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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최근 학교는 물론 온 나라가 사상 초유의 급식 사태에 몸살을 앓고 있다. 더구나 집단 식중독 사태가 식품업체로서는 브랜드 이미지가 높은 대기업이 관리하는 위탁업체라는 점에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노로바이러스'에 의한 식중독이라는 것 외에 감염경로나 책임소재를 속시원히 밝혀내지 못한 점은 아쉬운 면이다. 사고가 터지자 모두들 기다렸다는듯이 위생관리와 감독체계 부실, 이윤추구에 급급한 위탁급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며 학교급식은 직영 전환만이 대안이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학교에서 급식을 직영체제로 전환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나름대로의 논리로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그렇다고 위탁급식 옹호론자는 결코 아님도 아울러 밝혀둔다. 다만, 각각의 문제점을 알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제주도는 학교급식을 100%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는 전국 유일의 시범 지역으로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급식지역이라는 격려를 받아왔음은 물론이다. 그러면 제주도는 집단 식중독 사고 등 학교급식의 문제점이 완전히 해결됐을까. 그렇지 않다. 매년 4~5건의 식중독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지역의 규모와 학교 수를 감안하면 오히려 더 높은 사고율이다. 학교 직영급식이면서도 똑같은 잘못이 나타난다면 급식의 문제가 다른데 있다는 말이다. 물론 직영급식, 위탁급식은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다. 직영급식 체제는 관점에 따라 나름대로 장점이 많을 수 있다. 우선, 학교장의 전적인 책임 하에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학부모의 노력봉사를 포함해 재정적 절감효과가 있으며, 급식 운영상 문제점이 있을 경우 즉시 조치할 수 있다. 특히 학생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영양교육이나 식사예절 등의 식생활 교육을 할 수 있으며 학부모와 교사들이 배식에 관여하므로 보이지 않는 인성교육까지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외에도 교육당국에서 시설비와 인건비 일부를 부담하고 지방정부로 부터 운영비를 일부 지원받음으로써 학부모의 급식비 부담을 다소 줄여줄 수 있다. 따라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위탁업체와는 달리 양질의 식재료 사용에 따른 보다 균형 잡힌 영양식을 제공할 수 있고 위생안전과 관련, 문제점이 발생할 경우 즉시 개선조치가 가능한 점도 직영급식의 좋은 측면으로 꼽히고 있다. 이처럼 직영급식의 바람직한 면을 부각시키며 체제 변경을 유도하거나 이제는 아예 법으로 직영을 의무화하려는 추세다. 그러나 현실을 조금만 직시하면 직영급식만이 모든 급식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상은 다소 성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제도이든 운영 방법 내지는 관리가 중요한 것이지 제도가 잘못되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직영이냐, 위탁이냐를 결정하기에 앞서 각각의 문제점을 꼼꼼히 짚어보고 대안을 세운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학교급식에서 직영체제가 나름대로의 많은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문제점 또한 적지 않다. 첫째, 모든 학교에는 영양교사는 물론 국가가 인정하는 조리사를 의무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총정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현행 교육부의 회계제도 하에서는 배치되는 영양교사 수만큼 수업담당 교사가 줄어 사서교사, 상담교사, 보건교사, 치료교사 등과 함께 학교현장에서 정원관리상 또 다른 갈등 요소가 될 공산이 크다. 둘째, 학교장 등 교직원의 책임이 지나치게 커진다는 문제점이다. 급식 사고 발생 시 관리자는 도의적 책임을 넘어 1차적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음식물 책임배상보험’ 등 각종 보험가입을 통한 위험에 대한 대비책이 갖춰진 대형 위탁업체와는 달리 위험에 무방비 상태인 학교장이나 행정실장 등은 사활이 걸린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책임을 피하기 위한 또 다른 부작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셋째, 직영체제라고 해서 반드시 양질의 식재료만 사용하거나 예산이 크게 절감된다는 보장이 없다. 기업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해 식자재를 공동으로 구매하거나 가격 급등에 대비한 저장 관리가 가능한 대형 위탁업체와는 달리 학교는 이런 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격 변동에 대처하기 어렵다. 공동 전처리시스템, 업무 분업화, 식단 개발, 서비스 개선, 첨단설비ㆍ시설 활용 등 업무 효율성을 위해 첨단 식품산업기술을 활용하고 적용하는 측면 또한 학교는 전혀 고려할 수 없다. 넷째, 가장 큰 문제는 직영체제로의 전환에 따른 예산 문제다. 현재 전국에는 초등학교의 99.6%, 중학교의 75.2%에 직영급식을 하는 반면 고교의 경우 직영급식 비율이 6.3%에 불과하다. 직영으로 전환하는 데 학교당 대략 시설개선 등 2억 원씩 소요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따라서 직영으로의 전면 전환은 범국가적 차원 아니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섯째, 급식관련 시설이나 지원을 받는 일부 인건비를 제외한 급식 종사원의 인건비 추가 등이 결국 학부모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돌아갈 수 있다.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최소한의 시설 외에는 투자를 피함으로써 안전과 급식의 질 저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인건비도 절감하기 위해서 인력 채용을 최소화 하면 학생들에게 기호도에 따라 다양한 식단을 제공할 수 없고, 결국 학부모의 지원을 받거나 전문성이 없는 아르바이트나 학생까지 동원함으로써 급식 서비스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섯째, 원재료가 오염된 상태에서는 학교급식에서 집단 식중독을 방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안전하고 품질이 좋은 우수 농산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식재료의 가공과 안전관리 기술에 대한 노하우가 학교에는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연 학교가 전문업체 이상으로 관리ㆍ유통 단계에 대한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문제다. 실제로 직영학교에서 식재료는 ‘최저가입찰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몇몇 업체가 담합하여 응찰함으로써 서로 돌아가며 낙찰되거나 경쟁력을 갖춘 몇몇 업체가 수십 개 이상의 학교를 독과점 하는 현실을 뻔히 보면서도 현행법상 학교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외에도, 위생사고가 발생할 경우 해당업체와 관련자를 제재하기가 어렵다거나 급식관련 업체의 로비활동, 횡포 등에 학교가 일일이 대응해야 하는 것도 일이다. 학교장이 학력신장이나 학교운영 등 고유 업무보다는 사고예방을 위해 급식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기현상’이 벌어질 것이며, 급식사고가 나더라도 학교 내에서 은폐 또는 축소되는 경우도 우려된다. 결론은 이렇다. 직영급식이든 위탁급식이든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이 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단점은 없애고 장점을 신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정부나 교육당국은 직영이냐 위탁이냐에 지나치게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질 좋은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 올바른 식생활 지도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국민 식생활 개선에 기여하고 있는지, 교육의 일환으로 학교급식이 운영되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중장기적으로는 학교급식을 전담할 수 있는 전문기관을 설립하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아침 7시가 채 되기 전에 교문을 들어서니 교실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교실마다 불이 켜져 있다고 하니 당직하신 오 주사님께서 아침 6시가 되기 전부터 문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린다고 하더랍니다. 학생들의 기말고사 전쟁을 치르는 모습을 실감할 수 있는 아침입니다. 어제 시험 첫날 오후, 무용을 가르치시는 선생님께서 제9회 울산무용제 팜플렛과 초대권 두 장을 가져 왔네요. 토요일 오후 7시 울산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해프닝’이라는 현대무용을 선보인다고 하면서요. 그리고는 따뜻한 녹차 한 잔을 가져와 차를 마시면서 ‘해프닝’에 관한 대화를 잠시 나눴는데 무용선생님의 진면목을 보는 듯했습니다. 무용의 전문가라 방학 때만 되면 강사로 초빙되고 전국체전 때 팔선녀 지도, 개막식 무대공연 지도 등을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이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팜플렛에 ‘해프닝’ 제목 하에 선생님의 사진과 함께 ‘안무 정○○’라고 되어 있어 안무가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춤동작을 만들고 지도하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정 선생님께서 직접 춤 내용을 구상하고 16명의 무용수들에게 역할분담을 하고 춤을 가르치고 하면서 약 두 달 동안 연습을 해 ‘해프닝’이라는 현대무용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출연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자들인데 서울에서 현재 대학 다니고 있는 학생들, 무용학원 강사들로 16명의 무용수들이 시험을 앞두고서도 서울에서 울산에 왔다갔다하면서, 학원일도 뒤로한 채 한 자리에 모여 ‘울산춤포럼’이라는 무용단을 만들어서 준비를 했다고 하네요. 춤 내용은 허무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복잡한 삶을 일종의 ‘해프닝’으로 해석해 일상의 삶과 내면세계를 색다른 관점에서 조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창작 ‘해프닝’은 각자의 삶 속에서 모양을 달리해 다가오는 슬픔, 고독, 갈등의 무거운 이미지를 때론 활기차고 때론 박력 넘치는 몸짓에 담아 현재에 얽매여 앞으로 내달리지 못하는 자들의 마음에 신선한 자극제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든 거라네요. 주제 선정도 좋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총 4개의 에피소드로 꾸며지며 첫 번째는 ‘무의식, 무의미 일상의 풍경’, 두 번째는 ‘갈등의 태동’, 세 번째는 ‘갈등의 시간’, 마지막 네 번째는 ‘자각과 인식의 시간’ 주제로 춤사위를 펼치는데 정 선생님은 ‘울산의 현대무용을 전국에 알리고 싶은 욕심으로 작품을 통해 관객 스스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두 달 전 공연 때도 초청을 받았는데 사전 약속이 있어 참석하지 못해 미안했었는데 이번에도 또 사전 약속으로 참석치 못해 안타까움이 더합니다. 이번 기회에 참석해 현대무용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좀 넓히고 선생님에게 조금이라도 격려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정 선생님의 작품구상 능력이 이렇게 탁월한 줄 전에는 전혀 몰랐었는데, 이번에 팜플렛 내용을 읽어보고 소설가나 극작가만이 할 수 있는 대본구상능력을 소유한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무용을 사랑하는 열정, 작품 내용에 따라 어떤 때는 어둡고 밝은 춤을, 어떤 때는 빠르고 느린 춤을 구상하는 것이며, 무용수와 남자무용수의 몸짓향연이 군무 사이사이 펼쳐져 화합의 가능성을 살짝 맛볼 수 있도록 구상하는 능력이며, 내용 줄거리에 따라 음악을 편집하는 음악 편집능력까지 소유하고 있구나 하는 점을 알게 되네요. 정 선생님은 평소에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정적인 어려운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 시험성적으로 인해 갈등하는 학생, 부모 잃고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땀을 흘려가며 무용을 통해 힘을 실어주고 활기차고 박력 넘치게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고민과 고통과 슬픔과 갈등 속에 살아가는 기죽은 학생들에게 활기차고 진취적인 군무와 같이 쭉쭉 뻗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정 선생님이야말로 정말 위대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쁘신 중에 있는데도 담임이 아니지만 야자감독에 함께 동참을 해 담임선생님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학생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무용만 사랑하는 예술인이 아니라 무용 을 통해 우리의 위축된 삶을 자극하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도 톡톡히 해내며 틈틈이 밤 10시까지 학생들의 야자감독에도 함께 참여하고 있으니 정말 존경할 만합니다. 우리학교에 이렇게 능력 있고 열정적인 무용선생님이 계신다는 게 우리학교의 보배요,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통사고만 아니었다면 직접 ‘해프닝’의 현대무용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는 정 선생님! 한 작품을 만드는데 엄청난 경비가 드는데도 자비를 들여가면서, 돈이 되지 않는데도 현대무용을 사랑하기에, 학생들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주기 위해, 어둡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밝고 활기차게 살아가도록 하는 정 선생님! 하루 빨리 교통사고 후유증에서 벗어나도록 하시고 울산현대무용이 전국수준에 이를 만큼 한 차원 높여주시고 어둡고 힘들게 살아가는 학생들이 무용교육을 통해 밝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학교무용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어주셔야죠. 7월 1일의 현대무용 ‘해프닝’이 좋은 반응 얻기를 기대합니다. 정 선생님, 파이팅 !!!
박하선 | 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낙원 아주 오래 전 일이다.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이 지금 기억으로 '멀고 먼 푸른 바다(The Ocean)'이였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했다. 남태평양의 한 젊은 원주민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방법으로 바다에서 살아가는 것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었는데, 사실 내용 면에 있어서는 별 것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영화가 지금도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장면 장면마다에 남태평양의 꿈같은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영화를 본 후부터 줄곧 내 마음속에는 남태평양의 그 투명한 물빛과 아름다운 해변이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 오게 되었다. 우리는 실로 자기 마음속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이 항상 현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 또한 학창시절에 품기 시작한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먼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남태평양에는 낙원처럼 느껴지는 많은 섬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로 우리에게 이름만은 결코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곳이 있다. 누구든지 만나면 먼저 'Bula!(안녕)'를 외치고 상대편 또한 'Bula, Bula!'로 화답하는 남태평양의 조그마한 섬나라 '피지'가 바로 그곳이다. 그곳에는 투명한 햇살 아래 꿈같은 바다와 젊음의 낭만, 그리고 때 묻지 않은 대자연의 속삭임이 있었다. 어릴 적 동심의 세계에 꿈을 심어 주면서 말로만 들어오고 영상으로만 접해 온 그 환상의 남쪽 먼 바다. 그 보석처럼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오랜 꿈이 현실로 다가옴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태양과 바다의 아름다운 만남 이곳 피지는 주섬인 '비티레부'를 비롯하여 320여 개의 크고 작은 화산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를 합한 정도 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이곳 남태평양의 여러 섬나라 중에서는 제법 큰 나라다. 그래서 '남태평양의 십자로'라고 불린다. 옛날 이곳이 서양에 처음 알려질 때만 해도 식인종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지만 이젠 다시 천국에 비유하고 있다. 인구는 75만 명쯤 되는데, 원주민이 48%, 인도인이 46%, 그리고 나머지는 유럽인과 중국인이다. 인도인이 이렇게 많은 것은 영국 통치 시절에 이곳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인도인들을 대거 이곳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인도인들은 원주민들보다 뛰어난 상술을 발휘하여 오늘날 이곳 주요 상권을 거머쥐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원주민들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피지가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주변에 아기자기한 많은 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지의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서는 유람선을 타고 섬들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 섬들은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생겨났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파도에 밀려온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섬들이다. 그러니까 그 많은 섬들 중에는 단 두 그루의 야자수와 백사장만으로 1분 안에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영화배우 '브룩 실즈'가 출연한 영화로 유명해진 '야샤와 제도'에 이르기까지 규모와 종류가 다양하다. 또 이러한 섬들 중에는 무인도도 있지만 대부분의 섬에는 피지 전통 양식의 '부레(숙소)'를 비롯하여 여러 리조트 시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쾌적한 상태에서 남국의 바다를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섬들을 찾아 떠나는 유람선의 여행 또한 이곳 피지를 찾는 이들에게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다. 찌든 문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파 훌훌 털고 잠시 떠나온 사람들, 보다 맑은 자연의 품에 안겨 남국의 낭만을 즐기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그리고 필자처럼 역맛살이 낀 사람들…. 그 모두가 넓고 푸른 바다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 유람선의 갑판 위에 아무렇게나 뒹굴면서 이곳에서만은 모든 것을 잊고 자연과 더불어 있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하나가 되고 피지안들이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악기를 연주하던 한 피지안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내게 묻는다. '코리아'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국 가요 '사랑해'가 연주되면서 노래가 나온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분위기에 취한다. 그러는 가운데 남국의 뜨거운 태양은 우리를 검게 그을리게 하고, 환상의 섬은 꿈처럼 다가왔다. 편안하고 순수한 자연의 소리 이렇게 남국의 낭만을 가득 싣고 이 섬 저 섬을 오가는 유람선을 타게 되면 누구나가 한 번쯤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리조트 아일랜즈라고 불리는 '마마누다 제도' 중 최대의 규모와 시설을 자랑하는 '마나섬'이다. 난디 바로 옆의 '라우토카'에서 유람선을 타고 이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2시간쯤 흘러서 그 마나섬에 닿았다. 이곳은 비취색 맑은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곳이나 백사장이 있는 해변에다 윈드서핑에서 스쿠버 다이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또 시간이 넉넉한 사람은 야자림 속의 '부레'에서 다소 비싸기는 해도 며칠이고 머물 수도 있으며, 해변가에 마련된 뷔페 식당은 끼니때마다 손님을 불러들여 그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남국의 음식을 드는 것도 기분 좋은 것 중의 하나가 된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불편함 없이 잘 준비된 이 마나섬이지만 그 어디를 봐도 개발 면에 있어서 자연미에 거슬리는 것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백사장에 그 촌스런 각종 음료 광고의 비치파라솔 하나 없는 것을 비롯하여, 외관상의 콘크리트 건물 하나 찾아 볼 수 없고, 너저분한 상가 같은 것도 하나도 안보이며, 시끄러운 음악 또한 전혀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 비취색 바다와 야자수들, 각종 해양 스포츠 도구들, 요트 그리고 사람들뿐이며, 들려오는 것이라곤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스쳐가는 바람소리뿐이다. 현대 문명과 단절된 휴식처 사방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이러한 리조트 섬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본 섬인 비틸레부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니 수평선 끝까지 확 트인 시원스런 바다가 계속해서 펼쳐진다. 눈앞에서 얼마간은 옅은 녹색을 띤 투명한 바닷물에 여기 저기 거뭇거뭇한 것들이 흩어져 있고, 그 너머로는 바다 색이 갑자기 짙어진다. 처음에 저 거뭇거뭇한 것들이 무엇일까 했는데 알고 보니 산호였다. 그래서 이쪽의 해변을 'coral coast'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산호초 해안'인 것이다. 이 지역은 밀물 때가 되어도 바닷물의 깊이가 사람 키를 넘지 않지만 산호초가 없는 곳을 경계로 수심이 갑자기 깊어진다. 그래서 저 깊은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들이 이 산호초에 부딪혀 끊임없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는데, 그 소리가 마치 대전차 군단이 몰려오는 듯하다. 이 'coral coast'를 따라서도 요소요소에 많은 리조트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원주민 부락의 한가로운 모습과 그 리조트 시설에서 편히 쉬는 사람들만으로 고요하기만 하다. 오로지 들려오는 것은 저 멀리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곳 피지는 리조트 중심의 관광지다. 떠들썩한 시가지도, 고색창연한 문화 유적지도 없다. 볼거리라고는 오로지 때 묻지 않은 자연만이 있는 것이다. 한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는 리조트 '탐부아 샌드'라는 곳에 들렀을 때다. 이곳은 주로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 꽤 괜찮은 리조트인데도 불구하고 방안에 전화, 텔레비전, 냉장고 등등의 현대 문명의 이기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분의 말인즉, 그것은 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늘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가는 그들이 이곳에서만은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 얼마만이라도 바깥세상과는 단절하고 편히 쉬고 싶어 한다는 얘기다. 소중한 추억만을 주는 천국 넓고 푸른 바다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풍덩 물속으로 뛰어들고, 기이한 모양의 산호초 사이를 누비면서 형형색색의 물고기들과 친구하고, 야자수 그늘 밑에서 책을 읽다가 오수를 즐기고, 황홀한 석양빛에 취하다가 '메케'라고 하는 원주민들의 춤과 노래를 듣는다. 매일 매일 이런 시간들로만 짜인다면 문명에 길들어진 우리에겐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자신을 생각하면 그 한 시간 한 시간이 소중한 휴식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그 천국의 섬을 떠나오는 길에 'Vinaka! Vinaka!(고맙습니다)'의 환송을 받으며 마음속으로 언젠가 다시 올 것을 다짐하게 된다.
김연수 | 생태사진가 이 새를 보신 적이 있나요? 1996년 동북아 5개국에 일시에 이상한 벽보 하나가 배포됐다. 백로 비슷한 몸체에, 부리가 검은 숟가락처럼 생긴 새의 그림과 제목을 영어로 큼지막하게 'Have you ever seen this bird before?'라고 쓴 벽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참가한 5개국의 국어로 같은 내용의 문구를 함께 적어 놓았다.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이 새를 보신 적이 있나요?'라는 의미다. 여기서 '이 새'는 저어새.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타이완, 일본, 베트남의 조류관련 단체들이 공동으로 저어새의 생존 숫자를 밝히려고 만든 일종의 '조류 센서스' 포스터인 셈이다. 이렇게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쳐 집계한 저어새 수는 613마리였다. 이것이 이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저어새의 전부다. 그래서 우리나라 문화재관리청은 저어새를 천연기념물 제205호로, 그리고 환경부는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다. 뿐만 아니라 국제조류보호회의(ICBP)가 적색목록에 등재, 국제보호조로 분류한, 한마디로 희귀종 가운데 희귀종인 새다. 주걱 모양의 긴 부리가 특징 저어새는 황새목 저어새과에 속하며 긴 검은 색 부리에 하얀 깃털과 주걱처럼 길쭉하게 뻗은 긴 부리에 왜소한 다리가 매운 인상적이다. 바닷가 얕은 곳이나 간척지·늪지·갈대밭·논 등지에서 산다. 먹이는 작은 민물고기나 개구리, 올챙이, 곤충, 호수나 늪지 식물과 그 열매를 즐겨 먹는다. 1~2마리 또는 작은 무리를 지어 생활할 때가 많지만 20~50마리씩 무리를 짓기도 한다. 경계심이 매우 강한 편이다. 7월 하순에 4~6개의 알을 낳아 번식한다. 둥지 주변에서는 '허, 허, 허, 으르 험'하고 울며, 보통 때는 '큐우리 큐우리'하고 낮은 소리로 운다. 강화군 석도에 일부 번식 중 '조류 센서스'를 통해 겨울철을 지내기 위해 여러 나라로 분산한 저어새 수를 집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정도의 새가 과연 어디에서 번식하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일본의 NHK방송과 NTT(일본전신전화국)가 대만 월동지에서 20여 마리의 저어새에게 위성추적장치를 달아 매일 실시간으로 관측했는데 놀랍게도 이들은 한반도 서해 접경지역의 무인도로 이동했다. 이러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필자를 포함한 특별조사팀은 1998년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을 출항했다. 군의 통제를 받아 상륙한 강화군 서도면 석도에서 저어새 번식의 흔적을 발견한 후, 이듬해인 1999년 6월4일 동일한 장소에서 1천 여 마리의 괭이갈매기떼와 70여 마리의 가마우지 사이에서 번식중인 저어새를 찾아냈다. 섬 절벽의 골짜기에서 명아주와 쑥 사이에 튼 둥지에서 발견한 세 마리의 저어새 새끼들은 키가 약 40㎝정도로 새끼의 특징인 노란 부리와 함께 눈과 부리 사이에는 검은 반점이 있었다. 조사팀은 높은 언덕의 서쪽사면에서 10개의 저어새둥지를 추가로 발견했으며 20여 마리가 비도와 석도를 오가며 먹이를 찾는 현장을 확인했다. 10년 이내 멸종 확률 80% 조류학자들은 저어새가 황해의 무인도에서 번식하는 것과 관련, 사람을 비롯한 천적들의 간섭이 거의 없는데다 썰물 때 드러나는 방대한 갯벌에 풍부한 먹이가 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저어새들은 이곳에서 번식이 끝나면 10~20마리의 작은 무리를 지어 번식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차도와 강화도주변에서 서식하다가 9월부터 점차 큰 무리를 이루어 월동지인 대만, 홍콩 등으로 이동한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과 국제조류보호회의(ICBP)가 저어새를 '10년 이내 멸종 확률이 80%로 추정되는 멸종위기 조류'로 분류한 멸종위기종 가운데서도 보호, 보존이 시간을 다투고 있는 새이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저어새의 멸종을 막기 위해 앞다퉈 생존 대책을 마련 중이다. 2001년 9월 저어새 보호를 위한 국제심포지엄이 환경운동연합과 강화시민연대 주최로 번식지인 인천과 강화에서 처음으로 열린 이래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미국 등 관련국가간의 정기적인 조사와 보존대책이 계속되고 있다.
김정휘 | 춘천교대 교수․교육심리학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은 지난해 9월 22일 전국 국․공립 및 사립학교 교사의 정신적 질병 실태를 조사한 교육부의 자료를 공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심한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을 비롯해 정신질환 경험이 있는 교사들이 무방비 상태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 교사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시스템이 전혀 구축되지 않아 총체적인 점검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 또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지난해 6월 말까지 정신적 질병으로 휴·면직 처리된 교사가 전국적으로 358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가운데 248명은 일정 기간 휴직한 뒤 교단에 복귀했으나 아무런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이들이 휴직 기간에 제대로 진료를 받았는지, 정상으로 회복됐는지, 복직한 뒤 꾸준히 진료를 받고 있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는 실정이다. 현행 교육공무원법은 정신질환으로 휴직한 공무원이 복직할 때 별도로 담당의사의 진단서나 소견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규정을 두지 않고 있어 보완책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번에 드러난 숫자는 2년 6개월 동안 정신질환으로 휴직한 교사들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어서 전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교육부가 교사를 대상으로 정신적 질병 실태를 조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들 교사 가운데 3명은 숨졌다. 명예 퇴직한 교사는 5명이었지만 39명은 스스로 사직서를 썼다. 51명은 아직 휴직 중이다. 이 가운데는 지난해 9월 1일자로 휴직한 뒤 1년이 넘도록 여전히 교단으로 돌아오지 못한 교사도 있다. 짧게는 1∼2개월, 길게는 1년까지 휴직했다가 학교로 돌아온 교사는 지난해 6월 말 현재 248명이다. 현직에 있는 교사들이 앓고 있는 질환은 우울증과 조울증이 많았다. 135명이 이 질환으로 휴직했다. 이 가운데는 세상을 살아가는 의욕을 모두 상실한 상태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심한 증세의 ‘주요 우울증’을 겪은 교사가 7명이었다. 영화배우 이은주 씨도 이 질환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질환을 앓고 있는 교사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치면 위험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이종섭 다사랑병원 원장은 “정신 질환을 앓았다는 이유만으로 교단에서 퇴출시키려고 한다면 굉장히 무리한 태도”라며 “2∼3개월 집중적으로 입원·통원 치료하고 이후에 규칙적으로 전문의 진료를 받으면 얼마든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원장은 그러나 “주변 눈치를 보고, 소문을 두려워하느라 정신과에 가지 않고 단순히 집에서 휴식만 취하다 병을 더 키우는 사례가 많다”고 우려했다. 이주호 의원은 “2003년 이후 신체·정신 질환으로 휴·면직 처리된 교사 2411명 가운데 750명은 ‘공무상 질병’이 인정될 정도로 교단에서 병을 얻는 일이 많다”고 진단했다. 이어 “교육부 계획대로 이들을 무조건 ‘부적격 교사’로 판단해 퇴출해서는 안 되며 교사들이 ‘절대로 걸려서는 안 되는 질병’과 ‘잘 걸리는 질병’을 건강진단 항목에 추가하는 등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자료에서 나타난 발생률보다 더 많은 교사가 신체적․정신적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그 발생 원인은 스트레스나 탈진을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교사의 신체․정신 건강에 대한 복지․관리 대책은 불충분해서 심신이 건강치 못한 많은 교사가 방치되고 있다. 필자는 교육의 책무성 면에서나 학교의 중요한 목표들 중의 하나가 교사들의 정신 건강을 증진하고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교육계의 역량과 자원의 이용 가능성에 비추어 볼 때 교사들을 괴롭히는 직무 스트레스 관련 질병과 교사의 건강 악화를 예방, 감소,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교육계가 충분히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그러한 노력이 만족할 정도로 기울여지지 않고 있다. 교육부의 교육복지 대책안에는 교사를 위한 복지대책은 빠져있고 학생 복지대책만 제시되어 있다. 만연되어 있는 교사의 직무 스트레스와 탈진은 교육과 학교의 책무성, 교사의 근무 의욕과 효율성 및 사기를 저하시키고 교사의 정신건강 악화를 발생시키는 위험요인이며 교육력 약화를 초래한다. 교육부는 교사가 경험하는 직무 스트레스의 효과적인 해소 및 관리도 기업화된 교육․학교경영의 일부라고 보고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관련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기 바란다. 건강하지 못한 교사에게서 건강한 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
“새터민 학생, 이제 걱정 없이 공부해요” 지난 3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새터민(북한이탈주민) 청소년들의 남한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한 중·고 통합 특성화 학교 한겨레중·고가 개교했다. 학교법인 전인학원(이사장 박청수)이 설립하고 교육부가 시설비를, 통일부에서는 운영비를 지원했다. 곧 다가올 새터민 1만명 시대를 앞두고 이 학교의 곽종문 교장을 만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한겨레 학교의 개교 의미, 새터민 청소년들의 남한사회 적응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통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이념과, 문화 격차를 줄이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다음세대를 길러낼 교육”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새터민 학생들은 늘어나는데 정부지원은 갈수록 줄어 고민”이라고 우려했다. -한겨레 중·고는 어떻게 설립하게 됐나요? “2003년에 새터민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관련 기관, 학자들 사이에서 학교 설립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당시에 한국에 입국하는 새터민들 중 청소년의 비율이 20% 정도로 높았는데 이들의 남한사회 부적응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습니다. 나이가 어려 적응이 빠른 초등학생은 취학률이 100%에 이르지만 중학교는 70%, 고등학교는 취학율이 10%밖에 안되는 실정이어서 이들을 전담하는 학교가 절실했습니다. 현재도 8000~9000명 정도로 추산되는 새터민 중에 1200~1300명이 청소년이어서 이들의 교육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학교 설립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경기 이천 율면에 학교를 설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혐오시설로 생각해서인지 그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거셌어요. 때문에 주민들의 반대가 적고, 하나원과 가까운 곳을 찾아 안성시 죽산면으로 옮기게 됐죠. 하지만 이곳에서도 반대하는 주민들이 있어 학교 설립이 1년 넘게 보류됐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설립이 계속 지연되면서 지난해에는 관련 부처에서 예산을 절반으로 삭감했습니다. 처음에 280명 규모의 학교였다가 지금은 140명 규모의 학교로 설립되는 상황입니다.” -아직 학교가 완공된 것은 아니지요? “지금 수업을 하고 생활하는 곳은 임시 학교입니다. 처음에는 학교법인이 학교 부지를 마련하면 교육부에서 시설비를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해 특별법을 만들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관련 법규에 따라 학교가 먼저 지어져 인가를 받아야 교육부의 시설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지어진 학교는 법이 허용한 최소한의 기준만 충족시킨 규모이고, 내년 3월 정식 개교를 할 예정입니다.” -280명 규모에서 140명 규모로 예산이 줄었는데 앞으로 학교 운영하는데 문제가 없을까요? “예산을 삭감할 당시 두 달 정도 일시적으로 새터민의 입국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임시 학교 생활이라 올해는 40명 정도의 학생수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현재 학생 증가 추세를 보면 연말에는 150명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저희 학교가 중·고 통합학교인만큼 6개 학년이 모두 누적되면 400명 규모의 학교가 될 것 같은데, 학교는 현재 140명 규모로 짓고 있는 실정이죠. 남한 학생들은 교실이 부족하면 다른 학교로 보내면 되지만 이 학생들은 다른 학교로 보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정책 판단이 합리적이지 못했죠.” -한겨레중·고 개교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까지는 새터민의 사회적응을 위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대북지원사업은 해왔지만 국가가 정책적으로 국고를 들여 새터민을 위한 학교를 세운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습니다. 정부가 이제는 그들을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살피겠다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한겨레중·고 개교는 통일을 준비하는 공식적인 첫 발을 내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겨레학교에서 새터민 학생을 가르침으로써 통일을 대비하고 남북통합교육의 기초 작업도 할 수 있어 여러 가지로 발전적인 출발입니다.” -새터민 청소년들이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의 언어가 너무 달라 의사소통이 잘 안될 때가 많고, 사회체제와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또 새터민 학생들이 탈북해서 한국에 입국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생긴 심리적인 상처는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해요. 아울러 탈북 기간 동안의 학습 공백이 크고, 북한에서도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인민학교 중퇴자가 40%가 넘을 정도로 학습 결손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런 이들이 3개월 동안의 하나원 적응교육만으로 남한사회에 제대로 적응하길 바라는 것은 그저 바람일 뿐입니다.” -한겨레 중·고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일단 북한이탈주민이 국내에 입국하면 조사를 거쳐 하나원에서 3개월간 남한사회 적응 교육을 받게 됩니다. 한겨레학교는 하나원을 퇴소 하는 학생들 중에 신청을 받아 입학하게 돼요. 현재 34명의 새터민 학생, 30명의 위탁교육생들을 17명의 교사가 지도하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는 국고로 지원돼 학생들이 기숙사비와 학비가 면제되고 일반 학교와는 달리 순수하게 새터민 학생들의 수준과 학습능력을 고려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일반학교와는 달리 초월반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학력심사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학력을 인정받아 졸업이 가능하고, 일반학교에 편입도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 방학도 없이 1년 3학기제로 운영되는데 최소한 중학교 2년, 고교 2년 총 4년이면 정규 교육과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 -새터민 학생들을 위한 교육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교육과정 중 40%정도 국민공통기본과정을 배웁니다. 이것은 남한 학교와 공부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죠. 이밖에도 특기적성·직업능력 교육이 30%, 심리치료 및 사회적응 교육이 30%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방학이 없어 학생들의 학습량은 많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선생님과 같이 공부하고, 또 매주 수요일과 주말에는 현장체험학습을 갑니다. 남한 학생들과의 학력차 때문에 기초학력을 다지기 위해 6개 학년을 12단계로 세분화 해 맨투맨 집중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남한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경험 할 수 있는 현장학습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공부도 공부지만 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보통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단편적인 지식보다는 삶과 배움, 자신의 생활이 함께 어우러지는 교육이 이 아이들에게는 절실하죠. 새터민 학생들은 대부분 남한사회의 부유한 상위계층에 대한 환상을 많이 갖고 옵니다. 꿈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현실을 정확히 바라봐야 해요. 현장학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 농촌, 서민 등 여러 계층의 생활을 경험하게 합니다. 서울 포이동의 판자촌을 찾는다거나 소록도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현장학습 후에는 서로 느낀 점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이후 분석해 보고서도 제출합니다. 무엇이든 정확히 보고 분석하는 능력을 기르는 훈련이죠.” -새터민 학생들을 교육하시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새터민 학생들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욕이 대단하죠. 그런 아이들이 저는 너무 매력 있어요. 조금만 도와주면 얼마든지 우리 사회의 훌륭한 인재로 자라날 것입니다. 또 이들이 가지고 있는 통일에 대한 절박함은 우리의 통일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교육하시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예산 부족 문제입니다. 교육자로서 학교에 들어오겠다는 학생들을 막을 수는 없어요. 그리고 이들은 맨투맨식 집중교육이 필요해 남한의 일반 학교보다는 예산이 더 많이 듭니다. 얼마 전에도 학교 운영비를 담당하고 있는 통일부에서 예산을 절반 가량 삭감한다는 연락이 왔어요. 계속 늘어나는 아이들과 줄어드는 예산을 가지고 학교를 어떻게 운영할지 고민입니다.” -한겨레중·고에서 올해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소개해 주세요. “새터민 아이들의 교육을 맡다 보니 이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학교홈페이지와 전화를 통해 상담할 수 있는 ‘새터민 상담센터’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사들이 누구든, 어떤 내용이든 상담을 하고 있어요. 새터민 뿐 아니라 이들을 돕고 싶어 하는 분들도 상담이 가능합니다. 정확히 알아야 도와줄 수 있거든요. 또 ‘통일문화형성을 위한 시범학교’도 운영할 예정입니다. 이 프로그램에는 대도시, 중·소도시, 농·어촌, 인근 안성의 학교, 대안학교 등 각각 2개교씩 총 10개교가 참여하는데 청소년 또래 문화교육, 사회 적응 도우미 학생 간 교류 등을 통해 남북한 학생들이 서로 문화를 바꿔서 이해해보고 공통으로 통일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아직도 새터민에게는 더 많은 정보와 지원이 필요합니다. 간단한 실수가 평생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아요. 의료보험의 개념을 몰라 병을 키우기도 하고, 거주지 이전이 안되는 것을 모르고 직장을 따라 이사를 해 집을 잃기도 합니다. 또 이제는 우리도 자세를 바꾸고 통일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가야 해요. 이를 위해서는 학교에서도 올바른 통일교육을 해야 합니다. 지금 세대가 바라보는 통일은 막연하기만 해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통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 이상미 smlee24@kfta.or.kr
조현호 | 울산 옥현초 교사 냄새 나는 이야기 인도여행을 하다 보면 마을 근처 들판 여기저기에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페트병이나 물통을 한 손에 들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설마 하고 의아해했더니 곧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대자연 속 한 풍경으로 다가오더군요. 그들에게 있어 자연은 곧 그들의 화장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남겨놓은 그것을 길가던 돼지, 소, 염소 등이 파헤칩니다. 인도에 익숙해질수록 그런 모습들이 결코 불결하고 미개하다기보다는 탁 트인 공간에서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공존공생하는 성스러운 과정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중국여행에도 화장실 때문에 웃을 일이 많습니다. 급하긴 급한데 한참을 달려 도착한 휴게소란 곳에 들렀더니 남녀 공용인데다 칸막이 없이 옆 사람 혹은 뒷사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가 많지요. 기껏 칸막이가 있다 해도 고개를 쳐들면 옆 사람 모습이 훤히 보이고 게다가 앞문도 없는 경우도 많고…. 처음부터 냄새 나는 이야기로 시작되었지요? 이번 호에서는 은밀하고 때론 엉큼하며 나만의 공간으로 지극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뒷간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똥과 오줌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둘 있습니다. 신라 22대 지증왕은 옥경이 너무 커서 배필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사자(使者)로 하여금 배필을 찾도록 하여 삼도를 뒤지게 되었는데 모량부 마을에서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 덩어리 양쪽 끝을 물고 싸우던 것을 보고는 그 똥의 주인을 찾아내 궁중으로 맞아 황후로 봉하였다고 합니다. 또 29대 태종무열왕의 비 문명황후 문희는 언니 보희의 꿈을 사서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인즉 선도산에 올라 오줌을 누는데 서라벌이 온통 오줌으로 가득 차더라는 것이죠. 둘 다 똥과 오줌으로 왕후가 되었으니 여러분도 그런 류의 꿈을 꾼다면 좋은 징조로 보이니 기대(?)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우리네 건축에서 뒷간은 집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시설입니다. 그러면서도 대개 ‘뒷간과 사돈네 집은 멀수록 좋다’라는 말이 있듯이 생활공간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지요. 그 으슥한 곳에는 귀신이 삽니다. 이 치귀는 더럽고 냄새 나는 뒷간에서 머물러야 하는 것도 억울한데 행여 누군가 그를 놀라게 하거나 화나게 하면 좀체 화를 풀지 않고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고약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뒷간을 드나들 때는 인기척을 내서 귀신을 놀래지 않게 해야 했고 요강이 재산목록 1호가 된 것입니다. 휴급소와 해우소 뒷간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서양의 ‘rest room’은 휴식이라는 의미가 더 강조되고 화장실이라는 의미는 말 그대로 몸을 씻고 화장을 한다는 의미가 큽니다. 변소(便所)란 편안하게 볼일을 보는 곳이고 뒷간은 뒤, 즉 북쪽에 있는 방을 의미합니다. 측간은 집 귀퉁이에 붙은 건물을 이르며, 북수간(北水間)은 목욕이나 뒷물을 겸하는 공간을 의미하지요. 참선을 하는 절집에서는 뒷간이 동쪽에 있으면 동사(東司), 서쪽에 있으면 서정(西淨), 남쪽에 있으면 등사(登司), 북쪽은 설은(雪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정방(淨房)은 몸속을 깨끗이 하는 공간을 말하며 정랑(淨廊)은 ‘깨끗한 복도’라는 의미에서 시작합니다. 절간의 뒷간은 대개 좌우 양쪽에 남녀의 칸을 두므로 좌우를 기준으로 복도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고 선암사나 연곡사처럼 ‘丁’자 형의 건물은 들어가는 입구가 복도로 되어 있지요. 그래서 정랑이 뒷간을 의미하게 된 것이죠. 청측(圊廁)도 우리네 뒷간을 의미하는 전통적인 호칭입니다. 해우소는 사찰중심으로 쓰이다가 근래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입니다. 해우소는 승당(僧堂), 욕실(浴室)과 함께 삼묵당(三黙堂)으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절 뒷간에는 입측오주(入厠五呪)라고 하여 다섯 단계에 걸쳐 주문을 외게 합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부터 볼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각각 외는 주문을 이릅니다. 이는 뒷간에서 똥을 먹으며 산다는 담분귀가 주문을 듣고 자리를 비키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복잡한 듯한 이 청규을 통해 배설이 또 하나의 수도의 과정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입측오주는 다음과 같습니다. 버리고 또 버리니 큰 기쁨일세 탐욕과 성냄, 어리석은 마음 이같이 버려, 한 조각구름마저 없어졌을 때, 서쪽에 둥근 달빛 미소 지으리. 옴하로다야 사바하 비워서 청정함은 최상의 행복, 꿈같은 세상살이 바로 보는 길. …(이하 생략)… 해우소라는 말은 경봉 스님이 통도사 극락암에 계실 때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합니다. 6․25 전쟁 이후 하루는 스님이 나무토막에 붓으로 휴급소(休急所)와 해우소(解憂所)라는 글을 써서 뒷간에 걸었습니다. ‘휴급소’는 급한 것을 쉬어가라는 의미로 소변보는 곳을 의미하고 ‘해우소’는 몸속에 있는 큰 걱정을 떨쳐버리라는 의미로 대변보는 곳을 의미한다는 설명이었죠. 그는 세상살이에 바쁘다는 사람들이 정작 제일 중요한 자기 자신을 찾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세태를 보고 휴급소에 가서 다급한 마음 쉬어가고 해우소에서 근심 걱정 버리고 가면 그것이 바로 도 닦는 것임을 일러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궁궐의 매우틀 베르사유 궁전에는 뒷간이 없었다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우리네 요강과 같은 이동식 변기에다 볼일을 보고는 구석진 곳이나 정원, 나무 밑에다 오물을 버리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서구에서는 길가에 볼일 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향수문화가 발달했고, 길가다 위층에서 떨어지는 오물세례를 피하기 위해 파라솔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높은 구두가 생겨난 것도 이런 세태에서 유래되었다지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궁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조선시대 궁궐에는 뒷간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경복궁에도 뒷간이 28군데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단, 예외적으로 특수신분인 왕만큼은 배설작업에 있어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는데요, 왕의 배설물은 지칭하는 이름부터가 달랐습니다. 하늘 같은 임금님의 똥은 ‘매화(梅花)’라고 일컬었고 그의 오줌은 ‘매우(梅雨)’에 비유했다고 하네요. 임금의 눈물을 옥루(玉淚)라고 하고 임금님의 몸을 옥체(玉體)라고 일컫던 시절에 임금님의 그것마저 향기로운 것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죠. 그러니까 임금님 전용 이동식변기는 ‘매우틀’ 또는 ‘매화틀’로 불리었습니다. 창덕궁에서 발견된 매우틀은 높이가 21㎝, 너비가 39.5㎝ 길이가 22.5㎝ 정도 되는 크기로 나무로 틀을 만들고 주단으로 푹신하게 치장하였습니다. 장방형의 구멍이 뚫린 윗부분으로 볼일을 마치면 복이나인이라는 직책의 신하가 그릇만 빼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양쪽엔 두 발을 올릴 수 있게 발판을 만들어 두었고 앞에는 가리개를 꽂았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매추라고 불린 잘게 썰어놓은 여물을 바닥에 깔아두었다네요. 창덕궁 경운각에는 옛날 임금님의 변을 꺼내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현지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건물의 가장자리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왕이 볼일을 보면 그 아래로 떨어지고 그것을 신하들이 꺼내어 왕의 건강상태를 체크했다고 하지요. 왕의 건강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였던 거죠.[PAGE BREAK] 절집의 뒷간 절집의 뒷간 중 대표적인 곳이 선암사 뒷간입니다. 절집 뒷간 중 답사 1번지라고 일러도 무난할 것입니다.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입구에 붙어있는 이름을 보고 ‘깐뒤’라 읽어야 할지 ‘뒤깐’이라 읽어야 할지, 오른쪽부터 읽어야하는지 왼쪽부터 읽어야 하는지 당황합니다. 그 당황함을 가라앉히고 좀 더 멀리 시선을 대하면 대변소라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어 오른쪽부터 읽어야 함을 알 수 있지요. 그 규모가 보통이 아니지만 아래에 짚을 깔고 충분한 환기창을 마련해두어 냄새는 잘 나지 않습니다. 시인 정호승은 그의 시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라고, 해우소에 쭈그리고 않아 울고 있으면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고 노래했으니 여러분도 눈물 날 때 꼭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영월의 보덕사는 장릉의 원찰입니다. 그곳에는 120년이 넘게 원형을 간직한 뒷간이 잘 남아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벽면 중간중간에 창살 대신 조그만 구멍을 내서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그 네모나고 십자꼴의 나무 구멍이 만들어낸 좌우 대칭의 아름다움이 절묘합니다.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벽의 나무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밑을 간지럽히는 바람의 장난이 비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시원합니다. 실상사에서는 위생과 청결의 논리로 일관된 이른바 ‘화장실 현대화 운동’에 밀려 재래식의 뒷간이 사라져가는 현실에서도 소중한 생명줄로서의 생태 뒷간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장애우를 위한 배려로 끈을 매달아 놓기도 하고 쪼그려 앉았을 때 앞뒤 구분 못 하는 분을 위해 ‘앗, 거꾸로네요! 뒤로 돌아앉아 주세요’라는 친절한 문구에다 ‘대변을 보신 자리에는 톱밥 반바가지를 꼭 뿌려 주세요’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땅을 살리고 먹거리를 살리며 농사짓는 농부님을 살리고 그 쌀과 채소를 먹는 우리들의 생명을 살려내는 길은 똥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라는 큼직한 안내문까지 남아있어 뒷간 향기가 구수한 곳입니다. 비구니 절집인 동학사에는 해우실이 있습니다. 이 해우실로 건너가는 다리가 곧 해우교지요. 불국사 비로전 앞에 모아둔 돌로 된 변기를 보면 신라시대부터 수세식 변기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배변기능의 복원을 위해 병산서원(屛山書院)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처럼 펼쳐진 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대루가 그 산을 닮아 옆으로 길게 누웠습니다. 이 병산서원 오른쪽, 그러니까 고직사 앞쪽에 미로같이 동그랗게 말린 ‘한데뒷간’이 있습니다. 지붕이 없는 이 뒷간은 돌과 흙으로 담을 두르고 짚으로 용마름까지 짜 얹었습니다. 2년 전에 서원 고직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습니다. 새벽에 잠이 깨어 밖을 나와보니 밤하늘에 별들이 서로 자기를 봐달라고 발광(發光)하는 것이 여간 예쁘지 않았습니다. 휴급을 위해 문을 나서서 한데뒷간에 갔더니 밤하늘의 발광이 지붕 없는 그곳까지도 따라왔더랍니다. 격식과 틀에 얽힌 엄격한 유학의 공간에서 둥그렇게 말린 형태로 짚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 머슴 뒷간을 보면 덜렁이 마당쇠가 용변을 보다가 도련님의 호출을 받고 바지도 제대로 올리지 않은 채 달려 나올 것 같습니다. 도동서원 내의 뒷간은 앞뒤를 분간 못 하는 사람들에게 앞뒤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나무로 된 가리개가 설치되어 있어서 작은 놈들(?)의 일탈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청도 운강고택 솟을대문 옆에 자리한 뒷간은 그 품격이 대단합니다. 뒷간 위쪽 부분에 나무를 깎아 난초문이나 산수문 등으로 치장하였습니다. 이곳의 뒷간과 인근 임당리에 있는 400여 년 전통의 내시가의 뒷간을 비교해 본다면 더욱 흥미로운 답사가 될 것입니다. 정여창 고택은 운강 고택과 더불어 고샅이 있어 유명한 곳입니다. 고샅이란 대문까지 이르는 골목길을 말합니다. 이곳 행랑채 옆에 있는 뒷간은 칸막이가 없는 2인용인데 오른쪽에는 복숭아형으로 바닥구멍을 내고 왼쪽에는 장방형으로 바닥구멍을 내놓았습니다. 특히, 사랑채에서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구시를 볼 수 있습니다. 얇은 나무를 대어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도록 하였는데 집안 어른들이 이곳에 소변을 보면 하인들이 뒷처리를 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격조 높은 사랑채 한쪽에서 그런 비밀스런 공간을 엿볼 수 있지요. 구례 운조루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뒷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닥구멍 뒤로 짚을 마련해두어 거름으로 쓰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이 뒷간은 위성류라는 중국 원산인 나무 뒤에 자리하고 있어 숨은 멋이 느껴집니다.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대책에도 이제는 곪고 곪아 곧 터져버릴 것 같은 거품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에 대한 원성의 소리는 더 커져만 가는 것 같네요. 자기만 먹고는 순환시키지 않으려는 똥통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는 한 원성의 소리는 더 커져만 갈 것입니다. 기업들은 기업들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자기 몫 챙기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퍼 줄 수 있는 메세나[Mecenat]에 대한 마인드를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배변기능이 상실된 이 시대에 운조루에 있는 타인능해(他人能解) 쌀통을 그리워해 봅니다.
*임청각 전경* 최효찬 | 경향신문 기자 "내 자식을 왜놈 종이 되게 할 수 없다"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다보면 사람의 욕심이 끝없음에 절망한다. 땅을 원하는 대로 차지할 수 있다는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하지만 욕심으로 인해 돌아오는 것은 허무한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명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재산인가 자긍심인가. 과연 명가의 자존심은 수천억대의 재산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일까. 명가에서 가장 위대한 유산은 다름 아닌 자긍심이다. 아마도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해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버리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억만금을 상속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유산일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1858~1932) 가문은 서슬 퍼런 일제치하에서 일부 명문가 자녀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명가의 전통을 잇고자 할 때도 척박하고 살벌한 간도에서 민족의 고난을 함께 해왔다. 석주는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52세에 전 가족을 데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공자, 맹자는 시렁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망명의 변이었고, 나라를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석주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이에 앞서 의성 김씨 가문으로 석주의 처남 김대락이 만삭 임부인 손녀손부를 포함해 가신들을 이끌고 1910년 12월 24일 고향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넜다. 의성 김씨는 일송 김동삼과 김대락의 아들 월송 김형식 등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명문가이다. 또 12월 30일 우당 이회영 6형제들도 전 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이야말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명문가들이다. 석주는 1911년 1월 27일에 신의주에 도착하여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비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시를 지었다. 旣奪我田宅(기탈아전택) 이미 내 논밭과 집 빼앗아 가고 復謀我妻努(복모아처노) 다시 내 아내와 자식을 해치려 하네 此頭寧可斫(차두녕가작)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此膝不可奴(차슬불가노)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되게 할 수 없도다 "내 아내와 자식을 왜놈 종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석주의 이 시 한 구절에서 올곧은 선비정신, 그 가족 사랑이 온몸으로 전해져온다. 내 아내와 자식은 비단 석주의 처자만 뜻하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민족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조를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후손들은 행복하지 않겠는가. 석주는 1910년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서간도 망명을 결심하고 사당에 나아가 이를 고하였다. 그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로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 또 망명에 앞서 집안의 노비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고 방면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노비방면은 안동의 양반가에서는 흔치 않는 일이었다. 흔히 유림이라고 하면 보수주의자, 전통고수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석주와 같은 일부 혁신 유림세력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독립운동이나 사회변혁의 주도세력으로 역할을 했다. 석주는 고성 이씨 17대 종손이며 임청각(1519년 건립된 것으로 보물 182호. 안동시 법흥리 20번지)의 소유주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석주는 경제적 풍요와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은 사람이었지만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난의 길을 자처했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해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실천적 지성이었다. 오히려 그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고난의 길을 자처했고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석주는 1932년에 미처 조국독립을 보지 못한 채 간도에서 사망하고 그 아들인 이준형 마저 1942년에 자결로 일제에 저항했다. 독립투쟁의 불씨당긴 '호모 노마드' 50대의 망명객 석주 이상룡은 근대 최초의 '노마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대로 삶의 터전인 안동 임청각을 홀연히 떠나 서간도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는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불안정한 삶을 선택해 망명객을 자초한 것이다. 망명지인 서간도에서조차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그런 석주의 삶은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는 21세기 인간형으로 꼽히는 '호모 노마드'를 100년 앞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망명생활을 통해 보수적인 유림의 낡은 틀을 깨고 나와 혁신 유림으로 재탄생하면서 국난극복기에 변혁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노마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지만,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인 '노마디즘'으로 개념화했다. 자크 아탈리도 그의 저서 에서 오늘날 세계는 5억 명 이상이 이민자, 망명객, 이주노동자 등으로 노마디즘이 주류로 부상했다고 주장한다. 자크 아탈리는 "노마드는 인류 역사와 문화 전체를 역동적으로 창조한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석주 이상룡은 의병운동을 주도하면서 노마드적 삶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전통 유림세력들이 자신의 고향에 안주하면서 정주민적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을 때에 일제에 맞서 실천하는 지식인, 실천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진실은 앎의 차원이 아니라 바로 실천의 차원인 것이다. 앎 그 자체로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공론(空論) 혹은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앓을 실천으로 바꿀 때 진실은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내며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체구는 작았지만 호연지기 기상이 넘쳤던 석주는 한때 합천 가야산에서 의병활동을 했는데, 오합지졸과 다름없는 의병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독립운동 및 독립군기지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행한다. 이어 석주는 유교적 전통사상에서 깨어난 안동의 혁신유림들과 함께 근대적 민중계몽교육을 전개한다. 신교육을 주장하며 안동지방에서는 처음으로 현대식 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한다. 서간도로 망명한 이후에는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건립하여 국내와 그 곳의 유능한 청년을 모아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할 무관교육과 민족운동의 전위가 된 인재의 양성인 것이었다. 석주가 서간도에서 독립운동과 함께 동포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교육계몽운동도 펴나갔던 것은 석주 선대로부터 대물림되어 내려 온 문필중시의 가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공부 시켜 임청각 사람들에게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공통적인 덕목이 있는데 그 첫째가 학문과 교육에 앞장서는 학풍이다. 석주가(家)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는 앞장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 위기 때 호연지기를 실천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다름 아닌 자녀교육의 전통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녀교육에 소홀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500여 년 동안 대대로 서첩과 문집을 내는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석주 가문은 안동에 정착한지 500여 년, 20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아간 이는 병조정랑을 지낸 이후영 단 한명에 불과했다. 이는 엄청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임청각은 안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명가에 속하지만,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른 이가 500년 동안 단 한명에 불과하고 관직도 높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을 중시하는 호연지기 가풍 석주가에는 아직도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가정교육 에피소드가 있다. 석주의 큰아들 이준형은 간도에서 독립운동의 와중에도 며느리에게 직접 공부를 시켰다. 출산 후 몸조리를 할 때를 이용해 며느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와 등에서 뽑아 한문공부를 시켰다. 시부모가 며느리를 직접 교육하는 것은 집안의 오랜 가풍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또 이준형의 아들 이병화는 한국전쟁 당시 충남 아산에 피신 중에도 스무 살 전후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글을 가르쳤다. 현재 중앙중학교 교장인 이범증은 이병화의 여섯 째 아들로 그때 부친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이범증 교장은 중학교를 마치고 진학을 못해 1년 동안 농사를 지을 때 모친에게 맹자를 배웠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임청각 종손들에게 교육은 첫 번째로 중요한 덕목이었다. 학문에 힘써온 전통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에 항거하면서도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문제가 집안의 제일 큰 과제였다. 이병화의 부친 이준형은 일제에 항거해 자결을 하면서 종손이 될 손자의 교육문제를 유언으로 남겼다. "종손의 학업은 비록 전답을 줄이고 재물을 쏟아 부을지라도 중도에 그만두지 말아라." 일제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며 온갖 압력을 행사해 종손이 중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막았다고 한다. 이병화의 장남 이도증은 안동에서 공부를 못해 결국 만주로 가 하얼빈중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명문가의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산은 3대에 걸쳐 의원이라야 약에 효험이 있다고 했고, 또 3대에 걸쳐 글을 읽어야 다음에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온다고 했다. 그만큼 명문가를 만들고 유지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석주 이상룡과 그 자손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게을리하지 않은 게 바로 학문과 교육이었다. 둘째, 가문보다 국가를 위해 떨쳐 일어나는 호연지기 가풍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개인이나 가문의 안위보다 국가의 안위가 먼저였다. 임청각은 임란이 일어나기 73년 전인 1519년에 지어졌는데, 정유재란 때는 이곳에 주둔한 명군에게 군량미를 지원했고(선조는 공조참의 벼슬을 내림) 의병장으로 3부자가 전사한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의 부인이 바로 임청각의 딸이었다(고경명은 임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임청각을 다녀가면서 이곳에 '제임청각(題臨淸閣)'이라는 시현판을 남겼다). 임란이후 수백 년을 지난 후에는 3대에 걸쳐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다. 석주는 서간도로 가기 전에 해인사 등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런 임청각의 기운을 말살하기 위해 훼손에 앞장섰다. 임청각의 일부 집을 허물어 중앙선 철길을 내 현재는 67칸만 남아 있다. 셋째, 재물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가풍이다. 임청각의 유품을 보면 서책이 유난히 많다. 또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유품들 가운데 벼루와 거문고 등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후손들은 이를 개인이 소장하지 않고 국가 등에 기증했다. 고려대 중앙도서관 '석주문고'에 기증되어있는 임청각의 서적들은 모두 395종 1309책에 이른다. 1973년에 기증할 당시 고려대 김상협 총장이 4천만 원을 보상하겠다고 하자 후손인 이범증은 등은 "조상의 정신적인 유산을 팔아먹을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 당시에도 이범증은 단칸방에서 사는 등 어려운 형편이었다. 오늘날 다시 부활하는 석주의 집안 안 씨(顔氏) 가훈에서 말하듯이 후손에게 재물을 남기면 십년의 재산이 되는 반면에 지혜를 가르치면 백년의 재산을 물려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임청각 후손들은 선대의 독립운동으로 인해 고난 속에서 현대사를 살아왔다. 직계 후손들은 석주의 증손자인 이항증, 이범증 형제 등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부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나 북한 등지에서 귀국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대들이 뿌려놓은 발자취는 결코 이들의 가슴속에서 사라진 게 아니다. 후손들은 선대들의 고귀한 희생을 바탕으로 다시 우뚝 설 날이 오지 않을까. 소설 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은 자긍심을 먹고 사는 게 얼마나 인간적인 긍지를 지니는 삶인지를 역설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조찬하)의 의식 속에는 조 씨 가문을 묻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형, 그 인간성에 대한 증오감은 혈통에 대한 증오감으로, 나라를 강탈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 씨 가문의 치욕스러움은 혈통에 대한 열등감으로, 찬하는 가문을 묻어버리고 말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는 집안을 매장하고 만 것이다." 임청각의 교훈은 역설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아 해방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한 다른 어느 명문가보다 더 후손들에게 정신적인 유산을 많이 물려준 것은 아닐까. 고성 이씨 대종가를 이끈 석주의 리더십은 한국적인 '유교적 리더십'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군사부일체의 전통적 덕목에 따라 석주는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가문의 보존을 뒤로한 채 오직 조국을 위해 리더십을 행사했다. 석주의 리더십은 단순히 전통지향적인 리더십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집안사람들에게 강제적이고 독단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지만, 가족의 구성원들은 그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석주를 이어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의 신산한 길을 걸은 데서 이를 증명한다. 독립운동 서훈자만 3대 9명에 이른다. 이렇게 볼 때 석주의 리더십은 또한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하겠다. 가족 구성원에게 독립운동과 조국광복이라는 비전공유를 통해 동기부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몰입도를 높여 결과적으로 3대에 걸친 독립운동사의 큰 획을 그을 수 있었다.명문가의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옛글을 인용하면서 3대에 걸친 의원이라야 약에 효험이 있다고 했고, 또 3대에 걸쳐 글을 읽어야 다음 세대에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온다고 했다. 그만큼 명문가를 만들고 유지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석주 이상룡과 그 자손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게을리하지 않은 게 바로 학문과 교육이었다. 특히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배운 바를 실천하는 학행(學行)의 전통이 있었다. 임청각은 현재 전통문화체험장으로 개방돼 있다. 일제가 중앙선 철로를 개설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 집안의 정기를 끊으려 마당에 철길을 냈다. 기차소리가 임청각을 뒤흔들지만 자녀들과 함께 하루쯤 묵으면서 자녀교육과 함께 나라사랑의 참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임청각을 다녀간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방명록에 "이상룡 선생님의 애국정신을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또 종민이네 가족은 "먼 훗날 힘들고 어려울 때 지금의 이 시간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길 바라며"라고 썼다.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훌륭한 자녀교육의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이민족에 의해 다시 혼란 속으로 통일 한(漢)제국 이래 삼국시대를 거쳐 다시 중국을 통일한 사마염(司馬炎)이 국호를 진(晋)이라 한 이유는, 물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중국사를 통해서 나온 국호 가운데 춘추시대 제후국 중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던 '진(晋)'의 유사 국호라도 붙이는 것이 정통성 확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강남에서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었던 오(吳)나라도 통합함으로써(서기 280년) 재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만 이번에는 진나라[西晋]도 이민족인 흉노에게 멸망당하여 중국은 기나긴 혼란의 터널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는데, 무제 사마염은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일가친족들을 제후로 봉하여 영지로 보내 권력을 분산시켜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무제가 죽자 처음부터 진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제후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를 '팔왕의 난'이라 하는데, 10년 사이에 실로 천문학적인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이 시대야말로 중국 역사를 통해서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으며,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장이었다. 북적(北狄)은 동이(東夷)와 민족적 구별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같은 민족을 이렇게 욕설적인 명칭으로 갈라놓았다. 소위 흉노라 일컬어지는 민족은 포괄적인 의미로 우리 한민족(쥬신 : 조선(朝鮮)의 이두식 한문표현, 단군이 세운 나라를 쥬신이라 부름)의 선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동북아시아의 터프가이 흉노는 아주 흐뭇하였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들에게 마침내 때가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팔왕의 난'을 일으킨 제후가 흉노의 세력을 끌어 들였는데 이번에는 한족의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 동이족으로 동이족을 제압한다) 책략이 아니라, 거꾸로 이이제화(以夷制華 : 오랑캐로 한족을 제압한다)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책략을 썼던 것이다. 그때 흉노를 통치하던 유연(劉淵)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몰고 들어와 나라를 강탈하고(315년) 전조(前趙)를 세웠는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유연(劉淵)이 멸망한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흉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군대를 끌고 나왔다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한족도 아니고 더구나 한나라 황실의 유씨(劉氏)가 아니다. 일찍이 한나라 고조는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는 화친정책을 썼는데, 한나라 황실과 통혼한 흉노인이나 기타 공이 있는 사람은 '유'라는 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북방민족의 각축장이 된 중원 한편 졸지에 나라를 잃은 진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서기 317년 강남의 건업을 수도로 하여 새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동진(東晋)이라 부름으로써 흉노에게 멸망당한 서진(西晋)과 구별하고 있다. 우리 민족과 근원적 뿌리를 같이 하는 북방민족의 중원진출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흉노가 선두 타자로 홈런을 치고 나가자, 이번에는 나머지 민족들이 최소한 안타 내지는 운이 좋으면 장외 홈런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등판, 속속 진루하여 고구려와 형제국이라 볼 수 있는 북위(北魏)가 화북 일대를 통일하는 439년까지 100여 년간 서로 다투면서 10여개의 나라가 난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5호 16국 시대'이다. 혼란해진 서진을 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흉노의 유연이 전조(前趙)를 세우자, 온갖 나라 이름을 총 등장시킨 국호 엑스포와 같은 상황이 북방민족들의 중원 진출로 100여 년이 넘도록 혼전양상을 보이다가 전진(前秦)이 잠시 중원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동진까지 합병시키려던 전진(前秦)이 예상 밖으로 참패하자, 그것을 계기로 전진에 복속되어 있었던 나라들이 각각 독립하면서 일곱 나라로 분열되었다. 그러다가 서기 439년 약 50여 년 동안의 분열 끝에 북위(北魏)가 화북 일대를 통일함으로써, 서기 420년에 동진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강남의 송(宋)과 더불어 150여 년의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통일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전처럼 극도의 혼란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화북에서는 북방민족이 북위(北魏)·동위(東魏)·서위(西魏)·북제(北齊)·북주(北周) 다섯 나라가 북조(北朝)를 형성하고 강남 일대에는 송(宋)·제(齊)·양(梁)·진(陳) 네 나라가 남조(南朝)를 형성함으로써 어느 정도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상황까지 갔다. 남·북조시대 등장의 역사적 의미는 중국대륙이 남과 북으로 갈려 두 개의 역사 변화가 별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남조에서는 문화적 변화 그리고 북조에서는 사회·경제적 변화로 요약할 수 있는데, 특히 북조국가의 경우에는 통치근간을 이루는 사회제도의 시스템화가 가장 두드러졌다. 일찍이 흉노계열의 진나라 시황제는 군현제를 시행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꾀하였고,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도 무제에 이르기까지 이 제도를 완성시켜 나갔다. 중원의 혼란기를 틈타 중원에 진출한 화북의 북방 민족 정권도 기본적으로는 한화정책(漢化政策)를 추진하면서도 한족과 차별화되는 사회적 시스템화를 추진하였다. 사실 그들은 무력에서는 한족을 능가할지는 모르지만, 문화적으로는 중원의 한문화에 비교가 되지 못할 정도로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북조 국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북위(北魏)는 고구려와 뿌리를 같이 한다는 민족적 인식이 깊었던 국가였는데, 이제는 떠돌이 유목생활을 정리하고 한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었다. 어차피 한족을 지배하려면 정착해야 하고 정착하려면 차라리 자신들이 한족문화에 흡수 동화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조상대대의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소위 장강 이북을 송두리째 북방민족이 접수하고 말았다. 우선 한족출신의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 정치와 행정 분야에 종사케 함으로써 한족의 불만을 무마시키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국가경영에 동참케 하여 각종 제도와 율령을 제정케 하는 한편, 조세제도도 손질하였다. 북방 이민족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한 사람은 북위의 효문제(孝文帝)였다. 그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죽자(494년) 친히 상복을 입고 깊은 애도를 표할 정도로 고구려와는 형제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족통치를 위한 북위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도읍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낙양(뤄양 : 洛陽)으로 옮기고 복식과 제도, 의식과 풍습 등을 한조 이래의 유교식으로 개혁하는 한편, 성씨도 중국식을 따르게 하고 효문제 자신의 성씨도 원(元)씨로 바꾸었다. 효문제가 추진한 여러 가지 정책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것은 단연 균전제 도입인데, 서기 485년 이안세(李安世)의 건의로 처음 실시된 것이다. '균전제'의 주요내용은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며,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국가가 이를 나누어 주고 경작하게 하고 일정 비율의 세금을 받는 제도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까짓 것 누군들 생각을 못하겠느냐'하겠지만, 춘추 전국시대와 진·한 시대를 거치면서 제후나 호족의 소유물이라는 토지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효문제의 균전제 실시로 당시 토지를 잃고 헤매는 농민들과 전란으로 유민이 된 많은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비율의 세금을 거둘 수 있어서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제도 개혁을 통해 한족 흡수해 효문제를 비롯하여 북조 여러 나라들이 율령국가의 틀을 만들어 사회·경제적 변화를 일으켰다면, 남조에서는 문화적 변화를 통해서 중국판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남조에는 송(宋)·제(齊)·양(梁)·진(陳)이라는 네 나라가 있었으나 이들 네 나라의 평균수명(?)은 고작 40여 년 밖에 되지 않는 정치적으로 극히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군사력도 상대적으로 약했으나 오직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문화(文化) 밖에 없었다. 강남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남조의 나라들은 원래 이민족의 지배를 피해서 호족들과 지식인, 귀족들이 대거 남하해서 이룩한 소위 '화이트칼라' 국가였으므로 중원보다 몇 배 화려한 귀족문화가 융성하였다. 강남에서 발달한 삼국시대의 오(吳)와 동진(東晋),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는 남조의 네 나라를 합쳐서 '육조(六朝)'라 하는데 육조 시대에 발달한 귀족문화, 즉 '육조문화'를 가리켜서 '동양의 문화 중흥기'라 한다. 중국판 르네상스 시대 연 남조 예술이란 고도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우선 천부적인 끼도 있어야 하겠지만 사회적 분위기도 예술문화가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육조는 귀족사회였다. 평균수명(?)이 40여 년 밖에 안 되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으니 그만큼 황제권은 상대적으로 허약했고, 전통적인 명문가는 입김이 세었기 때문에 아무리 군주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불안정한 정국에서 조정에 출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예술적 창의성을 발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였다. 강남 특유의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사로잡힌 귀족들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여 수많은 문장가와 화가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예술세계를 키워나갔다. 이때의 대표적 인물로는 서예에서는 왕희지(王羲之), 시인으로는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 회화(繪畵)분야에서는 고개지(顧愷之) 등, 후세 사람의 귀에 익은 쟁쟁한 멤버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 최고(最古)의 문학평론서로 알려져 있는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도 이 시대의 작품이니 당시 예술세계에서는 자유로운 창작과 비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혼란이 계속되면 민심이 동요하고, 동요한 민심은 심리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절대적 가치를 찾아 그것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근세기에 와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혼란에서 탈피하려는 민중들의 마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서학이 공인되고 서양세력이 조선을 강타하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동학이 일어나는 등, 혼란과 위기가 닥칠 때마다 고도의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당시에도 역시 그랬다.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던 만큼 마음에 위안을 줄 그 무엇이 필요했다. 원래 후한 중기 이후부터 전해진 불교는 잠시 주춤거렸다가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민중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갔다. 불교는 특히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이 망한 이후 동진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남·북조 시대에 이르자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도 종교적 위안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 중국을 통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 즉 고구려에는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에 전진(前秦)의 순도(順道)가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고, 백제에는 384년(침류왕 원년)에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하였다(신라에는 그로부터 한참 뒤인 528년에 고구려로부터 전해진다). 당시 귀족들은 국가중심의 유가사상에 반발하게 되었다. 언제 현실정치 문제에 연루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군자의 도를 익히고 통치의 경세학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따분한 노릇이었다. 솔직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 당시 귀족들의 정서였다. 귀족들의 현실 도피적 도가사상을 청담사상(淸談思想)이라 하며 이를 실천한 사람들이 바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박준용 | 한양대 강사, 문화평론가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 간의 만남 사람들은 서로 간의 만남을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관계를 통한 영향력이란 단시간 내에 그 결과를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결실을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을 전제로 한 교육도 여기에 예외는 아니다. 흔히 인용되듯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그런 지난한 인내와 계획의 여정 끝에 개인과 한 세대의 성숙된 인격이 형성되어 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아이들을 위해 내일은 어떨지 몰라도 오늘 당장은 그 결과를 가늠하기 힘든 수많은 선택을 결정해 나가야하는 막막함이요, 그런 이유로 막연한 내일보다는 오늘의 가시적인 성과와 결실을 요구하는 학생, 학부형 그리고 그 압력과 유혹에 흔들리는 교사가 있을 수 있는 교육 현실이다. 2차 대전 직후의 프랑스의 어느 싸구려 기숙학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문제아들의 '이름'을 깨달은 충격 아직 생생한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기숙학원의 아이들은 척박한 삶의 환경만큼이나 거칠고 제멋대로다. 이런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학교 측의 제1 지침은 이른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에 따라 말썽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사고와 처벌의 악순환이 만성화되어가는 학교에 새로 부임하게 된 교사 마티유(제라르 쥐노)는 쇠락한 학교,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교사들, 천방지축인 아이들의 모습이 곧 실패한 음악가인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전쟁과 같은 첫 날 수업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마티유는 거의 기대하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적어보게 했던 미래의 꿈에 관한 글들에서 작은 충격을 경험한다. 겉으로 보면 커다란 문제 덩어리처럼 보였던 아이들이 실은 나름대로 꿈과 소망을 간직한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관한 낯선 깨달음이었다. 이후 마티유는 어떻게든 아이들의 개성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학교 측과 다른 '반작용'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칠판에 자신을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그린 학생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려 공개적으로 망신을 줌으로서 놀림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한다든가, 야단맞은 보복으로 수위 아저씨를 다치게 한 학생으로 하여금 간호를 하게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소모적인 처벌보다는 스스로의 행동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식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의 단초는 아이들이 대머리인 자신을 약 올리기 위해 지어 부르던 장난스런 노래를 접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교장 선생님이었다면 가혹한 처벌을 면하기 힘들었을 모욕적인 장난 속에서도 그는 가사를 지어내고 곡조를 붙이는 아이들의 창의성과 개성 있는 각각의 목소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내 합창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이후의 전개과정은 관객들이 이미 예측하고 있는 바와 같다. 우여곡절 끝에 훌륭한 합창단을 완성하고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난생 처음 인생에서 뭔가 멋지게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다시 깨달은 스승의 관심과 배려 이 지점에서 어떤 이들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교육에 관련된 영화는 천편일률적으로 전형적인 패턴, 즉 문제아이들, 탁월한 교사의 출현, 아이들의 변화, 성공적인 교육의 완성이라는 수순을 밟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별 문제없는 아이들을 평범한 교사가 가르쳐 적당한 진학률에 이른다는, 또는 문제아들이 무관심한 학교에서 방치되어 자포자기에 이른다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화를 비롯한 예술의 판타지는 현실의 문제나 한계를 고민하는 교사를 비롯한 의식 있는 관객들에게 영화라는 자유로운 상상의 영역을 통해 현실에서 상상하거나 시도해 보지 못한 다양한 가능성을 구체화해 봄으로써, 현실의 구체적인 변화를 향한 매우 실질적인 자극과 통찰력, 지혜를 제공하는 장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런 자극은 겉으로 전형적으로 보이는 영화적 맥락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관점과 적용방식에 따라 다양한 삶의 모습처럼 다채로운 변화의 차별점으로 관객에게 다가서기 마련이다. 시작과 더불어 전형적인 교육영화의 맥락을 밟는 듯 보이던 영화 는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교사 마티유를 비롯한 아이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하여 차별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여느 영화에서의 선생님들과 달리 마티유는 자신의 교육 방식에 대해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때로 교장 선생님의 위압적인 태도를 어색하게 흉내내기도 하고, 처벌과 용납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감행하기도 하며, 문제아로 전학 온 몽당과 같은 거친 아이 앞에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언뜻 보기에 일관성이 결여된 듯 보이는 마티유의 모습은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몸부림으로 인해 도리어 영화 속 가공의 인물이 아닌 생생한 현실감을 지닌 사실적 인물로 공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 의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가 시작하면서 기숙학원 학생이었으나 위대한 지휘자가 된 모항주(자크 페렝)가 정작 자신에게 그렇게 큰 관심과 애정을 쏟았던 마티유 선생의 이름조차 기억하고 있지 못한 부분이다. 그는 자신을 찾아 온 옛 친구가 전해준 스승의 손때 묻은 일기장을 읽어 보면서 비로소 자신의 인생에 있어 마티유 선생이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를 깨닫는다. 그렇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성장하여 성공한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스승인 누군가를 칭송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기억'보다는 '망각' 쪽에 가깝다. 종종 실패는 타인의 책임으로 전가되지만 성공의 결실은 제 스스로의 것인 양 착각하기 쉽다. 더구나 어린 시절 헌신적이었던 스승의 관심과 배려의 기억은 너무나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삶의 가치 하지만 영화 는 이런 현실을 질타하기 보다는 오히려 담담히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교사의 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중요한 것은 훗날의 기억과 칭송이 아니라 무명의 단역배우일지언정 아이들의 인생의 무대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마티유 선생이 충실히 감당했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아이들은 물론 교사 본인도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는 유럽에서의 엄청난 흥행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멋진 합창단을 만들었음에도 시샘어린 교장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파면된 마티유 선생이 결국 학교를 떠난다는 비극적 설정이 헐리우드식 행복한 결말에 익숙해 있는 국내 관객들에게 맞지 않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영화 의 매력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손쉬운 행복한 결말을 택하기 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노력과 몸부림 때문에 도리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결말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소신 있는 삶의 가치로움을 역설한 점에 있다. 겉으로 실패한 듯 보이나 진정 성공한, 이름 없는 교사로서 학교를 떠나는 마티유의 머리 위로, 쏟아지듯 날아드는 아이들의 종이비행기 편지에 담긴 참된 감사와 축복의 소리 없는 외침이 빛나는 영화,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