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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호주 연방 교육부는 각 학교의 예산액을 동결하는 대신 맡은 학생들의 성적을 올린 교사에게 금일봉 형식의 성과급제 지원금을 편성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기존의 교육부 예산 가운데 학교별로 5만 호주 달러(약 4천만 원)를 교사들을 위한 개별 보너스로 편성하여 ‘베스트 교사들’에게 직접 나누어 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교육부가 추진 중인 교사 성과급제가 정착될 경우 학생들의 영어 쓰기와 읽기, 수학 점수를 향상시킨 교사들은 이른바 실력 있는 교사로 인정받아 기본 급여 외에 과외 수당을 지급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의 성적 평가에 준한 성과급제가 자리를 잡게 되면 전국의 모든 학교 교사들의 자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강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는 게 정부의 예상이다. 교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학생들의 영어, 수학 점수를 올리지 못하는 ‘무능한 교사’는 5만 달러의 인센티브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같은 학교의 ‘유능한’ 동료 교사들보다 결국 낮은 급여를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연방 교육부가 이 같은 방침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교사들의 기본 자질에 대한 불신이 갈수록 깊어지는 교육 현실에 대한 현실적 개선책 강구에 기인한다. 학부모와 학생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실력 없는 교사들, 즉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엉터리 교사’들로 인해 호주 교육의 질이 나날이 떨어지면서 급기야 일정 수준 이상의 학년에 도달해도 여전히 읽고 쓰고, 기본적인 수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일례로 지난 해 한 사립 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 중 하나가 자신의 아이가 5학년임에도 여전히 쓰고 읽기와 수셈을 못한다며 학교 측에 항의, 학비를 되돌려받은 사례가 있었다. 공립학교와 달리 수업료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에서 수익자가 만족할 수준의 결과를 내지 못했을 경우 통상적인 상거래법을 적용하여 등록금을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던 것. 이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호주 학생들의 학력 저하 현상은 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차제에 교육부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본연의 업무를 등한시하는 교사들의 안일한 태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동시에 격려 차원의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겠다는 의지이다. 이는 곧 교사 개개인의 수행평가를 겸한 기능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교육부의 이 같은 정책에 대해 당사자인 교사들은 물론 학교장 단체 및 정부 야당, 교원 노조 등 교육 관련기관들은 일제히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좋은 교사, 실력 있는 교사’란 곧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는 교사’라는 정부의 단순 공식에 ‘단순 수긍’할 수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는 현실 교육 현장을 무시한 탁상행정이자 공허한 발상에 불과하다며 강한 반발을 하고 있는 것. 교사들은 정부가 말로는 ‘수행평가’에 준한 성과급제를 실시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적 평가’에 국한된 제한적 의미일 뿐이라고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학생들의 성적 관리가 교사들의 업무 수행의 일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교직 본연의 업무로 인식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더군다나 대도시나 농촌 등 지역에 따라, 학교에 따라, 혹은 학급에 따라 학생들의 수준이 각각인 상황에서 시험 성적을 단순 비교하여 담당 교사들의 자질에 점수를 매기고 우수 교사와 열등한 교사를 구분하는 발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부작용으로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학생들 간의 지나친 경쟁심을 촉발시킬 경우,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교사들 간의 경쟁심 조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교육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요소인 동료 교사들 간의 강한 유대감이나 친밀감, 협조, 일체감, 애교심, 수업 노하우 교환과 공유 등에 훼손을 가져올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또 소도시 및 고립된 농어촌 등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근무하는 교사들이나, 교육현장의 질적 성장을 꾀할 수 있는 전문적인 프로젝트 개발을 위한 지원금 등으로 지급될 때 실적급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만약 그도 아니면 교사 개인의 자기 발전이 곧 교육환경의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석사 학위 이상 소지자 등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한다면 그런대로 납득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교육부는 학생 성적 향상도 위주로 ‘베스트 교사’를 관리한다면 이로 인해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학부모들에게 보다 소상히 알릴 수 있는 바탕도 간접적으로 마련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학내 폭력, 성폭행 등으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놓고도 늘 불안해하는 학부모들에게는 교사들이 성적 위주로 학생들을 다잡을 경우, 품행 면에서도 지금보다 모범적으로 변하지 않겠느냐는 추측이다. 그렇게 되면 학생 관리에 허술하다는 학부모들의 학교 측에 대한 불만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제대로 된 수업 분위기는 고사하고 이른바 왕따 현상과 학내 폭력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공부 위주의 학풍으로 점차 바꾸어 나간다면 서서히 고삐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이처럼 교사 성과급제 도입을 둘러싼 교육부와 일선 교사들 간의 공방이 치열하지만 정부 시책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선 역시 그리 곱지만은 않은 편이다. 지난 2004년과 2005년 2년 사이에만도 8천 명 이상의 젊은 호주 교사들이 영국 등 해외로 빠져나갔는가 하면, 지난 10년간에는 약 2만여 명의 교사들이 교직을 그만둔 것으로 조사되었다. 호주 젊은이들에게 교직은 그다지 매력적인 직종이 아니며, 그 근본 원인은 타 직종에 비해 낮은 임금체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급여가 적정한 수준으로 향상되지 않는 한, 어떤 기준을 내세운 성과 급여라 하더라도 우수한 교원확보를 위한 근본 대책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겠다는 교육부의 정책에 대해 당사자인 교사들은 물론 학교장 단체 및 정부 야당, 교원 노조 등 교육 관련기관들은 일제히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좋은 교사, 실력 있는 교사’가 곧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는 교사’라는 정부의 단순 공식에 단순 수긍할 수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는 현실 교육현장을 무시한 탁상행정이자 공허한 발상에 불과하다며 강한 반발을 하고 있다.
“길에 가는 강아지나 나만 휴대폰 없지, 세상 사람들 다 있는 것 같더라.” “그럼, 엄마도 휴대폰 사 드릴까요?” “그렇다는 말이지. 집에만 있는 나한테 무슨 필요가 있다고.” 언젠가 필자가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다. 엄마의 말씀이 조금은 과장된 면도 있고, 표현이 익살스럽지만 그다지 틀린 말씀도 아니다. 엄마와 달리 가입비가 아까워 휴대전화를 극구 마다하셨던 아버지조차도 1년 전 휴대전화를 원하셨던 것 보면 휴대전화가 사람을 끄는 힘은 상당한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현대인의 필수품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휴대전화. 어디를 가든 사람들 손에는 어김없이 휴대전화가 들려 있다. 하루에 한 번도 울리지 않을 때가 많지만 장소를 이동할 때면 필자 역시 휴대전화를 챙기게 된다. 어느 때는 너무 휴대전화에 구속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휴대전화 없이도 살았고, 지금도 간혹 약속 시간 맞추기 힘들 때 요긴하게 쓰이는 것 말고는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다른 사람들 다 갖고 있는데 혼자만 없는 것도 그렇고 해서 지금껏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있다. 15년 전쯤 만해도 휴대전화는 값이 비싸서 주변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성인들 사이에서도 일부 사업하는 사람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물건으로 인식되었었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일반화되고 나서는 성인들뿐 아니라 학생들 또한 상당수가 휴대전화를 소지하게 되었다. 일본 역시 고교생은 거의 전원이, 중학생도 과반수 이상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실정이며, 필자가 담임하는 학급(초등 6학년) 또한 37명 중에 20명 이상의 학생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 학생들의 경우 학교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휴대전화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은 마음에 휴대전화 소지의 이유를 물으면 한결같이 부모와의 비상 연락을 이유로 든다.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밖에서 일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들과의 긴밀한 연락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상 연락보다는 친구들끼리의 통화나 다른 기능사용을 위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녀들의 무분별한 휴대전화 사용으로 과도하게 청구되는 요금 때문에 고민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성년의 경우 부모의 명의로 전화가 가입되다 보니 자신이 어느 정도 전화를 사용했는지, 부과되는 요금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감각이 없다. 매월 지불해야 하는 요금 중에 자신이 정말 필요한 때에 쓴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혹은 고정적으로 나가는 요금의 액수가 부모님의 가계 운영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에는 더 더욱 관심이 없다. 요즘 아이들의 ‘경제 감각의 상실’은 새로운 교육문제의 하나가 됐다. 돈 아까운 줄 모르고 과도하게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 역시 문제지만 지금 필자가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부적절하고 그릇된 행동이다. 이는 단지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하는 통화 매너 문제와는 차원이 또 다른 것이다. 학교에서, 그것도 수업시간 중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문제다. 일본 고교에서는 학교에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등교하는 것을 약 80%의 학교가 허가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70% 정도의 학교가 수업 중에 메일이나 인터넷에 접속을 하고 있는 문제로 지도에 골치를 썩고 있는 실정이다. 이 문제는 결국 ‘학생들의 규범의식의 결여’와 결부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최근 여기에 동영상이 되는 MP3의 등장이 교사들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한다. 얼마 전 본교 고등부에서는 수업 중에 동영상으로 포르노를 보다가 적발되어 유기 정학을 받은 경우가 있었다. 처음부터 유기 정학으로 처리할 마음은 없었으나 학생의 태도에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잘못을 한 이후에도 반성할 줄 모른다는 것은 학생으로서 학교 규범에 대한 준수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밖에 달리 해석이 되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몰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게임을 하는 일도 물론 있다. 학교에 오면 전원을 끄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교사의 눈을 피해 규칙을 어기는 학생들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요금 문제로 혹은 공부는 안하고 휴대전화로 장난만 하는 자녀들 때문에 고민을 하면서 휴대전화 소지를 허락해 주는 부모들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상시 연락 등의 휴대전화의 순기능적 면보다는 역기능적 면이 더 많음을 부모들도 알고는 있지만 아이들의 등살에, 혹은 아이들 기 살리기에 부모가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갖고 싶은 것에 온 정신이 팔려 공부에 집중 안할까봐 휴대전화를 사줬건만 결국 그 휴대전화 사용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경우를 초래하고 만 경우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모델과 기종이 쏟아져 나오는 현 상황에서 휴대전화 소지를 막을 방법은 학교에는 전혀 없으며 또한 그것을 막을 권리도 학교에는 없다. 다만 휴대전화 사용과 관련된 각종 문제들을 걱정하는 것과 교육적 차원에서의 지도를 궁리할 수밖에 없다. 학교 나름대로 규칙을 세워 학교 내에서의 휴대전화 소지를 엄금하거나, 소지를 하더라도 하교 전까지는 전원을 켤 수 없도록 못 박아 두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학교는 참으로 약한 존재이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휴대전화를 만들어 내어 돈을 버는 회사와 통화를 가능케 하는 통신회사가 따로 있고,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현란한 선전을 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광고회사가 있으며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서 휴대전화를 사주고 요금까지 내주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휴대전화의 엉뚱한 사용으로 수업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등의 문제로 골치를 썩는 곳은 결국 학교이니 말이다.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전 고교를 대상으로 실시한 ‘고교생의 규범의식’ 조사 결과를 보면 휴대전화, 메일 주소를 누구에게라도 가르쳐 준다고 답한 학생이 전체 3398명 중의 45%나 되었으며, 만남 사이트에 접속한 경험이 있는 9% 학생 가운데는 직접 상대방을 만난 경우가 27%나 되었다. 조사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학생들의 휴대전화의 부적절한 사용 자체도 문제이지만 학교나 가정이 그러한 실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각종 문제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유혹하는 첨단 물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는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다면 모를까 만들어진 물건을 사용 못하게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바른 사용과 건전한 사용법을 일깨워 줄 수밖에 없다. 요즘 교육현장에서 자주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 중에 ‘가정과 지역 사회의 연계 강화로 교육적 성과를 높인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참으로 그럴듯한 말이다. 학교 단독의 노력보다는 여기에 가정과 지역의 이해와 협력이 보태지면 그 성과가 높을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금이야말로 학교와 가정·지역사회가 긴밀히 연계하여 학생들의 규범의식의 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읍성의 관아건물 지난 호에 이어 읍성을 찾아갑니다. 우선 읍성에 있었던 관아(官衙)건물의 종류부터 알아볼까요? 관아건물은 고을의 격에 따라서 규모와 종류가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동헌(東軒)은 지방관이 행정업무를 보던 집무실입니다. 주로 ‘선화당(宣化堂)’이나 ‘안회당(安懷堂)’과 같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겠노라는 의지가 담긴 현판이 붙습니다. 지방관, 즉 도를 총괄하는 감사나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의 살림집은 내아(內衙)입니다. 동헌과 내아는 가까이 있습니다. 객사(客舍)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궐패(闕牌)를 모신 건물로 각 지방에까지 왕권이 미치고 있음을 말합니다. 지방관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이곳을 참배하여 어진 정치와 충성을 다짐하였습니다. 객사는 또 관찰사나 관리들의 숙박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대개 객사 건물은 가운데가 높고 도드라져 있는데 그 건물[正堂]에는 전패를 모시고, 좌우[翼室] 건물은 숙소였지요. 객사에는 주로 동경관(東京館-경주)이나 학성관(鶴城館-울산)처럼 그 고을의 옛 지명이 들어간 현판이 많습니다. 동헌과 객사 입구에는 삼문(三門)이 있습니다. 나주읍성의 경우 동헌의 정문인 정수루, 객사의 정문인 망화루가 삼문의 역할을 해내고 있고 고창읍성의 경우는 빈풍루와 풍화루가 삼문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방관을 돕는 아전(衙前), 즉 향리(鄕吏)들이 머물던 곳은 작청(作廳)이었습니다. 이방을 중심으로 6방이 모여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사무실이었지요. 이들은 출퇴근하는 입장이라 주로 읍성 내에 집이 있었습니다. 향청(鄕廳)은 수령을 보좌하고 견제하는 고을 양반들의 자치기구로서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교화(鄕村敎化)를 담당하였습니다. 관청(官廳)은 각종 세금과 곡물을 저장하고 반출하는 업무를 보는 곳으로 관주(官廚)라고도 하였습니다. 수령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賓客)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 사무를 관장하였기에 제일 분주한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관청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죠. 집사청(執事廳)은 경찰 사무를 담당하던 포도리(捕盜吏)들이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경찰청의 마스코트가 바로 포돌이와 포순이입니다. 이 명칭 또한 집사청 치안 담당관이었던 포도리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읍성 내에는 군무를 보살피던 장청(將廳), 무기를 보관하던 군기청(軍器廳), 죄수를 감금하던 옥(獄), 고을의 수호신을 모신 사당인 성황사(城隍祠) 등이 있었습니다. 한 때 빽빽하게 들어섰던 관아건물들은 오늘날 객사나 동헌 혹은 삼문 정도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격이 다른 읍성이야 조선 8도에는 각각 감사(관찰사)가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이 머물렀던 감영(監營)을 둔 읍성은 수령이 다스리는 읍성에 비해 격이 한층 높았겠지요? 주인장이 누구냐에 따라서 읍성의 규모가 달라지는 셈이죠.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감사 자리가 좋긴 좋았나 봅니다. 경상감영이 있었던 대구로 떠나볼까요? 대구 한복판 노른자위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에는 동헌인 선화당과 내아였던 징청각, 하마비,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 등이 남아 있습니다. 선화당과 징청각은 선조 34년(1601) 이곳에 세워졌는데 큰 화재로 인해 불타버리고 지금의 것은 순조 7년(1807)에 새로 지어 1970년에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공원 앞에는 병무청 건물이 있어 옛날 관찰사가 도의 병권을 맡았음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병무청 자리에는 원래 관풍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달성공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1906년 당시 관찰사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헐어낼 때 건물만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 관풍루 앞에는 하마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곳에 남아있는 하마비도 다른 지역의 것보다는 격이 높습니다. ‘절도사이하개하마비’니까 종2품이었던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 이하의 모든 사람은 이 비가 있는 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야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죠. 대개 관찰사가 절도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경상감영을 둘러싸고 있는 대구읍성은 선조 23년(1590) 처음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영조 12년(1736)에 다시 석성으로 축성하여 진동문, 달서문, 영남제일관, 공북문의 4대문을 두었습니다. 현재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전라감영의 흔적은 보물 제583호로 지정된 전주객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판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쓰여 있는데 ‘풍패’는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지명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가 바로 이곳 전주임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비록 객사만 남아 있고 다른 관아건물들은 찾아볼 수 없다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차이나타운, 차 없는 거리, 극장가, 관공서, 음식점, 패션가 등이 즐비해 있어 과거로부터 이곳이 전라도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줍니다. 이 전라감영을 둘러싼 전주읍성의 흔적은 남문이었던 풍남문(豊南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풍남문은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화재로 불타버렸고, 영조 44년(1768)에 전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우면서 풍패(豊沛)의 남쪽이란 뜻으로 풍남문이라 불렀답니다. 강원도의 감영이 있었던 원주에는 포정루와 선화당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감영의 흔적은 조금씩 남아 있으나 읍성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옛 모습은 잃었어도 주변 지역이 최대 번화가로 사랑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명성에 대한 대가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의 발발 - 부산진성, 동래읍성 전쟁의 비극을 혹독하게 겪은 읍성도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으로 돌아가 봅니다. 일본과의 첫 전투는 4월 14일 부산진에서 펼쳐졌습니다. 부산진순절도에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굳게 닫혀있는 성문이 보이고 그 위에서 정발 장군이 전투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습니다. 왜적의 배가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어오는데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 첨사 정발이 절영도에 나가서 사냥을 하다가 급히 성으로 돌아오자 왜병이 뒤따라 와서 육지에 올라 사면에서 구름같이 모이니 삽시간에 성이 함락되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은 다음날 2만여 명을 이끌고 동래읍성을 향해 진격합니다. 당시 동래읍성에서 벌어진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사순절도 아랫부분에는 ‘길을 빌리자(假我途)’는 팻말을 든 일본과 ‘길을 빌려줄 수 없다(假途難)’는 팻말을 성 밖으로 던지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조선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의 정신이 그림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동쪽 성벽을 통해 침입한 일본군은 칼과 창으로 무장한 채 성 안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관군과의 백병전도 시작되었습니다. 성의 한가운데에 객사건물 아래 붉은 관복을 입고 의연하게 앉아있는 송상현 부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임금님께 예를 올리는 그 모습이 비장하기 그지없습니다. ‘임금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중과부적이옵나이다. 이 성을 지키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객사문 아래쪽으로는 여인 두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이 지붕 위에서 깨진 기왓장을 던지며 최후의 항거를 하고 있습니다. 동래에 살던 일반 백성이던 김상이라는 사람과 그의 처와 딸로 보입니다. 왜적이 물러간 뒤 김상의 어머니가 그 현장에 가 보니,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같이 죽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북문을 통해서 달아나는 아군이 보이는데 이는 일본군의 위세에 놀란 경상좌병사 이각으로 그는 구원병을 보내리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야밤에 도주하여 밀양으로 달아났습니다. 그후 적이 밀양에 가까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도망을 거듭하다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에게 붙잡혀 군율에 따라 참형을 받아 일생을 마쳤습니다. 죽음으로써 성을 지킨 송상현과 도망으로 목숨을 부지하려 한 이각,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징비록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일에 왜병이 동래에 몰려와 송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서 반나절 동안이나 싸움을 독려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상현은 꿋꿋하게 버티고 앉아서 적의 칼날을 받고 죽으니 왜인들도 그가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동래읍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영조 7년(1731)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으며 현재까지도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벽, 북문과 옹성,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치성, 여장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되었습니다. 또 동래부의 동헌이었던 충신당, 송상현을 비롯해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신 송공단, 조선후기 군장관들의 집무소였던 장관청 등이 남아 있습니다. 곡창지대를 지켜라-진주읍성, 남원읍성 진주읍성은 남강을 천연 해자로 둔 절벽 위에 세워져 뾰족한 바위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촉성성(矗石城)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1592년 10월 1차 공격 당시에는 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성을 사수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6월 2차 공격을 받았을 때는 큰 비로 성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성을 사수하지 못하고 엄청난 희생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의기(義妓) 논개가 등장한 것도 바로 2차 공격으로 성이 점령된 후였습니다. 성내에는 창열사라는 사당이 있어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김시민 등 39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진주성 싸움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물리쳤다는 데 의의가 있겠습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집중적으로 전라도를 공략하기로 작정합니다. 보급통로를 끊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남원읍성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남원읍성은 언양읍성과 함께 읍성 중에서 평지에 자로 잰 듯 네모난 형태로 쌓았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정기원과 이복남이 지휘하는 조선 측 군사들과 명나라 장수 양원의 지휘 아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명나라 군사들이 지키던 동서남문이 뚫리자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북문을 지키던 이복남을 비롯한 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광해군은 그 때 희생된 사람들을 한곳에 묻고 그들을 추모하는 사당을 지어 충렬사라 불렀습니다. 근래에는 ‘만인의총’이라 해서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습니다. 전시관에는 왜군 남원성 침공 작전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정유재란 당시 1597년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던 왜군 ‘가와가미 후사구니’가 자필로 그렸던 것으로 그간 일본 가고시마현 도서관에 있던 것을 복사해 온 것입니다. 작전도에는 성의 형상과 규모, 성내의 건물과 통로, 성문과 성벽, 성호 등은 물론 왜군의 포진과 병력의 배치도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일본이 남원읍성을 치기 위해서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때 남원성을 공략한 왜장 중 시마즈는 도공 7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가 일본 큐슈 남단 가고시마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가운데 심수관가의 초대 심당길도 있었습니다. 1995년에 남원문화원에서 건립한 노래비를 만인의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낯선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의 도공들은 고향을 그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고 날이 샐지라도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 매일 오늘 같은 오늘을 사십니까?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요, 어제는 오늘이 있기 위한 과거일 뿐입니다. 이 시각, 촌음이라도 잘 활용해서 멋진 방학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호까지 읍성이 이어집니다.
영화 내일의 기억.“거 왜 있잖아, 영화. 배가 침몰하는, 그거 거기서 배 위에서 팔 벌리고 여자랑 같이. 아, 그 영화 주인공 남자 이름이…. 왜 생각이 나지 않는 거지?” 영화 내일의 기억(2006)에서 주인공 사에키의 알츠하이머 발병은 그렇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깜빡깜빡. 가물가물. 사람의 이름이 뱅뱅 돌면서 생각나지 않거나, 내 휴대전화 번호조차 갑자기 하얗게 생각나지 않는 상황. 경험에 보지 않으셨나요?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너무나 친절히 가르쳐 주는 이 영화. 의사가 사에키에게 질문하는 체크 리스트를 하나하나 빼놓지 않아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력도 무의식중에 테스트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같이 따라가다 질문에 대답이 언뜻 기억나지 않는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이라니…. 순간, ‘장동건의 뇌 나이 58세’라고 광고하는 ‘두뇌훈련’ 게임기를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치매까지는 아니더라도 ‘디지털 치매’(휴대폰·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과 계산 능력이 크게 떨어진데다 과다한 정보 습득으로 인해 각종 건망증 증세가 심해진 상태를 뜻하는 신조어)라 불리는 증상으로 병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저 역시 그런 건 아닌가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이 기계로 ‘두뇌 나이’를 측정한 결과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평소에도 기계와는 친하지 않은 제가 익숙하지 않은 게임기를 들고 두뇌 나이를 측정하니 그 결과라는 게 가히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아, 그래서 스스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두뇌 훈련이라는 걸 하면 정말 두뇌 나이가 젊어지기는 하는 걸까, 이 기계를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라는 의심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바르게 썼는데 게임기가 인식을 못 한다”는 사실(!)을 발견해내었습니다. 가령 숫자 ‘5’의 경우 두 획에 걸쳐서 쓰지 않으면 이 물건이 5로 인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단 가로 획을 나중에 긋고 아랫부분을 먼저 써야만 5자로 인식을 하는 것이지요. 한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터치스크린에 익숙해지고, 음성인식이 필요한 모드 역시 마이크에 잘 인식되는 음성 톤을 연습하니, 두뇌 나이는 자연스럽게 내려가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면 그렇지. 적어도 내 두뇌 나이가 그 정도일 리는 없어. 그럼, 그렇고 말고. 스스로 뿌듯해하던 가운데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에 피식하고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버튼 하나로 기억력과 사고능력을 대신해주는 디지털 장비들이 ‘기억하려는 노력과 습관’을 필요 없게 만들어 준 덕분에, 또 다른 디지털 장비를 들고 이렇게 기억력을 높이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결국은 손으로 쓰고,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직접 계산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두뇌 훈련’의 지름길이라는 것인데, 그나마도 또다시 기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컴퓨터와 핸드폰, 닌텐도 이 녀석도 던져버리고 ‘다이어리’와 ‘펜’을 다시 손에 들어야 하는 걸까요?
교실 수업과 관련해 최근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 학생 개개인의 특성(학습 준비도, 학습 양식, 흥미, 적성, 관심사 등)을 반영하지 못하는 수업, 학습량의 과다로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의 부족, 역동적인 평가 부재로 인한 학생들의 잠재적 능력 개발 기회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오늘의 우리 학교 교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업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학생들의 개인차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학생 개개인마다 독특한 학습양식이 있고, 자신의 흥미와 관심사가 있으며, 학습준비도가 각각 다른데 교실에서는 똑같은 학습자로 간주되어 획일적인 수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특성이 반영되지 않은 수업은 학습의욕을 떨어뜨려 학습력을 저하시킨다. 그리고 너무 많은 양의 학습내용을 짧은 시간에 다루다 보니 학생들이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고 만다. 반성적 사고는 초인지 능력을 향상시키고, 결국에 가서는 사고가 정교히 되어 지식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며, 이는 다시 학습력 향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우리 교육은 반성적 사고를 기르지 못하고 있다. 또한 평가는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제공하거나 수업 개선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학습 잠재력을 찾아내어 이를 계발하는, 교사와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교육적인 평가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평가는 시험을 보고, 점수가 나오고, 이 점수를 활용하여 석차를 매기는 활동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자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하나는 학생들의 다양한 특성을 반영한 개별화 수업(Differentiated instruction)을 시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이 플로우(Flow)를 만끽할 수 있는 수업이다. 개별화 수업은 학생들의 다양성, 즉 행동적 특성인 인지능력, 관심사, 개성 등의 차이뿐만 아니라 학습 양식, 학습 환경 등의 차이까지도 반영한 수업이다. 5·31 교육개혁에서는 ‘열린수업’을 표방하면서 ‘개별화·개성화·다양화’를 내걸었다. 하지만 이때의 개별화는 학생들의 학습 속도에 따른 IPI(Individualized paced instruction) 개별화였지 학생들의 다양한 특성, 즉 흥미, 적성, 관심사, 학습 양식, 또는 학습 준비도 등에 따른 DI(Differentiated instruction) 개별화는 아니었다. 단지 시간차만 달리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목표를 제시하고, 똑같은 내용을 학습하도록 하며, 똑같이 평가하는 것은 공정한 교육이 아닌 획일화된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에서는 정해진 시간 안에 전체 학생들에게 미리 처방되어 주어진 기능들을 완전히 학습했는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미리 만들어진 표준화된 잣대를 가지고 평가한다. 이러한 획일적인 교육에서는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이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성과를 얻기 힘들 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역동적이고 교육적인 평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개별화 수업을 하는 목적은 학생들의 성장을 극대화하고, 학생 개개인이 성공적으로 학습에 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개별화 수업을 하는 교실에서는 교사가 학생 개개인에게 주목하며, 그들의 학습 요구에 지속적으로 반응하려는 노력을 한다. 학생들 개개인의 흥미와 관심사 및 학생들의 학습 특성에 따라 학습 내용, 학습 과정, 또는 학습 결과물 등을 체계적으로 조정한다. 이러한 맞춤식 수업은 학생들의 학습력을 더욱 증진시킬 수 있다. 플로우(Flow)라는 심리학적 개념은 ‘완벽한 심리적 몰입’, ‘최적의 경험’ 등으로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는데, 사람이 어떤 활동에 매우 집중해서 절대적으로 몰입되어 있는 상태로,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행동이 자연스럽고 평안한 심리적 몰입의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최적의 경험’의 순간에는 우리의 의식과 심리적 에너지가 질서 있게 한 가지 목표에 집중되는 최적의 상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플로우는 명확한 목표가 있을 때, 또 행동을 위한 기회를 포착하여 자기 능력과 잘 부합한다고 느낄 때 경험하게 된다. 학생들이 학습에 있어서 플로우를 느끼는 때는 ‘도전적인 과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 부어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부에 몰입하면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게 되고 따라서 학습력은 저절로 향상될 것이다. 즐거운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학습량을 줄이고 깊이 있게 가르쳐야 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학습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부여하고, 실제적인 과제를 자기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직에서의 방학은 타 직종의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어쨌든 가르치는 본업에서 잠시 놓여나는 시간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방학은 무수히 의욕적인 계획으로부터 시작하여, 안타까운 미수(未遂)의 허망함으로 끝나기 일쑤지만, 그래도 속아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번 방학도 이런저런 계획에 마음들을 설레곤 한다. 그러나 나를 질적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연마와 단련을 위해서는 방학이 유용하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고생 그 자체가 문제이라기보다는 ‘진정성’이 문제가 될 뿐이다. 진정성이 살아나는 것이라면 삼복염천의 고생이라도 달고 흔쾌할 수 있다. 대학 1학년 시절, 여름방학과 더불어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며 따랐던 기숙사 선배들은 방학 동안에 읽을 책을 미리 정하여 독한 마음으로 반드시 독파하도록 하라고 했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다. 턱없는 지적 허영으로 무조건 고답한 책들을 잔뜩 챙겨 넣고 싶었다. 무언가 목마름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해소해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막막했다. 학문에 대한 낭만적 동경과 지적 소망을 품고 들어 온 대학은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꿈꾸고 동경하던 그런 학문의 향연은 먼 신기루 같이 보였다. 내 수준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지식과 학문을, 그리고 인생을 대단히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스스로의 한계가 엄정한 현실 앞에 시련을 겪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기대했던 강의들은 나의 지적 기질들과 자주 충돌했고, 따분하고도 지겨운 숙제 나부랭이와 일상의 다툼을 면치 못하는 대학생활을 하였다. 필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 스스로 탐닉하여 몰두하고 싶은 공부들은 대학의 현실 커리큘럼과는 한참 비켜서 있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대학생활을 마칠 때까지 확실하게 무엇이 되겠다는 현실적 목표를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지적 이끌림을 가지고 싶다는 점은 비교적 명료했던 것 같다. 문학과 철학에 대한 관심, 인간의 생각과 상상력에 대한 경이, 그것으로부터 경험하는 새로운 정신세계의 발견, 독서에서 얻는 새로운 감수성, 이때까지 진부하기만 했던 대상으로부터 얻는 미묘한 의미의 울림, 이런 것들로 인해서 문득 각성되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의 정신 등등이 내 지적 이끌림의 내용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을 현실의 구체적인 직업과 연관하여 성취동기를 강화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현실의식이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를 계발하는 가장 순정한 에너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1학년 여름 방학에 필자는 모두 다섯 권의 책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것은 그즈음 새롭게 각광을 받던 신비평 연구서인 르네 웰렉의 문학의 이론과 송욱 교수의 시학평전, 동양고전인 고문진보,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이었다. 이들을 어떤 지적 네트워킹으로 읽어냈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학 1학년짜리인 필자가 학교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만지작거리는 긴 과정이 있은 뒤에 고른 책들이었다. 누군가의 권장 도서 목록에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자가 ‘나의 독서’를 스스로 자랑하고 싶은 책들이었다. 허영심의 일종이었겠지만 내 나름의 지적 당위를 보장해 줄 것 같은 책들이었다. 나는 이들 독서경험을 밑천으로 내 ‘지식의 눈사람 만들기’를 비로소 시작한 셈이었다. 눈사람 만들기에서 첫 눈덩이를 뭉치는 것이 중요하듯이 무엇이든 첫 밑천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비단 물리적 법칙에 그치는 것일까. 정신의 영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들 책을 읽어낼 무렵, 위태롭게 지적 자존심을 펄렁거려 보기도 하고, 강적을 만나 불쌍하게 추락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이들 책은 ‘내 마음의 커리큘럼’으로 선택되고 작동한 원천이었다. 물론 학교가 제공하는 커리큘럼과 알게 모르게 상호성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지식 정보의 베이스가 빈곤하기 그지없었던 시절인지라, 나는 내가 만든 ‘내 마음의 커리큘럼’이 대견스러웠다. 커리큘럼(curriculum)이란 말은 1918년에 보비트(Bobbitt)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지금이야 이 말이 널리 쓰여서 평범하고 흔한 말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느낌을 주는 대단히 모던(modern)한 용어였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면서 그저 의욕 가지고 배우고 경험하면, 그것이 곧 교육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커리큘럼이란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조어가 얼마나 생명력이 있을까 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커리큘럼이란 말은 20세기 내내 막강한 힘을 자랑하면서 그 세력을 키워 왔다. 마침내는 학문의 한 분야가 될 정도로 확장을 계속해 온 것이다. 커리큘럼이 무엇인가.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온갖 정합성을 살피고,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전략적이고 합목적적인 교육 내용의 실체를 만들고 실현하는 것이 바로 커리큘럼이다. 커리큘럼이란 말이 이렇게 세력을 갖추게 된 것은 교육이, 특히 학교가 근대적 제도로서 필수불가결의 기능과 역할을 해 나가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의 기능을 이토록 극대화하도록 한 시대는 어떤 시대이었는가. 그 시대를 한 마디로 재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다음 몇 가지 특징을 담은 시대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기술 자본주의가 팽창해 온 급격한 산업화 근대화의 시대이다. 동시에 민주화와 인권의 신장이 전 지구촌에서 추구되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학교는 그런 시대를 실제로 추동시켰던 원천이었던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학교가 그러했다기보다 학교의 커리큘럼이 20세기의 역동성을 생성하고 견인하던 실질의 콘텐츠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커리큘럼은 20세기라는 시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들 양자는 운명적으로 궁합이 맞을 수밖에 없는 필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커리큘럼이란 말은 경주하는 말이 달리는 말의 경주로인 ‘currie’에서 온 말이다. 학교는 커리큘럼으로 굴러가는 학습의 마차이다. 우리는 그 마차가 제공하는 경주로에 내 존재를 맡긴다. 우리는 그 마차에 미완성인 현존의 나를 맡기고,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의 미래를 맡긴다. 자동화된 시스템처럼 커리큘럼이 어디에서나 대기하고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후기산업사회의 기능인을 계발하는 커리큘럼의 모습은 여기까지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제 커리큘럼도 다양한 개별화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믿을 만한 커리큘럼에 자신의 계발을 의탁하는, 시스템화 된 커리큘럼도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주체화하는 커리큘럼,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 만든, 스스로의 커리큘럼이 창조적 지식인들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내가 나를 계발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할 나의 경주로는 어디인가. 그 경주로는 내가 주인이 되는 다양하고 역동적이고 네트워킹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지식의 경주로이어야 할 것이다. 1968년 그해 여름, 필자가 만든 ‘내 마음의 커리큘럼’은 필자에게는 지독하게 난해한 것이었다. 읽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었다. ‘난해함’에 대한 미지의 매력과 짝사랑이 곧 필자의 지적 정체성이었으므로 난해하다는 그 사실에만 우월감을 느끼려 들었다. 그러므로 그 정체성은 일종의 허영에 가까운 것이었다. 궤변 같지만 모든 진정한 마음은 일종의 낭만적 허영을 속성으로 하는 것이어서 그 허영에 스스로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커리큘럼’은 내용 실체는 엉망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커리큘럼의 형식은 고답하게 빛났다고나 할까. 그러나 실상은 책읽기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속여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읽을수록 더욱 깜깜해지는 내용을 두고 몇 번인가 포기를 생각했었다. 배반의 생각이 서로의 꼬리를 물었다. ‘이런 독서는 의미 없다.’ ‘아니다, 자기 자신이 택한 ‘내 마음의 커리큘럼’이므로 오기로 뚫어내어야 한다.’ 모르는 것을 아는 듯이 말하기란 모든 지식 훈련의 필요과정임을, 그리고 그 과정은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는 데에 이르러 마침내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필자는 오늘의 ‘나’를 형성시킨 원천의 커리큘럼으로써 대학 1학년 여름 내가 만들었던 다섯 권의 책으로 된 ‘내 마음의 커리큘럼’을 소중하게 회상한다. 그것이 나의 출발이었다. 오늘 우리들 개개인의 마음에는 어떤 ‘커리큘럼’들이 그 경주로를 펼쳐 놓고 있는가. 현 단계에서 우리들 각자는 어떤 이상적 자아를 꿈꾸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현실적 성취를 강하게 추구하려고 하는가. 꿈과 동기가 강할수록 그것을 추동하는 ‘내 안의 커리큘럼’이 필요하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칸네 전(戰)에서 로마를 꺾은 여세를 몰아 이탈리아 전체를 장악하고 로마를 멸망시키다.” 물론 뒤집은 이야기다. 실제 한니발은 칸네 전을 비롯한 대소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탈리아반도를 점령하지 못했고, 결국은 자마 레기아 전투에서 로마에 완패했다. 로마의 앞길 가로막은 카르타고 공화국 500여 년과 제국 500여 년의 천년 역사를 자랑하며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여 지중해를 자국의 호수로 만든 로마. 군신(軍神) 마르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마르스에 바쳐진 동물인 늑대와 딱따구리에 의해 양육된 로물루스가 쌍둥이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세웠고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한 정복자 카에사르, 기독교를 박해하고 로마 시에 불을 지른 네로, 콜로세움·개선문·카라칼라욕장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고대의 사가 폴리비우스는 로마에 견줄 나라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로마는 세 번(혹은 네 번)이나 세계를 정복했다. 독일의 사가 랑케가 “고대의 모든 역사는 한 호수로 들어가는 강들과 같이 로마의 역사 속으로 흘러 들어가며, 근대의 모든 역사는 로마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나온다”고 했듯이 로마는 서양인들의 가슴에 늘 살아있는 ‘영원한 제국’이다. 로마만큼 오래, 그리고 확실하게 넓은 땅을 지배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한 나라가 어디 또 있으랴! 하지만 BC 219~204년의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에게 패했을 경우 로마가 세계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아니 생존이나 할 수 있었을까? 패장으로 역사에서 살아남은 한니발을 등장시킨 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와 로마의 운명을 갈랐을 뿐 아니라 고대와 중세 지중해 세계 역사의 향방을 결정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은 식민도시국가로 출발해 BC 265년경에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기로에 섰다. 반도국가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지중해로 나가 세계국가로 발돋움할 것인가? 후자를 택한 로마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반도에 거의 맞닿아 있되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던 시칠리아(2010년경에는 메시나 대교로 이탈리아반도와 이어진다고 한다) 문제였다. 로마는 결국 강력한 해상국가 카르타고에 도전해 시칠리아를 빼앗았다(BC 264~241년의 1차 포에니 전쟁). 허를 찔려 소국 로마에 패한 카르타고는 아예 로마를 없애버리기로 하고 대군을 동원했다. 알프스 넘어 8만 대군을 무찌르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문자로 유명한 페니키아(레바논과 시리아 연안)가 BC 9세기경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일대에 세운 상업식민지였다. 동지중해는 물론 서지중해와 대서양 연안까지 진출했고 일설에는 아프리카를 회항했다고 하는 해양국가 페니키아는 BC 600년 이후 약화되어 소멸했지만 그것의 상업식민지로 건설된 카르타고는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 제국이 분열해 약화되고 로마가 아직 강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시기에 서지중해 일대를 장악해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1차 포에니 전쟁에 패한 후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의 손에 이끌려 카르타고의 주신(主神) 타니트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로마의 정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맹세한 9살의 한니발. 그는 약관 26세의 나이에 카르타고 군의 사령관이 되어 로마원정에 나섰다. 한니발은 전력이 강화된 로마해군을 의식해 육로를 택해 알제리 쪽으로 향했다. 자신이 훈련시킨 용병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그는 스페인 해안을 따라 남프랑스로 향했다. 진격하면서 곳곳에서 전사를 증원한 한니발은 결국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전투코끼리를 포함해 5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나폴레옹보다 2천여 년이나 앞서 험준한 알프스를 넘던 한니발의 악전고투가 눈에 보일 듯하다. 10월이라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일렀지만 알프스에는 눈이 깊이 쌓인 데다 원주민의 공격까지 받았다. 병사, 말, 코끼리, 수레 등 가릴 것 없이 숱하게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거나 눈에 파묻혀 죽어갔다. 하지만 기어코 알프스를 넘은 후 남진한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쪽의 칸네에서 로마의 8만 대군을 격파해 로마를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뜨렸다(BC 216). 전투는 승리했지만 전쟁엔 패배 로마의 루키우스 파비우스와 가이우스 바로는 한니발 군과의 정규전을 준비하고 8만여 병력을 지휘해 칸네로 진격했다. 카르타고 군은 4만 여의 보병과 1만 여의 기병이었다. 로마는 오른쪽에 아우피두스 강이 흐르고 5㎞ 쯤 뒤에는 바닷물이 넘실대는 칸네의 남서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적의 중심부를 분쇄하기 위해 6천여 기병을 날개로 삼고 밀집대형의 대규모 보병으로 공격했다. 한니발은 스페인과 갈리아(프랑스) 출신 보병을 중앙에, 아프리카의 두 군단을 측면에, 기병을 좌우익으로 포진시켰지만 대형을 탄력적으로 변형했다. 그리하여 로마군과 맞닥뜨렸을 때 한니발군은 초승달 대형을 취하면서 아프리카군단들이 중앙을 맡았다. 또한 한니발 군의 좌우익 기병은 적을 압박하고 후미의 적까지 격퇴시켰다. 한편 로마의 보병은 한니발의 중앙군을 조금씩 후퇴시켰다. 하지만 바로 그 때 한니발 군이 뒤로 물러나 버리자 진격을 계속한 로마의 대군은 함정에 빠져버렸다. 한니발 군의 초승달 대형은 그때 다시 원형 대형으로 바뀌었고 보병은 후미의 기병과 함께 로마군을 역공했다. 포위되어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된 로마의 대군은 흩어졌고 전투는 로마의 참패로 끝났다. 카르타고는 6천여 명의 전사를 잃은 반면 로마는 8만의 병사 중 1만 4천여 명만이 도주해 목숨을 건졌을 뿐 1만여 명이 생포되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로마시를 포함한 인구 밀집지역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로마의 느림보장군 파비우스 쿤크타토르는 정규전을 피하고 게릴라전을 펴 카르타고 군을 괴롭히고 또한 줄곧 긴장상태에 있게 했다. 전쟁의 승패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 지루한 소모전이 되면서 한니발은 전력만 낭비했다. 본국에서 파견한 원군도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한니발은 이미 전투에는 이기되 전쟁에서는 지는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패배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니발 늘 그러하듯이 역사는 무한정의 소강상태를 허용하지 않았다. 운명의 갈림길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두 차례나 한니발에게 패한 바 있는 로마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소수 정예군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 카르타고를 기습공격하자, 이탈리아반도에서 15년여 소모전을 벌려온 한니발은 본국을 방어하도록 소환되었다. 그러나 한니발 군은 자마 레기아 전투에서 완패했다(BC 204). 한니발은 칸네에서처럼 전투코끼리를 동원해 포위전법을 폈으나 로마 군은 더 이상 그의 현란한 작전에 현혹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누미디아의 기병으로 카르타고 군을 제압한 다음 적진 깊숙이 침투해 그 배후를 공격했고, 그로 인해 이번에는 로마 군이 카르타고 군을 포위해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스키피오 군은 우세한 기병의 지원을 받은 반면 한니발 군의 전투코끼리들은 전열이 흐트러지자 놀라 날뛰면서 오히려 아군을 짓밟았다. 유연한 전략으로 한니발 휘하의 카르타고 군을 제압하여 로마를 위기에서 구한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누스’란 존칭을 받았고 패한 카르타고는 굴욕적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카르타고는 스페인을 포함해 모든 해외영토를 로마에 넘겨주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으며 전함도 12척 이상을 보유할 수 없었다. 패장 한니발은 작전의 실패와 관련해 질책을 받았지만 최고 정무관(수페트)이 되어 일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겨냥한 친(親) 로마 인사들의 음모를 감지한 후 시리아로 망명했다. 시리아마저 로마에 패하자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된 한니발은 자결로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BC 183).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아마도 칸네 전 승리나 뛰어난 용병술과 과감한 작전 탓이겠지만 패장 한니발은 역사에서는 오히려 승장 스키피오를 누르고 명장으로서 살아남았다. 포에니 전쟁 후 세계로 진출한 로마 50여 년 후의 3차 포에니 전쟁은 언제 다시 무서운 적이 될지 모를 카르타고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한 로마의 예방전쟁이었다. 카르타고는 2차 포에니 전쟁 후 주변 지역들과 다시 교역하는 등 국력을 점차 회복해 갔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로마의 동맹국 누미디아와 전쟁을 벌려(BC 150) 로마에 침공의 구실을 주었다. 숨통을 끊어 후환을 없애려고 재침의 기회를 엿보던 로마는 조약위반을 구실로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로마와의 새로운 전쟁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임을 모를 리 없던 카르타고는 일체의 무기를 로마에 넘겨주는 등의 굴욕을 참아가며 전쟁을 피해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자마 레기아 전투에서 승리한 대(大) 스키피오의 손자 에밀리아누스 스키피오가 로마군을 지휘했다. 로마는 4년여의 공격 끝에 카르타고를 초토화시켰다(BC 146). 카르타고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남녀노소할 것없이 결사 항전했다. 노예들까지 무기를 들었지만 지중해 세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로마 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거기다 그들은 굶주림과 역병에도 시달려야 했다. 역사는 강자가 연출하는 드라마라지만 로마는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들고 최후까지 저항한 5만여 명을 학살하거나 잡아서 노예로 삼았다. 또한 내친김에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던 마케도니아와 시라아 등 동지중해 지역도 정복했다. 그리하여 로마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스페인, 북아프리카, 발칸반도, 소아시아를 차지하여 일약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카에사르를 지나 제국 초에 이르러 이집트와 중동, 프랑스와 잉글랜드 등을 손에 넣어 지중해를 사실상 자국의 호수로 만들었다. 로마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로 불렀다. 잉글랜드로부터 루마니아에 이르기까지, 모로코로부터 요르단에 이르기까지 50여 개의 속주를 두고 지중해 세계를 통치한 로마는 믿어지지 않지만 요르단에서 스코트랜드까지 장성을 쌓기도 했다. 카르타고는 결국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칸네 전의 한니발이 자마 레기아에서도 승리했을 경우 로마와 지중해 세계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어떤 모양으로 기록되어 있을까? 물론 로마제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천년의 역사와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번영, 콜로세움, 개선문, 카라칼라욕장 등 로마가 자랑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도 물론 회자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크게는 동양과 서양의 역사가 사뭇 다르게 진행되었고, 따라서 동양과 서양의 관계 또한 지금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초등학교5,6학년 교사의 수업 부담은 정말로 대단하다. 그러나 직접 이를 담당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고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은 5,6학년 담당을 기피하기에 다소 젊다는 선생님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의 누마타시 교육위원회는 2007년도부터 시내 13개 초등학교의 5.6학년을 대상으로, 한 학급에서 복수의 교원이 자신 있는 과목을 지도하는「상호 교체형 학급 담임제」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종래의 학급 담임제를 유지한 채로 일부 교과에서 교과 담임제를 도입하는 것으로써 동 시교육위원회가 독자적으로 명명한 것이다. 현교육위원회에 의하면 이와 같은 제도를 시내 전 학교에 도입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이 제도는 각 교원의 전문 분야나 자신 있는 과목을 살림으로써, 아동들에게 충실한 교과지도를 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교과 담임제에 대한 부담없는 이행과 한 학급을 복수의 교원이 담당함으로써 아동을 여러 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등의 장점이 있다. 교체 예로는, A반 담임이 옆 B반에서 이과와 만들기를 지도하는 대신, B반 담임이 A반에서 사회와 체육을 담당하는 등, 교원이 서로 동일한 시간을 담당하도록 한다. 교체는 다른 학년의 담임 간 이외에도 담임을 맡고 있지 않는 교무주임, 교감을 합해서 4,5명으로 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동 시교육위원회의 시산으로는 두 학급 간의 교체 방법은 약 40가지 정도가 있다고 한다. 어떤 방법을 채용할 것인지는 각 학교장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각 학교는 시교육위원회에 4월 말까지 실시 계획을 제출하고, 학급을 담당하는 교원 전원이 학생지도 지원그룹을 만들어, 수업 별로 학생들의 수업 상태를 노트에 기록해서, 전원 열람할 수 있도록 한다. 그룹에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학습지도 뿐 만이 아니라, 따돌림과 등교거부 등의 생활지도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동 시교육위원회에서는 앞으로, 새로운 제도의 개요와 각 학교의 추진 상황을 시 홈페이지에서 소개해서 전국에 발신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황사, 미세먼지, 오존에 이어 요즘처럼 여름철에 폭염특보가 발령되면 일선 학교의 등ㆍ하교 시간이 조정되거나 임시휴업 등의 조치가 내려진다. 교육부는 최근 여름철 이상 기온 발생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 폭염으로 인한 학생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폭염시 각급학교 수업관련 계획'을 마련해 각 시ㆍ도교육청을 통해 일선 학교에 시달했다고 1일 밝혔다. 계획에 따르면 폭염주의보 발령시 학생들의 실외ㆍ야외활동이 제한되고 학교장이 단축수업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폭염경보 발령시에는 시ㆍ도교육감이 등ㆍ하교시간을 조정하거나 임시휴업 등 상황에 따른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폭염주의보는 이틀째 낮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될 때, 폭염경보는 이틀째 35도 이상 계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각각 발효되며 특보 발령시에는 습도 상황도 고려된다. 날씨를 고려해 학교수업 관련 제한 조치를 내리는 것은 황사, 미세먼지, 오존에 이어 폭염이 네번째로 대부분 최고 수위의 경보 발령시 단축수업이나 임시휴업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봄철 불청객인 황사의 경우 최고 수위인 `황사경보'(미세먼지 1시간 평균 농도가 800㎍/㎥ 이상인 상태가 2시간 이상 지속) 발령시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실외활동이 금지되고 수업단축 및 휴업 등의 학생 보호조치가 취해진다. 미세먼지는 최고 수위인 `먼지경보' 발령시 황사와 마찬가지로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수업단축 또는 휴업조치가 실시되며 오존은 최고 수위인 `중대경보'(오존농도 0.5ppm 이상) 발령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비롯해 중ㆍ고교까지 수업단축과 함께 휴업조치할 수 있다. 교육부가 황사, 미세먼지, 오존에 이어 폭염의 심각한 정도에 따라 휴업 조치까지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여름철 이상 기온 발생 가능성이 커지면서 폭염으로 인한 학생 피해가 우려되는데 따른 것이다. 교육부는 우선 폭염특보에 따른 학교 수업관련 조치를 7월1일부터 9월30일까지 3개월간 시험 운영하고 내년부터 본격 시행할 계획이다. 교육부에는 폭염 피해에 대비해 초중등교육정책과장(반장)을 포함한 10명으로 중앙비상대책반이 설치ㆍ운영되며 각 시ㆍ도교육청에는 담당 과장을 반장으로 비상대책반이 구성ㆍ운영된다. 기상청의 폭염특보 발령시 각 시ㆍ도교육청 비상대책반을 통해 지역교육청과 각급 학교까지 폭염 발령 상황을 SMS문자, 메일, 팩스, 지역방송 등을 통해 신속히 전달하고 폭염경보 발령으로 휴업조치가 결정되면 언론사, 마을방송, 학부모 SMS문자 등을 통해 결정 사항을 곧바로 통보한다.
최고기온 32도를 기록한 30일 서울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에서 덕수초등학교 학생·학부모 60여명이 운동장을 지키기위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의 주된 내용은 덕수초 운동장에 추진 중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념관 건립을 중단해달라는 것. 학생회장 정지은 양은 “6년 동안 추억이 담긴 운동장을 없애는 것은 우리의 꿈을 짓밟는 것”이라며 “운동회도 열고 축구도 할 수 있는 공간을 빼앗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현재 행정자치부로부터 무상으로 임대해 쓰고 있는 운동장에 기념관을 짓게 되면 학생들이 뛰어놀 공간이 부족해질뿐더러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 학생과 학부모들의 우려다. 또 만일 공사가 시작된다하더라도 소음과 분진으로 인한 수업권 침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학부모 성지은 씨는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것도 좋지만 하필 학교 운동장으로 쓰고 있는 땅에 건물을 지으려하는지 이해가 안간다”며 “한 때 이들이 민주세력이었는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전혀 민주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울분으로 토로했다. 이에 앞서 27일 서울교총은 성명서를 내고 “기념관 건립은 후대에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부지가 학교 운동장이란 사실은 교육의 중요성을 비춰볼 때 심각한 우려는 자아낸다”며 “행자부의 반교육적 기념관 건립 사업추진을 즉각 중단하고 사업취지에 맞는 부지를 다시 선정하라”고 촉구했다. 이처럼 학교와 교육계의 반대가 제기되자 기념사업회 측이 내놓은 대안은 건립될 기념관 내 체육시설과 주차장을 체육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는 것. 하지만 이같은 사업회 측의 중재안도 학생과 학부모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박찬원 학교운영위원장은 “운동장과 건물 내 체육시설, 주차장은 엄연히 성격이 다른 공간인데 사업회 측에서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땅 소유주인 행정자치부의 관계자는 31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따라 사업회가 전적인 권한을 갖고 신축부지를 지을 수 있으나 덕수초의 입장도 일리가 있는 만큼 기념관을 짓기 위해서는 상호 문제가 해결된 뒤에나 승인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해 앞으로 덕수초의 시위, 민원제기가 계속될 경우 학교 운동장에 기념관 건립이 어려울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여름방학 특집 Seunghak English Summer School - 인천승학초등학교(교장 송경수)에서는 여름방학을 맞아 7.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3~6학년 중 영어학습에 흥미와 관심이 있는 학생 30명을 대상으로 Seunghak English Summer School이라는 프로그램을 마련 수업 시간에 맛볼 수 없는 다양한 영어 체험 활동을 통해 영어의 바다 속으로 푹 빠지도록 해 참가학생들로부터호응을 얻은 가운데 마쳤다. 체험활동은 암기도 좋지만 영어적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따라서 초등학교 수준에 맞는 주제를 선정 다양한 문장을 통해 문법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한 후 본교 김주옥·차미현 영어담당교사를 비롯한 원어민영어교사(Charles T. Deighan)와 학생 간의 일대일 대화로 실제 상황에 적용해 보는 수업 방법으로 진행했다. 특히 초등학생들로부터 인기 있는 게임 프로그램인 Musical Chairs, Heads down·thumbs up, The mystery bag, Pin the tail on the donkey, Charades, Fast words 등 새롭게 접하는 게임 활동을 펼쳐 학생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었다. 또한 학생들은 TV 프로그램인 스타 골든벨을 응용한 What's behind your teacher?, 발음이 어려운 글을 빨리 읽어보는 Tongue Twister 등의 게임이 재미있었다고 전하였다. 한편 Charles T. Deighan 원어민교사는 승학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는 생활이고 문화랍니다. 올해로 3년째 본교에서 근무하며 느끼는 것으로 학생들과의 소통이 보다 자연스러워짐은 물론 학생들의 발음과 표현력이 좋아졌다고 말하고. 영어를 영어답게,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원어민 교사의 활용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번 English Summer School은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영도 아리랑 고개의 유래 우리나라 사람에게 ‘아리랑’이라는 단어만큼 친숙하면서도 비애를 느끼게 하는 말이 있을까. 또한 ‘아리랑’만큼 해학성과 풍자성을 드러내는 말이 있을까. 그리고 ‘아리랑’만큼 미스터리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그 누구도 아리랑이라는 말의 정확한 어원을 모른다. 그 누구도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으며, 또 어떤 경로를 타고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 그렇게 광범위하게 퍼졌는지 모른다. 님 웨일즈의 이 비운의 혁명가 김산의 아리랑이라면, 은 영화 ‘서편제’의 한 많은 여인, 송화의 아리랑이다. 통인에게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한이 돌고 돌아 을 만들었다면, 아우라지 강가에서 넘치는 강물을 원망하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여랑리 처녀와 유천리 총각의 안타까움은 을 낳았다. 현재 우리나라에 구전하는 아리랑의 종류는 50여종 3000여수라고 하는데, 이 수많은 아리랑에는 ‘아리랑 고개’라는 말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그럼 도대체 우리 민족에게 ‘아리랑 고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왜 하필이면 아리랑 고개라고 했을까?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산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산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산에는 반드시 고개가 있기 마련이며, 고개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넘어야 할 숙명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 숙명적인 존재는 민초들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통로였다. 그러나 이 고개를 넘어가는 과정이 그리 간단치 않다. 식량과 식수를 이고 지고하면서 두 다리를 휘적휘적 저어 쉴 새 없이 가야하는 곳이 바로 ‘고개’이다. 꼬불꼬불, 굽이굽이, 아홉 고개, 열 두 고개가 바로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왕조와 양반 계급의 횡포에 못 이겨, 일제의 수탈에 못 이겨, 때로는 가뭄과 장마를 못 이겨, 이 땅의 백성들은 고개를 넘고 넘어 신세계를 찾아 갔다. 그 신세계를 찾아 가는 과정에서 슬픔과 애환이 어찌 없을 리 있겠는가. 서울 성북구의 아리랑 고개가 춘사 나운규의 이라면, 부산 영도의 85번 버스 종점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는 영도 아낙네들의 고달픔과 애환이 서린 민초들의 고개이리라. 예로부터 부산 절영도는 국마장으로써 사람이 살지 않았다. 절영도의 절자는 끊을 절이요, 영은 그림자 영이다. 말이 하도 빨리 달려 그림자가 끊어질 정도라는 뜻이니 영도의 말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영도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881년 동삼동 중리에 수군인 절영도진을 설치하기 위해 국마장을 서구 암남동으로 옮기고부터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영도의 해안가로 몰려들어와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는데, 문제는 식량이었다.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은 지천으로 남아 도지만, 쌀과 보리는 늘 모자랐다. 결국 영도의 아낙네들은 말린 고기며 조개, 담치 등을 머리에 이고 오늘날의 범일동 부산진시장까지 가서 해산물을 팔았고, 그 돈으로 쌀과 보리, 기타 일용품을 사곤 했던 것이다. 당시 아낙네들은 부산장날에 맞추어 장을 보러 다녔다. 동삼동이나 청학동, 신선동, 영선동쪽에 살던 아낙네들이 부산 장을 가기 위해선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봉래동 바닷가에 있는 나루터의 배를 타야만 했다. 나룻배는 아낙네들을 용미산 나루터에 내려주었고, 그러면 아낙네들은 무거운 짐을 인 채 범일동 부산 장까지 고된 길을 걸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는 길은 또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갈 때는 말린 해산물이라서 무게라도 가벼웠지, 돌아올 때는 쌀과 보리라서 머리 위에 인 짐은 천근만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영도로 돌아갈 때쯤이면 이미 날이 저문 뒤라 험한 고개 길을 연약한 아녀자들이 넘으려니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해서 아낙네들은 반드시 무리를 지어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무거운 식량을 머리에 이고 험한 고개를 올라 온 여인네들은 고개 삼거리에서 너나할 것 없이 앉아 고달픈 다리를 쭉 뻗었다. 그러다 보면 보퉁이에서 주전부리가 나오고, 점심 때 먹다 남은 주먹밥도 나왔을 것이다. 차갑고 딱딱해진 그 음식들을 씹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휘영청 밝은 달이 은빛도 교교하게 바다를 비춘다. 그 달을 쳐다보던 어느 여인이 애잔한 자신의 삶이 서러워 무심코 아리랑 가락을 읊조렸다. 그러면 옆에 있는 여인이 따라 부르고 곧 이어 뒤에서 앞에서 동시에 아리랑 가락이 터져 나왔다. 아리랑 가락은 어느새 합창으로 바뀌고 이 가락 저 가락으로 넘어가다가 진도아리랑 대목이 나오자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덩더쿵 덩더쿵 춤을 추었다. 상상해보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짙은 어둠에 싸인 산마루에서 달빛과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는 흰 옷의 여인들을. 그 서러운 가락과 눈물과 한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리. 성북동의 아리랑 고개는 영화 의 촬영지라고 해서 대대적으로 거리 정비도 하고, 기념제도 개최하고, 상설 전시회도 개최한다고 한다. 그러나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영도의 아리랑 고개는 초라하고 낡은 식당의 간판에 작은 흔적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아리랑 고개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은 표지석 하나에, 고속도로 이정표에, 혹은 고속도로 휴게실의 간판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 고개의 옛 모습은 사라져도 아리랑 고개로 대표되는 한민족의 고요한 정서만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교육부는 올해 상반기 학술연구조성사업 지원 대상으로 신규 및 계속 과제 4천423개를 선정, 총 1천750억원을 지원한다고 31일 밝혔다. 박사학위 취득 후 5년이 지나지 않은 경우에 해당하는 '학문 후속세대 양성지원사업'을 통해 952명에게 256억원이 지원되며 대학 임용 후 5년 이내 교수의 왕성한 연구활동을 위한 신진교수 연구지원사업으로는 1천278명에게 275억원이 지원된다. 기초연구지원사업은 651개 과제에 919억원이, 지역균형을 위한 지방대학 우수과학자 지원사업과 여성과학자의 연구 지원을 위한 여성과학자 지원사업에는 584명에게 174억원이 지원된다. 학술단체지원 486과제에 34억원, 남북학술교류 7과제에 1억4천만원, 국제연구인력교류지원 173과제에 32억원, 국제공동연구 151과제에 38억원, 외국인교수 초빙 18명에게 10억원이 각각 지원된다. 교육부는 "이공 분야 연구과제는 자연현상의 원리 규명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 지식을 획득하는 순수 기초연구과제를, 인문사회 분야 연구과제는 인간의 가치와 인간의 문화, 인간 사회에 발생하는 여러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순수 인문학 연구과제 등을 우선 선정했다"고 밝혔다. 학술연구 조성사업은 국가가 대학 등에 근무하는 이공 및 인문사회 분야 학자와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연구자를 대상으로 학술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1963년 처음 2천만원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는 하반기까지 총 3천310억원이 지원될 계획이다.
경기도교육청은 31일 1단계 `학군'내 희망학교 선지원 후추첨 배정, 2단계 `구역'(학군을 세분화한 범위)내 학교 선지원 후추첨 배정을 주요 내용으로 한 2008학년도 도내 고교 평준화적용 5개 지역의 113개 고교 학생배정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이는 올 평준화지역 학생배정안 방식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 같은 학생배정안이 적용되는 도내 평준화지역은 수원학군, 성남학군, 고양학군, 부천학군, 안양권(안양.과천.군포.의왕)학군 등이다. 도 교육청의 학생배정안을 보면 수원과 성남, 고양, 안양권 등 4개 학군은 1단계로 각 학생들에게 학군내 5개 고교를 우선 순위별로 선택하도록 한 뒤 추첨을 통해 학교를 배정한다. 도 교육청은 이 1단계에서 수원, 성남, 고양 등 3개 학군의 경우 고교별 입학정원의 50%, 안양권학군의 경우 40%를 배정할 계획이다. 이어 1단계에서 학교를 배정받지 못한 나머지 모든 학생들은 본인이 재학중인 중학교가 포함된 `구역'내 모든 고교를 우선순위를 정해 선택한 뒤 역시 추첨에 의해 학교를 배정받는다. 학군을 세분화한 구역은 수원의 경우 북부와 남부 등 2개, 성남은 수정.중원, 분당 등 2개, 고양은 덕양, 일산 등 2개, 안양권은 안양, 과천, 군포, 의왕 등 4개로 나눠진다. 수원 등 4개 학군과 달리 학군의 전체면적이 넓지 않은 부천학군은 2단계 없이 1단계에서 학생들을 100% 배정하고 비평준화 지역내 중학생이 평준화지역 고교에 지원할 경우에는 2단계 배정과정에서 학생수용 능력에 여유가 있는 고교에 배정된다. 도 교육청은 "이같은 방식으로 이뤄진 2007년 학생배정 과정에서 전체 학생의 83.2%가 배정됐다"며 "올해도 비슷하거나 다소 높은 비율의 학생들이 1단계에서 고교를 배정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1996년부터 실시해온 이같은 고교 선지원 후추첨 학생배정으로 학생들의 학교 배정에 대한 만족도를 높이고 고교 선택권 제한에 대한 불만은 낮췄으며 고교 서열화 및 선호.비선호 학교의 양극화 현상도 크게 줄였다"고 자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