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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엔 버스를 타고 긴 여로(旅路)에 오르는 것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좁은 공간에 갇혀야 하는 그 시간이 지루함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낯선 사람을 옆자리에 앉힌 채 긴 시간을 함께 자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다란 무게감을 지닌 채 다가오는 법이다. 그런 만큼 나이가 웬만큼 든 승객들은 차에 오르며 혼자 앉게 되기를 갈망한다. 김명자 씨도 그런 바람을 가지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가는 곳은 같되 그곳을 향하는 목적은 서로 다른 승객들이 이미 열댓 명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승차권에 기재된 번호를 확인한 뒤 자리에 앉았다. 바랐던 대로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등을 깊숙이 묻었다. 온몸이 물에 잠긴 솜뭉치처럼 무겁고 나른했다. 눈을 감자 심신이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 풀어졌다. 종아리에서 찬바람이 일도록 일분일초를 아끼며 하루 종일 뛰어다닌 노력의 결과가 건더기가 전혀 건져지지 않는 장국처럼 멀겋게 쑤어져 피로감은 더했다.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모두는 보호 시설에마저 조금의 정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운전석 위의 전자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출발 시각이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녀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그렇게 자리가 계속 비어 있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기대는 버스가 출발을 위해 꽁무니를 빼는 순간 깨어졌다. 급하게 승강구를 오른 중년의 남자 하나가 좌석 번호를 훑으며 통로를 거슬러 오더니 그녀의 옆에 털썩 엉덩이를 내렸던 것이다. 수신호를 해주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후진을 한 버스는 차들이 뒤엉킨 차로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긴 장정에 올랐다. 다양한 간판과 다양한 걸음걸이의 행인들을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뒤로 뒤로 밀어내던 버스가 제 속력을 찾은 것은 고속도로로 올라선 뒤였다. 그즈음 먼 산골짜기로부터 먹어 들어오기 시작한 땅거미가 차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차내에도 어둠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운전기사는 단추 크기만 한 머리 위의 실내등을 점등했다. 김명자 씨는 실내등을 비틀어 끈 뒤 의자를 뒤로 눕혔다. 잠이 머리꼭지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리기 시작한 잠이 등을 타고 무릎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PAGE BREAK] “삐리리 삐익 삐리리리리리…….”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의 품속에서 휴대폰의 신호음이 울렸다. 조용한 공간을 산산이 부수면서 쏟아져 나온 그 소리는 막 잠이 들려고 하던 승객들의 신경 모두를 뾰족하게 날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차 내의 분위기가 너무도 조용했던 까닭에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김명자 씨에게도 선명하게 들렸다. “저예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였다. “응. 왜?” 남자는 목소리를 한껏 맞추어 말했다. “지금 어디예요?” “버스 안. 그리 가는 중이야.” “그래, 볼일은 잘 봤어요?” “아니. 요즘 다 그렇잖아. 대리점 사장이 며칠만 봐달라고 싹싹 빌어. 별수 있어? 그러자 했지. 그러나저러나 잘 찾아가는 길이야?” “못 찾겠으니까 전활 했죠. 내가 뭐래요? 요즘 대리점엘 가 봐야 뻔하니까 수금은 다음으로 미루고 이 일을 당신이 직접 처리하라니까……내게 미루더니 이 모양이잖아요? 송 기사 바꿀 테니까 지리 좀 자세히 설명하세요.” 부인을 통해 중요한 물건을 어딘가로 옮기는 모양이었다. 운전기사가 목적지를 잘 찾지 못하는 모양으로 남자의 입을 통해 자세한 그림 지도가 건네지고 있었다. 중소기업이나 유통업을 운영하는 사람쯤으로 여겨졌다. 장기적인 불경기 때문에 전 세계가 불황으로 신음 중이어서 버스 안에서까지 사업에 일일이 간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버스 안이고 지금 모두는 어둠 속에서 영혼을 안주시킬 차비를 마친 상태여서 남자의 전화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뒤척거리는 낌새가 역력했다. 통화가 끝났다. 다시 고요가 찾아 들었다. 김명자 씨도 서둘러 멀리 달아나려는 잠의 꼬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한데, 그 시간 이후, 남자의 전화는 김명자 씨가 진작부터 신흥 공해로 치부했던 버스 안에서의 휴대폰 통화 소음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겠다는 듯 시도 때도 없이 이어졌다.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의 통화가 끝났을 때 뒤쪽 좌석의 어디쯤에선가 젊은 목소리가 참다못해 볼멘소리를 냈다. “사업도 좋지만 남도 좀 생각합시다. 차내에서는 휴대폰을 잠금 상태로 해두는 것이 예의 아닐까요?” 김명자 씨는 중년 남자를 나무라는 젊은 목소리가 반갑기는 했지만 이쪽의 반응이 냉랭하게 나가면 둘 사이에 설전이 벌어져 더욱 시끄러워질 텐데 하고 조금은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남자는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그쪽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뒤 공손하게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급히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아내에게 일을 부탁했는데 길을 찾지 못해 자꾸 묻고 있습니다. 목적지의 근처에 다 갔으니까 곧 찾게 될 겁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정중한 사죄였기에 더는 얘기가 없었다. 전화기는 잠시 후에 또 울었다. “두 갈래 길이에요. 어느 쪽이라고 했죠?” 이제는 중년 남자도 주변이 의식되는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보냈다. “당신도 참. 왜 그렇게 길눈이 어두워? 그러게 내가 뭐랬어? 함께 가자고 할 때마다 그렇게도 싫다 싫다 하더니.” 자연히 전화기 저쪽에서도 짜증이 넘어왔다. “당신이 언제 함께 가자고 했어요? 내가 따라붙는다니까 남의 눈에 뜨일 염려가 있어서 안 된다고 할 땐 언제고?” 부인의 얘기가 맞는 모양으로 남자는 조금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요.” 하지만 여자는 난감한 말투로 하소연하듯 말했다. “여보. 오늘 꼭 가야 해요? 다음에 가면 안 되겠어요?” 부인은 목적지를 찾는 것이 영 자신 없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단호했다. “안 돼.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을 해야지.” “당신은 언제쯤 도착해요?” “한 시간쯤 후에 도착하게 될 거야. 당신이 그곳에 닿는 시각과 거의 같을 테니까 정문 근처에서 기다려. 택시를 타고 바로 쫓아갈게.” [PAGE BREAK] 그 후에도 전화는 승객들의 신경질을 팽팽하게 부풀릴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이제 승객들은 아예 잠을 포기했다. 여기저기에서 실내등이 점등되었고 신문을 펼쳐 드는 소리가 부스럭부스럭 났다. 김명자 씨도 잠을 포기하고 의자를 바로 세웠다. 남자의 전화 내용이 귀를 파고들어서 더욱 괴로웠다. 그런데 가만히 그쪽으로 귓바퀴를 열고 있자니 남자가 그리는 그림지도가 점점 더 익숙한 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왔다. ‘혹시?’ 김명자 씨는 이제 남자와 부인 사이의 통화 내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남자가 설명하는 지리가 점점 더 김명자 씨의 확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이 기사를 대동한 채 움직이는 목적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다 다음의 대화에서 김명자 씨는 결정적인 확신을 가졌다. “짐은 빠짐없이 챙겼지?” “그럼요. 당신이 포장해둔 것 모두를 빠짐없이 챙겼어요.” “인형도?” “그럼요. 그걸 빠뜨리면 어떻게 해요?” “녀석들이 좋아하겠지?” “당신도 참.” “올해는 너무 늦어져서 안 오는 줄 알고 실망들 했을 거야. 다른 때는 이삼일 전에 들렀는데.” “어쨌거나 새해가 오기 전에 들르게 되었으니 됐어요.” “아, 참. 냉장고에 넣어 둔 사골(四骨)은?” “걱정 말아요. 그걸 빠뜨렸다가 당신한테 쫓겨나게요?” 틀림없었다. 김명자 씨는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인데 그지없이 인자한 얼굴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삼십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김명자 씨는 이쯤에서 작전을 개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승객들의 호기심 주머니를 부풀려 시선을 모아야겠기에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저, 여보세요!” 남자의 얼굴이 이쪽으로 돌았다. 기대대로 승객들의 시선도 일제히 둘 쪽으로 모였다. “통화 내용을 엿들으니 나쁜 일을 하시는 분 같군요. 미안하지만 기사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차를 경찰서 앞으로 몰아야겠어요.” 남자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착한 품성을 내보이며 당황해하는 모습 때문에 김명자 씨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럼 뭐예요? 전화기 저쪽 사람이 지금 장물을 운반하는 것 아닌가요?” 당황한 남자는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실은… 남모르게 누군가를 조금 돕고 있습니다. 제가 출장을 다녀오느라 시간이 없어서 아내에게 그 근처까지 선물을 옮겨놓으라고 부탁했는데 아내가 지리를 잘 몰라서 이 소동을 겪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나쁜 일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PAGE BREAK] 이제 증거는 확실해졌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김명자 씨는 벌떡 몸을 일으켜 통로로 나섰다. “여러분! 지금 제가 미제(未濟) 사건 하나를 해결했습니다. 미제 사건 아시지요? 범인을 못 잡아 오리무중으로 남겨진 사건. …… 여기 서 있는 저는 여러분이 가시는 도시의 변두리에 자리한 희망고아원이라는 보호 시설의 원장입니다. 매년 새해가 되기 직전이면 저희 고아원에 온갖 선물을 한 트럭분 살짝 부려놓고 떠나가는 그림자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그 그림자를 찾았습니다. 이 차에 탄 여러분 모두를 2시간 동안이나 끈질기게 괴롭힌 이 분이 바로 그 그림자임이 분명합니다. …… 본의는 아닙니다만 옆자리여서 오고가는 통화 내용을 엿듣다 보니 이 분이 설명하는 지리가 저희 고아원 주변이 틀림없고 전화기 저쪽의 트럭에 실린 내용물이 범인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남자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김명자 씨는 예의 바른 자세로 그림자에게 사실 확인을 부탁했다. “어떠세요? 제 말이 사실 아닌가요?” 그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면서 오른손으로 턱을 한번 쓱 쓸었다. 곤란한 일과 마주치면 무의식중에 행하는 버릇인가 보았다. 결국 그는 방법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숨긴 선행이 선명하게 실체를 드러내자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를 짝짝짝 쳤다. 모두는 귀중한 잠을 도둑맞긴 했지만 밝은 새해가 될 서기(瑞氣)를 느끼며 푸근한 얼굴이 되었다. 그들의 얼굴을 2시간 동안 뒤덮고 있던 짜증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해가 오기 꼭 3시간쯤 전의 일이었다. --------------------------------------------------------------------------- 최창중 청주교대·한국교원대 대학원 졸업을 졸업했다. 현재 충북도교육청 장학사이며 펜클럽한국본부·한국문인협회·한국소설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양문학·자유문학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대산 문화재단 소설부문 창작지원자로 선정됐다. 소설집으로 건배가 있는 삽화, 대설주의보 등이 있다.
미완의 건국, 숨차게 달린 한국교육 35년 서럽고 쓰라린 일본의 식민 지배를 자력으로 벗어나지 못한 대가는, 정작 건국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해야 될 주인이 주도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과 북에 외국 군대가 진주하고, 종국에는 일 민족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섰다. 이 민족에게 드리워진 국토 분단의 멍에는 대한민국 건국 60년이 된 오늘에도 우리에게 좌절과 각오를 교차시키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은 그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건국은 힘들었고, 건국 후에도 위기의 터널을 달려왔다. 건국초기부터 내외의 온갖 방해와 저항이 있었으나 건국 후에는 국제전으로 비화한 6·25 동족상잔으로 취약했던 경제기반 마저 잿더미가 된 피폐한 나라가 되었었다. 전후에도 안보위협을 계속 받았고, 선거부정, 학생유혈봉기, 군부독재, 시민유혈봉기와 같은 내부 진통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러한 대내외의 위기를 극복해왔고, 서구 사회가 200여 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불과 40여 년 만에 이루는 경제적 기적을 낳았다. 민주화도 달성했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하게 OECD 회원국, G20 그룹에 속하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제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 경험은 많은 나라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서 나가는 나라이고, 미래가 있는 나라이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가능성 있는 나라로 움직이고 있는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상호 상승적으로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체제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 국민의 자녀 교육에 대한 무한 투자이다. 우리 교육은 이 두 요인의 상승작용으로 이제 더 이상 팽창할 수 없는 양적 성장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한 마디로 숨 가쁘게 달려온 길이다. 이렇게 한계점에 도달하기까지 양적 성장을 거듭해 오면서, 우리 교육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역할을 해 왔다고 확신한다. 세상을 읽는 기본 능력을 키웠다. 민족정신과 자유민주주의 원리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합리적 사고와 성취동기가 높은 시민들을 길러냈다. 전통사회로부터 잔존했던 저항적, 냉소적, 운명론적 태도들을 긍정적, 합리적 세계관으로 바꾸었다. 이런 교육으로 충원된 시민들에 의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움직이고 있다. 첫째, 우리 교육은 민족자주독립정신과 민족 정체성을 기르는 민족교육에 공헌했다. 해방되자마자 ‘한글 첫걸음’, ‘국사’ 교과서를 우선적으로 발행 보급하여 자주독립 국가 교육으로서 민족 정체성, 민족의 긍지를 확립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우리의 교육은 민족혼을 길러내는 보루였다. 둘째, 민주주의 교육에 공헌했다. 건국 초기에 교육선각자들이 시도했던 민주주의 교육은 지금도 한국교육을 지배하는 중요한 논리이다. 건국 60년 역사적 굴곡에서 있었던 반부패, 반독재 항쟁들과,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화의 수준은 학교가 민주주의 가치와 정신을 일관되게 가르쳐온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셋째, 우수한 기초교육으로 시민의 문해력을 고양했다. 팀스(TIMMS), 피사(PISA) 등 각종 국제학력평가결과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한국의 기초교육은 세계 정상을 달리고 있다. 넷째, 경제발전에 필요한 과학 기술 교육에 공헌했다. 외국의 교육내용과 비등한 수학, 과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학교는 가르쳤다. 다섯째, 교육재정 열세에도 불구하고 내용 압축 정선식 교과서 발행, 다인수 학급 운영 등을 통한 저비용 전략으로 교육기회를 확대했다. 적어도 학교 교육 기회에 관한한 우리 교육은 저비용 고효율의 나라이다. 여섯째, 지속적 교육개선, 또는 개혁 정책으로 교육발전을 위한 노력을 펼쳐왔다. 1980년대 이후로는 국가 주도로 교육개혁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도해 왔고, 나름대로 교육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공헌했다. 반성적 성찰 이러한 긍정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고질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역대 정부의 감축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되지 않는 사교육 시장, 우수 두뇌들의 외국 대학으로의 유학 행렬, 국내 학교에 만족하지 못한 학생들의 조기해외 유학 현실이 보여주듯이 학교가 수요자들에게 만족을 주고 있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다. (1) 고비용 저효율의 부실한 교육 = 가계의 사교육비 규모는 20조원이 넘고, 외국 유학으로 유출되는 국부(國富) 또한 10조원에 달하고 있다. 참고로 2008년도 국가 총 교육 재정 규모는 40조원이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70조원이 된다. 대한민국은 교육에 고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경쟁력은 하위권에 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국내 대학가운데 세계 100대 대학 가운데 포함된 대학은 1개뿐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2008년도 ‘세계 경쟁력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고등교육 경쟁률은 55개국 중 53위를 차지했다. 반면, 고등교육(대학) 이수율은 55개국 중 4위를 차지해 최상위권이었다. 2007년도 29위였던 국가 교육경쟁력은 35위로 6단계나 떨어졌다. 이 경쟁력 지표는 우리 국민의 고비용 부담을 무릅쓴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저급한 것이라는 것과, 특히 최종 단계인 고등교육은 세계에서 바닥권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고비용을 쏟아 붓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육경쟁력이 낮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까지의 분석과 처방이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반드시 교육을 그 본령에 충실하도록 살리겠다는 결연한 결단과 일관된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의 근원을 새롭게 규명하고 거기서 도출되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 학교교육의 이중구조 = 우리 교육이 질적 수준이 낮고, 경쟁력이 없게 된 원인은 복잡한데에 있지 않다. 너무나 관행적으로 오랫동안 후진적 교육형태인 간판주의 교육에 영합하여 교육 제공자들(학교, 대학, 정책당국 등)이 편의위주로 제도 교육을 운영해 오는 동안에 교육의 본질을 무시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교육의 본질이 무시되고 있으므로 해서 야기되는 교육의 문제가 너무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고질적인 문제가 됐다는 것, 그래서 어떤 처방으로도 단기간 해결 가능하지 않으므로 해서 또 다시 당면 정책의제에서 제외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는 데에 문제의 근원이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교육의 본질이란 교육과정에 설정된 교육목표에 충실한 형태로 학습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 교육에는 교육과정은 있으되, 교육과정을 무시하는 학력관리제도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즉, 학교 교육 이중 구조가 존재한다. 하나는 정규 교육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수능과 학교생활기록부로 대표되는 학력관리제도이다. 이 이중구조의 틀에서 후자가 학생들의 대입진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한 후자는 전자를 누르게 되어 있다. 교육과정은 있으되 그것은 죽은 교육과정이 되는 것이고, 학생, 학부모, 교사, 학교를 지배하는 것은 학력관리제도이다. 즉, 수능과 학교생활기록부 방식이 교육과정을 대신하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경쟁력은 모든 학교가 정상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날이 올 때에라야 만 가능하다. 질 높은 교육, 경쟁력 있는 교육은 공동체적 동의에 의해서 설정된 교육과정에 충실하도록 학교의 모든 학습활동이 교육과정 중심으로 정렬되어 있는 교육, 교육목표가 세계 수준에 있는 교육, 목표 달성을 위해 지켜야 할 기준이 서 있고 이를 엄정히 지켜나가는 교육, 즉 교육본질을 살리는 교육이라야 가능하다. 한국 교육의 과제 한국 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지금처럼 경쟁력 없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의 시험준비 교육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교육본령을 살리는 방향으로 바꿀 것인가? 양자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1) 기본으로 돌아가자 = 잘못 채워진 단추는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그것은 교육본질을 왜곡시키는 학력관리제도를 혁파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과제이다. 학력관리는 교육과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학교가 오로지 시험준비기관으로 예속되는 한, 학원과 경쟁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의 진정한 목표가 죽게 되는 것이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진정한 교육목표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작업이 요구된다. 첫째는 교육목표로서 각 교육주체들(학교, 교사, 학생, 행정당국 등)이 이행하고 수행해야 할 교육표준을 엄정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초·중등 학교급별 목표, 교과별 목표를 선언적인 문서가 아니고, 달성해야 할 과제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유명무실하게 관행적으로 문서화 해 온 교육과정을 살아 움직이는 교육의 표준이 되도록 목표중심으로 재조직해야 한다. 학교 생활기록부가 대입선발에서 가장 중요한 전형 자료가 되도록 해, 학생들은 고득점 시험 점수를 위해서 학원을 찾지 않아도 되도록, 학교의 위상을 확립하고 교사의 권위를 세워주어야 한다. 둘째, 수능과 등급제 학교생활기록제도를 교육과정 중심으로 개혁해야 한다. 수능에는 두 가지 대안이 있다. 교육과정 중심 학력시험으로 전환하든가, 아니면 원점수의 효력이 수년간 유지되는 순수한 학업적성검사(SAT)로 개선하는 것이다. 학력시험으로 전환하는 경우, 지금과 같은 학교외적 시험으로 실시하기보다 학교 자체평가가 공정하게 되도록 지원하는 방식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등급제 학교생활기록부는 학생들이 친구들과의 비교 등급이 아니라 교과별 성취목표에 비추어 달성한 성적이 무엇인지를 엄정하게 표기하는 방식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입시 자율화가 이명박 정부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지만, 고등학교 교육에 심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대학본고사, 논술고사와 같은 고등학교 외적 시험을 반대한다. 대학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체 시험을 실시하려고 하기보다, 대학이 원하는 지원자가 갖추어 주기를 바라는 실력이 무엇인지를 공지하여, 학생들이 고교 과정에서 준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상황주도력을 기르자 = 미래 세계를 선도해 갈 수 있는 한국인들을 기르려면 상황주도력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 즉, 어떤 미래 상황에서도 원하는 대안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길러내는 교육이다. 예측 가능한 상황은 물론, 불확실한 인재, 자연 재해 등 어떠한 돌발 상황에서도 주도력을 갖추어 주는 교육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중요하게 의식해야 한다. 상황주도력을 갖추는 교육의 핵심 요소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는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인들이 협력해 지혜를 총동원하여 늘 새롭게 설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의 결과가 교육과정에 목표로 설정되어야 하고, 이것이 교실 수업으로까지 규율할 수 있어야 한다. 차기 교육과정은 우리의 성장 세대들이 세계 선도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계 수준의 목표를 설정하고 반영해야 한다. (3) 한국형 국민역량 자격체계 개발하자 = 교육의 실제는 설정된 교육목표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교육목표는 전 국민에게 우리 사회가 가치 있게 지향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시민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핵심 역량이 무엇이고, 각자의 적성이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진로선택의 영역에 무엇이 있고, 선택한 영역에서의 자격 체계는 무엇이며, 그것을 갖추기 위해서 학습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를 설정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선명하면 할수록 국민의 학습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국민 역량 자격체계는 서구에서는 오래전부터 정착되어 왔다. 영국은 국민의 자격 체계를 크게 학력(學力)과 직업능력으로 대별하여, 각 영역별로 자격 단계를 8단계로 위계화하고, 동일 단계의 자격 간 호환이 가능하도록 한 국민자격체계(National Qualification Framework)를 구축했다. 이 자격체계에는 국민공통 역량으로 핵심기능 여섯 영역을 설정하였는데, 의사소통력, 수리력, 정보력, 문제해결력, 학습력, 협동력의 6개이다. 각 핵심 영역의 기능은 1-6단계 수준으로 위계화하고, 수준별로 학습내용과 성취기준을 명시하고 있다. 경쟁력 있는 교육은 총체적으로 국민의 자질 향상에 직결된 목표설정을 선명하게 설정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작업이 아니다. 이미 있는 학교 교육과정, 각 직업분야별로 설정되어 있는 자격기준들을 하나의 국민적 자격체제 틀로 연계시키고 체계화 시키면 되는 것이다. 국가 인적자원개발 과제의 첫 번째 과제는 국민역량 자격체계를 구축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교육과정 리더십을 세우자 = 우리 교육이고비용 저효율의 저급한 경쟁력에 머무르고 있는 근본문제는 교육과정 리더십 부재에서 생긴 문제이다. 교육과정이 교육의 중심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변적인 것으로 경시한데에서 우리나라 교육의 만병이 생겼다. 어떤 대입제도이던 고등학교가 교육과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고, 그것에 춤추게 하면, 고교 교육을 입시준비기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대입제도의 중심에 교육과정이 있어야 한다. 학교 교육을 교육과정 중심으로 정렬시켜 학교가 본령에 충실하게 하고, 학교에서 생성되는 자료가 가장 중요한 학생들의 정보가 되게 하는 학교 교육 정상화를 도모하는 길 이외에는 교육 경쟁력을 확립하는 일이나 사교육 부담을 줄이는 대안은 없다고 확신한다. 한국 교육의 위기는 교육과정 리더십의 위기이고, 교육 세력들이 이를 무시한 대가에 불과하다. (5) 아픈 역사 치유하는 교육을 생각하자 = 건국 60년은 남북 대치 60년이고, 아픈 역사 60년이다. 민족 고통의 역사, 분열의 역사, 대결의 역사를 화합과 상생으로 가는 역사, 그래서 역사를 치유하는 교육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먼저 제안하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떤 돌발사태가 남북관계에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치유로 가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는 말 : 교육이냐?, 정권이냐? 국가의 진운이 현명하고 책임 있는 시민에 의해서 좌우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덕분에, 그리고 자녀 교육에 아낌없는 투자를 해온 한국 국민의 높은 교육열에 의해서 우리 교육은 그 한계점에 도달할 정도로 양적인 성장을 이룩했고,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을 확립하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래 지식과 기술을 베끼고 암기하는 교육으로 가능했던 산업사회 시대의 이야기이다. 세계화, 정보화가 전면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압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교육구조는 고비용 저효율의 저급한 경쟁력 수준에 머물러 있는, 매우 낙후한 교육으로 판명되고 있다. 이런 교육으로 미래 상황을 주도하는 구성원들을 길러낼 수 없다. 우리 교육은 과감한 방향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슨 굉장한 처방이라고 볼 수도 없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기본으로 돌아가라’이다. 교육 이용자의 입장이 아닌 교육자의 입장에서 교육해법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현실은 기본에서 너무나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 어려워졌고, 그래서 쉽게 손댈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권이냐? 아니면 교육이냐?’를 놓고 한 판의 운명적인 도박을 벌려야 하는 일과 같은 위험을 감행하는 일이다. 막대한 세력들의 이해관계로 고착된 지금의 교육을 뜯어 고치려면, 그것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엄청난 도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과제이며 정권을 초월하여 장기적으로 꾸준히 지속해야할 과제이다. 교육과정 리더십을 살리는 교육은 정권을 걸고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의 힘든 과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저급한 경쟁력에 머물러 있는 이 나라 교육을 살리는 길은 그것 이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본령이 중시되는 학교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그 교육은 일차적으로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들을 크게 완화시킬 것이다. 학교가 즐거운 학습의 공간, 생활공간이 될 것이다. 선생님들의 권위가 신장될 것이다. 사교육이 위축될 것이다. 개성, 창의성이 자연스럽게 신장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국가 교육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다.
사람만이 웃는다 인간만이 웃는다. 자신이 기르는 애완동물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나머지 웃는다는 착시를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동물은 웃음을 표현할 만큼 다양하게 안면근육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안면근육은 80개에 달한다고 한다. 신은 어째서 인간의 얼굴에 그토록 많은 근육을 부여한 것일까?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불을 찾아서는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의 고대 원시사회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그려내면서 웃음이 인간의 문명을 열어젖히는 하나의 계기임을 드러낸다. 웃음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동물과 다른 사랑이란 감정을 자각하게 되고 언어 이전의 인간적인 소통 수단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비극과 쌍을 이루는 희극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착상을 바탕으로, 희극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게 된 과정을 그려낸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역시 웃음이 감정을 표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중세 수도원의 금욕주의적인 종교 철학은 인간의 웃음을 억압하여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웃음이 문명의 마중물이었다는 점,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징표의 하나라는 점은 웃음이 단순하고 즉각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다시 말해 웃음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성적으로 따지고 파고들어 생각하기 이전에 직감과 직관을 동원하여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인 것이다. 어떤 대상을 보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사물을 파악하는 고도의 지능을 전제로 한다. 웃음은 때로 고도의 직관 능력을 발휘한 표현이기도 하고, 때로 대단히 정교한 사고 작용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속 아픈 웃음도 있다 웃음이라고 하면 대개 즐거움, 행복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물론 사람은 일반적으로 기분이 좋을 때 미소, 폭소, 박장대소 같은 웃음으로 감정을 발산하지만, 웃음에는 쓴 웃음(苦笑), 비웃음(嘲笑), 헐뜯는 웃음(非笑) 같은 부정적인 웃음도 엄연히 존재한다. 앤터니 퀸이 열연한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과 분노를 버무린 듯한 웃음을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은 독일 나치즘에 의해 운명을 희롱당한 루마니아의 한 순박한 남자가 전쟁이 끝나고 카메라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강요당하는 순간을 찍은 것이다. 온갖 감정이 뒤범벅된 웃음을 통해 역사의 격랑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개인의 슬픈 운명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명장면이었다. 한편 조소나 비소라는 한자어에 해당하는 비웃음은 남을 조롱하고 헐뜯으며 빈정거리고 업신여기는 웃음을 뜻한다. 요즘 인터넷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악플 문제가 심각한데, 악플 가운데는 비웃음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런 비웃음은 때때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누가 누구를 보고 웃는가 요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은 예전보다 훨씬 ‘웃기기’를 지향하는 것 같다. 그런데 코미디나 개그, 또는 이른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화통하게 웃기는커녕 기분이 상할 때도 적지 않다.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상처를 웃음(이 가져다주는 돈)의 재료로 삼는 작품이 바로 그렇다. 돈 없고 ‘빽’ 없고 못생기고 늙고 뚱뚱한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그런 행위에 대한 일말의 자각조차 없이 오로지 관중을 ‘웃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더할 수 없이 씁쓸한 것이다. 웃음을 사는 사람과 웃음을 유발하는 사람은 처지가 완전히 다르다. 간단하게 말해서 ‘남의 비극 = 나의 웃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의 실수나 실패, 역경 등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나 거리낌 없이 마음껏 우스워할 수 있다는 것은 남의 일을 그저 남의 일로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남과 나를 철저하게 분리하고 남과 내가 맺고 있는 모든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남의 일이라고 웃고만 앉아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공공연하게 웃음거리가 되는 입장에 놓이는 집단은 대개 사회적 약자이기 일쑤다. 종교 관계자, 정치가 같은 사회적 지도자나 지배계급을 웃음거리로 삼았다가는 자칫 경을 칠 수도 있지만, 약자는 그럴 염려가 없기 때문일까. 그래서 좀 덜 약자인 쪽이 자기보다 더 약자인 쪽을 손가락질하고 웃음거리로 삼는 꼴이 되기 쉽다. 풍자와 해학의 전통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는 강자를 웃음의 재료로 삼는 전통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것 같다. 식민지 통치를 거쳐 분단시대의 독재체제를 경험하는 동안 형성된 문화 빈곤의 현상일 것이다. 조선후기의 탈춤, 판소리, 사설시조 등 전통적인 민중문화에 녹아 있는 풍자와 해학에는 봉건사회의 지배계급이 저지르는 부정부패와 도덕적 모순을 질타하는 비판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이런 날카로운 웃음의 전통이 현대의 코미디나 개그에 남김없이 전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중예술도 사회적 약자를 웃음거리로 삼았으니, 주로 육체적인 불구자, 즉 병신이 공격성 어린 웃음의 희생자가 되었다. 고전문학에 나타난 ‘병신’ 형상은 삶의 애환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인물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처럼 민주주의나 평등 같은 사회사상이 보편적 이념으로 자리 잡은 시대에 병신이란 말은 당장 차별이라는 부정적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병신보다는 불구(자)가, 그보다는 장애자라는 말을 선호하게 되었다(현재는 장애인과 장애우라는 두 낱말이 논란의 대상인 듯하다.) 완곡어법의 묘미 몸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불구의 뜻은 병신과 꼭 겹친다. 따라서 불구와 병신은 어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병신이 불구보다 더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어감을 갖게 되었을까. 병신(病身)을 그대로 풀면 병든 몸이고 불구(不具)의 한자를 풀이하면 갖추지 못함인데, 한자어의 뜻에서 보기만 해도 병신보다는 불구가 훨씬 간접적이고 우회적이다. 따라서 두 낱말이 경합하는 과정에서 언중(言衆)은 불구보다는 병신에 불쾌, 경멸, 조롱, 공격성 같은 부정적인 어감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 말에든 완곡어법(euphemism)은 있기 마련이다. 말이란 상대에게 곧장 날아가 꽂히는 것인 까닭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이나 성(性), 또는 신체 부위처럼 금기로 여기는 사안에 대해서 완곡어법을 사용하는데, ‘죽다’만 보더라도 높임말 ‘돌아가시다’는 물론, 세상을 뜨다, 세상을 떠나다, 하늘나라로 올라가다 등 부드러운 표현으로 대체하곤 한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상태를 직설적으로 가리키는 ‘병든 몸’ 대신 뭔가 완전하게 갖추지 못했다는 ‘불구’를 일부러 쓴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즉 말을 신중하게 골라서 쓴다는 의식을 전제로 한다. 불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 예부터 예술작품에는 여러 가지 불구의 인간형이 등장한다. 과연 작가들이 불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가장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심청전의 심봉사가 암시하듯이, 불구는 곧 인간이 감내해야 할 운명적 시련의 원인으로 설정된다. 운명을 극복하든 운명에 순종하든 인간은 불행을 통해 자신의 운명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봉사라는 불구는 딸 심청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동시에 선의 가치를 실현한 대가를 보상해주었던 것이다. 심봉사와 같은 불구가 해피엔딩을 위한 필연적인 동기인 데 비해, 전쟁처럼 인간이 스스로 행한 악행이나 그로 인해 자초한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으로 불구자의 전형을 동원하는 작품도 있다. 특히 전쟁이 낳은 인간형을 그리기 위해 불구를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작 잉여인간으로 알려진 손창섭을 꼽을 수 있다. 손창섭의 작품에는 폐쇄된 공간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불구자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쟁에 연루되어 피해자가 되었으나 어디에서도 보상받지 못한다. 도리어 전쟁이 끝나도 밝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폐쇄된 공간 속에서 동물적으로 사육당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불구는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재앙인 전쟁의 피해를 상징한다. 전쟁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역사적이면서 실존적인 인간의 비극을 그려내는 불구는 바로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측면인 것이다.
실천은 아무나 하나 ? 연초, 어떤 계획들을 세우셨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세우는 신년계획에는 운동, 금연, 다이어트와 같은 건강계획, 이직, 어학능력향상 등의 자기계발, 솔로탈출, 결혼하기, 재테크가 주를 이룬다고 하네요. 저 역시 지난해 다이어리를 펴고 신년계획을 살피니 ‘다이어트, 영어회화, 솔로탈출’ 3가지 항목이 모두 포함되어 있더군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3가지 계획은 전혀 실천하지 못한 허울뿐인 계획이었다는 사실에 탄식할 뿐입니다. 왜 매년 반복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새해에는 다시 계획을 세우는 일에 급급할까요? 실제로 실천할 방법은 없을까요? 계획은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세워라 지인의 상사 중엔 이런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업무 진행을 위한 플로차트 작성 시에는 분 단위까지 계획하여 제출하라’는 지시를 하는 타입. 업무라는 것이 10분 만에 끝날 수 있는 일도 있고, 한 달이 걸려도 원점으로 돌아와 진척되지 않는 일도 발생하는, 다양한 아이템들의 집합체인데, ‘1분’, ‘5분’을 가르는 계획을 작성하기란 너무 융통성 없는 지시였겠지요. 그런데 그분은 “일단 실천하는 데 의미가 있다”며 팀원들을 밀어붙였고, 회의시간 역시 ‘10분’을 넘기지 말자는 룰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엔 이게 과연 실행될 수 있을까 모두들 의심스러워했는데, 몇 달이 흐른 후, 분 단위 계획이 실행되어 돌아가는 모습에 팀원들 모두가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실천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부적으로 수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세우는 ‘운동해야지’, ‘영어 공부해야지’와 같은 구체적이지 않은 계획은, 다짐만 하다가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죠. 연초에 세우는 계획도 분기별/월별/주별로 쪼개어 세우고 ‘이번엔 여기까지, 다음번엔 어디까지’와 같이 진도를 정해놓으면 실행에 옮기는 데 더 많은 동기부여가 된다고 합니다. 귀찮아서, 시간이 없어서, 두려워서, 다른 일이 생겨서라는 그럴듯한 이유들 때문에 다음 날로 미루고 또 미룬 일들을 먼저 적어보는 게 그 첫걸음 아닐까요? 메모하라 ! 그리고 확인하라 ! 실천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또 다른 노력은 ‘메모하는 습관’을 키우는 일입니다. 메모는 목적에 따라 그 기술이 다르게 적용되겠지만, 자신의 계획을 되새기고 확인하는 데는 메모만한 것이 없겠지요. 본인만 알 수 있는 메모 이외에 구체적으로 세운 계획을 책상 앞에 붙여 놓는 행동은 주변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공표가 되기 때문에 더욱 자극이 된다고 합니다. 특히 ‘금연’과 같은 계획을 실천할 때는 더욱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겠죠. 성취지향의 계획만 세우지 말라 ! 계획이라고 하면 뭔가 배우고 취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옮기는 데 더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달 초 가까이 사는 후배에게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후배는 대뜸 심야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후배는 매달 한 가지씩 자신을 위한 이벤트를 계획해 실천하고 있었다네요. 워낙 이른 출근 때문에 밤 시간을 포기하고 사는 자신의 라이프 사이클에 변화를 주어보고자 ‘심야영화보기’ 계획을 세웠답니다. 1년간 그녀가 추진해 온 ‘나만의 이벤트’ 실천 이력을 들어보니, ‘비 오는 날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술 사달라고 하기’, ‘스승의 날 고3 때 담임선생님 찾아뵙기’, ‘편지를 쓰고 우체국 가서 부쳐보기’, ‘지하철 타고 종점까지 가보기’와 같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음직하지만 평소에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왔더군요. 거창한 것만이 계획은 아니죠. 무언가 일상에 변화를 주고 기쁨을 누리는 일. 왠지 실천에 발동이 걸릴 것 같지 않으세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벌써 신년을 맞았네요. 혹시 새해 첫날부터 시작된 신년계획들을 작심삼일로 날려 보내시지는 않으셨나요? 지금은 2009년의 시작 1월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난해를 돌아보고 꼭 했어야 하는 일들 우선순위를 매겨 실행에 돌입해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또 똑같은 계획세우기를 반복하는 실천력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자극이 되시라고 좋은 명언 한 구절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꿈은 날짜와 함께 적어놓으면 목표가 되고, 목표를 잘게 나누면 계획을 되며, 계획이 실행에 옮기면 꿈은 실현되는 것이다.’(그레그 S.레이드)
1 아부(阿附)를 싫어하는 사장님이 있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부하 직원들에게 자기는 아부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고 말하였다. 또 실제로 아부 모드로 접근해오는 부하 직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며 나무라기 일쑤이었다. 그렇게 되자 모두들 사장님 앞에서 환심을 사려고 알랑거리는 말이나 태도를 취하기는커녕, 사장님에게 격려가 될 수 있는 말조차도 꺼내기를 조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모두들 사장님이 기분이 나빠져 있을 때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전전긍긍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기도 했다. 회사 내에 그야말로 아부하는 분위기는 사라져 갔다. 물론 사장님 앞에서는 아부의 ‘아’자조차도 튀어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장님은 달라진 분위기가 되어도 부하 직원들의 변화를 인정해주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냥 계속해서 자기는 아부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는 말만 되뇌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업부장 직위를 가진 부하 직원이 사장님을 모시는 공식·비공식 자리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장님은 아부하는 사람을 정말 싫어하십니다. 아주 강직하신 분입니다.” “사장님께서는 아부하는 근성을 용납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장님 또한 아부의 처세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정직과 성실로 인간관계를 맺고 당당하고 합리적인 자세로 업무에 입하도록 합시다.” 사장님은 흡족해했다. 영업부장의 사장님 예찬론은 널리 퍼져 나갔다. 사장님 자기 스스로 ‘나는 아부를 싫어한다’라고 말하는 모습 대신, 영업부장의 사장님 예찬이 더욱 세련되게 퍼져 갔다. 그만큼 아부를 싫어하는 사장님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사장님이 아부를 싫어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회사원이 알고도 남게 되었다. 심지어는 이 소문이 회사 바깥에로도 알려져서 사장님의 곧고 바른 성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장님의 신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사장님은 매우 흡족해했다. 영업부장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영업부장은 사장님의 독점적 총애를 입었다. 누구보다도 빨리 중역으로 승진하고, 회사 내에서 가장 힘 있는 실세 중의 실세로 통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장님이 아부를 싫어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회사 직원들은 심각한 회의(懷疑)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님은 정말 아부를 싫어하는 분이실까. 사장님이 정말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장님은 아부를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아부를 싫어하는 멋있는 분으로 알려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부를 즐기는 것은 권력 가진 사람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게다가 중독성까지 있어서 좀더 강력한 아부를 원하면서 점점 더 그 쪽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도 바로 아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유혹이 강한 것이 있다. 더구나 그것은 중독되는지도 모르면서 중독되어 가는 것이다. ‘멋있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싶은 욕구’가 바로 그것이다. 2 대범함을 강조하는 교장 선생님이 계셨다. 학교를 위해서 노심초사 일을 많이 하셨다. 교육청에 들어가 학교 시설의 열악함을 호소하고, 새로운 학교 운영 계획을 의욕적이고 창의적으로 지역사회에 제시하고, 유관기관들을 부지런히 설득하여 학교 발전을 획기적으로 실현해나가는 중이었다. 워낙 대범하신 분이어서 이런저런 노력과 공적들을 자기 스스로 말하고 다니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의 활동이 학교 밖에서의 활동들이어서 학교 내의 선생님들도 교장 선생님의 수고와 공(功)을 소상하게 잘 알지는 못했다. 교장 선생님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의당 교장이 할 일이다. 이런 일 정도로 내가 내 수고를 스스로 공치사하고 다니는 것은 소인배나 할 행동이지, 대범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교장 선생님의 노고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학교 발전의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교장 선생님은 대범하게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사정을 잘 모르는 학교 선생님들로서는 교장 선생님의 공을 무심히 지나치게 되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경과하면서 교장 선생님은 섭섭한 마음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수고를 몰라도 너무 몰라주는 교직원들의 마음이 왠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소인배 같은 마음을 스스로 나무랐다. 대범하게 품위를 지켜야 할 내가 내 입으로 학교를 위해 이런 노력도 하고 저런 업적도 쌓고 등등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낯간지러운 일 아니겠는가.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한번 생긴 서운한 마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교장의 이런 헌신적 노력을 그렇게 외면하듯 몰라줄 수 있단 말인가. 젊은 교사들이야 학교 실정을 몰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견 교사 누군가 나서서 “아! 우리 교장 선생님께서 이러이러하게 활동하시고, 저러저러하게 애를 써주신 덕분으로 우리 학교와 구성원들이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 해주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교장 선생님은 서운한 마음이 조금씩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대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찍이 공자님도 말하지 않았던가.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해서 화를 내면 그것은 군자가 아니라 소인배의 행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일로 선생님들께 섭섭하게 생각 말아야지. 그거 뭐 별 대수로운 것도 아닌데. 교장 선생님은 자신이 그렇게 쪼잔하고 쩨쩨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대범하고 멋있는 모습을 유지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의 노고를 몰라주는 교직원들이 미워지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나는 대범한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그냥 대범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욕구, 그래서 멋있는 관리자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내 자신이 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더구나 고약한 것은 나를 몰라주는 사람들에 대해 미움과 짜증의 감정이 날로 커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교장 선생님은 깊이 고민했다. 대범한 사람으로서의 멋을 보이기 위해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내가 내 입으로 교직원들에게 내 노력과 업적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했다. 생각 끝에 교장 선생님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그 이유로서는 현재 상태로 학교 교직원들이 섭섭하고 미워지는 자신의 마음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까짓 거, 내가 좀 대범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떤가. 내가 교직원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지.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마침내 자신의 공적을 스스로 말하기로 했다. 그간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좀 섭섭했다는 말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살짝 끼워 넣었다. 그 대신 대범하고 멋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또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자신의 공치사는 전체 교직원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오늘 딱 한 차례만 하고 이후에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3 교장 선생님의 판단은 지혜로웠다.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저마다 교장 선생님의 수고를 따뜻한 말로써 화답해 주었다. 며칠 동안은 사람들이 교장 선생님을 만나면 인사처럼 교장 선생님의 수고에 감사의 언어를 표현해주었다. 교장 선생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섭섭함과 미움의 감정들이 서서히 씻겨 내려갔다. 다시 평명한 감정의 상태로 돌아와 학교 관리에 유쾌하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교직원들과 밝은 감정과 상쾌한 기분으로 소통을 할 수 있는 마음의 기조를 되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대목에서 사실 교장 선생님과 같은 지혜를 발휘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대범함을 강조하면서, 부하 직원들에 대한 섭섭함과 미움의 감정은 술자리 등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자리에서 여과 없이 거칠게 나타낸다. ‘내가 대범해서 그런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내 참 섭섭했다고, 나쁜 놈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이야기를 꺼내서, 나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는, 매우 고약한 상황을 자초한다. 이야말로 자기모순의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대범함은 대범함대로 상실하면서, 직원들과의 소통은 단절되고,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애초에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집착하여 보여주고자 했던 ‘대범한 멋’이라는 것이 섭섭함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마음의 미움을 없애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교장 선생님은 ‘연출된 멋’에 홀리지 아니하고 ‘우러나는 멋’의 경지를 체득하신 것이다. 아부를 싫어했다는 사장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아부를 배척하는 철학을 실천했다기보다는, 아부를 싫어하는 ‘멋있는 사장님’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는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이미지는 보여줌으로써 멋과 매력을 극대화한다. 그럴듯한 멋진 모습들은 모조리 이미지로 전달되고, 대중매체는 그것을 열심히 매개한다. 이미지가 빚어내는 멋은 순간의 감성으로 전달되고 포착된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의 관계 또한 파편적이고 순간적이다. 그런 탓인지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멋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연출하려 한다. 상업 자본들이 그런 욕구를 끊임없이 부채질한다. 그러니 리더십마저도 ‘멋있어 보이려는 성향’으로 흐른다. 더러는 ‘연출된 멋’에 ‘우러나는 멋’이 쫓기는 형국도 있다. 그러나 연출되는 멋은 일시적으로 매력을 발하지만, 우러나는 멋은 오래 향훈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연출되는 멋’은 ‘우러나는 멋’보다 한 수 아래이다.
오늘날 교육에 관한 일이라면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없다. 주위 사람들 혹은 언론보도 등으로부터 얻은 간접경험을 추가하여 모두가 자칭 교육전문가로 군림한다. 제반 교육문제에 대해서 서슴없이 칼을 들이대고 자신들의 상식과 잣대로 교육을 비판하고 평가를 내린다. 깊이 연구하고 생각해본 적도 없으면서 교육이 무너진다는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당면한 문제들을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 의거해서 예리하게 분석하고 명쾌하게 판단하며 때로는 그럴듯한 처방까지도 내려준다. 사회 어느 분야보다도 교육은 그 특성상 성과나 실적을 가늠하기 어렵다. 교육의 궁극적 결과물은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체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각종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최종 산출물이 될 수 없다. 사회 각 분야로 흩어져 학창시절에 배우고 익힌 실력을 바탕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국민 모두가 교육의 결과이다. 학교 시설물이나 그 속에 있는 교사, 학생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핵심과 본질은 놔둔 채 건물을 얼마나 짓고 기자재를 어떻게 개선하고 어떠한 행사를 몇 번 실시했다는 등의 가시적·외형적·단편적 실적이 점수화, 계량화되어 교육의 결과로 간주되고 있다. 교육에 관한 한 5000만 국민 전체가 당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 모두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너나없이 일가견을 가지고 교육을 논한다. 교육의 영역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중에는 문제가 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교육 자체만 탓할 문제이든가. 일류대학 일류학과를 나오지 않으면 사람 대접을 못 받고 결혼은 물론 취업마저도 어려우니, 누가 학교교육에만 만족하고 가만히 앉아 있겠는가. 어떤 제도, 어떤 여건 속에서도 내 아이만은 옆집 아이를 누르고 세칭 일류대학의 인기학과에 진학을 해야 하는 지상과제 앞에 과연 누가 자유롭고 초연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겉으로는 민주화되고 직업에 대한 귀천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인간교육이 중요하며 순수과학과 기초학문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안정된 직장에서 괄시받지 않고 궁핍하지 않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고3 진로지도를 할 때의 일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적절한 학과를 추천하면, 학부모가 “거기 나와서 밥벌이나 제대로 하겠습니까?”라고 되묻는다. 결국, 특기니, 적성이니 소질 따위는 무시하고 모두가 하나같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인기학과로 눈을 돌릴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고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사람 구실하는 데 문제가 없는 사회가 빨리 와야 한다. 전문기술과 특별한 재주로 사회생활을 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다면, 누가 구태여 대학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모든 것을 걸겠는가. 학벌과 관계없이 기술인과 전문인이 우대받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그리되면 아이들은 능력과 소질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과다한 눈치작전도 없을 것이며 모두가 일류대학 인기학과에 진학하고자 온 몸을 던지는 비극도 사라질 것이다. 교육은 전체 사회현상 중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교육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도 사회라는 큰 틀 속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각종 교육문제를 낳게 한 근본 원인에 대한 치유책도 당연히 범국가적 차원에서 강구해야 한다. 단순히 입시제도만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무나 나서서 함부로 교육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법은 법을 전공한 법조인에게 맡기고 질병은 전문적인 의술을 습득한 의사에게 맡기듯이, 교육도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교사들에게 맡겨라. 일단 맡겼으면 믿음을 갖고 지켜보라.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듯 조급증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절대로 교육을 단기적 안목으로 보지 말라. 적어도 10년 혹은 20년의 시간을 두고 생각하라. 밥은 몇 숟갈만 먹어도 배가 부르지만 몇 달 공부했다고 해서 바로 표가 나는 것이 아니다. 평가라는 장치를 통해 아이들의 머릿속에 든 것을 측정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이것은 다른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서 택한 궁여지책일 뿐 교육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땅은 좁고 자원이 부족하여 믿을 것이라고는 인력자원뿐인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바로 교육의 힘이 아니었던가. 세계가 놀라는 경이적인 경제발전도 교육의 힘이었으며, 지구촌 곳곳을 누비는 대한 건아들의 더 높은 기상도 교육의 결과임을 잊지 말라. 무엇보다도 내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즐거운 가운데 긍지와 보람을 느낄 때 내 아이의 장래도 밝다는 점을 명심하라.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에 대한 험담을 함부로 늘어놓지 말라.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신중하게 이성적으로 접근하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그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학교교육을 신뢰하고 지원할 때, 우리 교육은 제 구실을 다할 것이며 국가의 미래도 보장될 수 있다. 가슴 벅찬 감동과 크나큰 희망 속에 기축년(己丑年) 소의 해가 밝았다. 소는 옛날부터 인간과 친숙하게 지내면서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 했던 든든한 일꾼이었다. 가축이기보다는 오히려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그 유순하고 성실한 천성이 사람들에게 골고루 전파되어, 우리 국민 모두의 심성 또한 여유롭고 부드러워졌으면 좋겠다. 소처럼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다 하는 인재를 길러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교육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교육가족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 힘과 정성을 한데 모아야 한다. 새해에는 교육을 비롯한 국가의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잘 풀려서 온 국민이 환한 얼굴로 함께 활짝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강화산성 안파루(남문). 강화동종. 강화역사관에 있으며 강화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안내해주었다.서울을 지키는 천연 요새 섬을 찾아가는 여정은 이제 강화도로 향합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큰 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모두 축소되어 있다고 할 만큼 유적지가 많은 곳입니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을 비롯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군도 있고 팔만대장경판도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다른 어느 곳보다 외침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외세의 개방 압력에 제일 먼저 노출된 곳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도읍지인 개성과 한양을 대신하는 피난처로 활용되었고요. 서울을 지키기 위한 천연 요새였던 이곳에는 섬 구석구석 군사시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강화도로 떠나는 여행은 이렇게 강화도에 있는 관방시설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외규장각, 되찾아야 할 기록 고려 고종 때입니다. 몽골의 침입에 맞서 항쟁하던 고려는 드디어 개성을 떠나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서기 1232년의 일입니다. 도읍을 옮겼으니 성을 쌓고 궁궐을 지어야 하겠죠? 그 흔적이 강화산성과 고려궁터에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강화도는 39년간 항몽의 근거지였습니다. 강화산성은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초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되었습니다. 동문 망한루, 서문 첨화루, 남문 안파루, 북문 진송루의 4대문을 두었으며 강화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쓰던 강화동종이 현재 강화역사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려궁터라고 하지만 막상 그곳에는 고려시대 궁궐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은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었던 동헌이나 이방청, 도서관이었던 외규장각 건물뿐이죠. 강화유수부 동헌은 조선시대 강화도가, 유수가 다스리는 유수부(留守府)였으며 이곳이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줍니다. 서울을 둘러싼 개성이나 광주, 수원이 강화도와 함께 유수부가 설치된 곳이었죠. 이곳에 있던 외규장각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입니다. 하지만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서적을 약탈하고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더군다나 그때 약탈해간 고서들을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록이요, 되찾아야 하는 기록인 셈입니다. 지난 1993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한국의 고속철도기종으로 TGV를 선정하면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기로 하고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를 반환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하지만 고속철도기종으로 TGV가 낙찰되었건만 아직껏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약탈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동안 오랜 시간이 지났다. 따라서 이제는 프랑스 소유의 문화재가 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억지주장일지 모르겠습니다. 한 포털사이트에서는 외규장각 도서 환수 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고 민간단체에서도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반환운동을 펼치고 있는 중입니다. 〈르몽드〉지에 실린 외규장각 도서 반환과 관련한 광고 문구처럼 외규장각 도서가 반환될 때 대한민국 국민은 휴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전 세계 낯선 땅에 잠들어 있는 7만여 해외 문화재가 하루빨리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정족산성, 살아 있는 기록 외규장각과 달리 정족산성 내 정족산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 등 소중한 자료는 다행히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양헌수 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866년 프랑스는 자국의 선교사를 처형한 것을 구실로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병인양요입니다. 당시 양헌수 장군은 강계포수 300여 명과 함께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이로써 사고(史庫)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삼랑성이라고도 불리는 정족산성을 막 통과해 전등사로 가는 길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를 만날 수 있지요.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실록의 역사는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기록하게 하였으며 전왕시대의 역사를 기록해 실록이라 해서 사고에 보관해왔습니다. 대개 사고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이 함께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1409년부터 1413년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을 시작으로 정종실록 6권,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하고 위 3조실록 각 2부씩을 등사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향후 보존이 염려돼 1445년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보관하게 됩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맙니다. 전주사고의 경우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옮겨 보관했기 때문에 무사했던 것이죠. 1606년(선조 39년) 전주사고본은 서울과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명종대까지의 실록이 더해져 3부가 더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전주사고본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나머지 3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 사고에 보관합니다. 오대산사고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죠. 사고의 관리는 인근의 절에서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후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 등으로 춘추관과 마니산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이 불에 타거나 파손되었으므로 다시 4부의 실록이 작성되어 이곳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에 1부씩 보관합니다. 이 중 오대산에 있던 실록은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버렸고 적상산의 것은 북한에 있습니다. 지금 규장각에 남아 있는 실록은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입니다. 정족산사고본이 남아 있게 된 데는 외규장각 침탈과 같은 문화적 만행을 막아낸 양헌수 부대의 승전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정족산성 내에는 가궐터도 남아 있습니다. 가궐을 짓고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내면 몽골이 물러가고 주위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는 풍수설에 의해 지어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역사의 시곗바늘은 그 예언을 벗어나버렸군요. 어재연 장군기 (인천시립박물관에 원본이 있다).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 강화도를 여행하다 보면 ‘진(鎭)’, ‘보(堡)’, ‘돈대(墩臺)’등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 군사시설들은 수장이 누구냐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지겠습니다만 대략적인 규모를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진은 덕진진, 초지진,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등 모두 다섯 군데가 있었습니다. 강화지역 문화유산을 안내해주시는 분에 의하면 진은 지금으로 치면 대대급 규모를 말한다고 합니다. 보는 광성보, 철곶보, 장곶보, 선두보와 같은 곳으로 모두 일곱 군데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중대급 규모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돈대는 해안가나 고지에 설치된 소규모 군사시설로 그 형태는 원형, 타원형, 네모형 등 다양합니다. 오늘날 초소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몇몇 돈대가 모여 하나의 진이나 보를 이루게 됩니다. 강화도에는 5진 7보 53돈대와 8포대가 해안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1970년대 복원사업을 거쳐 관광지로 알려진 곳은 덕진진, 초지진, 광성보, 용진진, 갑곶돈대 등이 대표적입니다. 광성보의 경우도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미국의 장삿배인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와서 무역할 것을 요구하자 사람들이 그 배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해서 미국은 1871년 군함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는 데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초지진을 거쳐 강화해협으로 들어선 미군함은 광성보 근처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1861년부터 4년간 남북전쟁을 겪으면서 풍부한 전쟁 경험을 갖추었으며 근대화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조선군의 무기는 형편없어서 전쟁은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백병전으로 전개된 전투에서 총지휘관인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 등 조선군은 거의 전멸하고 미군은 3명만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모로 보나 비교가 안 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운 그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용두돈대에 있는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격전지였던 강화도를 핵심적으로 잘 나타낸 말이 아닐까 싶네요. 강화는 한강 어귀에 있어 사면에 물이 둘리고 섬 안에는 산악이 중첩하여 천연적인 요새지다. 역대를 통하여 전란 때에는 피란처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 병화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었기에 이 언덕 저 갯가 풀 한 포기 돌 한 덩이에 역사의 사연이 서리고 끼치지 않은 것이 없다.(이하 생략) 손돌목과 수자기 용두돈대에서 강화해협을 바라보면 물살이 급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는 뱃사공 손돌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광성보 손돌목 고려 고종(혹은 이괄의 난을 피해 강화도로 향했던 조선 인조 때라고도 합니다)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피난을 가는데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강화해협을 건너 강화도로 향하던 배가 점점 여울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피난길에 있던 왕은 손돌을 몽골의 첩자로 의심해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손돌은 이곳의 지형이 원래 그렇다고 했으나 왕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 바가지를 배 앞에 띄워 그 바가지가 가는 대로 따라 가면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손돌이 죽고 난 후 상황은 더 악화되어 결국 사람들은 손돌이 말한 대로 바가지를 띄워 그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가게 되었는데 정말로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답니다. 그 여울목이 손돌목인 것입니다. 손돌목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손돌의 묘가 있습니다. 뱃사공의 말도 믿 지 못해 민초의 억울한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살아남기 위해 섬으로 피신해야 했던 절박한 상황이었겠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전쟁 동안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뒤따랐을지 짐작해봅니다. 이를테면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 머물던 39년간 육지에 살고 있던 민초들의 삶은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또 16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판을 만들면서 외딴 섬에서, 혹은 깊은 산 속에서 후박나무며 자작나무를 채취해 강화도로 옮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민초 들이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까요. 광성보에 있는 쌍충비각은 어재연, 어재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입니다. 참,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가 미군에 의해 약탈당했습니다. 이 기는 누런 삼베 천에 장수를 나타내는 수(帥)자를 새긴 것입니다. 미군에 의해 약탈당한 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가 지난해 국내에 들여와서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입니다. 2010년 개관 예정인 강화역사박물관에서 상설 전시될 예정이랍니다. 우리 문화재이지만 최대 10년간 대여형식으로 가져온 것이라 기간이 끝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군요. 1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자기가 두 번 눈물 흘릴 일이라 하겠습니다. 쌍충비각 근처에 있는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은 미군과 싸우다 순국한 이름 없는 용사들의 묘입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51위를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두었습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못 숙연해집니다. 1월입니다. 제가 새교육에 연재를 시작한 지도 지도 만 5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만날 수 있게 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아울러 그동안의 친분을 빌미(?)로 살짝 제 자랑도 한번 할까 합니다. 전교생 22명의 우리 분교 아이들이 문화재청 스토리텔링 콘테스트에서 당당히 금상을 차지했습니다. 이 기쁨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월에도 강화도에서 만나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