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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초등학교와 금당 학부모회는 5일(수요일) 금당초등학교(교장 김한석) 과학실에서 학부모 회장 및 임원 그리고 학부모회원을 대상으로 ‘북아트 만들기’와 ‘NIE교육’을 주제로 학부모회 연수를 실시하였다. 김한석 교장은 인사말을 통해 '가정교육을 함에 있어 타인과의 관계에서 꼭 필요한 사람,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행복해지는 삶을 사는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모두가 행복해 지는 길‘이라며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학부모님들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학교 교육의 참여가 행복한 교육공동체를 만드는 지름길일 것'이라며 학부모의 참여와 협력을 부탁하였다. 이날 연수에 참여한 한 학부모는 ‘NIE 교육에 대해서 막연히 듣기만 했는데 오늘 연수에 참여하고 보니 쌓아두기만 하던 신문을 버릴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좋은 교재로 활용하겠다.'라고 하였고 북아트 만들기에 참여한 또 다른 학부모는 '아이들에게 책의 역사와 유래를 알고 실제로 책을 만들고 내용을 채워 가는 과정이 너무 유익 했다.'며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학부모회 임원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핬다. 앞으로 금당초등학교는 학교 교육 전반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학부모회의 활성화를 통해 금당교육발전을 이끌 수 있는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할 예정이며 10월 말에도 올바른 학부모회 운영을 주제로 연수를 진행할 계획이다.
지난 10월 5일 전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비보가 전해졌다. 애플사의 CEO이자 에니메이션 회사 픽사의 대표를 지낸 컴퓨터계에서 혁신가로 불리우는 스티브 잡스의 타계 소식이 그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으로 5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삶과 그의 인생 역정이 우리의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고 하겠다. 애플 컴퓨터 회사는 컴퓨터계에서 혁신적인 회사로 통한다. 아이맥에서 부터 시작해서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까지 누구나 사용하기 쉽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로 전세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아이 시리즈는 스티브 잡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사람들은 일반적인 컴퓨터와는 뭔가 다른 애플의 이런 점들에 환호하고 열광하였다.그래픽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했던 아이맥 컴퓨터부터 아이팟 터치와 현재 스마트 폰의절대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아이폰시리즈 등은 혁신과 창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 교육은 혁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상을 이끌어 나갈 인재양성도 무척 중요하고, 새롭게 생각하는 창의적인 사고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미래사회에서는 지식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많은 정보를 어떻게 자신만의 것으로만들어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배움 중심 수업이고 지금의 교육이 그렇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의 교육은 현재창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비록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창의와 인성을 어떻게 교육시키느냐가 과제로 남았다. 교과부와 각 시도 교육청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창의, 인성을 지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체험학습을 지원하고, 교과연구회를 통해 연구하고, 다양한 모델학교를 시범 운영하여 창의성과 인성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교육은 뭔가를 알려주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고 다르게 생각하여 새롭게 바꾸는 아이디어를 개발 시키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정보화와 미디어로우리가 배우고 알수 있는 길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것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내것으로 만들수 있도록 지도하고 교육시켜야 하는 것이 지금의 학교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이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계의 큰 별이 짐을 아쉬워 하고있다. 세계 각국의애플 관련 회사와 상점에는 한 시대의 혁신가를 잃은 아쉬움을한 송이 국화 꽃과 그가 만든 아이폰, 아이패드 화면으로 달래고 있다. 그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1주일만에 입양되었고, 구슬러야만 학교에 가는 문제아 였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6개월 만에 자퇴서를 냈고. 회사에 들어가서는 인도여행을 간다며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한 끝에 세계에서 제일 가는 혁신적 기업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우리교육도 이제다양한성공과 실패의 경험들로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인재를양성해 나가야한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연설을 마무리한이 한마디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교육의 방향을 말해 주고 있다. " 항상 갈망하면서 우직하게 나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스티븐 잡스 연설 전문 오늘 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 중 한 곳에서 새 출발을 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내가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경우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내 인생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 그저 세 가지의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얘기는 점(點)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리드 대학을 첫 6개월 다닌 후 그만두었습니다. 그후 18개월 정도 청강생으로 머물렀고 그 후 진짜로 그만두었습니다. 내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제가 태어나기 전이었습니다. 내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는데, 나를 낳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생모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면 바로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모두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입양키로 한 부부는 여자아이를 원했다며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있던 내 부모(양부모)는 한밤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내아이가 있는데, 아이를 원하십니까?" 부부는 "물론입니다"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생모는 나중에 내 어머니(양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내 아버지(양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생모는 이 때문에 최종적인 입양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다가, 몇 달 후 내 양부모가 나를 나중에 대학에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서야 마음을 바꿨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17년이 지난 후 나는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비싼 학비가 드는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 계급의 내 부모는 저축한 모든 돈을 내 대학등록금에 썼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 나는 그만한 돈을 쓰는 데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내 삶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는 내 부모가 그들이 한 평생 저금한 돈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믿고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때는 다소 두려웠지만, 되돌아보면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결정한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는 그 순간, 나는 내게는 흥미가 없었던 필수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어졌고, 내게 흥미롭게 보이는 다른 과목들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낭만적인 건 아니었습니다. 나는 기숙사에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 방의 바닥에서 잤습니다. 음식을 사기 위해 5센트씩 주는 콜라병을 되돌려줬고, 일요일 밤에는 해어 크리슈나 사원에서 일주일에 한번 제공하는 좋은 식사를 먹기 위해 도시를 가로질러 7마일을 걸어가곤 했습니다. 나는 그게 좋았습니다. 이렇게 내 호기심과 직관에 따라 부딪친 것들 중 많은 것들이 나중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들로 나타났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리드대학은 아마도 그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서예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 전체를 통해 모든 포스터, 모든 표지물들은 손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서체였습니다. 나는 학교를 그만 뒀고, 정규과목들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 지를 배우기 위해 서체과목을 듣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와, 다른 문자조합사이에 다양한 크기의 사이공간넓이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알아내지 못하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미묘함을 갖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중 어떤 것도 내 인생에서 실제로 응용될 것이라는 어떤 희망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했을 때,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맥에 디자인했고, 맥은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첫번째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대학에서 그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다면, 맥은 결코 다양한 글자체나 font사이의 사이공간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윈도우는 단지 맥을 복사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떤 개인용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 글자체를 갖지 못했을 겁니다. 만일 내가 대학을 그만 두지 않았다면, 나는 서체과목을 등록하지 않을 것이고,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글자체를 갖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연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되돌아보니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되돌아 볼 때 점을 연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점들이 언젠가는 여러분 미래에 어떻게든 연결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내면, 운명, 인생, 카르마, 그리고 그 무엇이든, 그 무엇인가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나를 결코 낙담시키지 않았고, 그것이 내 인생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나의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인생에서 일찍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찾았습니다. 우즈(스티브 우즈니액, 애플 공동창업자)와 나는 내가 20살 때 우리 부모님집 차고에서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이 지난후 애플은 차고에서의 우리 둘에서, 4천명 이상의 직원을 가진 20억 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인 맥킨토시 컴퓨터를 1년 빨리 시장에 출시했는데, 그 때 나는 막 30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수 있을까요? 애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나와 함께 회사를 운영할 내가 생각하기에 능력이 많은 사람을 고용했고, 첫 해 무렵쯤엔 잘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에 대한 관점이 차이가 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우리는 추락했습니다. 그때 우리 회사 이사회는 그의 편에 섰고, 그렇게 나는 30살에 쫓겨났습니다. 그것도 매우 공식적으로 쫓겨났습니다. 나의 성인으로서의 전 인생의 중심이었던 것이 사라지고, 그리고 그것은 참혹했습니다. 몇 달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정말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기업의 전 세대로 물러나는, 내게 전해졌을 때 바톤을 떨어뜨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데이비드 팩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났고 그들을 그렇게 못살게 군 데 대해 사과했습니다. 나는 아주 공식적인 실패자였고, 심지어는 도망쳐 떠나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천천히 내게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했던 일을 사랑하고 있다. 애플에서의 사건이 그것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나는 거부 당했지만, 나는 아직도 내 일을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일은 지금까지 내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 중 가장 최고의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성공한 것에 대한 부담이 다시 모든 것에 확신할 수 없는 초보자의 편안함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가장 창조적인 기간 중 하나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5년동안 나는 NeXT라는 회사와 Pixar라는 이름의 또 다른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내 아내가 된 멋진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에서 첫번째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놀라운 반전 속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나는 애플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현 르네상스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린과 나는 멋진 가족을 이뤘습니다. 만약 내가 애플에서 해고 당하지 않았더라면, 이 중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끔찍한 맛의 약이었지만, 환자에게 필요했던 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인생은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내가 계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내가 했던 일을 내가 진심으로 좋아했었던 것을 내 자신이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에서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에서처럼, 그것은 해가 지나면서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17살이었을 때, 나는 이 비슷한 인용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그 후 33년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내가 오늘 하려고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할까?" 그 답이 여러 날 동안 "아니오"라고 이어질 때, 나는 무언가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인생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모든 자부심, 모든 좌절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런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이 무언가 잃을 것이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벌거숭이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따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약 1년 전 나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나는 아침 7시30분에 스캔을 받았고, 췌장에 분명한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치료가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 거의 확실하다면서, 내가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내게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죽음의 준비하라는 뜻이죠. 그것은 앞으로 10년동안 내가 아이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단지 몇 달 안에 말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결정됐으니, 그것이 가족을 위해 가능한한 쉬운 일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 진단을 하루종일 생각했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나는 목구멍을 통해 내시경을 넣는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몇 점의 세포를 췌장에서 떼어내 조사를 했는데, 의사들은 놀랍게도 나의 경우 매우 드물게도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췌장암임이 밝혀졌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이것이 내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몇십년간은 그렇기를 바랍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죽음이라는 것을 유용하긴 하지만, 지적 개념만으로 알고 있었던 때보다는 좀 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천국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조차 거기에 가기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은은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목적지입니다.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가장 훌륭한 창조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교체를 만들어 내는 매개체입니다. 죽음은 낡음을 청소하고 새로움을 위한 길을 열어줍니다. 지금 이순간, 그 새로움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날,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을 그 때, 여러분들도 점차 낡음이 되고 청소될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진실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통념에 의한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 "전세계 목록"이라는 놀라운 책이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에게 그 책은 바이블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튜워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그는 시적인 면들을 가미해 책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책이 나온 게 1960년대로,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도 데스크탑 출판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타이프라이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종이책 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는데, 구글이 나타나기 35년전의 일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이 책을 여러 번 개정했고, 결국 그 책의 역할을 다 했을 때 최종판을 내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바로 내가 여러분의 나이 때입니다. 그 최종판의 뒷표지에는, 여러분이 탐험여행을 하다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타기 위해 손을 드는 곳과 같은, 이른 아침 시골길을 찍은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그 밑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늘 배고프고, 늘 어리석어라"(Stay Hungry. Stay Foolish) 이것이 그들이 책을 더 이상 찍지 않기로 하면서 한 작별의 메시지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이러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졸업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그러기를 바랍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늘 배고프고, 늘 어리석어라 감사합니다. 스티브 잡스 연설문 원문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ve got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go to college. This was the start in my lif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지난 10월 5일 도학초등학교(교장 박영선)에서는 겨울철을 앞두고 화재예방을 위한 소방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날 영원 소방서에서 구급차와 소방차 및 소방대원 3명을 지원하여 어린이들이 실제로 화재를 진압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소화기구 사용법을 배우는 체험시간을 가졌다. 전교생이 참여한 이 번 소방훈련은 소방대원의 지도로 개인별로 소화기를 사용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높은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소방차가 화재를 진압하는 물기둥이 하늘로 솟구칠 때는 어린이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초기화재 진압을 위한 장면을 목격하기 위한 모형 화재현장을 통해 소화기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으며 화재로 인한 재산피해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되었다. 이 훈련을 통해 화재예방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다지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요즈음 부모 노릇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세상이 변하고 있어 전에는 나이를 먹은 것 만으로도 권위가 있었지만 이젠 실제적인 파워를 갖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춘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더욱 그러하다.자녀와의 갈등이 너무 심하다는 것은 우리 나라만의 이야기 일까?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을 딱 하나 꼽아야 한다면 “네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이 아닐런지?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를 목적이 있어야 우리는 결승점에 다다를 수 있고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려가고 싶은 목적지가 없는 아이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다 줘도 듣지 않는다. 한국 시각 장애인 최초로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표가 없으면 하버드 대학에 가도 성공할 수 없다.” 그가 가진 자료에 의하면 1990년대 중반 하버드 입학생 중 한국학생 비율은 6%였으며 그들의 SAT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그러나 같은 해 낙제생 중 한국 학생의 비율은 10명중 9명 정도로 가장 높았다."고 하니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하버드대학에 들어갔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하버드대학을 가는 이유가 분명하게 없으니 낙제를 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아마 누군가의 힘, 동력에 의존하여 대학에 진학은 하였으나 스스로 노력한 경험이 부족하기에 견디어 내기 어려웠으리라 추측하여 본다. 강영우 박사는 그 이유에 대해 한국 학생에게는 장기적 목표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목표는 결코 남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통하여 체화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서울의 유명대학 경영학과를 중퇴한 김예슬양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에서 “열심히 달려 대학을 갔지만 그곳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은 살아가는 삶의 동력이 항상 뒤따르면서 도움을 주어야 살아가는 아이들이 아니라 세상의 어려운 일을 감당하면서 인내를 배우는 교과목을 경험하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조금만 걸어도 피곤하고, 조금만 더워도 짜증나 못참겠다하고 불평하는 아이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개척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제 우리 부모들이 자녀에게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제대로 세우면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가 없다면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인은 신문을 보고 정보를 얻는다. 방송을 보고 들으며 연예 오락을 즐긴다. 인터넷을 항해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현대인의 특징이다. 한 마디로 매스컴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매스컴은 대규모로 조직된 집단이고, 정보를 대량으로 복제하며 전달하기 때문에 수용자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문화 대부분도 역시 대중매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특히 매스컴의 언어는 우리의 감정과 의식에 작용해서 언어생활에도 영향을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청소년의 언어는 심각하다. 인터넷의 게시판 등의 글을 보면 어느 나라 글자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다. 그러다보니 현실에서 맞춤법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문제는 꾸준히 지적되어 온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접기로 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신문 등의 표제어가 거칠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섬세하고 정서적 깊이가 있는 표현보다는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언어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 21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치른 두 팀의 전반기 격돌에서는 부산이 인천에 2-1 승리를 거뒀다 ○ 월드바둑마스터스 16강전에서 세계 바둑의 ‘빅4’라 할 이창호-이세돌-구리-쿵제가 때 이르게 격돌했다 ○ LG-한화-두산, 5위 싸움 어떻게 전개될까 ○ 여야, 서울시장 선거전 본격 돌입, 치열한 기싸움 ○ 맨유, 노리치 시티 2-0 격파, 박지성 어시스트 ○ 백화점 17일간 가을세일 혈전 돌입 ○ 마트 ‘반값 전쟁’, “그래도 밑지진 않아요” ○ 보험사 MA 잇단 좌초, 금융불안 ‘직격탄’ ○ 무한도전 신세경 예능감 폭발 ‘물 만난 고기 같아’ ‘격돌, 싸움, 돌입, 격파, 혈전, 전쟁, 직격탄, 폭발’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이 말은 모두 전쟁과 관련된 말이다. ‘격파’는 ‘쳐부수는 것’이고 ‘혈전’은 ‘피를 흘리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들어서 무감각해진 단어지만, 사실은 무시무시한 표현이다. 운동 경기에도 어울리지 않고, 선거에도 안 어울린다. 심지어 백화점 가을 세일을 ‘혈전 돌입’이라고 했는데 순화해서 써야 한다. ○ 최경주, 강풍과 퍼팅난조로 순위 곤두박질. 김영규 이븐파로 단독 선두 바람과의 전쟁이었다 ○ ‘가문의 영광4’ 흥행바로미터 유료시사서 ‘통증’, ‘챔프’ 꺾다 ○ 연 800조원 세계 의약품 시장, 신약 개발로 뚫는다 ○ 개봉 10일 만에 200만 돌파, ‘도가니’의 질주 ○ JYJ, KBS 부적격 판정 발끈! ○ 김윤아 “남편 김형규, 자우림 사진마다 끼어 있더라” 섬뜩 ○ 코스피, 1730선까지 ‘폭삭’ ○ 런닝맨 소녀시대, ‘내숭은 가라’ 짝꿍 쟁탈전에 막춤까지 ○ 이휘재 미스코리아, ‘연기하기만 해봐’ 엄포 ○ LG 두들긴 두산 11-1 승 세상에 접촉하는 모든 일에 있어 첫인상이 중요하듯, 사람들은 신문을 볼 때 표제어에 영향을 받는다. 인터넷 뉴스도 마찬가지다. 제목에 이끌려 클릭을 하게 된다. 신문과 인터넷 뉴스는 표제어로서 특히 독자의 주의를 끌게 하기 위하여 활자 따위를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가시를 읽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자극적인 표현을 한다. 그러다보니 표제어는 현실 속에서 방법론상 어느 정도 묵시적 변칙성이 용인되고 있다. 그러나 신문 표제어가 사전적 정의에서 벗어난 쓰임이 일상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울러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폭로적인 것은 경계해야 한다. 특히 최근에는 거칠고 난폭한 표현이 일반화되었는데 삼가야 한다. 신문 표제어는 곧 신문의 제목으로써, 신문 기사내용을 형상화하고 개괄하여 보여주고 있다. 표제어는 헤드라인(headline)이라고 해서 뉴스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표제어는 정확성, 간결성, 명료성을 지닌다. 즉, 신문의 표제어는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고 대표하면서 독립적인 의미와 기능을 갖춘 독특한 표현 양식이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언어의 영향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어느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순화되지 못한 말들이 매체를 타고 우리 사회에 확산되면, 정서와 언어생활에 악영향을 끼친다. 신문이나 인터넷의 언어 사용에 대한 자정 노력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의무 사항이라는 책임감이 확산되어야 한다.
러시아는 그림이 많은 나라다. 특히 모스코바 34번 공립학교에도 학생들이 그린 그림이 벽에 많이 걸려 있었다. 그림의 나라다웠다. 러시아 하면, 그림은 아름답고 문학은 심오하며 노래는 감동적이라는 것쯤은 그 나라에 대해 관심이 없어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의 문인 듀체프의 〈초가을〉의 후반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힘찬 낫질로 이삭이 떨어졌던 곳엔 이제는 모든 것이 텅비었고 어디나 광활하다. 거미집들만 거밋줄을 빈 고랑에서 반짝이는구나” 모스코바에는 산이 없다. 광활한 넓고 넓은 평지이다. 이들은 아무 보잘 것 없는 자연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거미집을 노래하는 솜씨는 탁월하다. 거미집들만 거밋줄을 빈 고랑에서 반짝이고 있음을 볼 줄 아는 감각적인 안목은 특히 돋보인다.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삶이 아름답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본다. 그들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 예절바른 성품, 훌륭한 인격이 밑바탕이 되어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 있었으리라. 그들의 인성교육은 우리의 인성교육 못지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운 심성에서 길러진 깊고 심오한 창의적 능력이 발휘되고 있었다. 학교 안에서의 생활지도도 엄격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학교 안에서 한 학생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하셨다. 역시 화장실은 우리나라 호텔의 화장실급이었다. 깨끗한 모습이 그러했다. 소변기가 우리처럼 크지도 않았다. 아주 실용적이었다. 작고 아담한 변기였다. 얼마나 깨끗한지? 거기에서 담배꽁초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젠가 중국의 어느 학교를 방문했을 때 첫 인상이 학교가 깨끗하며 도서관의 열람실에 낙서 하나 없고 학생들의 두발이 단정되어 있음을 보고 생활지도만큼은 철저하게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 34번 공립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이 학교에는 남자 선생님이 너무 적었다. 2-3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도 남자선생님이 적어지는 추세지만 우리와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에겐 선생님의 보수가 너무 적어 교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근로자의 기본급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교시 수업을 참관하고 나서 교장실에서 우리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기 위한 협의에 들어갔다. 사전 조율이 있었지만 현지에서 직접 말씀을 나누면서 구체화할 수 있었다. 교육관련 협의가 있었다. 얻은 결론은, 하나는 우리학교 학생들과 러시아 학생들 간의 이메일 주고받기이다. 또 하나는 우리 학생들이 러시아 선생님으로부터 화상으로 수업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학생들이 겨울방학 동안 모스코바 34번 학교를 방문해서 그 학교에서 운영되는 프로그램대로 수업을 받는 것이다. 러시아어 수업, 문학, 예술, 문화 체험 등 다양한 수업을 직접 러시아 선생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러시아 모스코바는 다시 가고 싶은 도시다. 왜냐 하면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늘어선 아파트마다 미적 감각이 탁월했다. 우리 아파트처럼 비슷하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아파트마다 디자인이 모두 달랐다. 예쁘기 그지없었다. 모스코바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아름다움은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모스코바에는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오직 러시아어를 잘 모르면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그러기에 러시아를 가슴에 품고 세계적인 인재가 되고 싶으면 러시아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었다. 함께 숙소에서 식사를 할 때 한국 젊은이를 둘 만났다. 한 분은 대학원 박사학위를 준비 중인 학생이었다. 한 분은 사업을 하는 청년이었다. 미국에서 만난 러시아인이 다리가 되어 사업의 길을 열게 된 것이었다. 미국에서 함께 공부를 했으니 그들에게 영어라는 공통언어가 있었다. 러시아를 할 줄 모르는 이 청년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를 만났기에 러시아의 진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철인이 갔다. 초인이 갔다. 초 인류 한 분이 갔다. 다시 보아야 했다. 믿을 수 가 없었다. 그는 태평양 너머 먼 곳에 살던 사람이고, 자랑이 못되는 이야기인줄 잘 알지만 쉰 세대인 나는 아직도 스마트 폰이 없다. 그래도 스티브 잡스 그가 유명울 달리했다는 뉴스를 접하는 순간 지구 맞은 편에 살고 있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천재의 죽음은 범인들을 절망하게 한다. 그가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이루어 놓은 삶의 궤적에 비해 티끌처럼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내 삶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차례걸음이라고 했나. 왔으면 한 번은 가야하는 것이 유한한 우리네 삶일진대, 체취 한 번, 목소리 한 번 직접 들어본 적이 없는 어찌 보면 생면부지의 한 인간의 죽음이 이렇게 크게 다가오는 것은 임종 전에 보여준 그의 거인다운 행보 탓인가 한다. 기억이 분명치는 않으나 그는 그의 죽음이 공식 발표된 오늘로부터 한 달 전 쯤 인가로 기억되는데 세계인을 향해, 미래를향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으로멋진 프리젠테이션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혹독한 병마,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오늘 그의 부음을 접하면서 애플로 상징되는 천재로서가 아닌 병마와 죽음도 초월 했던 인간 잡스에 무한한 경외를 느끼게 되는 것은 죽음 앞에서도 인류의 미래를 생각했던 그의 치열했던 살이가 투영된 탓이리라. 하여튼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아까운 인재 하나를 잃었다. 내 생애에 언제 또 그런 초 인류를 보게 될 수 있을런지. 재능의 200%를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헌신하고 간 스티브 잡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능력 중에서 평생 5~10%정도만 사용한다고 한다. 인류 역사상 뇌를 가장 많이 사용한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도 자신의 잠재력의 10%를 쓰지 못했다고 하니 잘믿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평생 5~10%의 능력만을 사용하고 나머지 90%이상의 잠재력을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 자녀는 보석이 들어있는 원석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처럼 우리 자녀에게도 무한한 잠재력이 숨겨져 있다. 그 숨겨진 잠재력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루게 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자녀가 행복한 성공을 이루는 첫 번째 조건인 것이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가져야 될 중요한 역할 과제가 있다. 첫째, 아이 속에 숨겨져 있는 소질과 적성과 잠재 능력을 발견해 주는 것이다. 둘째, 그 다음에 발견이 되었으면 그것을 키워주는 것, 이때에는 부모 한사람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학교 교육에 참여하고 있기에 교사와의 협력이 중요하다. 셋째, 타이밍이 중요하다. 미술시간에 조각 수업을 할 때 석고 반죽을 해 놓으면 석고 반죽이 언제나 말랑말랑한 게 아니다. 반죽이 된 상태에서 조금 시간이 지나면 굳어지는데 그 시간안에 우리는 만들고 싶은 모습으로 석고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자녀들은 어느 새 부드러운 반죽의 시기를 지나 굳어져버리게 되는데 이때가 중학생 시기까지라고 생각한다. 인생이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니면 길러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의지와 주변 환경의 합작으로 서서히 모양새를 갖추어 간다. 그 가운데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도 있고 그러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만큼 타이밍이 중요하다. 언제나 우리 자녀 속에 숨겨져 있는 광맥, 자녀 속에 숨겨진 지하수, 이것을 마음껏 개발하고 이것이 발휘되도록, 터트려지도록 부모, 선생님들이 그것을 끄집어내 주는 노력을 해야 된다고 믿는다. 여기에 다중 지능의 개념, 그리고 아이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개념, 이 두 개를 언제나 명심을 하고 자녀교육에 임하면 우리 자녀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행복한 삶의 기초를 쌓게 될 것이다.
충남 서산 서령고가 헌혈실적 663건으로 전국에서 헌혈 순위 6위를 기록했다. 이번 국감에서 대한적십자가 제출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이 확인이 됐다. 1위는 서울 송곡고등학교, 2위는 인천 계양고, 3위는 서울 양정고, 4위는 수원고등학교, 5위는 부산의 브니엘고이다. 헌혈은 10분 안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로 일부러 시간을 내야만 할 수 있는 고귀한 활동이다. 또한 헌혈은 위급한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혈액은 아직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거나 대체할 물질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우리 학생들은 올 한 해에만 663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린 셈이다.
경남도교육청은 지진에 취약한 학교 건물 66동에 대해 2015년까지 내진보강 공사를 한다고 9일 밝혔다. 경남지역 991개 초ㆍ중ㆍ고등학교, 특수학교의 총 시설물은 5천90동이다. 이 가운데 교사, 강당, 체육관, 기숙사 등 내진설계 대상 시설물은 1천575동에 이른다. 그러나 386동(24.5%)에만 내진설계가 적용됐고 1천189동(75.5%)은 내진설계 없이 지어졌다. 도교육청은 올해 하반기 3개동, 2012년 18개동, 2013년 21개동, 2014년 12개동, 2015년 12개동 등 2015년까지 45개 학교 66동의 건물에 우선적으로 내진보강 공사를 할 계획이다. 교육청은 건물노후 정도와 학생감소 여부 등을 파악해 공사순위를 정할 방침이다.
서울 시내 초ㆍ중ㆍ고교가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추진하는 건물의 증ㆍ개축 행정절차 소요 기간이 내년부터 절반으로 단축될 전망이다. 서울시는 이런 내용을 담은 '도시계획 조례 일부 개정조례안'을 입법예고했다고 9일 밝혔다. 개정조례안은 도시계획시설로 분류된 학교의 건폐율, 용적률, 높이의 범위를 자치구청장이 변경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시장의 고유권한이었던 학교에 대한 도시계획변경 절차를 구청장도 할 수 있도록 위임한다는 것이다. 시 관계자는 "최근 교과교실제 실시 및 체육 활동 활성화 등 교육환경개선을 위해 도시계획시설(학교)의 변경 수요가 급증하고 있으나 도시계획 변경 절차이행에 시간이 오래 걸려 교육환경개선 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도시계획 조례를 일부 개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는 개정조례안이 시행되면 학교 증ㆍ개축을 위해 도시계획변경 절차를 밟는데 걸리는 기간이 통상 6개월에서 3개월 정도로 단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시는 다음달 열리는 시의회 정례회에 개정조례안을 상정하고 의결되면 내년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내년부터 대입 수험생은 대학에 낸 전형료를 일부 돌려받게 된다. 대학들이 응시생이 낸 전형료를 사용해 신입생 선발 절차를 마친 뒤 잔액을 응시생 숫자로 나눠 돌려주는 방식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수험생의 대입 전형료 부담을 완화하고 대학들의 `전형료 장사'를 막기 위해 이런 내용을 담은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과 `대학 입학전형료 징수 및 환불에 관한 규정'(가칭) 제정을 추진 중이라고 9일 밝혔다. 교과부는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31조에 전형료의 징수ㆍ환불에 관한 근거(제3항)를 신설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교과부령인 전형료 징수 및 환불 규정에서 정하게 된다. 이 규정은 4년제대와 전문대에 모두 적용된다. 이에 따라 대학들은 내년 8월부터 실시하는 2013학년도 대입 전형이 끝나면 전형료 잔액을 응시자에게 환불해야 한다. 응시 단계별로 `차등 환불'도 가능하다. 현재 대학별 수시와 정시 지원 1회당 전형료는 7만∼12만원대다. 수험생이 여러 대학에 지원하면 수십만∼수백만원의 전형료를 부담해야 했다. 수시에서 보통 4∼5개 이상의 대학과 전형에 지원하고 정시에서 가ㆍ나ㆍ다군별로 목표 대학을 정해 지원하므로 한 수험생이 수십번 대입 원서를 내는 사례도 생긴다. 2010학년도의 경우 한 명이 수시 모집에서 61회까지 지원한 사례도 있었다. 환불 규정이 생겨도 실제로 수험생이 돌려받는 금액은 크지 않을 수 있다. 대학이 광고ㆍ홍보ㆍ행사비, 입시수당 등을 지출하고 잔액을 `N분의 1(1명당 몫)'로 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의 `전형료 장사'는 불가능해질 전망이다. 지난해의 경우 181개 4년제 일반대 중 7곳이 10억원 이상의 전형료 수익을 남겨 눈총을 받았다. 대학들이 아예 번거로운 환불 절차를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적정 전형료'를 책정할 가능성도 있다. 교과부는 시행령 개정과 규칙 제정을 내년 상반기에 마무리할 방침이다. 올해 대학들은 다양한 전형료 면제ㆍ감액 조치를 했다. 9일 현재 사회적 배려 대상자의 전형료 감면은 83개 대학이, 단계별 불합격자의 전형료 환불은 106개 대학이 실시했다. 169개 대학은 부득이한 사유로 미응시한 경우 전형료를 환불할 예정이다. 교과부는 "수험생의 전형료 부담을 줄이고 대학 측에는 미리 `적정 전형료'를 책정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수원 칠보초 주관 교통 안전 캠페인 활동 현장 포착- 경기도 수원 소재의 칠보초등학교(교장 양원기)에서는 교통 안전의 달을 맞이하여 캠페인 활동을 벌였다. 10월 5일 아침 등교 시간 (오전 8:10~8:40)분까지 학교 정문과 후문 횡단보도에서 이루어진 교통 안전 캠페인 활동은 칠보초 학생, 교사들은 물론 인근 중학교의 교사, 학생, 학부모 및 지역 사회 주민 모두로 하여금 스스로의 교통 규칙 준법 정신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였다. 1학기 때에도 교통안전 캠페인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활동은 수원서부지구연합회를 주관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 캠페인 활동은 칠보초등학교 학부모회가 주관하여 진행되었다. 단순히 노란 기를 들고 일렬로 서 있는 것만이 캠페인의 전부는 아니었다. 선선하고 산뜻한 가을바람과 함께 왠지 모를 설렘으로 날아갈 것 만 같은 아이들. 밝고 명랑한 모습이 보기 좋지만 순간적인 방심으로 각종 안전사고가 유발될 수 있기에 절대 긴장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이에 2학기 시작 이래 각 담임 선생님들의 꾸준한 교통안전 지도, 관련 영상 관람, 수고하시는 녹색 어머님들께 편지나 엽서쓰기 활동은 오늘의 캠페인 활동이 단순히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준다. 집을 나서 학교로 가는 길목에서 항상 아이들의 안전을 지켜주시는 녹색 어머님들. 어찌 보면 아이들 학교생활은 담임선생님도 친구들도 아닌 이 분들의 미소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아침밥은 먹었니?” “저런, 가방 문이 열렸구나. 이리 와, 닫아줄게” 등의 따뜻한 말씨까지 건네시는 횡단보도의 수호천사들. 오늘도 어김없는 사랑 가득한 말씨는 아마도 아이들의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올라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교통 안전 캠페인 활동을 끝내고 파이팅을 외치시는 녹색어머니, 서부 경찰 및 교직원
장애학생 성폭행으로 물의를 일으킨 인화원과 인화학교의 법인인 '우석'의 법인 허가가 오는 11월 초에 최종적으로 취소될 전망이다. 광주시는 7일 오후 교육청, 광산구청,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이 모여 2차 '사회복지법인 우석 대책회의'를 열어 우석 법인의 설립허가 취소 방침을 재확인하고 허가 취소를 위한 수순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 광산구와 시 교육청은 각각 인화원 시설폐쇄와 인화학교 위탁지정 취소를 위해 오는 10일 인화원장과 인화학교장에게 사전 처분통지를 발송한 후 21일께 청문절차를 거쳐 결과를 확정, 인화원과 학교 측에 통보하기로 했다. 광주시는 시설폐쇄와 위탁시설 지정을 취소한 후 우석 법인 설립허가 취소처분 절차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광주시의 한 관계자는 "광산구청의 청문 결과가 나오는 대로 행정절차를 거쳐 11월 초에는 우석 법인의 허가를 취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학생들과 시설거주 장애인에 대해서는 인근 특수학교로의 전학과 다른 시설로 전원하는 기존 방침을 유지하며 광주시, 광산구청, 시 교육청,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 등 관련기관이 긴밀히 협조해 대책을 마련해 나가기로 했다.
충남교육청은 전국 시ㆍ도교육청 가운데 처음으로 청렴기관(학교) 인증제를 시행하고 나서 각종 공사ㆍ물품ㆍ용역업체 선정 등에서 전자계약이 많이 늘었다고 7일 밝혔다. 지난해 말 28.9%였던 도내 학교의 식재료 공급업체 전자계약 비율은 지난 6월 말 현재 89.7%로 60.8%포인트 수직상승했다. 교육기관의 업체선정 계약 건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 교육지원청의 시설ㆍ물품ㆍ용역 업무관련 전자계약 비율도 지난해 말 71.2%에서 98.9%로 27.7%포인트 올랐다. 이는 전자계약이 관련 서류를 가지고 기관과 학교를 방문해야 하는 민원인의 경제적ㆍ시간적 부담을 대폭 줄일 수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청렴인증제의 한 평가지표인 청렴교육 이수실적은 지난해 6월 말 1천325명에서 올해 6월 말 기준 4천522명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3천197명, 약 3.4배 증가했다. '청렴기관(학교) 인증제'는 충남교육청이 청렴도 향상을 위해 올해 1월부터 시행하는 종합청렴관리시스템으로 ▲비대면 전자 입찰ㆍ계약ㆍ청구 실적 등 업체선정의 투명성 정도 ▲공무원 행동강령 등 청렴 교육이수와 직장교육 실적 ▲클린 콜 센터(Clean Call-Center)를 통한 내ㆍ외부 고객 만족도와 친절도를 평가, 반영한다. 유재호 도교육청 감사담당관은 "청렴인증제가 업체선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직원의 윤리 실천의지 확산 등 청렴도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교육청으로 예산을 지원받은 도내 사립학교 사업들이 곳곳에서 말썽을 빚고 있어 도교육청의 지원예산 사후관리가 허술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도교육청 감사부서는 지난달 사립인 평택 A고교 법인에 대해 허위입찰 등의 혐의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감사결과 이 학교는 도교육청에서 10억원, 도에서 15억원 등을 지원받아 지난해 미디어실 및 회의실 등으로 이뤄진 건물을 완공했다. 그러나 학교는 특정 업체와 공사 계획을 체결하고도 공개입찰을 한 것으로 관련 서류를 허위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학교측은 공사 미비 등을 이유로 미디어실 등을 완공하고도 1년여가 넘도록 시설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역시 사립인 파주의 A중학교도 도비 17억원과 법인 자부담금 등 37어원을 들여 지난해 말 24개 교실을 증축했다. 그러나 부실공사와 횡령 등의 의혹이 제기돼 현재 도교육청 감사부서에서 감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은 물론 검찰에서도 해당 학교법인과 공사 업체 등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하는 등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에 앞서 사립학교인 평택의 C고교는 기숙사 건축비 명목으로 도교육청으로부터 지원받은 10억원 중 일부를 기숙사가 아닌 자기주도학습실을 설치하는데 사용했다 감사원 감사에 적발되기도 했다. 도내 사립학교 곳곳에서 도교육청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진행하는 사업이 이같이 말썽을 빚으면서 도교육청이 사립학교 지원예산에 대한 사후관리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교사는 "도교육청이 공립학교의 경우 예산 지원 등에 대해 철저히 관리하면서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예산을 지원한 뒤 인력부족 등을 이유로 사후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사립학교 재정 지원 업무 등을 담당하는 도교육청 사학지원과 한 관계자는 "사립학교 지원금에 대한 사후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며 "조만간 사립학교 지원예산 사후관리에 대한 종합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교육과학기술부는 7일 `구조개혁 중점추진 국립대학'의 자체 개혁안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국립대 구조개혁 컨설팅팀을 발족했다. 앞서 교과부는 38개 국립대의 운영 실태 평가에서 하위 15%에 든 강원대와 충북대, 강릉원주대, 군산대, 부산교대를 구조개혁 중점 추진 국립대로 선정했다. 컨설팅팀은 총 3개 팀으로 구성된다. 1팀은 강원대ㆍ강릉원주대, 2팀은 충북대ㆍ군산대, 3팀은 부산교대를 각각 컨설팅한다. 각 팀은 국립대의 실태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국립대 통폐합 심사위원회 위원, 구조개혁 전문가인 대학구조개혁위원회 위원, 대학경영 컨설팅 경험자(컨설턴트, 회계사 각 1명) 등 4명씩으로 구성된다. 컨설팅은 평가에서 해당 대학이 취약한 부분의 개선과 국립대 선진화 과제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워크숍 → 사전 서면조사 → 현장진단 → 방향 설정 → 핵심과제 중심의 컨설팅안 제출의 과정을 밟는다. 교과부는 다음주 워크숍을 하고 내달 말까지 각 대학이 컨설팅안을 내도록 할 예정이다. 한편 교과부는 구조개혁 중점추진 국립대가 `부실대학'으로 오해를 받는 것과 관련, "이들 대학은 경영부실 사립대와 같은 성격의 부실대학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말했다. 다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의 역할과 위상에 걸맞게 성과를 높여야 한다는 점, 강력한 구조조정 중인 사립대와 균형을 고려해 국립대가 변화의 속도를 높여 국가와 지역 발전에 기여토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원도교육청(교육감 민병희)은 7일 교육현장에서 쓰이는 어려운 한자어와 일본식 말을 쉬운 우리말로 바꿔쓰기 위한 용어사전을 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 교육청은 오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의 우수성과 우리말에 대한 가치를 돌아보기 위해 내년 한글날 발행을 목표로 강원교육용어사전 '바른말, 쉬운 글'을 만들기로 했다. 도 교육청은 `우천 시'나 '추리닝' 같은 용어는 각각 '비 올 때'나 '운동복'과 같은 쉬운 말로 대체하고 기합, 복장검사, 부동자세와 같은 군대용어는 교육현장에서 사용하지 않도록 캠페인을 벌일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도교육청은 올 연말까지 편집위원회를 구성, 고칠 필요가 있는 용어를 수집할 예정이다. 민 교육감은 "과거부터 몸에 밴 일본식 표현이나 한자어를 쓰면서 아이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들만의 말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우리글 바로쓰기는 학교를 창조성이 넘치는 민주적인 분위기로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대한 국회 교과위의 국정감사 마지막 날인 7일 한나라당 박영아 의원의 발언 에 대한 야당의원들의 사과요구와 당시 녹화물을 교과부가 파기한 것을 놓고 여야 의원 간의 설전이 이어졌다. 교과위는 지난달 19일 박 의원이 교과부 국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면 북한에 가서 하라"고 발언한 것과 관련, 전후 맥락을 검토하기 위해 교과부에 당시 상황을 녹화한 영상기록물을 제출하라고 요청한 바 있다. 야당 측은 이 발언이 야당 의원들을 겨냥한 것이라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박 의원은 야당 의원들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었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교과위는 지난달 22일부터 국감 파행을 거듭하다 이달 4일 가까스로 갈등을 봉합, 정상 진행됐다. 이런 와중에 교과부는 지난달 21일 영상물을 폐기했다. 국감에서는 녹취록이 공식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영상물은 참고만 할 뿐 국감이 끝나면 폐기해왔다는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 민주당 안민석, 김유정, 김상희 의원과 자유선진당 이상민 의원, 무소속 유성엽 의원 등은 이날 "공식 요청이 있었는데도 영상기록을 임의로 파기한 것은 불법행위"라며 장관의 사과를 요구했다. 유 의원은 "동영상 파기는 한나라당 간사인 서상기 의원 감독, 이주호 장관 주연, 이성희 교과부 기조실장 조연의 저질코미디'"라고 힐난했다. 이에 서 의원은 사과를 요구했다. 안민석 의원은 "지난달에 야당 의원들이 녹화 영상을 보자고 요구하니까 여당 의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야당이) `개그콘서트'를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며 "비아냥거린 것부터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변재일 위원장이 나서 "올해는 과거와 경우가 다르다. 교과부에 영상기록물을 제출하도록 공식 요청했는데도 파기한 것"이라며 "이는 공공기록물관리법상 기록물 파기, 국회증언ㆍ감정법상 증언 거부에 해당해 사법적 조치를 요구한다"고 정리해 설전은 일단락됐다. 이날 국감에서는 영화 `도가니'로 불거진 광주 인화학교 사태와 관련, 광주교육감을 지낸 안순일 교과부 학교교육지원본부장이 경력보고서에 이력을 고의로 누락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민주당 김상희 의원은 "안 본부장은 인화학교 사태가 불거진 당시 제6대 광주교육감이었다. 그런데 경력사항에는 2004년부터 올해까지 광주광역시 동부교육장으로 재직했다고 허위 기재돼 있다"고 말했다. 안 본부장은 2007년부터 작년까지 광주교육감으로 재직했으며 올해 6월 교과부 본부장으로 임명됐다. 변 위원장도 "교육감으로 재직한 것을 생략했으면 몰라도 본부장으로 오기 전까지 교육감이었는데도 교육장으로 있었다고 한 것은 착오가 아니라 허위"라고 지적했고, 이주호 장관은 "잘못 기재한 것 같다"고 인정했다.
한국교육개발원 Wee프로젝트연구특임센터는 지난 5일 위기 학생 지원 프로그램인 Wee프로젝트의 온라인 상담 전문성 확보를 위해 '온라인 상담 지원단' 1기 위촉식을 했다고 7일 밝혔다. 온라인 상담 지원단은 우울증, 가출, 게임중독 등의 문제와 관련된 자격증을 소지하거나 교육을 이수한 Wee프로젝트 종사자로 구성됐으며 4개월의 시범운영을 통해 학생들에게 온라인 상담을 제공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은 "온라인 상담 지원단 활동을 통해 보다 전문적인 온라인 상담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