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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권력배분 장치 공교육의 위기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특정 계급에게 집중되거나 귀속되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있다. 과거의 귀속주의(Aristocracy) 사회에서 현대의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민주적인 권력배분 장치를 만들었다. 그것이 곧 학력(學歷)이다. 요즘에 와서는 진정한 의미의 학력(學力)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직도 이른바 ‘가방 끈’이 권력배분의 중심에 있다. 대학교육을 받았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가 그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권력의 정도를 가늠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 모두가 대학 입시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대입 경쟁에서 남보다 좋은 조건에 들기 위해 고액 과외를 받거나, 학군이 좋은 지역으로 이사하려는 행태를 비난하기 어렵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지역, 어느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를 불문하고, 각자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더 나은 학력을 갖게 되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지위가 주어진다. 주어진 조건에 의해서 사회적 지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노력한 결과를 가지고 공정하게 경쟁해서 계층 이동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공교육을 통해 이런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왔다. 1960년대 후반의 ‘중학교 무시험전형’과 70년대 초반의 ‘고등학교 평준화정책’이 그 일환이다. 이 두 정책은 공교육 기관이 권력배분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들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또 하나의 제도적 장치는 대입제도이다. 특히 대입전형에서 고등학교 교육의 과정과 결과가 다른 어느 요소보다 중요하게 반영되는 제도가 필요하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내신의 반영’이다. 우리의 공교육이 위기에 처해 있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경쟁이 치열해지고,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지면서 학교마저 적자생존의 경쟁 시장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우리 모두 최고가 되려고 경쟁하는 사이에 성적이 하위권에 속한 학생들이 먼저 소외되기 시작했다. 공교육으로부터 소외된 하위권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학교를 외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위권 학생들로부터 학교가 외면당하고 있다.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경쟁에 이기는 데 학교가 학원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김동춘, 1999:1). 내신을 무력화 하려는 일부 대학들은 ‘고교등급제’를 사실상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기회균등할당제’를 실시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고교등급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대학 졸업자에게 투표용지를 두 장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별 다름이 없다. 우리는 근대 시민사회에 살고 있다. 시민사회의 교육이란 위대한 시민(citizen)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시민은 태생의 청탁수박(淸濁秀薄)은 다를지라도 그 본성의 존엄함에 있어서 동일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현실태(現實態)의 우열은 있을지라도 평등주의적 인간관의 원칙(egalitarian ideal)에 의해서 교육돼야 할 권리를 소유한다. 젊음이란 가능태(可能態)일 뿐이다. 한 시점에서의 한 기준이란 위인의 준칙이 될 수 없다(김용옥, 2007). 공정성 위해 내신 반영비율 높여야 국가 또는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공정한 권력배분의 잣대를 잘 만들어 실시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잣대의 객관성을 그 어느 것보다 중시했다. 이제는 객관성만을 담보한 잣대로 권력을 배분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전에는 명문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갖게 되었으나, 이제는 부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명문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사회과학연구원, 2004:3 ; 김동춘, 1999:4). 학교가 더 이상 권력배분의 장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돈도 권력도 없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밝은 미래가 보장된다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공교육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입전형에서 단순히 현재의 성적만이 아니라 그가 처한 교육 환경까지도 고려하는, 즉 공정성이 중시되는 잣대를 개발해야 할 시점이다. 고교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필요조건(충분조건은 아니지만)은 내신의 실질 반영비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는 대입전형의 공정성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안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수능은 대학지원 자격요건 정도로만 활용하고 대입전형에서 고교내신을 주로 활용하겠다는 ‘2008학년도 대입제도’는 시의적절하다. 새 정책의 취지는 고등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각 학교는 주어진 권한 내에서 교육과정을 소신 있게 편성하여 운영하고, 그 결과는 다른 학교와 비교할 필요 없이 해당 교사들이 평가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과거에도 고교내신을 반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영의 명목상 비율은 꽤 높으나 실질 비율은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내신 반영비율의 이런 이중 구조는 대학의 기존 서열 구조를 지키려는 명문 대학들의 암묵적 담합을 바탕으로 조성되고 유지되었다. 이른바 일류 대학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는 신입생의 전국단위 시험 성적이었다. 과거의 대학입학학력고사와 현재의 대학수학능력시험 등의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가 그 대학의 일류, 이류를 결정하였다. 내신 성적이 수능 성적보다 예언 타당도가 높다는 게 상식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내신이 높은 학생을 뽑는 데 소홀하다. 대학의 일률적인 서열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도 새 대입 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 제도가 정부의 방안대로 순순히 실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교 평준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니 오히려 학교 간 학력 격차는 심화되었는데(강상진, 2005:176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05), 정부는 단위 학교별로 내신 등급을 산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명문 대학에 수십 명의 입학생을 배출하는 고등학교에서 1등 하는 학생과 명문 대학 지원서조차 써본 적이 없는 고등학교에서 1등 하는 학생을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것이다. 대입전형의 공정성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발상이기는 하나 국민들이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교 효과성 측정으로 내신 등급 보정 고교등급제와 같이 각 학교가 처한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평균 성적을 그 학교의 성취 수준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편 각 학교의 평균 성취도에 관계없이 모든 학교의 1등급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양 극단을 취한 두 가지 관점을 지양하는 새로운 방안이 필요하다. 각 학교가 처한 여건을 감안하여 학교의 효과성을 측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내신 등급을 보정함으로써 대입전형의 공정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학 입시를 둘러싼 이해 관계자의 동의를 구하면서, 대입전형의 공정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필자는 위계선형모형(HLM, Hierarchical Linear Model)으로 학교 효과성(School Effectiveness)을 측정하고(김경성, 1998), 이를 바탕으로 단위 학교의 내신 등급을 보정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그 연구(남현우, 2006a)는 미국에서 수집된 자료를 이용한 것이었다. 또 미국과 우리는 교육환경이 같지 않고, 학교 효과성을 결정하는 변수도 같지 않기 때문에 국내에서 수집한 자료를 사용한 연구(남현우, 2006b)를 수행했다. 전국의 학생들을 하나의 잣대로 재어서 줄 세우는 현행 제도는 물론, 각 학교의 수준을 무시하고 모든 학교의 1등을 동일하게 취급하겠다는 정부의 방안을 지양해서, 각 학생과 학교가 처한 여건을 감안하여 학교 효과성을 측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내신 등급을 보정하는 방안의 타당성을 검증하였다. 내신을 단위 학교 내에서 과목별 9등급으로 산출한다는 게 교육부의 기본 생각이다. 궁극적으로 교육부의 기본 안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입시 관계자들이 흔쾌히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엄존하는 학교 간 학력 격차를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고교평준화를 기본 정책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학 실적과 관련해서 명문고와 비명문고를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교육부의 생각과 여러 입시 관계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이 필요하다. 단위 학교별로 내신 등급을 산출하되, 여건(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학교 위치, 개인 과외의 기회 등)이 비슷한 다른 학교들에 비해 높은 효과성을 보인 학교(School Effectiveness)의 학생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등급을 높여주는 것이다. 그 반대로 여건이 비슷한 다른 학교에 비해 낮은 효과성을 보인 학교의 학생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등급을 낮춰주는 것이다. 학교 간 학력 차이를 무시하고 단위 학교별로 내신 등급을 산출하는 게 불합리하다고 한다면, 각자가 처한 여건을 무시한 채 결과만을 가지고 전국의 학생들을 하나의 잣대로 재서 내신 등급을 산출하는 방안도 그에 못지않게 문제가 있다. 양 극단을 지양하여 입시 관계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필자는 학교 효과성을 반영하는 내신 등급 조정 방안을 제안하였고, 이의 타당성을 검토하였다. 공정성 확보위한 타당성 검증 계속돼야 고교평준화가 명실상부하게 이루어져 있고 고교교육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단위 학교별로 내신 등급을 산출하자는 교육부 안에 대부분이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학교 간 학력 차이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모종의 경과 조치가 필요하다. 그것을 필자는 위계선형모형(HLM)을 이용한 학교 효과성 측정과 이를 이용한 내신 등급의 보정이라고 보았다. 학교 효과성을 결정하는 최적의 함수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내신 등급을 보정하여 대입 전형에 반영한다면, 대학 입시 때문에 고교교육이 파행으로 치닫는 현상은 없어질 것이다. 더 나아가 학부형과 학생들이 고등학교 선택을 자유롭게 해도 괜찮은 상황이 될 것이다. 새 대입 제도를 통해 실질적인 고교평준화가 실현될 수도 있다고 본다. 즉, 교육 여건의 평등과 교육 효과의 차등을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HLM 방식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노력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빈약한 필자의 안목으로 볼 때, 대입전형 방법의 타당성 문제는 경험적 검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가치론적 추론의 대상이며, 경험적 검증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LM 방식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교육평가의 기본 철학은 사회 정의의 실현에 있어야 한다(황정규, 2000). 학업 성적이라는 결과는 그 밑에 ‘능력’과 ‘노력’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능력이라는 개념은 이미 주어진 조건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것은 오랫동안 가족 구성원이 보내준 지원이나 사회적 기회의 불공정이 누적되어 나타난 집약체로서 형성되어 있다. 교육평가가 공정성을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려면, 평가하려는 객체가 무엇이며, 그것을 결정하리라고 짐작되는 선행 변수 또는 선행 제약 조건이 공정하게 평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고려되고 있는지 되짚어야 한다. 잘 할 수 있는데 잘 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는데도 잘 할 때 칭찬이 필요하다. ‘잘 뽑는 것’ 아닌 ‘잘 기르는 것’ 필요 우수한 인재를 뽑기 위해 대학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국가가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심지어는 이러한 국가의 간섭이 대학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반국가적인 행위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우수한 신입생을 뽑기 위해 대학들이 노력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국가가 정한 대입제도의 틀을 무시하면서 학생과 학부모에게 혼란을 안겨주는 일부 대학들의 처사는 비난 받아야 한다. 대학 신입생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이들이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에 지원하느냐에 따라 각 대학의 희비는 갈리겠지만 대한민국 전체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가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우수 인재들이 기초 학문 분야보다 장래의 안락한 직업이 보장되는 학과에 몰리는 현상이다. 일류 대학의 입시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인 양 포장되는 사례가 많다. 대학입시제도의 자율화가 국가 경쟁력 제고에 필수 요건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데 대학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우수한 인재를 잘 ‘뽑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입생이 들어오더라도 이들을 잘 ‘길러내는’ 것이다. 공교육은 사회적 약자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국가는 공교육을 굳건히 지켜야 할 책무가 있다. 2008학년도 대입제도도 이러한 인식의 틀 안에서 만들어졌고 공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2008학년도 입시제도의 기본 정신을 훼손하면서 자기 대학의 이익을 챙기려는 소위 일류 대학들의 행태가 있었다. 이를 제지해야 할 교육부장관은 애매한 담화문을 발표하고 뒷짐만 지고 있다. 공교육 기관의 맏형인 대학, 그 중에서도 최고를 자칭하는 일류 대학이 할 짓이 아니다. 이들을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다고 공언하는 부총리의 행동도 잘못됐다. 세계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서방 선진국의 유명 대학 대신에 우리나라의 대학에 유학 오도록 하는 대입제도를 만드는 데 국가의 대입 정책이 걸림돌이 된다면 수정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3 학생들을 나누어 갖는 방안을 짜면서 국가의 기본 틀을 무시하는 대학의 처사를 용납할 수는 없지 않는가? 국가가 정한 대입 제도를 따랐을 때 특정 대학의 입시 경쟁력은 약화될 수 있어도 그것이 공교육의 기본 취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지켜야 한다. 대학이 신입생을 선발할 때에는 자율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입 제도가 공교육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함을 감안할 때, 초등 및 중등 교육의 정상화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받아야 한다. 대학이 자율권을 구가해야 할 영역은 신입생 선발이 아니라 이들의 교수·학습이다.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대학의 오판 서울에 소재하는 이른바 일류 대학의 입학 처장들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노력하는 것 같다. 이들은 수능 성적을 9개 등급으로만 보고하고 학생부의 비중을 확대하여 고교교육의 정상화를 이루려는 정부의 의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정부는 매번 고교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새 대입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일류 대학들은 정부의 방안에 아랑곳 않고 제 갈 길을 가곤 했다. 주요 대학들이 반발할 것이 뻔한 정책을 만들어내고 또 그런 대학들에 적절한 행정 지도도 못하는 교육부 관리와 국가 전체의 교육은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 대학에 성적 좋은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도록 생떼를 쓰는 대학의 입학 처장들은 수험생과 학부모들을 조롱하고 있는 셈이다. 왜, 일류 대학들은 수능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가? 학생부(내신)보다 수능의 변별력이 높아서인가? 수능을 표준점수로 보고할 때에도 수능의 변별력이 낮다며 논술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일류 대학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수능이 9개의 등급으로만 보고되는데도 오히려 변별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진짜 이유는 일류대의 ‘기득권 지키기’이다. 이른바 ‘일류’를 계속 지키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방법들이 녹녹하지 않기 때문에 대입 제도에서 기득권 지키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교수의 연구 업적이 일류이며, 그것을 계속 지킬 수 있는가? 학부 학생 또는 대학원생의 학업 성취도가 일류이며, 계속 그것을 지킬 수 있는가? 시설이나 재정 상태 등을 포함한 교육 여건이 일류이며, 이를 계속 지킬 수 있는가? 등을 통한 일류 지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류 대학은 전국의 학생들을 오직 하나의 잣대로 재서 얻은 수능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고, 그 중에서 상위에 있는 학생들만 쏙쏙 뽑을 수 있는 기득권이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서울대에는 수능 성적 상위인 자들이 가장 많다. 그 다음에 연세대나 고려대 등에 많다. 게다가 이러한 관행은 잘 바뀌지 않는다. 국가가 제안하곤 하는 새 제도가 정착되는 것만 적당히 방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9개 등급으로 나누어 놓은 것을 이제는 거꾸로 등급에 점수를 부여하겠다고 몽니를 놓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대학인들까지 제 몫을 챙기기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현실태(現實態)의 우열에 주목하지 않고 젊은이의 가능태(可能態)를 볼 수 있는 안목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일류 대학을 이 사회는 기대한다.
대학입시 경쟁이 없는 나라는 후진국이다. 세계의 모든 선진국은 선진국이 되는 과정에서 교육의 역할이 컸고 교육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쟁이 필수적이다. 다만 대학입시 경쟁이 요란하냐, 아니냐 하는 것은 성숙된 사회냐, 아니냐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대학입시 경쟁 없는 나라는 후진국 일부 사람들이 마치 선진국들은 입시경쟁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선진국들에서 입시 경쟁이 더 심하다.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미국의 주요 대학들은 지원자의 합격률이 10%대에 머물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일본도 전체 대학 진학자가 고등학교 졸업자의 50%를 넘지 않을 정도다. 중국도 명문대학에 대한 열기가 대단하고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유사한 대학입학통일고사에 대한 전 국민의 관심은 지대하며 6월에 치르는 이 시험시기에는 전국의 도관과 사찰에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기도 인파가 쇄도한다. 상대적으로 유럽 국가들의 대학입시는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유럽도 대학입시가 치열한 것은 여타의 국가들과 다름이 없다. 유럽 국가들은 고등학교 진학단계에서 대학으로 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 때문에 대학입시의 경쟁률은 미국이나 아시아 국가들보다 낮지만 실질적인 경쟁은 훨씬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대학문이 크게 열려있는 프랑스는 대학들과 소수의 엘리트 교육을 전담하는 ‘그랑제꼴(Grandes Ecoles)’이 이원화되어 있어서 마치 1부 리그와 2부 리그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달리 독일은 고등학교 진학단계에서 직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경우와 대학진학을 위주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의 진학하는 것을 엄격히 분리하여 적용하기 때문에 대학 경쟁이 크지 않게 보일 뿐이다. 영국의 경우에도 대학 진학률이 1960년대 5%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해 왔지만 여전히 50% 미만에 머무르고 있을 정도로 소수의 엘리트가 대학을 진학하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경쟁이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입시 경쟁이 사회문제가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며 최근에 크게 문제가 된 것은 대학입학 전형요소를 두고 정부와 대학들이 대립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대학들의 입장은 학교별로 수준의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 고등학교에서 얻은 성적을 반영하여 학생을 선발하는 것은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려는 대학의 의도에 어긋난다며 반대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대학의 입시에까지 국가가 간섭하는 것이 대학의 자율을 해치는 것이라 반발하고 있다. 한편 교육부가 대학입시에 내신반영비율을 높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 즉, 고등학교 교육이 입시위주로 흘러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교육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등학교가 평가하는 내신비율을 높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있는 이른바 일류고등학교에서는 내신우수자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이고 농어촌이나 낙후지역의 내신이 좋은 학생들에게 유리한 입시제도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내신반영 비율을 높이라고 주문하고 있다. 대입제도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 대입제도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은 가깝게는 학생과 학부모, 대학, 정부를 대표하는 교육부, 대학졸업자를 채용하는 기업 그리고 우리 사회전체가 될 수 있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대학교육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한다. 이에 비해서 대학은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유치할수록 자신들의 명성이 올라가고 동시에 더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고자 한다. 한편 기업은 인적자원들이 기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특성을 대학교육을 통해서 기르기를 원한다. 기업이 직접 기르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가능하면 기업의 요구에 맞는 특성을 많이 갖추기를 바라고 교육부는 국가의 경쟁력을 갖춘 인적자원 개발은 물론이고 민주시민의 자질을 갖춘 국민들을 교육을 통해서 기르려고 한다. 이와 같이 대학교육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요구를 수용해야하기 때문에 대학교육이나 대입제도에는 항상 긴장과 갈등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정부가 전인적인 인격을 가진 민주시민을 양성하려는 목표는 생산성 향상을 원하는 개인이나 기업의 바람과는 충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정부나 국가가 대학교육을 통해서 얻으려는 것과 개인이 대학교육을 받는 목적이 일치한다면 대학교육을 두고 발생하는 갈등은 줄어들게 된다. 예를 들어 우수한 인적자원개발이 국가의 목표라면 대학의 목표, 학생의 목표가 일치하기 때문에 갈등의 소지는 크게 감소한다. 갈등의 출발은 대입제도를 사이에 두고 이해당사자 간의 목적이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게 된다. 이 중에서 어떤 갈등들은 구조적인 문제로서 해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불가능에 가까워서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없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대학입시 경쟁 자체를 없애려는 노력, 사교육비를 줄이려는 노력이나 정책은 구조적인 문제들로서 정부의 정책과 단기적인 노력으로 해결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해결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시장을 통한 효율적인 자원배분은 생산자들의 경쟁과 소비자들의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생산자는 더 많은 소비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품질을 개선하고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 언제나 낮은 가격을 지불하기를 원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은 시장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대학입시 경쟁도 시장의 경쟁과 원리는 같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학생은 그에 상응하는 실력을 쌓아야 하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야 한다. 한편 대학도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교육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하고 또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든지 교육비가 싸야한다. 이와 같이 대학은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교육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비용을 낮추는 노력을 해야 하고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기르는 능력은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목적 달성에도 기여한다. 예를 들어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입시전형으로 들어가면 학생들은 외국어 구사능력을 신장시킬 것이고 그 과정에서 대학과 국가는 외국어 구사능력이 뛰어난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셈이 될 것이다. 잘못된 수단과 목적이 갈등 야기해 대학입시 경쟁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되고 동시에 대학은 우수한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선별도구가 된다. 그러나 대학입학시험은 한정된 입학정원을 두고 서로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쟁은 당사자에게는 힘이 들겠지만 개인이나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경쟁이다. 그동안 대학입시 경쟁을 없애기 위한 정부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대학입시 경쟁을 줄이려는 정부의 정책은 경쟁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거나 목적 달성에 적합한 수단이 되지 못했다. 대학입시 경쟁을 줄이기 위해서 여태까지 해온 노력 중의 하나가 대학의 정원을 늘리거나 대학 설립을 자유롭게 하여 대학의 문호를 넓히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대학입시 경쟁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대학입시 경쟁의 본질은 대학의 입학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학을 통하여 좋은 일자리를 갖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대학입학 정원을 늘려서 대학을 쉽게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일자리 얻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대학졸업자의 기대감을 높여서 일자리를 위한 경쟁을 더 치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대학입시 경쟁 과정에서 사교육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사교육비를 줄이는 정책을 여러 가지 시도하였다.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서 대학입학시험 문제를 쉽게 내고 내신을 강화한다는 정책을 펴는데 일견 그럴싸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수단과 목적이 잘못된 것이다. 경쟁은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얻겠다는 사람들의 욕망이 지속되는 한 경쟁은 치열하고 경쟁에 이기기위해서라면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더 많은 투자를 하고 비용을 지불하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가경쟁력 약화시키는 평등 정책 대입제도와 관련하여 이른바 ‘3불 정책’이 존재한다. 기여입학 금지, 고교등급제 금지, 그리고 대학별 본고사 금지의 3불 정책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학생들이 대학입학에서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다. 흔히 교육의 수월성을 포기하고 평등을 인위적으로 강조하는 정책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을 통하여 입시경쟁이 없어지고 학교의 서열화가 없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교육당국의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을 따름이다. 수능시험 성적의 비중을 높이든 낮추든, 본고사를 보든 보지 않든, 내신의 비중을 높이든 낮추든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일자리나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경쟁은 치열하고 경쟁의 결과는 항상 불평등하다. 다만 그 경쟁을 대학입학시험에서 하느냐 아니면 취직시험에서 하느냐하는 시기와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더구나 고등교육은 본래의 목적이 수월성임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단계인 대학교육에서 평등을 찾으려는 것은 세계화의 시대적인 상황과도 맞지 않다. 세계화에 따른 국가의 경쟁력을 강조하면서 교육에서 경쟁을 빼겠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이 정부에서나 시도할 만한 무모한 발상이다. 고등교육을 평등기조로 운영하려는 정부의 발상이 잘못된 것이고 또 평등을 달성하려는 정책수단이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오죽 대학입시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이면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가 하는 안쓰러운 느낌도 있다. 그러나 교육이 평등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평등이 유지될 수는 없다. 정말 평등한 사회를 유지하려면 조세제도를 통해서 소득의 평등을 추진해야지 능력과 적성이 다른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대학의 수시 1학기 접수가 시작되는 시점에서도 일선 고교의 내신 반영률이 확정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등 대학은 교육부가 요구하는 반영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다. 수시 1학기 대입전형에서는 내신만으로 합격의 당락이 거의 좌우되기 때문에 일선 고교에서는 내신 비중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고, 대학 당국에서는 내신만으로 선발한 학생이 대학에서 수학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경험한 터라 내신 반영으로만 선발하는 학생을 줄이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학 담당교사들의 혼란 가중돼 대학 당국은 학생선발권을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 지 뚜렷한 발표도 없이 언론에 흘려보냄으로써 진학을 담당하는 현장교사들의 업무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1등급에서 4등급까지 간격을 미미한 차이로 설정함으로써 실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특수고등학교나 도시 중심지 학생들을 선발하려는 대학 측의 의도가 깔려 있는 듯하다. 이로 인해서 시골 고교생들의 내신 등급은 상대적으로 무의미하게 되어 버리고, 수능에서도 대도시 같은 등급의 학생들과의 경주에서 시골 학생들은 유리한 환경에 처해 있지 않다. 그러기에 농어촌 전형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대학에서 학생 선발에 내신 반영률을 높이지 않으려는 것은 이런 시골의 학생선발 특혜를 줄이고 도시 변두리에서 농어촌 전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의 성적 등급을 대도시의 학생들의 등급과 같이 인정하지 않고 수능으로 학생을 선발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대학 본연의 연구력을 높이려는 의도는 인정한다고 해도 대학 당국도 대학 자체에서 수학 능력을 강화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반영도 높여도 부작용 염려돼 대학 당국에서는 학생의 능력을 고교교육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 내신의 반영률을 낮추려는 의도를 들어내고 있다. 일선 학교에서 학생들의 학업 추세를 보면, 방과 후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열성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학업에 대한 성취도가 높아지려고 하면 학생들의 바른 생활태도부터 갖춰져야 할 것이지만, 고교현장에는 학생지도를 교내 상주 경찰에 맡기고 있는 학교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교사의 손을 떠난 학생지도는 학생들을 자유방임의 천국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인지 현장교사들의 반론을 듣고 싶을 정도다. 학생들의 내신 반영도가 높아질수록 교실현장의 질서는 높아지고 학생들의 학업에 대한 태도는 높아질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로 인해 ‘수박 겉핥기’식의 공부가 극성을 부리게 될 것이고, 학원은 학생들의 중간고사 대비, 기말고사 대비 하면서 상술에 열을 올릴 것이다. 그로 인해 학원 강사들이 학교교사와의 결탁해 학교 홈페이지에 시험문제를 빼내는 등의 일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학원은 시험지를 복사해 시험지 문제에 대한 옳고 그름을 평가하여 학생들에게 공개함으로써 학교에 대한 평가절하를 하게 되는 등 시험지 공개로 인한 불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것이다. 현재 대학에서 요구하는 내신반영률 평가절하는 고교 교육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은 틀림없다. 이런 차원에서 교육부는 교사초빙제와 초빙교장제를 병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교장초빙제를 반대하는 이유가 교장의 잔임을 채워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다는 따가운 여론을 불식시키는 방안이 없이는 초빙교장제는 무의미할 것으로 본다. 그러기에 초빙교장제를 취하는 학교에서는 교장을 초빙하는 데 조건을 내세우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임기 동안 주어진 조건을 잘 수행했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했는가를 1년마다 평가해 내는 것도 필요하다 하겠다. 고교생의 대학수학능력 키워야 그렇다면 내신의 신뢰성 제고를 위한 제도적 방안은 무엇인가? 첫째, 전국학력평가 시험을 중간고사 아니면 기말고사에 적용하는 방안을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전국학력평가를 인문계 고교 1, 2학년생은 1년에 5번, 3학년은 6번 정도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날 학생들이 시험에 대하는 태도는 진지하지 못하다. 아니면 말고 하는 형식을 취하는 자세를 보고 있노라면 이 제도가 무언가 시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국가의 세금으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려는 의도가 유명무실해져 버린다면 그 제도는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수시 1학기 대입 전형을 치루는 학생에게는 대입적성검사를 받는 방안이 고려되었으면 한다. 2010년도부터 수시 1학기 대입 전형이 없어진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수시 1학기 대입 전형은 유지하면서 보완책을 강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면 수시 1학기를 통해 합격이 남아 있는 학생들의 학업에 대한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여건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여건은 무엇보다도 교사의 수를 확보하고 교실의 수를 보충하고 나아가서는 지역사회와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방안이 모색될 때 가능하다. 셋째,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성적이 학교마다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교육부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고교등급제가 인정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각 고교 내신 성적을 일률적으로 반영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대학 측의 견해인 것 같다. 일부 사립대학 측에서 내놓은 1등급에서 4등급까지 같은 등급으로 인정하자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천차만별인 내신 등급을 똑같이 적용한다는 것은 어렵고, 그래도 각 학교의 우수한 학생이라고 한다면 4등급까지는 같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는 수준별로 반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혼합성을 띤 반구성에서 교사의 교수 방법을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기에 어떤 반은 수업 분위기를 방임형으로 이끌어 나갈 때가 있고, 어떤 반은 민주형으로 이끌어 나갈 때도 있다. 현장교사들의 이 같은 어려움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평가 문항의 선정에 애로사항이 되고 있다. 문제 같지 않은 문제를 만들어 평가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문항이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되어야 한다고 하니, 현장교사로서는 체면이 말이 아닌 경우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중학교에서 적성검사를 충분히 하여 이과로 가야 할 학생과 문과로 가야할 학생을 분명히 해 주었을 때 고교에서는 학생들의 지도에 그나마 어려움을 덜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고교 인문계에서는 도저히 수학 능력을 인정할 수 없는 학생의 상태인데도 부모님의 극성에 의해서 또는 실업계 기피 현상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인문계 고교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적응을 할 수 없게 되고, 수업시간에도 집중을 할 수 없어 옆 학생들과 소란을 피우거나 아니면 수업시간에 핸드폰으로 몰래 게임을 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는 등 교사와 학생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나타나곤 한다. 넷째, 교교등급제와 내신반영률 문제, 지역할당제와 선발된 학생의 대학수학능력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도 궁극적으로 대학에 선발된 학생들의 대학수학능력 부족에서 야기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류 대학의 문턱에도 갈 수 없었던 고교에서 당당히 합격이라는 명함을 낼 수 있게 됨으로써 시골 학교의 이미지가 높아지고 새로운 희망을 줘 우수한 시골 학생이 타 시·도에 전출을 가지 않는 이유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면 좋은 결과를 외형상 도출해서 좋았지만, 대학 측의 입장에서는 고등인력을 양성해야 하는 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대학의 본래 목적은 국가 목적에 맞는 다양한 인력을 배출하여 다방면에 필요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집단에 속하는 개개인은 집단에 맞는 수준을 갖춰야 하고 강의도 그 수준에 맞게 진행돼야 한다. 고교 신입생 선발부터 신중해야 혼란스러움 속에서 그것을 바로 잡기위해서는 어려움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지역할당제 신뢰도를 높이려고 한다면, 농어촌 전형지역 확대를 강화하고 실업계 특별전형의 신뢰도를 높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것이 고교현장에서 수월성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는 방안이 고려되어야 한다. 사실 수월성 교육이 학교현장에서 진행되려면 방과 후 학교의 수준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마나 소수의 학생을 지도하기에 필요한 지도비용을 충당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학부모 부담으로 진행하려고 하니 민원이 야기되고, 학교차원에서 하려고 하니 소수 학급인 고교에서는 인원을 채우기에 어려워 수월성 교육이 일반 학생들과 더불어 진행되고 있을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고교현장에서 보는 고교내신제와 지역할당제의 만족도에는 뚜렷한 대안이 있다기보다는 고교내신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고교 신입생 선발에 있어 적성검사를 강화하여 인문계 고등학생으로서의 수학능력 정도와 적성을 평가하는 방안이 고려되었으면 한다. 또 현재 인문계 고교에서 수학능력이 부족한 학생을 해소하기 위해 고교 신입생 선발 원서접수도 인문계와 실업계 동시에 실시해야 한다. 인문계는 실업계보다는 그래도 학업에 대한 집착이 드높아야만 되는데,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시키기 위해 붙잡아 두어 오히려 타 학생에게까지 학업에 지장을 주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고교 신입생 선발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지금의 고교내신제 등급에 신뢰성을 드높이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스무 살, 그녀들의 꿈과 좌절 젊음을 담보로 자유를 만끽하기엔 삶이 너무나 팍팍해져버린 요즘이지만, 대중매체 속에서 보이는 스무 살은 여전히 밝고 화사한 청춘의 표상인 것처럼 포장된 채 괴리감을 던져준다. 그러나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 지점에 서 있는 현실의 스무 살들에겐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끼리도 털어놓기 어려운 비밀과 고민들이 있다. 여기에 스무 살의 진짜 이야기를 해주는 한 영화가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에 있는 한 여자실업계고를 갓 졸업한 다섯 명의 스무 살짜리 친구들 이야기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지닌 채, 꿈도 많고 고민도 많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맥반석 찜질방 카운터로 일하는 태희(배두나)는 특별한 고민도 욕심도 없는 평범한 인물로 비춰진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친구들을 챙기는 밝은 성격에 봉사 활동에서 알게 된 뇌성마비 시인을 좋아하는 등 엉뚱한 구석이 있으며 늘 세상 밖으로 여행할 꿈을 꾸는 몽상가다. 혜주(이요원)는 증권회사에 다니며 멋진 캐리어 우먼을 꿈꾸고 있는 야무진 친구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이기적일 정도로 새침하지만,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따라붙는 여상 졸업이라는 꼬리표는 직장에서 차별대우와 하급인생 취급을 받게 한다. 지영(옥지영)은 부모님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셋이서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에 산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유학을 꿈꾸지만 탈출구 없는 가난한 환경에 그녀의 삶은 나날이 찌들어 간다. 화교 쌍둥이 자매 비류와 온조(이은실, 이은주).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성장한 그녀들은 활발한 성격으로 항상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화교는 여전히 이방인에 가까운 존재이다. 전작 단편들에서 십대 소녀들의 자의식과 일상적 고민을 잘 그려냈던 정재은 감독은 장편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의 주인공들에게 깊은 애정과 지지를 보낸다. 그래서 드라마틱한 구성이나 기교는 없지만 캐릭터와 그들이 놓인 상황 위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잔잔한 느낌을 주고 각 인물들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스무 살,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디딘 여상졸업생의 꿈과 좌절, 졸업 후 만남이 뜸해지면서 느끼는 친구들 간의 소원함 등 본인 스스로도 젊은 여성인 감독은 스무 살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성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팍팍한 현실을 감싸 안는 애틋함 감독은 또한 우리가 쉽게 망각하고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것들에 대해 애틋한 시선을 던진다. 관객들은 문득 스무 살 또래의 청춘들이 모두 대학생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그녀들의 삶의 터전인 ‘인천’이라는 도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인천에 살고 있지 않는 이들에겐 단지 서울 옆에 있는 광역시라는 정도로 각인되어 있는 도시, 주변부의 느낌이 강한 낡고 오래된 곳, 몇몇 해수욕장이 있는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천이다. 이 주변도시 인천에서 인문계 학교가 아니라 실업계 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들은 인천이라는 ‘변두리’에서 서울이라는 ‘중심부’로의 이동을 꿈꾼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경쟁사회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이들은 출발선부터 뒤처져 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인천을 떠나 서울에 있는 증권회사에 다니게 된 혜주는 서울 입성을 뿌듯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혜주의 말대로 인천 최고의 여상을 나왔음에도 그들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냉정하다. 혜주는 대학을 나온 직장의 팀장으로부터 ‘저부가가치 인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홀로 눈물을 삼킨다. 고교시절 늘 함께였던 단짝친구들이었지만 스무 살이 되면서 그녀들의 관계엔 알 수 없는 틈이 생긴다. 그녀들은 인천에서부터 두 시간 넘게 지하철을 타고 젊음과 화려한 패션이 있는 동대문 의류상가로 놀러 가지만 서울과 인천의 거리만큼 혜주와 친구들 사이엔 어딘지 모를 어색함이 감돈다. 결국 그녀들의 조건은 그녀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심부 언저리에서만 머뭇거리도록 만드는 현실적인 제약으로 작용하고 마는 것이다. 영화 중간 중간 화려한 네온사인과 빌딩이 밀집된 서울과 연기를 내뿜는 공장 굴뚝이 떠오르는 인천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화면들이나 월미도에 주인공들이 놀러갔을 때 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거칠게 불던 바닷바람 등 인천이라는 공간을 세밀하게 잡아낸 카메라는 쉽게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고교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 깃든 월미도가 이제 각자의 삶의 고민을 안고 있는 스무 살 그녀들에게 어느덧 낯선 풍경이 되어버렸음을 묘사하는 이 장면은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 또 이 영화는 성장기의 고민을 갖고 있는 청소년들이 그들의 미숙한 자존심과 어른들의 무심함으로 인해 서로 간에 소통이 힘든 현실을 잘 보여준다. 혜주 부모님의 이혼, 태희의 가출 고민 등은 친구들에게 잘 공감되지 않는다. 또래에게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고민들이 타인이나 어른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다. 일례로 지영의 가난과 불우한 환경은 끝까지 혼자만의 몫으로 남는다. 지친 등을 두드리는 진심어린 격려 어느 날 지영이 길 잃은 새끼 고양이 ‘티티’를 만나면서 그녀들의 삶에 고양이 한 마리가 끼어들게 된다. 혼자 있길 좋아하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신비로운 동물 고양이. 고양이를 닮은 스무 살 그녀들. 다락방을 서성이며 머뭇거리던 고양이가 한 곳에 정착해 보호받지 못하고 혜주, 지영, 태희를 거쳐 비류와 온조에게 맡겨지는 것처럼, 그녀들에게 현실은 쉽게 머무르거나 다가설 수 없는 낯선 공간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마지막, 공항에 온 태희와 지영은 세상을 향해 ‘Good Bye’라고 외치며 당당히 발걸음을 옮겨 딛는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들에게 전망 부재의 시간들은 계속될 것이다. 때때로 그들의 삶은 자신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학벌(여상 출신), 가정환경(고아), 혈연(화교)에서 이미 약자의 위치인데다가 여성, 인천 출신이라는 짐이 추가로 얹혀 있다. 텍스타일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유학을 가겠다는 지영, 바다와 외국과 선원을 동경하는 태희, 코도 높이고 영어공부도 해서 성공할 거라는 혜주의 말은 모두 현실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희망과 꿈마저 보잘것없는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현재가 힘들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게 인생인 것처럼, 이 영화는 스무 살의 저편 너머에, 아직 뚜렷이 보이진 않지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살며시 속삭인다. 삶이 여전히 고단할지라도 꿈을 잃지 말라고 이들의 작은 등을 두드리며 힘내라고 격려한다. ‘소녀와 여인’,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은 ‘창 너머로 바깥세상을 꿈꾸는’ 고양이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감독은 이들 주변의 무심한 어른들과 이들을 둘러싼 냉혹한 세상을 향해 말한다. “고양이를 부탁해, 정말 진심으로 부탁해.” 어른이 되어 가면서 하나 둘씩 놓치고 가는 것들에 대해 깨닫게 해주는 이 작고 따뜻한 영화는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귀한 보석 같은 다섯 소녀들을 가슴속에 오래도록 심어준 영화이다. 엉뚱하지만 속 깊은 태희, 똑똑하고 예쁜 깍쟁이 혜주, 그림을 잘 그리는 아웃사이더 지영, 명랑한 쌍둥이 비류와 온조. 6년 전 당시 스무 살 단짝친구들이었던 그녀들의 지금 모습이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부디 그녀들이 씩씩하게 잘 살고 있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다시금 마음속 깊이 빌어 본다. “고양이를 부탁해! 멋진 인생을 부탁해!”
Q1. 4년제 교대 졸업생으로 2001. 9. 1자로 신규 임용돼 초임 9호봉으로 근무하던 교사가 1급 정교사 자격연수를 받고 2006. 8. 20일 1급 정교사 자격을 취득한 후 자격변동으로 인하여 2006. 9. 1(잔여월수 12월)자로 호봉 재획정하게 된 경우 호봉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 A1. 자격변동으로 기산호봉을 8호봉에서 9호봉으로 하고, 잔여월수 12월을 반영하므로 13호봉에서 2호봉 승급하여 15호봉에 급하고 잔여월수 0월로 처리함이 타당합니다(교육단체지원과 - 3615, 2006. 10. 25, 교육단체지원과 - 1840, 2007. 6. 22). 「공무원보수규정」 제9조 제1항에 의거 새로운 경력을 합산하여야 할 사유(교육공무원의 경우에는 자격이나 학력 또는 직명(대학이나 전문대학에 한한다)의 변동이 있는 경우를 포함한다)가 발생한 경우 호봉을 재획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2급 정교사 자격증 소지자가 1급 정교사 자격을 취득한 후 자격변동으로 인한 호봉 재획정 시에는 기산호봉에 1호봉을 가산하여야 하며, 잔여월수 12월이 남아있을 경우에는 추가로 1호봉을 가산하여 전체 2호봉 승급하고, 잔여월수 0월로 처리하는 것이 맞습니다. Q2. 「공무원보수규정」제9조(호봉의 재획정) 제2항 단서인 ‘휴직·정직 또는 직위해제 중인 자에 대하여는 복직일에 재획정한다’의 해석에서 휴직·정직·직위해제 중인 자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복직일에 호봉을 재획정하라는 규정인지, 아니면 제9조 제1항 제1호의 ‘새로운 경력을 합산할 사유가 발생한 경우(예, 휴직의 경우 「교육공무원법」제44조 제1항 제2호의 군복무 휴직과 같이 그 휴직기간이 새로운 경력으로 인정되는 휴직 등)에만 복직일에 호봉을 재획정하라’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A2. 「공무원보수규정」제9조의 ‘호봉 재획정’은 제1항의 호봉 재획정 사유와 제2항의 호봉 재획정 시기 및 제3항 내지 제5항의 호봉 재획정 방법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이 중 제2항은 호봉 재획정의 시기를 명시(다음달 1일로)하였고, 단서에서는 휴직·정직·직위해제 중인 자가 복직하였을 때 호봉 재획정을 하도록 예외를 규정한데 불과하므로, 휴직·정직·직위해제 기간 중 새로운 경력을 합산할 사유가 없는 휴직 등은 복직 시 호봉을 재획정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생활 주변에 우스개 이야기가 부쩍 많아졌다. 우리 사회가 먹고 살만 하니까 생겨난 소통의 여유 징후라고나 할까. 사석에서라도 능동적 발신자가 되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생리를 반영한 것이라고나 할까. 소통의 여유를 가지는 사회는 토론을 풍성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사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기도 한다. 너나없이 재미있는 이야기 한두 개쯤은 챙겨 가지고 다니면서, 고만고만한 친교의 자리에서 적절하게 활용한다. 이런 현상을 불러오게 된 원인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이런 현상의 결과로 보아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 공간에는 각종 우스개 이야기들이 허다하게 떠돌아다닌다. 학자들은 ‘새로운 구비문학의 시대’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우스운 이야기도 자꾸 들으면 면역이 생기는 모양이다. 어지간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웃으려고 들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스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마음에 소통의 건강성이 있기도 하다. 우스운 이야기에도 여러 층위가 있어서 질박한 웃음을 불러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지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웃음도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종류의 우스개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내용 자체는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터무니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무언가 공감의 마당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으로는 소통의 매개거리들이 많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열린사회’의 한 양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일전 어느 자리에서 한 친구가 모임의 분위기도 살릴 겸, 우스개 이야기 하나를 꺼내었다. 요즘 나돌아 다니는 우스개 이야기의 전형이다. 이야기의 요지는 이러하다. 어떤 사나이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왔더란다. 사나이와 의사가 나눈 대화는 이러했다. “의사 선생님, 침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군가가 침대 밑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침대 밑으로 들어가면 누군가가 침대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거 참 미칠 지경입니다!” “2년 동안 매주 세 번씩 나한테 와서 치료받아야겠군요.” “치료비는 얼만데요?” “한 번 올 때마다 5만원이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간 사나이는 그 후 병원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6개월 후 의사는 그 사나이를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쳤다. “왜 병원에 다시 오지를 않았죠?” “한 번에 5만원씩 들여가면서 어떻게 갑니까? 우리 동네 목공소 아저씨가 단돈 만원에 고쳐준 걸요.” “아니, 어떻게 고쳐주었다는 말이요?” “간단하던데요. 침대 다리를 없애버리라더군요.”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웃었다. 과장된 황당함이 웃음을 불러오기에 충분했고, 정신적 고통을 물리적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발상이 재미있었다. 생각을 좀 깊게 해 보자면,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잘난 체하는 모습에 한방을 먹이는 듯한 풍자가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그렇게 느껴도 그만, 그렇게 느끼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이야기를 지어내자니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굳이 의미를 규정하거나 해석을 통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웃자고 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 중에 의사 친구 한 사람이 정색을 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야기가 근거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우스개 이야기라도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이야기라야지, 엉터리없다는 것이었다. 침대 위와 침대 밑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는 불안의식을 치유하는 데 그리 많은 치료비가 든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환자의 증세가 침대 다리 자르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냐고 다소 흥분하여 따지고 들었다. 아마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그리고는 기어이 이런 말 한 마디를 내뱉으며 말문을 닫았다. “비싼 밥 먹고 쓸데없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말아라.” 웃자고 한 이야기인데 상대가 불쑥 화를 내면 그것처럼 민망한 것도 없다. 모든 이야기를 사실에 근거하여 시시비비를 굳이 가리기로 친다면, 이 이야기는 결함투성이의 이야기이다. 처음 이야기를 한 쪽에서 민망하기는 하지만 사태를 수습하려고 들었다. ‘어디 이런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다고 했느냐. 웃자고 만들어낸 이야기 아니냐.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말도 못하느냐.’ 이런 식으로 화를 낸 친구에게 이해를 구하였다. 그랬더니 화를 낸 친구는 누그러지기는커녕 더 날카로워졌다. ‘말이 그렇다는 거라고? 말도 못하느냐고?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해야 될 말이 따로 있지, 그 따위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달리 방도가 없다. 이야기를 꺼낸 쪽에서 거두절미하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한다. 네 마음을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물론 그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회복되기 어렵다. 머쓱해지는 분위기, 어딘가 불편하고 답답한 소통 단절의 씁쓸한 분위기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쉽사리 사과하지 않는다. 기왕에 분위기는 망가지게 된 것. 오히려 역공을 퍼붓는다. 여기에는 물론 상대가 너그럽게 들어주지 못한 데 대한 서운함이 깔려 있는 것인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역공에 나서는 것이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속아지가 밴댕이 속 같이 좁아 터져 가지고서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들이대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서해 바다에 가서 밴댕이하고나 놀아라.’ 이렇듯 거침없이 야유성 공세를 취한다. 이쯤 되면 싸움은 점입가경에 드는 것이고, 양쪽 다 잘한 놈도 없고 못한 놈도 없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형세를 연출하게 된다. 말이란 엄격하고 정확하기도 해야 하지만 그것이 말의 전부는 아니다. 그 엄격과 정확에 집착할수록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 소통의 본질을 놓쳐 가면서까지 부스러기 말의 정확성에 매몰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말이 말 그 자체로 완벽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영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말이란 기껏해야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분과 사람의 뜻과 사람의 사는 모습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도 아주 불충분하게 드러내는 도구이다. 사람들 사이를 원활하게 하는 말이라면 그것이 곧 사람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반영된 말이다. 좋은 소통은 ‘뜻·마음’들 사이에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도 못해 보나.’ 이 말은 실없이 해 본 말을 상대가 무어라 이의를 달 때, 슬그머니 변명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현실을 초극하려는 인간의 열정과 상상력이 매몰찬 현실과 늘 맞서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열정과 상상력은 언어를 통하여 비로소 소통된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우의(寓意)로서 살아나 인간의 지혜를 밝혀 나아가게 한다. 젊은 날 내 존재와 영혼 모두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냈던 절절한 연애편지의 언어들은 어떠했는가. ‘하늘에서 별을 따다 그대에게 드리리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그대에게 드리리다. 나와 결혼해 주면 평생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도록 하리다’등등. 이런 약속의 언어들이야말로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의 영역에 속하는 언어들이다. 이렇게 받은 사랑의 메시지들을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공증받아 두고, 훗날 약속 이행을 왜 않느냐고 다그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아직 듣지 못하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하는 것은 알면서도 즐겁고 감격스럽게 그것을 받아 준 것이다. 일제 억압과 수난의 현실을 살며, 광복의 그 날을 절절한 마음으로 소망하던 그 열정과 해방의 상상력을 표출한 시 가운데 우리는 심훈의 그 날이 오면을 익히 알고 있다. 시인은 광복에 대한 열정어린 감격을 특유의 시적 상상력으로 보여 준다. 그 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그는 어떻게 하겠다고 했던가.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겠다고 한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으니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겠는가고 말한다. 그 뿐인가. 그날이 오면 드는 칼로 자기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겠다고 말한다. 심훈 선생은 아깝게도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만약 선생께서 광복을 보셨다면, 과연 종로 인경을 울리려다 두개골이 깨어지고, 칼로 살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치고 다녔을까. 이런 질문이야말로 우문이다. 숨어 있는 열정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사실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과 말의 작용을 크게 보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우문이다. 그러고 보니 문학이야말로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의 방식으로 인간의 숨은 열정과 상상력을 드러내며, 말의 감동적 효용을 실현하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현재의 사실 세계를 넘어서려는 ‘열정과 상상력의 말’을 창공 높이 자유롭게 쏘아 올리려 한다. 인간에게 말이란 그러한 것이다. 그걸 두고 ‘비싼 밥 먹고 헛소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의 본질 기능 하나를 거세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니 인간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도 너무 모자란다.
“카라반[隊商]의 낙타몰이 무함마드, 하디자를 만나지 못하다.” 사실은 무함마드가 하디자를 만나 결혼한다. 이슬람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알라의 섭리로 설명하지만 무함마드가 카라반의 주인 하디자와 결혼하지 못했어도 이슬람교가 개창되었을까?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까지, 예멘에서 체첸에 이르기까지 60여 국가의 13억 5천여 신도(이슬람 측은 17억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약 67억 세계인구의 1/5 내지 1/4에 달한다. 27개국으로 늘어난 EU 전체의 인구가 5억에 훨씬 못 미친다지만 이슬람교의 교세를 웅변해주는 수치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예수와 달리 탄생과 관련해서도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특히 40세 이전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는 사후에 기록된 것이어서 자세하지 않고 신빙성도 그리 크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무함마드는 570년경에 메카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6세에 부모를 잃어 조부의 보살핌을 받던 중 8세에 조부도 타계해 백부의 보호아래 자랐다. 15년 수행 끝에 알라의 계시 받아 성장한 후에는 부유하지만 두 차례 결혼해 수명의 자녀를 둔 미망인 하디자 소유의 대상(隊商)에서 낙타몰이로 일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디자의 눈에 띄어 신임을 받은 그는 결국 25세에 40세의 그녀와 결혼했고, 결혼 후 곧 메카 부근 동굴에 들어가 수도했다. 아내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샤를 비롯해 수명의 아내를 두었던 무함마드는 그러나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여인을 취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딸 파티마만 장성했다. 무함마드는 한 동굴에서 15년여 동안 명상을 하던 중 610년경에 천사 가브리엘(기독교의 수태고지 천사다)의 안내를 받아 천마(天馬)를 타고 예루살렘의 한 바위에 도착, 빛사다리를 타고 승천해 알라(Allah)의 계시를 받고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메카로 귀환했다고 한다. 지금 그 바위 위에는 ‘바위돔모스크’가 서 있다. 그때부터 그는 ‘이슬람(Islam, 복종 - 무슬림 muslim은 복종하는 사람)’을 외치며 알라의 진리를 설파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무함마드라고 처음부터 포교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마법사나 점쟁이로 외면 받았고 부인과 백부마저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는 622년에 메디나로 옮겨(헤지라, 聖遷) 포교에 성공했고 630년에는 메카에 복귀했다. 시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메디나에서 타계했지만(632) 그가 만든 이슬람공동체 ‘움마’를 토대로 성장한 이슬람제국은 100년도 못되어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이 되었다. 이슬람제국은 639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이집트(640)와 튀니지(698)를 아우르고 711년에 지브롤터 해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다. 동쪽으로도 724년경에 인더스 강 유역과 중국 서부지방을 차지하고 카스피 해 연안을 병합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후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에 침공했다. 프랑스 남부 뚜르에서 패해(이겼을 경우 유럽의 한가운데인 프랑스도 이슬람 땅이 되었을 것이다)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후퇴했지만 지중해 연안의 유럽 땅을 유린했다. 5가지 이슬람의 기둥 이행해야 이슬람교는 신도에게 5가지(이슬람의 기둥)의 이행을 요구하는데, 신앙고백·기도·구제·단식·순례다. 이슬람교파 중의 하나인 카와리즈파는 거기에 성전(聖戰)을 더해 6개의 기둥을 지키게 한다. 무슬림은 항상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는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그것은 전장(戰場)에서는 신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장례식에서는 애도의 표시로, 아기가 태어나는 산실에서는 축복의 의미가 된다. 무슬림은 매일 5회 정해진 시간(새벽·정오·일몰 2시간 전·일몰 직후·일몰 두 시간 후)에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그들은 손발과 얼굴을 씻고 신을 벗고 모스크에 들어가 꿇어앉아 메카의 카바신전을 향해 기도한다. 기도시간이 되어 가까이 모스크가 없으면 있는 자리에서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순례는 무슬림의 의무이자 축복이다. 공식순례 때는 전 세계에서 수백만의 무슬림들이 메카의 카바신전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때로는 화재나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지만 그들은 순례 중에 죽는 것을 구원받은 것으로 여긴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에는 “알라를 위해 순례와 소순례의 의무를 다하라 (중략) 병자 또는 머리에 질환이 있는 자는 대신 단식이나 희사를 한다든가, 공양을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무슬림은 또한 매년 일정 기간 먹거나 마시지 않아야 하는데, 금식은 대개 이슬람력 9월(라마단)에 행해지는 공식 금식을 말한다. 금식은 한정된 날수를 지켜야 한다. 단 병자 또는 여행 중인 자는 다른 날에 같은 날수만큼 행해야 한다. 금식 중에는 화를 내거나 아내와 동침하거나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된다. 반면 하루의 금식시간이 끝난 다음에는 원하는 대로 먹고 이슬람율법이 허용하는 행동은 할 수 있다. 마지막은 구제, 곧 종교적 헌납이다. 〈꾸란〉은 예배를 잘 드리고 구제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노예·정신병자·빈자·재산만큼의 빚이 있는 자·미성년자 등을 제하고는 구제활동에 참여해야 해야 한다. 사실 이슬람교에 있어서 구제는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한 방법이었다. 일부다처제를 채택해 미망인과 고아를 돌보게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비롯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늘날은 종교헌금으로 바뀌었지만 일부 아랍국은 구제를 의무화하고 있다. 무슬림은 또한 도박을 해서는 안 되며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고 술도 멀리해야 한다. 〈꾸란〉은 “시체, 피, 돼지고기, 알라 이외의 이름으로 희생되어 타살된 것 등은 너희에 금지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돼지고기와 술을 금한 것은 사막기후와도 연관 있는 듯하다. 〈구약성서〉의 레위기가 돼지고기를 금한 것이나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전도하면서 유대인의 돼지고기 금식을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기독교와 유사한 교리 갖고 있어 이슬람교와 유대·기독교는 일신교리를 비롯해 일부 교리가 유사하고 성지를 공유하는데, 그것도 두 종교가 충돌해온 한 원인이다. 두 종교의 비슷한 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일신론이다. 이슬람교의 알라 또한 유일의 신이고 창조주다. 〈꾸란〉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알라를 찬송할 지어다”고 시작하는 1장 1절을 비롯해 도처에서 알라는 “유일신이고 그 외에 어떠한 신도 없다”고 가르친다. 천지창조 이야기도 유사하다. 〈꾸란〉은 “그대들의 신은 하늘과 땅을 6일간에 만드시고(중략) 만사를 다스리시는 신이시다”고 말한다. 이슬람교에서도 낙원에서의 추방 이야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알라는 아담에게 아내와 더불어 낙원에 살며 마음대로 먹되 특정한 나무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이행하지 않고 불의를 범했다는 것이다. 〈꾸란〉의 출애굽 이야기도 두 종교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포함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야기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꾸란〉에는 모세 외에도 아담, 아브라함, 다윗, 세례 요한, 예수, 마리아 등 신·구약성서의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무함마드도 인간의 조상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이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올바르고 의로운 자로 탄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서의 예수는 한 사도일 뿐이다. 〈꾸란〉에는 “우리는 많은 사도의 뒤를 이어 또 사도를 파견하고,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보내기에 이르렀다”와 “알라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아담의 경우와 같다”는 구절이 나온다. 성모 마리아 또한 알라의 은총을 받아 예수를 잉태하고 순산했으며, 예수는 알라의 은총을 받아 장님과 문둥이를 고쳤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알라의 사도로서의 메시아지만 예수를 메시아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름은 메시아, 마리아의 자식 예수, 그 분은 현세에 있어서나 내세에 있어서 고귀한 분이시며 알라 가까이 계신다”느니 “구세주라고 하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단지 알라의 사도일 뿐이다”고 말한다. 〈꾸란〉은 또한 신·구약 성경과 얽혀 있다. 이슬람교에 따르면 알라가 인간에게 준 거룩한 책은 〈꾸란〉과 성경을 포함해 104권인데, 아담에게 10권, 아브라함에게 10권, 모세에게 5권, 다윗에게 시편, 예수에게 복음서, 무함마드에게 〈꾸란〉을 주었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신이 아담과 아브라함에게 준 책은 모두 분실되었으되 그중 무슬림이 알아야 할 것은 〈꾸란〉에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그뿐 아니라 무슬림들은 유대·기독교도가 알라의 거룩한 책들을 변조시켰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신·구약성경은 변조되어 진리와 함께 오류도 섞여있으므로 성경과 반대되는 〈꾸란〉의 내용을 따르라고 한다. 무함마드에 의하면 〈꾸란〉은 이전 가르침의 효력을 상실시켜 바로잡은 마지막 계시므로 신·구약 성서의 완성판이다. 〈꾸란〉의 부활이야기도 두 종교의 관계를 짐작케 하지만 영체(靈體) 영생을 가르치는 기독교와는 다르다. 이슬람교도는 내세를 육신으로 살게 된다. 즉, 낙원의 행복은 육체적인 것이고 지옥의 형벌은 곧 육체적 고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부활에서는 몸이 일어나서 영혼과 결합한다. 선업(善業)으로 구원받아 부활하는 날 썩지 않고 보존되는 응치등뼈에서 나머지 뼈들이 자라난다고 한다. 이슬람제국의 일등공신 하디자 무함마드가 하디자와 결혼할 수 없었더라면 과연 이슬람교가 존재할까? 대상의 일원에 지나지 않던 무함마드가 어떻게 천국의 진리를 터득해 설파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는 글을 몰랐다고 하며 설사 알았어도 당시 중동에는 아랍어로 된 종교·철학 서적이 없었다. 대상으로 시리아 등 여러 곳을 여행해 견문을 넓혔겠지만(그래서 유대·기독교의 교리에 익숙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장기간 수도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득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디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무함마드는 15년간의 수도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함마드가 하디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슬람교와 이슬람제국 또한 없었을 것이다. 이슬람교와 이슬람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중동과 동지중해 세계의 역사,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왔을까? 이슬람교 아닌 다른 종교가 중동에서 기독교와 경쟁하고 대립해왔을까? 그래도 십자군전쟁은 일어났을까? 또한 중동 역시 상이한 종교·인종·문명이 유혈대결을 벌이는 땅으로 되어 있을까?
도서관옆에 아치형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수세미와 조롱박을 심었답니다. 벌써 수세미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롱박이 보이지 않는다고요? 조롱박은 이번 장마에 그만 다 썩고 말았답니다. 일부 수세미줄기는 비닐하우스를 빠져나와 하우스 근처 은행나무를 휘감고 있습니다. 다행히 감나무 옆의 조롱박은 아직 건강합니다. 언뜻 보면 호박꽃 같은에 실은 수세미 꽃이예요. 진분홍 나팔꽃은 이미 시들어가고 있더군요. 감나무에는 감과 조롱박, 그리고수세미가 사이좋게 동거를 하고 있습니다. 목백일홍도 어느덧 끝물로 치닫고 있더군요. 도서관 정원에서 바라본 교정의 초가을풍경입니다. 벌써 낙엽이 떨어집니다. 날씨가 선선해지자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졌습니다. 본관 건물 뒤의 맥문동은 자주색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새파랗던 잔디가 오늘 보니 누런 가을색을 띠기 시작하네요.
2009학년도 대학별 전형 시행계획은 대학별로 2008년 2월말까지 대교협에 제출되고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심의를 거쳐 2008년 3월말 발표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9학년도부터 수험생들의 안정적 수험 준비를 위해 대학별 전형계획을 전년보다 이르게 발표토록 하는 내용을 포함한 2009학년도 대학입학전형 기본계획을 31일 확정, 발표했다. 2009학년도 대학입학전형 기본계획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전문은 교육부 홈페이지(www.moe.go.kr) 정보교실-정보자료실-대학교육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전형 일정 및 변경 사항 = 기본계획에 따르면 전형유형과 내신 등 전형요소별 반영비율, 기본점수, 반영방법 등을 포함한 2009학년도 대학별 전형시행계획은 내년 2월말까지 대교협에 제출토록 하고 3월말까지 발표토록 했다. 교육부는 당초 2009학년도 대학별 전형계획을 내년 1월말까지 제출토록 요구했으나 대학측이 '2008학년도 전형내용을 분석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제출 시기를 늦춰달라고 요청, 한달 가량 미뤄졌다. 2010학년도부터는 대입전형 기본계획이 매 입학연도 개시 1년 9개월전(전전년도 5월말)으로 앞당겨 발표되고 대학별 전형계획은 1년 6개월전(전전년도 8월말) 발표토록 돼 있다. 이에 따라 2010학년도 대학별 전형계획은 내년 8월말 발표될 예정이다. 2009학년도 수학능력시험은 2008년 11월 13일 실시되며 수능 성적은 2008년 12월 10일 통지된다. 수시 1학기 모집은 2008년 7월 14일~8월 31일, 수시 2학기 모집은 2008년 9월 8일~12월 14일, 정시 모집은 2008년 12월 18일~2009년 2월 15일 모집군별로 실시된다. 추가 모집은 2009년 2월 17일~23일이다. 전문대는 수시 모집까지의 전형 일정이 4년제 대학과 동일하나 정시 모집에 있어 군별 구분이 없으며 동기간내 대학의 장이 원서접수와 합격자 발표, 등록 등을 자율적으로 정해 실시할 수 있다. 3월초까지 실시하던 추가 모집 전형 일정을 앞당겨 2월말(2.17~28)까지 전형을 완료토록 함으로써 3월 1일부터 모든 대학이 신학기를 정상적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2007학년도의 경우 3월 9일까지 전형을 실시, 3월 신학기 개시 후 타 학교로 신입생들이 이동하는 등 일부 학사 일정에 혼란이 빚어졌다. ◇ 전형 요소 = 2008년 대입제도 개선안 취지에 따라 학생부의 반영 비율 및 반영 방법(등급간 점수 설정 등)을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결정토록 한다. 외국의 고교 졸업시험 및 대학입학 전형자료는 해당 국가에서 고교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한 학생에 한해서만 활용이 가능하다. 고등교육법 제23조에 따른 대학과목 선이수제 이수 여부 및 결과는 당초 입법 취지에 근거, 대학에 입학한뒤 학점 인정 자료로만 활용할 수 있다. 특목고 졸업자들이 동일계 특별전형 이외의 전형에 응시할 때 비교내신제 적용을 금지한다는 규정이 명시됐다. 기본계획에 '동일계 특별전형 이외의 전형에서는 특목고 졸업예정자 또는 졸업자에게 비교내신 적용을 금지한다'고 명문화됐다. 비교내신제는 수능성적에 연동해 내신 성적을 매기는 제도로 일부 대학들이 검정고시 출신 학생이나 재수ㆍ삼수생, 내신이 불리한 특목고생들에게 적용했으나 특목고에 대한 특혜라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2009학년도부터 기존의 정원 제한이 있는 정원외 특별전형을 고쳐 저소득층 등에도 특별전형 자격을 부여하는 기회균등할당제를 도입하기 위해 올해 하반기 관련 법령을 개정할 예정이다. ◇ 대입전형 기본 방향 = 논술외 필답고사(본고사),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등 3불 정책은 고교 교육의 정상화, 합리적인 학생선발의 최소 원칙으로서 계속 유지된다. 정부는 대학이 학교생활기록부 반영비율 및 반영방법 등을 통해 학교교육 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행정ㆍ재정적으로 지원한다고 밝혔다. 대학이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운영의 정상화를 도모하기 위해 학교 교육의 과정과 결과를 중시하고 대학 자율화ㆍ특성화와 연계, 전형을 다양화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고교 교육의 중심축을 '학교밖'에서 '학교안'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시도별로 들쭉날쭉하던 보상금이 전국적으로 통일되고, 등하교 및 쉬는 시간에 발생한 학교안전사고도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그동안 사고를 당해도 보상금을 받을 수 없었던 교직원도 혜택을 받는다. 한국교총이 지난 20년 동안 주장하고 교육부와의 단체 교섭을 통해 수차례 도입키로 합의해 지난 1월 제정된 학교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이달부터 시행됐다. 이에 따라 교원들은 학교 안전사고에 대한 정신적․경제적 부담이 줄어들고 학부모들도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됐다. 법 시행으로 보상 받을 수 있는 안전사고의 범위가 학교 내 사고에서 등, 하교 사고로까지 확대됐다. 교육활동 시간을 통상적인 경로 및 방법에 의한 등하교 시간, 휴식 시간 및 교육활동 전후의 학교 체류 시간, 학교장의 지시에 따라 학교에 있는 시간 등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공제 급여의 보상 범위가 현재 요양급여, 장해 급여, 유족 급여에서 간병급여, 장의비로까지 확대 됐고, 전국적으로 통일된 공제급여 기준이 제시돼 시도간 보상금 차이에 따른 논란의 소지가 없어졌다. 임의 가입 대상 기관이던 유치원과 평생교육 시설이 학교안전공제회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고, 학생은 물론 교직원과 교육활동 참여자도 안전사고 발생 시 공제 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가해자가 있을 경우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지만 학생 및 교직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에 의한 안전사고라도 우선 치료․보상하고 후에 사고를 일으킨 자 또는 보호자 등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강화했다. 학교장에게 소방시설이나 화재 대피 시설, 실험실습실, 체육시설 등에 대한 안전 여부 및 청결 상태 등을 점검토록 해, 안전사고 발생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했다. 교총의 박우식 교권차장은 “학교안전사고보상법 시행으로 학생과 선생님들이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교육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돼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는 “시행령은 교총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으나, 학교안전사고 발생 시 교원의 배상 책임여부에 대해민사소송이 제기될 경우 그 대책이 미흡하며 향후 공제회 기금의 고갈과 이에 따른 기금 확보 방안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학교 교정에 핀 연꽃이랍니다. 엊그제부터 몽오리가 벌기 시작하더니 오늘 드디어 만개했답니다. 썩은 물일수록 더욱 순결한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연꽃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시죠. 유독,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고, 가운데는 통하고 밖은 곧으며, 넝쿨도 없고 가지도 없으며, 향기는 멀리 가면서 더욱 맑아지고, 물 가운데에 꼿꼿하고 깨끗이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다. - 주렴계의 애련설 전문 - 연꽃 향기에 취한 벌이 사람이 다가서는 줄도 모른 채 열심히 꿀을 빨고 있네요.
오늘은 어머니가 청주 효성병원에 입원한 지 44일째 되는 날이다. 어려운 수술을 잘 이겨내고 일반병실에서 재활의 꿈을 키우다 갑자기 폐렴 등의 합병증이 발생해 중환자실로 옮긴 지도 열흘이 넘는다. 하루에 두 번 30분씩 주어지는 면회시간에만 환자를 볼 수 있는 게 중환자실이다. 면회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어 썰렁했던 복도가 비좁고, 환자가 생사를 넘나드는 가족들의 표정에서 긴장감마저 감도는 게 중환자실 앞 풍경이다. 면회복도 한집에 두 벌씩만 배당돼 친척들이라도 여럿 오는 날은 순서를 정해 부지런히 교대를 해야 한다.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누워있는 환자와 달리 밖의 가족들에게는 피 말리는 시간이다. 전화벨만 들려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로 긴장한다. 평소와 다른 일이 생겨도 환자와 연관 지으며 그게 무슨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한다. 오죽하면 시계가 멈춘 것까지 신경을 쓴다. 결혼할 때 고향의 친구들이 사준 괘종시계가 어머님 방에 걸려있다. 26년이나 되어 낡고 볼품이 없건만 태엽만 감아주면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며 제 역할을 다했는데,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고부터 말썽을 부린다. 아침에 일어나면 시계에서 '째깍째깍' 소리가 나도록 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식사도 못 하시고 하루종일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면서 혼자 헛소리를 하는 시간이 많다. 헛소리라고 다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안돼, 꼭 움켜쥐고 있어, 줄려고 하지 마"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어머님이 일반병실에 있을 때 자주 들었던 말을 생각해보면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자식이 왜 필요한 거여. 이런 때 써먹으라고 있는 거지." "자식에게 무슨 효도를 바래. 속 안 썩이면 다행이지."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자식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비슷하다. 친척들이 부모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낯짝 자주 보이지 않는 자식을 욕하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집으로 고지서 날려 보내고 돈 적게 준다고 대드는 자식도 많다면서 그나마 다행이란다. 결국 자식은 애물단지라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어머님은 척추관협착증으로 다리가 마비돼 수술을 한 분이라 걷는 게 소원이었다. "간호사들하고 걷는 연습 했어. 매일 걸어다니는데 너는 못 봤니?" 현실에서 못 이룬 소원을 꿈속에서나마 이루고 있는 것인지 만날 때마다 걷는 얘기를 하셔 안타깝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누가 옆에서 도와줘야 걸어보지…"라고 말할 때는 안쓰러워 눈물이 핑 돈다. 뜬금없이 내뱉는 엉뚱한 소리도 많다. 날을 잡아 똑같이 목욕을 했더니 시원하다며 좋아하기도 하고, 매일 맨발로 걸어다녀 미안한데 왜 신발을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원망도 하고,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괴롭혀 못살겠다고 하소연도 하신다.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환자가 하는 말에 신경이 곤두서기도 한다. 돌아가신지 오래된 분의 이름을 기억해내며 "금방 만나기로 했어. 너 없어도 편히 잘 수 있으니 앞으로는 오지 마"라고 말할 때는 금방 돌아가시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헛소리를 하시더라도 내 어머니이고,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어머니를 보고 나야 마음이 놓여 면회시간을 기다린다. 짧은 시간이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숨결을 들으면서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어쩌면 이런 시간이나마 길게 주어지지 않은 것 같아 조바심이 나는데 개학을 하고 보니 오전 9시부터 30분간 이뤄지는 아침 면회시간이 걸림돌이었다. 메마른 것 같아도 인정이 통하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사정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며칠째 아침 6시 30분에 어머님을 뵙는다. 어머님이 훌훌 털고 일어나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같이하는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인지….
웬만큼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호랑이 담배 먹는다던 옛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긴긴 겨울밤, 아랫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할머니나 누나들이 구수한 입담을 풀며 ‘옛날에 옛날에’ 하면 어린 눈망울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꾼의 얼굴과 입을 똥그랗게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아이들한테 옛날이야기란 그저 흘러간 옛이야기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아주 어릴 때 엄마들이 들려주는 동화들도 우리의 이야기보단 서양의 이야기들이 더 많다. 더구나 구수한 할머니의 입담은 듣기 어렵다. 이러한 때 할아버지의 구수한 목소리로 옛날이야기 시리즈를 내놓은 시인이 있다. 올해 예순일곱의 나이가 된 최하림 시인이다. 이번에 시인이 내놓은 책은 와 이다. 제 17권인 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자신의 가난한 운명을 어떻게 바꿔볼까 해서 사천 서역국으로 가서 부처님을 만나 복을 빌어 가는 정 도령 이야기인 와 박복한 여인이 덕을 쌓은 덕으로 새 원님이 저승에 갔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박복덕 여인의 쌀 삼백 석을 갚는다는 이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그 사람의 사주는 못 속인다.’이란 말이 있다. 사주란 태어난 해, 태어난 날, 태어난 시를 말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주가 좋으려면 태어난 해와 날보다 시(時)가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 두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 도령과 박복덕 여인은 시가 좋지 않아 운명적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야기에서 운명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에서 정 도령은 자신의 가난한 운명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사주팔자를 조금이라도 좋게 고쳐주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서천 서역국으로 부처님을 만나러 간다. 정 도령은 서역으로 가는 도중 세 명의 부탁자를 만난다. 첫 번째 만난 여인은 혼인한 지 한 달 만에 남편과 사별한 새댁이다. 새댁은 정도령에게 천생연분의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는 신선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 세 동자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용이 되기 위해 천 년 동안 강에서 살고 있는 이무기다. 정 도령은 자신이 복을 빌어 가는 중에 이들의 소원도 가지고 부처님한테 간다. 그리고 부처님을 만난다. 그러나 부처에게 정 도령은 한 번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소릴 듣지만 세 부탁자의 소원을 이야기한다. 이에 부처는 정 도령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길 해준다. “그 새댁을 만나거든 전해라. 남편이 죽고 나서 처음 만난 남자가 천생연분 신랑감이라고.” “세 동자가 두 관의 금으로 황금 꽃송이를 만들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다면 향기도 뿜고 신선이 될 것이다.”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여의주가 하나면 되지 둘은 필요 없다.” 이 말을 들은 정 도령은 자신의 복은 얻지 못했지만 헛걸음한 것은 아니라며 홀가분하게 돌아오며 세 사람에게 부처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소원을 이룬다. 그럼 이 이야기에서 옛 사람들은 무얼 생각했을까. 바로 욕심이다. 세 동자나 이무기가 신선이 되지 못하고 용이 되지 못한 것은 욕심 때문이다. 그 욕심을 버리자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 도령의 운명은? 당연히 그의 운명도 바뀌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할 그의 운명은 예쁜 새댁을 얻고 잘 살게 된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려는 노력이 태어난 시의 운명은 바꿀 수 없지만 삶의 운명은 바꾼 것이다. 여기엔 그의 욕심 없는 마음과 선량한 심성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을 쌓으면 자신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 그럼 은 어떨까? 여기엔 두 개의 운명이 나온다. 역시 태어난 시가 지지리도 안 좋아 박복하게 살아야 하는 박복덕이란 여인. 그리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이기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 원님이 등장한다. 박복던 여인은 부모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조부모도 열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 열여덟에 서른이 넘은 사내와 결혼을 했지만 일 년 만에 죽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복이 없다고 해서 박복덕이라고도 하고 박복데기라고도 한다. 남편을 잃은 그 여인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영산강 나루터까지 흘러와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 여인은 온갖 잡일을 하며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람들의 슬프거나 기쁘거나 하는 말을 들어준다. 그리고 나중에 주막의 주인이 된다. 주인이 되어서도 그녀는 예전처럼 일한다. 그리고 노자가 떨어진 사람들에겐 노자를 보태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 사이에 그녀는 복과 덕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영암골에 새 원님이 온다. 그런데 부임한 첫날밤에 새 원님은 염라대왕 앞에 끌려간다. 그게 그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저승에 끌려온 원님은 억울한 사정을 염라대왕에게 조리 있게 말을 함으로써 다시 이승에 온다. 대가를 치르고 말이다. 그런데 그 대가가 박복덕 여인이 평생 동안 성실하게 덕을 쌓아 만든 쌀 삼백 석이다. 저승에서 이 쌀 삼백 석을 주고 원님은 이승에 다시 오고 주막을 찾아 여인에게 다시 삼백 석을 갚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자신의 운명에 임하는 자세다. 정 도령이 자신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면, 박복덕 여인은 묵묵히 일하며 사람들에게 덕을 쌓았다. 그리고 자신의 박복한 운명을 한탄하거나 불만스러워 하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성실하게 살아갔다. 그러자 두 사람의 박한 복은 실한 복이 되었다. 결국 운명이란 것은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옛날이야길 보면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엔 힘든 삶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기에 옛날이야기의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언재 들어도, 반복해서 자꾸 들어도 질리지도 않고 재미있는 우리들의 옛날이야기. 그 옛날이야기를 할아버지가 된 한 노시인이 손자들에게 들려주고 이야기하고 있다. 구수한 옛날이야기란 이름으로.
교육 칼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글의 대부분이 부드럽다. 그리고 잔잔하다. 파고가 없기에 밋밋한 느낌마져 준다. 교육계에 관한 많은 사건 사고가 있지만, 그 사건을 기사화해 내기에는 여전히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있는 듯하다. 교육 현장에서 교실을 들여다보아도 학교를 관찰해 보아도 어딘지 옛 교육의 구수한 냄새보다는 고도의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세련미와 자유 발랄한 품격을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속에서 현대판 교육은 지식을 전수하면서 동시에 지식에 메스를 가하여 비판식 토론 교육을 통해 대상에 대한 옳고 그름을 밝혀 나갈 때 학생들의 그릇된 태도도 고쳐지지 않을까? 참다운 비판 교육되살아나야 수업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착각을 할 정도로 학생들이 비판적일 때가 많다. 혹 그래서너무 가혹하게 대하기에 그런가 하여 완화하는 태도를 취하면 학생은 교사를 조롱하려고까지 한다. 학교에 대한 비판이 높아서인가 하여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교사에 대한 불만이 높아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해 본다. 그것도 다른 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니 것 같다. 학생들이 비판적 시각으로 사고가 뻗어가는 것은 어느 하나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불만은 아니다. 이들의 불만을 없게 하려면 그들이 하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된다. 그렇게 될 때는 수업이 수업다운 형태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러면적절한 수업은 무엇이겠는가? 요즘 수업의 적절함은 자는 학생은 자는 학생대로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수업을 이끌어 나갈 때 수업에 대한 불만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길은 아닌 지. 좋은 교사가 되는 길은 좋은 수업을 하는 것이다라는 구호가 인터넷에 유행어처럼 떠돌고 있다. 과연 좋은 수업은 흥미 위주의 수업에 한정되어 있는가? 수업도 학생과 교사가 조화를 이룰 때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학생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될 때 수업은 학생의 의도에 조금만 맞추지 못할 때는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다. 요즘 학생들은 자기에게 잘해주면 불만을 표출하지 않지만, 자기에게 약간의 체벌만 가해도 불만을 표출하곤 한다. 게다가 수업이 어떻고, 인간성이 어떻고 등 교사에 대한 폄하를 예사로 내뱉곤 한다. 학생의 불만이 비합리적이고 교사의 수업이 학생들을 좌우하지 못할 때 진정한 교실 수업은 난맥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을 과감하게 불식시키고, 교육에 대한 옳고 그름을 바르게 강조해 나가기 위해서는 바른 토론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이를 통해 학생들의 그릇된 인성을 바로잡아 나갈 수 있는 참다운 비판식 교육 풍토의 조성이 아쉽다. 더욱 거칠어지는 학생들의 태도에 교사들의 거친 말과 태도는 궁극적으로 거칠게 나아가는 학생이 되도록 하는 결과가 된다. 교실 수업 고소장 수업으로 바로잡아야 요즘 학생들의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학교에서 학생지도 벌점 카드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미 전국의 여러 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그릇된 태도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는 카드는 교사들이 그렇게 많이 애용하고 있지 않다. 그냥 회초리 한 대로 그치고 한 번의 꾸지람으로 넘어가곤 한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 교사의 벌점 카드 사용에 그렇게 조심을 하지 않는다. 교실 수업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을 바로 가려 주는 고소장 수업을 과감하게 도입하여야 한다. 갈수록 거칠어지고 갈수록 자기 제일주의 사고에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행동하는 이들의 자세를 바로잡는 것은 바로 비판식 교육을 통한 주체성 있는 학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아닐까? 현장 교육에 관한 글을 쓰는데 있어서도 좀더 날카로운 글로 오늘의 교육에 과감한 메스를 대는 풍토 조성도 아쉽기만 하다.
송별회장에서친목회장이 전해준 종이상자 하나. 그 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오늘 리포터는송별회에서 감동을 먹었다.상자 속엔 교직원이 정성껏 쓴 엽서 28통이 들어 있었다. 값비싼 그 어느 선물보다 소중한 선물이다. 귀가하여 한 통 한 통 읽어보니 승진축하, 감사, 좋은교장 선생님이 되라는 내용이다.함께 근무하면서 좀 더 친절하게, 인간적으로 대해 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교장·교감의 보람, 바로이런데있지 않을까?
국가청소년위원회가 전국 16개 광역시ㆍ도의회에 청소년의 인권, 공교육의 정상적 운영을 위해 오후10시 이후 학원 심야교습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조례를 개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9월 23일 시행되는 ‘학원의 설립ㆍ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학원법)에는 ‘학교 수업과 학생 건강 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시ㆍ도 조례가 정하는 범위 안에서 학원 교습 시간을 정할 수 있다’고 돼 있다.(한국일보 인터넷판 2007-08-30 19:18 ) 그동안 정부와 교육부에서는 사교육 경감을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해왔고, 여러가지 정책도 내놓았었다. 그만큼 우리사회에서 사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사교육경감을 위한 여러가지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발표된 방과후 학교 발전방안도 사교육경감책의 일환이다. 그럼에도 학원의 심야교습은 관행처럼 이어져왔다. 서울시교육청에서는 밤10시로 학원교습시간을 조정했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다시 11시로 연장하기도 했었다. 이번 국가청소년위원회의 권고는 최소한의 청소년 인권을 보호하고 공교육을 활성화시켜 사교육비를 경감하기 위한 두가지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사교육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학원숙제를 하는가 하면, 학교가 끝나기도 전에 학원갈 걱정을 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청소당번이면서도 다른친구에게 청소를 부탁하거나 그냥 학원으로 가는 학생들도 있다. 학원시간때문에 어쩔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느것이 주인지 학생들은 판단을 하지 못하는 눈치이다. 전국 16개 광역시ㆍ도의회는 국가청소년위원회의호소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리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지는 자녀를 두고있는 모든 학부모들과 일선학교 교사들이 누구보다 잘알고 있다. 중학생들의 경우 학교에서 6-7교시의 수업을 받는다. 방과후에 오후 5시반에서 6시에 시작된 학원교습이 밤 10-11시에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학생들이 이런데, 고등학생의 경우는 어떨지 쉽게 짐작이 간다. 그 다음날도 같은 과정이 계속된다. 최소한 쉴틈을 주어야 한다. 무조건 시간만 많이 갖는다고 실력이 부쩍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공교육을 신뢰할 수 있을만큼 회복시키는 일이다.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될수 있도록 해야한다. 또한 학부모들도 무조건 학생들을 학원으로 내모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집 아이들이 학원에 가기 때문에 우리아이도 보낸다는 식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 최소한 학원에 1-2개월이라도 보내지 말고 실력이 향상되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이런 분위기가 익숙해진다면 학원교습시간은 자연스럽게 밤10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소 시간이 걸린다고 볼때, 이번의 국가청소년위원회의 호소를 결코 쉽게 넘기지 말아야 한다. 다시한번 전국 16개 광역시ㆍ도의회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한다.
한국에서 오신 학교 현장의 선생님들이 자주 질문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일본 교사들의 근무 실태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교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일본의 학교 현장이다. 여름방학중인데 빈 교실이 단번에 떠들썩하게 되었다. 아이치현 코마키시립중학교의 연례「지역 좌담회」r가 7월 28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보호자들과 의견을 교환 하는 장소로서 학교가 독자적으로 연 1회 개최하고 있다. 토요일에 열리는 이유는 아버지들도 참가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금년은 부친 3명을 포함한 보호자 20명이 참가하여. 노다 교장등 교원 10명으로 그룹으로 나누어 대화를 시작했다. 교무 주임인 나가에 교사(48) 그룹에서는 휴대 전화나 인터넷의 사용법이 화제가 되었다. 「아이가 다양한 사이트를 보아, 청구 금액이 5만엔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넷에서 알게 된 동세대의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하므로 말린 적이 있다. 상대가 정말로 동세대인가 잘 모르는데, 간단하게 믿어 버립니다」라고 한 보호자가 털어 놓았다. 나가에 교사는 넷과의 교제하는 방법을 수업에서로 가르친 적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가정에서 어떠한 궁리를 하고 있을까를 물었다. 각 그룹은 서로 이야기한 내용을 모조지에 정리해 발표하여, 좌담회는 정오가 되어 끝났다. 여름은 학생들이 지역에서 보내는 시간이 증가한다. 좌담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는 상점으로부터「아이들이 많이 모여 곤란하다」라고 하는 불평이 학교에 전해졌던 바로 직후다. 여름방학에 보호자와 교원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은 가정의 역할을 재인식하는는 목적도 있다. 직원실로 돌아온 나가에 교사는 9월중 행사나 교원의 출장 예정 등을 일람표로 한「주보」을 PC로 만들기 시작했다. 토요일은 원래 휴무일이므로 귀가해도 괜찮았지만, 완성하고 나서 돌아가기로 했다. 주보 만들기는 교무 주임 일로 학교가 움직이는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작업이다. 「예를 들면, 9월의 운동회는 토요일이므로 다른 날을 휴일로 하는 신고를 사전에 시 교육위원회에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보를 만들면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무주임은 수업외에 주 단위·월단위의 계획 만들기나, 교육위원회에 보고서를 만들어, 교장이나 각 학년의 교사와의 협의 등에 쫓겨 매일 같이 오후 9시, 10시까지 잔업이 계속 된다. 교원중에서 마지막에 귀가하는 날도 많다. 여름방학 기간도 여러가지 서류 만들기는 있지만, 분량은 조금 줄어든다. 그 만큼, 가을에 제출하는 시 교무 주임회용의 발표 원고를 쓰거나 10월로 예정하고 있는 대학에서의 연수에 대비한 전문서로의 사전 학습을 하거나 할 시간에 충당하고 있다. 오전 8시 10분부터 오후 4시 55분까지의 근무시간내에 일이 끝나는 날이 많다. 나가에 교사 개인의 여름방학은 8월 11일부터 20일까지이다. 원래 휴일인 토요일, 일요일을 포함해 10일간 있지만, 이가운데 3일은, 전자 메일의 교환이나 서류 만들기 등을 하기 위해 학교에 나왔다. 가족 여행을 가는 해도 있지만, 금년은 맞벌이의 아내와 형편이 맞지 않아 그냥 보냈다. 교사 개개인이 여름휴가를 결정해도, 그 중 몇 일간을 일에 충당하는 교원은 드물지 않다고 한다. 또, 지역 좌담회 이외에도 특별활동 지도나 축제의 날의 순찰 등으로 휴일이지만 출근을 수반하는 일도 빈번하게 있다. 그렇지만「여름방학은“충전 기간” 같다」라면서 평상시, 귀가가 늦은 만큼 여름은 가족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면서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귀중한 때이기도 하다. 「역시 가족이 모이면 마음이 놓여요」라며 여유를 보였다. 이처럼 평상시에는 함께 식사도못하지만교원의 여름방학은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는 의미가 큰 것인지도 모르다. 참고로 나가에 교사의 여름 방학 일정을 소개한다. <7월> 21, 22일 동아리의 대회, 26일 복지 교육 써포터 연수, 28일 지역 좌담회 ,30, 31일 동아리의 대회 ,<8월> 2일 교무·교무 주임 합동 연수, 3일 정신위생 연수 ,4일 강연회 청강 , 6일 IT활용 연수 ,9일교직원 검진 ,10일 학생 지도 강연회 , 11일~20일 여름휴가(방학) , 23일 학생 등교일 ,27, 28일 직원 연수 여행으로 짜여 있다.
오늘 아침 밝고 희망찬 뉴스를 듣고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게 된다. 우리를 시원하게 하는 뉴스는 다름 아닌 그 동안 억류되었던 인질의 '전원석방'이라는 소식이 바로 그것이다. 오랜만에 가족들의 밝고 기쁜 표정들을 보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와 같이 아침마다 좋은 소식들만 가득 찼으면 좋을 것 같다. 변덕스러운 날씨! 언제 여름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날씨는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예전 같으면 화창한 가을 하늘이 여름으로 힘들어했던 모든 분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했을 것인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가을장마처럼 궂은 날씨가 이어진다. 비 갠 뒤에 맑은 하늘이 아니라 비 뒤에 다시 구름이 일어나고 또 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꼭 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 들면 나타나는 온갖 좋지 않는 증세들. 목 디스크로 상태가 좋지 않아 나타나는 증상이 조금 나았다 싶으면 또 다시 나타나고 반복되는 현상들 앞에 역시 그런 것들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젊음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가 끓는 우리 청소년들을 보라! 그들은 얼마나 생기가 도나?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나? 비가와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제 학생들 중에는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날씨가 시원한 탓인지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 체육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다. 비가 오고 있는데도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른들은 감기 들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생동감 넘치는 청소년들은 보기가 너무 좋다. 너무 아름답다. 너무나 부럽다. 너무나 자랑스럽다. 하늘의 해를 보라. 하늘의 별을 보라. 하늘의 달을 보라. 그들은 얼마나 빛이 나는가? 그들은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가? 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해와 달과 별들처럼 생동감이 넘치고 활기찬 젊은 10대 청소년들을 보면서 교육은 준비라는 생각에 젖게 된다. 젊음의 기회가 계속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음이 평생 있다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 하지만 젊음은 한정이 되어 있다. 생동감도 한정이 되어 있다. 그러니 청소년의 때를 허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때를 허비하면 다시 회복은 불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젊음의 때, 청소년의 때에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오게 마련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뭐니뭐니해도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곧 '준비+기회=성취'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가? 중3의 학생들은 고입의 준비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 중1,2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들도 마찬가지다. 기회를 미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가까이는 몇 개월 앞을 내다봐야 한다. 나아가 1,2년 앞을 내다봐야 한다. 더 나아가 10년 앞을 내다봐야 한다. 그래야 준비가 가능해진다. 그래야 준비가 알차게 된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당장은 고입, 대입을 앞둔 학생들은 실력을 준비해야 한다.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건강을 준비해야 한다. 체력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꿈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준비 없이 10대 청소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준비 없이 10대 젊음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준비 없이 10대 청춘을 소비해서는 안 된다. 준비 없이 10대 아름다움을 잃어서는 안 된다. 준비해야 한다.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기초부터 준비해야 한다. 꾸준히 준비해야 한다. 앞으로 여러분의 꿈은 무엇인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 아닌가? 가까이는 곧 고등학교를 진학할 것인데 잘 준비된 고등학생이 되도록, 예비된 고등학생이 되도록, 실력 있는 고등학생이 되도록 준비해 봄 직하지 않은가? 비오는 날 운동하는 그 젊음의 혈기왕성함을 교실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더워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는데 이제 시원하니 시원할 때 원도 한도 없이 열심히 공부하여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학생들이 되었으면 한다. 교육은 준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