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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올해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일출을 보러가지 못했다. 요즘처럼 해맞이 행사가 없었던 20여 년 전 아이들이 어릴 때 수년 동안 우리가족은 새해맞이 등산으로 한해를 시작하였다. 소백산 줄기의 하나인 월악산 마애불까지 등산을 하고 수안보온천에서 목욕을 한 후 새로운 한해의 계획을 세우며 가족 간에 화합을 다지던 기억이 새롭다. 올해는 나 혼자서 10시에 집을 나서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월악산으로 향했다. 운전을 하고 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이들이 학교 다니며 온가족이 함께 살던 시절이 힘들었지만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주댐을 옆으로 끼고 월악산 송계계곡을 들어서니 이곳에서 2년 반 동안 근무 할 때 출퇴근하던 생각도 나고 새해 첫 외출지로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걸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덕주사 입구에 차를 세우고 혼자서 등산을 하려니 더 춥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계곡인데 앙상한 나뭇가지와 냇물도 얼어붙었으나 그런대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성장하여 우리 곁을 떠난 지금 아이들과 떠들면서 눈싸움을 하면서 사진도 찍으며 걷던 길을 오늘은 혼자서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참 빠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른쪽 산 능선에 가려서 햇볕을 못 받으니 더욱 썰렁하였다. 해맞이 행사장으로 몰려가서인지 등산객도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어 더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로를 한참 오르다보니 햇살이 너무 반가웠다. 손 전화에 메일 도착 음이 울린다. 반가운 사람이다. 답을 안 해 줄 수 가 없어 장갑을 벗고 서툰 손놀림으로 답장을 띄우니 손이 시렸다. 혼자서 외롭게 산행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 듯 메일이 연달아 날아왔다. 새해 첫인사는 다른 날 보다 더 반가운 이유가 무엇일까? 마애불상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가정의 평안과 화목을 비는 마음으로 위대한 자연 월악산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계곡의 맑은 공기로 심호흡을 하였다. 등산로에 얇게 덮인 눈을 밟으니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전에 왔을 때 막내가 넘어졌던 곳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산은 오를 때 보다는 내려올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려왔다. 같이 산행을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아내의 전화도 반가웠다. 혼자서 하는 산행이 더 좋은 점도 많았다. 홀가분한 마음의 여유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어 좋았다. 또한 대자연속에서 새해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 있었으면 TV 채널만 돌리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 내년에도 새해맞이는 등산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몇 년 전에 해맞이 명소인 호미 곳을 갔다가 방이 없어 식당구석에서 새우잠을 자고 일출은 보았다. 인파에 밀려 떡국으로 아침을 때웠지만 새해를 이렇게 어수선하게 맞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懷疑)를 안고 행사장을 빠져나오는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떠들썩하게 새해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일출은 못 보았지만 올해의 새해맞이가 나에겐 더 유익했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자율형사립고, 기숙형공립학교에 기존의 특목고가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순수한 일반계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자칫 3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있다. 현재의 구도에서도 특목고에 진학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기에 이러한 우려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동안의 특목고 진학을 위한 학생들의 경쟁은 물론, 일선 중학교의 경쟁도 보이지 않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평준화를 깨고 경쟁을 유도하여 한단계 발전된 방향으로의 전환은 시대적인 요구사항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적당한 경쟁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경쟁의 과정에서 소외되는 집단이 나와서는 안된다. 아무리 경쟁에 뛰어들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경쟁이 계속된다면 그 경쟁에 계속 합류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그룹이 나오게된다. 이런 포기가 자꾸 늘어난다면 그 경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질 수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입학을 위한 경쟁이 필수적이라고 해도, 서로 상이한 여건하에서의 경쟁의 결과는 누구나 예측이 가능하다. 소외되는 집단이 없도록 경쟁을 유도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어느형태의 고등학교에라도 진학을 해야 본전은 뽑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최후에 기존의 일반계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면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한 형태의 학교라도 진학을 하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3류학생이라는 낙인이 찍힐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뿌리깊어지기 이전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미 낙인이 찍힌 후에는 벋어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완전히 학생선발권에서 자유로운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에 학생들이 대거 몰릴 가능성이 있으며, 학사운영까지도 자율성이 보장된다면 일반계고등학교와의 차이는 더욱더 벌어질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서 진학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이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학생들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기존의 고등학교에도 다른 형태의 고등학교와 경쟁할 수 있는 여건조성을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서야 한다. 최소한 소외된다거나 3류학교의 학생이 아니라는 인식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경쟁여건 조성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많은 차이가 난다면 경쟁 그 자체를 할 수 없게된다. 경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해 버리기 때문이다. 일반인들도 경험하듯이, 업무가 너무나 폭주하면 처리능력을 잃고 감당을 할 수 없게 된다. 경쟁도 마찬가지이다. 적당히 경쟁의 여건이 주어져야지, 너무나 차이나는 여건에서는 경쟁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경쟁을 유도하는 것도 좋지만 나머지 학교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같은 여건에서의 경쟁을 유도하도록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것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11월9일 실시된 2009학년도 중등교사 1차 임용시험의 물리 문항에서 뒤늦게 오류가 발견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정답을 정정하고 22명의 수험생을 추가 합격시키기로 했다. 평가원은 그러나 1차시험 결과가 이미 발표됐고 현재 2차 시험까지 완료된 상황임을 내세워 추가 합격자들을 2010학년도 시험에서 구제할 방침이어서 당사자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2일 "2009학년도 중등 임용시험 1차 물리 37번의 문항을 살펴본 결과 오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정답을 원래 발표한 ④번이 아닌 ②번으로 정정한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문항은 1차원 고전 단진자와 3차원 고전 이원자 분자 한 개의 총 에너지를 묻는 문항으로 평가원은 지난해 11월21일 5개의 '보기' 가운데 ④번을 정답으로 확정, 발표한 바 있다. 평가원은 시험이 끝난 직후부터 13일까지 수험생들로부터 문항 및 정답에 대한 이의신청을 받았으나 물리 37번에 대해서는 단 한건의 이의신청도 없어 원래대로 ④번을 정답으로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의신청 기간이 끝난 뒤 뒤늦게 "물리 37번 문항이 이상하다"는 민원이 접수됐고, 이에 평가원은 출제위원, 검토위원, 관련 전문가 협의회를 열어 정답을 정정하기로 결정했다. 평가원은 정정된 정답을 토대로 재채점한 결과 총 22명이 추가 합격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들에 대해서는 교육청과 협의해 올 연말 실시되는 2010학년도 중등 임용 1차 시험의 합격자로 인정해 주기로 했다. 평가원 관계자는 "2009학년도 시험의 경우 이미 2차 시험까지 끝난 상황이기 때문에 뒤늦게 추가 합격을 인정하기가 어렵다"며 "대신 돌아오는 2010학년도의 1차 시험을 면제해 주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정답 정정으로 이미 합격한 사람이 불합격하게 되는 사례도 있을 수 있으나 합격자를 불합격자로 다시 통보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추가 합격자들은 평가원의 구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2010학년도 시험이 치러질 때까지 1년을 손해보는 셈이어서 향후 법적 소송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공상훈 부장검사)는 주경복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선거자금 불법 지원에 관여한 혐의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교사 40~50명을 형사처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2일 알려졌다. 검찰은 전교조 서울지부가 25개 지회를 통해 주 후보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는데 조직적으로 개입했으며, 주 후보의 선거자금 중 수억 원을 모금하는데 800~900명의 현직 교사들이 관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형사처벌 검토 대상에는 주 후보의 선거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혐의로 구속된 송원재 전교조 서울지부장(구속)과 이을재 조직국장을 비롯해 서울지부 간부 10여명, 서울지부의 각 지회장 25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 후보 선거캠프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이 국장으로부터 선거운동 대가로 금품을 받은 선거운동원 10여명과 선거 모금활동에 관여한 일부 다른 지역 지부장들도 형사처벌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그러나 단순히 선거자금을 지원한 대부분의 현직 교사들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수사 여건을 고려해 형사처벌하지는 않고 교육청에 통보해 징계를 의뢰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전교조의 주 후보 지원이 법원에서 유죄 판단을 받을 경우 교사들에 대한 대규모 징계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검찰은 전교조 서울지부가 차용증 등 관련 서류를 첨부해 주 후보가 빌린 것처럼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했지만 이는 조직적인 선거 지원 혐의를 감추기 위한 허위 차용증으로 보고 있다. 한편 검찰은 주 후보를 6일 한 차례 더 소환한 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할 예정이며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2009년 새해가 밝았다. 밤에는 흰눈까지 내리며 기축년(己丑年)을 축하했다. 소띠 해에 붉게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러 청주 상당산성으로 갔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지만 많은 청주시민들이 공남문과 주변의 성벽위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붉은 해가 떠오르자 여기저기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힘차게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고, 일행이 많은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쳤다. 아내와 나는 올해 우리 가족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 다 이뤄지도록 함께 노력하자는 다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1년 전의 오늘은 날씨가 흐려 해맞이를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내 모습은 오늘과 같았다. 그날도 여러 가지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라며 새해를 맞이했었다. 뜻한 대로 소원이 다 이뤄지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만 살다보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도 많다.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고 국가적으로도 악재가 겹쳐 모두들 어려워한 한해라 더 그러했다. 작년에 우리 가족의 소원 중 가장 비중이 컸던 게 대학원 졸업반인 맏이의 취업이었다. 그동안 좋은 직장이라고 소문났던 회사들마저 직원 수를 줄이고 봉급을 깎으며 긴축경영을 하는 판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다.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도 속이 탔다. 내년에 취업해도 된다고 격려만하며 세월을 보냈는데 12월에 경영을 잘한다고 소문난 벤처기업에 취업을 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맏이가 우리 가족의 소원이 다 이뤄지게 만들었다. 새해가 하늘 높이 떠오르는 것을 본 후 산성을 한바퀴 돌았다. 성벽 길에서 청주어린이회관과 청주국립박물관, 소가 누운 모습을 하고 있어 와우산으로도 불리는 청주의 진산 우암산, 청주 시가지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내와 대화를 나눠보니 올해도 꼭 이뤄져야 할 것들이 많다. 다 이뤄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내와 나에 관한 것은 쑥 빼놓고 대학졸업반인 둘째의 취업과 맏이가 직장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만이라도 이뤄지길 바라는 게 부모마음이다. 좀 느리면 어떤가. 좀 뒤쳐져도 괜찮다. 못된 것에 눈독들이기보다는 맡은 일 잘하면서 소처럼 뚜벅뚜벅 앞만 보고 나가는 한해였으면 좋겠다. 올해는 붉은 해가 힘차게 떠올라 첫날부터 기분이 좋다.
부산의 초.중등학교 영어교사와 과학, 수학교사들이 미국 주요 도시의 학교를 찾아 보조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직접 가르친다. 부산시 교육청은 영어우수교사 국외심화연수 프로그램으로 모두 85명의 교사를 선발해 뉴욕과 시카고 등 미국 3개 도시의 현지 학교에 파견한다고 2일 밝혔다. 파견지역별로 뉴욕의 경우 초등교사 30명이 6일 출발하며, 시카고는 초등교사 18명과 중등 수학, 과학교사 7명 등 모두 25명이 오는 10일 출발한다. 또 중등 영어교사 30명은 리버사이드에서 파견 연수를 실시하며 오는 24일 출발 예정이다. 이번 국외심화연수 참가자들은 지난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됐으며 지역별로 12~15개 현지 공립 초.중등학교에 학교별로 2~3명씩 파견돼 5개월간 보조교사로 활동하며 각종 수업을 참관하거나 지도교사와의 협의 아래 실제 수업도 진행하게 된다. 부산지역 교사들이 참관하거나 진행하는 수업은 미국 공립 초.중등학교의 정규 교육과정과 ESL(제2언어로서의 영어) 교육과정 등이다. 참가 교사들은 자신들이 피교육생 입장에서 강의를 듣던 지금까지의 국내외 연수과정과 달리 미국 현지에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을 직접 가르치는 기회를 갖게 돼 영어교수법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시 교육청은 이번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교사들을 영어교육 '키-트레이너'로 양성해 원어민 교사와 같이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시 교육청 정경순 장학관은 "이번 심화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이 국내로 돌아오게 되면 교사 영어 연수과정 강사로 활동하거나 특목고나 영어체험교실 등에서 직접 학생을 가르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며 "연수효과를 면밀히 검토해 앞으로도 미국 심화연수를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가 지난해 7월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주경복 후보의 선거자금을 마련하면서 개인의 차명계좌로 자금을 '세탁'한 정황이 검찰에 포착됐다. 검찰은 전교조 서울지부가 단체자금 또는 단체와 관련된 자금의 정치자금 기부나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막는 정치자금법과 국가공무원법 등 현행법을 피하려고 이런 불투명한 회계처리를 했다고 보고 있다. 2일 검찰에 따르면 이 단체는 교육감 선거 한 달 전인 지난해 6월30일부터 1개월간 서울지부 산하 25개 지회 소속의 현직 교원, 서울지부 집행위원은 물론 전교조 본부의 집행위원을 동원해 주씨의 선거비용을 수차례 모금했다. 전교조 서울지부는 이를 위해 같은 해 6월말 집행위원회를 열어 조합원 1만2천여명을 상대로 10만원 미만씩 모금, 분회별로 취합해 지부 대표 통장으로 입금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선거비용은 반환을 전제로 한 3억8천여만원을 포함, 6억원에 달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전교조 서울지부는 또 이 단체 명의의 예금과 정기예금까지 찾아 2억원 정도를 주씨에게 기부했다. 이 과정에서 전교조 서울지부는 자신이나 소속 조합원의 돈이 바로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된 주씨의 선거비용 계좌(신고계좌)에 입금되면 현행법에 저촉될 것을 우려해 주씨 선거본부의 회계책임자 박모씨의 개인계좌 2곳으로 분산 입금했다는 것이다. 박씨의 계좌에 입금된 이 돈은 법률적으로 정치자금 기부가 허용되는 사람들이 주씨에게 선거자금을 빌려주는 것처럼 꾸미려고 전교조 소속을 포함한 박씨의 지인 9명의 계좌로 나누어 옮겨진 뒤 신고계좌로 다시 입금됐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은 전교조 서울지부가 현직 교사에게 모금하거나 단체의 공금을 선거자금으로 대면서 이를 감추려고 허위 차용증 등 관련 서류를 첨부해 해직교사 등 현직 공무원 신분이 아닌 개인 29명에게 빌린 것처럼 선관위에 신고했다고 보고 있다. 검찰은 또 전교조 송원재 서울지부장(구속)이 지난해 7월2일부터 7월18일까지 언론노조 중앙집행위원 회의, 공무원노조 등 민주노총 사업장을 방문해 주씨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으며 이 가운데 1차례는 주씨도 직접 참여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문건을 확보했다. 문건에는 방문 일시와 방문자, 참석 인원과 함께 "호응이 뜨거움", "일부 회의적 반응" 등 평가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전교조 서울지부는 지난해 6월 중순께 서울시 선관위가 '교육감 선거는 정치자금법이 적용되지 않는 선거이고 공무원인 교사도 후보에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유권해석을 내림에 따라 교사들이 주 후보 측에 돈을 빌려준 것이라고 반박했다.
충북 청원군 한국교원대가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의 인쇄문화적 가치 등을 초ㆍ중ㆍ고교 교사에게 알리는 데 적극 나선다. 2일 교원대에 따르면 이 대학 공업기술연구소(소장 김진수 교수)는 오는 4월부터 연말까지 5차례에 걸쳐 도내 초ㆍ중ㆍ고교 교사들의 신청을 받아 학교 교육연수원에서 '직지'의 가치와 우수성을 알리는 연수를 회당 30시간씩 펼칠 예정이다. 이 연수에서는 '직지와 고인쇄문화',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역할' 등에 대한 이론교육은 물론 '책 꿰기', '한지 만들기', 종이 공예 만들기', '금속활자 주조 및 조판', '책 만들기' 등의 체험 행사가 펼쳐진다. 김 교수는 이를 위해 지난해 7월부터 최근까지 14개 과목으로 짜진 이 같은 연수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연구소는 또 내년에는 연수 참가 교사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김 교수는 "청주 흥덕사(현재 터만 남아 있음)에서 인쇄된 직지의 소중함을 학생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교사를 대상으로 이 같은 연수 프로그램을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1377년 인쇄된 직지는 상ㆍ하권으로 돼 있으나 현재 하권만 프랑스에 남아 있으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2일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교육개혁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하면서 올해 교육과학기술부가 추진할 교육 정책에도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집권 첫해였던 지난해 교육 분야 개혁이 다소 지지부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해 올해는 교육 개혁의 속도가 한층 빨라질 것이라는 게 교육계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먼저 공교육 현장에는 신년 초부터 한차례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칠 것으로 예상된다. 교과부가 지난해 10월 실시한 학업 성취도 평가 결과를 다음달 초 초ㆍ중학교는 지역 교육청 단위로, 고등학교는 시도 교육청 단위로 공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도시, 중소도시, 읍면지역 등 3개 범위로 공개됐던 학업 성취도 결과가 지역 교육청 단위로까지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역 교육청 단위로까지 성적이 공개되면 그동안 짐작으로만 알던 시도별, 군구별 학력 격차가 객관적인 데이터로 증명이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지역별 성적 공개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 초부터 가장 역점적으로 추진한 교육 정책 가운데 하나로 '자율과 경쟁'의 원리에 입각해 지역 간 경쟁을 촉진하고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성적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정부의 구상이다. 성적이 매우 뒤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 지역이나 학교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지원을 병행한다는 계획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 교육정책인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의 윤곽도 올해 한층 뚜렷해질 전망이다. 직업교육의 산실이 될 마이스터고 50곳, 농어촌과 중소도시를 선도할 기숙형 공립고 150곳, 자율형 사립고 100곳을 만든다는 계획 아래 올해 본격적인 설립 준비에 착수해 내년 3월 개교할 예정이다. 새해 화두로 떠오른 '경제 살리기'는 교육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 대통령도 이날 연설에서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저소득층의 대학 등록금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 확고한 신념"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학업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것. 이를 위해 교과부는 올해 학자금 지원 예산(8천456억원)을 지난해의 두 배 가까이 늘렸으며 기초생활수급자 무상장학금이나 근로장학금 지원 대상도 크게 확대했다. 교육 행정 인턴십 채용 1천500명, 특수교육 보조원 5천명, 종일제 유치원 보조인력 4천명, 영어회화 전문강사 5천명, 방과후학교 강사 1만8천명 등 교육 서비스 분야에서 5만개의 일자리도 창출할 계획이다. 그 외 부실 초중고 및 사립대학 구조조정, 교원평가제 도입, 시도 교육청 인력 5% 감축 및 기능 재편, 교사직 개방 등 교육계의 오랜 관행을 타파하는 과감한 개혁으로 교육계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올해 새학기부터 학생들이 배우고 익힐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교육청 첫 인정 교과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광주시교육청의 인정을 통과한 교과서는 초등학생용과 중.고등학생용 2권이다. 초등학생용은 5.18 민주화운동 전개과정, 5.18 민주화운동 속에 담긴 정신, 함께 하는 5.18 등 3개 단원으로 구성됐다. 단원 아래 2-3개의 소주제와 5-7개의 세부내용이 만화와 사진 등과 함께 소개돼 있다. 소주제는 공부할 내용과 관련된 '도입글' 등 '생각열기'와 학습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탐구하는 '살펴보기', 단원별 학습내용을 정리하는 '활동하기', '정리하기' 등으로 꾸며져 있다.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춰 5.18 발생 계기, 5.18에 담겨 있는 정신을 물음과 답변 등을 통해 어린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함께하는 5.18'에서는 5.18 사적지, 국립묘지 찾아가기, 연극, 노래 해보기 등 주변에서 5·18 정신을 되새기고 체험할 수 있는 손쉽고 다양한 방법 등을 제시했다. 책 표지는 5.18민중항쟁추모탑을 향해 달려가는 해맑은 어린이 모습에서 광주시민이 이루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꿈을 나타냈다고 집필진은 설명했다. 중.고등학생용 교과서는 '나와 5.18', 5.18 민주화운동, 5.18과 문화, 5·18 정신 이어받기, 아시아의 광주, 세계속의 5.18 등 5개 단원으로 이뤄져 있다. 사건 자체의 단순 기술보다는 사건이 가진 의미에 초점을 맞춰 학생들이 그에 맞는 탐구활동 등 직접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5.18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과 서울의 봄, 5.18 전개과정, 민주화운동으로 되기까지 등을 기술했으며 5월 관련 문학,음악,미술 등 5.18이 문화, 예술 활동에 끼친 영향 등을 살펴봤다. 5.18에서 찾을 수 있는 민주.인권.평화 등의 사례를 언급하고 필리핀의 '피플 파워', 인도네시아 '5월 혁명' 등 아시아에서의 민주화 운동 등도 설명했다. 집필에 참여한 한 교사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행과정을 살펴보고 민주.인권.평화.공동체의 5.18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른길을 찾는 것이 이 책을 낸 궁극적 목적이다"고 강조했다.
부산지역 학생 수 감소에 따라 각급 학교의 학급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부산시 교육청은 학생 수 감소에 따라 올 신학기에 초등학교는 256학급, 중학교는 79학급, 고등학교는 45학급이 줄어드는 등 초.중등학교 전체적으로 380학급이 줄어든다고 1일 밝혔다. 이에 따라 초등학교는 지난해 8천253학급에서 7천997학급으로, 중학교는 4천95학급에서 4천16학급으로, 고등학교는 4천112학급에서 4천67학급으로 각각 조정된다. 또 각급 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도 줄어 초등학교의 경우 지난해 32명에서 올 신학기부터는 31명으로 줄고, 고등학교도 일반계는 지난해 39명에서 37명으로, 전문계는 32명에서 30명으로 줄어든다. 단 중학교는 지난해 37명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부산시 교육청 관계자는 "부산지역 인구감소로 학생 수가 줄면서 2005년부터 각급 학교의 학급수도 함께 감소하고 있다"며 "당분간 학급수가 계속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남는 교실 활용방안 등 대책마련에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공상훈 부장검사)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주경복 서울시 교육감 후보 불법 선거지원 의혹과 관련, 전교조가 검찰 수사에 대비해 특정 간부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내부 문건을 확보한 것으로 1일 전해졌다. 검찰은 최근 전교조 서울지부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통해 "이을재(구속) 조직국장 선에서 방어하고 실패하면 다른 간부를 내세운다"는 내용의 문건과 이메일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직교사로 주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자금 조달 및 전교조 서울지부와의 연락업무 등을 담당한 이 조직국장을 내세워 현직 교사인 다른 간부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형사처벌 대상자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조직국장은 검찰 조사시 자신의 혐의는 시인한 반면 다른 간부들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진술을 하지 않았으며, 다른 간부들도 산하 25개 지회에 대한 표 확보와 홍보단ㆍ선전단 구성 등 선거운동 지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그러나 한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됐던 송원재 서울지부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면서 이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긴 문건을 첨부했고, 송 지부장은 전교조 모금 활동 등 선거비 불법 지원에 대한 가담 정도가 구체화되면서 결국 구속됐다. 송 지부장은 지난 7월 서울시 교육감 선거 당시 전교조 서울시지부 공금 2억원과 전교조 회원들을 대상으로 모금한 8억여원을 당시 교육감 후보로 나선 주경복씨 측에 기부하고 허위 회계자료 제출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편, 검찰은 조만간 주 후보를 한 차례 더 소환 조사한 뒤 형사처벌 수위를 결정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2월 21일, 충북 옥천군 안내면과 안남면에서 중봉 조헌의 발자취와 인근의 볼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처음 찾은 곳이 안내면 도이리에 있는 후율당이다. 후율당(충북기념물 제13호)은 중봉 조헌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은현감을 파직당하고 옥천에 낙향했을 때 제자들을 가르쳤던 서당이다. 중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는 등 왜병들을 막아내다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율곡 이이의 제자였던 중봉은 후율을 호로 정하며 스승의 사상을 잇고자 했다. 안내면 소재지에서 가까운 정방사거리에서 보은방향으로 500여m 거리에 한문으로 '後栗堂'이라 새겨진 표석이 길에 서 있다. 그곳에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우측 길로 접어들어 400여m 가면 길가에서 후율당을 만난다. 돌담으로 둘러쳐 있고 북쪽으로 삼문이 나있는 후율당은 용촌 밤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오며 중봉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 되었다. 마을 안쪽에서 만나는 한옥도 옛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이리에서 나와 37번 국도로 옥천방향으로 가다보면 다리를 건너기 전에 인포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에서 안남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575번 지방도로다. 중봉 조헌 신도비(충북유형문화재 제183), 표충사, 중봉 묘소(충북기념물 제14호)가 있는 도농리에서 처음 만나는 게 길가의 신도비다.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둔 것이 신도비다. 인조 27년(1649)에 세워진 중봉 신도비에는 중봉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최후의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이 자세히 적혀있고,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표충사는 신도비에서 바라보이는 150여m 거리에 있다. 표충사의 대문인 삼문은 충의문으로 가운데 문이 높고 양쪽의 문이 낮은 솟을삼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삼문에 들어서면 주병덕 전 충북지사가 쓴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 중봉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지당에 비 뿌리고 / 양유에 내 끼인 제 // 사공은 어디 가고 / 빈 배만 매였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 오락가락 하더라 잔디밭에 있는 조헌 시비 앞에서 옛 시조 한 수 읊으며 당시의 생활풍습을 생각해보는 것도 현대인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다. 표충사와 영모제 사이로 연결된 돌계단을 60여m 오르면 중봉의 묘소다. 묘소는 낙낙장송들이 에워싸고 있는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중봉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과 문인석이 서 있는 묘소에서 표충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표충사에서 청정리를 찾아간다는 것이 마을 입구에 수령 300여 년의 느티나무가 서 있는 화학리 2구로 들어섰다. 회관 앞에 36년 전에 부락훈을 새겨 넣은 표석이 있어 어느 곳에 가든 새로운 문화가 있다는 것을 깨우친다. '열심히 일하자, 굳게 뭉치자, 서로 받들자'는 글귀가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았지만 늘 부지런했고, 나눌 줄 알았고, 예절바르던 옛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에 나타난 낯선 사람을 집에서 지켜보다 밖으로 나온 정척기 어른은 인근 마을과 옥천의 역사를 꿰뚫고 있다. 숨을 몰아쉬면서 옥천 육씨와 옥천 전씨, 본인의 이름에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안남천이 흐르는 길가의 청정리에 3기의 선돌이 있다. 돌도 돌 나름이라고 답사를 하다 보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돌을 많이 만난다. 가까운 거리에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선돌들은 나름대로 역할과 의미하는 바가 크다. 1호 선돌은 폐교된 삼호초등학교 앞 논 가운데에 있고, 윗부분을 뾰족하게 손질한 숫선돌로 마을에서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일부다처제를 의미하듯 암선돌 두 개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다. 선돌 옆에 서 있는 신태만선생교육공적비와 유리창에 붙어 있는 교장실, 교무실이라는 글자가 기도원으로 바뀐 옛 삼호초등학교를 알려준다. 송정마을 뒤 논 가운데에 있는 2호 선돌은 뒤로 배가 불룩 튀어나오게 손질한 암선돌로 마을에서 할머니라 부르고, 마을회관 앞 냇가에 있는 3호 선돌은 윗부분을 둥글게 손질한 암선돌로 아이 낳기를 기원하는 여성들이 돌로 문질러 반들반들하다. 청정리에서 안남면 소재지인 연주리로 가면 해발 384m에 불과하지만 한반도가 내려다보이는 둔주봉에 오를 수 있다. 한반도를 보려면 등산로 입구인 안남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점촌고개까지 간다. 이곳에서 900여m 거리의 전망대까지는 길이 평탄해 산책을 하듯 편히 오를 수 있다. 전망대에 있는 정자에 올라 아래를 바라 보면 금강의 물길이 U자를 만들며 휘돌아나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강 건너편으로 물길 안에 갇힌 땅이 영락없는 한반도의 모습이다. 물론 영월 서강의 물길이 만든 한반도의 모습과는 다르다. 둔주봉은 부산은 왼쪽, 목포는 오른쪽에 위치하도록 한반도의 좌우를 바꾸며 기막힌 반전을 보여준다. 둔주봉 정상은 전망대에서 가파른 산길을 500여m쯤 더 올라가야 한다. 비교적 조망이 좋은 정상에서 바라보면 대청호가 만든 물굽이와 산봉우리들이 아름답다. 정상에서 전망대 사이에 독락정으로 가는 하산로가 있다. 둔주봉에서 내려오면 초계 주씨들이 많이 사는 연주리 2구의 독락정이 가깝다. 독락정(충북문화재자료 제23호)은 절충장군중추부사를 지낸 주몽득이 1607년에 세운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 정자다. 독락정 바로 앞이 둔주봉에서 바라본 한반도다. 1991년에 세운 '연주리 마을 자랑비'를 읽어보면 이곳의 자연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안다. 앞에는 금강물이 휘돌아 흘러가고 뒤에는 층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니 산천이 아름다워 정자 없이 지낼 손가. 이곳에 정자 지어 이름은 독락이라 어찌 홀로 앉아 즐거운 낙 누리리까. 태평세민 모두 모여 함께 낙을 누려보세. 대청호에 물이 차니 고기 반 물 반이요 낚싯대 드리우니 현세낙원 이곳이라. 옥천은 중봉이 관직에서 파직당한 후 학문을 가르치고, 구국의지를 불태우고, 뼈를 묻은 곳이라 자취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 중봉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고 싶어 군북면 이백리의 이지당으로 향했다. 이지당(충북유형문화재 제42호)은 중봉이 후학을 교육한 서당으로 조선시대 중엽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웠다. 각신동이라는 마을 앞에 있어 처음에는 각신서당으로 불렀는데 중봉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의 끝 글자인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이지당까지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한적한 숲길이다. 산모롱이를 돌아서면 수수해서 정이 가는 전통가옥이 나타난다. 뒤는 상수리나무와 느티나무가 많은 야산이 감싸고, 앞에는 시냇물이 흘러가며 졸졸졸 물소리를 내는 이지당이다. 이지당은 본채와 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앞면 7칸ㆍ옆면 1칸의 강당건물이고, 누각은 앞면 1칸ㆍ옆면 1칸으로 높은 단 위에 누마루를 두고 있다. 풍광이 아름다운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개울과 주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지당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정자가 하나로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통안내] 경부고속도로 옥천IC - 보은방향 좌회전 - 문정삼거리 좌회전 - 문정사거리 직진 - 37번 국도 - 석호삼거리 보은방향 우회전 - 정방사거리 직진 - 500m - 도이리입구 - 400m - 후율당
해(年)가 바뀌었다. 세상의 흐름이 바뀌었다. 한 10여 년 전만해도 새해인사로 연하장을 보내다가 바로 작년 이맘 때까지만 해도 이메일을 발송하더니 이번엔 문자 메시지가 주종을 이룬다. 어제와 오늘, 새해 인사 덕담 문자 메시지 수 십 통을 받았다. 내가 먼저 보내드렸어야 하는데 선수를 놓쳤다. 그 내용을 보니 다복, 소원 성취, 건강, 행복, 평안, 감사등이 대부분이다. 리포터도 학교장으로서 학부모를 대상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작년 한 해 학교 표창 무려 4개나 받은 것은 바로 학부모님과 우리 서호중 교육가족 덕분이라고. 새해엔 사랑과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라고. 그리고 추가사항 하나! 방학 중 도서실을 개방하니 많이 이용해 달라고. 이젠 내가 받은 문자 메시지를 답신해야 할 차례다. 어떻게 보낼까? 길어도 안 되고, 고리타분한 형식적인 인사는 구태의연할 뿐 아니라 내 체질도 아니고. 마침 올해가 소띠해다. 그렇다. '소'를 이용하자. 그래서 탄생한 것이 "笑의 해가 되소서!" 경제 전망에 의하면 올해는 작년보다 경제가 더 안 좋아지리라고 한다. 생활이 더욱 어려워져 미소 지을 기회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때 일수록 일부러라도 웃어보는 것은 어떨까? 공익 광고를 보니까 하루 20초만 웃어도 이틀의 수명이 연장되고 하루 45초만 웃어도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웃을수록 행복은 더 커진다고 한다. 어려울수록 서로 웃고 힘내자는 광고에 공감이 간다. 그 뿐일까? 웃음치료사의 말에 의하면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억지로라도 웃으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강조한다. 웃음을 잃은 어른들에게는 악담(?)까지 한다. 웃음을 잃을수록 죽을 날이 가까와졋다고. 그렇다. 우리가 유년시절, 학창시절 얼마나 웃음이 많았는가? 낙엽이 바람에 쓸려 가는 모습, 소똥 굴러가는 모습만 보아도 웃었다. 리포터도 학창시절 월남파병 용사 귀국 환영 행사시 도로 맞은 편에 있는 여고생 모습을 바라보고 웃다가 학생주임 선생님께 따귀를 맞은 아픈 기억이 있다. (웃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아닌데 그 선생님은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싫었나 보다. 졸업 후 그 분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교닷컴애독자 여러분에게 웃을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혹시 웃을 일이 좀 줄어들더라고 일부러라도 함께 웃어 보는 것은 어떨까? 웃음속에 행복이 찾아오는 것을 체험했으면 한다. 하루하루 웃으면서'행복한 교단' 을 앞장 서 만들자. '笑'의 해가 되소서!
무창포해수욕장의 해넘이와 신비의 바닷길을 보기위해 보령으로 1박 2일의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하다 보면 꼭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일정에 쫓겨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그동안 그냥 지나친 곳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36번 국도를 이용해 보령으로 가다 보면 청양군 정산면소재지 앞 벌판 가운데 2층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이 서 있다. 이것이 보물 제18호인 서정리9층석탑인데 부근에 백곡사라는 절이 있던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대치터널이 뚫려 칠갑산을 넘나들기가 쉬워졌지만 옛 추억이 살아있는 칠갑산도림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옛길에서 콩밭 매는 아낙네상과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도 보고, 스타파크천문대까지 등산로를 걸으며 칠갑산의 자연을 만끽했다. 평야지대를 달리는 장항선에 작아서 더 정이 가는 청소역이 있다. 청소면 진죽리의 청소역은 1961년에 건축한 벽돌조 역사로 지붕이 녹색이다. 근대 간이 역사의 건축 양식이 잘 드러나 있는 이 건물이 장항선의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문화재청이 지정한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305호)이다. 달랑 택시 한 대가 역전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대여섯 명만 들어서도 꽉 찰 것 같은 대합실의 크기가 이용객이 작다는 것을 알게 한다. 경적을 울리며 시골 역을 오가는 기차들을 바라보는 것도 추억거리다. 무창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남포방조제에 있는 죽도에 들렸다. 방조제가 완공되며 육지와 연결된 죽도는 지난 5월 4일 갑자기 해일이 밀려와 낚시하던 사람과 관광객들의 인명피해가 컸던 곳이다. 사고 후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어 주민들의 걱정이 컸었는데 예전처럼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해돋이는 앞이 확 트여 붉은 해가 수면에서 떠오르는 동해안에서, 해넘이는 올망졸망 늘어선 섬 사이로 붉은 해가 사라지는 서해안에서 봐야 제맛이 난다. 무창포해수욕장의 해넘이는 서해안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지만 흐린 날씨가 하늘 위에서 해를 감추고 백사장에 모여선 사람들의 마음을 깜깜하게 만든다. 그 덕에 해수욕장에 설치되어 있는 조형물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전국이 흐리다는 일기예보가 이튿날 아침의 해돋이를 포기하게 했다. 살다 보면 날씨 때문에 저절로 흥이 나거나 괜히 우울한 날도 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 탓인지 무창포해수욕장 앞 바다에 신비의 바닷길이 열렸지만 사람 수가 적다.
교원정책 전반 다뤄 교섭위원들 긴장 지난해 11월 12일, 정부중앙청사 16층 대회의실. 한국교총과 교육과학기술부의 2008년 상·하반기 교섭·협의를 위한 제1차 본교섭·협의위원회 개회를 앞두고 양측 교섭위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돌았다. 오전 11시 양측의 교섭대표인 안병만 교과부장관과 이원희 교총회장이 입장하고, 교섭위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분위기는 누그러졌지만 회의 내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계속됐다. 안병만 장관은 “지난 1992년 시작된 교과부와 교총의 교섭·협의는 그동안 교원들의 권익향상과 교육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며 “이번에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우리 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서로 협력하자”고 말했다. 이원희 회장도 “새 정부 들어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는 것에 감사드린다”고 화답하며 본격적인 협의를 시작했다. 이날 교총-교과부 간 본교섭·협의는 양측 교섭대표의 인사말, 교총의 교섭·협의 요구 사항에 대한 제안 설명, 교총의 제안 설명에 대한 교과부의 입장 표명, 양측 교섭위원의 자유발언, 교섭대표의 마무리 발언으로 진행됐다. 1차 본교섭·협의회를 마친 양측은 원만한 교섭·협의를 위해 각각 5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를 구성, 교섭·협의를 진행시키기로 합의했다. 소위가 몇 차례 만남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면 전체 교섭위원이 모여 합의서에 조인하는 것으로 당해 연도의 교섭·협의가 마무리된다. 일선 교원들은 물론 교총 회원들조차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교총과 교과부의 교섭·협의는 ‘교원지위향상을위한특별법’ 제11조 및 ‘교원지위향상을위한교섭·협의에관한규정’ 제4조에 의거해 실시되는 것이다. 교섭·협의의 범위는 ▲ 봉급 및 수당체계의 개선에 관한 사항 ▲ 근무시간·휴게·휴무 및 휴가 등에 관한 사항 ▲ 여교원의 보호에 관한 사항 ▲ 안전·보건에 관한 사항 ▲ 교권 신장에 관한 사항 ▲ 복지·후생에 관한 사항 ▲ 연구활동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사항 ▲ 전문성 신장과 연수에 관한 사항 등 교원정책 전반이 망라돼 있다. 교섭위원들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2008년 제1차 본교섭·협의위원회에서 교총의 교섭위원들이 교과부 측에 요구한 발언을 살펴보면 교총-교과부 간 교섭·협의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관리직회원을 대표해 교총 교섭위원으로 참여한 김윤선 전남 구례동중 교장은 “학교전기료는 교총의 강력한 요구로 2005년부터 16.2%가 인하됐으나 수도료는 그대로 있다”며 “학교의 수도료도 전기료처럼 교육용으로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학회원 대표인 안양옥 서울교대 교수는 “저소득층 가정의 학생부터라도 대입전형료를 경감해주고, 초등교원의 전문성 신장을 위해 교육대학에 박사과정이 설치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유·초등회원 대표인 전상훈 서울 인헌초 교사는 수석교사제 법제화와 실질적인 잡무경감 방안을, 중등회원 대표인 조병선 인천 서곳중 교사는 성과상여금 개선과 주5일제 수업의 완전한 정착이 필요하다고 각각 밝혔다. 양시진 교총 부회장(경기 구봉초 교장)은 “일반직 공무원은 퇴직 전 6개월의 공로연수를 갖지만 교원들은 그나마 있는 3개월의 퇴직준비 휴가도 쓰기 어려운 형편”이라며 “교원들에게도 일반직과 동일하게 6개월의 공로연수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교원 대표로 나선 이순희 대구과학고 교사는 정년퇴직자 특별승진 문제를 거론했다. 이 교사는 “40대 후반 정도의 교사가 명예퇴직을 하면 교감으로 특별 승진하는데, 62세에 정년퇴직하는 교사는 그냥 교사로 퇴직한다”며 “정년퇴직자도 특별승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기 초부터 회원들 상대로 안건 공모 교총은 해당 연도의 교섭·협의를 진행하기 위해 신학기 시작부터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지난해 37개조 75개항의 교섭·협의 요구안 또한 일선 회원들을 상대로 공모와 여론조사 절차 등을 통해 선정한 것이다. 교섭·협의 요구안은 제1장 ‘전문직 교원단체 활동보장’, 제2장 ‘교원의 근무여건 개선 및 전문성 함양’, 제3장 ‘학생인권보호 및 교권신장’, 제4장 ‘교원처우 및 복지 개선’, ‘보칙’ 등으로 구성됐으며 우리 교육발전과 교원의 권익향상에 도움이 되는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1장 ‘전문직 교원단체 활동보장’은 교원이 전문직 교원단체에 전임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관계법령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과 교과부가 전문직 교원단체와 최소한 분기별로 정례 협의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교총의 전문성 신장 및 학부모, 학생연수 등 교육력 강화를 위한 현장교육지원센터의 설립을 행·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현장교육연구대회, 전국교육자료전, 초등교육연구대회 등 전국규모 대회 입상자들에게 해외여행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연구 분위기를 조성할 것도 촉구하고 있다. 제2장 ‘교원의 근무여건 개선 및 전문성 함양’에는 행정안전부가 갖고 있는 교원정원 관리권의 교과부 이관, 수석교사제 법제화, 현장교육연구대회 입상비율 개선, 교원 연구년제 조기 도입이 들어 있다. 근무성적평정 기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고, 우수성적 2~3회치를 반영하는 한편 교사다면평가의 시범실시를 2009년까지 연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교육공무원승진규정 개정도 요구하고 있다. 교원정년 연장, 교원의 공로연수 시행 등 일선의 강력한 요구가 있는 사항도 빠지지 않는다. 제3장 ‘학생인권보호 및 교권신장’도 매년 교섭·협의의 주요과제다. 교권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고, 교원이 교육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학생의 학습권 및 교원의 교육권을 보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가칭 ‘교권보호법’ 제정이 핵심이다. 교원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교육에 헌신해 사회적 귀감이 되는 순국·순직교원에 대해 헌정할 수 있도록 가칭 ‘교원명예전당’ 설립도 요구하고 있다. 교육 유해환경 차단, 저소득층 대학입학전형료 경감·지원 등 학생들의 피부에 와 닿는 정책도 담고 있다. 교직수당가산금 인상, 교원자녀 대학학비 수당 신설·지급, 영양교사 업무수당 월 3만 원 신설·지급, 교(원)감 직책급 업무추진비 신설·지급, 유치원을 병설한 초등학교 및 병설 중·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보건교사에게 월 3만 원 범위 내에서 겸임수당 신설·지급, 도서벽지수당 인상, 사서교사 수당 신설, 대학교원 연구보조비(성과급) 예산 증액 등 제4장 ‘교원처우 및 복지 개선’은 교총의 끊임없는 요구사항이다. ‘역사왜곡 대응팀’ 상설 설치·운영 등 교육현안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적 제언도 포함됐다. 물론 교총의 이러한 요구사항을 교과부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소위원회의 실무협의 과정에서 강제력을 배재한 채 “~노력한다, ~추진한다”는 등의 선언적 형태만으로 합의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총-교과부 간 교섭·협의가 우리 교육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그간의 실적을 통해 알 수 있다. “교총의 여러 활동 중 가장 의미 있어” 교섭·협의 원년부터 줄기차게 요구한 교직수당은 1992년 11만 원에서 2001년 25만 원까지 인상됐다. 초등교원 보전수당 가산금은 97년 교사 2만 원·주임 2만 5000원·교감 3만 원 교장 4만 원이 인상됐고, 2002년 유치원 및 초등교원 모두 평균 1만 원 인상됐다. 2003년에는 1만 7000원 인상이 인상돼 교사 4만 7000원, 보직교사 5만 2000원, 교감 5만 7000원, 교장 6만 7000원이 됐다. 1994년 담임수당이 신설, 지급되면서 계속 인상됐다. 6만 원 → 8만 원 → 11만 원에 이르고 있으며, 보직교사(부장교사) 수당도 3만 원 → 5만 원 → 7만 원에 이르렀다. 이 밖에 봉급 조정수당을 인상하고, 폐지된 체력단련비를 가계안정비로 부활한 것도 교총-교과부 간 교섭·협의 합의로 이뤄진 것이다. 임용 전 군경력 100% 교육경력으로 인정(2001년), 육아 휴직기간을 첫 1년에 한하여 100% 교육경력으로 인정(2001년), 교육대학 대학원 설치(1995년), 산업체 근무 경력 70%로 상향 조정(2002년), 명절휴가비 100% → 150%(2003년), 정액급식비 8만 원 → 9만 원(2003년) → 12만 원(2004년), 교장·교감 직급보조비 교장 인상(2003년)도 교섭·협의 결과물이다. 김동석 교총 대변인은 “교총과 교과부 간 교섭·협의는 교원에 대한 예우 및 처우를 개선하고 신분보장을 강화함으로써 교원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한편 교육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며 “교총이 벌이는 여러 활동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중앙단위에서 이뤄지는 교총-교과부의 교섭·협의뿐 아니라 시·도교총과 시·도교육청 간의 교섭·협의도 지방화·분권화 시대를 맞아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경기교총과 경기도교육청은 지난해 경기도 내 교사가 자율연수를 받을 때 교육청이 경비의 70% 이상을 지원키로 했다. 또 승진가산점 중 선택가산점을 대폭 축소하고, 초등전입교사가 전입 희망교에 임용될 수 있도록 했다. 교직원 자녀를 위한 보육시설 설치, 학급당 학생 수 감축, 학교 신축 시 교사 휴게실·탈의실·연구실 설치 등도 합의했다. 경기교총-도교육청 단체 교섭·협의 결과물이다. 지난 2006년 강원교총과 강원도교육청은 특수지 및 농·산·어촌 지역의 교원사택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후된 사택의 보수 및 부족사택 확충을 연차적으로 추진하고, 특수지 중심지역에 임대사택을 운영하는 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같은 해 대전교총과 대전시교육청은 학교마다 다르게 편성돼 있는 대전 시내 학교의 교사 연구활동비를 일원화하는 내용에 합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시·도교총과 시·도교육청의 교섭·협의는 해당 지역 교원들의 교육활동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창구로 자리 잡았다. 교총은 시·도교총이 보다 효율적으로 교섭·협의를 할 수 있도록 지난해 7월 사무국 직제개편을 통해 담당 부서를 신설하기도 했다. 시·도교총의 교섭·협의를 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교총 교육정책연구소 정책지원팀 관계자는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한 교섭·협의가 되도록 시·도에서 필요한 교섭·협의 과제를 발굴하고, 교섭위원들의 전문성을 신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에 대한 연수를 권역별로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로 교섭·협의 역사가 18년에 이른다. 교총-교과부, 시·도교총-시·도교육청 간 교섭·협의에서 다뤄진 수많은 과제는 우리 교육현실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합의를 통해 실현된 것들과 미뤄진 과제 모두가 소중한 이유다.
훌쩍 떠나기, 그리고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지구본을 손가락으로 돌려본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지구가 돌아가면서 둥글게 세상이 펼쳐진다. 익숙한 지명들 사이로 조금만 비켜가도 낯선 곳.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어느 누군들 그러지 않으랴. 아침 출근길에서 또는 답답한 교실에서 문득 먼 하늘 바라보면 어느새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고…. 어느 계절인가 훌쩍 떠난 길. 한적한 강원도의 산간 도로를 미끄러지듯 차로 달릴 때, 온몸에 파고드는 듯한 떨림에 놀란 적이 있었지. 문득 대학 시절 걸었던 긴긴 옛길들, 떠오르고, 하늘 가득 쏟아질 듯 은하수, 젖어 있고, 그 아래 터벅이던 발자국들, 가슴 쿵쾅거리고, 철썩거리던 파도 소리, 발끝을 간질이고, 백두대간의 산맥들에서 뿜어 나오는 나무들의 숨소리. 작은 새의 호흡처럼 이어지던 길. 끝 모르게 펼쳐지던 생각들. 누구나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누군가는 벗어나 마침내 돌아오고 또 누군가는 벗어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쥘 베른(Jules Verne·1825~1905).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번역된 작가. 그는 인류의 가슴에 영원한 여행의 꿈을 심어 준 작가다.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라지지 않도록,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끊임없이 꿈꾸게 한 영혼이 바로 쥘 베른이다. 그는 우리들의 시선을 달나라로 가게 했으며(달나라 탐험: Autour de la Lune), 바다 속으로 향하게 하고(해저 2만리: 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 하늘 높이 날게 하다가(기구를 타고 5주간: Cinq semaines en ballon), 지구 속으로 파고들게 하고(지구 속 여행: Voyage au centre de la Terre), 다시 80일간 세계를 넘나들게 한다.(80일간의 세계일주: Le Tour du monde en quatre-vingts jours) “그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인용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열한 살 때인 1839년, 동갑내기인 사촌누이 칼로린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쥘은 산호목걸이를 구해서 선물하려고 인도로 가는 원양선에 몰래 탔다가 루아르 강어귀에서 아버지에게 붙잡혀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때 소년은 ‘앞으로는 꿈속에서만 여행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80일간의 세계일주, 347쪽) 현실의 여행을 금지당한 쥘 베른은 법조계 집안의 전통에 따라 공부한 끝에 법학사 학위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작가의 길을 걷는다. 뛰어난 편집자이자 작가인 피에르 쥘 에첼(Pierre-Jules Hetzel, 1814~86)을 만난 그는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서게 된다. 1863년 그는 기구를 타고 5주간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경이의 여행(Voyages extraordinaires)’ 시리즈를 완성해 간다. “‘알려져 있는 세계와 알려지지 않은 세계’라는 부제로도 알 수 있듯이 ‘경이의 여행’은 인간이 아직 발을 들여놓지 않은 미개지, 망망대해에 떠 있는 무인도로의 여행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구의 중심으로 들어가거나, 극지방으로 가거나, 공중으로 떠오르거나,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가거나, 지구의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날아가는 등 웅장한 규모를 갖는 모험 여행이다. ‘경이의 여행’에는 지리학·천문학·동물학·식물학·고생물학 등 많은 정보와 지식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백과사전 여행’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인간 형성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유럽인의 근저에 숨어 있는 신화나 종교에 도달하기 위한 ‘통과의례 여행’이기도 하다. …(중략)… ‘경이의 여행’은 요즘 말하는 SF(공상과학소설)의 선구이기도 했다. 실제로 잠수함, 포탄에 의한 우주여행, 비행기계, 입체 영상 장치, 움직이는 해상 도시 등 현실보다 앞선 작품 속에서 ‘발명’되거나 실용화된 기계와 장치도 많다. 그런 것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에도 베른의 작품은 언제나 학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적인 정보를 많이 담고 있어서, 계몽적 과학소설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영원한 오마주의 원천 쥘 베른의 수많은 작품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우리들은 그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마침내 경이롭게 세계를 만나며 거듭 태어난다. 그의 작품을 읽지 않고 유년의 세계,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이가 얼마나 될까. 전 세계 수많은 푸른 영혼들에게 쥘 베른은 삶을 펼쳐가는 영원한 여행의 돛이다. 우리는 쥘 베른의 언어를 통해 미지의 의문부호 같은 삶을 풍요롭게 풀어간다. 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개혁클럽의 일원인 필리어스 포그는 어느 날 교통수단의 발달로 80일 만에 세계 여행을 마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공 여부를 두고 거액의 내기를 한다. 80일이라는 ‘시간’과 세계라는 ‘공간’, 이러한 장벽(Barrier)을 ‘인간’이 통과(일주)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간결한 설정, 여기에 다채로운 세계의 풍물을 담고, 도처에서 빚어지는 극적인 사건들, 개성적인 성격이 빛나는 인물들, 마지막의 반전 구조 등을 담은 80일간의 세계일주는 흥미진진한 요소들을 모두 담고 있다. 어렵지 않으면서 신기하고, 재미있으면서도 로맨스가 깔리고, 긴박하면서도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에 세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수많은 작품을 새롭게 낳은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의 수많은 여행기들 가운데 상당수는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1936년에 발표된 장 콕토의 다시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장 콕토 지음, 예담)만 해도 좋은 예다. 17세에 시단에 데뷔한 장 콕토는 소설가이면서 안무가, 극작가, 평론가, 영화감독, 삽화가, 디자이너, 무대장치가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 레종 도뇌르 훈장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과 같은 광휘를 자랑한 프랑스의 천재 예술가다. 그는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며 여행에 대한 욕망과 탐험에 대한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장 콕토는 이 작품을 각색한 유년 시절의 연극까지 기억하면서 쥘 베른(1828~1905)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소설 속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며 80일간 느긋하게 돌아다녀보자고 마음먹는다. 친구인 마르셀 킬이 아이디어를 낸 이 여행은 파리-수아르(Paris-Soir) 편집장 장 프루보스트가 받아들여서 마침내 이루어진다. 하지만 장 콕토 일행의 생각은 처음부터 빗나간다. “신문사는 그 유명한 ‘80일’이 단순한 이야기나 망상이기보다는 쥘 베른이 착상한 축음기, 비행기, 잠수함, 잠수부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걸작이 주는 설득력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데 1936년에 비행기도 타지 않고 필리어스 포그의 도박을 답습하여 연결편을 숨차게 갈아타며 그 이상적인 진로를 실제로 좇아가니 정말로 더도 덜도 아닌 80일이 걸릴 것 같았다.”(장 콕토, 16쪽) 결국 이들의 여행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자취를 찾아가는 한가로운 산책이 아니라 하나의 기록, 섬세한 퍼포먼스”로 바뀐다. 이들의 여행은 제1장 이탈리아에서 이집트로의 여행, 제2장 인도에서 싱가포르까지, 제3장 신비의 동양을 거쳐, 제4장 미국에서의 마지막 여정으로 크게 4부로 나뉜다. ‘너무 버거운 도시 로마’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이들의 여정만 보아도 이 작품은 아편과 허무에 취한 천재 예술가의 시적 표현이 근사한, 또 다른 80일간의 세계일주다. 이들은 1873년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프랑스인 하인 파스파르투가 80일 만에 끝낸 소설 속 상상 여행을 자신의 ‘버전(version)’으로 바꾸고 실제 여행까지 덧붙여 낸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다양한 오마주 작고한 고우영 화백(1938~2005). 그는 한국 만화계가 낳은 불세출의 천재였다. 탄탄한 그림 실력에 특유의 익살과 해학은 물론 판소리의 추임새와 랩의 기법 등 다양하게 구사한 서술기법 등은 현대 문학 이론의 도움을 받아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났다. 그는 무한 자유를 보여주는 천의무봉의 솜씨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절제가 무엇인지 아는 드문 작가였다. 그에 대한 상찬이 적지는 않지만 그는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작가다. 그가 그린 만화를 읽으면서 어린이들은 꿈을 꾸었고, 청소년들은 세상을 훔쳐보았고, 청·장년들은 일상을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1942년 16쪽짜리 딱지만화 ‘쥐돌이’를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 어린이 만화 ‘짱구박사’를, 그리고 1970년대 청년 만화 ‘임꺽정’으로 이어지는 그의 창작과정 자체가 한국 현대만화사의 정리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고우영 화백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만화로 극화한 것은 1970년대 후반, 어문각 클로버문고의 만화 시리즈에서였다. 당시에 나온 두 권의 흑백 만화였던 원본에 다시 컬러를 입히고 사진 자료도 바꿔서 새로 내놓은 작품이 80일간의 세계일주(고우영 글/그림, 자음과모음, 2005). “작가의 말은, 이 책을 새로 엮는 도중 고우영 화백께서 영면하시는 바람에 여백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음을 밝혀둡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편집부의 정중한 조사가 붙은 작품집이다. 그가 원작을 만화로 옮겼을 때 모든 인물은 마치 새로운 판본이라도 되듯이 생생하게 활력을 얻었다. 그가 그려낸 임꺽정과 홍길동은 물론 삼국지와 수호지, 초한지, 열국지 등의 수많은 인물은 고우영이란 붓 끝에서 새롭게 부활되며, 나중에는 텍스트 속의 이미지마저 좌우할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싫든 좋든 나는 고우영 만화에서 본 유비 모습을 삼국지의 유비로 가끔 떠올린다.) 하지만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는 놀랍게도 고우영 화백 특유의 다양한 서술 기법은 그리 나오지 않는다. 쥘 베른의 작품이 워낙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데다가 작품 전개에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하는 인물 파스파르투의 활약 때문이다. 파스파르투는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하인 역으로 나오는 인물. 주인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함께 여정의 곤경을 만들기도 하고 풀어나가기도 하는 약방의 감초, 사건 전개의 완급을 조정하는 인물이다. 파스파르투가 빠진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고우영 화백은 파스파르트를 자신의 이미지와 똑같이 그려낸다. 자신의 서술기법을 충분히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파스파르투이기 때문이다. 이는 80일간의 세계일주 1, 2(고우영 글/그림, 자음과모음)가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대한 오마주 이상의 오마주임을 보여준다. 한편, 파스파르투는 세계적인 아시아 배우 성룡에 의해 좀 더 창조적으로 바뀐다. 예전에 나온 영화(1956년작, 마이클 앤더슨 감독)와 다른 80일간의 세계일주(Around The World In 80 Days, 2004)(감독 프랭크 코라치)에서 성룡이 맡은 파스파르투는 런던 은행에서 불상을 훔쳐 고향인 중국으로 가는 인물이다. 성룡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자 괴짜 발명가인 필리어스 포그(스티브 쿠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며 마침내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이루어진다. 영화 미학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생생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 영화는 성룡이라는 인물의 캐릭터가 민첩하고 실수연발에 따뜻하고 정의로운 파스파르투와 정확히 일치하며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준다.(물론 나이가 들었기에 예전만 하지 못한 성룡. 과학 기술의 발달로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지만 가는 세월까지야 막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준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장 콕토에 의해서 실제 여행과 또 다른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다시 고우영 화백과 성룡에 의해서 만화와 영화로 멀티미디어 시대에 다양하게 리메이크 되었다. 여기에 그동안 나온 애니메이션과 PC 게임 등 수많은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모두 쥘 베른에 대한 한없는 무한 오마주 그 자체인 셈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오마주될 것인가.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우리 인류에게 끝없는 해방의 영감을 흥미진진하게 제공한다. 새로운 80일간의 세계일주 시도하기 나 역시 쥘 베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꿈꾸어오던 아이디어, 실제 여행을 하기 힘드니 독서 여행 글쓰기를 하면 어떨까. 독서는 저자와 나누는 대화, 곧 나 아닌 세계와 만나는 행위인 여행이다. 그렇다면 배낭여행을 떠나듯 가고 싶은 여행지를 자유롭게 정하고 일정을 잡으며, 내가 읽고 싶은 책, 그리고 읽어야 하는 책들을 읽어가는 여행, 그 과정과 흔적을 글로 써보자는 것.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세계 여행을 떠나려면 대개 인천 국제공항에 가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 출발지인 인천과 관련한 작품이나, 작가·등장인물·작품배경 등과 관련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실을 쓰거나 기타 관련 자료들을 읽으며 정리한 내용을 얹는다. ‘인천의 맛집 여행’ 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인천에 가면 이 음식(작품)을 꼭 맛봐라. 주인장(작가)은 어떻고, 식재료(작품의 공간과 인물, 관련 배경 등)는 어떻고, 실제 맛본 평가(기타 책을 읽은 뒤의 메모나 독후감 등)를 쓰는 식이다. 인천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실제 정보들(교통편, 숙박편 등)도 함께 집어넣고. 인천에서 떠난 세계 여행의 첫 기착지는 어디일까. 서쪽으로 떠나 중국의 상하이로 갈 수도 있고, 일본 교토로 가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탐미적인 소설 금각사의 무대를 밟아볼 수도 있다. 내가 어디로 떠날 것인지, 즉 어느 곳을 거쳐 어느 작품과 작가를 만날 것인지는 전적으로 내 자유고 내 취향이다. 요컨대 세계 각국을 책으로 여행하는 내용의 글쓰기를 꿈꿔본다. 이때 ‘책으로’는 여행을 가는 데 필요한 작품과 저자를 제시하는 내용이며, 독서라는 여행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즉, ‘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은 ‘자신이 다닌 곳의 작품과 저자, 배경 등에 대해 쓰는’ 실제 여행일 수도 있고, ‘자신이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가보고 싶은 마음에서 책을 통해 시도하는’ 가상 여행일 수도 있다. 그래. 그래. 그냥 뜻 가는 대로 써보자. 책과 만나는 과정이 실제/환상/책들로 이어지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책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이며, 실제인지 모르게 쓰는 글을 써보리라. 실제 여행이기도 하고, 대리 여행이기도 하고, 추체험 여행이기도 하고,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여러 겹에서 파헤쳐보는 탐사기이자 에세이, 소설 같기도 한 글. 나 역시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를 글쓰기로 펼쳐야 쥘 베른에 대한 부채 의식을 즐겁게 풀어낼 수 있을 듯싶다. 2009년에 본격적으로 시도하리라 마음먹는다.
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그러니까 여덟 살 이래 나는 줄곧 학교에 다니고 있다. 초로에 이른 여태까지 학교에 다니고 있다. 신작로 옆 측백나무 울타리 초등학교로부터 소읍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도회의 대학교를 거쳐 다시 그 도회의 중학교에 이렇게 다니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야트막한 단층 교사(校舍)는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학교 운동장은 세상에서 가장 넓은(?) 마당이었고, 그 운동장 가장자리에 줄지어 선 플라타너스는 세상에서 가장 장대한(?) 나무였다. 어디 이뿐인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도 학교를 통해서 만났다. 한 분 한 분 어떤 인간형의 전형으로서 큰 바위 얼굴처럼 우뚝 서 계시던 여러 선생님을 만났고,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여러 벗을 만났다. 학교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였고, 그 세계를 딛고 또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는 거대한 창(窓)이었다. 그랬다. 학교는 온전히 하나의 세계였다. 세상 그 여느 풍경과 마찬가지로 사람살이의 애환이 간단없이 굽이쳐 흐르는 현장이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위해 흘리는 땀과 눈물이, 탄식과 환호가 끊이지 않는 바로 그 삶의 현장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벗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학교는 여전히 늘 새로운 세계였다. 반짝이는 영혼을 지닌 어린 벗들이 그야말로 시시각각 생동하는 생명의 숲이었다. 이 생명의 숲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풍경을 만났다. 번다한 일상 속에서 대부분은 묻히고 흘러갔으나 어떤 풍경들은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옹이 같은 그 몇몇의 풍경들은 잊기는커녕 오히려 날이 갈수록 나의 내면에 또렷한 실루엣을 드리웠다. 그런데 그러한 풍경들 속에는 늘 어떤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람, 결국은 사람이었다. 세월 저편의 풍경이든, 엊그제 대면한 풍경이든 그 풍경들의 주인공은 늘 ‘사람’이었다. 지금 내 곁에 있을 리 없는 그 ‘사람’은 언제나 그날 그때의 풍경을 생생하게 되살려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이 되살려준 풍경을 무딘 솜씨로나마 옮겨 적곤 했다. 별리 윤효1)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갑자기 읍내 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울고불고 하였습니다. 전근 가시는 날, 선생님께서 떠난 신작로 길을 아이들이 줄지어 따라나섰습니다. 뽀얀 자갈 먼지 헤치며 뛰었습니다. 교감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도 말리지 못하였습니다. 김영태 선생님 부적국민학교 6학년 1반 우리 담임선생님은 풍금을 잘 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늘 음악책을 갖고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국어나 산수 수업을 하다가도 옆 반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면 얼른 음악책을 꺼내놓고 그 옆 반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6학년 때 그렇게 배운 노래들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잘 부릅니다. ‘별리’와 ‘김영태 선생님’은 나의 초등학교 시절 두 담임선생님을 노래한 삽화이다.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참 멋진 선생님이셨다. 운동장 조회 때면 구령대에 올라 하얀 지휘봉을 드셨다. 목소리 또한 미성이셔서 그 영롱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수업을 이끄실 때면 우리 반 아이들은 무엇인지 모를 감화를 받곤 하였다. 그런 선생님께서 갑자기 학교를 떠나시게 되었으니 우리들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린 나이에 경험한 이별의 슬픔이었다. 그리고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늘 음악책을 갖고 다니게 하셨다. 옆 반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면 음악책을 펼치라 한 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라 하셨다. 우리 교실에서는 좀처럼 풍금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우리들은 그런 담임선생님을 믿고 따랐다. 함석헌 1 새 담임선생님 오신다고 아이들 정거장으로 내달릴 때, 일제히 환호하며 정거장으로 정거장으로 내달릴 때, 가만히 걸음을 멈추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내달린 길 되돌아 교실로 향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교실로 돌아온 아이는 말끔히 청소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시는 책상이며 교탁이며 그리고 아이들 책걸상이며 유리창까지 정성스레 쓸고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나라 서북 끄트머리 용암포 바닷가 소학교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교실에서 새 담임선생님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새 담임선생님은 그 환하게 설레는 눈빛 중에서 가장 맑은 눈빛 하나를 보았습니다. 함석헌 2 1930년 무렵, 아직 서른도 되기 전의 선생이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나라도 제대로 건사 못하던 그 딱한 시절에 웬 사회주의 바람이 밀어닥쳐서, 학생들도 온통 무슨 동맹인가를 만들어 늦가을 가랑잎같이 몰려다니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는 그 학생들이 교무실로 우르르 몰려와서는 ‘민족주의 선생들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외치며 끝내는 손찌검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늘 흰 고무신에 한복을 차려입고 우리말로 우리 역사와 수신을 가르치던 선생도 그만 치도곤을 당하였습니다. 자리에 앉은 채 두 눈 꼭 감고 고스란히 당하기만 하였습니다. 며칠 후, 어떤 학생이 찾아와 그때 왜 두 눈을 꼭 감고만 계셨느냐고 여쭈었습니다. “나는 수양이 덜 된 사람이라서 나를 때리는 학생의 얼굴을 알게 되면, 그 후부터 그 학생을 전과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네. ” 그 학생은 선생의 그 깊고 넓은 오지랖에 파묻혀 그만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이 오산학교에서 늘 흰 고무신에 한복을 차려입고 역사와 수신을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함석헌 1’과 ‘함석헌 2’는 내가 어른이 되어서 다니고 있는 오산학교의 졸업생 씨 함석헌(1901~1989) 선생에 대해 읽었거나 들었던 풍경이다. 평생토록 “깨어 있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쳤던 들사람 함석헌 선생은 어려서는 물론 성년이 된 이후에도 이처럼 곡진한 순정의 사람이었다. 새로 부임하시는 담임선생님을 위해 책상과 교탁과 교실 구석구석을 정갈하게 쓸고 닦았던 그 마음이 훗날 선생을 한 학교의 교사를 넘어 겨레의 스승으로 설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배우는 게 일이든 가르치는 게 일이든 학교에 다니는 이들은 과연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지 헤아릴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김학표 선생님 휴지를 줍고 계단을 쓸었다 복도에 붙은 껌을 떼고 거미줄을 뗐다 수도꼭지를 고치고 소변기를 닦았다 막힌 대변기를 뚫었다 꽃을 심고 풀을 뽑았다 해진 출석부를 꿰매고 재떨이를 씻었다 교감 할 일이 그렇게 없냐고 수군거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낙엽 지면 낙엽 쓸고 눈 내리면 눈을 쓸었다 ‘김학표 선생님’은 나의 청년교사 시절 만났던 어느 선배 선생님의 초상이다. 이 선생님께선 학교 상장에 흔히 씌어 있는 표현대로 근면 성실한, 그리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생활인이셨다. 평소 낚시를 즐기셨는데, 어느 해인가는 국어책을 내려놓고 교감선생님이 되셨다. 그 무렵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의 하루하루는 가히 ‘헌신’이라 일컬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셨다. 몸소 학교의 궂은일을 애써 찾아 도맡으셨다. 우러르게 되었다. 꽃이 피긴 피는데 아이들에게 도라지꽃을 보여주고 싶어서 파주 어디쯤 가서 그 뿌리 넉넉히 얻어다가 교정 가득 심어놨더니 꽃이 드디어 피긴 피는데 하얀 꽃 보라 꽃이 피긴 피는데 그때가 하필 방학 때지 뭐예요. 얼마나 섭섭하던지 얼마나 속상하던지 그 도라지꽃 생각하면 지금도 잠도 안 와요. 아름다운 학교 1 판매원 없이 운영하는 협동조합에서 학생들 모두 돌아가고 난 뒤 결산을 해보니 공책 한 권 값이 비었다. 이튿날, 학생들 모두 돌아가고 난 뒤 결산을 해보니 공책 한 권 값이 남았다. ‘꽃이 피긴 피는데’는 내가 즐겨 찾는 야생화모임에서 만난 서울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일화이다. 교장선생님께선 시멘트 문명의 그늘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 벗들에게 이런 꽃들의 세계가 우리 곁에 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수더분하면서도 청초한 자연의 은총을 어린 벗들 곁에 가득 펼쳐놓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지으시던 그 교장선생님의 표정을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 도라지꽃의 화기(花期)를 왜 미리 고려하지 않았느냐고 그 교장선생님을 나무랄 일은 이미 아니었다. 생동 개학하고 한 사흘 지나자 계단 끝에 덧댄 철판 위에 여름내 곰팡이처럼 번진 붉은 녹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하더니, 한 열흘 지나자 말갛게 씻기었다. 아이들이 발끝으로 피워낸 빛이 채송화처럼 환하다. 학교 안에 머물고 있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세계와 우리 사회는 매우 빠르게 변화를 거듭해왔다. 학교 또한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모색을 꾀해왔다. 그러나 경제적 효율과 조급한 성과만을 숭상하던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학교를 향해 다투어 종주먹을 대기 시작하였다. 붕괴되었다느니, 망했다느니, 죽었다느니 하는 그 민망한 삿대질이 십자포화처럼 학교를 향해 쏟아졌던 것이다. 안타까웠다. 학교 안에 머무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학교는 아직도 따뜻한 인간애가 흐르는, 저마다의 어린 꿈들이 알차게 영글어가는 아름다운 삶터임을 알리고 싶었다. 어쩌면 항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학교 1’과 ‘생동’은 이런 무렵에 씌어졌다. 어린 벗들과 동행하며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내가 직접 보았던 장면들을 조촐하게 옮겨 적은 것이지만, 어린 벗들이 이룩해내고 있는 삶의 가치가 이미 충분히 높다랗다는 것을 나는 이 두 시편을 통해 헤아리고 싶었다. 학교에는 누가 사는가? 어떤 이들이 무슨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일이다. 오직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싱그럽게 가꾸기 위해 애쓰는 맑은 영혼들이 산다고. 그 어린 영혼들을 따뜻한 눈길로 감싸 안아주는 넓은 가슴들이 산다고. 그리하여 교학상장(敎學相長), 서로 동행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날들을 열어가고 있다고. 다만 먹빛 세사(世事)에 얽매여 날로 무디어져 가고 있는 나의 이 가슴이 문제다. 이 가슴의 냉기를 다시 따뜻하게 지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일 아침 만나는 어린 벗들에게 물어보아야겠다. 고백 훤칠하니 의젓하고 늠름하여 바라볼수록 성스러운 삼나무과 침엽교목이 콘크리트 교사에 치여서 가지를 제 뜻대로 드리우지 못하고 있다 나 또한 커 가는 아이들 오금만 저리게 하는 것 같아 스스로 부끄러워지다 스승의 날에 저 맑은 눈망울들과 한철을 살았건만 내 눈은 점점 흐려져 가고, 저 착한 눈빛 속에서 꼬박 또 한철을 살았건만 그 눈빛 속 좁다란 길을 나는 걸을 수 없네. 오늘은 다만 물푸레 잎사귀가 깔아놓은 햇살방석에 앉아 내 젖은 몸을 말리네. 교원들이 참여하는 독자와 함께하는 새교육은 수필, 동화 등의 문학작품, 교단일기, 교육정책 제언, 색다른 수업 등 주제의 구분 없이 모두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새교육 이메일 sae@kfta.or.kr로 원고를 보내주십시오. 관심 있는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진격을 재촉했고 영국군과 프랑스군 34만여 명은 덩케르크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랐다. 히틀러는 1940년 5월 24일 돌연 독일군의 파죽지세 진격을 중지시켰고 그로 인해 시간을 번 영·불군은 아슬아슬하게 덩케르크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진격을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전황은 어떻게 달랐을까? 제2차 세계대전 초반전은 ‘당나귀전쟁’이라 비판받지만 영국과 프랑스도 개전 초에 독일군의 북유럽으로의 진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실책을 범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점령한 데 이어 덴마크 전역과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했다(1940. 4~6).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투입해 노르웨이를 지원했으나 독일 공군에 압도당해 철수했다. 독일은 1940년 5월에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 만에 장악했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선을 뚫은 후 파리를 장악한(6월 15일) 독일은 6월 22일에 프랑스의 3/5를 장악했다. 소련 또한 라트비아 3국에 이어 핀란드를 침공하는 등 이른바 ‘대조국전쟁’에 나섰다. 최고의 전략가임을 자랑한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해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지만 전쟁 초기 덩케르크작전에서도 큰 실책을 범했다. 개전 초기의 벨기에 전선. 연합군의 북부군과 남부군 사이의 모든 연락은 아르덴에서 솜강을 향해 활(弓) 대형으로 서진하던 독일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브뤼셀 동쪽의 다일 방어선에서 셸트 강으로 퇴각한 북부의 연합군은 포위되었고, 영국군 사령관 거트 공(公)은 이미 1940년 5월 19일에 바다를 통한 영국군(BEF)의 철수를 고려했다. 그러나 그는 공세적 작전을 펴라는 런던으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5월 21일에 아라스로부터 남쪽으로 독일군의 오른쪽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반격은 독일군 사령부를 잠시 놀라게 했을 뿐 작전의 성공에 필요한 무력(武力)이 크게 부족했다. 그 사이 하인츠 구데리안 휘하의 독일 탱크들이 볼로뉴와 칼레를 휩쓸고 올라온 다음 덩케르크 부근 방어선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4일. 불가사의한 히틀러의 명령이 그들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그래서 구데리안의 탱크들은 덩케르크로 돌진할 수 있는 위치로부터 해협방어선으로 물러났다. 당시 덩케르크는 영국군의 주력부대가 유럽대륙으로부터 철수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고, 영국 내각은 결국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철수를 결정했다. 영국군의 해안으로의 철수는 독일군이 덩케르크를 점령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했다. 절체절명의 다급한 상황에서 영국 해군성은 철수작전에 도움이 될 경우 아무리 작은 배일지라도 징발했다. 철수는 5월 26일에 시작되었지만 27일에 이르러서는 분초를 다투는 일이 되었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휘하 독일 6군단의 진격으로 좌익과 중앙이 무너진 벨기에가 휴전을 호소한 데다 독일공군(Luftwaffe)이 27일에 폭탄을 퍼부어 덩케르크의 부두가 기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마일에 걸치는 해변에 모여 있던 수만 명의 영국군은 해군으로 징발됐지만 대개 아마추어 뱃사람이 운행하는 소형 선박들에 올라타 철수해야만 했다. 다행인 것은 다수의 영국군이 파괴된 부두의 방파제를 이용할 수는 있었다는 점이다. 작전은 6월 4일에 종료됐고, 영국군 19만 8000명과 프랑스군과 벨기에군 14만 명이 구출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중무기와 장비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으며 41척의 구축함 중 6척은 침몰하고 19척은 심한 손상을 입었다. 구출된 병사들은 영국군 정예병의 상당 부분을 점했고 따라서 연합국 측으로서는 매우 값진 작전이었다. 1940년 독일군의 진격으로 덩케르크 해안지대에 포위된 영국, 프랑스군들.사실 영국에서 출격한 영국 공군기의 폭격도 덩케르크 철수작전의 기적적 성공에 기여했다. 하지만 화급한 상황에서 별다른 희생 없이 작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구데리안의 탱크들을 멈추게 한 히틀러의 24일의 명령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그 명령을 내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즉, 독일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가 공군만으로도 덩케르크에 집결한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잘못 확신했고, 히틀러 자신도 영국군이 굴욕적으로 항복하지 않을 경우라야 평화조약을 더 용이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육군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비슈가 히틀러를 설득해 독일군을 덩케르크로 재진격시켰을 때는 이미 연합군이 철수한 3일 이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영국군의 보다 강력해진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진격을 다시 중지시키고 남쪽으로 진군케 하는 한편 솜-아이슨(Somme-Aisne)선 공격을 준비했다. 프랑스 북부에서의 전투는 구데리안과 라이헤나우가 남쪽으로 향한 후 퀼러 휘하의 전사들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독일군은 3주 동안 6만 명의 희생자를 낸 대가로 100만 명 이상의 포로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22만의 연합군이 북서 프랑스의 항구들(셰르부르, 생말로, 브레스트, 생나제르)에서 구출되었다. 그리하여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병사들과 합쳐 모두 55만 8000에 이르는 연합군이 사지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대전의 추이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마지노선이 뚫리고 뒤이어 파리가 점령되고(6월 15일) 국토의 3/5이 점령되자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휴전을 제의해 성사되었다(6월 22일). 그리고 페탱 원수를 수반으로 하는 꼭두각시 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런던으로 탈출하여 자유프랑스를 이끈 드골장군은 다음 날 BBC 방송을 통해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프랑스는 고립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도 구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한(6월 10일) 가운데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동남부 유럽을 석권하고 북아프리카까지 장악한 히틀러는 1940년 8월부터 공군기를 동원하여 영국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했다. 영국은 수상 처칠의 지도하에 타협을 거부했고, 히틀러는 결국 영국 상륙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영국의 저항으로 서부전선에서 결정적 승리를 얻지 못한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한 다음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결국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기 시작했다. 소련을 과소평가한 히틀러는 소련을 제압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 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타도하고 나아가 독일의 생활권을 동유럽에서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던 것이다. 9월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육박하고 10월에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의 진격을 자랑하던 독일군은 그러나 소련의 후퇴작전과 동장군(冬將軍)에 무릎을 꿇고 결국은 수비태세를 취해야 했다. 한편 미국은 1941년 3월에 영국에의 전쟁물자 공급을 승인함으로써 중립을 포기했다. 이어 동년 8월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처칠과 더불어 대서양상의 영국전함에서 ‘대서양헌장’을 발표하고 전후에 추구할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선언했다. 이후 일본이 진주만공격(1941년 12월 8일) 직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 하여 미국도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 사이 전선은 더욱 확대되어 일부 중립국(포르투갈·스위스 등)을 제외한 전 유럽이 전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하지만 1942년 가을에 볼가 강에 도달한 독일군은 사력을 다했으나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패해 후퇴해야 했고, 그것은 전쟁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1943년부터 주도권을 장악한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8월 15일에는 연합군이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에 상륙했다. 그 이전에 아프리카전선에서 롬멜의 독일군에 반격을 개시해 튀니지를 탈환한 연합군은 1943년 7월에는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9월에는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무솔리니 정권은 무너지고 이탈리아는 연합군과 제휴했다.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에 연합군의 진격이 일시 멈칫했으나 1944년 6월에 결국 로마를 탈환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스탈린그라드전 이후 독일군을 추격하던 소련군은 1944년 말에 독일국경에 도달했다. 생포된 독일군은 잔혹한 보복을 당했고 요새들은 파괴되었다. 동시에 서부에서도 연합군이 독일 국경을 넘었다.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에 처한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독일은 1945년 5월 7일에 항복했다. 그리고 일본의 진주만공격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도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고 9일에는 소련이 일·소 불가침조약(독일의 소련 침공 2개월 전인 1941년 4월 13일에 일본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을 깨고 만주로 진격하던 중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전쟁이었다. 폭격기나 전투기는 물론 개량된 화포와 자동화기 등이 엄청난 살상력을 자랑했다. 특히 원자탄의 가공할 파괴력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원자탄의 파괴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폭격기 편대들은 인구밀집 도시들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다. 1945년 11월의 교황청 통계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는 2200만이 넘고 부상자는 3440만이었다. 다른 통계에 따르면 교전국의 사망자와 실종자는 1500만이 넘었다. 미국도 1940년 경우 미국인 450명 중의 1명에 해당하는 30만 명이 전사했다. 물론 중국·한국·필리핀 등 아시아인도 다수 희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3배를 넘는 희생자들 가운데는 민간인도 다수 포함되었다. 전쟁물자의 수요 또한 엄청나게 증대해 국가가 온통 군수공장으로 변하고 전 국민이 군수품의 생산에 매달려야 할 형편이었다. 더불어 이전의 사회질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추방되거나 적군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특히 독일·폴란드·소련 거주 유대인을 비롯해 다수의 유대인은 집단수용소의 가스실 등에서 살해되었다. 독일군이나 일본군에 점령된 여타 지역의 사람들도 살육당하거나 비인간적 학대를 받았다. 피정복민이나 포로 군인들은 독일과 일본의 전시경제를 위해 착취당했으며, 어떤 저항도 폭력으로 진압되고 털끝만한 혐의도 죽음으로 다스려졌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전쟁도발자들은 전후 개별적인 책임도 져야 했다. 뉘른베르크전범재판과 맥아더사령부에 의한 일본의 전범재판에 의한 처벌이 그것이다. 히틀러가 오판하지 않았고, 따라서 연합군을 덩케르크로 몰아붙이면서 쇄도하던 독일군의 작전을 5월 24일에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대전의 초반 전황은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을까? 영·불 연합군은 덩케르크에서 치명적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이 전의를 상실해 히틀러와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북부의 연합군이 독일 탱크부대의 노도와 같은 공세에 포위되거나 후퇴해야 할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연합군이 34만에 달했고 그들이 정예군이었음을 염두에 둘 경우 히틀러의 불가사의한 명령이 없었을 경우 연합군이 개전 초반에 입었을 손실과 그 손실이 대전 전반에 끼쳤을 영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