을 접하며 그날은 얼마나 허전하고 아쉽고 쓸쓸하였는지. ‘내 맘의 강물’을 종일 가슴 안에 머금었다. 선생을 보내고 부르는 이 노래는 그 뜻이며, 곡조며, 감정들이 얼마나 너그러운 울림으로 살아나는지, 나는 조용히 울었다. 애도를 넘어서자 감화가 찾아왔다. 감사했다. 그는 교실 밖에서 국민을 감화로 이끈 훌륭한 스승이었다. 어찌 학교에만 스승이 있으랴.
능력주의 사회, 가난의 대물림 28년을 직업계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정글 같은 사회에 내보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지적처럼 학력 자본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학력 능력주의 사회에서 부족한 학력을 잘 견디며, 제법 성공해서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제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제자는 그들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가난을 대물림받아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빈곤은 군나르 뮈르달(Karl Gunnar Myrdal)의 통찰처럼 대물림을 넘어 부와 마찬가지로 확대재생산된다. 기초학력 부족과 학습된 무기력,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그들의 고된 노동은 정형화된 수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각형의 교실처럼 반듯하게 질서를 요구하는 학교와 끊어진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제자들 사이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중견 교사로 취업 담당 부장을 맡아 한참 취업률에 신경 쓰고 있을 무렵에 제주 생수 공장에서 이민호 군이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사망했다. 이민호 군은 직업계고에 적을 둔 고등학생이자 현장 실습생이었다. 제주 생수 공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무렵 내가 취업시킨 다수의 제자가 근무했던 곳도 이민호 군이 고통스럽게 죽어간 현장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의하면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매년 1,000명 이상이 산업재해로 사망했고, 2014년부터 2020년까지 850명에서 1,000명 사이의 산업재해 사망자가 발생했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산업재해로 4,641명이 사망했다. 이는 매년 928명이 아침에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에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2021년 상반기에도 산업재해로 유명을 달리한 노동자가 474명이다. 안전보건 공단은 매일 사망사고 속보를 낸다. 2021년 1월 3일 울산 자동차 공장 사망사고를 시작으로 10월 7일 포항 덤프트럭 사망사고까지 총 324건의 사망사고 속보가 올라왔다. 거의 매일 한 건 이상의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발생한다. 산업재해 사망률이 수년째 1위 국가의 민낯이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산업현장으로 제자들을 몰아넣어야만 했던 나는 산업재해 뉴스를 접하면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혹시 나의 제자가 희생되지 않았을까? 취업률이 높아야 교육청으로부터 학교의 재정지원금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시기라 나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된 사업장임을 알면서도, 최저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을 꾸역꾸역 사업장으로 밀어 넣었다. 행여 힘들어 다시 학교로 오겠다는 학생들에게 조금만 더 견뎌보라고 했었다. 회사에서 명백한 산업재해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회사 관계자에게 노동법 조항을 거론하면서 제대로 따지지 못했었다. 내년에 다시 그 회사로 취업 가야 할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현장실습 나가는 제자들에게 제대로 노동인권에 대해 가르치지 못했을까? 회사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주말 노동과 잔업에 그냥 참지 말고 당당히 말할 권리가 있다고 가르치지 못했을까? 위험하거나 힘들면 일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회사를 그만둘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을까? 이민호 군 사고 이후로 모든 교육청은 더는 취업률을 기준으로 직업계고 재정 지원에 차등을 두지는 않는다. 그리고 성가실 정도로 노동인권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직업계고는 2018년부터 근로 중심에서 학습 중심으로 현장실습의 패러다임 변화를 통해 현장실습에 있어서 학습과 안전을 강화했지만, 현장실습생을 저임금 노동자로 대하는 기업과 산업재해 관련 법률의 미비 등이 맞물려 올해도 어김없이 직업계고 학생의 사망 비보를 접한다. 10월 6일 여수의 특성화고 홍정운 학생은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18세 미만 금지 직종이자 잠수기능사 자격 없이 불가능한 잠수 작업 지시를 수행하다 사망했다. 이민호 군 사고 이후 학습 중심 현장실습을 통해 안전한 현장실습이 되도록 하겠다는 교육부의 학습 중심 현장실습 정책은 노무사의 현장 실사를 통해 엄격하게 검증된 ‘선도기업’을 중심으로 한 현장실습이었다. 이민호 군의 사고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현장실습 업체의 요건이 완화되었다. 홍 군이 현장실습 나간 사업체는 노무사의 현장 실사 없이 학교 심의만으로 1인 사업장임에도 현장실습 사업체로 선정될 수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 단위 학교나 심의한 교사들을 비판하는 기사가 많다. 그런데 현장실습 사업체 선정 심의에 참여한 교사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단위 학교에서 현장실습 관련 협의회는 고3 담임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냥 담임이기 때문에 그 협의회에 속한 것뿐이다. 현장실습 사업체 선정을 심의할 아무런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교육부는 산업안전전담관 제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시교육청의 공문에 따르면, 교육부는 2021학년도 하반기부터 안전한 학습 중심 현장실습을 위해 산업안전전담관 제도를 시범 운영한 후, 2022년 3월부터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산업안전전담관 제도는 직업교육훈련촉진법 제8조 2항에 따라 현장실습생이 산업현장에서 접하게 되는 유해·위험기계 등의 위험 요소를 인지하여 사전 안전예방 대책을 강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산업안전연수를 이수한 학교의 교감 또는 현장실습 담당부장, 전달 연수를 받은 자가 산업안전전담관이 된다. 산업안전전담관은 산업안전근로감독관과 협업체계를 구축하여 현장실습 안전사고 예방 등 안전 기반 강화, 현장실습 시작 전 산업체 발굴 단계에서 기업의 산업안전 여건을 점검하게 된다. 실제로 금년 상반기에 단위 학교의 교감이나 취업 담당부장 중 반드시 한 명은 산업안전연수를 받아야 했다. 교육계의 이상한 관행이다. 문제가 생기면 결국 연수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진정으로 30시간 연수 이수로 사업체의 산업안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가?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면 좋겠다. 교사는 수업 전문가이다. 산업안전 전문가가 아니다. 30시간 연수로 전문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산업안전전담관 제도의 예산이면 현장실습 업무와 취업 업무를 보조하는 취업 지원 인력의 노동 안정성 강화 정책을 펼 수 있다. 현재 서울의 경우 직업계고의 취업 지원 인력은 서울시 예산지원을 받고 있기에 1년 단위의 선발 권한만 단위 학교에 있고 소속은 서울시 각 자치구이다. 1년 단위의 재계약으로 취업 지원 업무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신분상 제약으로 취업 지원인력은 독립된 주체로 취업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단위 학교는 매달 취업 지원인력의 근무상황을 각 자치구에 보고해야 하는 행정의 낭비를 하고 있다. 취업 지원인력을 정규직 실무사로 채용하여 재학생의 진로 개척과 현장실습생의 산업안전 그리고 졸업생의 유지취업률을 증가시키는 등 장기적인 관점에서 취업을 지원할 수 있는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 산재보상금과 특성화고생의 죽음 산재보상금을 포함하여 퇴직금 50억 원 받은 30대 곽 씨와 여수의 한 요트사업장에서 현장실습 도중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제거하다 익사한 10대 직업계고 홍 군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생각해 본다. 곽 씨는 부모를 잘 만난 능력(?), 약 6년 근무한 회사로부터 신청하지도 않은 산업재해까지 인정받으며 퇴직금으로 5억도 아닌 50억 원을 받은 것을 자신의 노력과 능력이라 말한다. 홍 군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은’학생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채로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되어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으로 곧 세상의 관심사에서 사라질 것 같다. 구의역 김 군, 제주 생수 공장의 이 군이 그러했듯이. 홍 군이 숨지고 겨우 사흘 만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고업체는 영업을 재개했다. 교육부는 또 대책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홍 군이 잊히는 속도보다 더 빨리 그 대책은 느슨해질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